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와같이 전통적인 객관적인 미가 주관적인 것으로 전의되고, 숭고 등 다른 미적 가치의 대두로 상대화하면서 미의 대이론은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퇴조를 몰고온 18세기의 취미론조차도 취미의 기준으로서 객관적 미의 공식을 찾으려는 기도가 여전히 주된 관심사였다. P. 나이트나 D. 스튜어트 등이 미의 개념을 분석하여 이러한 작업이 무익하며, 동시에 불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판명할 때까지 '미'는 서구 미학사를 통해 가장 중요한 논의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20세기 현대에 이르러 '미'는 미학적 논의에서 사라졌거나, 기껏해야 동일 문맥의 미적 경험에 대한 논의 속의 한 요소로 해소되어버렸고, 대신 예술이 주된 관심사로 대두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미적 경험은 예술을 통해서만 획득되는 것이 아니며 자연을 통해서나 인간에게서도 얻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짙어졌다. 이것은 개념적으로 미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 간에 근본적인 구별이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이 구별은 단순히 두 개념의 외연이 아니라 내포의 차이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본래 '미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세계에 대해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취하는 어떤 태도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고, '예술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무엇을 창조(그것이 제작이든 표현이든)한다 할 때 그 창조활동의 특성을 지적하기 위한 말이다. 따라서 '미적 경험'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도 경험의 일환이라 생각하여 창조적 경험이라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원칙적으로는 창조를 위한 전 단계의 예술가의 경험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서구 미학사상의 초기단계에서 미론과 예술론의 문맥이 각기 달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연유한다. 즉 미적 경험은 미론의 문맥이고, 예술은 창조론(영감론이든 제작의 일환으로서 모방론이든)의 문맥에 속한다. 두 이론이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많은 이론을 낳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근대 이후 서구 미학이론의 특징이지 애초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는 예술이 주된 관심사이지만 고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는 미가 주된 관심사였다. 그러므로 미를 논할 때 예술이라 할 것이 거론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그것은 지극히 지엽적이거나, 그나마도 부정적인 입장에서였다. 그렇다면 고대를 통해서 예술이라 할 것들은 어떻게 이해되었을까? 예술이란 말과 그 근대적 체계가 없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이다. 그렇다면 서구 근대인들이 예술이라 부른 활동을 고대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을까? 애초에는 없었던 말과 체제가 성립되었다면 그것이 성립되는 과정을 알아보는 것은 서구 미학사상의 발전의 중요한 문맥을 파악하는 일이 된다.
발생 초기에 시·음악·춤은 상호 미분화된 활동이었다. 이처럼 말(시)과 리듬(음악)과 동작(춤)이 미분화된 채 통합된 인간활동의 특수한 형태를 고대 그리스인들은 '코레이아'(choreia)라 불렀다. 이 말은 현재 합창을 뜻하는 'chorus'에서 파생된 것으로 당시에는 군무를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코레이아란 특히 춤과 깊이 관련된 말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것은 고대 원시종교 형태인 제의의 일환인 축제와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인간활동의 형태이다. 제의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는 행사라면 축제는 그러한 기구를 촉진하기 위해 수반되는 행사이다. 이처럼 제의와 축제가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진행된 것이 초기에는 인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따라서 제의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종교적 측면과 예술적 측면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H. 쿤은 "축제는 예술의 모태"라고 말한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이러한 종교행사에서 사제가 신의 메시지를 기구하기 위해 신과 교감하는 신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엔토우시아스모스(enthousiasmos)라 했다. 이 말이 오늘날 영어 'enthusiasm'의 어원이 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볼 때 신적인 상태란 열광적인 상태, 즉 제정신이 아닌 상태를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대 미학사상에서 이같은 사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까닭은 종교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된 이 말이 예술현상이라 할 코레이아를 설명하는 데에도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코레이아가 동일한 종교행사의 일환으로서 참여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뿐 아니라 사제로부터 신의 메시지를 전달받기 위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 역시 사제와 같이 신에 열광된 상태에 빠져야 하며, 코레이아는 그러한 상태를 촉진하는 마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암시해준다.
