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미 낀 포구
①
나는 이른 아침 진부령을 넘어 가락시장에 도착하였다. 싣고 온 코다리 짐을 부리고 거래상회에서 주는 소주 상자와 보일러 룸에 설치할 조립 앵글을 싣고 나니 점심때가 되었다. 거래처 직원들과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나는 바로 그 곳을 떠났다. 늘 만나기를 미뤄왔던 차일우 선생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서부트럭 터미널 부근으로 가서 그가 살고 있는 연립주택에 주차를 하였다. 5층으로 된 연립주택은 지은 지 오래되어 외벽이 연기에 그을린 것처럼 검게 얼룩이 져있었다. 연립 주위로 전깃줄이 거미줄처럼 처져있다. 평수가 작은 집에서 여태 어렵게 사는 차일우 선생의 처지를 알 수가 있었다. 동호수를 확인하고 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안에서 차일우 선생 부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주호입니다.”
차 선생은 전교조 지부에 가고 집에 없었다. 그의 집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시골로 가셨다는 소식을 그이로부터 들었는데 잘하고 계신지요?”
“네. 어느 정도 적응은 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그러나 이젠 모든 것 털어버리시고 학교로 돌아오셔야지요.”
“글쎄요. 아직도 집사람의 반발이 너무 심해요. 차 선생을 너무 안 좋게 보고 있어서 좀 더 앙금이 가라앉기를 기다릴 뿐입니다. 그리고 집사람은 그곳에서 아예 정착을 하자 하는데 어찌해야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지난 일 다 잊어주세요. 그이도 자신 혼자 잘 살자고 한 일은 아닌데, 정말 참교육이 뭔지! 김 선생님이 한 번 찾아올 거라며 그때 복직을 권유하겠다고 하더군요.”
차 선생 부인의 말이 하나도 틀린 것은 아니다. 차 선생도 참교육을 위해서 였고, 나 역시 그들의 희생물이 된 것은 사실이나 이제 와서 차 선생을 원망할 수는 없었다. 나는 차 선생 집을 나와 그의 부인의 한숨 섞인 푸념을 뒤로하고 강원도로 냅다 달렸다.
중천의 늦가을 햇살은 어느새 서산으로 빨려 들어가듯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진부령 정상에서 잠시 쉬면서 언제까지 이 일을 해야 할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넘어왔다. 벌써 주위는 어두워져 있었다. 나는 창고에다 서울서 싣고 온 짐을 내려놓고 작업장으로 향했다. 작업장의 천정에 매달린 백열전구가 바람에 흔들리는 바람에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그곳에서는 장화를 신고 고무장갑을 낀 여자들이 큰 물탱크 가에 둘러 앉아, 녹은 명태 배를 따고 있다. 검고 작달막한 부엌칼로 배를 갈라 누르스름한 내장과 둥글고 길쭉하게 서로 맞붙은 붉은 알을 끄집어낸다. 알의 표피 전체에 핏발이 풀뿌리처럼 가늘고 길게 뻗어있다. 알과 창자는 따로 깨끗이 씻어 별실에서 알은 명란젓, 창자는 창란젓. 아가미는 따로 염장하여 김치 속 양념용으로 담아 용기에 넣어 포장을 하였다.
예전엔 처자들도 많았다는데 요즘의 농촌이 그렇듯이 어촌에도 일손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남편들은 새벽에 배를 타고 바다로 고기잡이 나가고, 아낙들은 청각과 미역, 우뭇가사리, 천초를 뜯으며 애면글면 아들딸 가르쳐 놓으니 말짱 어촌이 싫다며 돈 벌러 간다고 도시로 떠나갔다.
아낙들은 뒷불에서 터진 그물코를 뜨거나 어판장에 나가 잡일을 하였다. 그녀들은 새벽같이 뱃일 나간 바깥사람 뒷바라지하다 굽뉘에 얼굴이 잔뜩 찌들었고, 시마바람에 머리도 희끗희끗 까치놀같이 폴싹거렸다.
작업장의 여자들은 무척 소란스러웠다. 감실감실하게 검은 머리가 섞인 여자는 말코처럼 코를 벌름거렸다. 비린내에 찌들어 습관적인 것 같았다. 그녀는 콧잔등을 어깨에 문지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저 손자 녀석만 생각하면서 공부는 잘하는지, 밥은 제때에 챙겨먹고 노는지 안절부절 못할 때가 많았다.
“우리 종구 핵교갔다 올 때가 지났는데 와 안 오는지 모르겠고마. 이눔아가 누카 쌈박질이나 안 하는지? 애간나 종자 새끼들이 여간 억쎄빠져 놔서 맴을 놀 수가 없어야!”
옆에 앉은 허리가 궁둥이같이 펑퍼짐하게 살집이 좋은 여자는 갑자기 칼질하던 손을 멈췄다. 누굴 찾는지 양미간을 치켜세우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면서 어줍게 입을 열었다.
“김 선상이 안 보이지비. 이래 늦은 적이 없었지비야. 사고라도 난 게 아냐?, 강원도 길이란 원래 산세가 험해놔서이!”
그녀는 보따리 장사로 남과 북을 들락거리다가 어느 날 3.8선이 막혀서 돌아 갈 수가 없었다. 영감과 아들 찾아 간다고 통일 될 그날을 기다렸다. 여름이면 오징어 가랑이에 겨릅대를 끼우고 한겨울이면 어판장에 나가 양미리를 엮으면서 한숨 섞인 말을 내뱉곤 했다.
“기놈에 뎡 때문에! 내래 님댜 생각에 디금 이 가슴이 시커멓케 멍이 들었어야!”
그녀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신청에서 누락되자 무척 실망을 하여 며칠 앓아눕기도 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말코여자가 답답하다는 투로 언성을 높였다.
