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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깨달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온 가족이 모여앉아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시골에 혼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어머니가 웬일이세요, 전화도 자주 안 하시는 분이…….”
“저……, 저……, 그게 말이야…….”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한동안 말씀을 못하시고 망설이기만 하고 계셨습니다.
“왜요?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너무 비싼 것만 아니면 제가 사드릴 테니까
뜸들이지 말고 얘기해보세요. 호호호…….”
“저……, 사실은 좀 전에 병원에서 전화가 왔는데 너희 아버지가…….”
저는 하마터면 전화기를 바닥에 떨어뜨릴 뻔 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전화를 받던 제가 차가운 얼굴로, 그것도 손까지 떨면서
딴사람처럼 바뀌자 남편은 서둘러 아이들을 방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여보, 장모님 전화 아니야? 갑자기 왜 그래…….”
남편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소파에 앉혔습니다.
“어머니, 저한테 아버지가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런 이상한 얘기 하시려거든 전화 끊어요.”
“그래 못 들은 걸로 해라, 어미가 괜한 전화를 해서 네 속을 상하게 했구나.”
어머니는 서둘러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몇 년간 잊고 살았던 소름끼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저를 숨 막히게 했고
저는 터질듯한 두통에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펴고 누웠습니다.
“여보, 왜 그러냐니까……, 남편한테 못할 얘기가 뭐가 있어, 장모님한테 무슨 일 생기신거야?”
“아니에요.”
“그런데 왜 이래, 당신답지 않게…….”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그래요.”
남편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적잖게 놀랐는지 한참동안 저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물수건이라도 만들어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몇 년간 전 아버지라는 존재를 그저 죽었다고만 생각했고,
저와 제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좋았습니다.
그런 존재였는데 병원에서 왜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는지 수없이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저를 괴롭혔습니다.
저는 흥분한 감정을 잠시 추스르고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전화를 끊으시면 어떡해요! 병원에서 왜 전화가 왔는데요?”
“응, 처음엔 가족이 없다고 했다는데 나중에 수술 끝나고 마취에서 깨어나면서 집에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더구나.”
“도대체 무슨 수술을 받았길래요?”
“모르겠다, 병원에 오면 말해준다는데 심각한 모양이야.”
“그럼 거기서 혼자 죽지, 뭣 하러 가족을 찾는데요! 무슨 염치로...”
“어미가 죄가 많아서 그렇지 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걱정하다가 너한테 전화한 거란다.”
어머니는 마치 당신이 죄인인양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셨고,
저는 그런 어머니 때문에 더 속이 상했습니다.
한 평생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 한번 받아본 적 없이 어찌 보면 바보처럼 일만하시다가
늙어버리신 어머니셨으니까요.
“내일 애들 아빠랑 아침 일찍 갈게요.”
“그래, 미안해서 어쩌느냐. 아무튼 조심해서 와라.”
참 바보 같은 어머니십니다.
남들 같으면 꼴도 보기 싫다고, 아니면 그런 사람 모른다고 일언지하에 전화를 끊었을 텐데
그래도 남편이라고, 자식들 아버지라고……,
병원에서 온 전화를 끝까지 받으셨던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 잠시 긴 한숨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존재가 나한테 어떤 존재였을까…….
저는 바닷가가 보이는 작은 마을에서 2남3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밭과 논이 꽤나 많이 있었고,
동네에서도 몇 안 되는 작은 배도 한척 갖고 있었습니다.
그랬던 우리 집이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던 건 아마도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무렵이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소풍을 다녀오던 날 집안에는 눈물을 흘리고 애원을 하시던 어머니와 매몰차게
땅문서를 가지고 집을 나가셨던 아버지의 그 차갑던 얼굴이 지금도 잊혀지질 않으니까요.
그 무렵부터 아버지는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힘들게 했고,
어머니는 그때마다 친척집으로 이웃으로 돈을 빌리러 다니시느라 쩔쩔매셨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데 멀리서 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오랜만에 아버지를 본거였지만 전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외면했지요.
