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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의 생애와 사상 마성/ 팔리문헌연구소장
불타(佛陀)와 불전(佛傳)
이 글은 설법연구원에서 발행하는 <說法文案> 2003년 4월호 부터 게재된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이번 호부터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불교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의 생애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불교계에서는 출가 · 재가를 막론하고, 붓다의 생애를 너무나 가볍게 여기거나 거의 무시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재가 불자들은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공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한국불교의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기복적인 신앙과 잘못된 신앙 형태들은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야기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붓다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자신의 인격향상과 올바른 불교관 정립은 물론 잘못된 불교 신앙을 바로 잡는 데에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500여 년 간 인류의 스승으로서 많은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고, 불교의 개조(開祖)로서 받들어져 온 고따마 붓다(Gotama Buddha)께서 실제로 어떠한 생애를 보냈으며, 또 그의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하여 가능한 한 정확히 알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 공부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神話的) · 전설적(傳說的)인 요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붓다께서 가르쳤다는 교설(敎說)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과 윤색(潤色)이 매우 많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러한 후대의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排除)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고자 합니다. 사실 이러한 접근 방법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시해 온 연구 방법론입니다. 주로 서구의 불교 학자들은 신화와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 시도하였으며, 지금도 이러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기영(李箕永) 박사가 처음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으로 붓다의 생애를 다루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이기영 지음, <석가> 세계대사상전집 5, (서울: 지문각, 1965)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의 불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높게 평가 받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이 책이 출판될 당시(1965)에는 아직 학문적으로 이러한 접근 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만일 이 책이 한국의 불자들에게 많이 읽혀졌더라면 한국불교는 지금보다는 좀더 나아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시의 상황보다는 많이 나아졌습니다. 이제는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와 아울러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날로 증가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불전문학(佛傳文學)에 기록된 것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붓다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연속 강좌를 마련하게 되었음을 밝혀둡니다.
2. 붓다의 호칭(呼稱)과 불전(佛傳)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를 가리킬 때, 일본의 불교 학자들은 대부분 '석존(釋尊)'이라고 부릅니다. 예로부터 중국 · 한국 · 일본에서는 관례적으로 '석가족(釋迦族)의 존자(尊者)'라는 의미로 '석존(釋尊)'이란 존칭을 널리 사용해 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중국에서 '석가모니 세존(釋迦牟尼 世尊)' (혹은 釋迦牟尼尊) 또는 '석가세존(釋迦世尊)' (혹은 釋迦尊)이라고 하던 것을 줄여 쓴 말입니다. 1)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석가(釋迦)'라고 하는 호칭도 사용되고 있지만,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붓다가 출생한 종족의 이름이지 자신의 이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관용적으로 쓰여진 익숙해진 호칭입니다.2) 그런데 "불타를 말할 때에는 반드시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3)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석존의 호칭으로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붓다(Buddha)'입니다. 이것은 인도 · 동남아시아 및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널리 채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중국에서는 '불(佛)', '불타(佛陀)'로 음사(音寫)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4) '붓다'라는 말은 불교의 전용어가 되었지만, 본래는 보통명사이며 자이나교(Jaina)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붓다란 '깨달은 사람(覺者)'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석존 이외에 또 다른 붓다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석존 이전에 여섯 명의 붓다가 존재하였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존을 고타마(Gotama)라고 하는 그의 족성(族姓)에 따라 고타마 붓다(Gotama Buddh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팔리어 경전에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 용례가 있어5) 흔히 남방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호칭입니다. 