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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푸른 시의 방 원문보기 글쓴이: 강인한
2014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작 _ 최백규, 정기석
* 당선작은 각각 6편씩 발표되었으나 3편씩만 여기 올립니다.
얼룩의 반대 (외 2편)
최백규
나는 횡단보도를 보면 자꾸만 연주하고 싶어진다
#1이 신호등을 기다리면 반대의 횡단보도는 피아니시모
누구 하나 다 건넌 길의 뒤를 돌아보지 않아
솟아오르는 표지판의 뒷면이 항상 궁금했다
하얀 건반만 밟아나갈 때
초록 머리의 소녀가 뒷모습만 남기고 사라질 때
뒷면이 흘리고 간 무지개를 먹고
그녀의 얼룩무늬 원피스를 연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지금, 태양의 14시는 발기된 혓바닥으로 중앙선을 핥고 간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벌겋게 달아오른 돌기에 닿았을까
새의 심장을 관통하는 무수한 2차원들
나의 등뼈 위로 질질 흘리는 은근한 체크무늬
처음으로 알게 된 폐부의 간지러운 감각
새의 목을 잡아 비틀면
쏟아지는 내핵
자기장을 잃은 지구는 참 울퉁불퉁하구나
네가 마모되는 동안 나는 멀리 떨어져 앉아 구경을 했지
너 참 재미있는 아이구나
푸른색을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지
10층에서 1층으로 가기 위해서는 뛰어내려야 해
푸른색도없다니쓸모없는새끼죽어버려!죽어버려!죽어버려!
손목이 비틀어지고 새의 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해바라기의 고개가 꺾이는 장면을
어느 영화에선가 본 적 있지
무언가 시작되기도 전에 올라가는 엔딩 크레딧
아무도 없나 봐, 저기 새가 날고 있잖아
어디? 스크린 뒷면 오른쪽 위에 보이잖아! 눈을 감아야지 이 바보……
너의 눈알이 해체되는 사이- 그 속에서 태양계 너머의 영화를 볼 텐데
멋지지 않니?
횡단보도 밑 아스팔트가 카펫처럼 일어나 둘둘 말리기 시작하고
늘 바닥의 반대편이 궁금했었는데 얼룩말*의 등껍질이다
———
* 얼룩말의 가족단위는 1마리의 수컷과 여러 마리의 암컷, 새끼들로 구성된다.
나의 세상에 온 걸 환영해
나는 숨을 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빗나간 입술
비어있는 공간을 굳이 채워 넣을 필요는 없다
거리의 밀도가 나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다
뒤돌아서는 그때의 너를 오후의 크기에 더했다
너와 처음 여행을 다녀오던 날에도 나는 쓰레기였다
그저 네 고양이의 단면이 얼마나 흘러내리는 모양인지 알려주고 싶은 것
떠나간 자리에서 남아 있는 날개의 흔적에 글자를 그렸다
니야옹, 니야옹
우리가 아직도 한 우주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최소 유통기한은 4년
너는 달의 공전 주기를 뒤적이고 나는 지구의 나이를 달력에 표시했다
4월의 꽃잎들을 잘게 찢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구부러진 햇살 ㄷ자로 웅크린 거실의 오후 4시
공중을 떠다니던 먼지들도 소파의 안으로 점점 파고들 것이다
이곳은 내가 없어져야 모든 것이 완벽하다
매일 거울 앞에서 이빨을 하나씩 뽑아 선반에 얹었다
면도를 할 때마다 창가의 꽃병들은 어째서 죽어가야만 하는지 궁금했다
의사가 먼지보다 많은 이곳인데!
아직 마르지 않은 세면대의 상처에 물기로 뒤덮인 심장을 가만히 맞춰본다
핏줄을 타는 붉은 것 너무 뜨거워 나의 마음은 언제나 4도 화상
너는 숨 쉬는 대신에 휘파람 부는 법을 마지막 가르쳐 주었고
내가 노래를 완성했을 때 너의 모든 것은 나의 세상이 되었다
머리 위로 기차가 지나갈 때, 한껏 벌린 가랑이 사이를 기어나갈 때
여름의 한복판을 거니는 고양이의 소리로 실컷 울었던 것도 같다
막다른 골목의 담벼락에 천천히 ‘굿바이, 로맨스’라고 긁는다.
