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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일제시대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선교 사제가 되시어 호주 멜번에서 한국에 오신 조 선희 필립보(Philip Crosbie) 신부님은 1915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생하셨다.
1939년에 아일랜드의 성 골롬반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신 신부님은 1940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춘천지목구의 홍천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셨다. 조 필립보 신부님은 그로부터 58년간 강원도 춘천교구의 농촌 본당에서 사목활동에 헌신하셨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연금을 당한 후 강제 추방되었다가 해방 이후 재입국 하셨고, 한국 전쟁 때에는 인민군에 의해 체포되어 700 여명의 연합군과 다수의 성직자와 함께 죽음의 포로행렬과 수용소생활을 한 뒤 석방되었지만 건강악화와 여러 어려움으로 다시 호주로 출국하셨고 건강을 회복하신 뒤 재입국 하시어 만 58년간 사목 활동에 전념하셨다.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하신 조 필립보 신부님은 은퇴하신 후 인간의 죄에 대한 보속과 참된 평화를 염원하시며 겟세마니 피정의 집을 시작하셨다.
조 신부님께서 하느님 사업에 참여한 60여 년은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는 우리 역사의 격동기였다. 그는 우리 겨례의 아픔과 희망을 함께 나눈 진정한 선교사제 이셨다.
말년에 병들고 불편한 몸이 되자 한국 신자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내 영혼의 반을 한국에 두고 떠납니다.”라는 말씀을 남기고 아쉬운 마음으로 본국행을 선택하셨고 2005년 3월 24일(성 목요일) 90세의 일기로 본국인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면하셨다.
조신부의 생애에 대해서는 30여년간 그를 보좌했던 임숙녀(보나) 전교사가 쓴 자서전 <조신부님과 임회장님>에서 감동적으로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이제(2005. 3. 24) 평생 그리워하던 하느님 품에 안겼다. 임숙녀 전교사의 글을 중심으로 조신부가 남긴 일화 몇 편을 소개한다.
조신부님의 출생과 가족
조신부님의 아버님은 다윗 크로스비이며, 어머님은 이따 크로스비이다. 어머니이신 이따는 아주 미인이시었으며, 정숙하고 열심한 카톨릭 신자이셨다. 그런 이따 아가씨에게 마을에 사는 청년이 청혼해왔다. 모든 조건이 다 좋았으나 종교가 걸렸다. 청년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두 분은 만남을 통해 마음이 통했다. 한편 종교에 대한 많은 토론을 했다. 그러나 카톨릭 신자와 결혼하고 싶었던 이따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결국 두 분은 헤어지게 되었고, 청년은 그 마을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 다시 마을로 돌아온 청년은 그 때까지도 이따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알고 두번째 청혼을 했다. 청년은 그동안 카톨릭에 대해 연구하면서 교회의 본질적 특성을 지닌 카톨릭으로 개종하며 다윗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두 분은 아름다운 사랑을 했고, 혼인 성사를 통해 가정을 이루었다. 그 때 다윗의 나이 28세 이따는 24세였다. 두 분 사이에서 조신부님이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그 아래로 남동생 3명과 여동생 2명을 두셨다.
그러나 결혼한 지 10년만에 아버님인 다윗은 38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34세였던 어머님 이따는 어린 6남매를 양육하기 위해 노동을 해야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새벽 미사를 다녀오신 뒤 아침 준비를 마치고, 이내 직장에 나가 일하셨다. 저녁에 오시면 식사 준비와 빨래, 청소 등 가사일을 하셔야 하는 삶이었다.
어머님 이따는 그런 고달픈 삶속에서도 새벽미사에 빠진 적이 한 번도 없으셨다. 이를 딱하게 여긴 마을 아주머니들이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 평일 미사는 빠지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럴 때면 어머님 이따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미사를 통해 그 날 일할 수 있는 힘을 받는데 어떻게 빠질 수 있습니까?”
생활고와 과로가 쌓인 어머님 이따는 끝내 병석에 누우셨다. 어머님이 병원에 입원하자 장남인 조신부님이 어린 동생들을 돌보게 되었다. 조신부님은 어머니가 퇴원해 오셨을 때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마음으로 담요, 침대 커버, 동생들의 옷 등을 손빨래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님 이따는 집에 오시지 못하고 병원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님의 나이가 40세. 남편이 떠난 지 6년 만에 그 뒤를 따라 가신 것이다. 그 때 조신부님의 나이는 15세, 막내 여동생은 6세였다. 조신부님을 비롯한 6남매는 고아가 된 것이다.
