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부여군 세도면 간대리 365-1번지 남원윤씨 12세(諱 湯新) 묘역에 위치한
삼효자 정려가 2012년 8월 28일 자로 부여군 향토유적 제12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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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윤씨 부여(扶餘)의 三孝子
-叅議 尹湯新의 후손들-
증 이조참의 윤탕신(尹湯新/ 윤은의 長曾孫)의 후손들은 당파 싸움으로 조정이 소란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솔가 해 충남 부여군 임천으로 낙향해 세거하였다.
윤탕신의 자손들은 그 뒤 로 학문에만 전념했을 뿐 관직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 후로 삼효자(三孝子)가 나와 ‘충의효열록(忠義孝烈錄)’에 오르는 등 효도의 집안으로 이름을 떨쳤다.
(1) 윤 이(尹儞 / 1693 숙종 19 ~ 1725 영조 1)
字는 사거(士擧) 號는 포옹(圃翁)으로 윤은의 8대손이다.
윤이(尹儞)는 성품과 행실이 탁월했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한 효성으로 하여 하늘도 감동한 기이한 일이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몸소 고기를 낚아 찬수(饌需)를 대는 일을 일찍이 잠시도 끊어드리는 일이 없었다. 한번은 마침 겨울철이라 눈이 내리고 물이 얼어붙었는데 찬수가 떨어졌다고 하였다.
공은 바삐 고기를 찾아 개울가를 왕래하며 걱정이 되어 우는데 커다란 고기 수 십 마리가 눈 더미 속에서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하여 공은 즉시 그것을 거두어 어버이 찬수(饌需)에 공했다.
(대방세가언행록)
(2) 윤창수(尹昌洙 / 1729 영조 5 ~ 1799 정조 23)
字는 백순(白淳) 號는 만담(晩潭)이고 윤이의 재종질이다.
문학의 재능과 지성스런 효행은 천부적으로 태어났다. 그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하게 되었을 때 삼을 다려 증세를 가름하여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친[尹侹/1702~1770]은 「죽고 사는 것은 천명이다.
나는 내명수를 아는데 이것을 먹은 들 무슨 도움이 있겠는가?」하고 거절하고 곧 별세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뒤 공이 임종에 이르러 그 아들이 인삼을 다려 올리니,
「이것은 내 선친께서도 복용치 않으신 것이다. 내 비록 죽는다 할지라도 어찌 차마 이것을 먹겠느냐 」하였다. 그의 문고인「만담유고」가 집에 소장되어 있다. 전후 여덟 차례에 걸쳐 천거되었으나 은전을 입지 못해 향리의 사우들은 아직도 애석해하고 있다. (대방세가언행록)
(3)윤 갑(尹玾 / 1766 영조 42 ~ 1822 순조 22)
字는 군옥(君玉)이고 號는 삼성재(三省齋)라 하였는데 윤창수의 조카이다. 순후한 성품과 지극한 효성은 천성이어서 종신토록 어버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어버이가 돌아가심에 삼년간을 여막에서 지냈고 슬퍼하는 울음소리는 하늘에 까지 사무쳤다. 三年喪을 지낸 뒤에도 40년 동안을 매일 같이 성묘했다. 공이 작고 한 뒤에도 마을사람들은 종종 공이 무덤에서 절하는 모습을 완연하게 보고는 쫓아가서 살펴보면 사초가 뉘어져 있는 흔적이 보였다한다.
그러므로 고을사람들이 이르기를 「윤씨 가문에 전에는 三節이더니, 뒤에는 三孝가 있다」고 들 하였다.
(대방세가언행록)
三孝子 정려는 1956년 참의공종중에서 건립하였습니다.
※ 참고서적
남원윤씨영사정유적지(윤장섭 編輯)
첫댓글 삼효자 정려 향토유적지 지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그동안 향토유적지정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참의공
종중 경호회장님을 비롯한 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바쁘신 중에도 우리 종중 소식 올려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정려에 대한 부연 설명 할 것 있으시면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삼효자 정려비의 향토유적지정을 축하드립니다. 삼효자비와 비각을 건립,보존하시고 유적지정을 이끌어 내신 부여세도 諸宗님들의 노고에 찬사를 드립니다. 우리윤문에 계속해서 문화재지정이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