서양의 많은 학자들도 이 명칭을 쓰고 있으며, 근래에는 일본의 학자들도 즐겨 사용하게 되었습니다.6) 그러나 이기영 박사는 그의 저서 <석가>라는 책에서 붓다란 말은 불교의 이상적 존재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서 고유명사가 아니기 때문에 불교의 개조(開祖) 개인을 지칭할 때에는 '고따마 붓다'란 호칭을 쓰거나 '석가모니(釋迦牟尼)'란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석가모니는 원래의 인도음 샤캬무니(Sakyamuni)를 한자로 음사한 것인데, '샤캬(釋迦)'란 고따마 붓다가 탄생한 종족의 이름이고, '무니(牟尼)'란 '거룩한 분'(聖者)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샤캬무니'라고 하면 샤캬족 출신의 성자란 뜻이 되므로 고유명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7) 필자는 개인적으로 '붓다'라는 호칭을 선호합니다만 여기에서는 특별한 구별 없이 '붓다(佛陀)', '석존(釋尊)', '세존(世尊)', '석가모니(釋迦牟尼)' 등의 호칭을 두루 사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경우에 따라 여러 호칭들은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붓다'라는 호칭이 낮춤말처럼 들릴지 모르나, 이 단어 속에는 이미 깨달은 자라는 뜻과 존경의 의미가 담겨져 있는 높임말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붓다의 전기에 관한 자료는 매우 많습니다. 불교경전 중에서 부처님의 생애를 주제로 한 것을 일반적으로 '불전(佛傳)', '불전경전(佛傳經典)', '불전문학(佛傳文學)'이라고 합니다. 불전은 산스끄리뜨어, 팔리어, 한역(漢譯), 티베트어 역본(譯本) 등 오래된 불전만 하더라도 20여 종에 이릅니다.8)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산스끄리뜨어로 씌어진 <마하바스뚜(Mahavastu, 大事)>, <랄리따비스따라(Lalitavistara)>와 불교시인 아쉬바고사(Asvaghosa, 馬鳴; A.D. 2세기경)에 의해서 카비야체(體)라는 아름다운 미문(美文)들로 씌어진 <붓다짜리따(Buddhacarita, 佛所行讚)>, <자따까(Jataka, 本生潭)>의 서문에 해당되는 인연품(因緣品), 한역으로는 <보요경(普曜經)>,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등이 있습니다.9)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붓다가 입멸한 후 수 백년이 지난 뒤 성립한 것이고, 더구나 불타로서의 석존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입장에서 씌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여러 가지 창작과 가탁(假託)이 부가되어 비역사적·신화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습니다. 따라서 붓다를 역사적 존재로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불전문학의 원천이 되었던 것, 다시 말해서 초기불교 성전인 <율장(律藏)>과 <아함경(阿含經)> 가운데 전해지고 있는 붓다의 전기적인 기술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초기성전의 기술은 불전을 작성하기 위한 목적에서 설하여진 것이 아니라 교단 규칙의 제정이나 중요한 설법과 관련하여 붓다의 사적(事蹟)을 단편적으로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적 역시 창작이나 신화적 요소가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인간 붓다의 생애 전모를 있는 그대로 묘사해 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야겠지만, 초기성전이 전하는 바에 의해서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고 생각되는 붓다의 단서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10)
3. 붓다의 전기(傳記)를 대하는 태도
지금까지 우리는 불전 혹은 불전문학에 기록된 내용으로써 붓다를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들을 통해서는 역사적인 붓다의 생애 혹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붓다를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헌에 나타난 부처님의 일대기는 너무나 신격화(神格化)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쉬바고사(馬鳴)에 의해 씌어진 장편 서사시(敍事詩) <불소행찬(佛所行讚)>이 그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아쉬바고사는 인도 카니쉬카(Kanisika)왕과 동시대의 인물로서 대략 1세기 후반에서 2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11) 불교시인(佛敎詩人)으로 널리 알려져 있던 인물입니다. 이 책은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붓다의 모습보다도 신격화된 부처님의 덕[佛德]을 찬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헌을 통해서 접하게 되는 부처님은 우리와 너무나 동떨어진 인물입니다. 그의 능력은 감히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스리랑카 출신 불교 학자인 칼루파하나(David J. Kalupahana)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과거의 여러 종교 지도자의 경우가 그러하듯이, 붓다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도 온갖 형태의 신화와 전설들로 점철되어 왔다. 신화와 전설을 역사적인 실제 사건과 구분한다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광신도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문제이다. 