조신부님은 바로 밑의 남동생만 농장으로 보냈고, 거기서 일하며 야간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다른 네 동생은 친척집과 어머님의 대모님 댁 등에 한 명씩 맡겨 양육을 부탁했다. 성직에 뜻을 두었던 신부님은 소신학교 기숙사에 입소하여, 동생들에 대한 그리움을 참으며 열심히 공부하셨다.
조신부님께서는 1939년 12월 21일 서품을 받으면서 사제의 길에 들어섰다. 1999년 현재 남동생은 모두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두 분만 생존해 계신다.
조신부님은 1939년 12월 21일 24명의 사제와 함께 애란에서 서품을 받고, 외국 선교사로 파견되었다. 그 때 신부님은 미얀마(버마)로 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조신부님은 미리 미얀마 문화와 언어를 공부해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님께서는, “조선의 신부가 부족하니 크로스비 신부와 만신부는 조선으로 가라.”라고 하셨다.
그 때 조신부님은 조선에 관해서 공부한 것이 없어서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조신부님은 만신부님과 함께 애란에서 배를 타고 호주로 오셨다. 본국에서 몇 달간의 휴가를 마친 조신부님과 만신부님은 호주 시드니에서 선편으로 일본 시모노세끼를 거쳐 부산까지 오셨다.
조신부님은 배안에서 매일 미사를 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회고하셨다. 고향을 떠난지 1개월 만에 조선 부산 항구에 도착하신 두 신부님은 기차에 오르셔서 서울을 거쳐서 부임지인 춘천지목구까지 오셨다.
일제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에게 선전을 포고하고 전쟁에 참전했다. 일제는 조선에서 포교를 하는 서양인 선교사들까지 적대시하였다. 그런 일제에 의해 조신부님께서는 투옥되셔서 5개월간 옥고를 치르셨다.
조신부님께서는 안신부, 만신부, 고신부, 오후벨도 신부, 메리놀 신부와 함께 일본으로 끌려가셨다. 일본과 연합군과의 포로 교환으로 석방되신 신부님들은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셨다. 호주로 귀국하신 조신부님께서는 멜본으로 가셔서 임시로 본당 사목을 맡으셨다고 한다.
1947년 2월, 홍천으로 돌아오신 신부님
해방이 되어 우리 나라에 돌아오신 조신부님께서는 춘천지목구를 맡고 계시던 구토마스 신부님으로부터 발령을 기다리셨다. 당시 부지목구장으로 계시던 오후벨도 신부님께서는 춘천 죽림동본당과 홍천본당 중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조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한다.
“모르는 마귀보다는 아는 마귀가 낫습니다.”
그러자 오신부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면서 홍천본당 주임신부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죽림동본당은 도청소재지에 있는 주교좌 성당이다. 그에 비하면 홍천본당은 신자의 수나 지역의 교통 등 갖가지 여건이 좋지 않았다. 조신부님께서는 그런 것을 잘 아시면서도 홍천본당을 선택하신 것이다.
홍천 본당은 목재건물이고 사제관이 없었다. 그래서 강당 옆에다 방과 부엌을 1칸씩 덧붙이시어 사제관으로 삼으셨다. 신부님께서는 식사를 한식으로 드셨다. 신부님의 식사를 돕기 위한 식복사는 아침에 출근하여 식사를 준비한 뒤 저녁식사를 마치면 퇴근했다. 식복사는 퇴근하기 전에 신부님이 다음날 사용하실 세숫물을 미리 방에다 떠다 놓고 가셨다.
신부님께서는 새벽 4시 30분 경에 일어나셨다. 겨울이면 방에 떠놓은 놋대야의 세숫물이 꽁꽁 얼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망치로 얼음을 깬 뒤 그야말로 차가운 얼음물로 세수를 하셨다. 그러고 나면 얼굴도 손도 얼어붙는 듯하여 한참동안 양손으로 마찰을 하셨다고 한다. 신부님께서는 그 정도로 추운 방에서 겨울을 나셨다.
6시에 새벽미사를 드릴 때면 복사는 미사에 쓰일 물을 가슴에 품고 있다가 꺼내서 썼다고 한다. 잠시만 있어도 물이 얼기 때문이다. 그래도 미사 중에 성체를 모시고 손을 씻다가 물방울이 튀면 금새 하얗게 얼었다고 한다.
미사를 드리고 나면 손도, 귀도 남의 살같이 느껴질 정도로 성당은 추웠다. 오래된 일이지만 그 때의 추위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가끔 말씀하셨다.
