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가 끝난 들녘은 적막하다.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따내고 난 뒤의 까치밥만 남겨진 채 서있는 감나무 모습들도 이런 늦가을 농촌의 적막감을 더 하는 풍경이다. 입동이 지난 지도 한참 되었으니 어느새 겨울이 시작된 셈이다. 다시 봄이 오기까지는 긴 날들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금 농촌에는 추수 뒤끝인데도 웃음이 없다. 대부분 인사말만 몇 마디 건넬 뿐 주고받는 말조차 드물어졌다. 수확의 기쁨보다는 실의와 한숨이 더 깊다. 농사에 대한 재미를 잃은 지는 이미 오래지만 수확 뒤끝의 허탈함이 웃음과 말을 앗아가 버린 탓이다. 농약과 비료, 비닐 기름 등 농자재 값은 갈수록 천지부지로 치솟는데 쌀값은 오히려 떨어지고 수매량마저 제한되니 농사지어 수지 맞춘다는 것은 옛이야기가 되었다. 땅을 비어둔 채로 차마 놀릴 수 없어 씨앗을 묻고 모종을 내어 보지만 농사짓는 이들이 육칠십에 이르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니 이 또한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갈수록 농사일에 힘은 부치는데 부족한 일손을 매울 품은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특별한 농사가 아니고선 농업소득을 통해 그 품값 또한 감당할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 몸에 무리가 오는 줄 알면서도 새벽부터 해 저물도록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사정이다.
최근에 들어와선 지구온난화 등으로 인한 기상이변까지 겹쳐 농사를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아무리 애써 농사짓는다 해도 태풍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가 한번 닥치면 속수무책, 하루아침에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만다.
갈수록 이런 재해가 심화되는데다가 농사일이라는 게 철을 놓칠 수도 없는 것이라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가을걷이를 하느라 정신없이 일하다보면 그 새 겨울은 성큼 다가왔는데 이젠 몸의 어느 구석 안 아픈 곳이 없다. 평생 농사일로 골병 든 몸이 다시 도져 겨울 내내 앓아야 하는 것이다.
가을걷이 뒤의 이런 모습은 우리 나라 여느 농촌에서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일반적인 풍경이다. 추수를 끝낸 빈 들판에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처럼 희망을 잃은 농촌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착잡한 심경에 희망을 다시 일굴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하게 된다.
농촌, 농업을 걱정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한미FTA협정이 통과되면 우리 농업이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라 우려한다. 사실 그런 우려처럼 소값, 쌀값의 폭락에서 보듯 이미 그 영향은 현실로서 닥쳐와 있다. 그러나 이처럼 농촌 농업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런 사람들도 정작 한미FTA 이전에 이미 우리 농촌, 농업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 있다는 사실은 잘 알지 못하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 한미FTA 협정 체결 이후의 문제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그 해결 방안이 무엇인가를 걱정하기 이전에 지금 이 농촌, 이 농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그 해법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이에 바탕하여 한미FTA뿐만 아니라 한EU, 한중, 한일FTA 등 줄줄이 이어 서 있는 무역자유화협정으로 인한 농업 피해 대책을 제대로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촌, 농업문제의 해법은 무엇인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선 두 가지 방안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농업소득, 또는 농가소득을 높여서 농민들도 도시민 못지 않게 경제적으로 잘 사는 방안이다. 이른바 도농의 소득격차를 줄여 상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방법이 이것이다.
이런 해결방식은 사회구성원 간의 형평성을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고 또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해결방식이 그 동안 끊임없이 모색되고 시도되었으나 지금껏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산업문명이후 자본주의체제나 사회주의체제를 막론하고 이에 대한 그 모든 시도는 사실상 실패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 할 수 있다(이에 대한 반론으로 쿠바의 예를 성공 사례로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고립된 상황 속에서의 한시적 현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 외의 경우엔 일본 등의 예처럼 농외소득을 높이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는데 이 또한 농업 자체의 소득으로선 도시나 다른 직종과 비교해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농촌, 농업의 가치, 그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고 이에 따른 해법을 찾아보는 것이다. 잘 산다는 개념을 경제적 관점에서 삶의 관점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농업을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하나의 직업'이라는 관점을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한다. 쉽게 말하면 농업, 또는 농사짓는 일이란 단순히 돈벌이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 본시 자연생태계 속의 한 존재인 사람이 자신의 존재에 가장 걸맞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인식이다. '돈벌이를 위한 농업은 망해가지만 사람이 제대로 사는 방식으로서의 농업은 갈수록 더욱 요청된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아무튼 우리 앞에 놓인 이 두 가지의 해법 또는 길이 있다고 할 때 그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는 국가 제도와 정책문제 등과 연관된 것이긴 하지만 결국은 개별적인 선택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비록 사회적 여건 등 외적 강제를 벗어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각 개인의 삶에 대한 궁극적 책임은 결국 그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국가가 정책적으로 농업의 불리함에 대한 직접적인 소득보전대책 등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아직까지 이것이 실현되기는 요원해 보일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하는 까닭이다.)