신화를 해석하는 사람은 신화란 독실한 신도의 소박한 상상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광신도의 저항이 정당화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좀더 냉정하고 신중하게 분석해 보면, 신화란 극적인 설명이 요구되는 실제의 역사적 사건들이나 복잡한 인물 성격과 관련하여 감정이나 정신상의 사태들을 상징화한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다."12) 위에서 지적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우리는 역사적 인물로서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부처님의 생애에 있어서 신화와 전설의 부분을 삭제한다고 해서 부처님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통해 진실로 인류의 스승으로서의 참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붓다의 생애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러한 붓다의 생애를 거울삼아 우리들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여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따마 붓다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우리는 근대 학문의 원전비평(原典批評)의 방법을 채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종교의 성전(聖典)이라 할지라도 역사적 소산(所産)임을 인정하고, 그것은 사상의 발전에 기초하여 성립한 것임을 생각할 때, 후대의 전적(典籍)보다도 오래된 전적에 의지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된 전적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분에 의거할 것입니다.13) 둘째, 우리는 고고학적(考古學的) 자료에 의거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성전 중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는 비교적 신화적 요소나 붓다의 초인화(超人化), 신격화(神格化)는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혀 신화적인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문헌에 근거하는 한, 신화적이지 않은 석존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묘사(描寫)를 꿰뚫고, 역사적 면모를 그려내기 위해서는 확실한 증거, 즉 고고학적 자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14) 셋째, 우리는 불교경전 중의 가장 오래된 것과 그와 거의 동시대의 다른 종교의 성전과를 비교해서 그 사상의 같고 다름을 밝히는 것이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의 교설이 지니는 의의(意義)를 밝히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15) 넷째, 우리는 남방계의 불전(佛傳)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할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생애를 다루고 있는 불전경전(佛傳經典)은 남방에 전해진 것(南傳)과 북방에 전해진 것(北傳)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생애를 표현하는 방법에도 남전과 북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남방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생애를 ①탄생, ②깨달음을 이루다(成道), ③최초의 설법(初轉法輪), ④열반에 들다 라는 네 가지 사건(四大佛事)을 중심으로 설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와는 달리 북방의 불전에서는 ①도솔천에서 내려오시다(下天), ②마야부인의 태내에 들다(托胎), ③탄생(降誕), ④출가(出家), ⑤마귀 파순과 싸워 이기시다(降魔), ⑥깨달음을 여시다(成道), ⑦처음으로 설법하시다(初轉法輪), ⑧열반에 들다(涅槃)의 여덟 가지로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여기에 더 상세히 하여 청년 시대, 결혼, 규방 생활, 고행, 깨달음의 자리에 있다 라고 하는 네 가지 항목이 더 추가되어 12 항목으로 된 것도 있습니다.16) 이와 같이 북전의 불전에는 부처님의 전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여 가정 생활을 거쳐 출가하고 고행해서 마왕을 항복 받고 성도하기까지의 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로 남전의 불전에 의거하여 붓다의 생애를 조명해 나갈 것입니다. <다음 호 계속>
Notes: 1) 비교적 오래된 '釋尊'의 용례는 曇無讖 譯 <金剛明經> 권1에 나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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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탄생 이전의 인도
1. 인도의 자연환경
붓다의 생애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살았던 당시 인도의 역사적 배경부터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은 어떤 형태로든 그 당사자가 몸담고 있던 자연환경 및 생활환경 그리고 사회환경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붓다께서 살았던 시대 상황과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완전히 알아야만 비로소 붓다의 생애와 그 역사적 의미를 정확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붓다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사상 등에 대한 정보는 곧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생애를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도 역사적 산물(産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와 그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붓다가 태어나 살았던 인도와 인도의 문명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도(印度)라는 말은 본래 대수(大水), 대해(大海), 대하(大河) 또는 인더스(Indus)강을 뜻하는 산스끄리뜨어(범어) 신두(Sindu)로부터 유래한 말입니다. 신두가 페르시아어의 영향을 받아 힌두(Hindu)로 변하고, 다시 그리스어의 영향을 받아 인더스(Indus)로 바뀌고, 인더스에서 현재의 인디아(India)라는 영어가 파생되었습니다.1) 하지만 인도인들은 자신의 나라를 인도(India)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본래 범어나 힌디어로 된 인도의 호칭인 브하라뜨 칸다(Bharat-khanda) 또는 브하라뜨 와르샤(Bharat-varsa)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영원히 번영하는 사람들' 또는 '영원히 번영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2) 후자의 '브하라뜨 와르샤'를 한국의 백과사전에서는 '바라타-바르샤'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이 명칭은 바라타족(族)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며, 자이나교의 성전(聖典)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일찍이 리그베다시대에 갠지스강(江) 상류의 광활한 지역을 통일하여 성세를 이룬 전설적인 바라타족에 자긍심을 가져, 외국인이 붙인 인도라는 국호보다 이렇게 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3)
