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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성애/트랜스젠더 - 사회교리 성덕(聖德)과 순결(純潔) 날짜: 출처: 서론 「성윤리에 관한 선언」은 시야가 한정되어 있다. 현대사상의 혼란과 오류에 대처해야 할 필요 때문에 이 문서의 분명하고 엄밀한 가르침은성적인 행동의 어떤 면들에 국한해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이 제한된 범위를 지배하고 있는 도덕 원리들은 적극적으로 열렬한영성생활을 촉진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자위행위(自慰行爲)와동성애(同性愛), 혼전탐익(耽溺婚前)에 대하여 취해야 할 진정한 성덕의 자세는 성 바올가 권장한 그런 초연성이다: "음행이나 온갖 더러운 행위나 … 탐욕 따위의 말은 여러분의 입에 담지도 마십시오. 그래야 성도로서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에페5,3), 참으로 '영적'으요 '성숙한' 사람인 그런 사람으로서는 (1고린 3,1-2;히브 5,13-14), 이 「선언」이 반쪽의 마음만 그리스도교인인그런 사람에게는 필요한 것이라고 인정하는 한편, 자기 자신의 진지한 노력에 비한다면 이 가르침은 미흡한 수준에 있는 것이라고 볼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런판단은그러나근시안(近視眼)적이라 할 것이다. 실상 이「선언」은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하나의 Sursum corda (마음을 드높이)인 것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가르침을 숙고하는 사람이라면이 문서에서 비단 일련의 엄밀한 지침들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진정한 성덕의 빛과 힘이 흘러나오는 지극히 중대한 문맥을 발견하게될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생명의 법"(로마 8,2)을 표현해 주는것이 하느님의 가르침이라면, 그것은 워낙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신 성령과의 그리스도교인의 결합 안에 내재하는 면들을 비추어주고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성체성사의 계시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그분의 도덕적인 가르침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 "내가 당신들에게 한 말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입니다"(요한 6,63). 모든그리스도교인, 그가 순결함에 있어서 이미 완전한 사람이든 혹은실천상확보하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든, 이 「선언」의 내용에서영적으로 얻어낼 것이 많이 있는 것이다. 이 문서는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부름을 받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성세성사에의한 그리스도와의 결합을 통하여 이미 부분적으로 참여한 그러한 성덕과 풍부한 희망을 환기,고취시키고 있는 것이기에, 모든 그리스도교인은여기서그 정신이 빛을 받을 것이요 그 마음이 열을 얻을것이다.이러한 「선언」의 중대한 문맥은 그 내용을 이루고 있는 바오로의 텍스트들에서 가장 분명히 나타난다. 이 구절들은 모두가"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는 진정한 그리스도교인의 인격성을 구성하는 명령을 실행케 하는 하나의 자극제가 바로 그리스도교인의 성윤리의 명령들이라는 진지를 밑받침해주고 있는 것이다. 본론 바오로의 원리 : Agree sequitur esse(행동은 존재에서 나온다) 율법이 성덕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을 공박하면서 바오로는 끊임없이 이와 대립되는 "그리스도를 입을" 필요성을 내세우고 있다. 그가 배타적인양자택일을 염두에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님이 명백하다. 하느님의 계율을 깨뜨리거나 경시하기는 커녕, 그는 "율럽은 어디까지나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정당하고 좋은 것입니다"(로마 7,12)라고명백히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성덕을 율법의 문자에 완전히 충실한 것과 동일시하는 그러한 온갖 제도를 그가 배척했다면,그가 이러한 자세를 취한 것은 그의 개종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순종이란 아무런 도움도 없이 약한 인간의 허황한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하느님의 은혜를 겸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용함으로써만 성취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바오로의 인생관에 있어서 하느님의 게율들이란 하느님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이 어떠한 인간이 되고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밝혀주고그 능력을 주시는 하나의 계몽적인 묘사이다. 이런 진정한 관점안에서 볼 때 도덕적인 계율들은 그리스도교인으로 하여금"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창조하신 작품"(에페 2,10)으로서의 자신의 성격에 속하는 성덕과 의무를 실행하고 표명하도록 하는 강력한 자극제를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 바오로의 확신이 「선언」속에 올올이 짜여들어가 있는 것이다.그의 정신이 미친 여러가지 영향의 예들 가운데서도 제11항에 있는 두개의 바오로의 텍스트의 인용이 특별히 적절하다. 첫째 구절은 순결에 관한 사도의 최초의 가르침을 나타내고 있다.(1데살 4,2-8). 내용상 이 말들은 「선언」이 "인간 각자의 구성적 요소들이요 본질적인 것에 입각한 불변의 원리"(3항)라고 부르고자 하는 바를내세우고있다. 그뿐 아니라 문체와 어구상으로 이 텍스트는 영감받은 이스라엘 사제들의 법전에서 유래하는 고조된 음성을 반향하고 있기도 하다. 사도는 그러나 인간 본성상의, 그리고 구약 법전상의 하느님의 명령을 엄밀히 그대로 반복하는 데만 그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하지 않았다. 