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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가 뒤덮고 있다하여 천구만별(千龜萬鼈)이라고 불리우는 금정산에는 등산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범어3기, 금정8경 등 천혜의 자연경관과 신라시대(678년)에 창건된 천년고찰 범어사(보물 제434호)가 자리잡고 있고, 등나무 군생지(천연기념물 제176호)와 함께 부산의 역사와 문화, 민속이 살아 숨쉬는 관광명소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삼기 - 금정산 내 독특하고 이름있는 세 가지 암석을 총칭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원효석대, 자웅석계, 암상금정이 있다.
어산노송(魚山老松), 계명추월(鷄鳴秋月), 청련야우(靑蓮夜雨), 대성은수(大聖隱水), 내원모종(內院暮鐘), 금강만풍(金剛晩楓), 의상망해(義湘望海), 고당귀운(姑堂歸雲)
팔 경 - 범어사, 금정산 주변의 풍치림과 돌과 물, 그리고 청량한 바람 등과 같 은 자연이 일구어 내는 풍정 8가지를 가르켜 부르는 말이다. 범어사 경내에 들어서면 어산교 주변의 숲속 길 양쪽의 울창한 소나무 숲들이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볼 수 있는 데 이를 두고 어산노송 이라 부른다.
그리고 범어사 본당을 기준으로 왼편에 계곡 바위 위에 세워진 대성암을 볼 수 있는 데, 그 밑으로 조용히 흐르는 물소리와 계곡, 바위 등이 어울어져 지하수로 흐르는 물소리가 아름답 게 들린다고 하여 그것을 대성은수라고 부르고 있다. 그 곳 주변 계 곡을 따라 500m를 지나면 금강암이란 암자가 나타나는 데 그 곳의 주 변의 풍치림이 단풍으로 옷을 갈아입을 때 또 하나의 아름다운 경관이 하나의 장관을 이룬다 하여 이를 금강만풍이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범어사 본당 오른쪽 뒷편에는 청련암이 자리잡고 있으며, 밤중에 이곳 객사에서 대숲으로 내리는 빗소리의 운치가 독특하고 그 화음이 아름 답다 하여 이를 청련야우라고 부르고 있다.
청련암 뒷편에는 내원암 이 자리잡고 있는 데, 이 곳은 범어사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정적이 흐르는 곳으로 이 곳에서 큰절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가 신묘한 운 치를 자아낸다고 하여 이를 내원모종이라 부르고 있다.
범어사 동편 산록에 보면 계명봉이라는 산봉우리가 있는 데, 이 곳은 가을이면 금정산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풍이 드는 곳으로, 이를 일컬어 계명추월이라고 부르고 있다. 대성암에서 11km 떨어진 원효암 동쪽 능선에 돌출해 있는 곳에 의상대사가 동해를 보며 좌선한 곳인 의상대 가 있다.
이 곳은 동으로는 계명봉, 밑으로는 범어사가, 멀리 회동 수 원지가 둘러서 있으며 서쪽으로는 원효봉과 원효석대가 자리잡고 있으 며, 북으로는 고당봉이 자리잡고 있어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고 있다.
이러한 경치를 보고, 의상망해라고 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정산 정상인 고당봉은 가장 높은 곳인 만큼 고당봉에 흰 구름이 흘러가다 걸려 있는 그 운치가 압권이라 하여 이를 고당귀운이라 일컬으며 범어 8경중 마지막 8경으로 꼽고 있다.
범어사 입구 양쪽에 "금정산" "범어사"라 음각된 돌 비석이 말해주듯 범어사는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의 명패를 지닌 거찰답게 1천6백여년의 세월동안 민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면면히 담당해온 한국 불교의 태동과 발전 그리고 미래를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사찰로서 그 냄새가 물씬 풍겼다.
천년 노송과 비석들이 서 있는 길을 따라가면 일주문이 다가선다. 기둥이 일직선상의 한 줄로 늘어서 있다고 하여 일주문이라고 이름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진리의 길을 들어서는 첫 관문이다. 이 문을 지나면 천황문을 보고 왼쪽으로 따라 가면 대성암이 나온다. 여기서 '의상대'까지 11km 이다. 고당봉에서 흘러 내려온 범어천의 물은 많은 바위 틈으로 흘러 더욱 물소리가 유난히도 아름답고 맑았다. 산자락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면, 어울리지 않는 철조망이 처 있고 '원효암'이란 나무 팻말이 철조망에 걸려있다. 자연 그대로의 오르막 오솔길로 5분쯤 오르면, 또 원효암의 입간판이 보인다.