1957년 여름, 역경을 마다하지 않으신 신부님
홍천 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이야기이다. 밤낮으로 폭우가 내렸다. 장마비로 인해 강물이 불어나고, 산사태가 나고, 도로가 파손되었다. 그런데 내면 공소에서 혼인성사 신청이 들어왔다. 조신부님께서 가실 차비를 차리자, 한복사님께서 만류하셨다.
"물도 많이 불었고 길이 파손되어서 가시는 것이 위험합니다. 장마가 그친 뒤에 가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고개를 저으셨다.
"아닙니다. 혼인 성사는 중대한 것이어서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 차가 갈 수 있는 곳까지는 차로 가고, 그 다음에는 걸어서라도 가야합니다.
홍천에서 내면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이고 당시에는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로 물살이 급하고 폭이 좁은 개울이 많았다. 그래도 신부님께서는 미사짐을 준비하신 뒤 내면공소를 향해 출발하셨다.
작은 개울들도 흙탕물이 세게 흘러내리니 물속으로 큰돌이 굴러 내려와서 차가 개울을 건너기가 힘들었다고 한다. 물이 차안으로 들어와서 발목까지 올라오는 등 힘들게 건넜다고 한다. 또, 도로 곳곳에는 큰돌이 굴러 내려와서 그것들을 피하거나 치우면서 차를 몰았다.
이런 고생 끝에 서석면 입구인 솔치고개까지 오셨다고 한다. 험하고 높은 솔치고개 곳곳이 산사태로 찻길이 막혔으므로 삽으로 흙을 치우며 간신히 고개를 넘었다. 이어서 폭이 넓은 어론리의 강이 나왔다. 교량은 파손되었고, 물이 너무 많아서 차가 건널 수 없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는 차를 두고 물을 건너자고 하셨다. 한복사님은 물의 깊이도 알 수 없고, 흙탕물이 세차게 흐르고 있으므로 겁이 나셨다고 한다.
"신부님, 위험합니다. 건너갈 수 없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건너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신부님께서는 웃옷과 바지를 벗으셔서 미사짐과 같이 머리에 단단히 묶고는 한복사님의 손을 잡고 물에 들어서셨다. 강물은 갈수록 더 깊어졌다. 그 때 물이 턱까지 올라와서 입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므로 물을 뱉어냈다고 한복사님은 회고했다.
신부님께서는 키가 좀 크셨지만 어깨까지 물이 올라왔다. 하지만 물살이 급박했으므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한복사님의 손을 꼭 잡으시고 힘을 다해서 겨우 건너셨다고 한다.
이렇게 어론리의 강을 건넌 두 분은 내면까지 걸어서 가셨다. 당시 서석에서 내면까지 버스로 1시간 3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다. 서석과 내면 사이에도 뱃재고개 등 크고 작은 고개와 개울들이 있었다.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내면공소에 도착한 두 분은 혼인성사를 주신 뒤에 즉시 돌아섰다. 똑같은 고생을 하며 오던 길을 되돌아서 홍천본당으로 돌아오셨다.
이 이야기는 한복사님께 들은 이야기다. 한복사님은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그 날 신부님의 고집때문에 수호천사께서 몹시 바쁘셨을걸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알았다. 사제는 신자를 위한 길이라면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 가신 다는 것을, 사제라는 직분은 목숨을 담보로 내어놓고 십자가를 지고 험지로 가야 한다는 것을….
1972년, 팔을 잃은 환자를 구하신 신부님
포천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보나 자매가 급한 목소리로 도움을 청하는 전화를 했다. 동리 방앗간의 주인이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작업 중에 몸이 방아기계에 끌려 들어가면서 팔이 잘려 나가고 피부가 벗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병원에 갈 차가 없다는 것이다. 택시 기사는 물론 승용차가 있는 마을 사람도 모두 거절했다는 것이다. 워낙 피가 많이 흐르는 데다 가다가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 중에 연락을 받으신 조신부님께서는 급히 사고 현장으로 가셨다. 오른쪽 팔은 잘려 나가서 살갗만 매달려 있고, 가슴과 얼굴에는 큰 상처가 있는 등 처참한 모습이었다.
신부님은 차에다가 담요를 깐 뒤 환자를 누이고는 서울의 성가병원으로 향했다. 환자는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보호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데 신부님은 손이 떨려서 운전하기가 아주 힘드셨다고 한다.
서울까지 중간쯤 갔을 때 환자의 신음 소리가 약해졌다. 신부님은 병원에 도착하기 전에 환자가 죽을까봐 더욱 불안해졌다. 그러니 앞이 잘 안보여서 몇 번이나 사고가 날 뻔했다고 한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한 뒤 응급실에 들어섰다. 치료를 마친 의사 선생님은 환자가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면서 조금만 늦었더라면 사망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부님께서 정말 힘들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그 날 처음으로 보았다. 얼마나 걱정을 하셨으면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식복사는 신부님이 입으셨던 속옷에서 물을 짜낼 정도였다고 했다.