이러한 엔토우시아스모스가 춤과 음악, 미분화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시의 발생에 적용될 때 '시적 정열'이 되기도 했고 라틴어 'inspirare'로 번역되면서 영어의 '시적 영감'이라는 말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시적 영감은 어떠한 의미로 고대 미학사상에 수용되었을까?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이 된다는 것은 시인 외부의 어떤 신적인 존재, 즉 뮤즈 여신에 게 사로잡힌 상태임을 뜻한다. 이것은 시인이 뮤즈에 홀렸음을 뜻하는 것이며 정신이 나간 일종의 광기(mania)의 상태임을 뜻한다. 시인에 대한 플라톤의 이같은 설명은 호메로스나 헤시오도스에게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그 이전부터 내려온 오래된 사고로서 플라톤 역시 이성으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비밀스러운 요소가 개입되고 있음을 인식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 때문에 시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것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시에 지식의 자격을 부여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입장과 아울러 순전히 이성에 의해 인도되어야 할 젊은이에게 격정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킨다는 윤리적 입장에서 시인추방론을 역설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인과 시를 부정적으로 여기는 플라톤의 태도를 두고 그가 시적 창조와 경험을 너무 천박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시의 창조를 영감에 결부시키고자 했던 것은 시의 창조가 이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특별한 힘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시가 지니는 불가항력적인 힘, 곧 시의 매력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피력하게 된 것은 시의 발생과 그 경험이 그러한 것이라고 해서 반드시 찬미될 수는 없다는 시대적·사회적 요구 때문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요구 때문에 플라톤이 비난하게 된 바로 그러한 시를 찬미하게 된 낭만주의 철학자들의 평가태도는 플라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시적 영감론은 오랜 세월을 거친 후 19세기 낭만주의에 이르러 상상과 무의식의 입장에서 다시 그 현대적 형태로 부활하고 있다.
시가 영감의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던 데 반해 회화와 조각은 고대 그리스적인 의미의 '테크네'(techne)라는 개념에 관련되어 이해되었다. 테크네란 동물과는 다른 인간의 한 특징을 이루는 기억에 의해 인간이 어떤 일을 하거나 어떤 것을 만들면서 경험을 쌓고, 그렇게 경험을 쌓는 중에 그것이 지성에 의해 조명됨으로써 그로부터 유도되는 일단의 규칙체계에 기초한 기술(craft)을 뜻하는 말이다. 이러한 의미의 테크네가 라틴어 'ars'에서 영어 'art'가 되었지만 본래의 테크네는 오늘날 예술이라고 불리는 회화·조각·건축과 같은 활동뿐 아니라 제약·농업과 같은 과학, 목공·제화·요리와 같은 단순한 기능(technique)에 적용되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제작(making)은 실천(doing)과 함께 테크네의 일환이 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테크네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분류했는데, 미학적 논의에 관련되는 것으로서는 〈소피스트〉편에 나오는 것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제작기술은 실물을 제작하는 기술과 실물의 이미지를 제작하는 기술, 달리 말해 실물을 모방하는 기술로 분류되어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 당연히 예술이라는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건축은 전자에 속하며, 회화나 조각은 후자인 모방에 속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러한 모방기술을 다시 분류하여 실물을 실물 그대로 닮은 이미지(eikon)의 제작과 실물을 변형함으로써 실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이미지(phantasma)의 제작으로 나누고 있다. 플라톤이 회화를 모방이라고 했을 때는 우리의 눈을 기만하는 이미지의 제작이라는 후자의 의미에서였다. 그러나 플라톤에게 모방이라는 말은 어느 점에서는 회화나 조각만이 아니라 시에도 적용되고 있다. 시인의 시는 시인의 창조가 아니라 신의 말씀을 대변하는 것일 뿐이다.
