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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경기도 광주시 홈피 인물란에 나오므로, 광주 출신은 맞는 듯하나, 광주에는 광주안씨, 순흥안씨 모두 있으므로 어느 문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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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가객으로 알려져 있고 1816년 경 태어났으며, 박효관의 제자이자 "가곡원류"라는 가집을 박효관과 함께 편찬하고, 개인 가집인 "금옥총부"를 편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외 정보를 알 수가 없어 이렇게 문의를 드립니다.
"금옥총부(金玉叢部)"에는 자성무 호주옹(字聖武 號周翁) 등의 정보가 있고, 장지연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는 광주인이라고 하고, 어떤 가집에는 "순흥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http://cafe.daum.net/ahnjustice/PqtJ/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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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gjcity.go.kr/01_cityhall/02_history/01_04_12.asp
가인 안민영(安玟英)
- 자는 성무 또는 형보이며 호는 주옹이니 이조 철종 때 광주에서 태어나 뛰어난 가인이었다.
그는 서자 출신으로 벼슬길이 여의치 않자 과거를 단념한 후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하여 노래를 즐겨 불렀다.본래 타고난 천부적인 재질이 있어 노래를 썩 잘 불렀고 또한 술을 잘 마셨으며 놀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고종 13년(1876)에 그는 그의 스승 박효관과 더불어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옛날시가를 찾아 모아 이조 역대
시가집「가곡원류」를 편찬 간행하였으니 오늘날 이조 가곡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시가 외에도 글을 즐겨 썼으니 「가곡원류」를 편찬 간행하였으니 오늘날 이조 가곡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그는 시가 외에도 글을 즐겨 썼으니 「마옴만필」「금옥총서」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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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oreandb.nate.com/history/people/detail?sn=4784
안민영(安玟英)에 대하여
안민영(安玟英)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의 가객. 자는 성무(聖武)·형보(荊寶), 호는 주옹(周翁).
서얼출신으로 1876년(고종 13)에 스승인 박효관(朴孝寬)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하고, 자신의 시조 〈영매가 #영02歌〉 외 26수도 함께 실었다. 그와 동배의 가객으로 홍진원(洪鎭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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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곡원류 [歌曲源流]
금옥총부 [金玉叢部]
조선 철종 때의 가인(歌人) 안민영(安玟英)의 개인 가집(歌集).
구분 필사본
저자 안민영
시대 조선
소장 서울대학교 도서관
필사본. 1권 1책. 1881년(고종 18) 간행.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주옹만영(周翁漫詠)》이라고도 한다. 국한문혼용체인 저자의 자작시조(自作時調) 180수를 수록하였다. 책머리에는 《능가재만록(能歌齋漫錄)》에서 옮겨 실은 <가곡원류(歌曲源流)> <논곡지음(論曲之音)>과 자서(自序)가 있으며, 자작 시조 l80수를 그 곡조에 따라 분류하여 각수(各首)마다 창작한 동기와 날짜 ·장소 등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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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가객 안민영 인물의 자료 구합니다.pauldemian 2008.06.08 0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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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지식인 오픈사전 내용입니다.
안민영 그는 누구인가?
안민영에 대한 자료가 너무 부족하여 안민영에 대하여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아서 여기저기 자료를 모아 이렇게 씁니다.
안민영에 대한 자료가 없는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를 않습니다. 그는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정사에도 기록이 없습니다. 알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작품 금옥총부나 여기저기 자료를 짜집기 하여 알아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금옥총부에 의하면 그는 1816년 순조 16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알 수 있지만 언제 죽었는지는 자세히 남아 있지 않으며 고종 22년까지 그의 작품활동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70세 이상까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는 광주 사람으로 대원군으로 부터 구포동인이라는 시호도 받았습니다. 운애 박효관의 제자로 그와 함께 가곡원류도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조계 문학사상 개인가집 금옥총부를 남겨 근대 조선 최후의 시조계를 화려하게 장식한 사람이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운치가 있었습니다. 낙산낙수 하고 공명을 구하지 않아 떠다니는 구름처럼 얽매인 데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가창에는 능통하지 못하였으나 시조를 잘 짓고 음률에 능통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대원군의 측근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의 아들 우석 이재황의 비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생애는 총 4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기는 그가 태어나서 그의 스승 운애 박효관을 만나기 전까지의 시기 즉 24살까지의 시기 입니다.