로그아웃 로그아웃
주의사항!
내 몸을 마신 벽의 혈관은 너무 축축해서 발이 빠지기 쉽다.
우선 이 방 안에서 가장 어두운 한쪽 벽을 무너뜨렸다.
알 수 있는 사실은 그 너머에 사는 도트 벽지까지 절대 숨이 닿을 수 없다는 것.
흘러내리는 잠도 고개를 끄덕이고,
딱딱한 시선이 살갗에 닿았을 때 뒤쪽 벽에 부딪히면서 귀를 때리는 뇌파.
목으로 앵무새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손으로 피스톤 하는 것이 낫겠다.
온종일 콘크리트에 귀를 비비면 선명해지는 핏덩어리의 펌프질과 아이들의 비명.
뒤집어진 손톱이 덜덜 떨린다.
커피로 알약을 마신다.
생쥐, 기생충, 벌레, 개새끼,
바닥을 기어 다니며 타자를 친다.
ㅅㅏㄹㄹㅕㅈㅜㅓ.
오른쪽 스피커 안에서 온종일 소리만 지르는 외국인 아가씨.
‘백색소음’이라는 말을 라디오에서 들어본 적 있었지만 굳이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왼손이 필요하고 너는 12월 달력만을 넘기길 바랐으니까.
테이블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위한 도구일 뿐.
어쩐지 이 장면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관없지.
말 못할 생각들을 곱게 접어서 입속에 구겨 넣었다.
벽은 손목을 긋는다.
분수가 쏟아지면서 연주를 멈추는 바람과 어색한 숲.
카페의 천장에서는 이상한 수채화가 무반주로 춤을 추고,
외팔이 화가도 남은 한쪽 팔을 마저 테이블에 못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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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백규 / 1992년 대구 출생. 현재 대구광역시 교육청 문예창작영재교육원 강사이며, 텃밭시인학교 회원.
http://blog.naver.com/qkenr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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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나날 (외 2편)
정기석
오전과 오후와 저녁과 밤이 지나자
아침과 오전과 점심과 오후와 저녁과 밤과 새벽이 왔다
대체로 당신이었으나 때때로 나인 시간을 나누자
당신의 나날은 무리수가 되었으므로, 완전하지 못했다
당신의 시간은 대체로 일요일 오후였으므로
때때로 나인 시간도 대체로 일요일 오후에 머물렀다
대체로 당신이었으나 때때로 나인 시간에서
달력은 대체로 빨간 색이었으므로, 우리는 불온했다.
달력의 빨간 날들에 당신은 오후에 일어나
마른기침을 하였으므로 시간의 순서는 대체로 뒤섞였다
뜯기듯 나누어진 서사의 셈에는 피가 고였으므로
때때로 나인 시간 속 당신의 부재는 불투명했다
당신을 잃지 않기 위해 오후를 기억해야 했으므로
햇빛이 수평으로 눕는 두 번의 오후마다 커피를 마셨고
남은 커피가루를 창틀에 놓아 말렸다
커피는 때때로 말라 갔으나, 대체로 눅눅했다
대체로 내 오후는 당신의 오후를 따라잡지 못했으므로
오후 뒤에는 노을이 뒤따르기 일쑤였다
어떤 밤에는 별이 없었으므로 서러웠고
어떤 새벽에는 수평의 해가 하도 길어 외로웠다
새벽 다음에 새벽이 오고 또 다시 새벽이 올 때에는
기다림의 장력(張力)에 벽에 걸린 기타의 줄이 끊어지곤 했다
그럴 때에는 창문을 떼어다가 절반으로 접고 한 번 더 접었다
때로 더 접어질 수 없을 때까지 접었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당신으로 산 시간의 겹이 정갈하게 나눠지지 못했으므로
커피 속에서는 버짐처럼 하얀 아몬드 꽃이 피곤했고
당신의 오정(午正)과 자정(子正) 사이 어딘가에서는
때때로의 내가 당신의 네 시를 관통한다고 착각하곤 했다
은하의 배열
송곳 묵직하게 뭉뚱그려가며
금속 같이 새긴 뼈의 기억들
눈 깊은 곳에 입은 상처같이
망막에 박아둔 별의 화인(火印)들
손이 병렬구조로 굽게 된 이유가
펜을 잡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으므로,
눈에 반짝이던 것이 별 뿐은 아니었으므로,
소환했다. 너라거나, 혹은 너이거나
부식은 광년만큼 요원하므로,
아직도 오고 있는 빛이 있으므로,
차라리 은하의 배열을 바꿨다
길 잃겠지. 너라거나, 혹여 너이라도
당신이 모르는 행성 두 개쯤
주머니 속에 넣고 달그락거리며
값싼 허세를 입 꼬리에 걸고 기다렸다
끝내 마주치기 싫었던 마주침이 빨랐다
접합할 열쇠구멍을 위해 마모된 것은 사랑.