“아따 걱정두 팔자지. 선생질하다 내려온 김 선상이 그렇게 허술할까? 오매 저기 오는구먼, 호랭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만, 근데 오늘은 정말 꽤나 늦었구마.”
짐을 들고 오는 나를 발견한 말코여자가 갑자기 뜨악해 하며 하던 말을 멈추었다. 여자들은 나만 보면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선생질을 했었다는 전직 때문이었다. 여자들이 지껄이는 소리는 함경도와 평안도 말에다 경상도 말까지 뒤섞였다. 그래서 그녀들이 떠드는 소리는 특이한 사투리로 매우 덴덕스러웠다. 나는 그녀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면서 소주를 몇 병 건네주었다.
“오늘도 야간작업하시나 보네요? 수고들 많으신데 한잔씩들 하고 하세요.”
“에구 고마워라. 근데 김 선상! 오늘은 왜 이리 늦은겨? 김 선상이 안 보이믄 걱정이 돼놔서이.”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서울서 볼일이 있어 거기 들려오느라 좀 늦었습니요.”
나는 비나리를 치는 그녀들을 뒤로하고 보일러실의 정 씨한테로 갔다. 보일러실에는 손질한 명태를 코다리로 건조시키는 룸이 있고, 그곳에서 정 씨가 일을 하고 있다.
보일러 룸은 전국에 30여 개 정도이며 하루에 1만~1만5천 마리 정도를 처리했다. 연안에서 잡히는 연동선의 조태釣太나 유자망의 망태網太는 맛과 질이 뛰어나지만, 워낙 가격이 비싸 원양태를 부산과 포항의 종합상사에서 콘테이너 화물로 냉태 1짝 90마리. 300편을 들여왔다. 건조실에서 나오면 4~5시간 냉동하여 2.5톤 트럭에 186개로 박스 당 8코(32마리)를 가락동과 오장동 중부시장으로 직송하였다. 명절 밑이나 물량이 많을 때는 하루 두 번씩이나 서울을 왕복하여 물량을 맞춰줘야 했다.
나는 정 씨와 이 씨가 일하는 덕장으로 갔다. 덕장은 손질한 명태를 걸어 물기가 빼는 곳이다. 물기가 빠지면 명태를 보일러실의 건조룸으로 옮겨 코다리를 만든다. 물탱크에서 떠드는 여자들의 얘기소리가 덕장까지 들려왔다.
나와 정 씨를 본 구레나룻 이 씨가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였다. 구레나룻 이 씨는 눈, 코 입만 내놓고 얼굴 전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듯이 털이 많아 사람들은 그를 털보라 불렀다. 이을 마무리한 이 씨가 고무장갑과 속의 목장갑까지 벗었다. 수돗물에 손을 헹구고 허리춤에서 수건을 빼내어 손을 닦으며 물었다.
“김 선상! 오늘은 왜 이리 늦은 겨. 무슨 일이 있던 게야?”
나는 서울서 친구를 만나고 오느라 늦었다하면서 사무실로 들어갔다. 탁자 위에 놓인 너저분한 책자며 신문을 대충 치웠다. 소주와 물컵을 탁자 위에 놓고 코다리와 고추장을 준비하고, 그들에게 술을 따랐다. 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마신 이 씨가 투덜거렸다.
“그 그제부터 폭풍주의보가 내려 출항을 못했으니 생태국은 다 먹었구먼. 무를 숭숭 썰어 밸이 달린 곤지를 넣고 끓인 국에다 고추 가루를 벌겋게 풀어 소주 한 잔이 간절하구먼. 원양태는 멋(맛)이 읎어놔서……!”
코다리를 뜯던 이 씨가 연안에서 잡은 생태국이 간절하다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에는 배를 탔었지. 입김마저 얼어서 수염에 달라붙는 새벽 세 시에 출항을 했어.
생태국에다 막소주를 사발에 따라 들이키고는 일곱이서 십여 톤의 연승선을 타고 나가 작업을 했네. 명태란 놈은 얭미리(양미리)를 잘먹거덩. 한참 부리나케 낚아 올리다 해금강이 뺀히 올려다 보이는 곳에서 끌려갔었지…….”
말을 하다 말고 정 씨가 따라 준 잔을 받기가 무섭게 입으로 가져갔다. 벌컥벌컥 거친 소리가 나도록 단숨에 마시고는 길게 찢은 코다리 살점을 고추장에 찍어 모지락스럽게 씹어댔다. 그는 이북까지 끌려갔다 온 얘기를 갑자기 끊어버리고 딴전을 피웠다.
“허허! 내가 시방 뭔 소릴 하는 게야! 아무 일도 아녀. 그냥 해본 소린 게 김 선상은 어여 술이나 한 잔 다시 따라봐.”
나는 납북되었을 때의 얘기를 이곳에 와서 정 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이북에 끌려가서 많은 고생을 하셨다면서요?”
“김 선상, 그 소릴 우서 들은 겨? 그 얘길랑 함부루 끄니지 말기여. 술 먹는 자리에서 내가 괜한 쓸데없는 소릴 해서 낭패야!”
이 씨는 얼굴 근육을 실룩거리며 ‘끄윽 카’ 하는 소리를 내고 다시 잔을 비웠다. 화가 치미는 얼굴로 한참이나 정 씨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리고는 오줌버캐처럼 허옇게 낀 설태를 내밀면서 투덜거렸다.
“에이 망할, 비러 먹을 놈. 니놈의 짓이지? 우라질 것이 주둥아릴 함부루 놀려!”
당장 칠 듯이 포악하게 눈을 부릅뜨자 정 씨가 주춤거렸다. 이미 얼굴이 불콰한 정 씨도 시답지 않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야, 이 털보야! 지금이 워니 때여? 워니 때! 쌍팔 년도 일 갖고 주접떠는 그 주변머리하곤! 턱주가리가 허얘가지고 덕장일이나 하는 무식쟁이 뱃놈에게 이제 뭘 더 우쩌겠나? 소갈머리 없게시리 굴지 말고 어여 잔이나 줘 봐.”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 씨에게 다시 정씨가 대거리를 했다.
