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 재 지: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 ❏배향인물: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한원진(韓元震) 윤봉구(尹鳳九) 송환기(宋煥箕) ❏창건연도: 1712년(숙종 38) ❏향 사 일: 음력 3월 중정(中丁) |
고령군 내의 유일한 노론계 서원이다. 원래의 행정구역은 성주군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고령군이 되었다. 1712년(숙종 38)에 송시열(宋時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성주군은 송시열의 연고지가 아니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게 되자, 송시열이 거제에서 귀양에서 풀려나 향리로 돌아가는 도중 이곳에 이르실 때 여러 제자들과 노촌들이 나와서 맞이한 곳이다. 그리고 장기에서 거제로 귀양지를 옮길 때도 이곳을 거쳐간 일이 있어서 이곳 사림들이 송시열을 기리기 위하여 영당을 세웠다.
그 뒤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권상하(權尙夏)·한원진(韓元震)·윤봉구(尹鳳九)·송환기(宋煥箕)를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46년 지방유림에 의해 복원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후기의 학자·명신으로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庵)·화양동주(華陽洞主),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송갑조의 아들이며 사계 김장생과 신독재 김집으로부터 사사받았다. 27세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635년에는 봉림대군의 사부가 되어 훗날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고 향리에 낙향하여 10년간 학문에만 몰두하던 중 1649년에 효종이 즉위하자 기용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이후 송시열의 정치 생활은 북벌·예송과 관련하여 부침(浮沈)을 계속하였다.
조정에 나아가기보다는 향리에 은거한 기간이 대부분이었으나 사림의 중망 때문에 서인의 거두로, 혹은 노론의 영수로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689년의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하면서 유배와 사약을 받은 이후, 송시열의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 간의 칭송과 비방이 무성하였다. 그러나 1716년의 병신처분과 1744년의 문묘 배향으로 그의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은 공인되었고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의 일당 전제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역사적 지위는 더둑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송시열의 서원 제향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대대적으로 추진되어 청주의 화양서원을 비롯, 수원 매곡서원, 영동의 초강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강릉의 오봉서원, 경주의 인산서원 등 전국적으로 약70여개 소에 이르며 사액(賜額) 서원만도 37개소가 된다. 저서로는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경례의의 심경석의 찬정소학언해 주문초선 계녀서등이 있고, 문집으로는 우암집(167권)·송자대전(215권) 송서습유(9권) 속습유(1권) 등이 간행되었다.
2)권상하(權尙夏, 1641~17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치도(致道), 호는 수암(遂菴)·한수재(寒水齋). 서울 출신. 아버지는 집의 격(格)이며, 우참찬 상유(尙游)의 형이다.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에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중, 1668년에 스승 송시열이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우의정을 사직하자 유임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에는 앞서 1659년(효종 10) 효종의 승하시에 있었던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가 다시 발생해, 송시열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덕원(德源)에 유배되는 불운을 당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남인의 정권에서는 관계에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고 청풍의 산중에 은거해 학문과 교육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게 되어 송시열은 다시 제주에 위리안치되고, 이어서 사약(賜藥)을 받게 되자, 유배지에 달려가 스승의 임종을 지키고 의복과 서적 등 유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송시열이 죽음에 임해 남긴 유언에 따라 괴산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와 대보단(大報壇)을 세워 명나라 신종(神宗: 임진왜란 때 군대를 파견하였음)과 의종(毅宗:나라가 망하자 자살함)을 제향하였다.
숙종 재위중에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고, 그 뒤 1689년에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 1694년에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득세하는 등 서인과 남인간에 당쟁이 치열했지만, 그는 당쟁에 초연한 태도로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1703년 찬선, 이듬해 호조참판에 이어 1716년까지 13년간 해마다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그 밖에도 1705년 이조참판, 찬선, 1712년에 판윤, 이조판서, 1717년 좌찬성, 우의정·좌의정, 1721년(경종 1)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송시열의 제자 가운데 김창협(金昌協)·윤증(尹拯) 등 출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권상하는 스승의 학문과 학통을 계승해 뒤에 ‘사문지적전(師門之嫡傳)’으로 불릴 정도로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이와 같은 학파적인 위치로 인하여 정쟁의 소용돌이에 관련되기도 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임을 밝혀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또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윤휴(尹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고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해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 명과 대사간 이관명(李觀命), 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당쟁기에 살면서도 정치 현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서경덕(徐敬德)·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이이(李珥)·성혼(成渾) 등 선유(先儒)들로부터 제기된 조선시대 성리학적 기본 문제에 대하여 규명하려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논쟁(同異論爭)으로써, 호락 논변이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인성이 물성과 다른 것은 기(氣)의 국(局)때문이며, 인리(人理)가 곧 물리(物理)인 것은 이(理)의 통(通)때문이다.’고 한 이이의 이통기국(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상이론(相異論)에 동조하였다.