인도는 히말라야산계(山系)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로서 그 면적은 서유럽의 전지역에 필적하는 약 450만 ㎢이며, 현재는 인도공화국,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등으로 나뉘어졌습니다. 인도의 북쪽은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히말라야(Himalaya)산계(山系)와 힌두쿠쉬(Hindukush)산맥(山脈)을 경계로 아시아 대륙과 구분되고, 동서는 그 지맥(支脈)인 아라칸과 술라이만의 양 산맥으로 구분되며, 남쪽으로는 코모린 곶(Comorin cape)을 꼭지점으로 하는 광활한 역삼각형의 모양으로 펼쳐져 인도양(印度洋)에 돌출되어 있습니다. 이같은 인도는 그 지리적 특색에 따라 ①히말라야 지역, ②힌두스탄(Hindustan) 평원(平原), ③인도반도 또는 데칸(Decan) 고원 지역 등 크게 세 지역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분류 외에도 인도를 ①인더스강 유역, ②갠지스강 유역, ③빈드야산맥 이남 지역 등 세 지역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4) 이처럼 인도의 국토는 광대하기 때문에 기후도 매우 다양합니다. 남쪽은 북위 8도에서 북쪽은 37도까지 이르러, 대부분은 아열대(亞熱帶)에 속하나, 그 기후는 몬순(moonsoon, 계절풍)에 의해서 큰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기(雨期)와 건기(乾期)가 뚜렷이 구분되고, 하천(河川)의 수량도 연중 크게 변화합니다. 또 몬순의 도래시기가 일정하지 않아 봄베이(현재의 뭄바이)가 며칠씩 큰 비로 시달려도 델리는 건조한 날이 계속됩니다. 강수량도 아샘의 실롱 구릉(丘陵)이 세계에서 최대량을 기록하는데 반하여 라자스탄의 서부에는 사막이 전개되어 있습니다.5) 이러한 자연환경의 차이는 곧 생활문화의 차이로 연결됩니다. 아직도 원시림이 남아 있는 히말라야 산록의 계곡이나 분지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더위가 극심한 평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 습관이 같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라자스탄의 모래 먼지와 열풍이 몰아치는 지방과 벵갈이나 아샘처럼 다습한 지방과는 자연의 모습도 사람들의 의식주나 기질도 전혀 다릅니다. 데칸의 고원 지대에는 그 나름의 정신적·문화적인 풍토가 존재합니다. 다양한 인도의 자연은 참으로 다양한 생활문화를 산출하며, 거기에 인종이나 언어 상황마저 결부되게 되면 그 다양성은 더욱더 심화되는 것입니다.6)
2. 언어의 다양성
인도의 자연환경이 각 지역마다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인종과 언어도 매우 다양합니다. 특히 인도의 언어는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언어들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도의 언어에 대한 전모를 파악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도에서 1961년 시행된 국세조사에 의하면 인도에서 '모국어'로 신고된 언어가 실로 1,652가지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는 기본적으로는 같은 언어이지만 부족에 따라 명칭이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정리해 보면 방언을 포함하여 826종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1971년의 조사에서 사용자가 100만을 넘는 언어는 33가지가 있고, 5천명 이상의 언어는 281가지를 헤아립니다. 이 가운데서 14개 언어는 헌법에 의해서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로 되어 있습니다. 이들을 사용 인구가 많은 순서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즉 ①힌디어, ②델구어, ③벵갈어, ④마라티어, ⑤타밀어, ⑥우르두어, ⑦구자라티어, ⑧칸나다어, ⑨말라야람어, ⑩오리야어, ⑪판자비어, ⑫앗샤미어, ⑬캐시미르어, ⑭산스끄리뜨어 순입니다.7)
산스끄리뜨어는 고대로부터 문학과 사상을 담당해 온 문장어인데, 그래도 2,544명이 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것으로 신고되어 있습니다. 인도 문화의 담당자라는 뜻에서 인도 정부는 이 산스끄리뜨어를 '특히 발전 · 보급시켜야 할' 언어 속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현재 인도에는 21개 주가 있는데, 이는 대체로 언어 지역에 따라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비하르 주나 라자스탄 주와 같이 일반적으로는 힌디어가 통용이 되고, 그 지역의 고유 언어는 위에서 언급한 공용어로 인정되지 않고 있는 것도 존재합니다. 반면에 우르두어나 산스끄리뜨와 같이 특정의 주를 가리지 않는 언어도 있지만, 이들을 제외하면 12개 언어가 이른바 공용어로서 통용이 되고 있습니다.8)
이러한 인도의 언어는 크게 몇 가지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즉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아리야어계가 있고, 주로 남인도에서 통용되는 드라비다어계가 있으며, 이 밖에 티베트-버마어계와 호주-아시아어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인종과 어계(語系)를 같이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문화인류학이나 언어학에서 보여주고 있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어계와 인종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인종적으로 같은 집단이라 할지라도 단일한 어계로만 구성되어 있지 않고 여러 어계의 다양한 종류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9) 그렇지만 인도의 언어는 종족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깊은 관계가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3. 힌두문화의 형성
이와 같이 광대한 인도의 자연환경 속에서 다양한 종족에 의해 그들만의 독특한 인도문화, 즉 힌두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힌두문화는 오랜 세월동안 여러 종족들에 의해 형성된 각양각색의 문화가 하나로 어우러진 혼합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리야(Arya)인들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에 침입한 것은 기원전 1,500년 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인도에는 선주민족(先主民族)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10) 그들이 바로 '인더스 문명(Indus civilization)'을 이룩한 비아리야계로 알려진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룩했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강 유역의 모헨조다로(Mohenjodaro)나 하랍빠(Harappa), 기타의 유적 발굴에 의하여 그 실체가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드라비다인 보다 먼저 인도에 들어온 종족들도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에는 일찍이 네그로이드(Negroid)인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에서 이란연안을 거쳐 남인도 및 서인도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곧 북인도에도 나아갔으며, 후에는 안다만제도에서 마레의 방향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세의 인도문화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11)
