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
"산은 물이다" - 대간과 정맥은 모든 생활권의 자연스런 분계선
이우형(지도편집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은 우리나라 산줄기의 근골을 이룬 기준 산줄기이다.
필자는 지난 86년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와 기타 고지도에 나타난 산줄기를
조선시대 말의 문헌 『산경표(山經表)』와 비교 참고하여 일차 발표한 바 있다.
이즈음 우리 산악계에서는 이와 같은 산줄기 이름 - 즉 백두대간, 낙동정맥, 호남정맥 등의
종주등반이 유행하고 있다.
잊혀진 우리 것을 되찾아 이해하고 새롭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작업에 있어 조선시대 우리 조상들이 인식하고 있던 우리 땅의 산줄기는
어떤 기준으로 정해졌으며,
그 산줄기들은 이 땅의 사람들 생활과 의식, 그리고 그 이상의 모든 분야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 것인가를 짚어 보고자 한다.
1개 대간, 1개 정간, 13개 정맥 『산경표』는 조선시대의 문헌으로, 현재 남아 있는 대표적인 본은 세 가지가 있다.
규장각의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중의『산경표』,
정신문화연구원의 <여지편람(輿地便覽)> 중의 『산경표』,
영인본으로 조선광문회가 1913년 간행한 『산경표』등이 있으나
모두가 같은 내용이다.
이 가운데 오자가 없고 출처가 분명한 것이 규장각 소장본이다. 그 내용은 전국의 산줄기를
하나의 대간(大幹), 하나의 정간(正幹)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규정했다.
여기에서 다시 가지 친 기맥(岐脈)을 기록했으며,
모든 산줄기의 연결은 자연지명인 산이름, 고개이름 등으로 하고,
기술은 족보기술법을 따르고 있다.
수록된 자연지명은 모두 1,650여개이며, 이 중 산이름과 고개이름이 1,500여 개이다.
산이름의 기록은 '三角山一名負兒山山在京北三十里楊州三十九里分二岐'와 같이
산의 다른 이름과 그 산의 위치,
그리고 그 산에서 가지 친 또다른 맥줄기의 수를 기록해 놓았다. 여기에 나타난 우리 산의 산줄기 이름과 순서대로의 이름들이
백두대간,
장백정간(長白正幹),
낙남정맥(洛南正脈),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이다.
산줄기 이름의 특징은 산이름으로 된 것이 백두대간과 장백정간 두 개,
해서나 호남처럼 지방이름으로 된 것이 두 개이고,
나머지 11개는 모두 강이름에서 따와 그 강의 남북으로 위치를 표시하고 있다.
산줄기의 순서 역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중심 산줄기로 하고,
이에서 가지 친 장백정간과
낙남정맥(이 산줄기를 장백정간과 같이 낙남정간으로 기록한 본도 있다.)을 우선하고,
백두대간의 북쪽으로부터 가지 친 차례대로 그 순서를 정했다. 이와 같이 산줄기 이름을 강에서 따온 까닭은
정맥의 정의를 강유역의 경계능선, 즉 분수령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그 강의 위치, 유역의 넓이, 모양을 간명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이는 지리인식을 높여 활용의 의미를 중요시한 것으로 보인다.
순서의 의미는 백두대간의 북단으로부터 차례대로 강과 그 유역을 파악하여
지형지세를 쉽게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이다.
필자도 이 산경의 이해로 보다 세밀히 우리 땅의 지형지세를 파악하게 됐다.
특히 산줄기의 이름을 강이름과 연관하여 부여한 것은
산이 곧 그 강을 이루는 물의 산지라는 당시의 지극한 상식을 담고 있다.
현존 『산경표』는 1800년경의 것 이와 같이 우리 땅의 산경을 일목요연히 정리한 『산경표』의 간행시기와 이 책을 정리한
찬표자(撰表者)에 대하여 최근 발표된 논고가 있다.