“식구들과 맨몸으로 살겠다구 나리까까지 온 김 선생 보게나.”
“집어쳐! 씨부럴 놈. 뭘 안다고 좆퉁수 불어. 교장이란 작자가 운동회빈가 합숙빈가 하는 걸 떼 묵으려다가 들통날께비 트집 잡아 내몬 겨. 김 선상 축구뽈 하난 제법 잘 찼던 모양인데. 나도 젊을 땐 선수로 뽑혀 다녔었는데. 그런데 그눔에 전교준가 선교산가 난, 자꾸만 헷갈려서. 암튼 트집 잡아 뽈을 못 차게 핸 모양이여.”
“저 놈, 저 소갈딱지하곤, 쯧쯧!”
정 씨는 그의 말에 혀를 찼다. 나는 매우 난처하여 정 씨를 바투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이곳으로 내려와 며칠이 지나서였다. 하루는 정 씨가 나를 불러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물었다. 나의 얘기를 들은 정 씨도 자신도 납북되었던 일이며, 송환되어 간첩으로 몰렸던 당시의 일을 털어놓았다.
정 씨는 이 씨와 같이 김 사장 배를 타고 북위 38도 28분 최북단까지 가서 조업을 하다 납북되었다고 했다. 그는 큰 키는 아니었다. 육십이 훨씬 넘었지만 딱 벌어진 어깨와 가슴이 건장해보였다. 뱃일을 하는 사람 치고 아는 것이 많았다.
“우덜은 이곳에서 배나 타며 처자식과 사는데 무슨 놈의 사상과 이념을 달리해서 월북을 자처했겠나.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같은 어부들을 뱃놈이라 하잖는가! 왜 위험한 줄 알면서도 해금강이 뻔히 보이는 곳까지 가서 조업을 해야 했겠나. 먼 바다에는 저인망에다 대구리. 소나(어군탐지기)까지 설쳐대 치어까지 분별없이 쓸어가니 점점 씨종자가 말라 근해까지 올 고기나 있겠나. 그래서 어군을 따라 자꾸 북상을 하게 되는 거지.”
지난 날의 그때를 회상하는 정 씨의 얼굴은 잔뜩 굳어있었다.
“한류성 어종인 명태는 북쪽으로 갈수록 많이 잡히는데 조업 때마다 월북을 막거나, 이북경비정한테 납북되지 않기 위해 우리경비정이 보호를 해주는데, 그날따라 공해상을 지키는 우리 경비정이 보이지 않아 불안했었지.”
시선을 먼 북쪽으로 던진 그는 다시 차근차근히 그 때의 일을 들려주었다
“얼마 후에 검은 물체가 해미가 잔뜩 낀 바다를 하얗게 가르며 달려오면서 서치라이트가 모르스부호를 빛으로 바꾸어 연신 번쩍거릴 때는 어떤 영겁이랄까 그 무시무시한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김 선생 같은 사람은 이해 못할 거라며 연신 얼굴을 실룩거렸다.
“암튼 어업이 목적이 아니고 염탐하러 어로 한계선을 넘은 거라 따로따로 불러 취조할 땐 모골이 송연했지. 1년 후에 평양서 버스로 원산까지 와 경비정으로 장전항 외항에 오니 납북당시의 총 맞은 우리 배를 잘 수리하였다가 주더군. 떠나면서 우리는 손을 좌우로 흔드는데 장전항 어부들과 기관원들은 손바닥을 펴서 앞뒤로 흔드는 게 이상했고, 그게 사회주의의 모습이구나 했네.”
죽기 전엔 그 누구에게라도 말 못할 줄 알았다는 거였다. 북조선에 끌려가서의 고충보다 송환되어 간첩으로 몰아 갖은 고문과 회유에 무척 고통스러웠는데, 그렇게 친했던 친구란 놈이 보안대에 매수당하여 감시를 했고,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신고했는지 툭 하면 조사할 것이 있다며 불렀다. 그리고는 간첩과 내통하려 했다면서 억지 조서를 꾸며 윽박지르기까지 했다는 거였다.
“시상이 진작 바껴도 내 엽태 이렇게 속이 다 후련하도록 털어 놀 수 있을 거란 생각이나 핸 줄 아나. 비밀을 털어놓지 못해 속앓이를 하다 대밭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고 병이 나았다는 북두건이 이발사 얘기 말일세.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 했겠나! 엽태 그 이발사처럼 세월을 삭히느라 이 씨나 나나 속이 다 타버렸다네.”
그는 속 시원하다면서 가끔 생각이 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어갔다.
“나나 이 씨는 그래도 좀 난기여. 김 사장은 수산대학까지 나온 배운 사람이라 고문을 많이 받았네. 전에는 김 사장을 따라서 나도 인도양으로 떠나는 참치잡이 독항선도 타봤고, 북양으로 떠나는 명태트롤선. 새우잡이나 은대구 잡이선도 탔었다네.”
1958년 1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원양어업에 뛰어들면서 여러 해양업계가 참여하여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후 사모아를 기지로 한 남태평양의 어황이 안 좋아 대서양쪽의 트롤어업. 남빙양의 크릴. 포클랜드의 오징어 채낚기에도 타고 조업을 하였다고 했다.
“조타호령이 떨어지면 정신없이 움직여야 하고, 포드 파이브(키 좌현 5도), 미드 쉽(키 중앙), 엔진 슬로우 헤어드(기관 저속전진)할 때에는 완전히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네. 정신없이 갑판에서 그물을 끌어올리다 큰 너울인 스웰에 배가 흔들리면서 파워브럭(그물을 감아올리는 장비)에 손가락이 몽땅 잘려나갔었네. 그땐 젊어서 무척 힘께나 썼기 때문에 헷또(1등 갑판원의 뜻으로 Head Sailor의 일본식 발음) 라고 명성이 높았는데, 그만.”