여기서 왼편을 보면 화강암 큰 바위무리가 어울려 하늘을 치솟고 산천을 덮고 있다. 이 바위를 타고 50m쯤 올라가면 6평 정도의 너럭바위에 다다른다 여기서 왼편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옆에 가로 20m 10㎝, 세로 1m인 10여도 경사진 타원형 화강암에 "의상대"라고 행서로 음각되어 누구나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사방이 트인 이곳의 전망은 남으로는 총총이 건물이 들어선 시가지, 그 너머 넘실거리는 푸른 바다가 아련히 보인다. 동쪽으로는 계명봉이 우뚝 솟아 있고 바로 밑에는 범어사가 품에 안길듯이 산자락에 싸여 있으며, 멀리 오륜대가 있었던 회동 수원지가 호수처럼 둘러서 있다. 서쪽으로는 원효봉, 그리고 암석이 매우 기묘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원효석대"가 그 옛날 원효대사의 일체유심조(一體有心造)를 깨달은 기상을 말해주고 있는 듯 하였다. 북쪽으로는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이 의상대를 지켜 보아 마음이 확트인 최고의 전망대이다.
여기 의상대는 꽤나 넓은 반석이 널려 있고, 바로 밑에는 천길의 벼랑을 이룬 요새에 듬성듬성 서 있는 곰솔로 둘러 싸인 절벽이다. 맑은 날 이곳에서 저 멀리 보이는 남해를 바라 보노라면 참으로 자연이 빚은 천하의 절경이다. 의상대사가 금정산에서 수도 하시던 석대가 바로 이곳 『의상대』이고 이 대에서 남해를 바라보는 절경을 사람들은 의상망해(義相望海)라고 먼 옛날부터 불렀다. 의상대에 올라 시인, 묵객들이 읊은 글들이 많이 전해지고 있다. 화엄대종사로서 의상은 이 대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수도를 하시면서 범어사를 창건하였다. 여기서 그 너머 보이는 남해를 보면서 의상대에 얽힌 아름답고 숭고한 전설을 하나 소개한다.
의상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위해 등주해안에 이르러 유리걸식 하던 중, 마침 어떤 청신사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다. 그 주인 집에는 얼굴이 예쁜 선묘(善妙)아가씨가 있었다. 선묘는 스님을 보고 단번에 사랑을 하여 의상스님을 사모하게 되어 마음속에 정의 불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의상의 구도심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더욱 굳어져 갔다. 그는 마음을 굳게 다짐하는 한편으로 선묘녀의 정념을 불제자로서의 계를 잃지 않고 어떻게 승화시키느냐 하는 것에 고심하였다. 선묘도 의상의 마음이 그토록 굳은 것을 알고 사랑을 갈구하는 자기의 마음이 출가사문의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의상 앞에 나아가 지금까지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참회하고 '불제자가 되어 세세생생 태어날 때마다 스님을 통해서 최상의 불법을 배워 공부를 성취하려 하오니, 스님께서는 하루 속히 거짓없는 깨달음을 이룩하여 불쌍한 저를 인도하여 주소서'라는 서원을 올렸다.
의상은 이 청을 받은 후 장안 종남산의 지엄을 찾아 화엄경의 높고 깊은 뜻을 전수 받았다. 그때 마침 신라의 承相 김인문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오자, 고종이 그를 가두고 신라를 치려는 계획을 보이므로 급히 의상을 통해 본국에 알려 이 위기의 수습을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의상은 급히 귀국하기는 하지만 자기를 위해 십여년 동안 뒷바라지 해온 선묘녀의 노고를 치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묘녀는 때를 맞추어 해변으로 나왔으나 스님이 탄 배는 멀리 떠나가고 있지 않는가! 그녀는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저의 이 한 몸 당장 죽는다 하여도 후회없이 의상대를 따르렵니다. 망망대해를 건너가는 스님을 보호하여 무사히 신라에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하고 그대로 바다에 몸을 던졌다.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여 도운다 더니, 그녀는 소원대로 용이되어 스님이 탄 배를 호위해 무사히 신라에 도착하게 하였다. 의상은 귀국하여 부처님 법을 펼칠 큰 원을 세우고, 선묘의 서원을 가상히 여기 금정산 절경이 석대위에 천년 전 의상대사가 섰다. 여기가 바로 "의상대"라고 불리는 천고의 경승지인 이곳이다. 여기 절벽 석대 위에서 솔바람 마시며 자거나 먹지도 않고 대자대비 부처님께 발원을 피워 올리며 무릎 굻고, 두 손 모으고 있는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불국정토의 유서깊은 곳이다.