이 간행시기와 찬표자의 규명 의미는 단지 서지학적인 면 외에
우리 땅 산줄기와 산이 갖는 우리들의 오랜 인식의 연대를 규명하는 작업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산경표』가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의 「산수고(山水考)」를 바탕에 둔 것이라는
조선광문회본의 발문(최남선)과 최근 연구자들의 논고에 대하여는 대체로 이의가 없다.
그러나 신경준이 이 책의 저자이며 이와 같은 산경 개념이 신경준 시대에 공적으로 인정받은
우리의 산수개념이라는 최근 논고에는 이의가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관찬 지리지는
맹사성의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誌)』(1432년),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1545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1481년),
『여지도서(輿地圖書)』(1757년)가 있고,
이후 영조 46년(1770년)의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가 당시까지의 문물제도와 지리 등을
총망라하여 13고 100권을 간행하였다.
1770년의 『문헌비고』는 일차적으로 그 이전의 지리지들이 그 저본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문헌비고』 13고 가운데 「여지고(輿地考)」는 여암이 찬한 것으로,
변화가 있다면 산을 종래의 치소(治所) 중심에서 산계(山系) 중심으로 그 체제를 바꾸었다는 점이다.
규장각본의 『해동도리보』의 『산경표』는 여암 신경준의 「산수고」,
즉 12산 12수의 산천총설, 읍치별 산수고와 산경위, 수경위가 그 저본임에는 앞서와 같이 이론이 없으며,
같은 내용의 도리구분 역시 여암의 「여지고」 24권 도리구대로(道里九大路)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그러나 『산경표』의 내용 가운데 한북정맥의 기맥에 '追慕峴 本名沙峴英宗45年改名在京西部'가 있다.
영종 45년은 1769년이다.
한편 같은 내용인 도리표에서는 수원을 '華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수원은 정조 13년(1789년)에 화성으로 옮기고 1795년 11월에 정식으로 설치했다.
여암은 1781년 타계했고, 문『문헌비고』는 1770년에 찬했으며, 화성은 1795년에 설치되었으므로
신경준이 1769년에 간행하였다는 주장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존하는 『산경표』는 1800년 전후로, 찬표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의견이다.
아무튼 문헌상으로 볼 때 『산경표』는 1769년 또는 1800년 전후에 편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산경 개념의 기술은 현존하는 많은 고지도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도 많은 지도가 제작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면모를 알 수 없는 것이 유감이다.
조선시대의 지도로는 공공도서관에만도 수백 점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여지도, 팔도도, 군현도 등 일반도와 보다 많은 풍수도인 명당혈도 등이 있으나,
일반도로서의 전국도는 모두가 지형표현의 산맥 표현을 산경표의 산줄기 개념과 같이
수계 중심으로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현존하는 지도 가운데
가장 오래된 1402년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의 우리나라 부분과
우리나라 전도로서 가장 오래된 1557년경의<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국보 284호)는
『산경표』의 대간, 정간, 정맥 그리고 그로부터 가지 친 기맥까지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래의 자료 참고)
이와 같은 산경 개념은
이후 여지도류와 도별 군현도 등에서도 우리나라 지도제작의 독특한 전통기법으로 지형표현에 있어
불가분의 요소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김정호도 그의 <동여도(東輿圖)>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의 제작에 있어
『산경표』의 원리를 적용하였으며,
선대의 전통기법으로 정확하게 현대 지도의 등고선으로 읽어지는 산수계와 다름없는 1:216,000의
거대한 지세지형도를 제작한 것이다.