수업이 끝나고 책가방을 메려는데 선생님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은화야, 이리 좀 와보렴.”
“예, 선생님.”
“너 혹시 집에 무슨 일 있니?”
“아니요……, 아무 일도 없는데…….”
선생님은 저를 유심히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말씀 드리어라.”
“무슨 말씀이요?”
“어,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는데 오늘 너희 아버지가 오셔서 네가 6년 동안 들었던
학교적금을 해약해 가셨다는구나.”
“제 적금을요?”
“그래, 너도 모르고 있었구나.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꼭 말씀드리렴.”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한 달에 두 번씩 저금을 했던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보통은 그 돈으로 중학교에 들어갈 때 교복도 맞추고 입학금도 보태고 그런 시절이었으니까요.
집에 오자마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씀을 어머니에게 해드렸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그냥 서럽게 울기만 하셨습니다.
어린 제 마음에도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가족들을 가난하게 만든 아버지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으니까요.
모두가 즐거워야할 중학교 입학식 때 저는 교복을 장만하지 못해서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사복이라도 입고 가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집을 나섰지만 하루 종일 바닷가에 앉아서
우리 집은 왜 이럴까? 그런 생각만 했던 것 같습니다.
학기가 시작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친척들의 도움으로 교복을 마련할 수 있었고
그런것 때문인지 전 더 말이 없고 소극적인 아이로 자랐지요.
제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우리는 이사를 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남아있던 집마저 아버지가 노름빚으로 넘기셔서 우리는
이모가 살고 있는 집의 창고를 손봐서 그곳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엄마, 나 학교 그만두고 서울 가서 돈 벌게요.”
“너 미쳤니! 수업료는 어미가 어떡해서든 장만할 테니까 고등학교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쳐야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는 당신처럼 고생하시는 게 다 못 배운 탓이라고 생각하셨는지 찢어지게
가난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저를 학교에 보내셨습니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수도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런 어머니의 마음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전 서울에 직장을 얻어서 고향을 떠났습니다.
궁상맞게 울고만 계시는 어머니의 눈물이 싫었고,
느닷없이 집으로 쳐들어와 돈을 마련해 달라며 살림살이를 때려 부수는
악마 같은 아버지의 그늘이 싫었습니다.
과자를 만드는 제과업체에 취직한 저는 생산직에 근무하며 열심히 돈만 벌었습니다.
한 달에 수도 없이 야근을 해서 받은 월급으로 시골에서 공부하는 동생들 학비도 보내주고
큰돈은 아니지만 적금도 들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참 편했던 것 같네요.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이 저를 보고 짠순이라고 놀렸지만 전 그렇게 열심히 제 청춘을
일에 파묻혀 보냈습니다.
회사에 다닌 지 4년쯤 되던 어느 날 기숙사 방송에서 제 이름이 나오더군요.
“생산2부 이은화씨! 가족 면회 있습니다.”
어쩌다 한 번씩 시골에서 동생들이 면회를 왔기 때문에 전 즐거운 마음으로
기숙사 앞으로 뛰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동생들이 보이질 않았어요.
이상하다싶어 주위를 둘러보는데 잠시 후 정문 옆에서 아버지가 나타나셨습니다.
전 너무 속이 상해서 다시 기숙사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기……, 은화야, 애비다.”
뒤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마치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저를 소름끼치게 만들었어요.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오세요. 어떻게 알고 여길 찾아왔냐고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나 이제 노름 안한다.”
“노름을 하고 안하고 저는 관심 없으니까 다신 여기 찾아오지 마세요.”
“알았으니까 잠깐만 나하고 얘기 좀 하자.”
그냥 못들은 체 기숙사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직장 동료들도 보이고 해서 어쩔 수없이
아버지와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래, 서울서 직장생활 하느라 힘들지?”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찾아온 용건만 말씀하세요.”
“그게……”
“전 돈 없으니까 돈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마세요.”
