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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주나씨남간파 원문보기 글쓴이: 나씨아줌마 ,1955.직,남.서울
이승만 [李承晩] 1875 황해 평산~ 1965. 7. 19 미국 하와이. 독립운동가, 초대 대통령. 초명(初名)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 가난한 선비 이경선의 외아들로 태어나 한문을 배운 이후 1894년 배재학당에 입학, 이듬해 8월에 졸업하고 모교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일본인이 명성왕후를 학살하자 이를 보복하기 위한 사건에 관계되어 지명수배를 당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후 그리스도교도가 되고 개화사상에 심취해 서재필이 주도한 독립협회 간부로 활동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했으며, 〈협성회보 協成會報〉의 주필로 재직중 날카로운 필치로 정부를 비판했다. 독립협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중 정부전복 혐의를 받고 1898년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1904년 민영환의 감형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된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으로 가 미국의 대통령 T. D. 루스벨트에게 일본의 한반도 침략 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했다.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여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YMCA)를 중심으로 후진양성에 힘썼다. 1912년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나 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같은 해 미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기 위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건너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서구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는 독립외교론을 주장했다. 이런 외교론은 박용만 등이 주장하는 무장투쟁론과 대립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민 사이의 반목과 분열을 빚게 되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초대 국무총리로 선임되었다. 이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스스로 대통령 행세를 하다가 1920년 상하이로 돌아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전횡적이고 독선적인 행동으로 1922년 6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불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결정에도 상관하지 않고 임의로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으며 워싱턴과 하와이 등지에서 외교론을 전개하는 등 기회가 올 때마다 외교교섭을 벌였으나 별다른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브리태니크자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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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쪽에서 내려다 본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영부인의 합장묘)
얘들이 어렸을때 답사할대는 너무도 형편 없어서 (대한민국의 대통령)묘가
맞나 싶었는데 박대통령 묘가 조성되면서 새단장을 했네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업전문학교를 마치고, 스코틀랜드에 유학하여 국제통역과 속기사의 자격을 취득했다. 1933년 2월 당시 발간된 서적을 통해 한국을 처음 알게 되었으며, 어머니와 함께 유럽을 여행하던 중 이승만을 만났다. 이후 어머니를 비롯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34년 10월 8일 미국 뉴욕의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윤병구 목사와 존스 헤인스 목사의 공동 주례로 이승만과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녀는 한국 독립운동가 및 정치가의 아내로서 굴곡이 많은 길을 걷게 되었다. 이승만의 내조자로서 미국 본토와 하와이 일대에 있는 청소년들의 민족교육과 독립운동에 힘썼으며, 한인기독학원의 교사로서도 큰 공헌을 했다. 1945년 8·15해방 뒤에 한국에 왔으며,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이후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검약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조용한 생활을 했다. 1960년 이승만 하야 후 그가 죽을 때까지(1965. 7. 19) 헌신적으로 남편을 돌보아 미국에서 '베스트 와이프'(Best Wife)라는 별칭을 받았다. 남편과 사별한 뒤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돌아가 지내다가 1970년 5월 16일 환국하여 이화장(서울 종로구 이화동)에서 양아들 이인수 가족과 함께 생활했다. 이화장에서는 다정하고 이해심 많은 한국의 할머니로 살았으며, 한 양산을 30년 동안 사용할 정도로 늘 검소해 일반국민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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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나주나씨남간파 원문보기 글쓴이: 나씨아줌마 ,1955.직,남.서울
첫댓글 이승만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초대 대통령으로 , 태종 이방원의 맏아들인 양녕대군의 후손으로서, 그의 다섯째 아들인 장평도정 이흔의 15대 손입니다.
아버지는 이경선이며, 두 형과 두 누나는 죽어서 사실상 6대 독자가 되었습니다.
자식이 없어서 효령대군의 후손이자 이기붕의 아들인 이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정부수립후 1948~7~1960 ,4)월까지 1,2,3대를 역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