필자는 김정호가 『산경표』를 그대로 인용하여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나라 고지도에서 보이는 이와 같은 산경 표현은
나라 땅의 모두가 뫼로 이루어져 그와 더불어 산 사람들의 상식을 그대로 지도에 표현하게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지도는 그 땅을 보는 사람들의 공통의식이 담겨져야 지도로서의 가치가 인정되며,
독도에서 해독성(解讀性)이 높아지고 이용도 역시 증가한다는 기본적인 제작의도가 담겨지게 마련이다. 이상에서 산경원리의 정립은
글로 정리된 1800년경의 『산경표』보다 지도에서 지형표현으로 300~400년 전인 1500년대 이전에 이미
정립되어 널리 상식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산경원리 인식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 누구나 느끼고 인지하고 있는 지리심성(地理心性)인
지극한 생활양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덧붙여 한 집단의 지극한 상식은 기록의 의미를 상실한다는 뜻에서 문헌으로서의 정립연대가 큰 의미가 없음을
일깨운다.
수계 파악의 근간으로 산맥 접근 이와 같은 산경원리 개념이 고래로 전하여진 풍수와의 관계는 어떠한가.
풍수는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다시 일본으로 전파되었다고 하지만, 삼국의 풍수는 풍수라는 표기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개념의 사상으로 변모되어 있다.
한반도의 지세는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뻗었다는 도선의 풍수설, 즉 도선비기(道詵秘記) 이론은
지형지세는 국가와 개인의 길흉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이는 초기 고려의 정치사회에 크게 영향을 주었으며 수세기 동안 이 나라 지리학을 지배했다. 공익을 우선한 이 설이
조선시대에 이르러 지극히 개인주의적으로, 즉 길지와 명당의 소유욕으로 특권계급의 영욕의 도구로
타락해 버렸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대변하는 지리사상으로도 정착해 자연히 후기 조선시대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산경은 전 국토를 대상으로 자연지리에 바탕을 두고 지형지세를 과학적으로 정립했다는 의미에서
실학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고려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오악, 십이종산, 외명산, 사명산 등으로 알려져 온 명산들이 있으나
이 가운데 팔도 산맥의 종산이 된다는 십이종산(삼각, 백두, 원, 낭림, 두류, 금강, 오대, 태백, 속리, 장안, 지리)의
산들이 간·정맥의 선상에 있을 뿐
실제로 산경의 원리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다만 지형지세로 이루어진 수분기(水分岐) 중심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로써 조선시대의 산맥, 즉 산경을 정리하면,
1) 대간, 정맥의 우리나라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비롯된다.
이 땅의 근골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백두대간으로서 모든 수계를 크게 동서로 양분한다.
2) 정맥은 대간에서 가지 쳐 나온 이차적인 산줄기로서 큰 강의 유역능선, 즉 분수능선이다.
따라서 정맥은 산줄기의 높이, 규모, 또는 명산, 종산, 진산 등과 관계하지 않고
아무리 낮고 미약한 김포평야의 낮은 구릉이라도 한강의 남쪽 유역을 가르는 능선이므로
중요한 한남정맥의 줄기가 되는 것이다.
정맥들로 형성된 강은 압록강, 두만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이다.
3) 기맥은 명칭을 부여하지 않았다.
대간과 정맥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산줄기로서 내(川)를 이루는 분수릉이다.
이와 같은 산경의 개념은 현대의 산맥개념과는 달리
모든 산줄기는 강, 즉 물줄기를 건너뛰어 연결될 수 없고, 산줄기의 시작과 끝남의 지점이 명확하다.
따라서 정맥의 시작은 특정한 산이고, 그 끝남은 강 하구의 해안선까지 연결되어 있다.
산경은 수계를 경계하는 능선이므로 전국토의 지세지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로써 수계 중심으로 발달된 이 땅의 도시형성과 관계되는 유역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세분하여 골(谷)까지의 수계 파악도 쉽게 하여 당시 해안에서 내륙 깊은 곳까지 조운(漕運) 영역도 쉽게
가름할 수 있었다.
일인(日人) 고토의 지질구조론적 산맥관 (고토 분지로와 '조선산악론') 현재 우리가 배워온 산맥의 이름들은
장백, 마천령,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 등이다.