순결에 관한 그의 훈시를 결론지음에 있어서 그는 세심한 배려로 데살로니카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기를, 그들의 충실성이란 하느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순결하게 살도록 능력을 주시는 성령의 은혜 안에서 그 원천과 힘을 발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경고를 거역하는 사람은 사람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시는 하느님을거역하는 것입니다"(1데살 4,7-8). 둘째텍스트는더욱 분명하다(1고린 6,15.18-20). 고린토에서의 부정한 행실에 관한 추악한 문제를 다루면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의가장 풍부한 진리들 중의 하나를 들어 호소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교인 각자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성령의 은혜를 내려주시었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그는 이 경이로운 현실을 그의 약하고 죄많은 개종자들에게 똑바로 상기시켜 주고 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이와같은 동기는 오직 위대한 신비가들이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바오로는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교 인각자가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성세성사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도 친밀하게결합되어 있어서 그의 육신 자체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 된다는 것을 거침없이 긍정하고 있다. 사도는 여기서 하나의 미사여구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심오한 현실로서의 이 진리의 인식을 촉구하면서 고린토인들로 하여금 예수 자신의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것을 알지 못합니까? ……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러니 음행을 물리치십시오. 인간이 짓는 모든 딴죄는 자기 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지만 음행하는 자는 제 몸에 대해서죄를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신 성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들텍스트에 나타나는 그리스도교적 생활에 대한 생명부여적인 개념은성바오로의 도덕적인 가르침 전체의 정신을 이루고 있다. 그에게있어서 하느님의 명령들이란 그리스도교적 인격성에 내재하는 성덕과 힘의 표현이다. 성세성사를 통하여 인간은 하느님의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모든 도덕적인명령하나하나는 따라서 그리스도교인으로 하여금 점점 더 "그리스도를입어" 그 본질상으로나 행동상으로나 완전히 진정으로 "제 2의 그리스도"가 되도록 환기시켜 주는 빛이요 자극인 것이다. 바오로 원리의 총화성 사도의 이와같은 관점은 「선언」의 중대한 문맥을 제공해 주고있다. 이 문서의 가르침을 숙고하고 실행하는 데에는 따라서 바오로 자신이바로 우리의 가장 훌륭한 안내자가 된다. 이 제안에는 그러나 즉각적으로긴장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니, 이 문서가 강조하고 있는특수한문제를 광범한 바오로의 사상에다가 결부시키는 일이 그것이다.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긴장관계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그리스도교인의 성덕에 생명이 주어질 것이다. 「선언」은 그 특유한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성적 행동이라는 엄밀한한 분야에 그 관심사를 집중시키고 있다. 성바오로는 반면에 성령이 그리스도교인 안에 형성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묘사하면서 풍요함과총화성을염두에 두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바오로는 성령에 의하여인도를 받는 사람의 특징적인 면모를 설명하면서 성령의 은혜와 조화된애덕에다가첫자리를할애하며순결의 절제(egkrateia)에대해서는 마지막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 "성령계서 맺어 주시는 열매는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친절과 선, 진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erkrateia)입니다"(갈라 5,22). 바오로가순결의 중요성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이런 어순(語順)을 썼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가 이 덕행을 자주 강조했고 부정을 강력히 경고했다는사실을무시하는셈이될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풍부한 어휘와 그 어순이 참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명이란 풍부하고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그러한 진리인 것이다. 그리스도교인이 나누어 가지는 구세주의 사랑이 그 본원이다. 그리스도께의 온전한 일치를 생활화하는 원천이다. 그리스도교인의 순결이란 따라서 스토아적인 고룁된 절제의 덕이아니라애덕으로부터 힘과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 또 역으로 확호한 힘으로 애덕을 보전하는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닮음의 일면인 것이다. 바오로의 총화원리와 실천 이러한 바오로의 관점은 순결하게 살고자 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힘찬 도움이 되어주고 있다. 