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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파도 :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비석 연혁 해설
섬에 이름은 제도 재파도, 가파도, 가을파지도, 더위섬이라 불러고 처음에는 나라에서 소와 말을 기르는 목장지로써 이조 성종 때 1469년 임금이 타시는 양마를 산출한 곳이다. 영조 26년 1750년 나라에 바치는 희성진공용 (소) 50마리 방목한 이래 헌종 6년 1840년 영국선이 내박하여 축우마를 쏘아 잡아간 후 폐우장이 되었다. 동 8년 壬寅년 1842년 李光廉 (이광렴)주관으로 개경 허가를 받아 上 ‧ 下摹瑟里민들이 왕래하면서 개간 경작하기 시작해서부터 나라에 납세하였다. 철종 말경 1863년 이 섬에 소와 쟁기로 밭가는 법이 들어오면서 上 ‧ 下摹里에서 주민이 상주하게 되었다.
제주도의 우스갯소리로 '가파도(갚아도)좋고 마라도(말아도)좋고'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세찬 바람 억센 파도와 싸우며 살아온 가파도(加波島)와 마라도(馬羅島)사람들이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도타운 인정을 나타낸다. 또 두 섬 모두 제주의 대표적인 유인도로서 인심이 좋은 곳임을 뜻하는 말이기도 한다.
개 요 :
면적 0.84㎢, 인구 763(1993), 해안선길이 4.2㎞, 최고점20.5m 대정읍 모슬포에서 남쪽으로 5.5㎞ 떨어져 있는 섬으로 모슬포와 마라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은 마라도보다 약 2.5배 더 크다.
19세기 중엽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 섬의 주민들은, 현재 약 600여 명 정도이고, 주로 어업에 종사하며 살고 있다.
주변 바다는 파도가 거칠어서 가끔 파선하는 일이 있는데 1653년 네덜란드의 선박 스펠웰호의 가파도 표착은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그 배에 승선하고 있던 헨드릭 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간 뒤에 '난선 제주도 난파기와 조선 국기'를 저술하여 서양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소개했다.
현재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산방산 아래의 용머리해안 입구에는 "하멜의 표착기념비"가 있다.
제주의 남쪽 모슬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30분 걸려 도착한 가파도.
제주의 섬이면서도 또 다른 문화와 따뜻한 인심이 남아 있는 섬.
가파도 선착장에 발을 내리니 커다란 바위덩이가 여행객을 가장 먼저 반긴다. 가파도는 마라도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가파도는 면적이 0.84㎢로 마라도보다 약 2.5배 더 크다.
마을주민은 225명이고 가구수로 치면 112가구다.
가파도는 상동과 하동 두 마을이 존재하며 해안선 길이는 4.2㎞이다. 초등학교와 보건소, 파출소, 교회, 사찰이 하나씩 있지만 금융기관은 한 곳도 없기 때문에 여행객들은 미리 현금을 준비해야 불편함을 피할 수 있다.
주민들은 농사와 바다 일을 겸하는 반농반어의 생활을 하고 있다. 경작작물은 대부분 콩과 보리인데 태풍 길목인 이곳에서 여름농사는 한마디로 도박이다. 다행히 태풍이 비켜가 주면 콩을 수확할 수 있지만 태풍의 영향을 바로 받을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밭을 갈아엎어야 한다. 그 자리엔 보리가 파종된다. 파릇파릇한 보리가 가파도를 뒤엎는 5월쯤 청보리축제가 섬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 가파도... 고인돌 군락 가파도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서양에 소개된 계기가 된 곳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선원 헨드릭 하멜이 `하란선 제주도 난판기`와 `조선국기`를 저술함으로써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비교적 정확히 소개된 것이다.
현재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용머리해안 입구에는 하멜의 표착기념비’와 난파선을 전시관으로 재현해 놓은 대형선박 기념물이 있다.
가파도를 유명하게 만든 또 하나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추측되는 대단위 고인돌 군락이다. 도내 언론매체에 따르면 2002년 이곳의 고인돌을 조사한 결한 135기가 확인됐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실시된 조사에선 50여기만이 남아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주민들이 보리 경작를 위해 밭 여기저기 산재한 고인돌들을 돌담 쪽으로 이동시켰거나 그런 과정 중 파손됐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무관심도 문제지만 문화재 보호를 소홀리 한 행정당국에 일차적 책임이 있다 아니할 수 없다.