팔송에서 범어사로 들어가는 아스팔트의 산길은 꼬불꼬불한 46곡각을 이루며 양쪽으로 소나무 숲이 늘어서 있다. 한껏 청량함을 맛보며 산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함께 올라간다. 금정산 동쪽을 조양(朝陽)이라 하면 서쪽을 석양(夕陽)이라 할까. 겨울이라도 그다지 차갑지 않은 아침, 막 잠을 깬 조양을 등에 지고
범어사 동쪽 계곡에 들어서면 차츰 소나무 숲이 촘촘해진다. 이제는 썩어서 밤색으로 변한 송화가 땅바닥에 소복소복히 떨어져 있다. 솔방울이 달린 솔가지에 조각조각 찢어진 하늘이 파랗게 걸려있다.
적막을 깨고 흘러가는 맑은 냇물을 가로질러 놓인 돌다리 어산교를 지나 비스듬히 숲속 길을 오르면 화엄도량인 범어사 입구 13줄의 석판이 깔린 길양쪽에 울창한 소나무들이 빽빽이 서있어 한층 산사의 아름다운 풍치를 자아내는데 옛 사람들은 이를 "어산노송"이라 불렀다.
어산교에 얽힌 낭백스님의 일화를 소개하면 조선 때 사찰에 부여된 부역수가 36종에나 이르러서 수많은 불자들은 부과된 부역에 종사하기에 바쁜 나날이었다. 스님은 이러한 당시의 사정을 뼈아프게 개탄하고 부역을 면하고 살아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설사 금생에 안되면 내생에라도 부역을 면하고 마음껏 공부할 수 있게 하리라 마음 먹고 부처님께 서원을 다하였다.
원력을 짓기 위해 기찰부근 큰소나무 밑에 샘물을 파서 식수 제공하고 밭을 개간하여 과일, 채소 등을 심어 행인에게 무한정 나누어 주고 짚신도 삼아서 보시 하였다. 그런데, 스님이 돌아가시게 되자, 스님은 그를 따르는 많은 불자들 앞에서 3가지 과제를 던져 주셨는데, 그중 세번째가 내가 죽어 다시 환생하여 나라의 고급관리가 된다면, 모든 관리가 다 일주문까지 와서 말에서 내리는 데, 자신은 어산교 앞에서 내리겠다고 하였다.
그뒤 스님은 열반에 들고 그 제자들은 늙었으나 낭백스님의 그 눈물겨운 원력이 성취될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던 어느날, 마침 순상국(巡相國)이라는 중앙의 높은 벼슬을 지닌 사람이 온다는 전갈을 받자, 범어사 스님들은 어산교까지 나가서 행렬을 지어 부복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일주문까지 말을 타고 올라 오는 상례를 깨고 어산교 앞에 와서 말에서 내리는 것이었다. 순상국 조공은 낭백스님 원력을 성취시킨 사람이므로 낭백스님의 환생임에 틀림이 없다고 믿었다.
소나무는 한자로는 '松'자를 쓰는데 이 자의 오른편 公은 이 나무가 모든 나무의 윗자리에 선다는 것을 뜻한다. 『본초강목』에 "소나무는 모든 나무의 어른(長)"이라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松'자는 중국 전설시대에 황제의 신하 창힐이 말들었다고 한다. 소나무의 상징은 목재로 이용하고 맑은 공기, 수리조절, 보건휴양 등 나무로 존재함으로써 제공하는 가치가 있으며, 붉은 비늘의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으로 보고 용의 상태에 적어들어 씩씩함, 굳은 절개, 깊은 부부의 사랑 등의 상징성을 말할 수 있다. 또 오래 사는 나무로 장수는 인간의 간절한 희구이고 보면 이 나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천년을 사는 학이 집을 짓고 오래 사는 거북이 엎드린다는 소나무는 초로와 같이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야할 인간의 동경 대상이 되었다. 오래 사는 물체에 인간은 영성 또는 신성을 부여했고 그 장엄에 굴복하고 그 위력의 그늘아래에서 평안하게 살것을 바랐다. 소나무 가운데는 서낭당 나무로서 치성을 올리는 대상이 된 것이 많다.