인성·물성의 상이론의 발상은 본성을 후천적인 것, 즉 기질의 다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본성을 동물성으로부터 분별, 보호하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본성의 문제를 물성과 관련해 이해하려는 태도는 인성론이 자연물에까지 확대된 형이상학적 전개로서, 이황·이이 이래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발전상을 보여주는 이론이다.
17세기 이후 조선성리학이 예학(禮學)에 의해 구체적인 사회 규범으로써 경직되어가는 학문 풍토에서 인성·물성 상이론의 제기는 예학적 학문 이론을 활성화하고 심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겠다고 할 수 있다.
이단하(李端夏)·박세채(朴世采)·김창협 등과 교유했으며, 문하에서 배출된 뛰어난 제자로는 한원진·이간·윤봉구(尹鳳九)·채지홍(蔡之洪)·이이근(李頤根)·현상벽(玄尙璧)·최징후(崔徵厚)·성만징(成晩徵) 등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가 있다.
글씨에 능해 <기백이태연표 箕伯李泰淵表>·<형참권극화표 刑參權克和表>·<부사과이숙표 副司果李塾表>등의 작품이 전한다.
청풍의 황강서원(黃岡書院) 등 10여 곳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한수재집≫·≪삼서집의 三書輯疑≫ 등이 있는데 ≪한수재집≫은 1979년 양장으로 영인, 간행되었으며, 가전되던 영정을 영인본에 수록하고 있다.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3)한원진(韓元震, 1682~175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소(德昭), 호는 남당(南塘).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상경(尙敬)의 후손으로, 통덕랑 유기(有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숭부(崇阜)의 딸이다. 송시열(宋時烈)의 고제(高弟) 권상하(權尙夏)의 제자들인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인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8세에 공부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문장 파악이 매우 느렸으나 수년을 지나자 한 번 본 문장은 곧바로 암기할 정도로 뛰어났다. 12세에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성인처럼 상례를 지켰다.
1717년(숙종 43) 학행으로 천거받아 영릉참봉이 되었고, 1721년(경종 1)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5년(영조 1) 경연관(經筵官)으로 뽑혀 학문을 진강,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맹자≫의 ‘신시군여구수(臣視君如仇讐)’의 구절을 인용하여 소론을 배척하다가 탕평책에 어긋난다 하여 삭직되었다. 1741년 김재로(金在魯) 구명운동으로 복직, 그 뒤 장령·집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다.
재지(才知)가 뛰어나고 사리에 명철했으며, ≪주역≫·≪시경≫·≪서경≫ 및 사서(四書), ≪태극도설≫·≪통서 通書≫·≪계몽 啓蒙≫ 및 여러 경세서(經世書) 등을 정독하여 성리학설에 정통하였다. 그 밖에 율려(律呂)·천문·지리·병가·산수 등의 서적까지도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학문과 사상은 당시 성리학의 중심 과제에 두루 미치고 있었으며, 17, 18세기 성리학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실학이 남인 학자층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여 이이(李珥)·송시열·권상하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여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심성론논쟁(心性論論爭)에서 낙론(洛論)인 이간(李柬)을 중심으로 하는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의 주장에 반대하여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인물성이론의 주장을 대표하였다.
그의 심성설의 구조는 우주만물의 생성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 우주에는 양건(陽健)한 기(氣)로서 남성적인 것이 되며 음순(陰順)한 기로서 여성적인 것이 되는 기화(氣化)의 단계, 음양의 기가 모여서 만물의 형체를 이루는 형화(形化)의 단계가 존재하며, 형화를 통해 형성된 형체의 내부에도 기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처럼 만물의 생성을 기화, 형화, 형화 속의 기화 등과 같은 삼층의 구조로 파악하며, 이 삼층구조를 심성설에 적용하여 성(性)을 삼층구조로 파악한 것이 성삼층설(性三層說)이다. 그는 이 성삼층설에 입각하여 성을 인간과 사물이 같은 초형기(超形氣)의 성, 인간과 사물이 다른 인기질(因氣質)의 성, 인간과 인간이 서로 다른 잡기질(雜氣質)의 성 등으로 구분하여 파악하였다.
또한 성은 이(理)가 기질 속에 내재된 뒤에 운위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이이의 생각을 계승하여, 인성과 물성은 기질을 관련시키는 인기질의 차원에서 비교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사고를 근간으로 그는 인성과 물성은 다르다는 주장을 전개한 것이다.
미발심체(未發心體)의 문제에 관한 논쟁에서도 그는 미발(未發)의 심체(心體)는 본래부터 선하다고 주장하는 이간과는 달리, 미발한 심체에도 선악의 가능성이 공재하는 것으로 파악하여 미발심체유선악설(未發心體有善惡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학문적 관심은 ≪주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학에도 미치고 있었으며, 그와 관련된 저술로 ≪역학답문 易學答問≫·≪역학계몽 易學啓蒙≫·≪거관록 居觀錄≫·≪문왕역석의 文王易釋義≫ 등이 있다.