이처럼 시인은 신의 통로 역할을 하지만 마치 자기가 아킬레스인 양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 또 시인이 아킬레스를 흉내내고 있지 않다 해도 그의 시는 아킬레스에 관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시 속의 인물을 흉내내고 있다는 행위에서, 또 시는 시 속의 인물에 관한 것이라는 내용에서 시 역시 모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플라톤은 시인의 모방을 회화나 조각과 같은 모방기술의 하나로 보지는 않는다. 시의 발생은 어디까지나 영감의 소산이고, 회화와 조각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모방기술의 소산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신적 영감으로서의 시와 인간적 제작으로서의 회화, 즉 시적 창조와 기술적 창조라는 서구 미학의 이원적 창조관이 출발하게 된다. 그렇다면 모방으로서의 회화·조각에 대한 플라톤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플라톤은 회화를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을 위해 사람이 만든 꿈"이라고 규정한다. 이 규정은 이념계와 현상계를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그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내린 회화에 대한 비난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회화가 진정한 실재인 이념으로부터 두 단계나 떨어진 이중의 모방이고, 실재와 아무 관계가 없는 한낱 꿈 같은 사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방적이라고 규정한 시를 포함하여 모방기술로서 회화에 대해 플라톤이 〈국가〉 10권에서 행한 공격의 기본입장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플라톤은 영감된 시에 대해서는 인식론적 자격을, 모방된 회화·조각에 대해서는 존재론적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전자인 시가 비합리적 과정의 소산이라면, 후자에 대해서는 그 제작과정이 합리적임을 주장하고 있는 점에서 그의 모방론은 그후 르네상스 및 그로부터 발전된 신고전주의 예술관으로 이어진다.
예술과 체제와 개념
플라톤의 설명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시 부류의 표현적 예술과 회화 부류의 조형적 예술은 그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달리하고 있다. 따라서 2가지 부류의 활동을 하나로 묶는 개념이 없었다. 모방이 거론되는 경우에도 앞서 언급한 사실 때문에 모방은 양자를 실질적으로 종합하는 통일적인 개념으로 강조되기 힘들며, 동시에 거기에는 건축이 빠져 있다. 설령 건축이 포함되고 음악과 춤이 분리되는 과정을 고려할 때라도 모방은 근대 이후 서구인들이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2가지 부류의 활동에만 국한된 개념은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테크네의 일환으로서 특수한 부류로 모방기술을 논하고 있는 경우에는 예술 이외에도 궤변, 거울이나 마술의 사용, 나아가 동물 목소리 흉내내기와 같은 도저히 '아름답다'(fine)고 할 수 없는 그밖의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방 이외에 오늘날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다른 개념은 없을까? 이 점에서 간혹 유용한 기술과 오락술의 구분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여기서 후자는 예술을 수용하는 점에서는 모방기술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시 부류의 활동과 회화 부류의 활동이 동류로 여겨져 근대적인 예술체계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여러 형태의 단계적 논의가 있어야 한다.
먼저 뮤즈에 의한 비합리적 창조로 이해되던 시가 규칙에 입각한 인간의 제작으로 전의되든가, 아니면 그 역이든가 하는 계기가 마련되어야 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를 보편적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재해석함으로써 시가 전자의 의미로 전의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했다. 그의 〈시학〉은 이러한 입장에서 시, 특히 비극적인 시가 제작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시가 준수해야 할 규칙을 논한 시의 입법서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러한 시를 보편적인 인간행위의 모방으로 규정함으로써 시가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라고 했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거부했던 인식적인 자격을 시에 부여하고 있고,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시를 되살려놓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에 대해 행했던 방식으로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를 되살려놓고 있지는 않다. 즉 〈시학〉에 해당되는 화론을 남겨놓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전개될 회화의 운명에 치명적이었다.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 의해 이론적 계기가 부여되기 시작한 음악과 함께 시는 정신적 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이해되는 데 반해, 회화는 여전히 일체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볼 수 없는 사이비 기술(kolakeia)로서 순전한 수공의 의미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즉 신체를 경멸하는 철학적 입장과 신체노동을 하지 않는 귀족정치의 체제 때문에 화가의 사회적 지위는 시인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시를 인간행위의 모방이라고 규정했다고 해서 시와 음악이 곧 회화와 조각과 동류의 활동으로 간주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플라톤의 비난으로부터 회화나 조각이 구제되어야 했다. 