그 환자는 한 쪽 팔을 잃은 것을 제외하고는 상처가 잘 회복되어서 건강한 몸으로 돌아왔다. 그 분은 불교 신자였다. 억지로 개종시키지 말라는 신부님의 말씀이 있었으므로 신앙 문제는 말하지 않았다.
그 날 마을 사람들은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더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도와주시는 신부님의 자세를 직접 보게 된 것이다. 신부님께서 더욱 존경을 받게 된 것은 물론이다.
1979년, 감사의 마음을 전한 홍천 손님
간성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이야기이다. 바닷가에 많은 인파가 모여드는 여름 휴가철이었다. 어느 날 자가용이 들어오더니 조신부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하시는 듯했다. 손님은 자기 소개를 했다. 자기가 옛날 홍천에 살 때 가족들이 신부님께 세례를 받았으며 여러모로 도움도 컸다는 것이다.
다음은 그 손님의 말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 많았는데 아버지가 일거리가 없이 놀고 계셨다. 자연히 하루 세 끼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웠다. 어려운 사정을 아신 신부님께서 가끔씩 양식을 주셔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부님께서 오시더니 돈을 내어놓으며, 그 돈으로 손수레를 사서 일을 해보라고 하셨다. 그 후 아버지는 손수레 끄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가족이 살아갈 수 있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부모님께서는 조신부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너희가 커서 잘 살게 되면 신부님을 도와드려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에 박히도록 들었다.
지난 사연에 대한 말을 마친 손님은 두툼한 봉투를 내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저는 서울에서 작은 중소기업을 하고 있는데 돈 좀 벌었습니다. 문득 신부님 생각이 나서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신부님, 옛날 저희 가족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이건 약소하지만 용돈으로 써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맛있는 것을 사 드시고, 여름 휴가도 즐기십시오."
신부님께서는 손님에게 받은 돈을 모두 필요로 하는 어려운 가정에 나누어 주셨다. 당신을 위해서 쓴 돈은 한 푼도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신부님께 말씀드렸다.
"신부님은 왜 그 돈을 조금도 쓰지 않고 남에게 나누어주십니까?"
"그 돈은 제 돈이 아닙니다. 하느님 돈입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관하셨으니 하느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제게 허락된 돈이 아닙니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 분은 복음 삼덕의 이상을 몸소 실천하며 살고 계신 것이다.
1987년 여름, 거지 눈에도 불쌍하게 보인 신부님
원통본당에서 사목할 때의 이야기다. 원통본당은 시장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장날이면 거지가 5∼6명씩 다녀간다. 조신부님께서는 섭섭하지 않게 골고루 돈을 주시기 때문에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하루는 거지가 와서 동냥을 하기에 내가 500원을 주었다. 시장의 보통 가게에서는 100원을 준다. 한 사람이 아니고 여러 사람이니 500원씩 주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그 거지는 내가 주는 돈은 받지 않고 신부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묻는 것이다. 신부님께서 주시면 더 많이 준다는 것이다.
나는 성당 운동장에 계시다고 계신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 거지는 운동장 쪽으로 가는 듯하더니 잠시 후에 다시 돌아왔다. 아까 그 돈이라도 달라는 것이다.
"왜요? 신부님이 안 계시던가요?"
"아니요. 신부님이 나보다 더 불쌍한 것 같아서요."
그 때 신부님께서는 떨어진 맥고모자를 쓰시고 땀이 배고 기름과 흙투성이인 작업복 차림으로 작업을 하고 계셨다. 돌과 유리조각 등을 손수레에 담으시고, 패인 땅을 평평하게 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시고 계시는 신부님…. 그 거지는 그런 신부님께 차마 동냥을 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거지 눈에까지 불쌍하게 보이셨던 신부님! 그러나 그 분께서는 내적으로는 어느 왕보다도 고귀한 사제셨다.
신부님의 친구들
조신부님께서 성당의 땅을 사시고, 유급직원의 봉급을 자비로 주시고, 어려운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도와드리는 일이 많았다. 혹시 신부님께서 큰 부자인가, 또는 큰 돈을 기부하시는 독지가가 있는가 등으로 오해하실 분이 계실 듯하여 그 분의 친구들을 소개하겠다.
조신부님의 친구분은 세계적으로 570여분이시다. 그 친구분들 중에는 할머니 친구가 가장 많으며, 어린이 친구도 많았다.