예로부터 부정을 박기 위해 문위에 건너 질러매는 금줄에는 소나무와 숯과 고추를 꼽았고 또 집안에 있는 부정을 좇기 위해 솔잎에 물을 묻혀 사방을 뿌리는 민간의 습속이 있었다. 이와같이 어산교의 낙락장송도 그냥 단순한 큰 소나무가 아니라 인력으로 막을 수 없는 사바세계의 부정을 막는 또 하나의 수호신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우리 나라의 이름난 사찰의 입구에는 대개 큰 소나무가 늘어서 있는데, 이는 하나같이 그러한 깊은 뜻을 지니고 있다.
범어사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에 왼쪽으로 걷다보면 대성암이 나온다. 이곳은 범어사 계곡, 바위와 물이 어우러져 지표수보다 지하수로 흐르는 물소리가 자연적 화음을 이루어 아름답게 들리는 곳이다. 어느 고고학자에 의하면 이 골짜기 바위들이 1,500만년전에 생겼고 바위의 모양으로 보아 주거지였다고 말하고 있다.
대성암에서 주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관조의 세계, 무아의 경지에 물의 화음을 음미할 수 있어 어느 누가 "대성은수" 하였을까? 원주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소 선방에서 참선을 하면 구들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조화를 이루면서 들리는 물소리는 더욱 선의 경지에 도달하게끔 불심을 자극하였다'고 한다. 위로 쳐다보니 "각해선림(覺海禪林)"이란 현판을 붙인 선방이 지금부터 10여년전에 새로 불사를 시작하여 건립된 건물이라 오늘날에는 화음을 이룬 물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담장 밖에서 흐르는 물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선방에서도 들을 수 있다.
대성암은 유명한 만성스님이 지도한 비구니 선원 중 전통있는 암자로 이름이 나 있다. 비구니계 큰 스님으로 알려졌던 만성스님은 포교도 불사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 해야 하는 것이 깨달음을 위한 자기 공부라 하시며 오로지 참선 수행만을 강조하였다. 그분의 가풍을 이어받아 절제있는 생활로 지금의 도감스님 또한 늘 근검 절약을 강조하시며 일꾼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불사에 임하시면서도 '이 뭣꼬(是甚摩)'의 하두를 놓지 않으시는 수행의 모습은 곁에 있는 스님들에게 생활철학의 가르침이 된다.
선가에서는 1년에 두 차례에 걸쳐 석 달씩 용맹 정진을 계속하는데 여름 선가는 4월 15일에서 7월 15일까지이고 겨울 선가는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이다. 이때 전국에서 중진 비구니 스님 70여명이 정진하는 자리를 같이하여 일심으로 수행에 임한다. '우리가 가야 할 해탈의 길은 멀고 험한 길이다. 때로는 게을러지고 혹은 견딜수 없는 역경에 시달리기도 한다. 쉼 없는 노력만이 나의 자세를 가다듬은 양약이 될 수 있다. 흐리멍덩한 마음가짐과 산란한 마음을 바로 잡고 끊임없이 열반을 추구하는 자세로 우리의 일상생활을 전환시켜야 한다. 바른 진리를 남에게 전해주어 고해에서 허덕이는 무명중생을 깨우치는 일은 부처님의 원력에서 비롯된 하염없는 자기반성의 채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마음의 허리띠를 조이며 쉼없이 흐르는 물소리, 대성은수와 함께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곳이기도 한다.
범어사 매표소를 지나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예불드리는 목탁소리를 들으면서 오른쪽 숲속 연화교를 지나면 "지장대도량"이란 큰 바위 탑이 우뚝 눈앞에 다가선다. 언제나 청정한 마음으로 세속의 티끌을 이내 씻겨가는 아축교는 실개천 〔絲川〕을 이루었는데 문자 그대로 가람으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해탈의 문이다. 또 들어가는 입구 4곳에 부처님의 원력의 가피로 석탑을 조성하였다. 금정산 고당봉에서 발원한 정화수는 상류 계곡에서 운반해 온 수많은 크고 작은 자갈들과 가닥 사천으로 갈라진 삼각주 지형이 마치 푸른 연꽃을 이룬 곳이라 하여해 청련암이라고 불렀다고 전하다.
금정산 계곡을 흐르는 개울물이 하나같이 유난히도 맑고 깨끗한 것은 산이 좋기 때문이겠 지만 또한 법당 앞을 흐르는 법수이기에 더욱 맑은 물일런지도 모른다.