손가락이 없는 손으로 무릎을 툭 툭 치면서 아쉬운 듯 입맛을 쩝쩝 다셨다.
“내 꿈이 뭔 줄 아나? 일류 선장이 되는 거였네. 갑판으로부터 35미터의 높이에 있는 코파望臺에 올라가 지시하는 그런 선장 말일세. 그러나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바람에 그만, 아직도 큰 배를 타고 고기를 잡던 그 때가 그리워진다네.”
고깃배에서는 피리나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몰고 오고, 육지의 지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뱃길이 멀어지고, 해산한 마누라를 둔 선원이 타면 고기가 안 잡히고, 어창 뚜껑에 누우면 고기가 차지 않는다. 뱃머리 오른 쪽에서 오줌을 누면 재수가 없고, 상륙할 때에는 발바닥에 불을 지펴야 악귀를 내쫓는다는 속설이 있다는 얘기를 전에 들려주었던 정 씨가 다시 말을 이었다.
“나는 손을 다쳐 먼저 들어오고, 김 사장과 이 씨는 몇 년을 더 타다 아주 귀향을 핸겨. 이곳 연안에도 자꾸만 고기 씨가 말라 어획고는 줄어들고 안개만 껴도 출항을 못하게 했어. 김 사장이 가리비 양식기술을 배우러 일본으로 가려 했는데, 그것마저도 출국을 못하게 한 겨. 납북되었다 송환되어 온 사람들은 보안대에서 리스트를 작성하여 관리대상으로 분류하여 죄인취급을 핸 겨.”
그의 검게 페인 얼굴의 주름에서 한 세월의 섟이 언뜻언뜻 비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난,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네. 바다에서 손 병신이 돼 꿈은 꺾이고 말았지만, 그래도 바다에는 사나이의 기백이 넘실거려. 속이 상하거나 울화가 치밀 때면 바다가 감정을 잠재워주지. 자네도 해미가 걷히면 바다에 나가보게나. 바다 한가운데선 뭍에서의 잡다한 생각이 싹 가시고 가슴을 확 트이게 해주니까.”
정 씨의 말에 칠 듯이 포악하던 이 씨는 벌써 여러 잔을 마신 탓인지 숨소리가 거칠었다. 거센 바람에 그을린 그의 얼굴은 붉다 못해 바위의 이끼처럼 푸릇푸릇한 색으로 변해갔다. 정 씨에게 한바탕 넉살 좋게 떠든 그는 화제를 바꿨다.
“바다도 흉년이여! 유자망에 머구리까지 설쳐대니 연안에선 씨종자가 남아나기나 하겠어? 허이 이래가지고 뱃놈들이 우찌살끼란 말고. 어허 고연 놈으 시상!”
이 씨가 푸념하듯 뇌까렸다. 그뿐인가! 조태, 닻배, 통발, 원양어선, 저인망, 후리장, 선망, 오징어 채낚기, 멸치배, 멍텅구리, 고데구리, 소나 등등 고기의 씨를 말리는 어로 방법은 일일이 꼽기도 어려웠다. 나의 입에서도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시큼하고 들척지근한 술 냄새를 풍기며 정 씨의 말에 투깔스럽게 언성을 높이는 이 씨의 손등의 툭 불거진 혈맥이 유난히 푸르렀다. 몸서리쳤던 두려움이 아직도 파랗게 질려 혈관 속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고대구리 식 싹쓸이 소형기선 저인망 업계가 사용하는 어구 어법은 노르웨이식 어법이지. 일제 강점기에 도입되어 치어까지 씨를 말려. 그물코가 워낙 촘촘해서 일본서는 쓰질 않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양심 없는 자들이 아직도 불법으로 사용한다네. 단속이 너무 느슨해서 그래. 그래도 그 많은 괘기 중에서도 명태란 놈이 제일 으뜸인 겨.”
그러자 정 씨도 지지 않고 한마디 거들었다.
“그려! 지방태와 원양태. 크기에 따라 노가리, 소태, 중태, 대태. 언 놈은 동태. 말리는 상태에 따라 황태, 북어, 춘태, 추태. 건조대에서 떨어진 건 낙태. 어디 하나 버릴 것 없는 이놈들 때문에 마신 술도 수월찮을 거구먼.”
명태란 놈은 혹사한 간을 해독하는 메티오닌 시스테인 등 함황含黃 아미노산물이 많아 간은 간유로 쓰고, 민간요법에서 과음, 피로, 감기몸살에 좋고, 소변이 잘 나오지 않거나 눈이 침침할 때 회복이 빨라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우리 연근해에서 많이 잡히는 명태가 요즈음의 지구 온난화 탓에 러시아 해역인 북태평양과 베링해로 북상하여 이제 명태는 금태가 돼버릴 처지가 될 것 같다며 신문 보기가 매우 겁이 난다고 했다. 매일 신문만큼은 철저하게 보는 정 씨는 술기운이 도는지 눈자위가 명태 알처럼 붉었다.
나는 다시 잔을 비우고 명태 살점을 씹었다. 찝찔하고 달착지근한 맛에 이런 애환이 배어 있구나 하며 창가로 가서 문을 열어 젖혔다. 하늘도 검고 바다도 검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내가 K학교에서 축구부 선수들과 합숙훈련을 할 때였다. 귀가하다 만난 차일우 선생의 퀭한 눈을 똑바로 바라 볼 수가 없었다. 시선은 투지에 불타는 듯 매우 강렬했다. 신도림 전철역에 가면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하면서 목청을 돋우던 퀭한 눈의 사내와 흡사했다.
나는 그를 따라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평교사들의 모임이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그래서 취기가 돌자 비척거리며 일어나 나가려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여선생 꽁무니만 쫓아다니면 단가!”
