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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케톤신경 스크랩 에베소 - 칼케톤 공의회 기독론
sola 추천 0 조회 83 16.03.12 20: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에베소-칼케돈 공의회 기독론


 

사진 : 아타나시우스와 동지들(880년 작품)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인가? '완전한 사람'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처럼 실제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난을 받기도 하고 성적인 욕망을 지녔다는 뜻인가? 그 분은 하나님이셨는가? 그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떤 양식으로 존재했는가? 신성과 인성이 부분적으로 결합된 형태였는가 아니면 혼합된 형태로 존재했는가?


고대-중세교회의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에 대한 논의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또한 참 사람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신학고백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발전한 동방교회가 정리한 기독교의 중추적인 교리이다. 이를 정확히 이해하자면 아리우스주의를 다룬 니케아공의회(325) 뒤에 발전한 기독론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아래의 글은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가 조만간 출간할 『쌍두마차시대』 제8장의 글을 옮겨온 것이다. 정독을 하기 바란다.


위 책은 본문과 관련된 천연색 사진들을 다량 수록하고 있다. 화면에 나타난 그림은 “아나타니우스와 정통신앙 동료들”을 그린 것으로 880년 무렵의 작품이다(Sermons of St. Gregory of Nazianzus).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와 동료들이 함께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황제의 박해를 피해 나일강을 따라 사막으로 피신하고 있다.


에베소-칼케돈 공의회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Mode)과 본질에 관한 신학 논쟁은 니케아공의회(325)에서 시작하여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일단락되었다. 신학논쟁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였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가? 아니면 완전한 인간인가? 완전한 사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처럼 실제로 성장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난을 받기도 하고 성적인 욕망을 지녔다는 뜻인가? 그 분은 하나님이셨는가? 그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어떤 양식으로 존재했는가? 신성과 인성이 부분적으로 결합된 형태였는가 아니면 혼합된 형태로 존재했는가?


기독론 논의는 5세기에 이르러 두 학파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아타나시우스, 아폴리나리스, 키릴로 이어지는 알렉산드리아학파와 데오도레, 네스토리우스, 데오도렛으로 이어지는 안디옥학파이다. 전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신비적이며 초자연주의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후자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역사, 윤리, 인격 면을 중요하게 여겼다.


논쟁의 기선(機先)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잡았다. 에베소공의회는 안디옥학파의 대변자 네스토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했다. 그러나 기독론 논의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양식과 본질에 대한 논의는 칼케돈공의회(451)가 극단의 헬라사고 양식을 배격하고 지금까지 논의되어 오던 건전한 요소들을 받아들임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며 아울러 완전한 사람이며, 두 본성은 나누어지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며, 변하지 않고, 혼합되지 않는다고 천명했다.


기독론 논의는 그 뒤에도 단일의지론, 단성론의 등장과 더불어 계속 교회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점차 칼케돈공의회의 결정이 정통신앙으로 수납되었다. 한국교회가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칼케돈공의회가 천명한 정통신앙을 전수받았다는 것을 뜻한다.


1. 아폴리나리스주의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이 주창한 로고스기독론은 아리우스주의를 다룬 니케아공의회를 거쳐 점차 발전하여 칼케돈공의회가 결정한 ‘신앙의 정의’를 향해 나아갔다.


니케아공의회가 다룬 아리우스주의 뒤에 새로운 기독론을 제기한 사람은 라오디게아의 감독 아폴리나리스(Apollinaris, c. 310-390)였다.1 시리아의 라오디게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훌륭한 교육을 받고, 유머감각이 넘치는 세련된 연설가로 자랐다. 니케아공의회가 채택한 신조를 신봉하면서 정통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아타나시우스와 바질과 친분을 가졌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고향 라오디게아 지역의 감독이 되어 아리우스파 반박에 앞장섰다. 안디옥에 가까운 라오디게아에 살면서도 안디옥학파를 경계하고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념을 옹호했다.