그의 어린시절 자료는 전무한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유년기를 보냈는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 시대적 상황을 짐작해 봄으로써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추측해볼수는 있습니다. 그의 유년기는 많은 시련, 고난이 이었던 시기 입니다. 그 당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는 곧 삼정의 물란을 가져와 농민들은 당연히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화전민이나 소작농으로 몰락하였으며 또는 수적이나 산적 등 도적이 되어 민심이 극도로 어지러웠습니다.
사회는 계속 불안하여 청주에서는 정부를 저주하는 사건등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도 겹쳐 물난리로 많은 사람이 죽는가 하면 질병이 돌아 역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또 심한 병충해가 돌기도 하였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천도교가 하층민을 중심으로 확산되다가 극기야는 기해사옥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기해사옥은 천도교 박해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따라서 주옹은 이런 사회적 혼란으로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으며 자랐으리라 생각됩니다. 또한 그는 명문사대부가 아닌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그에 대한 회의나 좌절감으로 인하여 그가 가객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2기는 24세부터 대원군이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그의 나이 25~48세의 기간입니다. 안민영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사람은 운애 박효관과 대원군입니다. 박효관을 만나 그의 인생의 나침반을 정했다면 대원군은 그의 인생을 꽃피게 해준 사람입니다.
그는 27세의 나이로 호남기행을 시작하여 37세때는 영남기행을 마치고 문경의 조령을 넘어오는 사이에는 다시 10년이 47세에는 강원도를 순방했다고 합니다. 결국 그 시기에 안민영은 전국을 유랑하면서 여러 당대 가객들과 교류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불분명한 점은 운애 박효관이 안민영의 유람에 함께 했다는 자료가 없어서 박효관은 서울에 있고 안민영만 전국을 유람했는지에 대한 의심이 갑니다. 그리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에 눌려 살았던 대원군과의 만남도 이때 있었을 것으로 여겨 집니다.
3기는 고종 즉위 원년부터 대원군이 하야하게 되는 10년간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는 대원군의 도움을 받아 활발히 창작에 몰두한 시기입니다. 안민영의 작품은 50세 이후에 지어진 것이 많은데 이런 이유 때문으로 보여 집니다. 매화사 8수를 지었으며 대원군과 우석상서에게 자기의 회갑연을 성대히 받았도 또한 박효관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했으며 자기 시조집인 금옥총부의 원본을 수찬하기도 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슬픈 일도 있었습니다. 부인과 이별하고 병인 난으로 인해 피난살이를 경험했으며 대원군의 축출과 함께 자기의 가각 인생도 생기를 잃어 ㅆ르쓸함을 느끼고 동지들 또한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와중에서도 이 기간 중에 평안도를 유람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안민영에게 있어 이 시기는 다사다난한 시기였다고 보여집니다.
4기는 대원군이 하야하고 나서 그 이후로의 시기입니다. 이 기간은 66세 이후의 노년기로써 다가오는 죽음과 지나간 삶에 대한 반성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도 소량이나마 작품을 썼고 금옥총부의 보완 작업도 꾸준히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시기에 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걸 보면서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죽음을 인정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과 회의 생의 정리를 했던 기간으로 보여집니다.
아래는 안민영의 대표작 매화사 8수입니다.
매화사-안민영
[1]
매영(梅影)이 부딪친 창에 옥인금차 비겨슨져
이삼 백발옹은 거문고와 노래로다
이윽고 잔 들어 권할 적에 달이 또한 오르더라
* 매영 : 매화나무 그림자
* 옥인금차 : 어여쁜 여인의 금비녀
* 비겨슨져 : 비껴 섰구나
* 백발옹 : 백발노인
[2]
어리고 셩근 매화(梅花) 너를 밋지 아녓더니,
눈 기약(期約) 능(能)히 직켜 두셰 송이 피엿구나.
촉(燭) 잡고 갓가이 사랑할 제 암향조차 부동(暗香浮動)터라.