성덕있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자기 스승처럼 마음이 깨끗한 자가 되려고 노력해온 여러가지 길이 있다는 것을 존중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풍요함과 위계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도의 가르침을 따른 이들의 표양에는 하나의 특별한 진실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즉시 생각나는 것은 성 필립보·네리이다. 그는 자기 개인생활에있어서도 순결을 애호했거니와 여러 젊은이들도 두드러지게도와서 도덕의 순수성을 유지 또는 회복케 했다. 이 로마의 사도는 그런데하나의 "순결의 道場"을 이룩하는 데에 노력을 집중한 것이 아니라, 휠씬 더 포괄적이며 고취적인 하나의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도장"을이룩하는 데에 힘을 쏟았던 것이다. 바오로의 지혜를 통찰하고 있던 그는 무절제한 성의 비열한 매력에서부터 주의를 회피시키는 최선의방법이란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한 삶에다가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지도함에 있어서 그가 행한 충고들은 바로 다음과 같은 바오로의 권고를 따르는 일이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고상한 것과 옳은 것과 순결한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영예로운 것과 덕스럽고 칭찬할 만한 것들을 마음 속에 품으십시오"(필립 4,8) 많은수덕가들은 어째서 성 필립보가 미술과 연극과 음악과 문학과 스포오츠에 대하여 관심을 촉구하고 있을까 하고 의아해 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런 온갖 활동 안에서 이 현명한 교육자는 자기제보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을 보도록 가르치고 있었고 진지한 참여의식과 고상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도록 촉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들로 하여금 풍부하고 충만한 그리스도교적 삶을 살도록 일깨워주면 순결은 그들의 그 성격을 발산하는 일면이 되리라는 성 바오로의 확신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필립보의 영적 후손인 죤.헨리.뉴먼 역시 성 바오로의 지혜를 굳이 믿고 있는 분이었다. 버밍엄 오라또리움에서 한 사제로 일하면서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교란 애덕의 실행과 완전한 인격개발을 의미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계속 환기시키고 있었다. 그의 충고는 언제나 그가 20년 전에 리틀모어에서 지은 기도문에서 강조한 바가 간직되어 있었다. 이 기도문은 순결 분야에서 청소년들이 겪은 문제점들과 싸우고 있는 한 젊은이를 위해서 쓴 것이었다. 특징적으로 말해서 단순하고 간결한 이 탄원의 기도에서 뉴먼 추기경은 하느님을 "순결을 사랑하는 이"로서가 아니라 caritatis amator - "참된 사랑을 사랑하는 이"로서 불러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애덕과 순결 성 필립보. 네리와 뉴먼 추기경의 정신과 행동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행하라"(에페 4,15)는 성 바오로의 그리스도교적 행동 프로그램을요약하는하나의실천적인 실례를 제공해주고 있다. 여기서 '진리'라는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풍부한 은혜와 거기에 내재하는 요구들에 대한 하느님의계시와일치한다."진리를 행한다"는 것은따라서"그리스도안에서하늘의 온갖 영적 축복"(에페1,3)을 받은 인간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학자들은 이 그리스도교적 현실의 존재론에 관하여 방대한 저술을 한 바 있다. 현실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그러나 이 신비를 살기 위한 관건이 되는 말은 "사랑 안에서"라는 바오로의 간단한 한마디이다. 교회의 신앙과 성사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과 결합되어 있는 한 인간을 풍부하게 하는 온갖 본질적인 특성들을 개발하고자 하는 확호한 심리적인 동기와 의지의 힘을 제공해 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성령에 의하여 우리의 마음 속으로 쏟아져 나오는" 애덕 그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가 말하고 있는 애덕(agape)은 단지 인간적인 애정이나 다른 사람들의 곤궁에 대한 이타적인 관심만이 아니다. 그가 인간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명백히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로마5,5이하;2고린 5,14)'신앙'(pistis)으로써, 즉 사랑의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헌신으로써 이웃에 대한 애덕을 말하고 있는 그의 한마디 한마디를 비추어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진정한 애덕은 이 신앙과 더불어 살아있는 것이기에, 바오로는 agape를 일러 은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부르면서, 이 하느님의 뜻이란 인간이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모든 하느님의 자녀들에 대한 진실한 사랑에 의하여 그 헌신의 현실을 표명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로마 13,8-10; 갈라 5,13-14). 이와갚이 완전한 의미로 바오로 사상을 이해할 때 애덕은 그리스도교인들로 하여금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완전한 충성의 삶이(2고린 1,18 이하)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 아버지 사랑을 표명하는 것으로 표명되었던 바 저 그리스도 안에서 발산되는 온갖 덕행들은 실행하도록 하는 빛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성 토마스의 개념 성 토마스는 이 바오로의 애덕 개념을 그의 그리스도교적 특성에 관한 권위있는 논문에서 전개하고 있다.