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 홍 춘식
고국을 방문해서 친구 모친을 찾아뵙고 부탁받은 말이다 . 재석이를 찾아줘...
박재석 이라는분이 뉘신데요 어머님? 내가 젖먹여 키운 자석(자식)이여.
그분이 카나다에 사신데요? 으~응...그래... 카나다 어디서 사신데요? 그건 모르지...
나이는 얼마나 되신 분이죠? 정순이 위 이니까 지금쯤은 60 쯤 되였을 것이다 ,
지금부터 10여년전 일이다. 박 재석...라... 어디서 익은 이름일까 !
어느구석에 박 재석 이라는 이름이 숨어있듯 내 머리에선 바쁘게 찾고 있었다.
어떻게해서 젖을 멱여 키우게 되셨어요 어머님! 재석이네가 우리 동네에선 살지 않았지만,
아마 그때 내가 젖이 아주 많이 나와 주체를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왔을꺼야
어린 핏덩이를 데려와 젖을 먹여 달라는거야, 그때 어린 내 딸이 젖을 먹고도 철철 넘쳐
수시로 짜내 강아지를 줄 정도였으니까! 지금 같았으면 짜서 냉장고에 보관 했다가
필요한 사람에게 주면될터인데, 허기야 지금은 우유가 많이 나오니 모유가 필요
없어진 시절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런데 까마득한 옛날 있었던 일이신데요
어머니 ! 그 재석 이가 왜 지금와서 보고 싶으신 거예요 ? 모르지..
젊어선 그리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죽을때가 되여선지 꿈에도 보이고, 낮에도
고놈이 눈앞을 얼쩡거려... 그놈이 아주 내 젖을먹고 토실토실 해지는것이
행복 했었어, 멀리서 데려와 젖을 먹이고 데려가면 두시간쯤 있다가
또 데려와야 했거든, 그러니까 아주 놔두고 가라했지. 그리고 재석이네가
잘 사는 집안인데 젖값을 톡톡히 갖다 놓더라고, 젖값을요? 그런데 고 놈이
예뻐져서 젖값을 안받아도 좋으니 걱정하지 말라해도 재석네 양반집에서
그렇게하지 않더군, 어떤땐, 한 주만에 보러와선 아이의 모습을보고 행복해
하면서 커서는 한문도 가르침 받게 할꺼라했었지...
그 때는 일정기로 나라가 혼란 했었지, 몇년 있다간 동네에서 이장이
처녀들의 이름을 적어 가면서 일본 군수 공장에서 일하게하여 돈을
벌수있게 해준다고도했고,다른 소문은 만주로 끌려가 일본 군대 밥해주는
일을 한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당시엔 동네를 떠나면 죽는줄 아는 시대
아니였느냐? 그래서 내 둘째딸도, 그리고 열일곱에 네 큰 누나 영식이도
멀띠 익환이한테 얼른 시집보낸거였지, 그때 시집보내지 못했으면 아마
둘 다 끌려 갔을것이여!... 처녀의 이름뿐 아니라 남정네들도 비행장
닦는다고 이름을 적어갔으니까...
해방되고 그렇게 처녀들이 우리 동네에서도 셋이나 끌려가선 여태껏 못돌아
오고있지, 춘식이나 종열이는 6/25 전후해서 태어났으니 알리가없을거야,
얼마동안 재석이를 젖먹여 키우셨어요 어머님? 젖 떼고는 데려갔지! 그
놈에게 정이들어 잊을수가 없고,이제 곧 죽을 나이인데, 보고 죽으면 원이 없겠어!
카나다에 산다는 춘식이 너만보면 더 생각나고,너도 자주 나오는것도 아니라서 ...!
이제 이 늙은이 우리 동네에선 나만 남고 다들 저 세상으로 벌써 떠나고 없어,
고 녀석 기져귀를 갈아줄때면 몇번이나 내 얼굴을 온통 오줌으로 적셔놨었지,
꼬치도 보통 아이들 보다 커서 이놈 마누라는 행복 하겠다고 아낙들과 농을하며
웃기도 많이 했었지. 네 알았읍니다 어머님 ! 꼭 찾아서 소식 드리겠읍니다 .
박 재석이 라 ....! 어디서 익혀진 이름일까! 나는 칼가리로 이민와서 3년 살다가
에드몬톤으로 이사와 5년살다 BC 주에서 14년을 보냈기에 에드몬톤 교민소식을 잘
모르고있었다 , 그러나 박 재석이라는 이름이 기억에있는 이름이니 찾을수 잇을
것이라는 기대가있었다. 그러던중 식품점에 놓여있는 한인 신문을 읽는중 칼럼
밑에 박 재석 이라는 이름이 눈에들어왔다. 올커니,이분이였구나 .그러면 그렇치
이름이 기억에 있다했지, 신문을 봐서 익혀진 이름 이라는것을 알게되였다.