아폴리나리스는 로고스(Logos)가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있는 이성(理性)을 대신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었으나 그 육은 영혼―마음을 지닌 존재가 아니다. 그리스도가 지닌 것은 단순한 육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 안에 거하는 것은 로고스이다. 육 안에 거하는 것은 영혼―이성이 아니라 로고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통 인간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성을 지닌 것을 부정하는 것은 그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을 부정하는 말이다. 아폴리나리스는 ‘로고스+인간’이 아니라 ‘로고스+육신’이라는 존재양식을 제시했다.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에는 두 가지 배경이 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반박하는 과정에서 후기 아리우스주의자들의 문제점을 간파했다. 그들의 주장은 만일 로고스가 인성―육신과 연합되어 있다면, 그 육신은 본성상 가변적(可變的)이므로 로고스 그 자체도 가변적인 존재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아폴리나리스는 이러한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하면서 불변하는 로고스가 어떻게 가변적인 인성과 연합되어 있는가를 정확하게 증명하는 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폴리나리스주의는 여기에서 태동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영혼이 아니라 불변의 로고스라고 말함으로써 로고스의 불가변성을 천명했다.


아폴리나리스의 관심은 육신과 연합되어 있는 로고스의 불가변성에 있었다. 그는 로고스의 가변성을 말하는 아리우스주의자를 반대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체를 입었지만 고유한 하나님의 에너지는 육체와 관계없이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감정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소유했다. 전혀 죄가 없다. 신적 방법으로 육체와 육체의 움직임을 보전했다. 사망의 권세에 굴복당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망의 권세를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지닌 ‘사람’을 경배할 것이 아니라 육신을 지닌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반대자들이 하나님을 지닌 ‘사람’을 경배한다고 공박했다. ‘사람 경배자’라고 비판했다. 한편, 그의 반대자들은 그를 ‘육신 경배자’라고 비난했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 안에 로고스가 영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에게서 인간의 몸과 영이 신의 이성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로고스가 그리스도 안에서 능동적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했다. 이 이론으로 그는 로고스의 불가변성을 견지(堅持)할 수 있다고 보았다.


아폴리나리스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새로운 본성을 형성하지 않은 채 어떻게 결합되어 있는가를 설명하려고 했다. 그리스도의 몸과 혼은 생명의 활력소를 지녔다는 점에서 인간이다. 그러나 그의 이성은 하나님의 로고스 그 자체이므로 신적(神的)이다. 만일 온전한 인격과 이성을 다 갖춘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되어 있다면 결과적으로 두 개의 인격체가 존재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되면 성육신의 실재성을 파괴시키는 결과가 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성과 인성’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로고스와 육신’으로 구성된 존재이다.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은 로고스가 완전한 인성과 결합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렀다. 인간 영혼을 갖지 않은 육신이 로고스와 결합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아리우스주의를 공격한 아폴리나리스는 자신의 주장이 안디옥학파의 기독론 계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나님인 로고스와 인간인 예수는 별개의 인격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는 마리아를 통해 육체로 오기 전에 아들로 계셨다. 완전하고 거룩하고 죄 없는 인간으로 존재했으며 인류를 갱신하고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구원자의 위치를 지키고 계셨다. 이러한 아폴리나리스의 사상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들의 은근한 지지를 받았다.


인간의 마음―영혼을 가지지 않은 그리스도가 그것을 가진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만일 아담의 육체만 타락했다면 육과 로고스가 결합된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갑파도기아 신학자 바질, 닛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을 반대했다. 만일 어느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인간의 마음―영혼을 가지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며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온전한 인간이 아니면서 어떻게 인간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하고 비판했다.


제2차 에큐메니칼공의회로 불리는 콘스탄티노플공의회(381)는 갑파도기아 신학자들이 주도하는 과정에서 아폴리나리스의 기독론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2. 네스토리우스주의


경주 토함산에 있는 석굴암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자랑스러운 인류문화유산이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때, 불국사를 재건한 김대성이 주도하여 만들었다. 굴 안에는 둥근 평면에 3.26미터 높이의 화강석으로 만들어진 석가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뒷벽에는 반육각(半肉刻)의 십일면관음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우리 조상들의 비범한 예술세계를 드러낸 걸작품이다.