“나 노름 완전히 끊었다. 그런데 예전에 노름할 때 빚진 게 좀 남아있는데 그놈들이
시골에 있는 네 동생들 학교까지 찾아갔다지 뭐냐.”
“뭐라고요? 아버지가 그러고도 사람이에요.”
“내가 너를 볼 면목이 없구나. 지금은 노름에서 완전히 손 뗐다. 애비가 무슨 일이든
해서 갚을 테니 돈 좀 빌려다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아버지가 저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돈을 빌려 달래요.”
“어쩌겠냐? 네 동생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시달림을 받으니 내가 꼭 일해서 금방 갚아주마.”
전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제가 보내준 학비로 구김 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동생들이 보고 싶어도 차비가 아까워서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그런 동생들이 아버지의 노름빚 때문에 시달림을 받아야 된다
고 생각하니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더군요.
“제발 우리 좀 그냥 내버려두세요. 왜 자꾸 나타나서 못살게 구시는 거예요.”
“그래 알았다, 이번 한번만 동생들 생각해서 애비 좀 살려다오. 다시는 이런 일 없을
테니 염려 말고……, 내가 다시 노름을 하면 손가락을 잘라버리마.”
그날 전 4년 동안 옷 한번 제대로 사 입어보지 못하고 부었던 적금을 해약해서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이걸로 꼭 빚 갚고 아이들한테 피해 주지마세요.”
“알았다니까……, 고맙다.”
아버지는 피같이 모아둔 제 적금을 들고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라지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눈물 섞인 말들이 모두가 거짓이었다는 걸 알게 된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들려오는 소식에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딸한테 받은 돈으로
읍내에서 며칠 만에 노름으로 탕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하니까요.
아버지를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그 일로 인해 제 앞에는 절대 나타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열심히 근무해서 시골에 있는 동생들이 걱정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것만으로 저는 즐거웠습니다.
지금의 제 남편을 만난 건 스물다섯 살 되던 봄이었어요.
회사에 함께 근무하는 언니의 소개로 만난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저처럼 가난한 시골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화목하고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서울 남자지만 무엇보다 저를 아껴주고 이해해 주는 착한 사람이었지요.
우린 늘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했고 회사 근처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먹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어려운 형편을 이해해주었기에 항상 돈 안 드는 데이트를 선택했고
늘 제가 상처를 입을까봐 매사에 조심해주는 모습이 눈에 보였습니다.
1년여의 열애 끝에 결혼을 약속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보는 행복에
꿈이 아니기를 수없이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결혼을 한 달여 앞둔 어느 날이었어요.
“은화야, 오늘 장인어른 만났었어.”
“뭐……, 뭐라고요?”
“왜 한 번도 인사 안시켜준거야. 장인어른 참 좋으신 분 같던데…….”
상견례 때도 전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신다며 아버지 얘기를 피했고
지금의남편은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했는지 더 이상 아버지에 대해
묻지도 알려고 들지도 않았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아버지가 나타났다는 말에 전 숨이 막힐 듯 아무 말 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어요?”
“어,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그냥 자기한테 잘해주라고……,
고생 많이 시킨 딸이라고 마음 아파하시던데…….”
“정말 다른 얘기는 없었죠?”
“없었다니까 그러네. 장인어른이랑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보기엔
괜찮은 분이시던데 결혼식 때 오시라고 하면 안 될까?”
“싫어요, 아버지 얘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그만 할게.”
잊을만하면 어떻게 알고 제 주위를 맴도는 아버지 때문에
늘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웠습니다.
수없이 노름을 끊었다던 아버지는 언제나 그대로였고,
어머니야 쉬쉬 하시지만 고향에 갈 때마다 아버지가 매번 어머니를 힘들게 하고
그때마다 십 원짜리 한 잎까지 싹싹뺏어서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있었으니까요.
막내동생이야 그때까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피해가 없었지만
도회지에 나가 직장에 다니던 동생들은 몇 번씩 아버지에게 월급을 통째로 빼앗길 때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동생들에게 수없이 다짐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동생들에게 돈을 타가곤 하셨으니까요.