신부님께서 한국 전쟁 때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3년간 포로 수용소에서 고생하시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 나오시자 그 사연이 세계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러자 신부님을 존경한다는 편지와 후원금이 왔다. 신부님은 감사하다는 답장을 어린이에게까지도 꼭 하셨다. 이렇게 편지가 오고가면서 사진이 오기도 하고 영적 지도를 부탁하는 분도 계셨다. 큰돈을 보내시는 분은 서울 콜롬반회를 통해서 보내주셨다. 이런 도움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분들이 신부님의 친구이자 은인이시다.
신부님은 그 돈을 자신을 위해서 쓰시거나 헛되이 쓰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다. 모아서 성당 대지를 사시거나 성당신축, 성당수리비, 각종 공사비 등 교회를 위해서 쓰셨다. 신부님께서는 하루에 평균 20~30 통의 편지를 받으신다. 물론 봉투마다 헌금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큰 축일 때는 헌금이 많았다.
신부님은 낮에는 사목일을 하시고 밤에는 편지를 쓰신다. 자정이 지나 새벽 1~2시까지도 타자기 소리가 들린다고 신부님 옆방에서 기거하던 인부(김00)가 말했다. 그러면서도 아침이면 4시 30분에 일어나셔서 긴 시간 동안 기도를 하신 뒤, 아침 미사로 하루를 시작하신다. 하루에 3~4시간밖에 주무시지 못하는 셈이니 신부님께는 편지 쓰시는 것이 큰 노동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성탄 때는 570여 통의 카드를 한꺼번에 보내야 하기 때문에 11월부터 카드 쓰기를 시작하시곤 했다.
신부님의 친구들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있다. 그 중에 호주의 어떤 어린 친구에 대해 소개하겠다. 다음은 그 친구의 어머니가 신부님께 보낸 편지 내용이다.
하루는 신부님께 용돈의 보낸 아이의 어머니에게, 어머니의 친구가 찾아와서 말했다.
“너희 아들에게 용돈 좀 주어라.”
“왜? 무슨 일로?”
“휴일에 유원지에 갔다가 너의 아들을 보았는데 빈병을 줍고 다니더라.”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고민하다가 아들에게 물어보았다.
“용돈이 부족하면 더 줄까?”
“아니요. 넉넉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데 왜 유원지에서 폐품을 줍고 다니니?”
“저는 크러스비 신부님(조신부님)을 존경합니다. 그 신부님이 가난한 나라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려고 그랬습니다.”
“10달러씩 여러 번 보내드렸는데, 답장도 받았어요.”
어머니는 아들의 생각이 너무도 훌륭해서 꼭 안아주었다.
신부님이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또는 사목 활동에서 쓰시는 돈들은 이렇게 마련 된 귀한 돈이기 때문에 신부님께서는 한 푼도 함부로 쓰지 않으셨던 것이다.
모든 재산을 신부님께 드린 사촌 여동생
호주에는 조신부님의 사촌 여동생인 아이비 크로스비가 계셨다. 그분은 동정녀이시며 불치의 병을 앓고 계신다. 조신부님은 한국에서 본당 사목 생활을 4년간 하시면, 6개월간 휴가를 받으신다. 그 때는 고향에 가셔서 아이비 크러스비가 있는 병원에 방문하셨다.
아이비 크러스비는 자기가 죽은 뒤에 모든 재산을 조신부님께 남기겠다고 하셨다. 신부님은 너무나 고마워서 다른 곳에 여행할 계획이 있으셔도 아이비가 있는 병원을 매일 방문하셨다. 동생을 위해 기도도 해주시고 의료에 대한 상담도 하시는 등 대화를 나눠주셨다.
아이비는 신부님을 좋아했고, 방문을 기다렸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휴가 기간 동안 병원 방문을 빼놓지 않았다. 이것이 은인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고 희생적으로 시간을 내셨던 것이다.
6개월 휴가를 일주일 남겼을 때 아이비 크러스비는 향년 70세로 하느님 품에 안기셨다. 신부님께서는 아이비의 장례미사까지 마치니 한국으로 귀국하실 날짜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비의 유산을 정리한 변호사는 큰 돈을 조신부님께 보내왔다. 조신부님은 그 돈으로 간성 성당의 정면과 종각을 아름답게 신축하셨다. 또, 성당 안 제대 뒤의 벽에는 간성 본당 주보성인인 성부 안나의 성화를 색유리로 장식하셨다.