산맥을 『국어사전』(현민사간)에서는 '여러 산들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라고 정의하고 있고,
『지형학사전』(일본 니노미야 서점)에서는 '산지가 선상으로 길게 연속되어 있을 경우, 이것을 산맥이라 한다.
산맥은 하나의 산계 가운데 동일한 원인으로 형성되어 공통된 형성사를 갖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앞의 것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상식을 술회한 정도이고, 뒤의 것은 지질학적인 의미가 담겨 전문적이다.
현재의 한반도의 산맥과 그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朗)에 의해서 였다.
고토는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14개월 동안 우리나라의 지질을 조사했고,
그 결과를 1903년 동경대학기요(東京大學紀要)에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조선산악론)'이라는
논문과 지질구조도(1:2,000,000)를 발표했다.
이 논문은 한반도의 지질과 지형연구에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이 일본인의 궁극적인 목적은
합방 이후 감행한 수탈의 기초조사였다.
현재의 산맥은 일반 상식적인 산맥과는 달리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형태와 이것들의 삼차원적인 배치를
기본선으로 하고 있다.
즉 땅속의 맥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광주산맥이 금강산 북쪽 언저리에서 시작되어 북한강 서쪽으로 건너 북한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관악산과 광교산으로 이어진다.
차령산맥은 설악산과 오대산 근처에서 시작되어 남한강을 건너 금강 하류를 끼고 돌아 대천 뒤쪽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은 예는 다른 산맥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이나 내를 건너뛰고 자연히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다.
이것은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가 땅 위의 어떤 선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하고 있으므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지리학과 지질학은 현대과학으로 그 구분이 명확함에도 우리는 1세기 전의 전근대적인 산맥개념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일본은 지질구조 개념의 산맥 이름을 다른 이름으로 바꾼지 이미 오래다.
산은 생명체의 근간인 물의 산지
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모든 나라에 있으나 그 나라 사람들이 그 땅의 산을 바라보는 산관(山觀)은 각기 다르다.
생활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정복의 대상으로, 또 뒷산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이라면 공포의 대상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우리의 산은 예부터 낳는(始와開)산이었다.
가락국의 수로왕이 구지봉에서 나오고, 신라 육촌의 촌주들이 하늘에서 산으로 내려왔으며, 단군이 내려온 신단수도
산이었다.
모든 어머니들은 생의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식의 점지를 산에서 얻어왔다.
우리 모두도 결국 산에 빌어 낳은 자식들의 후예인 셈이다.
곧 우리의 산은 잉태하여 새롭게 시작하고 여는(開) 곳이다.
우리의 산은 삶과 정신(生과精)의 산이다.
의식주의 모두를 산에 묶어 두고 살아온 우리다.
세 칸짜리 집을 지어도 들 한가운데가 아닌 한 뼘 산이라도 그 산에 의지하듯 등지고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살아야
평안함을 느낀 우리네다.
어린이가 처음 그림을 그릴 때 산부터 그리듯이 이 땅의 멋이라는 것과 가락이라는 것 모두가
산과 더불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지식을 쌓으러, 고시공부하러도 산으로 가고, 머리 아픈 사람들도 산을 찾는다.
해서 상상과 여유를 얻어온다.
각급 학교의 교가에 그 지역 산이 빠지면 기가 없어 보인다.
우리의 산은 쉬(死와輪)는 곳이다.
요즘이야 산에 갔다 왔다고 하면 등산하고 온 것이겠거니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들에 있는 산소에 갔다 오고도 산에 갔다 왔다고 했다.
우리는 영원한 쉼터를 산에 마련하고 환생을 기다린다.
우리의 산은 저만치 홀로 있는 산이 아니었다.
늘 사람과 더불어 살고 살아오고 있다.
눈을 뜨면 산이 보여야 안심하고 안식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우리들이다.
결국 우리는 산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는 귀결이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가 우주의 근본이라는 사상에서도
들(野)은 땅(地)이 아닌 산의 일부분이라는 것이 고래의 인식이다.