계곡을 이루는 이 맑은 법수는 그 천연의 저형과 더불어 무량광불(無量光佛)로서의 한 송이 또 하나의 연꽃을 피우기 위해 끊임없이 흘러 왔으리라. 아마도 물조차도 지장대도량으로 그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오직 불심으로 참고 견디면서 만들어 낸 것이 저 유명한 '청련야우'가 아니었을까? 청련암 주위의 울창한 대숲, 사천의 맑은 물소리가 이룬 화음이 아름답다. 그 숲위에 내리는 빗소리도 계속 사천에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아무리 밤에 많은 비가 온다해도 빗소리는 흐르는 물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자연의 심오한 조화이리라.
지장대도량이라 법당에 지장보살을 모셨다는 경위를 선승 양익스님으로부터 들었다. 돌로 만든 불상을 금물로 옷을 갈아 입혔을 당시 '지장보살'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어 이 불상은 그 유명한 보관을 쓴 지장보살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그 내력을 전한다. 이곳은 또 하나의 영험한 지장대도량의 구세주이신 땅신이 오묘한 천지 조화의 수호로 씨를 맺게 하시고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원력을 베풀었기에 스님은 법당의 보살을 바탕으로 하여 지금부터 10여년 전에 법당 밖에 청동으로 된 높이 7m의 동양 최고의 불상 지장보살을 주조했다. 평소 불심이 깊기로 널리 알려진 양익스님의 일념이 결국 열매를 맺어 불상이 이루어졌으니 자비스런 보살을 우러러 보니, 밝은 광명과 따뜻한 미소,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워하여 그만 보는 이로 하여금 합장하고 그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우리 부산에서는 그 봉기의 횃불을 처음 밝힌 곳이 이곳 동래다. 3월 18일인 동래 장날에는 때 마침 범어사에 있던 금정학당 학생, 승려들에 의해 동래읍에서 다시 커다란 독립만세 시위가 벌어졌다. 3월 17일, 저녁 청련암의 기숙사에서 금정학당 졸업생 송별회에 모인 40여명의 학생들이 결사적으로 거사할 것을 굳게 다짐하였다. 이때에 독립선언서 1천매 태극기 큰것 1개와 작은 것 1천매를 준비하여 18일부터 19일까지 동래시장통에서 군중들과 시위를 하였는데, 마침내 일경의 무자비한 탄압이 닥쳐오고 주동인물 허영호외 33명이 검거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범어사 학생의거 사건』이다. 동래의 3·1운동 진원지가 범어사 청련암이었으며 이곳 금정산 기슭 호국의 암자, 지장대도량에서 구국의 비원을 불전에 맹세한 것은 거룩한 위국충절의 발로라할 것이다.
범어사 어산교를 지나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이내 연화교가 나타나고 계명암으로 오르는 비탈진 길이 앞에 다가온다 "계명암"아란 입간판 왼쪽에는 안내하듯 관세음보살 석상에 다소곳이 서 있다. 그 가파른 오솔길은 중안 계단을 33곡간을 지나면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숨이 차면 심호흡을 가다듬어 산아래를 보면 33천에 龍이 승천하는 모습을 실감케 하여 용을 타고 극락세계에 왔는듯한 느낌이다. 적당히 속가와 떨어져 있고 또 숨이 찰만큼 오르는 산길이 있고 서어나무 숲과 낙엽, 그늘과 샘물, 향내어린 바람이 있는 해발 500m에 위치하게 계명암이다. 범어사 동편 산록에 계명봉(601.5m)이라 불리는 삼각형의 가파른 산봉우리가 있다.