그 후에 이주해 온 사람들은 호주-아시아계(Austro-Asia)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현대의 중인도의 콜족(Kol)과 문다족(Munda), 아삼의 카시족(Khasi)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또한 벵갈에서 비하르에 이르는 지방에 거주하는 산탈족(Santal)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얀마와 타일랜드의 몬족(Mon), 캄보디아의 크메르족(Khemer)도 동일한 계통에 속합니다. 그들은 당시 전 인도에 유포되어 있었으며, 그 후 인도문화의 여러 형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12)
다시 그 후에 유입된 사람들이 바로 드라비다(Dravida)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중해 지역 및 소아시아 방면에서 이주해왔다고 하며, 현대의 남인도 사람들은 주로 이 계통에 속합니다. 드라비다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총인구의 20퍼센트가 넘습니다. 이 외에 현재의 벵갈지방에서 비하르, 오릿사 일대에는 티베트·버마어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습니다.13)
이와 같이 인도에는 여러 이민족(異民族)들이 들어와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문화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하지만 인도의 문화는 대체로 바라문 문화가 과거 3천년 동안 그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바라문 문화를 형성한 주체는 바로 아리야(Arya)인들이었습니다. 이 민족은 피부가 희고 금발이며 코가 높은 것이 특색입니다. 민족학이나 비교언어학적 입장에서 보면 이란인·희랍인·로마인·게르만인들과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습니다.14) 이들이 인도아대륙(亞大陸)에 침입해 온 시기는 대략 기원전 15세기 이후라고 합니다. 그들은 먼저 서북인도의 판잡(Panjab, 五河) 지방으로 침입하였습니다. 판잡은 지금의 파키스탄에 해당됩니다. 이곳에는 인더스강을 이루는 다섯 지류가 있습니다. 판잡은 이와 같은 다섯 물의 흐름(panca ap)이라는 명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보통 오하(五河) 지방으로 불리는 이곳에 아리야인이 침입하여 원주민을 무력으로 정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차 동진(東進)하여 북인도의 중앙으로 확장하여 갔습니다. 물론 단일 민족이 한번 침입한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이 파상적으로 이 지방으로 침범해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15)
서북인도에 침입한 아리야인은 인더스강 상류의 판잡지방에 정착하여 리그베다(Rg-veda)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시기는 대략 기원전 1,200년 경입니다. 이것은 주로 천공(天空) · 비 · 바람 · 우뢰 및 기타의 자연계의 힘을 신으로 숭배하는 다신교(多神敎)였습니다. 그 후 기원전 1,000년 경부터 아리야인은 다시 동쪽으로 진출하여 야무나(Yamuna)강과 갠지스(Ganga)강 중간의 비옥한 토지를 점거했습니다. 이 땅은 토질이 매우 비옥해서 항상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었고, 외부로부터 침공하는 외적도 없어서 태평한 가운데 풍요로운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후세의 인도문화의 특징이 되는 갖가지 제도는 대개 이 시대(대략 B.C. 1,000-500)에 확립되었습니다.16)
이 시대에 아리야인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농경과 목축을 위주로 하면서 생활하고 있었지만, 상공업도 상당히 발달시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도시는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직업의 분화도 이루어져 신을 제사 지내는 제식을 담당하는 바라문계급(Brahmana, 브라흐마나), 군대를 통솔하고 정치를 담당하는 왕족계급(Ksatriya, 刹帝利), 그 밑에서 농경 · 목축 · 상업 · 수공업 등에 종사한 서민계급(Vaisya, 毘舍), 위의 세 계급에 봉사하는 것이 의무로 부여된 노예계급(Sudra, 首陀羅)이라는 사성(四姓, varna)의 구별도 이 시대에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여러 갈래로 복잡하게 분화된 카스트(Caste)제도의 모태가 되는 것입니다.17)
한편 정치적으로는 아리야인들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18) 그리고 아리야인의 문화와 토착민의 문화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상호 융합과 변용 작용을 거쳐 정착된 것이 곧 힌두교 혹은 힌두문화입니다. 최초기의 힌두문화는 바라문 문화라고 할 요소가 많았지만, 이는 결코 정체적 · 고정적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됩니다. 아리야인의 생활문화가 표면화되면서도 내면으로는 아리야인과 원주민의 인종적 · 문화적 혼혈이 착실히 진행되어 갔던 것입니다. 경제적 · 사회면으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으며, 점차 기원전 6-5세기의 소위 인도고대사의 격동기로 이어져갔습니다.19)
끝으로 인도는 자연환경과 민족, 그리고 종교와 언어가 각기 다르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습니다. 나라 야스아키(奈良康明)가 말한 것처럼, "한 국가 내에서 이처럼 많은 수의 언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민족이 다르고, 자연이 다르며, 이에 덧붙여 언어도 다른 것입니다. 인도라는 광대한 지역에는 사막도 있고 기름진 평야도 있습니다. 산악 지대가 있는가 하면 고원도 있습니다. 이러한 자연 조건의 차이에 따라서 사람들의 사고 방식도 다르고 생활 문화도 다릅니다. 실제로 인도에 가 보면 사람들의 용모나 체격 또는 의복이나 식생활, 그리고 생활 풍습 등이 지방에 따라 커다란 차이가 난다는 것을 누구든지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다양성과 그 위에서 그 다양성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 바로 인도라는 세계인 것입니다."20) 이러한 나라, 인도에서 기원전 6세기 경 석가모니 붓다께서 탄생하였습니다.