뒷 벽면에 부조(浮彫)된 남자들은 오늘날의 여자용 잠옷과 비슷한 것을 입고 있다. 통고무신을 신었고, 손에는 감로수병―유리병을 들었다. 입구에 새겨진 무인상은 당시 풍물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흔히 인도 간다라지방의 문화가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1,500년 전의 페르시아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신라는 ‘땅 끝’이다. 1956년에 신라 땅 불국사 경내에서 돌로 만들어진 십자가와 구리로 만들어진 마리아상이 발견되었다. 석굴암은 1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 페르시아의 문물과 이미지가 해상루트를 통한 신라와 페르시아의 직접적인 접촉으로 온 것인지, 통일신라와 외교관계가 있던 당나라를 거쳐 들어온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석굴암을 건축할 무렵, 당나라에는 ‘경교’라고 불리는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페르시아에서 크게 번성했던 이 종교는 635년에 태종이  지배하던 시대에 당나라에서 포교활동을 개시했다. 그로부터 약 3백 년 동안 영화를 누리고, 경교문화를 형성했다. 멀고도 먼 동양으로 진출한 그 종교는 대진교(大秦敎)라고 불렸다. 대진사라고 하는 교회당과 대진승이라는 성직자를 두고 있었다. ‘대진’(大秦)이란 진시황제가 통치하던 진(秦)나라처럼 번영한 로마제국의 종교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교회당은 파사사(波斯寺)라고 불렀다. 경교(景敎)는 ‘광명의 종교’(Luminous Religion)란 뜻이다. “하나님은 영혼의 태양이시며, 세상의 빛이시기 때문에, 이 영원한 진리는 신기하고 오묘하여 그 이름을 감히 붙이기 어려우나 그 공덕과 효용이 너무나 밝고 크게 나타남으로 자연히 경교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635년에 페르시아인 알로펜(아브라함) 등 21명이 당나라 수도 장안(현 서안)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 기독교를 포교했다. 당 태종이 그의 설교를 듣고서 신앙의 열정에 넘치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약 300명의 선교사들이 페르시아에서 중국으로 왔으며, 그 종교가 그 나라 전역에 퍼졌고, 각 성읍에 교회당이 들어섰다. 신민과 조정, 저명인사들과 대현(大賢)들이 그 종교를 독실하게 신앙했다. 경교는 덕종이 통치하던 780년경에 최고조로 달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를 세울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비석에는 경교의 중국선교와 전교현황들이 중국문자로 736자 정도 새겨져 있다.2 여호와의 천지창조, 사탄의 유혹을 받은 인간의 타락,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심, 세례, 성령의 힘이 죄를 씻을 수 있음과 구원받은 사람은 중생 전체를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적고 있다. 그들이 조석으로 예배를 드리며, 아침 7시에 성경을 읽고 영생을 기원하며, 7일에 한 번씩 예배와 성찬예식을 가졌고, 이 예식을 행할 때 회중이 동쪽을 향해 경례를 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시리아어로 기록된 부분은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이다.


그 무렵, 신라는 당나라와 밀접한 외교관계를 가지면서 문화교류를 하고 있었다. 최치원을 비롯한 많은 유학생들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과학서와 천문도 등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다. 이 때 페르시아의 문화가 중국을 거쳐 서라벌까지 전래되었을 수도 있다.