가을이면 금정산에서 가장 아름답게 단풍이 드는 곳, 범어사 산내암자의 하나인 계명암 앞에 서면 멀리 또 다른 동해 바다 검푸른 물결이 펼쳐진다. 범어사 경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계명암 문틀에 기대어 계명이란 이름을 생각해 본다. '계명'이란 '닭울음'이란 뜻이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의상대사가 이 부근에서 절터를 물색하던 중 한 밤중에 느닷없이 닭울음을 들었기에 이곳에 암자를 세우고 이런 이름을 붙였다. 또 이 암자에서 정진하던 납자들이 새벽 예불 때마다 하늘에서 울려오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고 그것으로 시간을 가늠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계명이란 고유어는 '새울이'를 한자의 훈을 빌어 차자한 것이다. 계명봉의 본 이름이 '새울이뫼'이다. 새울이란 동쪽에 있는 새우물〔新井〕이란 뜻이다. 계명이나 금정, 나아가서 동래란 지명도 모두 새울이의 차자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새는 날이 새는 동쪽이며 새롭게 하루가 시작됨을 뜻하면서 때로는 새(鳥)와 쇠(金)와는 동음어의 관계가 있다. 한편, 현대어 우물(井)은 본래 울(井) 혹은 천(川)에 물(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말이다. 따라서 새울이라고 할때 『울』은 운다는 뜻의 한자명을 취하여 계명이라 불렀던 것이다. 이 계명은 '날이 새는 동쪽이며 새롭게 하루가 시작됨에 닭이 운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 보덕굴은 지나 북극보전 앞으로 올라가면 기암괴석과 잡목이 어우러져 산세가 수려하고 5층석탑과 수탉의 모습 바위가 있는 곳, 앞이 확트인 전망대라 동해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와 일출과 월출의 광경이 그야말로 천혜의 절경이다.
아무리 목석 같은 사람이라도 계명암에서 바라보는 가을달의 아름다운 풍치를 보고 찬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풍류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신선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졌으리라.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다워, 멀리 동해바다가 내려다 뵈는 계명암에서 청사포 앞 바다에서 선남선녀에 의해 달님을 수평선 위로 떠받쳐 올려보내는 가을밤 하얀달을 바라보는 운치야 말로 속세를 떠난 천상의 극락을 연상케 한다. 이 "계명추월"이 아니어도 닭의 울음소리에 미망(迷妄)을 끼친다는 말 그대로 이 계명암은 오래 오래 중생 모두에게 지혜를 밝혀준 영험한 기도도량이 되리라 믿는다.
금정산 기슭에는 범어사에 딸린 12암자가 곳곳에 진좌(鎭座)하고 있다. 청련암을 지나 좁다란 길을 따라 올라가노라면 세속의 번뇌를 계곡물에 씻어 말끔히 흘려 보내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라는 듯 속삭이는 물소리가 들리는 돌다리를 지나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계곡에 자리잡은 내원암에 이른다. 內院이란 암자 중에서 가장 안쪽에 있는 곳 안집 또는 안방이란 뜻을 지녀 듣기만 해도 편안한 곳이며, 또한 부처님이 도솔천, 내원궁에 기거했으므로 마땅히 내원암이란 큰 스님, 대득 스님이 상주하는 곳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내원암은 선도량으로 여기에는 제일선원이란 현판이 달린 선방이 있다. '한국불교의 얼을 새로이 심고 새로운 불교 이념의 선풍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신 겸허, 용성, 만해선사가 내원암에서 선의 생활화를 모색하였다'고 인각스님은 전한다. '정진수행으로 마음을 충전하면 저절로 戒(참선), 定(안정), 慧(지혜)의 삼학(三學)이 충만해진다. 미혹해서 잃었던 내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그 때가 『戒』이고 그렇게 되어 편안해진 마음이 『定』이 있고, 정이 있을 때에 『慧』가 살아나는 것이다. 수도자적인 보살행의 실천은 마음을 한데모아 부처님께 서원하면 念跛작용으로 깨달음의 길이 열린다'고 스님은 힘주어 말씀한다.
법당에는 『대자비전』의 편액으로 관세음보살이 흰 연꽃 위에 서 흰 옷을 입고 한 손에 불사의 감로수를 담은 감로병을 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바세계에 나타난 것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자비의 손길로 끝없는 평온으로 인하도 하는 천수관음이 구세주로 모신 사찰의 전각이다. 내원암의 저녁 예불 때 느껴오는 상큼한 공기는 법당을 향하는 참배객의 두 손을 다소곳이 모으게 한다. 이즈음 "쾅더응―" 멧부리를 울리는 28번의 종소리가 울려온다. 28천의 모든 하늘나라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며 "더웅덩―" 긴여운을 남기면서 계곡을 따라 멀리 멀리 펴져가는 것이다.
모든 중생이 어두운 마음을 열어 지혜로 밝히소서… 멀리 멀리 하늘 저 끝까지 울려 퍼지고 깊이 깊이 땅속 도산지옥까지 스며드는 듯한 그 종소리, 산으로 둘러싼 내원암의 저녁 종소리는 계곡을 따라 메아리를 이루며, 은은히 울려오는 바, 이 범종소리는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고 사람의 마음을 부처님의 품안으로 안내하는 이름할 수 없는 신묘한 운치를 자아내 옛 사람들은 이를 특별히 "내원모종"이라 하여 귀히 여겼다. 오늘도 이 종소리는 탐욕과 질시와 어둠으로 가득 찬 세속의 때묻은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해 중생계 속으로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다.