산은 정상을 뜻하지 않는다.
남산의 철책 속 만이 남산이라는 생각은 현대가 낳은 지극히 짧은 소견이다.
청계천을 건너면 남산골로 접어들었던 산이 점차 그 소임을 박탈당한 것이다.
우리 옛 산의 개념, 즉 『산경표』에서 이르는 우리 산의 개념은
그 산자락 앞의 들까지를 포용한 하나의 덩치를 두고 어느 곳이든지 그 산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그래서 결코 정복의 대상일 수 없고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저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정신을 살찌우면 되는 산이었다.
산줄기의 연결, 즉 대간과 그에서 뻗은 모든 정간은 물뿌리(水分岐)로서
모든 생명체의 시작인 물의 산지라는 인식이었다.
생활권의 자연스런 분계 하나의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 여기에서 가지 친 기맥으로 이 땅을 가름한 산경은
이 땅의 모든 생활권역의 자연스런 분계를 이루고 있다.
현재 각 지방 또는 지역의 경계를 두고 우리는 크게 북부, 중부, 남부 지방으로 나누고,
영남, 호남, 영동 지방등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다시 나누어 안동, 단양, 남원 등의 지방으로도 이야기하며, 해안에서는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지방으로도
구분하고 있다.
이들 지방들의 경계를 편의상 행정경계를 기준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산경도>에서 볼 때
북부는 해서정맥 북부, 중부와 남부는 백두대간의 속리산 구간과 한남금북정백~금북정백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그 경계가 대별되어
오히려 자연, 인문, 식생, 기후 등 자연지리적인 측면에서 더 타당하다.
해안지방에서도 대체로 내륙 어디까지를 경계로 할 것이냐에 대해서 명확치 않다.
그러나 우리 산줄기 개념으로 볼 때 그 답을 얻을 수 있으며, 여타 지방의 경계도 <산경도>에서 쉽게 가름할 수 있다.
배산임수의 취락형성이나 발달, 그리고 식생활과 주거양식의 구분도 산경의 선과 일치하고 있다.
북부, 중부, 남부지방의 음식문화도 다르다.
특히 황세기젓 문화권, 새우젓 문화권, 멸치젓 문화권으로 나누어 보면 재미있는데,
이런 문화권의 형성도 <산경도>로 쉽게 가름되는 것이다.
주거의 양식을 예로 들어 보자.
남해안의 한옥에는 대청마루에 반드시 덧문이 있지만 내륙의 집에는 없다.
그 분포가 어떤 선으로 그어지느냐 하면 바로 호남정맥의 남쪽과 낙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선과
일치한 것으로 조사된 바 있다.
언어권의 분포도 우리말의 방언을 도별로 대별하지만 같은 도내에서도 크게 다른 말씨가 있다.
경상도 말은 강원도 속초지방에서 전라도 여수지방까지 분포하며,
같은 전라남도이지만 호남정맥을 기준으로 해서
서쪽의 광주 말과 동쪽의 섬진강 유역인 곡성, 구례의 말은 전혀 다르다.
특히 경기도의 수원 말과 이웃한 용인, 이천의 말이 다른데, 그 사이에는 한남정맥이 있다.
이와 같은 예는 일일이 이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언어권은 사람들의 습성과도 연결되며, 풍속, 놀이, 혼례, 장법 등에서도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준다.
옛 보부상의 상권과 오일장의 권역도 산경의 산줄기로 쉽게 알 수 있고, 절기와 식생의 분포, 꽃의 개화일도
정맥의 선과 관계가 깊다.
현재 우리나라의 기상예보는 행정단위 중심에서 점차 지역특성이나 재해특성, 또는 생활권 등을 고려해
53개 국지예보로 바뀌었는데,
이 예보구역이 산경을 가름한 정맥과 그로부터 갈라져 분할하고 잇는 기맥들이 이루어 놓은 하나 하나의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
역사가 진행되면서 영토의 분활 변천이 이들 산경의 정맥들과 무관하지 않으므로 역사지리 전반에 걸쳐
산경은 근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에게는 오랜 역사와 문화가 있다.