이들 저술을 통해 볼 때, 역에 관하여 자연지역(自然之易)·괘획지역(卦劃之易)·문자지역(文字之易) 등이 있다고 하는 독특한 사고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 의미를 윤리도덕적으로 파악하는 성리학적인 역학관의 입장에 섰다. 그의 많은 저술 가운데 1741년에 저술한 ≪주자언론동이고 朱子言論同異攷≫는 송시열이 착수한 것을 그의 스승인 권상하를 거쳐 50년 만에 완성한 한국 성리학사상의 거작이었다.
저서로는 ≪남당집≫ 38권이 있고, 편저로 ≪임시취고 臨時取考≫·≪경의기문록 經義記聞錄≫·≪퇴계집소석 退溪集疏釋≫·≪의례경전통해보 儀禮經傳通解補≫·≪장자변해 莊子辨解≫·≪선학통변 禪學通辨≫·≪왕양명집변 王陽明集辨≫·≪거관록≫·≪심경부주차기 心經附註箚記≫·≪춘추별전 春秋別傳≫·≪근사록주설 近思錄註說≫·≪이락연원록 伊洛淵源錄≫·≪가례소의의록 家禮疏擬疑錄≫·≪가례원류의록 家禮源流疑錄≫·≪고사편람 古事便覽≫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 저술 가운데에서 ≪경의기문록≫과 ≪주자언론동이고≫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의 대부분은 그 판본이 김천의 직지사(直指寺)에 수장되어 있었으나, 이황(李滉)의 학설과 위배되는 설을 제기했다는 이유에서 어사 김정희(金正喜)의 방화로 회신(灰燼:불에 타고 남은 끄트러기나 재)되어 희귀본이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4)윤봉구(尹鳳九, 1683~1768)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서응(瑞膺), 호는 병계(屛溪) 또는 구암(久菴). 유건(惟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판 비경 (飛卿)이고, 아버지는 명운(明運)이며, 어머니는 이경창(李慶昌)의 딸이다. 우참찬 봉오(鳳五)의 형이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14년(숙종 40) 진사가 되고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1725년(영조 1) 청도군수가 되었다. 1733년 사헌부지평, 이듬해 장령(掌令)이 되었고, 1739년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1741년 부호군이 되었을 때 주자(朱子)를 보은 춘추사(春秋祠)의 송시열(宋時烈) 영당에 추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삭직되었다.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군자감정이 되었다.
1743년 사과, 1749년 진선, 1754년 서연관(書筵官), 이듬 해 찬선을 거쳐 1760년 대사헌에 특별 임명되었으며, 1763년 지돈녕(知敦寧)에 이어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이간(李柬)·현상벽(玄尙璧)·채지홍(蔡之洪) 등과 더불어 권상하의 문하에서 수학한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서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중심 인물로 꼽힌다.
호락논의 분파는 이간과 한원진에게서 심화되어 심성론(心性論)의 한 줄기를 형성하는데,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같다는 이간의 학설은 뒤에 이재(李縡)와 박필주(朴弼周)에 이어져 ‘낙론(洛論)’이라 불리고, 인성과 물성은 서로 다르다는 한원진의 주장은 윤봉구와 최징후(崔徵厚)로 연결되어 ‘호론(湖論)’으로 지칭되었다.
윤봉구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간추리면,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의 형성 이전에 부여되는 천리(天理)는 동일하나, 일단 만물이 형성된 뒤 부여된 이(理), 즉 성(性)은 만물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의 생애는 사회적·현실적 활동보다 심성론을 주로 한 성리학자로서의 입론(立論)에 치중했으며, 저술의 내용도 경전의 강의나 주석 및 성리설이 주를 이룬다. 저서로 ≪병계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5)송환기(宋煥箕, 1728~1807)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은진(恩津). 자는 자동(子東), 호는 심재(心齋)·성담(性潭). 송시열(宋時烈)의 5대손이며, 인상(寅相)의 아들이다.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태극도설≫·≪역학계몽≫·≪가례≫ 등을 배웠다.
1766년(영조 42) 진사가 되고 1772년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799년(정조 23) 사도시주부(司歸寺主簿)가 되고, 사헌부지평·시헌부장령·군자감정(軍資監正)을 거쳐 진산군수가 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1807년(순조 7) 형조참의·예조참판, 1808년 공조판서, 1811년 의정부우찬성에 올랐다.
당시 심성(心性)의 변(辨)으로 성리학계에서 논쟁을 벌일 때 한원진(韓元震)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그는 학덕을 겸비하여 조야의 존경을 받았으며, 문하에 많은 선비가 모여들었다. 저서로는 ≪성담집≫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서원의 일곽을 이루고 있는 영역 내에는 4칸의 강당인 산앙재(山仰齋)만 남아있고 사당은 없다.
참고-우암연보
경북서원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