범어사 계곡의 물이 줄기차게 흐르는 것처럼 산 또한 첩첩하게 쌓여 골을 이룬다. 비록 밀생하였을 망정 제 줄기가 아주 곧게 쭉쭉 잘 뻗어 올라서 자연경관으로는 소나무 의장대라는 말이 실감이 날 정도다.
범어사 입구 왼쪽 골짜기를 따라 500m 남짓 올라가면 천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기암괴석들의 틈으로 흐르는 물소리가 은수(隱水)는 아니더라도 천갈내 만갈래 오묘한 자연의 음악인 선율을 이루면서 흐르고 있다. '성불 하세요' 라고 새겨진 금강암 입구의 표지판를 보고 오른쪽으로 바윗길로 나서면 동자스님상이 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일주문의 주련에는 '즐거움 괴로움도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라고 써 있다. 이문 앞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이들 주련의 글귀를 한번 더 음미하면서 문을 들어섰다.
'파괴되지 않는 지극한 보배의 모습이여/ 그 본성은 항상 사물을 파괴할 수 있네/ 이로써 반야는 셋이면서 셋이 아닌데 비유하여/ 통(通), 별(別) 모두 다함이 제도합니다'는 금강에 비유이며, "반야 바라밀"은 법이다. 금강은 그 가운데 가장 존귀하기 때문에 금이 강한 성품이라는 뜻에서 금강이라 말한다.
1899년 10월 1일 처음으로 임시선회를 금강암에 세워 임시선사를 조성하고 이때 모인 대중은 수옹혜윤, 성월일전 등화상 4분과 휴진 등 세 수좌와 더불어 일곱 분이었다고 한다. 금강암은 독특한 지형 위에 놓여 있는데 법당은 주변의 건물보다 3m높은 석단 위에 자리잡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을 중생의 갈망을 쫓다 그 속에서 스스로를 닦아 가는곳,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요, 우리의 기도가 금강삼매 다시말하면 최후에 일체의 번뇌를 끊고 궁극의 마음 상태에 이르는데 있는 것이다.
현판 옆기둥 들보에 한 쌍의 용조각 수법은 생동감이 흘러 넘친다. 내부의 목조 보개 및 불단의 조각은 매우 섬세하고 정교하게 되어 있다. 석가모니, 지장, 신중정화 조각, 단청의 보상화문, 연화문의 그림, 내벽에 채워진 벽화, 하나 같이 격조 높은 옛 사람의 슬기와 불심이 어우러진 수작이었으며, 건물의 짜임새와 탱화가 풍기는 독특한 무늬로 하여 과연 이곳은 『금강만풍』의 아름다운 경관을 절로 연상시켜 고도 남음이 있었다.
늦가을철에 이곳에서 보는 풍치가 바로 금강만풍 진미를 보여 주는데, 금강암에서 남쪽의 능선 계곡, 동쪽의 계명봉은 소나무 뿐만 아니라 미모의 참나무과의 낙엽수들이 이루어 만산홍엽으로 불타알로, 그 비장한 경치는 범어사 계곡물에 비치고 그 물도 단풍이 들어 불게 타올라 붉은 계곡을 이루는데, 천하의 절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은 자연의 위대한 파산(破産)을 보여주다. 그냥 파산하지 않고 모든 녹음은 불바다로 불타오르는 최후로서 파산을 한다. 네로가 로마를, 진시황이 수천만권의 책을 불질렀던 그 장절한 광태(狂態), 아무리 불바다로 어우러진 장관이라고 한들 자연의 파산에 비교할 수 있으랴! 늦가을 단풍속의 천연 도량 금강암에서 사방을 보면 울울창창한 밀림지대인 것이다. 노송과 잡목 넝쿨이 단풍나무들과 어우러져 빨강, 노랑, 파랑 3원색의 조화를 이루는 장엄한 자연의 큰잔치가 단풍으로 불타오르고 있는 것을 보고 와! 어머를 연발하면서 탄성을 지른 것은 또한 불법이 자아낸 또 하나의 인간본연의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금정산 안내에 관한 옛 문헌에 금정제일이라고 예찬한 "금강만풍"은 신선의 선남선녀만이 단풍놀이를 했다는 전설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해동 제일의 진산인 금정산을 빼곤 부산을 생각할 수 없고 고당봉(姑堂峰) 없는 금정산은 말할 수가 없다. 금정산 주봉인 고당봉은 범어사의 배산이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을 바라보고 있으며, 봉긋한 연꽃송이 봉머리에 걸려 있는 흰구름이 흘러가면서 하늘문이 열리는 듯하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도 구름이 덮였다 열렸다 하기에 어느 한 경치치고 그 모양 그대로 오래도록 볼 수 없다.