신부님으로서는 4년 만에 고국을 찾는 휴가였다. 나름대로 다양한 계획과 뜻하신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부님은 은인을 위해 6개월의 시간을 모두 바치며 기도와 위로로 봉사하셨다. 아이비 크러스비님께는 물론이고, 은인에게 받은 돈으로 한국의 성전을 아름답게 가꿔주신 신부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그 후 신부님은 매년 아이비 크러스비 기일에는 위령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 간성 본당을 떠난 후에도 본당 사목회에서는 기일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1993년, 목숨을 바쳐 선물을 준비하신 할아버지
신부님이 말년에 사목하신 <게쎄마니 기도의 집>에서 가까운 이웃에 75세된 할아버지가 혼자 살고 계셨다. 서울의 어느 회사 과장이라는 아들은 명절 때만 찾아 왔다. 그 분은 할머니와 함께 내외분이 사셨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부인의 산소를 성당 옆 공동묘지에 모셨다. 할아버지는 매일 한 번씩 부인의 묘소에 가셔서 앉았다가 오시곤 했다.
할아버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술과 담배를 많이 하셨는데, 차츰 주량이 늘어갔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실 때는 술에 취해서 길가에 누워 계실 때가 많았다. 그 분은 술이 곧 밥이라면서 식사는 며칠에 한 번 정도 드셨다고 한다.
조신부님께 할아버지에 대해서 말씀드렸더니, 그 분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갖다 드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신자들이 신부님께서 잡수라고 가지고 온 것을 골고루 나누어 드렸고, 가끔씩 밥과 고깃국이나 반찬 등을 갖다 드렸다.
할아버지는 집에 안 계실 때가 많았다. 그 분은 할머니 묘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한다. 언젠가 성당에 오시더니 신부님께 감사를 드리러 왔다면서 여러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날 술 중독자라고 모른 척하는데 신부님은 저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먹을 것을 주시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저도 하느님 믿고 싶지만 술을 안 먹으면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술 먹고 교회에 나올 수 없으니 죄송합니다."
"하느님이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신부님을 보면 하느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밖에도 할아버지는 여러 말씀을 나누고 돌아가셨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친구는 술이다.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하면서 건강도 나빠진 듯하다. 세례 준비를 시키려 했지만 늘 술에 취해 계셔서 정신이 없으시니 그럴 수 없었다.
어느 날 신부님과 함께 홍천에 다녀왔는데 우리 방문 앞에 검은 비닐 봉지가 있었다. 그 속에는 자연산 송이버섯이 일곱 개나 들어 있었다. 누가 이렇게 귀한 송이를 주셨을까? 그 때 시세로 송이버섯 한 개에 1만원이 넘었었다. '보낸 분이 전화라도 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다음 날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깜짝 놀라 할아버지 댁으로 갔더니 옆집 아주머니가 내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신부님의 신세를 많이 져서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모르겠다면서 늘 고마워 하셨어요. 어제는 송이를 따다 드려야겠다고 하시면서 아침 일찍 산으로 가셨다가 오후 늦게 오시더군요. 좀 따셨냐고 물으니 몇 개 따다가 신부님 댁에 드렸다고 하시더니…."
할아버지는 그 날 점심과 저녁도 굶으신 채 많이 편찮으신 표정으로 방으로 들어가셨는데 아침에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귀하신 분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송이를 따셨을 할아버지. 그 분의 아름다운 마음이 지금도 생각난다.
1997년 2월, 청빈한 마음이 담긴 신부님의 옷
2월에 조신부님께서 감기에 걸리셔서 많이 편찮으셨다. 춘천 한림 병원에 가시기로 했는데 연로하신 신부님께서 춘천까지 운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고 버스로 가는 것도 힘드실 것 같아서 내가 여쭈어 보았다.
"신부님, 신남 성당에 자가용 가진 교우 분이 계십니다. 그 분께 부탁해서 함께 병원에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닙니다. 모든 교우들이 자기 할 일이 있는데 나를 위해서 희생시킬 수 없습니다. 버스로 가겠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는 신남까지 5km 정도는 손수 운전하신 뒤 신남 터미널에서 춘천행 버스를 기다리셨다. 그런데 1시간이 지나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마스크를 하신 신부님의 얼굴 위로 눈빛이 괴로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지금까지 신부님께서는 수많은 환자들의 아픔을 함께 하셨다. 가난하거나 위급한 환자들을 위해 당신이 직접 운전하셔서 병원에 데려다 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데 막상 신부님께서 편찮으실 때는 늙으신 몸으로 스스로 걸어서 병원을 찾으셔야 되는지…. 외로워 보이는 신부님께서 너무 안쓰러워서 마음이 아팠다.
