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 울릉
고려장
옛날 고려때에는 남자나 여자나 일흔살에 고려장을 하였다. 이섬에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둔 일흔살이 되는 할머니가 있어다. 고려장을 하기는 해야 하는데 살아있는 어머니를 산에
지고가서 묻을 수가 없었다. 망설이다가 할 수 없이 고려장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산에 가보니 높은 곳에 넓고 편편한 좋은 반석이 있었다. 어머니를 이 반석에 고려장 하기로
하였다. "어머니 ! 오늘은 어머니를 업고 놀러 갑니다."
"어디를?"
저 산에 좋은 반석이 있습니다."
"그래"
아들은 어머니에게 거짓말로 놀러 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벌써 아들의 뜻을 알았
고 아들이 할 수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알았다.
"어머니 업히시오" "오냐!"
아들도 어머니도 가슴이 찢어지는것 같았지만 서로 속내 말은 아니하고 업고 업혀 갔다. 길은 매우 멀었고 몇번씩 쉬고 쉬면서 가는데 어머니가 생각해 보니 먼길을 업고 가느라고 고될 뿐 아니라 밑만 보고 걷다가는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고 못 찾을까봐 걱정이 되어서 쉴때마다 나뭇가지를 꺽어 놓았다. 아들은 어머니가 나뭇가지를 꺽는 이유를 몰랐다. 아마 무심히 꺽으시려니 생각하였다. 그럭저럭 목적지인 반석에 도착했다. "어머니 여기요" "자리가 참 좋구나" 어머니는 슬프기만 했다. 그러나 아들의 섭섭해 하는 마음을 아는지라 말로 나타내지 앉았다. "너도 많이 먹어라" "예 먹습니다. 어머니" "기운이 빠졌지. 업고 오느라고" "괜찮습니다" "올해는 농사가 잘 되어야 할 텐데" "잘 될 겁니다. 비가 잘 오니까요" 고려장 하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이 잘 살기를 걱정해 주시는 어머니의 가슴은 얼마나 쓰리겠느냐 생각하니 아들의 가슴은 찢어지는 것 같았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어서 거짓말로 "어머니 ! 여기 계십시오. 집에 가서 저녁밥을 가져 오리다" 하고 갈려고 하자 어머니는 아들이 산에 자기를 버리고 가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얘야 길을 찾겠느냐. 길을 모르겠거든 나뭇가지 꺾인 것을 보고 따라 가거라. 내가 올 때 가끔 나뭇 가지를 꺾어 놓았다." 이 말을 들으니 아들의 가슴은 더욱 더 찢어질 것 같았다.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허둥지둥 갈피를 못 잡았다. "왜 일흔살이 되면 고려장을 해야 하나. 원수 같은 일이로다" 하고 한탄을 하면서 걸었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가 살림 걱정이며 길을 잃을까 걱정하명 나뭇가지를 꺾어 두었더라는 얘기를 아내에게 했더니 아내도 울면서 "여보, 법이 다 뭐요. 어서 어머니를 모셔 옵시다." "정말이오?" "정말이지요." "법인데?" "그 법에 따라 우리가 벌을 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아들은 아내 보기가 부끄러웠다. "당신은 마음이 참 착하오." "어서 가보시오. 어머니가 추우실테니 밤에라도 가서 업고 오십다." "그럽시다." 아들은 등불을 켜 들고 그 반석이 있는 곳을 찾아 갔다. 반석 가까이 가니까 무슨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는 불도 꺼지고 없었다. "이상하다" 무서운 기운이 들었다.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 오르는 것 같았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신령님께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용왕님께 비나이다 우리아들 풍년들어 바리바리 실어다가 노적쌓아 두고두고 먹고남고 쓰고남고 오래오래 길이길이 부귀영화 누리도록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고 아들 잘 되기를 빌고 있지 않은가. "어머니 !" 하고 앞에 꿇어 앉으니 아들내외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온 산이 울음 바다가 되었다. 일흔이 넘었는데 고려장을 하지 않고 어머니를 모셔온 일이 온 누리에 퍼졌다. 그러자 이 이야기가 임금님게 알려저서 아들이 임금 앞에 불려가게 되었다. "너에게 일흔 노모가 있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고려장을 했느냐?" "못 했습니다." "국법을 어긴 까닭은?" "예, 황송하오나 이러이러 하옵니다." 임금앞에 꿇어 앉은 아들이 전후 이야기를 하자 임금님도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고려장하려고 업고가는 줄을 알면서도 아들이 길을 잃을까봐 나뭇가지를 꺾었단 말이지?" "예, 그러하오니 그 사랑에 감동하여 다시 집으로 어머님을 업고 왔나이다." "알겠다. 효성이 지극하구나" 임금님은 그 아들에게 양식과 베를 한 짐씩 상으로 주어 칭찬하고 그때부터 법을 고쳐서 "나이 일흔이 되더라도 고려장하는 것을 아니하여도 좋으니라" 하고 어명을 내렸다 한다.