우선 플라톤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이 일원론적인 것으로 변모해야 했는데 이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실체 개념이 회화를 구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는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 철학의 입장에서 회화를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새로운 철학적 입장에서 회화에 대한 논의는 그리스 문화를 계승하려는 과정에서 수행된 키케로나 세네카의 조각에 대한 논의가 있은 뒤에야 대두했다. 위의 2가지 계기,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과 회화나 조각에 대한 재평가를 일자의 개념을 기초로 새로운 일원론적 형이상학 속에 종합해놓은 사람이 바로 플로티노스이다. 그는 정신적이고 가치적인 이념과 감각적인 미 사이의 연속성을 말하는 중에 예술만을 열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인들이 예술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것은 여러 예술을 처음으로 일정한 원리하에 체계적으로 종합하고 있으며, 이념과 예술 간에 긴밀한 등식이 성립될 수 있는 첫 계기를 마련해놓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헬레니즘 시대를 통한 이러한 접근은 불안정한 것이었으며,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이내 고대적 사고로 회귀했다. 그러한 회귀는 곧 찾아오는 그리스도교의 교회철학과 결부되어 일어났다. 복음서의 정신과 금욕주의로 인해 예술은 고대 그리스 이래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획득해온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즉 그리스도교 정신은 감각을 매개로 하는 감각적인 미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미는 신과 그 창조물인 자연 속에서만 볼 수 있고 인간의 불완전한 작품 속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에도 많은 미학적 저술을 통해 미학적 사상을 제기했다고 해도 그것은 미 그 자체에 관한 논의일 뿐 예술에 관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는 중에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모방 개념 역시 사라지게 되었다. 신성으로서의 미를 모방하는 일은 우상을 조장하는 일이 되며, 따라서 미에 관해서만은 아니지만 설령 정신성을 드러내기 위해 가시적·감각적인 예술이 요구될 때라면 모방 대신 상징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예술이라는 것은 고대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7가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7가지 머캐니컬 아츠(mechanical arts)의 체제 속에서나 겨우 그 언급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전자에는 음악, 후자에는 건축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시는 문법이나 수사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으나 회화와 조각은 머캐니컬 아트에도 포함될 수 없을 만큼 그 중요성이 낮게 평가되고 있다. 이 경우의 중요성은 유용성을 말하는 것으로, 회화나 조각은 지극히 미미한 것으로 생각되어 캄포룽고의 라둘프나 생 빅토르 위고도 회화나 조각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조각가와 화가는 고대처럼 물질적 재료를 가지고 신체노동을 하는 직조인이나 석수와 동일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근대적 체제가 성립되기 위한 다음 단계의 논의는 회화나 조각이 시나 음악처럼 리버럴 아트의 자격을 획득하자는 데서 비롯되었다. 사실 1,000년의 한을 실현한 것은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서였다.
르네상스 시기는 신의 은총으로서의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자연적인 힘으로서 이성의 능력을 자각하고 발견해가는 시대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간은 신의 말씀인 성서에 입각해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이성으로 세계를 파악하게 되었다. 근대의 과학적 발견과 발명을 위한 철학적 기초가 서서히 확립되는 중에 화가에게도 자기 앞에 펼쳐진 비옥한 자연과 그 풍경이 소재가 되었다. 그래서 까맣게 잊혀졌던 고대의 모방 개념이 다시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바로 이같은 문맥에서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고대의 모방론을 다시 부활시키고 있다. 우선 과학에서 정확한 관찰이 요구되듯 회화에서도 정확한 모방이 문제되었다. 이를 위해 르네상스인들은 고대의 문헌을 통해 모방에 관한 여러 가지 규칙들을 발견하고 연구했으며, 따라서 원근법·해부학·심리학·인상학 등의 규칙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바탕에서 추후 미술론(theory of art)으로 발전된 새로운 교과의 싹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회화는 미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의가 발전되었다. 과학자가 자연을 관찰한 후 이성적으로 통찰할 때 그 배후로부터 보편적인 법칙, 곧 진리를 발견해내듯 화가도 이성을 가지고 자연을 통찰할 때 자연의 보편적인 모습인 미를 모방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보편적인 자연을 곧 플라톤이 이념이라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초월적 의미로서의 전통적인 이념의 개념을 심리적인 것으로 바꿔놓고 있다. 이같은 과정을 통해 진과 미는 동일한 자연의 서로 다른 양상이고 과학자와 화가는 동일한 지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확립되었다. 그리고 화가에 의해 모방되는 보편적 자연인 이념은 그에게도 이성적으로 파악되는 것이기에 이념은 일단 화가에 의해 구성되어 화가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머리에 떠오른 생각을 르네상스 화가들은 디자인(disegno)이라고 불렀으며, 그러한 디자인을 갖고 모방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회화나 조각은 물론 건축까지도 동일한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미술(Arti del disegno)의 체제가 처음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범주적으로 달리 분류되었던 건축이 회화와 조각과 함께 미를 구현하는 동류의 활동으로 여겨졌다.