춘천에 도착하여 내과 과장 앞에서 진찰하시기 위해 웃옷을 벗으셨을 때 깜짝 놀랐다. 신부님께서는 보온내의를 입고 계셨다. 그런데 얼마나 오랫동안 입으셨던지 보온 내의 양쪽 팔꿈치와 양쪽 겨드랑이가 닳고닳아서 실오라기만 남을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도 놀라는 표정이었다. 요즈음 같이 옷이 흔한 시대에 이렇게 다 떨어져 가는 내의를 입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너무나 죄송했던 나는 돌아오자마자 내의 한 벌을 사서 드렸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도 새 옷 있습니다. 그러나 헌 옷 더 입을 수 있고, 그건 나중에 더 떨어졌을 때 입겠습니다. 아직 더 입을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며칠 후 신부님이 안 계실 때 방에 들어간 나는 새로운 내의를 두고 떨어진 내의는 가지고 나왔다. 혹시 병원에 가실 때 또 입으실 지 모르므로….
신부님께서는 지금 이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셨지만 그 분의 청빈한 마음이 담겨 있는 내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다. 비록 떨어졌지만 신부님의 고귀하신 마음이 담긴 옷이다. 그분을 보는 마음으로 소중히 보관하고 싶다.
1997년 8월, 힘겨워도 원칙을 지키시는 신부님
조신부님께서는 양 무릎, 양손, 양어깨의 관절이 부었다 내렸다 하면서 통증이 심해지셨다. 신부님의 주치의인 메리 수녀님은 "젊어서부터 심한 노동을 너무 많이 하시면서 관절을 쓰셨기 때문에 퇴행성관절염이 왔다."고 말씀하셨다.
1997년 8월, 서울 한양대 부속병원의 김성윤 박사의 진료 예약일이 되어서 서울로 가셨던 날의 일이었다. 내가 모시고 가려고 했는데 신부님께서는 두 사람의 여비도 염려하시고, 혹시 치료가 늦어져 당일에 돌아오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셔서 혼자 다녀오시겠다고 하셨다.
서울에서 오후 네 시에 진료를 마치신 신부님께서 동서울 버스 터미널로 오시니 차표가 매진되어 입석밖에 없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서서 오시게 되었다.
그 무렵은 휴가철이라 수도권에서 설악산 방향으로 여행을 가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니 서서 가는 사람이나 앉은 사람의 수가 거의 같을 정도로 버스가 붐볐다고 한다. 서 계셔도 편히 기댈 수도 없을 정도로 대만원이었던 것이다. 편찮으신 어깨와 손으로 손잡이에 의지한 채 네 시간 반이나 서서 오셨으니 그 고통이 어떠하셨을까?
밤 열시에야 돌아오셨는데 너무 피곤하셨는지 성무일도 기도만 바치신 뒤 바로 주무시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신부님은 걸어서 나오지 못할 정도로 힘겨워 하셨다. 발등과 발바닥이 얼마나 부었는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심하게 부운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신부님이 외국인이라고 무시해서 젊은이들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은근히 화가 났다.
"신부님께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있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일어나면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고맙지만 괜찮다고 했습니다. 나는 입석표를 약속했으니 서서 가야하고, 그 젊은이는 좌석을 맡았으니 앉아서 가야 합니다. 본 신부 때문에 긴 시간을 서서 가야 하는 고생을 해야 합니까?"
서울에 있는 신부님의 주치의 메리 수녀님께 전화를 드렸다. 신부님의 상태에 대해 말씀드리고 약을 부탁드렸다. 병세가 악화된 원인까지 말씀드렸더니, 수녀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들으시며 조용히 우시는 듯했다. 듣기를 마친 수녀님이 내게 물으셨다.
"손님 중에 자리를 양보한 분이 없었습니까?"
내가 신부님께서 자리를 사양한 연유를 말씀드렸더니 수녀님께서 말씀하셨다.
"신부님께서는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수녀님은 그러시면서 스스로 울음을 참으셨다. 그리고 우선 약을 속달로 보낸 뒤에 시간을 보아서 오시겠다고 하셨다.
그 후 신부님께서는 무릎 관절이 더욱 악화되어 무릎에서 물을 빼는 치료를 받으셨다. 나만 편하면 된다는 사고 방식의 삶을 사는 세상에서 신부님께서는 자신의 몸은 망가지더라도 먼저 이웃을 생각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고 계신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주어진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것, 그것이 신부님의 삶이었다.
1998년 11월, 한국을 떠나시며 남긴 말씀
1996년 가을 무렵이었다. 홍천 본당 연령회 회장님과 회원 몇 분이 조신부님이 계시는 <게쎄마니 기도의 집>을 방문했다. 신부님은 손님들과 함께 홍천본당 사목 시절의 추억을 회상하며 환담을 나누셨다. 그러다가 이런 말씀도 하셨다.
