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순수문학 수필부문 전미자 신인상 수상
스승과 같은 어머니 /전미자
나의 어머니는 대 지주의 딸로 태어나서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다
다만 10살이 되어도 부모님은 신교육 학교를 보내지 않고 예의범절과 바느질, 수놓기 등 소위 여자의 미덕인 여공(한문) 만으로 가르치셨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채에서 오라버니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너무도 글이 배우고 싶어 부모님을 졸랐다. 그랬더니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여자가 글을 배워서 무엇에 쓰겠다고 그러느냐? 그렇게 배우고 싶으면 내일 밤부터 사랑채로 나와 글을 배우거라" 라고 어렵게 허락을 하시더란다.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하며 저녁이 되기만을 기다렸다가 사랑채로 나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왜 할아버지는 '내가 너에게 글을 가르치기는 한다만, 출가하고 나서 친정에 편지는 보내지 말라' 하시고 매일 밤 여필종부라고 붓으로 한 장씩 쓰게 하셨다니 남존여비의 봉건사상 얼마나 철저했었는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옛날 여인네들은 시집살이 하면서 겪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을까? 사람은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살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에 비하면 요즘 여자들은 천국에서 사는 거나 다름없다.
어머니의 큰 오라버니는 그러니까 나의 큰외삼촌은 그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는데
일본 경찰에 잡혀가서 고문을 받고 그 후유증으로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 말씀을 할 때마다 눈물을 닦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외가 어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통했을까,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어머니가 한글과 천자문을 다 배우고 나서 출가하셨는데 글을 배운 며느리를 봤다면서 시어머니 (나의 친할머니) 는 무척 기뻐 하셨단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며느리를 불러놓고 옛 이야기책을 읽으라고 하셨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읽은 적도 있었는데 그렇다 보면 잠이 부족하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내가 왜 글을 배워서 이런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가, 해야 한적도 있다면서 웃으셨다.
그러면서 '나는 글을 배우는 게 너무 재미 있어 좋았는데 너희들은 왜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하느냐' 고 가끔 꾸짖기도 하셨다. 내 아이들은 공부하라 하지 않아도 알아서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행이라 여겼다. 결혼6년 되던 해 둘째 며느리인 어머니는 분가하셨고 수놓는 일을 배우기 위해 지금의 자수학원 같은 데를 다니셨다. 어느 날 수 놓은 것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 놓았었다. 그 액자 속에는 암 닭과 숫 닭 한 쌍과 예쁜 병아리들이 들어 있었다. 우리 가족 중에 아버지를 비롯해서 어머니, 나, 내 막내 여동생이 희한하게도 모두 닭띠이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 속의 단란한 닭 가족은 바로 우리가정을 표현한 것이었다.
어머니 바로 아래 여동생은 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당시로써는 그게 흉이었다.
동네남자 아이들이 여자가 학교에 다닌다면서 돌을 던지며 놀려대서 비가 오는 날은 물론 안 오는 날에도 검정우산으로 몸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학교에 다니는 동생을 무척 부러워 하셨다. 그래도 어머니는
다행히 서당에서 글을 배웠기에 많은 책을 읽으셨고 그로 말미암아 나에게는
좋은 스승이 되어 주셨다. 또한 어머니는 절실한 천주교 신자셨다. 성당에서
신부님을 보면 사십오도 각도로 절을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옛날이야기도 많이 해주셨고 천주교 교리도 가르쳐 주셨다. 소년성서에 나오는 이야기도 자주 들려 주셨기에 나도 어려서부터 신앙심을 키워왔고 학교에서도 남에게 뒤 떨어지지 않는 학생으로 공부도 열심히 잘 할 수 있었다.
십자고상앞에 앉아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리시던 어머니, 언니가 결혼한 후부터
기도하는 시간이 더 길어 지셨던 어머니, 나를 위해서는 얼마나 자주 기도 하셨을까. 보지 않아서도 알 것 같다. 지금은 천국에서 복락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는다. 사랑채에서 어머니와 함께 글을 배운 작은 외삼촌은 서울의대 1회 졸업생이며 일본유학도 다녀왔고 황해도 도립병원 원장도 지내셨다.
그 외삼촌이 어머니에게 너무 짜고, 맵고, 더운 음식을 몸에 안 좋으며
음식은 서른 번 이상 씹어 먹어야 한다고 간곡히 권했다. 그러자 어머니 또한 나에게 외삼촌의 권고 그대로를 가르치셨다. 그로부터 나는 음식을 천천히 먹는 습관을 지금도 버리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여러 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는 너무 천천히 먹어서 조금 미안할 때도 있다. 어머니는 꽃을 참 좋아하셨다. 마당에 작은 꽃밭을 만들어 놓고 각각의 꽃들로 집안을 아름답게 했다. 분꽃을 비롯해서 채송화, 봉선화 등이 시샘하듯
서로 예쁜 자태를 자랑하는 꽃밭에 아침마다 정성 들여 물을 주시던 어머니,
담장에 곱게 피어있는 나팔꽃을 타서 책 갈피에 넣어 말리기도 하셨다.
내가 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다음과 같은 설화를 들려 주신적이 있다.
한 처자가 양가에 시집을 갔다. 그러나 시집은 가난했고 남편은 글만 읽는 벽면서생으로 무능하기 짝이 없었다. 여인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하루는 여인이 냇가로 빨래를 하러 간 사이에 소나기가 퍼 부어서 불이 나게 집에 돌아와 보니 안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비에 흔적도 없이 떠 내려 갔는데도 남편은 집안에 앉아 책만 읽고 있는 게 아닌가 바느질 삯으로 받아온 보리였다. 당장 저녁끼니를 굶어야 한다. 화가 난 여인이 더 이상 못살겠다며 보따리를 싸 들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재혼하였지만, 오래 살지 못하고 다시 홀몸이 되었다.
그러다가 길에서 사또나리 행차를 만났다. 숙이고 있던 고개를 살며시 들어보니 그 무능한 전 남편이 사또 교자에 앉아 있었다. 그러니 여자는 한번 결혼하면 끝까지 남편을 섬기며 살아야 하느니라 내가 결혼생활을 하는 동안 몹시 상 한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바로 그 설화를 떠 올리며 꾹 참고 견디어 냈었다.
이 설화를 내 딸에게 해주었다. 어머니, 하고 아무리 불러도 실증 나지 않고
오히려 부르면 부를수록 마음에 화평이 찾아온다.
첫댓글 어릴때 외갓집에 가면 오빠와 저의 대접이 여실히 다름을 알아채곤
늘 큰 어머님집에만 머물려고 한 당돌했던 제 모습이 떠오르네요.
어느 한해엔 엄마가 추석빔으로 오빠 옷만 만들어 주셔서 오빠 바지는 빼았아서 제가 입었지요.
그 시절에 여성은 지퍼가 허리 옆선에 위치하는데 아마도 정면에 지퍼 달린 옷 입은 첫 여자애 였을꺼예요. 제가...
친척들의 놀란 표정들이 하나같이 제게 머무는데 전 자랑스럽게 그 노획물을(?) 의기양양하게 뽐내고 있었답니다.
전설같은 이야기에 그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