그렇다면 교민 주소록에 전화번호가 있을 터이였다, 식품점 주인에게 한인록을
잠시 볼것을 요청하여 전화번호를 적어 놓아 두었다,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차
어떻게 말을 해야하나를 구상 해본다. 집에와서 전화기를 들었다 . 여보세요?
박 재석씨 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만 “, 저는 홍 춘식 입니다 ,
한국에 다니러 나갔다가 어느분의 부탁을 받고 무례한 전화를 드립니다 .
“무슨 말씀 이신지”...... ! ? 혹여 박 선생님께서 남의 젖을먹고 자라셨읍니까 ?
단도 직입적으로 물어 확인을 해야했다. “네 그렇게듣고 자랐읍니다만”!...
바로 그분의 부탁을 받고 전화를 드리는 것입니다, “무슨 부탁을”...!
그분이 돌아가실 연세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아들과 부랄 친구이고요,
이번 고국 방문에서 친구 모친을 찾아 뵙고 박 선생님을 알게 되였읍니다,
저도 에드몬톤에 삽니다, 반갑습니다 박선생님.! “네 반갑습니다” .......
용건은 친구 모친이 선생님을 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네~~! 고국 방문길이 있으시면
꼭 찾아 뵈었으면 해서 연락 드렸읍니다.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홍 춘식씨라
했읍니까? 네 저는 현재 레둑에 살고있으며, 직장은 니스큐 공장 지대에서 용접 하고있읍니다.
네, 감사합니다 홍선생님! 그분이 아직 생존해 계시는군요? 잘 알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요. 이제와 생각하니 나의 이민 수속중일때. 내 친구의 집 주인은
교수님 이셨었는데 카나다로 이민을 떠나서 잠시 집을 봐주며 살게 되였다는 친구의
말이 떠 올랐다, 당시엔 친구의 집주인의 이름도 묻지 않았고, 또 알 필요도 없었다고
해야할것이다 , 나는 칼가리로 이민을 가기로 되여있기도 하였지만,
에드몬톤 이라는곳이 같은 주 에있는 도시인것도 모를 때였다.
교수님도 이민을 가야할 만큼 카나다가 그리도 좋은 곳인가보다 라고 생각 했을뿐이였다.
나는 꿈이있어 온 카나다가 아니였다. 정혼했던 여자가 1년만 카나다에서 살다 온다고
했던것인데, 그동안 그녀 에게 병이 생겨(늑막염) 몸져 누워 있다고해서 ,불야 불야
25세에 남편이 되여 이민을 왔다. 그래서 당시는 이민 초년 들에게 정부에서 3개월
코스로 기본영어 교육을 장학금(?) 을 받으며,(출석 여부에 따라 돈을 받으며)
공부를 시켜줬는데, 그도 할수없을 만큼 생활비가 급급했던 때였다.
친구 모친은 위로 딸만 넷을 두었고, 막내로 내 친구를 얻어 동네 축하를 받았다는
추억을 간직한 분인데다, 내 동네 에서 유일 하게 박식한 남편을 둔 여인 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한 분이셨다, 남편은 한문 선생으로 학식이 있다는 면 소재지의 식자들이
명절때면 문안 드리려 찾아오는 집안 이였으며, 학문으로 트인 집안의 아내로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해서 죄인처럼 사시지도 않은 분이셨다고 한다.
당시엔 부자집 에서도 딸 자식의 교육은 남의 식구가 된다는 이유로 교육비를
아끼던 시절이였는데, 그 친구 들은 5km 거리에 중,고등 학교를 졸업 시키면서
당시엔 엉뚱 하다는 이웃의 입방아도 들었을터 였을것 이지만, 또래 들이 모두
무식쟁이 한테로 시집을 갔던것에 비하면 트인 집안 이였음을 알수 있었다.
내 누님을 비롯 부자집 딸 친구들도 변변치 못하게 시집을 보낼때 였으니 과히
미래를 내다본 식견이 아닐수 없었음을 알게된다. 다시 몇년이 흐르고 친구모친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을 내 가족을 통해 들었다.
나는 퍼뜩 박 재석씨를 떠올리며 만약 찾아 뵙지 못했다면 하는 엉뚱한 분노가
머리에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그분을 향한 분노였다, 만약에 돌아 가시기 전에
찾아 뵙지 못했다면...하는 가상과함께 쏟아부을 말이 꼬리를 물고 대기하고 있었다,
마음 으로는 이미 전화기를 돌리고 가상 대화를 해본다.
찌르르릉. 찌르르릉 박 XX 맡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만...
몇년전에 전화드렸던 홍춘식입니다 ,당신이 글 쓰는 사람 맞습니까? 무슨..........! ?