지금 우리는 돈벌이 중심, 상품경제방식에 익숙해 있다. 돈 벌어 잘사는 삶의 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농업을 통해서 이 방식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러한 방식을 통한 성공이라는 것은 흔히 성공사례의 예에서 보듯 일반화 할 수 없는 예외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어쩌다 이렇게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농민으로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어 보인다. 땅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잘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사실상 무슨 사업가와 다를 바 없게 사는 것으로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다른 한 길은 돈 벌어서 잘 사는 방식, 도시 사람처럼,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처럼 잘 사는 방식이 아니라 농민으로서,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잘 사는 길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돈이 주인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쉽게 익숙한 방식은 아니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다.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길은 지금 처음 시도해보는 길이거나 그리 낯설기만 한 길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적어도 산업문명, 자본주의 체제가 전면화 되기 전까지 인류가 전통적으로 살아온 가장 오래된 삶의 방식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이 두 갈래의 길 가운데 어느 길을 갈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 선택의 과정에서 어느 길이 옳고 그른 길인가의 논쟁보다는 어느 길이 우리가 농민으로서, 또는 자연과 조화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길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귀농운동을 통해 우리가 지향하는 길은 분명하다. 생태가치와 자립하는 삶의 실현이라는 귀농운동의 지향에서 보듯 이 시대, 모두가 외면하는 농촌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농업이라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은 귀농의 목적이나 이유가 '돈벌이가 되는 직업'으로의 전환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면에서 보면 농민으로서, 또는 자연과 함께 조화되는 삶을 살고자하는 사람으로서 잘 살 수 있는 길이란 결국 반자연적인 공업화 중심의 산업문명체제 속에서 농업이 갖는 근원적인 한계로 인해 경제적인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대부분의 우리농민들에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없는 유일한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새삼 이러한 원론적인 문제를 지금 다시 되풀이 거론하는 까닭은 이러한 인식이 대부분 아직 관점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고 구체적 현실에서의 요구나 기대치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가을걷이 뒤에 농민들이 더욱 허탈해 하며 절망을 느끼는 것은 결국 힘든 노력의 대가가 사회적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실의와 좌절감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해 온 것처럼 현실적으로 이러한 기대와 요구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길은 스스로 그 대안을 마련하는 길뿐이다. 삶이 의미 있고 때론 위대한 것은 '절망적 조건 속에서 희망을 일구어 가기 때문'이라는 말처럼 절망 속에서 스스로 희망이 되는 것 그것이 유일한 희망인 까닭이다. '가슴 속에 희망을 품고 있는 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그것이다.
왜 절망인가. 무엇 때문에 절망하는가. 이 문제에 대해 냉정하게 말한다면 우리들 대부분은 관념적으론 돈(경제가치, 물질가치, 소유가치)이 중심이 되는 그 길이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니라면서도 실제로는 농민 아닌 사람들, 농민들보다 편하게 잘 사는 사람들 흉내 내며 따라가지 못해 안달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임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한다. 농업을 통해선 경제적으로 저들처럼 따라 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임을 인식해야하며 또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저들이 잘 살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상대적으로 못 살아야 가능하기 때문이라는 것과, 우리가 만약 저들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은 또다시 누군가를 지금의 우리처럼 못살게 만들어야 가능하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한다.
결국 사는 방식을 바꾸고 새길을 열어야 한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고통은 저들의 게임방식을 우리끼리 적용하고 있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것에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우선 게임의 법칙, 그 방식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경쟁에서 이겨 돈이나 물질을 더 많이 소유하고 잘 살기 위해 어떻게 돈을 벌까, 소득을 높일까가 아니라 가능한 경쟁 등 인위의 수고로움을 놓고 자연의 풍요에 의지하며 어떻게 생명력이 충실하게 제대로 살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결국 우리가 왜 농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 농민으로서 또는 땅의 사람으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길이며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에 대한 자기 확인과 확신이 기본이라는 생각이다.
나로서 나답게 살기가 자기존재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실현하는 전제인 것처럼 농민으로서 농민답게 살기란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 흙과 함께 생명을 돌보고 기르는 사람으로 살기라 할 수 있다. 이는 땅이 주는,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주는 행복, 곧 생명을 담당하는 자로서 맛보는 기쁨과 보람, 자연과 함께 함을 통해 얻는 풍요와 기쁨과 안식 등 도시적인 삶과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내면의 평화, 즐거움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길만이 지금 여기 농민으로서, 땅과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잘 살 수 있는 길이다.
희망이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일구는 것이다. 자신이 희망이 되는 것이다. 삶의 여유 갖기, 생명을 모시는 농사짓기, 돈 벌기 위해 일하는 삶이 아니라 살아있는, 존재하는 기쁨을 위해 살기 등이 곧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기이며 다시 희망을 일구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단순 소박한 삶의 자족성을 위하여 가능한 인위적인 농사의 규모를 줄여가며 생계의 필요를 자연이 기르고 가꾸어 주는 것에서 더 많이 충족하는 삶의 방식은 더 많이 소유하기 보다 더 많이 존재하는 삶을 추구했던 스콧 니어링 부부처럼. 한나절 일하고 한나절 여유를 즐기는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삶의 방식이란 다른 말로 자기의 존재를 드려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쓸모에 바탕하여 삶의 필요를 스스로 충족해 가는 단순 소박한 삶이야말로 자신을 존중하며 땅의 사람으로, 생명의 일꾼으로서 품위를 유지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농민이 땅의 사람으로서 농민답게 살기 위해선 이에 대한 필요를 느끼고 공감하는 사람들끼리 먼저 그 길을 찾고 서로 도와야 한다. 농민들, 땅의 사람들과 연대와 협동이 스스로 행복한 삶을 일구는 바탕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초록빛깔을 꿈꾸는 사람들, 곧 생태적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과 구체적 연대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십시일농의 방식을 보다 책임 있게 실천하는 공동체 지원농업이나 지역 내의 소비자와 연대하여 지역 안에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지는 로컬푸드 운동, 농민장터를 통한 직거래운동과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 급식운동 등 시장경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다양한 형태의 자조적인 연대운동이 대안사회를 준비하는 사람들과 함께 활발하게 모색되어야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봄의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이것이 우리 농촌에, 이 땅에 다시 새로운 희망을 씨 뿌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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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건 또 누가 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