이제 마지막으로 손을 직렬로 맞잡아도 괜찮아
찰칵, 열릴 때 변하는 건
우주뿐만이 아닐 테니까
당신의 생몰연대
당신의 생몰연대를 기록하며
여타한 부사는 버리도록 해요.
실은, 아직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으니까.
설령, 모든 것이 일어나는 중이라 해도.
벚꽃과 아카시아 사이에 라일락이 펴요.
혹은 4월과 5월 사이에 라일락은 펴요.
당신은 초여름과 늦봄 사이에 태어났지요.
어느 사이들에 더 틈이 많을까요.
그 모든 틈들의 사이를 사랑했어요,
어느 늘어진 전선도 붙들어 매지 못한 채,
시간은 전신주처럼 지나가고 있네요.
당신은 봄에 떠나기 시작한 것 같은데
지금은 여름이에요. 그 사이,
몇 번의 여름이 지나갔는지는 헤아려보지 못했습니다.
위도 36도 경도 129도 사이 30평방미터의 방,
지구 위에서 유난히 당신 짙은 부분을 살짝 오려내
오후 햇살 속에서 이불 털듯 탈탈 털어 보아요.
하지만 우리, 바람 많이 받는 사람들.
잘 넘어지지만 날아오르지는 못해요.
그럼 차라리 그 부분의 바닥을 뜯어
녹슨 골재를 세워 이젤을 만들고,
창틀을 떼어내 캔버스로 올리고,
노을 진 당신을 여백으로 그려요.
비워내지 못하므로 온전히 채워요.
그리곤 당신 그린 그림을 관처럼 포개,
내 생의 일몰연대와 만나기까지, 혹은
이 방의 지평선과 접할 때까지 수평으로 뉘어요.
그러면 우리가 만들어 낸 소금물들이
부풀어 오르는 해류와 만나는 때가 있을 거예요.
누구도 섬이 아니기 위해선
누군가는 기필코 사이에 있어야 하고,
섬의 사이에 있기 위해선 부력(浮力)이 필요하니까.
그때가 되면 당신 그린 그림은 해류를 타고
닿지 않던 섬과 닿지 않을 섬 사이를 지나,
언젠가 당신이 두 번 연이어 발음했던 지중해의 일몰로 갈 거예요.
당신은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태어났지요.
혹은 당신은 초여름과 늦봄 사이에 태어났지요.
그 사이, 몇 개의 계절이 지나갔는지는
미처 헤아려 보지 못했고,
다만, 지나간 계절만큼 돌아오는 계절도 사랑했습니다.