애덕의 첫째 요소는 "하느님께대한인간의 우정"(S.Theol. Ⅱ-Ⅱ, Q.23,art. 1,corp)이라는 것을 긍정하는 데서 그는 출발하고 있다.이어서 그는 설문 23의 8항에서 이우정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것을 - 이것이 어떻게 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참으로 하느님께 헌신케 하며, 자기 동료들을 애호하게 하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게 하는가를 - 설명하고 있다.이 우정은 이기심이라는 좁은 한계 내에 안주할 수가 없다. 그것은 더욱 더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갈수록 자라나는 욕망에 의하여 추진된다. 따라서 성 바오로의 가르침을 좇아 천사적 박사는 단언하기를, 애덕이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모든 면의 실효적이며 지도적인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그것은 인간 각자가그리스도와 닮은 모든특징들의 지도원리이자 밑바탕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Q23, art 6,7,8). 그의가르침에 의하면 따라서 애덕은 모든 도덕적인 덕행들을 실행함에 있어서 실지로 작용하고 있지 않으면 않된다. 다만 각각의 덕행이그리스도교인각자의 성덕에 대하여 제각기 독특한 기여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어떻든 애덕의 영향력이 이와같이 필요하다는 것은 사랑과 이기심 사이의 투쟁이 인간의 심리적 본성 전체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바 순결의 영역에서 가장 뚜렸하다(1고린 6,18 참조). 인간적인 사랑 자체가 하느님을 생각지 않고서라도 부정이라는 이기심을 극복하는 비상한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한 젊은 남 자가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한 여자와 결혼하면 그는 본능적으로 混淫과 自瀆에서 멀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인의 순결이란 전체적이며 보편적인 중대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기에 그것은 단지 인간적인 애정보다는 더욱 깊고 더욱 지속적인 어떤 것에서 힘을 길러 내지 않으면 안된다. 피조물로서나 그리스도교인으로서나 한 인간은 모름지기 하느님 자신과의 우정 안에서만 그리스도교적 삶이 요구하는 저 절재의 확호한 원천과 바탕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랑의 도장'과 순결 종종사람들은, 현대의 영성이 agere contra(거슬러 행동하라)라는데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을 두고 유감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의 생활에 대하여 규율과 극기와 십자가를 지는 부정적인태도가 필요 하다고 강조하던 과거의 영적 가르침의 형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의 기쁨과 풍요함을 강조하는 것에 자리를 양보한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 비판은 근거가 있는 말이라고 할것이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에 미리 참여 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그분의 "고난을 같이 나눌"(필립 3,10) 필요가 우리에게 절박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러나 영적인 가르침에 있어서 적극적인 면을 강조하는 것을 새로이 촉구함으로써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언제나 요구하고 있는 "어려운 일들"을 더욱 관대하게 실행할 자세를 낳게 된다고 주장할수도 있는 것이다. 성 바오로 자신도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열매는사랑과 기쁨과 평화"라고 말한 다음에 이에 덧붙여서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갈라 5,22-24). 현대 교회를 잘 살펴보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그리스도교적 생활의 풍부한 적극적인 면들을 강조한 대서 큰 이익이 따라왔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께 대한 새로운 사랑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기들의 인간 존엄성의 강한 의식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니, 이는 전례에서 능동적인 참여를 통하여, 평화와 사회정의와 애덕과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의 일치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통하여, 성서의독서를 통하여 널리 기도 정신의 부흥을 통하여, 진정한 휴머니즘을 개발하고자 하는 노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수년전에는 저자들은 완전히 순결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면서 살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날 이 진리를 발설하는 것은 오랜 상투어 이상의 어떤 것이 되어 있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말은, 강생하신 하느님의 아들이란 비단 신경에서나언급되기 위한 지적인 신앙의 대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살아 있고 전능하신 친구라고 하는 확신과 함께살아온 것이다. 칼.