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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6 | 덕숭산/수덕사 원행기 | 2008-11-04 오후 3:57:07 |
기주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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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숭산((德崇山) · 수덕사(修德寺) 원행기"
지난 주말에 충남 덕산 가야산 남쪽에 위치한 덕숭산(450.2m)으로 산행을 다녀왔다. ROTC 7기생들의 등산모임인 토요산악회 회원과 가족 회원 40여 명이 일행이 되어 가을 원행을 다녀온 것이다. 인생사가 다 그렇듯 여행이나 원행도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느끼기 마련이다. 그래서 보다 알찬 산행을 위해 떠나기 전에 그 지역에 대한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인문지리에 대해서 간략히 알아보았다. 오대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려온 차령산맥의 줄기가 서해 쪽으로 내려오다 마지막 용틀임을 하듯 북쪽을 향해 치솟은 땅이 가야산(678m)이다. 이 가야산을 둘러싸고 있는 예산, 서산, 홍성, 태안, 당진, 아산 등 주변 고을들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넓은 평야지대로 예전엔 내포(內浦)라 했고 지금도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 부른다. 이 고장 사람들은 사는 행정구역은 서로 달라도 친근한 동향의식을 갖고 살아간다. 내포 땅이 배출한 인재들을 보면 최 영 장군을 비롯하여 사육신 성삼문, 이순신 장군, 추사 김정희, 김대건 신부, 윤봉길 의사, 시인 한용운 등 근·현대사를 통해 실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모두 쉽지 않은 분들로 비록 제 명을 다하지 못할망정 의(義)를 다한 분들이다. 인걸지령(人傑地靈)이라 했으니 이는 아마도 가야산의 정기와 관련이 있을 듯싶다. 서초구민회관 앞에 대기시킨 관광버스에 탑승한 일행은 인원점검을 마치고 아침 8시 정각에 양재역을 출발해 죽전 승강장에서 기다리는 회원들을 픽업한 후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김밥과 간단한 간식거리 및 당일 시간계획표와 원행지에 대한 안내 유인물을 받은 후 임원진들의 인사말과 산행에 따른 간단한 주의사항이 전달되고 수덕사에 대한 간략한 소개가 있었다. 행담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출발한 버스는 10시 30분에 덕산도립공원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수덕사 경내로 가는 길목 양쪽 상가엔 탐스럽게 익은 홍시를 비롯하여 사과, 대추, 밤, 은행 등 온갖 과일들이 진열되어 볼거리를 제공해 우리의 마음을 풍요롭게 해 주었다. 수덕사 경내는 오후에 둘러보기로 하고 곧바로 사찰 서쪽 계곡을 끼고 돌계단으로 치장한 등산로를 따라 정상을 향했다. 산 중턱 남쪽으로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전해 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특히 이 수덕사의 중심건물인 대웅전(국보 제49호)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년)에 건립된 것으로 올해가 마침 건립 700주년이라 지난 10월 18일, 이를 기념하는 법회가 이곳에서 열렸다고 한다. 예로부터 덕숭산(德崇山)은 ‘호서(湖西)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산이라더니 과연 송림이 우거지고 숲속에 기암절벽들이 한 떨기 꽃송이처럼 솟아있어 등산객의 마음을 포근하게 해 준다. 수덕사에서 정상까지는 약 한 시간 거리로 우리 회원들이 매주 오르는 청계산 매봉(582.5m)보다는 좀 낮고 옥녀봉(375m)보다는 약간 높아 함께 오르기에 큰 부담이 없었다. 계단을 따라 30여 분쯤 오르니 산 중턱의 등산로 오른 쪽으로 만공 선사(滿空禪師)가 세웠다는 25척의 미륵불 입상과 그 옆으로 약수터가 있다. 정혜사의 약수는 그 보호각에 ‘佛乳閣’이란 현판이 있다더니 아무튼 샘물을 ‘부처님의 젖’에 비유한 만공의 심사도 헤아릴 겸 약수로 목을 축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다시 위쪽으로 오르자니 만공이 참선도량으로 세웠다는 정혜사(定慧寺)의 능인선원(能仁禪院)과 그 우측에는 만공탑(滿空塔)이 있었다. 능인선원, ‘능인(能仁)’은 능히 인(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석가모니를 달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선 아마도 통일신라 초기 문무왕 때의 고승인 의상(義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동문인 표훈(表訓)과 함께 금강산에 표훈사를 창건한 승려 능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만공의 사리탑인 만공탑 뒷면엔 ‘世界一花’라고 크게 새긴 글씨가 써 있고 그 밑에는 작은 글씨로 ‘千思不如一行’이라 새겨 있었다. ‘천 번 생각하는 것이 한 번 실행함만 못하다’는 뜻이니 이를 마음에 새기며 다시 정상에 향했다. 정상에 오르니 서해와 내포평야가 일망무제로 펼쳐져 일말의 호연지기를 느끼게 한다. 잠시 사방을 조망하고 일행들이 식사할 장소로 돌아와 길게 둘러앉아 각r자 집에서 준비해 온 음식들을 내 놓고 여기저기서 건배사가 이어지니 흡사 야외 만찬장을 방불케 하였다. 반짝반짝 가을을 물들이는 다정한 가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주황색 단풍이 물들어 가는 만추의 서정을 만끽하노라니 이 또한 여간 큰 축복이 아니다. 모두 술잔을 기울이며 건강과 우정의 재창조를 위해 웃음꽃들을 피우는데 건강을 잃고 술잔을 입에 올렸다 다시 내려놓는 이 심정을 누가 짐작이나 할까. 