최근의 역사연구는 그 무렵의 신라가 해상 루트를 거쳐 페르시아와 직접 상업과 문화의 교류를 가졌음을 밝히고 있다. 예컨대, 일본이 소장하고 있는 그 시대의 화려한 양탄자에는 신라 상표가 붙어 있는 것이 있는데 신라에서 수입한 것이다. 신라는 그 무렵에 많은 양을 키웠고, 페르시아의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양탄자를 생산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문물이 해상 루트를 거쳐 직접 도입되었다면 우리 조상들은 이런 저런 형태로 페르시아에서 강세를 보인 네스토리우스주의 기독교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구려는 서기 3년 10월에 도읍지를 졸본(卒本)에서 국내성으로 옮겼다. 제2대 유리왕이 집권한 지 22년째 되던 해였다. 국내성은 지금의 중국 행정구역으로 요녕성 환인(桓仁)이란 곳에서 압록강 뗏목도시인 평안북도 만포 대안의 집안(集安)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무려 424년 동안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이 자리 잡은 집안에는 지금도 ‘동양의 피라미드’라고 불리는 장군총이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의 기상이 얼마나 씩씩했는가를 한 눈에 보여준다. 고구려는 장수왕이 집권하던 427년에 도읍지를 집안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그 때, 서양에서는 기독론 논쟁이 극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기독교회는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출범하여 로마제국 치하에서 극심한 박해를 받다가 콘스탄틴의 개종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서 신학논쟁을 전개했다. 기독론 논쟁은 5세기에 이르러 점차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의 갈등으로 발전했다. 신학논쟁은 정치적 이해관계, 기득권, 지역성 등이 작용하여 더욱 가열되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네스토리우스(Nestorius, c. 381-c. 451)는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사람이라고 믿는 안디옥학파의 대변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키릴(Cyril, c. 315-386)은 그를 정죄하기 위해 정략을 세우고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했다.


네스토리우스는 428년에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으로 취임했다. 그가 목회를 하던 콘스탄티노플은 강한 종교적 영향력을 가진 도시였다. 로마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지닌 곳이었다. 정치적인 중요성과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감독들은 이 도시의 총대감독직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네스토리우스가 부임했다. 그가 당도했을 때 그곳에는 기독론 논쟁이 한창이었다.


에베소공의회(431)로 이어진 논쟁의 불씨는 네스토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를 낳은 마리아를 ‘하나님의 임신자’(Theotokos: Bearer of God) 또는 ‘하나님의 어머니’(神母)라고 일컫는 것을 반대하는 데서 비롯되었다.3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알렉산드리아학파가 선호하는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을 널리 사용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플교구의 사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가 그러한 명칭 사용을 반대하여 문제를 제기하자 감독들은 그를 정죄하고 출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요구를 묵살했다. 그 이유는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일원인 아폴리나리스가 주장한 기독론이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부인하고, 또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명칭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혼동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인간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마리아를 “하나님의 임신자”(Theotokos)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임신자’(Christotokos)로 일컬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본성의 통일성을 희생시킬 정도로 차이를 강조했다. 인성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정녀에게서 났으며 하나님과 연합되었다. 출생하신 로고스, 곧 하나님과 연합된 인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아들은 어머니와 동일본질을 지녔다. 인간 마리아에게서 난 것은 인성을 지닌 그리스도이다. 마리아가 낳은 것은 인성이지 신성이 아니다. 신성과 인성은 나누어진다. 이 둘은 결합되어 연합된 상태로 존재한다. 이러한 이론은 플라톤의 이원론 사고양식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온전하지 않다. 칼케돈공의회(451)는 그 주장의 일부,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혼합되지 않는다는 이론을 채택했다.


한편, 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Cyril of Alexandria, d. 444)은 네스토리우스가 ‘하나님의 임신자’라는 명칭에 반대하는 설교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를 정죄할 수 있는 지략을 동원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대감독 키릴을 황제에게 고소하는 일로 말미암아 그는 일찍부터 네스토리우스를 견제했다.5


키릴은 정략가였다. 황실을 움직여 돈을 마음대로 얻어 썼다. 그의 교구가 확보하고 있는 많은 재원을 네스토리우스를 공략하는 데 사용했다. 키릴은 신학 자체보다는 재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을 이용하여 고위 관직을 가진 자들의 지지를 얻었다.


