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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서원(道東書院)
❏소 재 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 도동
❏배향인물: 이숭원(李崇元) 이숙기(李淑琦) 이호민(李好閔)
이숙감(李淑瑊) 이후백(李後白)
❏창건연도: 1771년(영조 47)
❏향 사 일: 춘추 |
연 혁
1648년(인조 26) 연안 이씨 문중은 상좌원리의 현조이자 불천위인 충간공 이숭원을 제향하기 위해 도동서원을 건립하였다. 이후 1771년(영조 47)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1771년 이건 당시 상량문을 보면, 상좌원리 충간공파 종중의 이민관[1727~1805]이 상량문을 짓고, 상원리 정양공파 종중의 이의조[1727~1805]가 상량문을 썼다.
그 해 이숭원을 불천위로 하여 정양공 이숙기를, 1796년(정조 20) 이숙기의 증손이면서 예조판서를 지낸 문희공 이호민을, 다음 해 이숙기의 동생 문장공 이숙함을, 이숙기의 증손 문청공 이후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5명이 배향되면서 도동서원(道洞書院)은 ‘오현원(五賢院)’이라 불리기도 했다.
1871년(고종 8)에 서원철폐령의 실시로 훼철되었다. 훼철 과정에서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을 분리하여 유지·지속시키고자 했다. 훼철 직후 상좌원리 충간공파 종중은 이숭원의 영정을 이장원의 재실이었던 충효당에 임시로 이전하였다. 그 뒤 1897년(고종 14) 상좌원에 경덕사를 세워 이숭원의 영정[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9호, 현재 명칭 이숭원 초상화]을 모셨다.
현재 경덕사에는 이숭원뿐 아니라 상좌원리의 중시조 이장원[1560~1649], 도동서원 건립에 노력한 이민관을 배향하고 있다. 상원리 종중에서는 이숙기의 위폐를 이숙기 후손들이 거주하는 원터마을로 옮겨 명성재[별칭 경호영당]에 모셨다. 그 뒤 1918년 이경균[1850~1922]의 주도로 도동서원 옛 강당터에 명례당을 재건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배향인물
1)이숭원(李崇元 1428~1491)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인(仲仁),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낸 이보(李補)의 아들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출생지와 거주지는 미상이다.
세종 32년(1450)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고, 단종 1년(1453) 증광시(增廣試)의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사재감(司宰監)의 주부(主簿)에 보임되었다가 감찰 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이듬해 사간원(司諫院)의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세조 3년(1457) 원종 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고 2년 뒤 사헌부(司憲府)의 지평(持平)에 임명된 이래 형조 및 이조의 정랑(正郞)과 세자 문학(世子文學)·검상(檢詳)·사인(舍人)·집의(執義)·군자감정(軍資監正) 등을 역임하고, 예종 1년(1469) 장례원(掌隸院)의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이후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시작으로 여러 승지직을 두루 지내고, 성종 2년(1471)에는 성종의 즉위와 보필에 공이 있다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과 연원군(延原君)에 책봉되었으며 이듬해부터 2년 동안 도승지를 맡았다. 1474년 형조 판서에 제수되면서 판서의 반열에 올랐고, 3년 뒤에는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성종 9년(1478) 잠시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그 해 9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어 돌아왔다. 이듬해 사직하였으나 1481년 12월 다시 판윤으로 기용되었으며,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성종 15년(1484) 이조 판서에 올라 2년 동안 이를 역임하였다. 1486년 우참찬(右參贊)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이듬해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선임되어 명에 다녀와 좌참찬이 되었다. 그 뒤 의금부의 당상(堂上)을 거쳐 1489년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고 2년 뒤에는 병조 판서로 자리를 옮겼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는데 곧 타계하였다.
효성과 우애가 깊었고 공손·검약·정직하였으며 염치가 있었다. 재산을 모으는데 관심을 두지 않아 빈곤하였으나 굳은 의지를 지녔으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는 부지런하고 엄밀하였다.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며 인조 때 지례(知禮)의 도동서원(道東書院)에 제향되었다.
2)이숙기(李淑琦, 1429~1489)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근(公瑾). 양(亮)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백겸(伯謙)이고, 아버지는 증 연성부원군(贈延城府院君) 말정(末丁)이며, 어머니는 한옹(韓雍)의 딸이다.