비아냥거리는 소리에 나는 그만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등골이 오싹하였다. 갑자기 술기운이 확 가셨다. 나는 순간적으로 큰소리로 외쳤다.
“뭐야! 어떤 자식이야?”
내가 고함소리와 함께 탁자를 집어 던지려 하는데 차 선생이 나를 잡고 만류했다. 나는 도장을 꺼내 높이 들고 언성을 높였다.
“그래 서명부 이리 줘 봐. 양호 선생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가 아냐. 전교조 결성을 빗대어 모함하려 들지 마! 그렇게 원하는 도장 찍으면 될 거 아냐.”
나는 도장을 들고 그들을 바투 바라봤다. 그들이 갑자기 도깨비같이 험악한 괴물로 보였다. 나는 휘청거리며 도장을 거두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손을 잡고 도장을 서명부에 눌러버렸다. 나는 순간 식탁을 엎어버리고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기억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전교조 탈퇴를 하지 못하고 강제 퇴직을 당하고 무작정 간 곳이 남해의 어느 조그마한 어촌이었다. 얼마동안 잠적하여 그곳에서 해미(바다 위에 낀 아주 짙은 안개)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아침 일찍 해안에서 망망대해를 보았다. 거기에는 어선들이 성글게 떠있었다. 난바다, 그곳! 물결이 너울지고 있었다. 물초가 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염분끼가 있는 해미가 살 속으로 스며들어 느낌이 안 좋았다.
밤만 되면 잡다한 꿈에 시달렸고 아침이면 다 잊어버렸다. 며칠 후 서울로 돌아온 나는 막노동에다 행상까지 했지만 여의치가 못하자 아내가 언니 얘기를 꺼냈다.
“속초 언니네나 다녀와야겠어요.”
“갑자기 언니 네는 뭐 하러 갈려고. 처형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그게 아니고 당신 이대로 나가다간 뭔가 일 저지를 사람 같아요. 다른 일을 생각해봐야겠어요. 당신도 해볼 건 다 해봤잖아요. 그래서 전화로 당신 얘길 했더니 왜 진작 알리지 않았느냐면서 당장 내려오래요. 그렇지만 당신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는 알아봐야 해서 먼저 갔다 올게요.”
나는 며칠 후 돌아온 아내에게 설득되어 억지로 따라 나섰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빚쟁이 야반도주 하듯 얼마 되지 않는 이삿짐을 챙겨 진부령을 넘었다. 이삿짐을 실은 작은 트럭이 가파른 산허리를 돌 때였다. 산허리는 먹구렁이의 잔등같이 꾸불꾸불하여 오를 때는 괜찮은데 내리막길을 달릴 때면 현기증이 일었다. 적요가 능선에 머물고, 우람하게 치솟은 전나무의 끝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다. 떡갈나무와 굴참나무의 구겨진 잎들이 바람에 자지러졌다. 다시는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도 들었다. 자는 줄만 알았던 석진이가 눈을 배시시 뜨고 한참을 밖을 내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빠! 정말 속초에 가서 살 거야? 거기 우리 집도 있고 고기도 많이 잡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는 거야?”
“나도 잘은 몰라. 그냥 니 엄마 따라 가는 거야. 일단 이모네 집에 가나 봐.”
“이모네 집에 가면 우리도 잘 살 수 있어? 이젠 곪아 깨진 수박 안 먹고, 진 무른 딸기 안 먹어도 돼?”
석진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얼마나 지긋지긋했으면 잊어버리지도 않고 가슴에 묻어둔 걸까? 나는 녀석의 손을 거머쥐고 행상을 하던 때를 생각했다.
퇴직금으로 소형트럭을 구입했다. 남루한 작업복에 운동화를 신고 아직도 어둠이 스멀스멀 기어 다니는 한적한 도로를 냅다 달렸다. 가락시장까지는 40여분. 간간이 새벽바람이 동살을 몰고 왔다. 고속도로를 밤새 달려 온 대형트럭이 들어찬 이른 시각 경매가 끝나고 나서 나는 야채를 사서 싣고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행상을 했다. 아침나절에 팔지 못하면 시들해져서 제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드는 잎사귀와 대궁에 물도 뿌리고 부채질도 했다. 처음에는 과일을 팔았다. 연립주택 담벼락에 차를 대고 핸드마이크로 외쳐댔다.
“싱싱한 과일이 왔습니다. 꿀수박, 찰도마도, 꿀참외를 아주 싸게 팝니다.”
이렇게 외쳐대고 나면 좀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승용차 장식바구니 속에서 반점을 키우며 시들어가는 모과와 같아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
초여름 주택가 골목으로 나른하게 실바람이 이는 날이었다. 여자들이 재잘대며 모여들었다. 센들 끄는 소리, 껌을 씹는 소리도 들렸다. 과일을 고르는 여자들 중에서도 나이가 어려보이는 여자가 유난스레 호들갑스러웠다, 빨간 매니큐어 칠을 한 꽃 삽 같은 뾰족한 손톱으로 소나무껍질처럼 딱지가 붙은 곳을 후벼 파면서 눈을 치떴다.
“이 수박 상한 거 아녜요?”
손톱으로 후빈 곳의 딱지가 떨어지면서 푸릇푸릇한 껍질 속이 드러났다. 여자는 못마땅하다는 듯이 인상을 쓰면서 다른 수박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너무도 얄미운 생각이 들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상하다니요.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오늘 새벽 밭에서 직접 따온 겁니다. 자 보세요. 이래도 썩었습니까?”