옛적에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는 노년에 병이 들어 중양절에 산에 올라 술잔을 앞에 놓고 ‘늙고 사오나오매 흐린 술잔을 새로 멈추었노라(燎倒新停濁酒杯)’고 노래한 시구를 떠올리며 역지사지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어느새 하산 예정시간이 되어 앉았던 자리엔 추억의 웃음꽃과 이야기들만 남기고 자리를 정리한 후 수덕사로 향했다. 수덕사의 대웅전은 정확한 건립연대를 알 수 있는 국내 몇 안 되는 목조건축물의 하나다. 건축양식의 특징은 목조 배흘림기둥에 맞배지붕으로 벽면의 조형과 마름모꼴 사방 연속무늬 창살이 단아함과 근엄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유홍준은 그가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이 대웅전 하나만을 보기 위해 수덕사를 열 번 찾아온다 해도 그 수고로움이 아깝지 않다’고 극찬하였고, 부안 내소사의 창살무늬가 화려한 아름다움의 극치라 하지만 그것을 수덕사 대웅전에 비하면 바둑으로 쳐서 9단과 5단의 차이라고 평한 바가 있다. 대웅전 동쪽 건물엔 만공이 초서체로 ‘염화미소(拈華微笑)’라고 쓴 현판이 눈길을 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염화미소란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으므로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 말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만공(滿空, 1871∼1946) 스님은 일제시대 때 조선불교의 법통을 지킨 스님으로 오대산 상원사를 살신성인으로 지킨 방한암 선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고승의 쌍벽을 이룬 큰스님이다. 13세에 어머니를 따라 출가하여 정진수행하면서 수많은 납자(衲子)들을 배출한 만공은 ‘칠선녀와선(七仙女臥仙)’이란 말이 생길 만큼 법도를 넘어서는 호방함으로 숱한 일화를 남긴 스님이기도 하다. 반승반속(半僧半俗)의 고 은 선생은 만공의 이러한 모습을 한암 스님과 견주어 한암이 곧고 높다면 만공은 걸리는 바가 없었으니, 그 높이나 넓이는 같다고 하였다. 불경(佛經)과 선(禪)과 독행(獨行)을 각각 10년씩 30년을 수행해야 고승(高僧)이 될 수 있다는데 만공은 이를 다시 초월해 나름의 법통을 이루어 우러름을 받았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많은 후학들이 지금도 그의 법맥을 계승하고 있으니 인간은 다만 도덕률의 잣대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수덕사는 김일엽(金一葉, 1896~1971) 스님이 출가한 곳으로 더욱 유명해진 사찰이다. 일엽 스님은 사랑에 실패하고 33세 때 만공 스님을 만나 이곳 견성암에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그의 본명은 김원주(金元周)인데 ‘일엽(一葉)’이란 이름은 한국의 일엽이 되라는 의미로 춘원 이광수가 지어 준 이름이라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일엽은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동경 유학까지 한 여류시인이요, 인텔리 여성이다. 또한 여류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한 문학도의 신여성으로 자유연애론과 신정조론을 주장하며 당시의 사회적 도덕률에 도전하는 대담한 글과 처신으로 숱한 화제에 뿌렸던 가슴이 뜨거웠던 여성이다. 경내를 두루 살펴보고 일주문을 나서려는데 서쪽으로 작은 다리 건너에 초가로 개축한 수덕여관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들러 객실과 뒤뜰을 돌아보았다. 나혜석과 고암 이응로 화백이 한동안 머물며 거처하던 곳이라 옛 정취를 그대로 느낄 수는 없으나 고인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했다. 객실엔 현재 고암의 작품들이 걸려 있고 뒤뜰에는 동백림 사건 당시 이 화백이 잠시 머물며 화강암에 새겼다는 추상 암각화 2점만이 남아 임자 없는 집을 지키고 있었다. 경내 탐방을 모두 마치고 지친 다리를 끌고 일주문을 나와 주차장으로 가 버스를 타고 덕산관광호텔 온천장 에 들러 피로를 풀며 온천욕을 즐겼다. 온천욕을 마치고 꺼먹돼지 명가 ‘선사시대’라는 식당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뒤풀이 행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며 돌아가며 많은 건배사와 덕담들을 나누었다. 인생의 경륜이 담긴 가슴에 와 닿는 덕담들을 화기애애한 가운데 나누다 보니 어느새 출발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귀가하는 길엔 좋아하는 노래도 한 곡씩 부르며 덧없는 세월의 아쉬움을 달랬다. 오늘도 더없이 행복하고 소중한 하루였다. 내일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은 신이 우리에게 내리는 축복의 선물이다. 오늘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다 보면 인생 전체가 충실한 삶으로 채워질 것이다. 나이가 들면, 아니 건강을 잃은 경우라면 더욱 오늘에 초점을 맞추어 사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 생각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오늘 살아 있음과 단잠을 잘 수 있음을 감사한다. 그리고 좋은 인연들과 동행하며 걸을 수 있음을 감사한다.(2008. 1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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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고맙 습니다 박 원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