여기에 단절의 한 시기로 '진정한 우리만의 것'을 이어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어디에나 물이 있어 물통은 없어도 표주박만 있으면 되었듯이 물에 관한 한 참으로 축복받은 우리들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 어린이들은 멋과 가락, 상상과 여유인 산을 잃어버리고 로보트부터 그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땅, 우리 산들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창조한 모태이다.
이 땅의 모든 산줄기는 물줄기 중심으로 가름한다는 산경원리,
즉 우리를 낳고 살게 하고 쉬게 하는 그 원초적인 알맹이인 물(重水)의 산지라는 인식을 옛 선인들은 가지고 있었다.
산을 아끼고 산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가 선조들이 인식했던 산경의 원리를 새롭게 인식하는 작업에서
우리 땅에 대한 보다 활발한 연구와 토론이 있기를 빈다.
백두대간 종주방법
요즈음 백두대간 구간종주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다.
우리가 딛고 사는 이 한반도의 등줄기를, 비록 수십 일간에 걸쳐 한꺼번에 밟지는 못할지언정 주말마다
이어 달리기를 해서라도 밟고자 하는 등산인들의 욕망이 날로 커져 가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에 대한 책자는 그간 몇 권 나왔지만 대개 전구간 장기 종주가 아니면 5~10일씩 끊은,
역시 장기 산행 기록이라서 주말 당일, 또는 1박 2일 구간종주자들에게는 큰 도우이 되지 못했던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이번 특집은 구간종주에 관한 한 최상의 정보원이 되리라 믿는다.
물론 장기종주를 하는 이들에게도 좋은 정보가 될 것이다.
현재 우리 등산인들의 종주가 가능한 남한쪽 백두대간은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다.
진부령 이북 향로봉까지는 군사통제 지역이어서 출입하려면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천왕봉~진부령 구간의 도상거리는 약 640km. 이 구간을 1~3일 소요되는 거리로 잘라 29개 구간으로 나누었다.
구간 가이드는 산행기점에서 백두대간 주능선까지 올라가고 내려가는 거리, 소요시간 등을 두루 감안해 설정한 것이다. 이 구간 나누기는 현지 답사를 한 각 지역 산악인들과 의논해 설정한 것이다.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좀더 쉽게 하려면 주릉까지 올라가고 내려가는 거리가 최대한 짧은 곳을 마디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이 특집 구간에 마디는 가능한 한 차량이 가닿을 수 있는 고갯마루를 삼아 설정했다.
그러나 각자의 체력조건에 따라 구간의 길이는 다소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감안, 각 구간을 '소구간'으로 나눠 한마디로 끊을 만한 고개에 대한 정보를 추가 했고,
마일에 대비한 탈출로에 대한 상황과 하산 후 교통편도 소개했다.
백두대간 상에는 지리산을 비롯해 덕유산, 설악산과 같은 큰 산들이 있다.
이 산의 주릉을 하루씩 끊어 종주 하려면 오르고 내리는 거리가 너무 길어 상당히 고생스럽다.
이런 큰 산은 1박 2일이나 2박3일간 시간을 내서 단번에 끝내는 것이 한결 나을 것이다.
한편, 1박2일이나 2박3일씩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는 소구간 몇 구간을 일시에 연결해 종주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백두대간 구간종주 경험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산행 자체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들고 나는 지점의 정보가 어두워서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이번 특집은 이들 산행 기점에 대한 정보에도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각 개념도의 방향은 남북방향을 원칙으로 했다.
개념도의 능선과 계곡 표시는 백두대간 원줄기 주변의 것은 가능한 한 충실을 기했으며,
대간 기슭은 접근도로와 마을 정보에 주로 치중했다.