“옛날부터 가파도 어른들은 힘자랑, 힘내기를 즐겨했는데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바위 돌 옮기는 행위를 통해 그 실력을 뽐내곤 했다”
그러고 보니 가파도 돌담도 본 섬과는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집과 집, 밭과 밭을 경계 짓는 돌담은 공통적인데 쌓인 돌들이 크고 넓적넓적하다. 섬의 중앙을 가로지는 길을 따라 걷다보니 과거 논농사 짓던 곳, 우물터, 보건지소, 교회, 초등학교, 사찰 등이 차례로 나온다.
학생수 감소가 이 마을 최대 현안이긴 하지만 결코 학교 문을 닫지 않게 하겠다는 주민들의 결연한 의지가 있어 가파도는 그래도 미래가 있는 섬이다.
멀리 한라산과 산방산, 송악산, 모슬포 포구가 시원하게 눈에 들어온다. 해안가 그 옆으론 커다란 바위가 툭 솟아있는데 ‘큰돌’있다.
선착장 인근에도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그 돌을 ‘까막바위’라 불렀는데 갈매기떼가 유독 그 바위에만 내려앉아 까맣게 보여서 붙인 이름이다.
이 바위엔 절대 올라서선 안 된다. 사람이 이곳에 올라가면 배가 뜰 수 없을 정도의 거센 바람이 불어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바다 일을 생업으로 하는 섬사람들에겐 절대적인 금기사항이다.
여행객이라 할지라도 이곳에 올라섰다간 마을 어르신들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들을 수 잇다.
상동 선착장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제주도 특유의 무속신앙인 본 향당이 바다를 향해 좌정하고 있다. 상동마을 본 향당인데 큰 할망당으로 부르며, 마을의 안녕과 번영, 무사귀환 등을 기원하는 곳이다.
하동에도 당이 있는데 본 향당에서 가지가 갈려나와 ‘작은 할망당’이라 불린다.
복잡한 생활을 벗어나 조용히 사색을 즐기고 인공의 냄새가 전혀 배어 있지 않은 곳이다.
2. 마라도(마라도천연보호구역 -천연기념물 제 423 호)
소 재 지 : 서귀포시 대정읍 가파리 580 등
마라도는 우리나라의 가장 남쪽에 있는 섬으로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타원형의 모습을 하고 있다.
마라도는 북위 33°06′31″, 동경 126°16′10″에 위치하며, 동서의 길이가 500m, 남북은 1.3m 남북이 긴 모습을 하고 총면적 0.30㎢인 유인도로서 10만평에 이르고 있으며, 26세대에 107명의 주민들이 주로 어업에 종사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마라도의 주역처럼 버티고 있는 등대를 지나 약간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한민국최남단"이라고 새겨진 기념비가 있어 새삼 국토의 소중함을 느끼게 한다.
모슬포항에서는 11㎞, 가파도에서는 5.5㎞ 떨어져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마라도는 기반암이 현무암질 암석이며 절리가 잘 발달되어 있고, 해중에서 독립 분화한 섬이라고 생각되나 분화구는 볼 수 없다. 등고선은 섬 모양과 같이 동서가 짧고 남북이 긴 타원형을 하며 동쪽등대 부근이 34m로 가장 높으나 전체로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섬의 돌출부를 제외한 전 해안은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북서해안과 동해안 및 남해안은 고도 20m의 단애를 이루고, 그 곳에 무수한 해식동굴이 발견된다. 파식대는 해식단애가 비교적 완만한 북동해안과 남서해안에 주로 발달하고 특히 남서해안에는 3단의 파식대가 관찰된다. 이곳의 육상식물은 원식생이 모두 파괴되어 경작지나 초지로 변했으며, 섬의 중앙부에 해송 조림지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해산 동식물은 매우 풍부하여, 해조류의 경우 난대성 해조류가 많이 출현하는 조간대와 조하대 식생이 잘 보존되어 제주도 본 도나 육지의 연안과는 매우 다른 이질적인 식생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녹조류 8종, 갈조류 20종, 홍조류 44종이 밝혀져 있고 해산 동물로는 해면동물이 8종 중 6종이 한국 미기록종, 극피동물은 2종, 자포동물은 히드라충류 2종 산호충류 8종이, 태형동물은 2종, 피낭동물의 해초류는 2종의 생육이 밝혀졌다. 또한 이매패는 7과 12종이 채집되었는데, 그 중 8종은 한국 미기록종이다. 연체동물은 38종, 갑각류는 21종 중 4종이 한국 미기록종이다. 마라도는 육지와 거리가 멀고 섬 주민이 잘 보호관리하고 있는 까닭에 해산 동식물의 생태계는 인간에 의한 간섭이 거의 없는 자연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 미기록종의 출현이 많으며, 특히 섬의 경관이 아름다워 학술적으로 보존관리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라도는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본토와의 거리가 멀고 주민이 적어 특히 해안 생태계의 유지관리가 잘 되어 있으며, 많은 한국 미기록종 생물이 출현한다. 이 섬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는 지정학적인 이유로 난대성 해양 동식물이 가장 두드러지고 많은 한국 미기록종과 신종생물의 출현을 가능케하고 있으며 그 특유한 생태적 특성과 경관으로 인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 한다.