var Long_URL=doc-ument.domain; TMPdomain=Long_URL.split(".");if (TMPdomain.length==4) { ID = TMPdomain[0]; } else { ID = TMPdomain[TMPdomain.length - 4]; } doc-ument.writeln('')
경남 - 고성
황소바위의 전설
옥천사 입구에 있는 백련암의 황소바위라 불리우는 큰 바위로 옛날 옥천사를 창건할 때 청연암에 황소 한 마리가 나타나서 물도 날라주고 돌도 치워주고 나무도 날라 주는 등 많은 일을 도와 주었는데, 절 낙성때 큰스님이 황소의 공을 치하하여 소목에 염주를 걸어 줄려는 찰나에 갑자기 황소의 몸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 오르더니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황소바위로 부르고 있다. 그 후 임진왜란때 왜병이 이곳에 침입하여 옥천사를 불태우고 자방루에서 조련하고 있던 승병들이 황소바위 앞에서 진을 치고 염주를 들고 불공을 드리고 있는 것을 보고 왜장이 나타나서 바위를 부수려고 정을 내려치자 바위에서 붉은 선혈이 치솟아 왜병들이 모두 피투성이가 되어 도망치게 되었고 우리 승병들은 용기 백배되어 왜병을 격퇴하고 옥천사를 지켰다는 전설이 있는 호국수암의 바위이다.
전라북도 - 익산시 해발 162m의 낭산 정상에 있는 산성 구성, 마한성 등으로도 불리는데 마한성이라고 하는 것은 고조선의 기준왕이 내려와서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마한시대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마한시대에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성 안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고, 후세에 와서 익산 일대가 마한의 옛 도읍지였다는 점에서 마한성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정상을 둘러싼 형태로 북쪽은 거의 정상에, 남쪽은 일부 골짜기를 감싸고 있다. 현재 남쪽에 남아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2.8m 가량이 되며, 물 흐르는 곳이 2군데가 확인되었다. 또한 남쪽과 동쪽 그리고 서쪽의 성문터가 남아 있으며, 성의 동남부에서 주춧돌로 보이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어 건물 터였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전라남도 - 화순군
도깨비 소(沼) |
북면 옥리 이구(北面 玉里 二區) 는 옛날부터 구수리라고 불려 온 마을이다. 이 마을 앞을 흐르는 시냇물은 동북천 상류로서 이 곳에서 800m 떨어진 곳에 도깨비소라고 하는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나주군 노안 땅에 박칠덕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부잣집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을 남의 집에서 종노릇 하며 사는 것이 억울하여 비관하고 있던 중 하루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말하기를 화순 북면 옥골이란 고을을 찾아가면 논밭이 많으나 사람이 적게 살아 마음 놓고 농사를 지을 수 있다고 하였다. 칠덕이는 즉시라도 옮겨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님과 한자리에 앉아 그 손님이 알려 준 화순 북면 옥골에 대한 말씀을 드렸다. 어머니도 쾌히 승락을 하여 이사를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후 어린 여동생 둘과 어머님을 모시고 그는 말만 들은 화순 북면을 찾아 나섰다. 버들잎 파릇파릇하고 종달새 우는 산마루를 돌아 그림같은 산골 마을들을 두루 살펴보며 오고 가는 행인들에게 옥골 땅을 묻고 물어 지금의 구수리(九水里) 에 도착하게 된 것이었다. 돈 한푼 가진 것 없이 적수공권으로 찾아 들어 온 칠덕이는 우선 산나물을 캐서 죽을 쑤어 먹으면서 여러가지 약초를 캐가지고 부잣집과 한약방을 찾아다니며 팔아 곡식을 마련하여 어머님을 봉양하고 어린 동생들을 보살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한 효심은 지극했고 동생들에 대한 우애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칠덕이는 어느덧 열여섯살이 되었다. 무엇인가 달리 살 방도를 취해야 했다. 「 어머님, 제가 어언 나이가 이처럼 되었으니 부자집 머슴살이로 가면 벼 닷섬을 주겠다고 하니 일년만 고생하고 돌아오겠읍니다. 」 어느날 그는 어머니께 청하였다. 처음에는 승락을 하지 않았으나 칠덕이의 끈질긴 간청에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승락을 했다. 그뒤 칠덕이는 이웃 마을 서유리에서 몇년동안 고생하여 전답 몇마지기를 마련하였다. 가족들과 함께 농사에 온갖 고생을 다 하였으나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수확의 기쁨은 더욱 컸다. 