아버지 한사람 때문에 가족이 자주 만날 수도, 마음 편히 돈을 모을 수도 없는
비참한 현실이 아버지를 더욱 밉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결혼을 앞둔 우리 앞에 나타났다는 생각을 하니
회사에서도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더군요.
그렇게 지금의 남편과 성당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고
서울 변두리 산동네에서 신혼을 시작했습니다.
제 생애 그토록 행복하고 꿈같던 시절은 아마 없었을 거예요.
늘 저를 믿고 아껴주는 남편과 함께 웃을 수 있어서 행복했고,
곧 첫아이를 임신하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술에 약간 취해서 퇴근을 했더군요.
“웬일이에요, 술도 잘 안마시면서…….”
“어, 오늘 장인어른이랑 한잔 했어. 기분이 좋아서 너무 많이 마셨나봐.”
“또 만났어요?”
“아이참, 사위가 장인어른 만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오늘 회사 앞으로 오셨더라고…….”
“당신 회사는 어떻게 알고 가셨대요?”
“결혼 전에 처음 뵀을 때 내가 명함을 드렸거든.”
“아버지가 무슨 부탁 같은 거 안 했어요?”
“부탁은 무슨, 그냥 기분 좋게 술만 마시고 온 거야.”
임신을 한 상태에서 나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고, 되도록 편한 마음을 갖고 싶었기에
그렇게 아버지 얘기는 일단락 짓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은행에서 남편 앞으로 우편이 하나 날아왔더군요.
무얼까 하고 꺼내봤는데 전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남편 앞으로 대출이 두 번 돼있었는데 너무 큰 액수라 겁이 났습니다.
‘아니 나도 모르게 이렇게 큰돈을 왜 대출했을까?’
우려했던 걱정은 무서운 현실이 되어 나를 슬프게 했습니다.
“당신 이렇게 많은 돈을 왜 나 몰래 대출한 거예요?”
“음, 내가 꼭 쓸데가 있어서……”
“솔직히 말해 봐요. 나도 다 짐작하는 게 있으니까 솔직하게 말해보라구요.”
“사실... 장인어른이 장사를 하시려는데 급하게 돈이 좀 모라란다고 해서 빌려드렸어.”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선뜻 큰돈을 대출해서 아버지에게 드린 남편을 욕할 수도 없고,
그저 불행한 내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솔직히 그때는 뱃속에 아기와 함께 세상을 등지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고 한 적이 있었어요.
차라리 제가 없어져야 이런 불행이 끝이 난다는 그런 생각을 말입니다.
“우린 아직 젊으니까 돈이야 열심히 다시 벌면 되잖아. 그러니까 화 풀어.”
“어떻게 나한테 상의 한마디 없이 그 많은 돈을 드려요?”
“장인어른이 당신한테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몇 번을 부탁하셔서 어쩔 수 없었어……”
살아가면서 참 열심히 누구한테 싫은 소리 한번 안 해보고 살았건만 늘 이렇게 저를
절망에 빠트리는 아버지가 숨이 막힐 정도로 싫었습니다.
“이제 절대 아버지 만나지 마세요.”
“그래도 어떻게…….”
“그게 아버지 살리는 거라고요. 아무도 아는 척 하지 않고,
아무도 십 원 한 잎 주지 않아야 그나마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요.”
“아……, 알았어. 그렇게 할게.”
결혼 전 제가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 냉정하게 생각 좀 하세요. 아버지 저렇게 도박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시는거
저건 분명히 심각한 병이라고요.”
“노름에 빠져서 저러긴 해도 앞으론 절대 노름 안한다고 그러니까 한번만 더 믿어보자.”
“어머니가 매번 그러시니까 아버지 병을 못 고치는 거예요.”
“병이라고까지 얘기하면 어쩌냐……, 남들 들을라.”
이미 동네사람들은 모두 다 아버지가 노름에 미쳐 계신다는 걸 알고
손가락질 하고 있는 데도 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도박병을 숨기시려고만 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병은 이제 본인 의지만으로는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병이라고요.