키릴은 네스토리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로마의 환심을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서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드디어 돈으로 로마교구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했다. 어느 정도의 돈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그 무렵, 네스토리우스가 펠라기우스주의자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키릴은 이 소문을 이용하여 로마감독의 마음이 자신에게 기울도록 만들었다. 이집트사막의 수도사들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수도사들은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와 깊은 인연을 가졌으며,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주장이 대개 정통이라고 믿고 있었다. 수도사들은 ‘정통교리’를 지키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로마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렇게 생각한 근본 이유는 그의 이론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약화시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430년에 로마에서 모인 대회는 네스토리우스가 그의 주장을 취소하도록 종용하기로 하고, 키릴로 하여금 그 일을 하도록 지명했다. 키릴은 성명서를 만들어 네스토리우스에게 그 주장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다소 과격한 용어로 쓴 편지들을 보냈다.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12개의 저주(Anathema)가 담긴 서신도 보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의 신학이 정통이라는 신념을 깔고 있었다. 키릴은 이 편지들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했던 것만큼 간단하지 않았다. 네스토리우스도 키릴에게 12개의 저주문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상호간에 주고받은 서신은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전체에 알려졌고, 전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다.


황제는 이 문제를 종결짓기 위해 431년 6월에 에베소공의회를 소집했다. 황제의 환심을 산 키릴은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받아냈다. 회의 날짜를 키릴이 임의로 결정할 수 있도록 허락 받았다. 안디옥학파의 신학자들이 에베소에 도착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의 촉박한 시일에 공의회 날짜를 잡았다. 회의장에는 키릴을 지지하는 감독들과 수도사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에베소의 감독 멤논(Memnon)은 그 행사에 직·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키릴의 지지자인 그는 대중을 선동하는 집회를 주도하고, 무장한 사람들을 회의장에 배치하여 공의회의 분위기를 키릴 쪽으로 기울게 했다.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서 개회되어 회무를 진행했다. 소수의 반대를 무시하고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저주(Anathema)를 선언했다. 청문회를 거치거나 연구문서를 채택하지도 않은 채 그를 이단으로 단정했다.


한편, 안디옥의 대감독 요한은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했다. 에베소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요한과 그의 일행은 네스토리우스에게 저주가 선언된 4일 뒤에 에베소 가까운 곳에 도착했다. 키릴이 주도한 공의회의 결정 소식을 접하고서 그들은 숙소에서 곧장 ‘에베소공의회’를 개최했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인정하고, 키릴과 멤논을 이단자로 정죄했다. 두 개의 에베소공의회가 생겨난 것이다.


기독론 문제가 그 지경에 이르자 로마감독은 대표단을 에베소에 파송했다. 로마감독이 어느 편을 인정하는가에 따라 정통과 이단이 결정될 판이었다. 싸우는 자 곁에는 언제나 칼을 갈아주고 이득을 챙기는 자가 있다. 로마 교황청은 동방교회의 교회·신학 논쟁에 항상 변수로 작용하면서 이득을 챙겼다. 정략가인 키릴은 신속하게 교황청이 보낸 대표단을 환영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자신의 이야기만 청취하도록 하고 네스토리우스 일파의 주장을 접하지 못하게 했다.


로마는 평소에 동방교회의 총사령관격인 콘스탄티노플의 대감독 네스토리우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교황청 사절단은 키릴이 주재한 에베소공회의의 결정사항을 옳은 것으로 인정하고, 요한이 주재한 에베소공의회를 정죄했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이단재판은 이처럼 주장에 대한 신학 논의를 거쳐 결론을 내린 것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네스토리우스는 총대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안디옥으로 추방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리비아 사막의 조그마한 오아시스 곁에서 조용히 생을 마쳤다. 칼케돈공의회가 그의 주장 일부를 수납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그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안디옥의 대감독 요한과 시리아의 감독들은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방교회와의 교제를 단절하고, 네스토리우스주의를 견지했다. 시리아는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관할밖에 있었다. 이러한 정치 상황에서 네스토리우스주의는 점차 발전하여 시리아와 인도와 중국에 확산되었다. 서라벌의 석굴암에까지 그 흔적을 남겨놓은 것으로 보인다.