♣ 관련설화 "애기업개"
수백 년 전, 가파도에도 마라도에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시절, 모슬포에 살고 있는 이씨 부인은 어느날 물을 길러 가다가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듣게 된다. 울음소리를 좇아가니 태어난 지 3개월도 채 안된 여자아이가 수풀 속에서 울고 있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이의 부모를 찾을 수 없게되자, 이씨 부인이 딸처럼 기르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이씨 부인에게도 태기가 있어 첫아이를 낳았고, 여자아이는 자연스럽게 아기를 봐주는 애기업개가 되었다.
어느 해 봄, 모슬포 잠수들은 마라도 '섬비물'해안에 배를 대고 물질을 시작했다. 바다는 매우 잔잔했고, 날씨도 좋아서 소라, 전복 등이 많이 잡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이레가 지나고, 가지고 들어온 양식도 다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 물질은 잘도 푸진게, 이제 그만하고 오늘랑 돌아갑주." (이번 물질은 수확이 아주 좋네요. 이제 그만하고 오늘은 돌아갑시다.)
잠수들이 섬을 떠날 채비를 하자, 갑자기 바람이 불고, 잔잔했던 바다가 거칠어졌다.
"잔잔해지면 가야되큰게" (바다가 잔잔해지면 가야겠어요.)
그런데, 바다가 참으로 이상했다. 떠날 것을 포기하고 배를 묶어 놓으면 잔잔해 지고, 배를 타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거칠어졌다.
"이거 틀림없이 바다신이 노한거라. 이제 살앙 돌아가긴 틀린 거 닮수다." (틀림없이 바다의 신이 화가 나신 거예요. 이제 살아서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아요. )
물이고 양식이고 다 바닥이 난 날 저녁, 잠수들은 다음날에는 죽을 각오로 떠나기로 뜻을 모았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 가장 나이 많은 잠수가 선주(船主)에게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젯밤 꿈에 누가 나타나 이르기를 애기업개를 두고 가야지 데리고 가면 모두 물에 빠져 죽을거랜 합디다. 어멍도 아방도 없는 아이니 두고 가야쿠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는 아이이니 여기에 두고 가야할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부인 역시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일행들은 의논 끝에 애기업개를 희생시키기로 하고 떠날 채비를 했다. 어찌 갈등이 없었으랴만, 더 이상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배를 띄워 사람들이 오르자, 잔잔했던 바다에 다시 바람이 일기 시작해면서 거칠어질 조짐을 보였다. 아기 어머니가 애기업개에게 말했다.
"아이고, 얘야, 아기 기저귀 널어놓은 것을 잊어버리고 안 걷어 와졌구나. 저기 저 바위 위에 하얀 걸렁이 보이지? 얼른 가서 좀 걷어 오너라."
애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간 사이에 배는 바다 가운데로 빠져나갔다. 뒤늦게 눈치를 챈 애기업개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나도 데려가 줍서! 제발 데려가줍서!" (저도 데려가 주세요. 제발 데려가 주세요.)
그러나 무정하게도 배는 뒷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바다는 더 이상 거칠어지지 않았다. 배에 탄 사람들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차마 뒤를 돌아볼 수도 없었다.
그 뒤 3년 동안 사람들은 무서워서 마라도 쪽으로 가지 못했다.
3년이 지난 뒤 마라도에 들어간 사람들은 모슬포와 가파도가 가장 잘 바라다 보이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모슬포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가 외로움과 굶주림에 지쳐서 죽은 애기업개의 뼈를 볼 수 있었다.
잠수들은 애기업개의 뼈를 그 자리에 곱게 묻어 장례를 치러 주었다. 그리고 애기업개를 위해 그 자리에 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매달 7일과 17일, 27일에 제를 지내고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였다. 그 이후로는 사람들이 바다에서 죽는 일이 드물어졌다고 한다.