나는 전대에서 과도를 꺼내어 세모로 도려냈다. 빨간 속살이 쐐기처럼 칼끝에 꽂혀 나왔다. 까맣게 박힌 씨에서 윤기가 흘렀다. 나는 자신만만하게 여자가 만졌던 수박을 들어 보였다. 여자는 아니꼽다는 듯이 고르던 수박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는 참이었다. 창피를 무릅쓰고 어렵사리 시작한 장사인데 안사면 말지 괜한 생트집을 잡는 거 같아 화가 치밀었다. 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에이’ 하는 소리와 함께 들고 있던 수박을 냅다 내동댕이쳤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난 수박이 빨간 매니큐어 여자의 살색 스타킹에 튀어 붙었다.
“어머머! 이 아저씨 봐. 수박은 왜 깨트리고 난리예요? 장사하는 사람이 별꼴스럽게 성깔은 왜 부려. 혜진 엄마 어서 가요.”
앙칼진 목소리가 귓전을 후벼 팠다. 여자들이 가버리고 나는 이마에 돋은 땀을 닦고 나서 담 아래턱에 주저앉았다. 역한 감정이 후끈거리며 기도로 올라왔다. 숨이 찼다. 담배만 볼이 패도록 빨아댔다. 아들 녀석이 생각났다. 손에 잡히는 대로 과일을 바닥에 내던져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아내의 찡그리는 얼굴이 보였다. 자꾸만 비굴해지고 처참해지려는 기분을 삭이려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보았다. 나는 맥이 빠졌다. 그래도 오기 하나로 버텼고, 주위의 시선들을 밀짚모자 하나로 가리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행상을 하기 전에 아파트 공사장에 나가 벽돌을 져 올렸다. 다리 힘 하나는 튼튼하다고 자부했었다. 그러나 멜빵을 멘 어깨에 물집이 생기고 살가죽이 벗겨졌다. 그 일도 더는 할 수가 없었다. 쿡쿡 쑤시는 어깨를 치료하고 돌아오면서 나는 그때 왜 탈퇴를 못하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는지 후회를 하기도 하였다.
원정 시합 때였다. 숙식비가 바닥이 나 나는 조화연 양호 선생을 전화로 급히 불렀다.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애들을 운동장으로 내보내고 함께 걸었다. 기와를 얹은 집들이 즐비한 신흥 주택가를 끼고 돌았다. 운동장이 저만치 내려다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갔다. 안개보다 큰 는개 같은 알맹이가 촘촘히 묻은 아카시아 이파리가 차갑게 얼굴을 스쳤다. 신문지를 깔고 나는 그녀와 앉았다.
“위에서 체육진흥기금이 내려 온 걸로 알고들 있는데요. 이럴수록 냉정하시고, 제가 마련해온 돈이 있으니 우선 쓰시고 나중에 교무주임께 청구하세요.”
그녀의 위로에 나는 너무나 화가 치밀었다. 괜히 조화연 선생에게 언성을 높였다.
“그래서 이 번 출전을 마지막으로, 교육청의 체육지원금이 중단되었다고 이렇게 회유를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체육진흥기금까지요……?”
아침 햇살이 이슬을 핥고 있었다. 음산한 풀숲에서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내려가는 길이 미끄러워 나뭇가지를 휘어잡자 물방울이 후드득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내내 말이 없었다. 언덕을 내려와 준비해온 봉투를 내게 주고는 학교로 떠났다.
나는 축구를 하다 다친 애들 때문에 양호실을 드나들었고, 하루는 양호선생과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 일학년 담임인 여선생과 마주친 일이 있고부터 학교에 소문이 돌았다.
교장이 불러 양호 선생과의 염문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속히 전교조 탈퇴를 하고 선수를 인솔해가라고 회유를 했다. 교장실을 나온 나는 나의 처지를 호소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나를 질타하고 있었다. 참 교육을 위한 건데 무슨 소릴 하냐며 학교를 떠나라는 야유까지 들었다. 나를 합리화시키기에는 그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렇게 소외당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섭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적대감을 갖기보다는 자꾸만 초연해졌다. 그들을 원망하기엔 이미 먼 감이 들었고, 내가 받는 만큼의 죄장감罪障感도 어쩌면 같은 맥락에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의 역겨운 감정을 정리하고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종일 달아오르던 해가 기진맥진하여 산등성이 너머로 굴러 떨어지듯이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남은 과일 가운데서 다시 팔 수 없는 것은 따로 골라내어 속이 곪은 수박은 그 부위를 도려내고, 물러터진 딸기는 씻어서 식구가 배를 채웠다. 석진이는 엄마의 눈치를 보면서 배가 볼록하도록 먹고는 토하고, 싸고 밤새도록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그 후로 아이는 딸기, 수박, 참외는 보기조차 싫어했다.
이 씨와 정 씨는 주로 정부의 잘못을 질타하고 있었다. 매점매석도 기관을 낀 수입상과 돈푼이나 만지는 재력가의 뒷거래로 공공연히 이루어고 있었다. 나는 그간 바다에서 고기 잡는 어부라면 무지막지한 뱃놈으로 알고 있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밖은 칙칙한 기운이 돌았다. 따개비 같이 다닥다닥 붙은 지붕위로 분기氛氣가 몰려왔다. 배의 엔진에서 나는 후아나 소리가 먼 곳에서 들려왔다.
“니미럴, 김 선상! 벌써 취했는 겨? 이리 와서 내잔 한 번 받아. 젊은 놈이 몸 사리기는. 사장은 수협장 만나러 군수협郡水協에 갔구먼. 늦을 거라 했네.”
이 씨가 다그치듯이 나를 불러 잔에 술을 따라주면서 언성을 높였다.
“배타수역이라나 서로들 바다를 금 긋듯 쫙쫙 갈라놓고 점점 더 큰일일세! 전에 해양수산부에서 일본 놈들과 바다 따먹길 핸거 자네두 알지? 우리 수협에서 세금을 조금 내려고 어획량을 적게 신고했는데 그 어획고 수치를 갖고 가서 협상을 하고 와서 뭐래는 줄 아나? 더 많이 잡을 수 있는 양(수역)을 뺐어왔다나 뭐라나.”