3. 기독론의 발전


알렉산드리아의 키릴과 그의 추종자들 그리고 안디옥의 요한과 그의 추종자들은 모두 자파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극단의 견해는 조금씩 수정되었다. 안디옥학파 신학자들은 네스토리우스주의가 이단으로 정죄된 뒤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두 인격(person)을 인정했다. 두 인격 사이의 교류를 부인하는 것은 성육신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까지 부인하는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에는 참된 ‘속성의 교류’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신성과 인성의 연합으로 혼돈이 초래되고 인성의 고유한 특성이 상실되는 것으로 보는 이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와 안디옥학파와 서방교회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달랐다. 알렉산드리아학파는 ‘로고스+육신’이라는 존재 양식을 제시하면서 신성과 인성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그리스도의 인성을 왜곡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점차 “성육신 이전에는 두 본성이었으나, 연합 이후에는 한 본성이다”는 양식으로 발전했다. “그리스도는 참 인간이며 하나님이지만 이 구별은 단지 지적 단계에서만, 곧 성육신 전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연합 후에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이 본래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는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서방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공양미’ 개념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심청이가 심학규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3백석을 대신하여 제물이 되었듯이 인간이 하나님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화목제물이 되어 구원사역을 수행했다고 생각한다.6 이러한 구원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인성이 신성을, 또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에베소공의회 이후의 기독론 논쟁은 맙수에스티아의 감독 데오도레(Theodore Mopsuestia, c. 350-428)의 주장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7 데오도레는 안디옥학파의 일원이었다. 요한 크리소스톰과 함께 수사학을 공부하고 수도사가 되었다. 오리겐과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풍유적 성경해석을 반대하는 안디옥학파의 전통에 따라 성경의 문자적·표상적 해석을 시도했다. 데오도레는 안디옥학파의 인물답게 아리우스주의를 반대했다. 로고스가 그리스도 속의 이성적 혼을 대신한다는 아폴리나리스의 주장도 반대했다.


데오도레는 옛 안디옥학파의 전통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두 본성 사이의 연합보다는 두 본성의 구별을 강조했다. 먼저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을 주장했다. 성육신은 신적 아들과 육을 지닌 완전한 인간 예수가 연합한 경이로운 사건이다. 예수 안에 신적 아들이 거한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은 엄격하게 나누어진다. 인간 예수는 신성을 지닌 아들과 다르다. 이 둘 사이에는 확실한 구별이 있다. 그러나 두 본성 사이의 연합은 깨뜨려지지 않고 영속적으로 유지된다. 완전한 인간 예수와 그 안에 거하는 신적 아들은 구별되며 아울러 두 본성이 한 위격 안에 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8


안디옥학파의 변증가 키루스의 감독 데오도렛(Theodoret, c. 393-c. 466)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기독론을 발전시켰다.9 이단을 퇴치하는 일에 일익을 감당했고 역사가이기도 했던 그는 자기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수도사가 되었다. 수도원에서 봉사하다가 감독이 되었다. 네스토리우스와 키릴의 기독론 논쟁을 지켜보던 그는 처음에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옹호했지만 나중에는 자의반 타의반 이를 포기하고 칼케돈공의회의 결정을 수납했다.


데오도렛은 하나님의 로고스의 불변성을 강조했다. (1) 로고스이신 그리스도는 변할 수 없는 분이다. (2) 그리스도는 이성적 마음―혼을 소유한 완전한 인간이다. 그리스도의 혼은 로고스로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영혼을 지닌 인간, 곧 이성적 혼을 가졌다. 그리스도는 양성적 본성(dual nature)을 지녔다. (3)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연합되어 있다. 두 본성은 “변하지 않으면서 혼동도 없이” 연합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칼케돈공의회는 데오도렛의 “변하지 않으면서 혼동도 없이”라는 공식(Fomula)을 받아들여 ‘신앙의 정의’(Definition of Faith)라는 칼케돈신조문을 작성했다.