글을 보니 신실한 기독교인 같으신데요, 글 쓰시는것 다시 생각해보시는게 좋을듯해서
말씀 드립니다, 에드몬톤 교민 독자 들을 속이지도 우롱하지 말란 말 입니다,
당신의 어린 생명을 위하여 거두워 주신 유모님의 유언을 그리 홀대 할수 있는것이요?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다 가슴에 원망을 품고 이생을 떠났단 말입니다 알겠어요?
내 당신을 길가에서 만나면 짐승같은 인간이라고 하면서 내 곁에 지나간 발 자욱에다
침을 뱉어 정결하게 할것이요. 어디 젖이 쌀 몇 말로 계산할수있는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디 마지막 유언을 일상의 바쁘다는 핑게로 지나치고 삶을 이어준 사랑이 멀리 있다는
이유로 넘어갈 문제 입니까? 사람이 사람다울때 사람 대접을 받을수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는, 떨리는 손 끝으로 담배에 불을 부치고 길게 빨아
넘겼으리라. 그러나 이것은 내가 혼자 상상해본 것이요 먼저 당사자 박 재석씨에게
확인해 봐야했다, 쏟아진 물 줏어담을수 없듯이 말은 이미 입 밖에서 떠나면 되 돌릴수
없게된다허지만 글은 언제나 고칠수 있어 좋은것을 알았다 한국의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이왔다, 그 분이 한국을 방문하여 어머님을 생전에 찾아 뵈었다고 했다,
다행인것은 내 마음속 에서만 맴돌다 사라진 사건이 되어진, 그리고 그 큰 실언을 할뻔했었던
내 자신을 발견하고 다행임 알았다 믿었던 사람에게 실망을 느낄때 누구나 분노한다.
친구끼리도 예의가 준수될때 우정은 지속될수있는것이다. 삶에 있어 피치 못할 사정을
고려하지 말자는 것이아니다 , 돈을 벌어도 우정 앞에서는 목에 기부스를 하지 말아야하고,
어투가 달라져선 안된다, 믿음과 사랑으로 대하는 자에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반 해서는 않된다,
그렇게 얻은것으로 밥을 해먹으면 소화가 잘될수 있겠는가, 잘될수있다면,
짐승의 소화기관과 같지 않겠는가! 친구와 전화 연결이되였다, 박 선생님,
네 엄마 찾아뵈었다고 했지? 응 왔다 가셨어, 돌아가시기 전에... 으~~ 그래 ? 잘됐다 야~~!
네 어머니가 편히 눈를 감으셨을것같아 나도 기분 좋다 친구야!
그 분 너도 아는 사람이니? 그 사람 우리 에드몬톤 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야 종열아.
아~ 그러니? 어떻게 ? 교회 장로 이시기도 하지만, 교민 신문에 자주 좋은 글 올려서
교민 정서 함양에 지대한 공헌을하시고 계시지. 가끔 그분 만나냐? 아냐, 한번도
만나본 일은 없어, 그런데 어떻게 그분을 알아 ? 만나서 보는것은 겉딱지야.
속을 보는것은 그 분의 마음을 쏟아 놓은 글을 통해서 안다는 것이고, 나 또한
그 분의 글을 통해 안다고 하는거야. 그분 아주 잘 생겼더라, 그리고 예의와
진실이 담기신 신사 이시더라. 잠시 본 좋은 느낌으로, 믿고 돈 빌려줄 수 없듯이,
말과 행위의 지속성으로 믿음이 가게 되는 것이잖니? 그러나 그동안 그 분의 글을
통해 느끼는 내 느낌은 한결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세는 곧 그분의
성품 이라고 말할수있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래 춘식아 고맙다 ! 네가 에드몬톤에
살고 있었기에 박 선생님께 연락 되고내 어머님도 소원을 풀게되였으니 말이지,
아냐 종열아 ! 그분의 사람됨이 네 어머님의 한을 푸신것이지, 나는 전해 드렸을 뿐인데 뭐!
그 후로 더욱 그분을 존경 하게 되었고, 글 또한 꿀떡으로 바뀌게 된것은 아마도
그 일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좋은말은 넘치고있다, 우선 경전들의 말들도 다 좋은
말들이지만,내가 검증하고 체험한 후에 받아 드려지는 감흥은 남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일것이다, 수십년전의 일, 기억조차 없는 먼 옛 일이 되여 내가 전한 말을 가치없다
버린들 누가 그 분을 욕 하겠는가만, 그 분은 일면식도 없었던 나의 말을 가슴에
담아 뒀음이 분명하여 작은 일에도 세심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 한 노 여인, 생모,
나는 친구의 모친, 박 재석 씨에겐유모, 우리 다 같이 어머님 이라고 부르는 형제가
되였으니 아름다운 인연이 아니겠는가 !
소중한 인연들로 엮인 사회 일수록 건전하다 할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