요즘 도박중독을 치료해주는 기관도 있다고 하니까 제발 좀 가서 상담도 받아보고 하자니까요.”
“네 아버지가 그런데 갈려고 하지도 않겠지만 나도 그렇게 까지는 하고 싶지 않구나.
저러다 좋아지겠지……,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
아버지의 도박중독에 대해 어머니는 늘 이런 식으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시는 모양이셨어요.
그로인해 우리 가족은 언제나 살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한 삶을 살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아버지의 도박중독을 심각한 병이라고 느꼈던 건 고등학교1학년 때였습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집에 들어오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날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꼼꼼히 눈여겨봤으니까요.
아마도 아버지란 사람이 싫다 못해 불쌍하게까지 느껴져서 그랬나 봐요.
아버지는 마치 무엇에라도 쫓기는 사람처럼 몹시 불안해했고,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습니다.
마치 술이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돈을 마련해 달라며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눈동자로 어머니를 괴롭히기 시작했지요.
돈을 어디서 빌리겠냐며 눈물짓는 어머니를 짐승처럼 때리는걸 보고
저건 아버지 의지로 고칠 수 없는 심각한 병이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던 날 어머니와 전 읍내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 적이 있었어요.
수소문 끝에 노름을 하는 곳을 찾았는데 방에 둘러앉아 노름을 하고 있던 아버지의 표정은
집에서 보던 표정하고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평소엔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요.
“여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빨리 집에 가 봐요.”
“저놈에 여편네가 여기를 어디라고 찾아와! 알았으니까 당장 애 데리고 꺼져!”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 아버지는 그렇게 어머니와 저를 그곳에서 쫓아내셨고
3일장을 치르는 내내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남편이 아버지에게 대출받아서 준돈을 조금이라도 보태기위해
임신 중에 하루도 빠짐없이 집에서 부업을 했습니다.
“여보, 뱃속에 아기 때문에 몸도 힘들 텐데 이제 부업은 그만하면 안 될까?”
“전 괜찮아요, 집에서 그냥 있으면 뭐해요. 이거하고 있으면 잡념도 없어지고 많지는
않지만 돈도 생기고 좋잖아요.”
말은 그렇게 태연하게 했지만 아버지 때문에 남편이 힘들어할 생각에
한 푼이라도 벌어서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고 싶었습니다.
카세트테이프에 부품을 끼워 넣는 부업도 해보고,
또 어떨 땐 여행용 휴지를 케이스에 담는 부업까지
아마 열 가지도 넘는 부업을 했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을 힘들게 하고 끊임없이 괴롭히던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끊겼던 게
아마 5년 정도 된 걸로 기억합니다.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한번 왔었던 걸 빼고는
그 어느 가족에게도 연락이 없었으니까요.
아버지가 가족들을 힘들게 하지 않으니까 우리 형제들은 더할 나위 없이
즐겁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작지만 저축도 할 수 있어서 좋았고, 불안에 떨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렇게 남들처럼 웃으며 행복하게 살고 있다가 느닷없이 어머니의 전화를 받으니까
도저히 어찌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도대체 장모님이 뭐라고 하시기에 당신이 그러는 거야?”
저는 남편에게 어머니와의 통화내용을 말해주었습니다.
“참, 어쩌다가 병원에 가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내일아침 일찍 시골에 내려가 봅시다.”
“미안해요, 여보.”
남편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제 자신이 창피하고 한심하게 느껴지더군요.
“부부사이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당신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음날 아침 일찍 고향에 가기위해 남편과 집을 나섰습니다.
남편은 내 눈치를 보느라 조용히 운전만 했고,
전 지나온 세월들이 너무 힘들고 가슴 아파서 자꾸만 눈물을 흘렸습니다.
“여보, 그만 좀 울어요. 다 잘 될 거야. 우리가 무슨 걱정이 있어.