어쩌면, 라일락이 피는 4월과 5월의 그 사이에는
당신의 생몰연대에 대한 기록을 마칠 수 있을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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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석 / 1982년 포항 출생. 동국대 광고홍보학과와 동국대 영어영문학과 석사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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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미래 시의 가능성을 기대하며
열네 분의 작품 140편이 본심에 올라왔다. 여느 해보다도 시적 개성이 분명했고, 작품 수준 또한 높고 일정했기에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전체적으로 시의 서사화 혹은 산문화 현상이 역력했다. 시적 대상은 다채로웠고 시선은 넓었다. 언어들은 유려했으며 형태 혹은 배치는 자유로웠다. 감각은 세련되었고 상상력은 분방했다. 잘 빚어진 서정, 절제된 언어, 의미의 압축과 농축, 구조화된 긴장과 같은 기존 시의 미덕에 의지하지 않고도 충분히 시가 되고 있었다. 분명, 시의 음역이 넓어졌으며 이를 통해 미래 시의 가능성을 예단해 볼 수도 있었다. 당선작으로 추천해도 큰 손색이 없어 보이는 열네 분의 대표 응모작들은 다음과 같다.
<중국 사원> 외 9편ㆍ<당신의 나날> 외 9편ㆍ<자연사박물관> 외 9편ㆍ<사보타주 신발> 외 9편ㆍ<얼룩의 반대> 외 9편ㆍ<4월> 외 9편ㆍ<물의 식자공> 외 9편ㆍ<나는 지워지고 나는 남고> 외 9편ㆍ<작은 단편의 나무서랍> 외 9편ㆍ<비폭력 대화 중> 외 9편ㆍ<열세 살의 장갑> 외 9편ㆍ<초경> 외 9편ㆍ<누군가의 단검> 외 9편ㆍ<앙우가 있던 자리> 외 9편
즐거운 비명은 이럴 때 터지는 법이다. 심사위원들은 흠을 잡기 위해 읽기를 거듭해야 했다. 시적 완성도보다는 시적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당선작을 결정하였다. 당선작보다 시적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도 더러 있었으나 어쩐지 그 지점이 절정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자아냈기에 더 두고 보기로 했다. 이에 비해 당선작들은 다시 읽게 하고 집중해서 읽게 하는 시적 에너지가 있었다. 이는 그 시편들이 시인조차 다 파악하지 못하는 지점에 가닿아 있을 뿐 아니라 시의 음역이 깊다는 간접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고심 끝에, 2014년 《문학사상》 신인상에는 두 분의 신인을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당선작 <당신의 나날> 외 9편에서 심사위원들이 높이 평가했던 것은 유려한 호흡과 언어감각, 시를 구축해 가는 시의 조형성과 분방함이었다. 산문화된 어법과 서술성에 우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그 산문성을 시적 리듬과 서사로 구축해 내는 시적 재능이 미더웠다. ‘당신(너)’으로 표상화된 세계를 향한 좀 더 내밀한 천착에 대한 요구도 덧붙인다. 또 다른 당선작 <얼룩의 반대> 외 9편은 다분히 징후적인 시편들이었다. 그것은 단점인 동시에 장점이기도 했다. 지나친 죽음의식에로의 경도나 외래어 남용이 지적되기도 했으나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개성적이고 그 내면이 깊다는 점, 현실을 다르게 혹은 새롭게 명명해 내려는 시적 시도가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끝까지 심사위원들이 쉽게 놓지 못한 작품이 <중국 사원> 외 9편이었다. 시적 완성도가 높았으며 시적 진정성이 큰 장점이었다. 그러나 너무 다듬어져 있었고 너무 조심스러웠다. 좀 더 거칠게 내지르며 파탈擺脫의 지점들을 천착해 본다면 시적 열도와 넓이를 얻을 것이라 확신한다. 머지않아 동업자가 되어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격려의 말을 덧붙인다. 이외에도 <자연사박물관> 외 9편과 <사보타주 신발> 외 9편에도 심사위원들의 마음에 오래 머물렀음을 밝혀 둔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 젊은 두 신인 시인들에게는 격한 축하와 벼랑 끝을 향해 한 발 더 내달리라는 채찍의 주문을 덧보탠다. 본심에 올랐던 열두 분에게도 진일보를 기원하는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이래저래 다시 시작인 것이다!
심사위원 : 문정희 · 정끝별
—《문학사상》2014년 10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