Notes: 1) 元義範, <印度哲學思想> (서울 : 集文堂, 1990), p.11, p.81, p.3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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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시대의 정치·경제적 상황
1. 베다 종교의 출현 지난 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인도 아대륙(亞大陸)에는 여러 인종들이 들어와 널리 퍼져 살면서 인도 역사를 이루어왔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인더스 문명의 주체자였던 드라비다(Dravida)인과 호주-아시아(Austro-Asia)계 이후 인도 아대륙(亞大陸)의 새로운 주인공은 인도-아리야(Indo-Arya)인이었습니다. 인도-아리야인들은 인도-유럽인 가운데에서도 인도-이란인(Indo-Iranian)의 지파(支派)에 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아리야인이라는 말이 모든 인도-유럽인을 나타내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인도 아대륙의 인도-유럽계 사람들만을 한정해서 쓰고 있습니다.1) 이들은 원래 인도 아대륙에 살았던 사람들이 아니라 유럽과 인도 아대륙의 어느 중간 지점에서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분산·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들 중 일부가 힌두쿠쉬(Hindukush) 산맥을 넘어 인도의 서북부를 통해 인더스강과 쟘나강 사이의 판잡(Panjab) 지방에 침입하여 원주민들을 정복하고 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1,600-1,300년경으로 알려져 있습니다.2) 그 시기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학자들에 따라 약간 다르게 추정할 뿐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야(Arya)라고 부르면서 다른 원주민들과 엄격히 구별하였습니다. 아리야란 고결한(noble), 명예로운(honorable)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리그-베다(Rg-veda) 등에 나오는 이 말의 기원은 근본적으로 선주민(先主民)에 대한 우월의식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아리야인들이 처음에는 인더스강 유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수백 년 동안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갠지스강 유역에 도달, 거기에서 다시 남인도 쪽으로도 뻗쳤습니다. 현대에 이르는 동안 선주민족(先主民族)과 혼혈하고 문화적으로도 복잡한 발전을 이룩했습니다.3)
인도에 들어온 아리야인은 <베다>라는 오래 된 성전(聖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베다>에 의지하여 세습적인 바라문이 희생(犧牲) 등의 종교 의식을 집행, 사람들의 안전과 행복을 도모하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다}는 절대 신성하며, 바라문은 나면서부터 최고라고 결정되어 있었습니다. 아리야인의 생활은 주로 목축이었습니다. 따라서 우유나 유제품(乳製品)에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바라문과 함께 소를 신성한 것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아리야인은 목축민이라 농경(農耕)은 그렇게 발전시키지 못했습니다.4)
그러나 아리야인들이 판잡 평원(平原)에서 점차 동진(東進)하면서 농경생활에 적합한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켰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는 주로 농경에 관계가 깊은 신(神)들을 모시는 제의종교(祭儀宗敎)의 성격을 강하게 띠었습니다. 이를 일컬어 베다(Veda)종교 또는 브라흐마니즘(Brahmanism, 바라문교)이라고 합니다.5) 그들은 기원전 1,100년-900년경에는 이미 갠지스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합니다. 그들은 다시 동쪽과 남쪽으로 전진하면서 자연환경에 힘입어 농업을 더욱 발전시켜갔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사제(司祭)였던 바라문들이 점차 하나의 사회계급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술(呪術)의 힘을 기조(基調)로 하는 제식(祭式)의 효과를 강조하고 이 제식을 독점함으로써 종교권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여기에 바라문 지상주의(至上主義), 제식(祭式) 만능주의(萬能主義)를 특징으로 하는 바라문 중심의 문화가 이른바 바라문 중국(中國)을 중심으로 꽃피게 됩니다.6) 이와 같이 바라문 문화는 서력 기원전 10-6, 5세기 경에 성립되었으며, 그 본거지는 남북으로는 빈디야산맥과 히말라야산맥으로 한정되며, 동으로는 프라야가, 서(西)로는 비나샤나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현대의 웃타르 프라데쉬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곳을 중국으로 불렀습니다. 즉 '바라문 중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붓다가 활약했던 비하르주의 동방은 이곳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변방이었습니다.7)