* 아녓더니 : 않았더니
* 눈기약 : ① 눈이 올 때 피겠다는 약속, ② 꽃 눈을 틔워 믿게 하던 기대
* 촉 : 촛불
* 암향조차 부동터라 : 그윽한 향기가 떠돌더라(고결한 성품을 의미)
[3]
빙자옥질(氷姿玉質) 이여 눈속에 네로구나
가만히 향기 놓아 황혼월을 기약하니
아마도 아치고절은 너뿐인가 하노라
* 빙자옥질 : 얼음이나 옥처럼 맑고 고운 자질
* 네로구나 : 너로구나
* 황혼월 : 저녁 달
* 아치고절 : 알뜰하고 곱고 높은 절개
[4]
눈으로 기약터니 네 과연 픠엿고나
황혼에 달이 오니 그림자도 성긔거다
청향이 잔에 떠 이시니 취코 놀려 하노라
* 성긔거다 : 성기었다
* 청향 : 맑은 향기
* 이시니 : 있으니
[5]
해 지고 돋는 달이 너와 기약 두엇던가
합리(閤裡)에 자든 곳이 향기 놓아 맡는고야
내 엇디 매월(梅月)이 벗 되는 줄 몰랏던가 하노라
* 합리 : 침실 안
* 매월 : 매화와 달
[6]
바람이 눈을 몰아 산창(山窓)에 부딪히니
찬 기운 새어 들어 잠든 매화를 침노한다
아모리 얼우려 하인들 봄뜻이야 앗을소냐
* 주제 : 봄 기운을 전하는 매화
* 산창 : 산가(山家)의 창
* 얼우려 하인들 : 얼리려고 한들
[7]
저 건너 나부산 눈속에 검어 우뚝 울퉁불퉁 광대 등걸아
네 무삼 힘으로 가지 돋쳐 곳조차 저리 피였는다
아무리 석은배 반만 남았을망정 봄뜻을 어이하리오
* 나부산 : 중국 광동성에 있는 산
* 광대 등걸 : 고목이 되어 툭툭 내민 나무등걸
* 곳조차 : 꽃마저
* 피였는다 : 피었느냐
* 석은배 : 썩은 배
[8]
동각(東閣)에 숨은 꽃이 철쭉인가 두견화인가
건곤이 눈이어늘 제 엇지 감히 피리
알괘라 백설양춘(白雪陽春)이 매화 밖에 뉘 이시리
* 동각 : 동쪽에 있는 누각
* 두견화 : 진달래꽃
* 건곤 : 온 천지
* 알괘라 : 알겠도다
* 백설양춘 : 겨울인데도 봄빛을 보이는 것
장지연 : 열전 <일사유사(逸士遺事)>
<일사유사(逸士遺事)>
한말의 언론인ㆍ지사(志士)로 활약했던 장지연(張志淵.1864∼1921)이 엮은 열전(列傳). 6권 1책. 국한문혼용체.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어우야담> <진조속기(震朝續記)> <호산외기(壺山外記)> <앙엽기(盎葉記)> <겸산필기(兼山筆記)> <숭양지(崧陽志)> 등 여러 책을 참고로 하여, 신분제약이 철저했던 사회에서 신분의 굴레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주로 이름을 남긴 중인ㆍ하층 계급 인물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밝혔다.
그 내용은 주로 조선시대 중인계층의 활약상을 묶은 것으로, 기인(奇人)ㆍ화가ㆍ문인 등을 비롯하여 권5의 효열(孝烈), 권6의 재녀(才女)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거의 무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조선조 양반관료시대에 신분적 한계로 말미암아 타고난 재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던 인물들의 구체적인 활동상을 밝히고 있다.
자료가 많지 않은 중인ㆍ하층 계급의 실태를 파악하고 조선시대의 사회상과 신분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그러나 야사류에서 자료를 모은만큼 내용상 확대, 과장되고 첨삭된 부분이 많다는 한계가 있어 엄격한 사료비판 작업이 요구된다. 장지연 사후(死後) 이듬해인 1922년에 유작으로 출간되었다.
[출처] 장지연 : 열전 <일사유사(逸士遺事)> |작성자 재봉틀
첫댓글 댓글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올린 내용은 저도 책이나 인터넷에서 이미 확인한 내용들입니다. 혹 순흥 안씨 족보의 실제 내용이나 집안에서 내려오는 문서, 내용, 정도 등을 기대했는데,,, 역시 그런 정보는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분은 돌아가신 연대도 확실치 않고 1885년 경을 이후로 활동을 전혀 알 수 없어 그 행적이 묘연한 상태입니다. 혹 작은 단서라도 있다면 알고 싶은데 역시 힘드네요. 그래도 이렇게 관심가져 주시고 답변도 달아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전자족보로 모든파별(순흥1,3파) 검색을 하였으나 자료가없습니다. 더나은 자료를 찿아보도록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