이제 미술은 이론적으로는 과학과 같은 지적 활동의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으므로 그러한 이론적 기초 위에서 미술가의 사회적 지위를 승격시켜야 하는 문제가 남게 되었다. 미술가를 길드의 구성원으로부터 분리시켜 시인처럼 아카데미에서 교육시켜야 한다는 요구가 일어났고, 이에 따라 1563년 피렌체에 미술학원(Accademia del Disegno)이 세워졌다. 이론적으로 회화는 과학과 같은 정신활동이며 사회적인 입장에서 화가는 더이상 직인이 아니므로, 최종적으로 남은 문제는 미술도 시처럼 리버럴 아트의 일환임을 당당히 주장해야 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실제적 목적을 위해 취해진 이론적 기도가 호라티우스의 시구에서 따온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a poesis)의 이설이다. 왜냐하면 미술도 리버럴 아트의 일원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르네상스를 통해 리버럴 아트 가운데 3과(triuium:문법·수사·논리학)를 확대한 인문과학(studia humanitatis)에 논리학을 대체한 시와 회화가 평행이라는 사고를 발전시켜 양자가 동등한 활동이라는 이론을 세우면 되기 때문이다. 시와 회화의 평행론에 관한 뒤 프레소니의 〈미술론 Ars graphica〉은 이러한 논의의 귀결인 셈이며, 그결과 회화는 최소한 논리적으로는 시와 같은 활동으로서 리버럴 아트의 일원일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되었다.
시의 경우에 있어서 이러한 긍정적 논의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기를 통해 발전된 시적 모방의 개념에는 엄격한 규칙과 함께 플라톤에 의해 논의된 바 있는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 점에서 음악과 시는 다같이 보편적인 미를 모방하는 동등한 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과학으로서의 회화에 대한 사고에 있어서도 영감의 요소가 개입되고 있다. 그러므로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주는 점에 있어서 회화와 과학은 다를 바 없으나 양자의 그러한 차이 때문에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다같이 이성의 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 르네상스인들의 이성개념의 특징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성은 과학적 진리뿐 아니라 미와 선 같은 가치까지 파악하는 폭넓은 의미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J. 베이트는 선과 같은 최고의 가치를 파악하는 것이 르네상스적 이성개념의 특징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을 윤리적 이성이라 규정하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수학적 이성의 개념을 정립하는 문제가 그후 데카르트 철학의 기본과제가 되었다. 이제 "시는 그림과 같이"의 이설을 통해 시와 음악과 함께 회화를 필수로 한 미술 역시 리버럴 아트의 체제 속에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5가지 리버럴 아트는 미를 모방하고 있다는 점에서 18세기를 통해 '예술'(beaux-art)이라는 어법이 만들어졌다.
이상이 미학의 한 문제로서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와 개념이 만들어진 역사적 과정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사실은 예술이라는 말과 체제는 근대적 사고의 소산이며 그 개념은 비록 심리적인 것으로 바뀌었지만 형이상학적인 이념·자연·미라는 점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적 개념에 기초한 미의 모방을 데카르트 철학의 엄격한 이성의 개념으로 옹호하고자 한 것이 바로 신고전주의 예술관이다. 그러나 신고전주의 예술관은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계속적인 과학의 발달은 예술을 이성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갖게 했고, 따라서 진과 미는 동일한 것일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리버럴 아트의 체제가 붕괴되기에 이르렀으며, 예술은 자신의 정당성을 과학과는 다른 데서 구해야 했다. 여기서 예술은 이성이 아니라 상상의 문제이며 미는 비례와 같은 규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환기시키는 즐거움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예술의 개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경향은 경제적으로는 중산계급의 대두와 사회적으로는 개인주의적 성향에 편승하여 전통적인 고전적 경향을 점진적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첫댓글 미학이란 말 그대로 미(美)를 대상으로하는 학문, 즉 철학의 한 분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