그러자 정 씨도 요즘의 정부는 뭐 하는지 모르겠다며 매우 분개해 하였다.
“우리 수협도 문제가 있는 게지만, 우리나라가 러시아의 남쿠릴열도 주변수역에서 잡는 꽁치조업을 일본 놈들이 러시아와 합의해서 조업을 금지키로 했다는데 정부의 작태에 분통이 터지겠네. 꽁치 국내 어획량은 4만여 톤인데, 남쿠릴열도에서는 1만5천여 톤. 인근 공해상에서도 1만여 톤인데 남 쿠릴이 금지되면 공해상 조업도 경제성이 희박하여 결국은 총 어획량이 절반으로 줄어들게 될 껀 뻔한건데, 한심한 작자들. 즈들은 배때지가 불러서 뱃놈들의 배 고품을 알기나 할낀가. 호랑말코같은 놈들!”
정부를 탓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바다를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그들을 정부가 너무 몰라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장관도 선거를 통해서 선출했어야 전문성이 결여되지 않고 소신껏 일을 할 수 있다는 그들의 생각이 백번 옳은 것 같았다. 나는 집으로 와서 아내가 차려온 밥상을 받았다.
“요즘 명절을 앞두고 종합상사에서 또 매점매석을 하는 모양이에요. 가격 폭등은 고사하고 출고를 안 해서 형부가 수협장 만나러 갔데요. 근데 오늘 왜 이리 늦었어요? 아저씨들과 술을 마신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서울서 일이 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차 선생 집에 갔다가 차 선생이 집에 없어서 부인하고 얘기 좀 하고 오느라고…….”
“거긴 뭣 땜에 갔어요? 그 사람 때문에 우리 식구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고, 나는 여기가 더 좋아요. 당신 복직할 생각은 말아요. 요즘 귀농인구가 늘어난다는 추세이던데, 이만큼 터를 잡았는데 이제와 어쩌려구요?”
아내는 차 선생 얘기만 하면 싫어했다. 형편이 나아지면 형부하고 전복 양식을 하자는 거
였다. 그러면서 악착같이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오늘 아주머니들과 바다에 나가 미역과 다시마도 함께 뜯어다 수협에 넘겼어요. 성게를 좀 얻었는데 당신 줄려고 냉장고에 넣어뒀어요. 배가 있어 부부가 나가는 집이나 농토가 있는 집은 그래도 견딜 만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집들은 말이 아니네요. 낼은 돌김을 뜯으러 뒷불에 나가볼까 해요. 그런데 어제 한 해녀가 양식전복을 몰래 따오다 발각되어 실랑이를 벌였다는데 그것도 다 크지도 않은 전복을. 오죽했으면 어린것까지 손을 댔겠어요. …….”
“그러니 어촌계에서 좀 더 강력하게 단속을 해야 하는데, 조그만 동네이다 보니 야박하게 하면 욕먹을 거고. 당신은 절대로 그런 것 손대지 말아요.”
“그런 건 깊은 물에 들어가 물질하는 해녀나 잡지 우린 바위가 있는 얕은 뒷불에서 작업을 하기 때문에 어림도 없어요. 그냥 바위의 미역과 다시마나 돌김을 뜯는 정도에요.”
나는 밥상을 물리고 방바닥에 누웠다. 천정을 보았다. 반자에 누렇게 얼룩무늬가 더 커져 있었다. ‘쥐란 놈이 또 오줌을 쌌군!’ 하며 눈을 감았다. 아내의 설거지하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잠에서 깬 나는 점퍼의 깃을 세우고 밖으로 나왔다. 동살이 잡히자 밤새 낀 해미가 몰려오면서 친친한 바람이 하늘을 부풀리고 있었다. 마른 명태를 안주하여 술을 마시고 난 아침이면 으레 속이 칼칼했다. 그래도 소주에는 명태만한 안주가 없었다.
어판장으로 갔다. 그간 폭풍주의보로 배들이 출항을 못한 터라 조태나 망태가 없었다. 아침 해장국으로는 연안에서 잡힌 생태가 제격이었다. 어판장을 나와 축항을 향해 걸었다. 주의보는 해제되었지만 아직 파도가 거셌다. 굼뜬 파도가 항에 정박해있는 배를 향해 밀려오자 배가 서로 부딪칠 때 배를 보호하기 위해 달아놓은 밴다지를 비벼댔다. 멀리 해안 경비초소의 철조망이 거미줄처럼 희미하게 보이고 그 곳에서 이어진 축항은 비행기 활주로처럼 길게 뻗어있다. 방파제를 때리고 치솟는 물살에 휩쓸릴 것만 같았다.
시멘트로 짓이겨 바른 축항의 가장자리에 우끼가 몰려 떠있고, 바닥엔 단풍잎 같은 불가사리가 좍 깔려 있었다. 이놈 들은 어류와 패류 등의 유용수족有用水族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번식력도 어마어마하다는 불가사의한 동물이었다.
배가 정박해있는 어항에는 고지랑 물이 누런 이끼를 쓸고 있었다. 깡통, 비닐 팩, 스치로폼, 각목과 각종 쓰레기가 쓸려와 콜타르 기름에 얼룩져 일렁거렸다. 깎아지른 절벽위에 하얀 등대가 고고하게 우뚝 서있다. 이물마스트처럼 밝게 비춰주던 등대가 아직도 12초 주기로 먼 바다를 향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등대에서 울려오는 무적의 음파가 가슴으로 느껴져 오는 듯했다. 등대에 대해 얘기해주던 조막손이 정 씨의 말이 떠올랐다.
“등대가 항로를 표지하는 방법 중에 그냥 빛만 비춰주는 광파光波와 무적을 울리는 음파音波 표지인데, 빛만 발하는 것은 12초 주기로 밤하늘에 궤적을 그리는 구원의 빛이지. 무적은 삼십초에 한 차례씩 4초간의 울림으로 항해하는 배들이 이 주기를 탐지하여 현재의 위치를 분별해내기 위한 것이네. 등대를 지키는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나, 먼 항해에서 등대에서 발하는 광파나 음파를 탐지하기 위한 절실한 마음들을, 그건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네.”