각 개념도는 1:50,000 지형도를 기본으로 하여 그린 다음 20% 정도 축소한 것이 대부분이다.
천왕봉~성삼재와 같은 경우는 1:65,000으로 그린 다음 20% 축소했다. 한편 다소간 확대한 구간도 있다.
따라서 이 개념도만으로 대간 종주에 나서는 것은 무리이며, 개념도의 정보를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 옮겨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백두대간 종주에 필요한 지형도 도엽명 일람표 참조).
백두대간을 종주할 때는 1:25,000 지형도를 계속 쓰는 것이 좋다.
1:50,000 지형도로는 정확한 독도가 어려운 구간이 적지 않은 한편, 서로 축척이 다른 지형도를 번갈아 쓰게 되면
독도하는 데 있어 거리감각에 혼돈이 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지형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을 때는 1:50,000 지형도가 요긴하므로 산행시 지참토록 한다.
백두대간 당일 구간종주 때는 장기종주 때와는 달리 텐트나 코펠과 같은 장비가 필요없다.
그러므로 방풍, 방수의와 중식, 수통 등속만을 간단히 챙기고 속도를 내서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장기종주에 비해 걸어야 하는 총 거리는 갑절 이상으로 늘어난다.
천왕봉에서 진부령까지 도상거리가 약 640km쯤 된다.실거리는 적어도 800km쯤 된다.
여기에 매번 오르고 내리는 거리까지 합하면 줄잡아 1,500km쯤 걷게 될 것이다.
하루분씩 끊은 소구간은 약 50개.일요일 이외의 휴일에도 산행을 한다고 해도
빠짐없아 산행에 나서는데 따를 어려움을 감안하면 전구간 종주에 1년은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각 구간별 소요시간은 집에서의 거리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집에서 가까운 곳이라면 일요일 당일 새벽에 길을 나서도 될 것이다.
그러나 태반은 산행 전날 밤에 현지까지 가두는 방식을 택할 수 밖에 없다.
때문에 전구간 종주를 마치기까지는 숙박비나 교통비 등이 만만찮게 든다.
이러한 경비문제나 산행의 안전 등을 감안, 3~4명이 조를 짜서 구간종주를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단체 안내산행팀에 참가해 구간종주를 하는 이들도 많다.
가이드가 몇몇 동행하는 안내 구간종주는 자기 스스로 길을 찾지 않아도 되기에 산행은 편하지만 그만큼 재미가 덜하다. 독도하는 능력을 길러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구간종주를 권하고 싶다.
비록 가이드의 뒤를 쫓아가는 단체 구간종주에 참가했더라도 자신이 그날 가려는 산에 대한 기본 지식은
일행과 헤어진다거나 할 경우를 대비해 반드시 미리 갖추어 두어야 한다.
무적정 남만 믿고 잘 모르는 산을 갈 때가 가장 위험하다.
지난 겨울 어느 백두대간 종주팀이 설악산에서 당한 조난사고는 이런 예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종주 개시일은 어느 계절이 좋을까.
경험자들의 말을 빌면 백두대간 중 남쪽 지역에 독도가 까다로운 구간이 한결 많다고 한다.
그렇다면 시야가 훤히 트이고 길도 잘 보이는 초봄이 가장 좋을 것이다.
늦가을도 좋으나 곧바로 겨울로 접어들기 때문에 겨울산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고생하게 된다.
하지만 구간종주 도중 겨울은 어차피 한번 겪어야 할 것이고, 중부 이북 지방이 한결 폭설이 심하기 때문에
가을에 시작해 가을에 끝내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경험자들도 있다.
8.15 광복절에 시작해 이듬해 광복절에 끝내는 것으로 의미를 주려는 이들도 적지 않다.
구간종주를 마칠 때마다 능선상 정보 뿐만 아니라 교통편, 숙박시설 등의 정보를 충실히 기록으로 남겨두면
다음 구간산행 때 좋은 정보로 삼을 수 있다. 물론 이 기록은 훗날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