2. 정치적 과도기(過渡期) 아리야인이 발전함에 따라 부족간의 대립이나 통합이 생기고 점차 군소 부족이 통합되어 독재권을 가진 왕(Rajan, 라잔)을 지도자로 받드는 왕국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부족간의 전쟁으로서는 당시 최강의 부족이었던 바라따(Bharata)와 뿌루(Puru)족간의 전쟁이 유명한데, 그 결말은 마하바라따(Mahabharata)라는 장편의 서사시로 구전되고 있습니다.8) 붓다 당시의 사회는 정치적으로 격변기(激變期)였습니다. 종래의 군소 부족국가들이 점차 통합하여 강력한 국가 체계가 형성됩니다. 초기경전에는 이른바 16대국(大國)의 이름이 나오는데, 그것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앙가(Anga), 마가다(Magadha), 카시(Kasi), 코살라(Kosala), 밧지(Vajji), 말라(Malla), 체띠(Ceti), 방사(Vamsa). 쿠루(Kuru), 판찰라(Pancala), 맛챠(Maccha), 수라세나(Surasena), 앗사카(Assaka), 아반띠(Avanti), 간다라(Gandhara), 캄보자(Kamboja) 등입니다. 이러한 16대국의 명칭은 고대 통일국가를 이룩했던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완성된 것이기 때문에 붓다 당시에 모두 실재(實在)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것은 당시의 복잡했던 정치상황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16대국을 포함한 붓다 당시의 여러 나라에서는 공화정(共和政)과 군주정(君主政)의 두 가지 형태의 통치가 행해지고 있었고, 이들은 상호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습니다. 전제군주(專制君主) 국가들은 주로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공화정은 히말라야의 산기슭에 인접해 있었습니다. 군주국가의 팽창에 맞서 공화국들(ga a-sa ghas)은 존립을 위한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또한 군주국끼리의 큰 전쟁도 빈발했고, 공화국끼리의 작은 싸움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공화국은 점점 쇠퇴해가고, 군주국은 영토와 국력을 증대시켜 갔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추세였습니다.9)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에 의하면, 붓다 당시의 석가족은 코살라국에 의해 멸망되었습니다.10) 장아함(長阿含) 유행경(遊行經)에는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이 밧지(Vajji)를 정복하고자 하여 대신(大臣) 우사(禹舍)로 하여금 붓다께 자문을 구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또한 마가다국의 파탈리가마(Pataligama)는 대신 우사가 밧지국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구축했다는 등의 내용이 나옵니다.11) 또 사분율(四分律) 권39에는 코살라의 파사익왕(波斯匿王)과 마가다의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비구들이 그 죽은 사람들의 옷을 가서 가져오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는 베살리(Vesali)의 릿차비족(Licchavi)과 아사세왕이 싸워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기록이 보입니다.12) 이 밖에도 붓다 당시의 정치 상황을 알려주는 내용은 상당히 많습니다.13) 그런데 본래 고대 인도의 공화제는 종족사회를 기초로 하여 발전하였고, 또한 전제군주제는 이러한 공화제 국가 및 그 주변에 잔존(殘存)하는 종족을 정복함으로써 발전하였습니다. 붓다시대의 존존 종족으로는, 사캬족(Sakya)을 비롯하여 말라종족(Malla), 리챠비종족(Licchavi), 비데하종족(Videha), 박가종족(Bhagga), 불리종족(Buli), 콜리야종족(Koliya), 몰리야종족(Moliya), 브라르마나종족(Brahmana), 칼라마종족(Kalama), 티바라종족(Tivara), 판다바종족(Pandava), 카칸다종족(Kakanda) 등이 알려지고 있습니다.14) 원래 종족사회란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정치적으로 독립한 사회로서, 당시 종족사회는 원시공동체 사회의 최고 조직 형태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공화제 국가의 기초를 이루는 과정에서 해체되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전제군주제 국가든 공화제 국가든 모든 국가들은 종족사회가 붕괴한 폐허 위에 건설되었던 것이며, 더욱이 강력한 전제군주국가는 다른 약소국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종속시켜갔습니다. 코살라국에 의한 석가족의 멸망, 그리고 마가다국에 의한 코살라국의 멸망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정복적·노예적 관계를 거부하고 종족의 독립과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종족들은 서로 연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밧지족은 리차비족과 비데히족의 연합종족으로서, 고대 인도 최후의 민주제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15)
3. 상업의 발달과 도시화 붓다시대에 있어서 사회기구의 변동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경제적 사회를 확립하였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것을 확립한 근본기조(根本基調)는 촌락사회기구로부터 도시국가기구에로의 변동입니다. 그리고 이것과 병행해서 직업의 분화(分化), 생산기술의 향상, 대상인(大商人)의 출현, 동서교통로, 특히 서방제국(西方諸國)과의 교통로의 확립 등, 종래의 사제자(司祭者) 바라문에 의한 농촌사회에서는 보이지 않던 현저한 사회변동을 가져왔습니다.16) 그 배경에 대해 살펴보면, 대략 기원전 800년경에 철이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철의 사용에 의해 농기구와 그 이외의 도구가 개량되었으며, 이는 숲의 개간과 농업 생산의 증대에 크게 공헌하였습니다. 