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4월 13일 독일군은 러시아의 스몰렌스크 근교에 있는 카틴 숲에서 소련 비밀경찰(NKVD)에 의하여 학살된 뒤 집단매장된 4100여 구의 시신을 발견하였다. 희생자들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때 포로로 잡혀간 폴란드군의 장교와 경찰·대학교수·성직자·의사 등이었다. 이 학살의 현장은 우연히 발견되었으나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군에 패배한 뒤 독일 국민에게 총력전을 호소하고 있던 나치의 선전상(宣傳相) 요제프 괴벨스는 우연히 발견한 이 학살의 현장을 반소(反蘇) 선전자료로 이용하여 연합군측을 분열시키려고 획책하였다. 소련은 1941년 가을에 자행된 독일군의 만행이라고 우겼으나, 독일측의 조사로 1940년 봄 소련측이 행한 학살임이 입증되었다.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는 전부터 독·소 양국에 의한 1939년의 폴란드 분할 결과, 소련측에 억류된 폴란드군 포로의 행방에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었으므로 국제적십자사에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소련은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영국과 미국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소련과의 분열을 피하려고 사건에 말려들지 않았다. 또 폴란드의 저항세력도 아우슈비츠에서 대량학살을 계속하는 독일에 대한 저항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괴벨스의 선전공작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1952년 미국의회에서도 조사한 일이 있으며, 1989년 소련 당국은 비밀경찰이 학살에 개입하였음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1992년 구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학살은 스탈린의 지시로 이루어졌음이 드러났다. 폴란드가 다시는 소련에 대항할 수 없도록 엘리트들을 모두 처형하라는 스탈린의 지시와 당시 내무인민위원부장관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서명한 명령서 등이 공개되었으며, 여기에는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예술가, 노동자, 성직자 등 학살된 2만 1768명의 명단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구 소련이 자행한 만행임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적으로 책임질 일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지금까지 폴란드와 반목하고 있다. 학살 70주년을 맞은 2010년 4월 10일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이 정부 주요 관리 등 유력 인사들과 함께 카틴숲의 추모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길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