아담이 그의 저서 <우리의 형제이신 그리스도>(Christ Our Brother)를 쓸 때, 마르미옹 원장이 그리스도교인 생활에있어서의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의 3부작을 간행할때, 이들저자들은 오늘날 많은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하나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내다보면서 글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나, <성 윤리에 관한 선언>의 진정한내용은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모든 관심사들에 대한 깊은 관심을 교회 내에서 더욱 힘차게 진작되는 정신으로 삼고자하는 하나의큰 노력이라고 감히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문서의 자세한 지침들은 오직 하느님의 백성이 다음과 같은 성 바오로의 말씀을 얼마만큼자기 자신의 것으로 삼고자 노력하는가 하는 정도에 비례해서 살아있는 원리들이 될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또 나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신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모든 것 안에 모든 것이신 그리스도 이 그리스도 중심주의란 인간을 천사로 바꾸어놓은 것을 의미한다고 결론짓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무시함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인간적인 것을 배척하고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배척하고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와해시키기는 커녕, 인간과 인간의 세계가 그리스도께 속하며 그리스도의현존으로 더불어 빛이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대한능동적인 사랑은 현대적인 가치들의 파괴가 아니라 그 변형을 촉구하고있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마음에 품는(필립 4,8) 스토아적 이상을 가진 자신의 것으로 삼으라고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성 바오로의 말은 마치 저 완전한 휴머니스트인성 토마스 . 모어의 말처럼 들린다. 사도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온 세계를 이미 "그리스도화된" 것으로 보고있다.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따라서 진지한 인간적인 노력을 통하여삶의 모든면이 주님의 아름다움과 거룩하심을, 그분의 정의와 평화를 표명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책망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이기심에서나오는 추함이다. 예컨대 바오로는 이를 반향하여 순결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위하여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온갖 인간적인 애정들을 단죄하고 있다.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그들의 있는 그대로 -곧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 존중되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처럼 그는 만민 앞에 팔을 펼쳐들고서 이 계시적인 말씀을 할 수가 있었을 것이다: "보라, 우리는 십자가의 표지 안에 평등하게 조성되었다"고.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만민은 각자가 그분 아드님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란 따라서 "그분이 거리낌 없이 형제라고 부르시는"(히브 2,11) 이들에게 대한 순결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結論. 「성윤리에관한 선언」을 혼란되고 흔들리는 그리스도교인들을 위한 하나의 훈시로만 해석하려 한다면 이것은 불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 하느님에 의하여 창조 되었기에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살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재 창조되기에 모든 그리스도교인은 그의 마음속에 그리스도적 인격성의 생명을 주는원천으로서의 살아계신 에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선언」은 그 드러나고 숨어있는 문맥 속에서, 완전히 인간적이고 훌륭히 그리스도교적인 진정한 인격을 가진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하여 빛을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 비단 계율만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살아있고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말씀에 눈을 뜨게 하는 것이 교회가 그 가르침에 있어서 가지고 잇는 역할이다.「선언」은 단지 정신에 지식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그 목적을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는 모든 하느님의말씀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인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체험에로 인도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목표는 「선언」의 내용을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나 이 문서의 정신대로 살아야 할 사람들이나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많은 숙고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숙고의 초점은 단지 순결한 행동에 대한 관심 이상의 깊은 곳에 놓여 있다. 하느님의 말씀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위하여 창조되 고경이롭게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인간의 마음 자체를 꿰뚫고 들어가는것이다. 모든 그리스도교인이 완전한 사랑의 응답을 통하여 노력하지 않으면 안될것은 바로 이 마음의 쇄신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