아이들 건강하게 잘 크겠다, 부부 금슬 좋겠다, 남편 직장생활 잘하겠다, 아! 그러면 된 거지. 안 그래!”
남편의 따뜻한 말이 위로가 되어 간신히 힘을 내 고향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사위 얼굴 보시기가 창피하다며 몇 번이고 남편의 손을 잡고는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전화가 왔다는 병원을 찾았을 땐 이미 늦은 오후가 되고 있었어요.
“저기……, 실례합니다. 어머니한테 여기서 전화가 왔었다는데…….”
“예, 환자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잠시 서류를 뒤적이던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했고 우리를 의사선생님이 있는 곳으로 안내했습니다.
“이 수길씨 가족 되시죠?”
“네.”
“다른 게 아니고 이 환자가 지난 3월에 공사장에서 추락사고를 당해서
저희 병원 중환자실로 들어오셨는데요.”
“공사장이요?”
“예, 그때 뇌수술 받으시고 허리랑 다리 수술까지 받으셔서 지금은 거동을
아예 못하시는 상황입니다. 대소변을 받아내는 상황이죠.”
의사선생님은 그간의 일을 상세히 말씀해주셨습니다.
“이젠 더 이상 손쓸 수도 없고, 수술받기엔 체력도 연로하셔서 마지막 수술을 해드린 건데
성과는 보이지가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요?”
“솔직히 이런 말씀 드리기 참 곤란하지만 지금 뇌수술 경과도 좋지를 않고,
말씀도 제대로 못하시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장기 요양원으로 모실 건데
아마 길어야 1년 정도 보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수술비랑 병원비는 얼마나 된데요?”
어머니는 그 상황에서도 돈 걱정을 하시고 계셨습니다.
“어차피 산재 환자라 그런 건 걱정 안하셔도 되고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안남은 시간, 마음이라도 편안하게 해드렸으면 싶네요.”
의사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언제고 사람 되서 나타날 줄 알았더니 죽을 때가 돼서야 나타나는구나.
이런 기구한 팔자가 어디 있누…….”
한참을 망설이다가 아버지가 누워계시는 병실을 찾았습니다.
병실에는 초라하게 늙어버린 깡마른 노인 한분이 누워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 보여 줄라고 찾았어요? 뭐 하러 우릴 찾아요? 그냥 조용히 죽으면 끝날걸!
뭐 할라고 찾냐구요.”
“어머니, 그만하세요. 옆에 다른 환자들도 있잖아요.”
저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하도 시끄러웠는지 한참 만에 아버지가 눈을 뜨셨습니다.
“저……, 저…….”
의사선생님 말씀처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옆에서 다른 환자를 돌보던 간호사가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제가 이 할아버지 여기 처음 오셨을 때부터 도와드려서 전 무슨 말씀하시려는지 대충 알거든요.”
“예, 고맙습니다.”
“할아버지, 뭐라고요?”
한참 아버지 옆에서 무언가 얘기를 듣던 간호사가 병실침대 옆에 있는 서랍에서 가방을 하나 꺼냈습니다.
“이걸 전해 드리래요.”
“이게 뭔데요?”
“할아버지가 가족들한테 드리려고 막노동일 하셔서 모으신 건데 얼마 되지 않아도
꼭 받으시래요. 이거 전해 드리려고 전화해달라고 하셨다는 거 같은데요.”
간호사가 전해준 통장에는 220만7천원이 들어있었습니다.
“누가 이런 돈 받으면 좋아할 줄 알았어요. 평생 사람구실 못하고 노름판만 돌아다니더니
죽을 때까지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도무지 가슴만 막막했습니다.
아버지는 무언가 말씀을 하시려고 입을 계속 움직였지만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가 없더군요.
다만 후회가 많으셨는지 소리 없는 눈물만 자꾸 흘리고 계셨습니다.
그토록 증오하고 미워했던 아버지였는데 이렇게 초라하고 힘없는 촛불처럼 앙상한
모습으로 누워계시니까 그저 불쌍하게만 느껴졌어요.