4. 칼케돈신조: ‘신앙의 정의’


제2차 베소공회의(449)는 그리스도의 존재양식을 둘러싸고 제기된 여러 가지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으나 정치적인 갈등으로 말미암아 마땅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칼케돈공의회는 451년 5월에 기독론 논의를 일단락 지었다. 520명의 감독들과 18명의 황실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그리스도의 존재양식과 본성에 대한 4가지 부정문(否定文)이 들어있는 신조문인 ‘신앙의 정의’를 채택했다. 아폴리나리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위험한 점들을 피하고 조심스럽게 장점들만을 택했다. 핵심부분은 다음과 같다.10  


우리는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한 분 동일한 하나님이시며, 신성은 동일하게 완전하시고, 인성도 동일하게 완전하시다. 참 하나님이시며, 참 인간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몸을 동일하게 가지셨다. 그의 신앙은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고, 인성은 우리와 동일본질이시다.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똑같다. 그의 신성은 시간 이전부터 아버지로부터 나시고, 동일한 분이 마지막 날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 그의 인성에 대해서는 동정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이시다. 우리는 한 분 동일한 그리스도, 아들, 주님을 독생자로 인정한다. 두 본성이 혼동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는 연합체로 알려졌으나, 두 본성의 차이는 연합으로 인해서 결코 없어지지 않았으며, 각 본성의 속성은 한 위격과 한 본체 안에 (다같이) 보전되고 함께 역사한다. 두 위격으로 나누이거나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한 분 동일한 아들로서 독생한 하나님의 말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옛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쳤으며, 우리에게 전수된 교부들의 신조가 그렇게 가르친다.11


‘신앙의 정의’는 지금까지 계속되어 온 기독론 논쟁의 중요 사항들을 모자이크하듯이 엮어 놓았다. 칼케돈신조문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혼합시키는 자들과 두 본성을 분리하는 자들을 각각 정죄한다. 극단의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과 극단의 안디옥학파의 신학 그리고 칼케돈공의회 이전에 존재한 이단들을 정죄했다.12

칼케돈공의회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은 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정통교회와 분리된 상태로 12세기까지 존속했다.


5. 헬라철학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응전


기독론 논의에서 눈 여겨 볼 것은 신학 논쟁에 정치 요소가 상당히 개재된 점이다. 교회는 로마치하에서 박해를 받는 동안 겸손한 자세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황제의 개종과 더불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지자 황실의 지원을 받았고, 거대한 세속 특권을 누리면서 권력투쟁에 개입했다. 전략적인 교구들인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가 벌어졌다.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지역 감독들 사이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정치적인 이해관계는 신학논쟁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교회는 그리스도로부터 신앙을 변증해야 할 책임을 부여받았다. 바울서신의 상당부분이 교회의 변증기능과 양떼를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에서 보호하는 책임을 언급하고 있다. 교회는 세상의 도전과 세속철학의 공격에 맞서서 믿는 바를 확고히 천명해야 한다.


그러나 때로 이단재판이 정치적 동기와 감정개입으로 혼선을 겪는 경우를 본다. 이단 정죄는 신학적으로 충분하게 토론을 한 뒤에 냉철하게 해야 한다. 계파의 입김이 배제된 것을 확인하고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단에 대한 경각심이 감소된다. 이단으로 정죄된 자가 버젓이 정통신앙인으로 행세하는 경우가 있다. 교회가 변증의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은 탓이거나 정치관계와 감정에 따라 이단재판을 한 결과이다.


중세 초기까지 진행된 기독론 논의는 오랜 기간에 걸쳐 헬라철학의 사고양식과 범주를 바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이 점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 진보주의 신학자들은 칼케돈공의회가 일단락 지은 정통기독론을 헬라 문화의 산물로 간주한다.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를 단지 종교적 슈퍼맨(superman)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며 신성과 인성을 지닌 메시아라고 하는 주장은 고대교회와 중세초기의 교회가 그를 종교시장에 내다팔기 위해 상품화 한 것으로 본다.


헬라사상은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본래의 메시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는 장애가 되었다. 이단들이 신성 또는 인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은 헬라의 이원론 사고양식을 가졌기 때문이다.13 만약 복음이 동아시아에 먼저 전해졌다면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을 겪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동양사고의 기본 범주인 음양(陰陽)의 원리로 이 문제를 이해했을 것이 틀림없다. 음과 양은 둘이면서도 하나이고, 하나이면서도 둘이다. 나누어지면서도 분리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구분된다. 극동지역 사람들이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교리에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은 동양 문화의 사물이해의 양식 덕분이다.


