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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라면 누구나 집착을 품기 마련이지만, 18세기말 연암 박지원을 비롯한 문인들의 집착은 유별났다. 우선 그들은 집착하는 대상에 귀천(貴賤)을 두지 않았다. 공맹(孔孟)의 말씀이나 고문(古文)만을 최고로 치고 나머지를 폄하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정약전은 ‘현산어보’ 를 통해 물고기를 조사했고, 이옥은 ‘연경’ 에서 담배를 논했다. 김덕형은 ‘백화보’로 꽃에 관한 족보를 완성했고, 이덕무는 ‘발압경’ 을 지어 한양에 사는 비둘기들을 세심히 살폈다. 이런 풍광은 서양의 철학자인 들뢰즈가 영화에 기대고 화가인 드가가 춤에 매료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끼는 대상을 관찰하고 정리하며 기록하는 순간이야말로 그 사람만의 색채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심노숭(1762~1837) 역시 화공(畵工)의 화재(畵材) 가운데 풍속화를 최하로 치던 당시의 상식을 비판하면서, "진실로 묘(妙)의 경지에 나갔다면 산수화(山水畵)이든 속화(俗畵)이든 가릴 게 무엇이 있는가!"라고 주장했다. 소설 ‘금병매’를 천하의 정취문자라며 칭찬하고 당대의 이야기들을 모아 ‘대동패림’이란 야사집을 편찬한 것도, ‘지금 여기’ 의 누추하고 속된 삶을 소중하게 여긴 탓이다.
심노숭이 특별히 집착한 것은 슬픔이다. 꽃과 새, 물고기 같은 생물뿐만 아니라 슬픔이란 감정 자체도 집착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1792년 아내가 죽은 후 30년 동안, 그는 26편의 시(詩)와 23편의 문(文)을 통해 아내 잃은 슬픔을 토로했다. 백년해로를 꿈꾸며 준비한 파주의 새집으로 죽은 아내를 관에 넣어 들어서는 대목이나 평소 아내가 즐겨 요리했던 쑥을 먹으며, “아내의 얼굴 위로 흙이 도톰히 덮이고 거기서 쑥이 돋아났다네”라며 탄식하는 대목에선 느꺼움이 절로 일어난다. 얼마나 지독한 슬픔에 잠겨 있었으면, 눈물이 마음에 있는지 눈에 있는지를 따져 물을까.
오래 전 도종환의 ‘접시꽃 당신’ 이나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에서 가족 잃은 슬픔의 깊이를 망연히 바라본 적이 있다. 세상에 대한 원망과 망인(亡人)에 대한 그리움의 응어리는 곱씹어도 삭혀지지 않는 법이다.
심노숭은 정한과 수심으로 가득 찬 불면의 밤을 글로 달랬다. “처음에는 수심만 보태는 듯하고 잠도 들지 못하더니, 이제는 거의 수심을 잊은 채 잠들 수 있게 되었다.” 아내를 그리며 써 내려간 시문이 슬픔을 키우는 대신 편안한 잠자리를 선사한 것이다.
집착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 않다. 혼자 웅크리지 않고 그 집착을 타인과 공유할 때, 비로소 눈물방울도 아름다운 시어로 바뀌는 법이다. 가족을 잃은 자 누군들 심노숭 만큼 슬퍼하지 않을까마는, 그처럼 자신의 슬픔을 감각적인 문체에 실어 정직하게 드러낸 이는 드물다. 이 가을 집착 하나 품으시기를. 그 집착에 단아한 에세이('눈물이란 무엇인가', 태학사, 2001) 하나 얹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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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소설가 · KAIST 교수(조선 2006.10.13)
추신: '그렇다'고 긍정하는 사람은 눈물의 의미를 알 것이고...
'그렇지 않다'고 부정하는 사람은 눈물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심노숭의 마음이 '그렇다'고 수긍되는 사람들에게
소망과 힘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 마디 곁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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