한참을 지켜보다가 남편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을 나섰습니다.
아버지는 떠나가는 어머니와 저희 부부를 보시면서 통한의 눈물만 흘리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집으로 돌아가는데 한참 아무 말씀이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옆에 있던 제 손을 꼭 잡으시더군요.
“은화야, 어미가 백번 잘못했다.”
“무슨 말씀이에요, 어머니가 뭘 잘못해요?”
“오래전에 네가 어미한테 그렇게 아버지를 치료하자며 애원했을 때, 그때 어미가
어떻게든 네 아버지 모시고 상담도 받고, 치료도 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
“다 지난일인데 지금 와서 후회한들 뭐하겠어요.”
어머니는 고개를 떨구신 채 한숨만 자꾸 내쉬었습니다.
“어미가 무식해서 그런 거야. 진즉이 네가 얘기했을 때 아버지 혼자선 고칠 수 없는 병이라 생각해고
치료를 받았더라면 이지경은 안 됐을 텐데, 어미가 무식해서 그런 거야. 다 이 못난 에미 탓이다.”
어찌 보면 죽음을 코앞에 두고 후회의 눈물을 흘리시는 아버지나
저러다 나아지겠지, 저러다 나아지겠지 하며 도박중독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던 어머니의 후회나
둘 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좀 더 일찍 도박중독의 심각성을 깨닫고, 어떻게든 아버지를 치료받게 했다면
지금처럼 통한의 눈물은 흘리지 않았어도 됐을 테니까 말이에요.
며칠 전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보, 원망스럽고 한없이 미운 아버지지만 이번 추석 때는 어머니 모시고 요양원에
한번 다녀와야겠어요.”
“잘 생각했어, 여보. 장인어른이 비록 도박에 빠져서 온 가족들을 힘들게 했지만
늦게나마 후회하시고 그렇게 우시는 거 봤잖아.”
“그래요, 얼마 안남은 아버지 인생을 편안하게 보내 드려야겠어요.”
“그럽시다.”
실제로 겉으로 드러나질 않아서 그렇지, 우리 주위에는 저처럼
도박중독자를 가족으로 두고 있는 가족들이 많을 거예요.
그런 가족들에게 꼭 이 말을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도박중독은 절대로 본인의 의지로 나아질 수 있는 병이 아니란 걸 명심하셨으면 좋겠어요.
병은 알려야 낫는다는 옛말이 있잖아요.
부끄럽다고나 창피해야할 일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상담하고 치료하면
충분히 나을 수 있다는 병이란 걸 깨달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저희 가족처럼 너무 늦게 깨달아서 많은 시간 온 가족들이 피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고통은 겪지 않으시길 말이에요.
알코올중독이나 마약중독처럼 도박중독 역시 하루라도 빨리 가족들이 함께 도와서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최선일거에요.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곧 나아지겠지’ 라는 망상은 버리시고,
억지로라도 도박중독을 치료하고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겁니다.
이제 저희가족처럼 불행한 삶을 사는 가족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불혹의 나이에나마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어서 한결 마음이 가볍습니다.
가벼운 놀이와 도박중독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도 하루빨리 자리 잡기를 바래봅니다.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가 제 옆에 앉았습니다.
“엄마…….”
“왜, 엄마한테 무슨 할 말 있니?”
“엄마가 얘기 안 해주셔서 모를 것 같지만 저도 외할아버지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어요.”
“아니 네가 어떻게…….”
“아빠한테 들었는데 이번 추석 때 외할아버지 요양원에 가신다면서요.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거긴 가서 뭐하려고…….”
“그래도 외할아버지잖아요. 같이 가도 되죠?”
“그래, 같이 가자.”
돌이켜 보건데 아버지가 도박중독에 빠지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하루라도 빨리 도박중독을 치료할 수 있었더라면
여느 집처럼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받으며 더 소중한 추억을 만들 수 있었을 텐데…….
너무 늦은 깨달음이 마음을 아프게 하지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용서할 수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지는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