방금까지 보이던 까마득한 골짜기에 문득 안개 구름이불끈 솟아올라 어느새 골안을 덮고, 고당봉을 스치어 싸고 돌면 마치 흰 파도가 몰아치는 바닷속에 뜬 섬과 같이 그만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느새 구름이 흩어지면 정상도 보이고 짚은 안개속에 파묻힌 골짜기도 드러내는 기상천외의 자연조화는 『고당귀운』의 비경이 아닐 수 없다.
등마루를 따라 오르막 길로 가면 용호굴이 있고 그 위에 정상이 있다. 거기에는 『금정산 고당봉』을 새긴 석주가 우뚝서 있다. 주위에는 기묘한 큰 바위들이 모여 있는 불쑥 높아진 곳, 금정산의 최고 전망대이다. 북으로 장군봉, 남으로 상계봉, 동으로 계명봉, 서로는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이 바라보이고 수 많은 골짜기들, 동해바다까지 한 눈에 바라다 볼 수 있어 참으로 웅대하고 장쾌하다. 산꼭대기에 위태로운 바위들이 바람만 세차게 불어도 떨어지고 무너지고 부러질 것 같건만 바위 벼랑을 후리는 바람에도 윙~윙~소리를 낼 뿐 끄떡하지 않는다. 중향성(衆香城)의 바위 경치는 보석이 반짝이는 듯 유난히도 빛나는 화강암류이다.
『범어사창건사적』중 창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문득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대왕이시며 태백산중에 의상이라고 하는한 화상이 있는데 항상 3천명의 대풍을 거느리고 화엄법문을 연설하고 화엄신중과 40법체 그리고 제신 및 천왕이 항상 떠나지 않고 수행한다. 동국해변에 금정산이 있고 그 산정에 높이 50여척이나 되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바위 위에 우물이 있고 그 우물은 항상 금색이며 사시사철 언제나 가득차고 마르지 않고 그 우물에는 범천으로부터 오색 구름을 타고 온 금어가 헤엄치며 놀고 있었다. 대왕께서는 의상스님을 맞아 함께 그 산의 금정암 아래로 가셔서 7일 7야 동안 화엄신중을 독성하면, 그 정성에 따라 미륵여래가 금색신으로 화현하고... 동해에 임하여 제압하여 왜병이 자연히 물러갈 것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놀라 깨어났고 아침에 제신들을 불러 꿈 이야기를 하고 사신을 보내 의상을 맞아 오게했다. 의상과 함께 친히 금정산으로 가서 7日 7夜를 일심으로 독경했다는 곳이 고당봉이다. 고당(姑堂)이란 '원래 불가에서 부처님의 화엄일승인 최고의 법문을 높은 깃대에 세웠다' 는 의미로 금정산 제일 높은 봉우리, 범어사 배산에 기치를 꽂아 세웠다는 뜻이다. 법의 당을 높이 세워 운집한 사부대중을 위해 일승법문을 강설한다는 의상대사(625 ∼ 702)의 뜻에 따라 붙은 명칭이 "고당봉(姑堂峰)"이다.
『범어사서체유전』산령축(1920)에 의하면, 밀양 박씨가 많은 보시로 화루보살이 되어 불가에 귀의하고 절 살림을 맞아왔다. 어느날 보살은 '내가 죽으면 화장을 하고 고당봉에 고모영신을 모시는 사당을 지어 고모제를 지내 주면 고당봉의 수호신으로 범어사를 돕고 지켜 주겠다'고 유언을 남기고 돌아 가셨다. 스님은 유언 따라 고당봉에 사당을 지어 1년에 2번씩(1월 15일,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니 범어사가 번성한 사찰이 되었다고 한다. 오늘도 고당 박씨 할매는 고모영신의 인격신이 되어 부산의 호국 영산 진호산에 생산과 풍요를 안겨주는 선신께 원력을 받기 위해 기도를 밤낮 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