고대교회와 중세교회를 휘몰았던 기독론 논쟁은 헬라문화의 도전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적인 응전이었다. 기독론의 역사는 헬라 사고양식을 배격해 온 역사이다. 영지주의, 마르시온주의, 아리우스주의, 바울당원주의, 보고밀주의, 카타리파 등 서양이단들은 한결같이 헬라의 이원론 사고양식에 충실했다. 칼케돈공의회가 천명한 ‘신앙의 정의’는 기독교신앙의 근본도리를 부정하는 극단의 헬라 사고양식을 배격했다. 진리를 헬라문화의 실험관에 맞추어 이해하려는 시도를 배격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만들었으나 그것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분이다.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 존재한다. 기독론 논쟁의 배후에는 헬라문화 양식의 도전과 위협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보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엿보인다.


최덕성,『쌍두마차시대』의 제8장 "에베소-칼케돈공의회" 글




1Francis M. Young, From Nicaea to Chalcedon (London: SCM Press, 1983), 182-199.

2“Eulogy on the Nestorian Tablet at Sianfu”(781), The Nestorian Tablet at Sianfu, Ignatius Wing-ki and Greorge Barry O’Toole, tr. (Peking: The Peking Leader Press, 1929). 마르코 폴로는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 나라 변방에 경교가 널리 퍼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9세기 중엽에 중국이 보수적 복고주의를 지향하면서 외래 종교를 탄압한 결과로 경교는 멸절되었다.

3Nestorius, “First Sermon Against the Theotokos,” Richard Norris, Jr., ed., The Christological Controversy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123-131.

4Francis Young, 255-258.

5Cyril of Alexandria, “The Letter of Bishop Cyril of Alexandria to Bishop Nestorius of Constantinople with the Twelve Anathemas of Both, 430” and “First Letter to Nestorius,” Henry R. Percival, tr. From Nicene and Post-Nicene Fathers, Philip Schaff and Henry Wace, ed. (New York: Christian Literature Company, 1890-1900), vol. XIV, 201-205; “Second Letter to Nestorius,” Norris, 131-135.

6중세 신학자 안셀무스의 구속론―만족설은 이러한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자매편 『종교개혁전야』(2003)에서 상론한다.

7Francis Young, 199-213.

8Theodore of Mopsuestia, “On the Nicene Creed,” chap. 3, 5, 6, in A. Mingana, trans. in Wooodbrooke Studies 5 (Cambridge: W. Heffer &Sons, 1932), 35-37, 54-55, 63-64, 66에 수록되어 있다.

9Francis Young, 266-289.

10John H. Leith, Creeds of the Churches (Atlanta: John Knox Press, 1982), 35-36.

11DEFINITION OF FAITH: Following therefore the holy fathers, we confess one and the same our Lord Jesus Christ, and we all teach harmoniously [that he is] the same perfect in godhead, the same perfect in manhood, truly God and truly man, the same of a reasonable soul and body; homoosious with the Father in godhead, and the same homoou-sious with us in  manhood, like us in all things except sin; begotten before ages of the Father in godhead; the same in the last days for us and for our salvation [born] of Mary the Virgin Theotokos in manhood, one and the same Christ, Son, Lord, unique; acknowledged in two natures without confusion, without change, without division, without separation―the difference of the natures being by no means taken away because of the union, but rather the distinctive character of each nature being preserved, and [each] combining in one person and hypostasis―not divided or separated into two  persons, but one and the same Son and only-begotten God, Logos, Lord Jesus Christ; as the prophets of old and the Lord Jesus Christ himself taught us about him, and the symbol of the fathers has handed down to us. (Tr. by Jacoslav Pelikan).

12칼케돈신조문은 니케야신조문에 대한 정통적 해석이며, 계속된 기독론 논쟁에 대한 표준문서가 되었다.

13Malcom Lambert, Medieval Heresy: Popular Movements from Bogomil to Hus (New York: Holmes and Meier Pub., 1976), 182-208. Janet Hamilton and Bernard Hamilton, Christian Dualist Heresies in the Byzantine World c. 650-c. 1450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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