1453년(단종 1) 무과에 급제해 훈련원주부를 지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참군(參軍)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세조의 가전훈도(駕前訓導)로 선발되었다. 1456년(세조 2) 무과 중시에 급제해 사온서영(司倍署令)이 되었고, 1459년 평양판관, 1461년 영변판관을 지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함길도에서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 강순(康純) 휘하의 맹비장(猛裨將)으로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특진되고,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전토와 노비를 하사받았다. 그리고 가정대부에 특진되어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이 해 겨울에 건주위(建州衛)의 야인 정벌에 참여해 또 공을 세웠다. 이듬 해 함길남도절도사가 되고, 1470년(성종 1) 북청부사를 겸임했으며,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1475년 황해도관찰사, 이듬 해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479년 다시 건주위 정벌에 참전하고, 그 공으로 이듬 해 자헌대부로 승진하였다.
이 해 전라도절도사로 있으면서 제주 관리에게 부탁해 말을 산 죄로 파직당하였다. 그 뒤 복직되어 영안도(함경도)관찰사·경상좌도병마절도사·지중추부사를 거쳐 14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교체되어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89년 특진관에 임명되어 특히 영안도 5진에 대한 자문에 응했으며, 이어 호조판서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했으며, 사사로운 것 때문에 공을 버리지 않았다. 경상도 지례(知禮)의 도동사(道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3)이호민(李好閔, 1553~163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증조부는 호조판서·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 숙기(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세범(世範)이다.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 국주(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박씨(比安朴氏) 사직 여(旅)의 딸이다.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었다. 1584년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5년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되었다. 응교·전한을 역임하였다. 집의·응교를 겸하였다. 1592년에 이조좌랑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하였다.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쳤다. 1595년에 부제학으로 명나라와의 외교문서를 전담하여 초안하였다. 1596년에 참찬관(參贊官)을 거쳤다.
이호민은 1599년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다. 대제학·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에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되었다.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이호민은 1608년에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고 적서의 구별 없이 장자를 옹립하여야 된다는 입장론(立長論)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공을 세운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하였다. 그러나 <고부시공로사차 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이를 사양하였다.
이호민은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1614년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을 가게 됐다. 그러자<청환수정온보외차 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에 봉착되어, 7년간 교외에서 대죄(待罪)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구신(舊臣)으로 우대를 받았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많이 작성하였다. 그가 지은 교서(敎書)의 내용이 간절하여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보다는 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적의 수중에 있는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 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되었다.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오봉집≫ 16권이 있다.
4)이숙감(李淑瑊)
문장공 이숙감은 1454년(단종 2)에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1457년(세조 3)에 문과 증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를 하고 여러관직을 거쳐 이조참판 및 관찰사에 이르렀다.
5)이후백(李後白, 1520~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진(季眞), 호는 청련(靑蓮). 관찰사 숙함(淑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감 원례(元禮)이고, 아버지는 국형(國衡)이며, 어머니는 홍씨(洪氏)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큰아버지 집에 살면서도 어버이의 상을 예법대로 치렀다. 하루는 집안 어른이 그에게 단술을 권하자 비록 단술이라도 ‘주(酒)’자가 붙은 이상 상주가 마실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1535년 (중종 30)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곧 상경해 이의건(李義健)·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 등에게서 배웠다.
1546년(명종 1)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5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주서를 거쳐 1558년 승문원박사로 사가독서(賜暇讀書 :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케 하던 제도)하였다. 그 뒤 전한이 되고, 이어 시강원설서·사서·정언·사간·병조좌랑·이조정랑·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선조 즉위년)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다.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으며,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仁聖王后 : 仁宗의 妃)가 죽어 복제 문제가 일어나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와 양관(兩館 : 홍문관과 예문관의 합칭)의 제학을 지내고, 호조판서로 있을 때 휴가를 얻어 함안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앞서 종계변무(宗系辨誣 :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재된 일을 바로잡은 것)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光國功臣) 2등으로 연원군(延原君)에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안의 문회서원(文會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건축물
1871년(고종 8) 훼철된 것을 1918년 강당을 명례당(明禮堂)으로 현액하여 복원하였는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참고-김천시 문화관광 http://www.gimcheon.go.kr/culture/intro.htm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