그러던 어느해 칠덕이는 또 다시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일이 한가한 틈을 타서 자본이 적게 들고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바구니 장사를 해볼 생각이었다. 그는 돈 몇냥을 준비하여 품속에 넣고 담양 땅을 찾아 갔다. 담양에서 바구니를 사가지고 순천(順天) 에 가서 팔았다. 장사가 처음부터 의외로 잘 되어 칠덕이의 팔자는 날로 풀려갔다. 장사에 모든 정력을 쏟아 재미를 톡톡히 보게 된 칠덕이는 눈, 비를 가리지 않았다. 담양에서 산 바구니를 순천 고을에서 팔면 몇곱의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남에게 말 못할 기쁨속에 발 걸음은 더욱 가벼웠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 장마가 계속 되는 바람에 두달만에 겨우 바구니를 모두 팔고 승주군 운월치(雲月峙) 를 넘어 고향집을 찾아 가는 길이었다. 그리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눈앞에 그리면서 바쁜걸음을 재촉하여 험한 고개를 넘어 가는 길어었는데 난데없이 무서운 도적떼들이 나타나 칼을 들이댔다. 「 너 이놈! 돈 내라! 」 칠덕이는 어쩔 수 없이 주머니 돈을 모두 털어주고 말았다. 빈털털이가 된 칠덕이는 고향 부모님에게도 갈 수 없어서 그 길로 다시 담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바구니를 대주던 주인을 찾아 자초지종의 사실을 모두 얘기했다. 주인도 칠덕이의 효심에 감복하여 물건을 외상으로 밀어주었다. 그길로 그는 순천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다. 밤낮 삼일만에 순천에 이르러 몇일동안 장사를 한 후 허둥지둥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백여일만에 집을 찾아 온 칠덕이는 좌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어머니 방문을 열었다. 왠일인지 방 안에 어머니는 안 계시고 어린 동생만 방에서 울다 지쳐 자고 있었다. 어린애들을 깨워 물어보았다. 동생들이 울며 대답했다. 「 어머니는 밥 얻으러 가셔서 지금까지 오지않아요.」 이웃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으나 모두가 모른다고만 했다.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며 물어보았으나 어머니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어머니를 부자집 홀아비가 데려가 버렸다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은 칠덕이는 천지가 무너진듯 앞이 캄캄했다. 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어 그는 반미치광이가 되어 허둥지둥 돌아다녔다. 밤이나 낮이나 어머니 생각에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낮이면 해처럼 밤이면 달처럼 의지하고 살아 온 어머니의 일을 생각하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날이 가면 갈수록 어머니 생각 때문에 잠을 못이루고 뒤척이며 괴로와 했다. 차라리 목숨을 끊어버릴까도 생각했지만 어린 동생들의 일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는 잠든 동생들의 머리맡에서 눈물을 흘렸다. 칠덕이는 그길로 집앞 연못을 찾아가 몸을 던지고 말았다. 갑자기 <풍덩!>하는 소리에 놀란 도깨비들이 모두 나타나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칠덕이를 건져 등에 업고 그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방에 누워 있는지 몇시간이 지나 칠덕이가 깨어보니 다시 자기집 방이었다. 그는 이상히 여겨 이튿날 밤 자정에 다시 죽을 양으로 그 깊은 못을 찾아갔다. 이번에도 또 다시 도깨비떼들이 나타나 칠덕이를 건져낸 다음 그를 설득하였다. 「 당신은 어린 동생으로 보아 죽어서 안될 사람이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시오.」 「 어제밤에도 우리가 집에까지 모셔다 드렸오.」 이 말을 들은 칠덕이는 크게 뉘우쳐 집으로 돌아와 어린 동생들과 더불어 재생의 길을 찾았다. 살림도 점점 늘어났다. 그는 밤마다 도깨비들이 못가에서 모여 노는 것을 보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 주었던 그 도깨비들에 대한 은혜를 저 버릴 수가 없었다. 생각끝에 그는 도깨비가 많이 모여 노는 곳에 정자를 지어 주었다. 그뒤 도깨비들이 밤이면 모두 이 정자에 모여 놀면서 풍물놀이를 하면 기호장관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칠덕(朴七德) 이와 정자는 온데 간데 없고 정자 주춧돌만 쓸쓸히 남아 그 옛날의 사연을 전해주고 있다.
* 이밖에도 많은 전설들이 내려져 오고 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