달리는 배들이 돌진하는 탱크와도 같아 보였다. 간밤에 주의보가 해제되어 나불도 점점 굼뉘로 잦아들었다. 기장살을 털며 출항을 하는 배들의 후아나 소리가 힘차게 들려왔다. 시커먼 물굽이 하얗게 뱃전에 부셔졌다. 막걸리같이 텁텁하고 북어 살같이 찝찔한 바닷바람이 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놓는다.
“속상하고 울화가 치밀 땐 바다가 감정을 잠재워주지. 바다 한가운데선 뭍에서의 잡다한 생각이 싹 가시고 가슴이 확 트일 테니까!”
구레나룻 이 씨나 조막손이 정 씨도 한 세상을 뜬금으로 물 흐르듯 살기로 작정한 듯하였다. 물보라를 치며 흰 거품들이 축항에 달려들었다.
요즈음의 불황인 어촌의 현실에 대해 이 모두가 해양수산부 관료들의 자질문제라고 비난하고 있었다. 남쿠릴 열도에서의 한국, 대만 등 제3국 조업금지에 합의함이 알려지자 우리 꽁치봉수망 업계가 러. 일 협상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강력히 반발했다.
한. 중 어업협정이 발효된 후 중국 배타적 경제수역(EEZ)에서도 우리 어선의 조업이 부진하여 어장성 부족인데다가 연안에서도 고기가 잡히지 않아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기름 값도 못하여 아예 바다에 나가지 못하는 배가 많았다. 바다의 고기는 고갈되는데 어선은 자꾸만 늘어났다. 그래서 정부에서 어선의 숫자를 줄이려고 오래된 선박을 보상하고 폐선을 시켰다. 그런데 선박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본인 명의로 돼있는 선박을 폐선하고 보상비를 받아 식구의 명의로 다시 배를 건조하는 것이다. 그러니 새 어선으로 교체하여 숫자적으로 줄기는커녕 오히려 경쟁만 심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면세유를 정부에서 지원한다 해도 어획량에 비해 기름 값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나는 방파제를 벗어나 다시 어판장으로 들어섰다. 인근 바다에서 따온 다시마의 미끄러운 점액질에 마침 떠오르는 햇살이 내려와 박혀 빛을 발했다.
고무로 된 검은 해녀복의 허리에 둘러쳐진 납덩어리가 너무 무거워 보였다. 저것도 한 생애의 무거운 짐이요, 긴 여정의 착종이고, 한 삶의 굴레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실은 바닥으로 쉬이 가라앉기 위해서 허리에 차는 것인데, 그러나 바다에서는 필요할지는 모르지만, 뭍에선 그냥 무거운 짐에 불과하여 저것도 삶의 무게만큼이나 같은 느낌이었다.
먼 바다에서 원양어선들이 치어까지 싹쓸이하는 바람에 연안까지 들어오는 고기 씨가 말라 어촌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이곳의 현실이 나를 옥죄이기까지 했다. 해미가 내 주위로 엄습해왔다. 나는 갑자기 복직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그래! 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아내의 거칠어진 손등에 터져 난 골로 포구의 해미가 파고들고 있지 않은가! 아내도 이만큼 고생했으면 된 것이다.”
나는 깊은 생각에 빠져들다가 다시마 줄기를 밟고 나자빠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성게 가시처럼 일어섰다. 해미를 몰고 오는 바닷바람이 자꾸만 주위를 엄습했다. 여기 현실을 타파하지 못하고 가는 것은 도피하는 것이 아니다. 내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나의 길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판장을 나와 걸으며 그동안의 어촌생활에서 느낀 현실을 아쉬워했다. 구레나룻 이 씨나 조막손이 정 씨의 삶이 그러하듯 나도 내게 닥친 쥐어진 삶을 다시 시작하리라 마음을 먹는다.
출항을 포기하고 정박해있는 배들이 물결에 출렁이면서 밴다지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바다로 나가고 싶다는 푸념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훅하고 바람이 불어와 나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간다. 나는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중얼거린다.
“해미는 언제 걷힐는지…….”
- 끝 -
<작가 노트>
바다는 언제나 거칠게 일렁인다.
지금의 어촌 실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공해상이 있고, 넘어선 안 될 분단의 북방한계선(NLL)이 엄연히 존재하고, EEZ(배타적 경제수역)인 연안국이 어업과 자원 등을 보유·관할할 수 있는 해역을 보통, 연안에서 200해리까지를 이른다는데 좋은 어장은 다 빼앗기고…….
아직도 해안을 끼고 둘러 처진 철조망이 분단의 현실을 말해주듯, 납북되었다 돌아와 어장 일을 하는 그들을 아직도 그 때의 일들이 옥죄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해안을 낀 산등성이에는 붉은 속살을 파헤쳐가며 길닦이에 한창이다. 금강산 육로를 뚫는 것이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일까! 아무리 면세유를 지원한다해도 어획고는 고갈되고. 어로작업을 나가자니 기름 값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어장은 피폐해져 가는데 말이다. 잡는데 전전할 게 아니라 길러서 잡아야 하는데 어촌은 너무도 영세하다.
여름이면 오징어 배가 집어등을 대낮같이 밝히지만, 노가리만한 오징어 세끼를 잡는 현실에서 더욱 더 암담하다. 어장의 고기는 씨가 말라가고, 나는 이 암담한 현실을 타파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주인공을 못내 아쉬워해야만 했다.
첫댓글 좋은 작품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졸작을 읽어주시고 좋은 글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작품을 드래그하여 올렸는데 지면이 매끄럽지 못해
미안합니다. 원인을 찾아 수정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