♥ 아기업개 할망당
마라도 북쪽 바닷가의 높은 언덕에 모슬포와 가파도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바닷가에 자리잡고 있는 마라도 아기업개당에는 어업에 관련된 처녀신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라도는 옛날 사람이 살지 않아서 바다에는 유난히 해산물이 많았으나 이 섬에서 어로 작업을 하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면 해신(海神)이 노하여 바람이 불고 섬 전체에 흉년이 들곤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섬의 출입을 금했다. 그러나 제주 해녀들은 남몰래 이곳을 드나들며 물질을 하던 작업장이었다. 모슬포 해녀들이 아기와 아기를 보는 계집애를 대동하고 마라도에 물질을 했다.
어느 해인가 모슬포 해녀들이 물질에서 해산물을 많이 잡았으나 갑자기 바다가 거칠어지고 바람이 몰아쳤다. 해녀들이 며칠을 기다렸지만 비다는 잠잠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군 해녀는 꿈에 어떤 이가 나타나 아기업개를 섬에 두고 떠나야 무사히 귀가할 수 있다며 아기업개를 희생제물로 삼으라는 말을 듣는다.
이 말을 전해들은 해녀들은 다음날 배를 띄웠고 아기업개가 기저귀를 가지러 달려간 사이에 바다 가운데로 빠져나갔다. 아기업개는 같이 데려가 달라고 울부짖었으나 배는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아기업개는 굶주림에 지쳐 죽고 말았다. 몇 년이 흘러 해녀들이 왔을 때에는 아기업개가 있던 자리에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흘러 이 섬에 사람들이 들어와 산 이후 아기업개 처녀의 슬픈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매달 7일, 17일, 27일 그 자리에서 제를 지내고 해상의 안전을 기원하게 되었다. 아기업개당은 죽은 처녀신을 모신 당이라 해서 ‘처녀당’이라고 했으나 세월이 흘러 나이를 먹었다 하여 ‘할망당’으로도 부른다.(http://cafe.daum.net/fulllifetour 유리상자 발췌)
3. 형제섬(관도 貫島)
형제섬은 산방산 바로 앞에서 내려다보이는 무인도로. 사계리 포구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크고 작은 섬이 마치 형제처럼 마주하며 떠 있다. 길고 큰섬을 본섬, 작은섬은 옷섬이라 불렀다. 본섬에는 작은 모래사장이 있으며 옷섬에 는 주상절리층이 일품이다. 바다에 쑤욱 잠겨 있다가 썰물때면 모습을 드러내는 새끼섬과 암초들이 있어서 보는 방향에 따라 섬의 갯수가 3 ~8개로, 그 모양도 마치 착각처럼 변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일출. 일몰시 사진촬영 장소와 최고의 낚시 포인트로도 유명하다. 형제섬의 수중아치는 다이버들에게 잘 알려져 있으며 해송, 연산호, 군락과 함께 자리돔, 줄도, 화돔 때들의 유영이 만들어 내는 비경을 즐길 수 있다
4. 이어도(離於島),이여도, 파랑도(波浪島)) - 이어도 종합해양과학기지
이어도는 예로부터 제주도 사람들에게 복락과 구원의 이상향이었다. 뱃사람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은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이어도는 사시사철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때문에 뱃사람들은 위험스런 뱃길을 이어도로 위로받으며 두려움 없이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갈 수 있었다. 또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자식을 기다리는 여인네들에게 이어도는 한 가닥 희망의 끈이기도 했다. 즉, 이어도는 이승의 삶이 지겹도록 고달플 때 편히 쉴 수 있는 피안의 섬이었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에서는 전설 속의 섬 이어도가 실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해군의 수색작전이 벌어지는 상황이 전개된다. 그러나 역시 이어도는 가상의 섬이란 게 드러난다. 하지만 수색작전 취재차 동승했던 기자의 실종사고에 대한 의문을 풀어감으로써 이어도가 고된 삶을 살았던 제주도 사람들에게 얼마나 위안과 안식이 되는 구원의 섬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어도의 섬으로 알려져 있으며 '파랑도'라고 불리는데 이어도의 암초 정상이 바다의 표면에서 4.6m 아래에 잠겨 있어 파도가 심할 때나 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이어도'가 '환상의 섬' 혹은 '전설의 섬'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어도의 정확한 위치는 대정읍 가파리에 속한 마라도에서 서남쪽 152km 떨어진 동중국해 해상이다.
우리 정부는 지난 2003년 이어도에 해양과학연구소를 설치해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