또한 다양한 수공업 제품의 증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토지가 증가하고, 많은 토지를 소유한 부유한 농민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풍부하게 생산된 제품은 자급자족의 범위를 넘어 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이에 따라 이를 사고 파는 상인계층이 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도적과 교통의 불편함 등의 난관을 극복하고 시골과 도시 사이를 왕래하며 교역했습니다. 그들은 점차로 이 교역로의 안전을 위하여 무력을 지닌 왕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들은 무력에 의해 보호받았으며 교역의 이익을 확장하였으며, 동시에 왕족은 재정적인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육로와 하천을 이용한 교통로가 개척되고, 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리·도시가 나타났습니다. 이에 따라 폐쇄적인 농촌의 부족사회는 도시에서 붕괴되어 갔습니다.17) 특히 상업의 발달은 자연히 교환의 매개체로서 화폐를 필요로 했습니다. 육로와 수로의 무역에서 제일 먼저 취급된 것은 금, 은, 보석 등의 사치품과 특산물이었습니다. 먼지 지역을 운반하기에 부피가 적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취급하다가 점점 다양한 품목으로 발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는 물물교환이 행해지고 있었으나, 점차 금속통화(金屬通貨)가 많이 이용되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주조(鑄造) 동화(銅貨)나 타각인(打刻印)을 지닌 방형, 원형의 은화, 금화, 동화를 이용한 교환 경제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화폐의 발행권은 국정의 최고 수반인 국왕의 손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입니다.18) 이와 같이 군주제 국가가 신장됨에 따라 국가의 장벽을 넘는 통상, 경제행위가 발전하였습니다. 이는 불가분 왕권의 강화와 결부되어갔습니다. 화폐경제가 일반화되고, 도시에는 상공업자의 길드도 생겼습니다. 조합장과 대상인의 자본가와 왕족은 도시를 중심으로 사회의 상층계급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들은 바라문들이 주장하는 사성제도(varna)에 구속되지 않았습니다. 재래의 농촌과는 다른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가치관의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바라문의 종교적 권위는 옛날의 빛을 잃게 되었습니다.19)
4. 반 바라문적 사상운동의 태동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yajna)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습니다. 현세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지만, 이 시대에는 그 제식에 부수된 동물의 희생이 혐오되었으며, 그 효과도 의심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푸자(puja)라는 새로운 예배의식도 토착문화에서 출발하여 번성하게 됩니다. 옛날의 신들은 몰락하고, 쉬바 또는 비슈누와 같은 신들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 시기부터였습니다.20) 동시에 인간의 지식의 발달은 종교적으로 보다 고차원적인 '해탈'의 경지를 희구하게 되었습니다. 해탈에 관한 수행법과 사상이 정비되고, 그 가치는 일반인에게도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윤회와 업의 사상도 이 시대에 일반화되었는데, 당시의 문헌은 왕족이 이러한 새로운 설을 바라문에게 가르쳤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경제, 사회, 지성, 종교성 등의 여러 면에서 바라문 지상주의가 붕괴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초기의 불교경전이 사성을 기록함에 있어 크샤트리야를 바라문 보다 앞서 열거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사회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21) 이러한 변모를 겪으면서 초기의 힌두문화는 급격히 동쪽과 남쪽으로 확대되어 갔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지역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변모를 수반하였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동인도에서 현저하였습니다. 동인도는 바라문중국(中國)의 입장에서 보면 변방지역이며, 그러한 점에서 전통적인 바라문 문화의 속박을 덜 받는 지방이었습니다. 힌두세계에 동화되어 가면서도 독자적인 생활양식과 관행을 많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비바라문적 또는 반바라문적 분위기도 강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새로운 사상운동이 꽃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운동을 담당한 사람들은 슈라마나(Sramana, 沙門)라는 출가유행자 그룹이었습니다. 그들은 반바라문적 색채를 감추려 하지도 않고 다양한 학설을 제시하였습니다.22) 붓다도 이러한 슈라마나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불교는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종교문화 등 인간생활의 여러 면에서 재래의 전통이 의심되었던 격동의 시대에 태어난 신흥종교의 하나로서 새로운 가치관을 제시하였던 것입니다.23)
Notes: 1) 조준호, "석가족의 인도-유럽인설에 대한 반박" <인도연구> 제6권 2호, 2001, p.8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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