"나는 한국에서 살아온 세월이 고향 호주에서 생활한 시간보다 더 많습니다. 한국은 제2의 고향입니다. 사후에 한국에 묻히고 싶으니 홍천 성당묘지 산에 자리 하나 남겨주십시오."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셨다. 그런 신부님께서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 새삼스럽게 고국인 호주로 돌아가셨을까? 신부님을 아시는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고 아쉬움을 느끼는 것 같다. 그 연유에 대해 내가 아는 대로 말씀드리겠다.
앞에서 적은 대로 신부님께서는 1997년부터 몸이 편찮으셨고, 자주 병원에 가셔야 했다. 시력이 나빠지고, 감기가 드시고, 관절이 약해지면서 거동마저 불편하여 2주일이나 입원 치료를 받으시기도 했다.
입원 치료비가 100여만원이나 들었다. 신부님께서는 치료비가 많이 나왔다면서 걱정하셨다. 그 때부터 깊은 생각에 잠기시더니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왔는데 이제는 피해만 끼치고 있으니 안되겠습니다.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말씀드렸다. 의료 보험에서 도와주고 있으니 병원비 부담은 걱정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신부님께서는 의로보험 회사에 미안하다고 하셨다.
"한국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없으면 돌아가야 합니다."
그 후 신부님의 이런 마음이 굳어지셨다. 나는 여러 말씀을 드리며 신부님을 만류했다.
"신부님께서는 50년 이상이나 한국 민족과 춘천교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셨습니다. 그런 신부님께서 노인이 되시고 치료비가 많이 든다고 우리나라나 교회가 외면하겠습니까? 신부님의 노후생활을 기쁘게 보살펴 드릴 의무가 저희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말씀도 그 분의 마음을 바꿔 놓지 못했다. 신부님께서는 한국이 좋으시고, 춘천교구의 모든 분들을 사랑하지만 도움을 줄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돌아가시겠다는 것이다.
신부님께서는 1940년(26세)에 한국의 춘천교구에 오셔서, 1998년(84세) 11월 12일에 우리나라를 떠나셨다.
"그 동안 도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내 영혼의 반은 한국에 두고 갑니다."
떠나시는 신부님의 말씀이다.
보석을 위한 피정의 집 건립
---평화신문, 96. 5. 5. 16쪽, 이연숙 기자---
하루에 점심 한끼만 간단히 먹고 기도와 묵상을 하며 맨발로 다니는 '보속 피정의 집'이 생긴다.
피정의 집들이 가능하면 신자들이 숙식에 불편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피정을 할 수 있도록 편리한 시설로 바뀌는 것과 달리 극기 속에서 보속하는 피정의 집을 준비하고 있는 이는 산골에 살고 있는 은퇴신부이다.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3리 은퇴 사제관에서 살고 있는 조 필립보 신부(80. 골롬반회)는 6월경부터 보속을 위한 피정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으로 현재 50∼60명이 들어갈 수 있는 성당 공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아일랜드 서쪽 한 호숫가 섬에는 해마다 봄부터 가을까지 보속의 피정이 이어집니다. 이 피정에 참석하려면 전날 밤 12시 30분부터 대재(大齋)를 지켜야 합니다. 2박3일간 점심 한끼씩만 빵과 홍차로 먹고 기도와 묵상을 하는데 첫날은 성체 조배로 밤을 새우게 됩니다. 한국에서는 두 끼 점심을 밥과 김치만으로 먹게 되겠죠."
아일랜드 신학교 시절, 이 피정 프로그램에 몇 차례 참석한 바 있다는 조 신부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피정을 마친 뒤 그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좋았다."며 지금도 이 피정 프로그램에 연간 3만여명이 참가한다고 전했다.
조 신부는 "특히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낙태 등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해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보속을 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바로 이 같은 지향으로 보속 피정의 집을 계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앞으로 '올리브 동산'으로 부르게 될 이 집은 숙식비를 별도로 정하지 않고 자유롭게 할 예정이다.
서울에서 3시간여 거리의 산골짜기에 위치한 이 집은 별도로 건립되는 게 아니라 사제관에 딸린 집을 수리해 활용하게 된다. 15명 정도 숙식할 수 있으며 그동안 성직·수도자·평신도들이 와서 개인 피정을 하기도 했다.
"작년에 한 그룹 15명이 시험적으로 여기서 보속을 위한 피정을 했습니다. 작은 방에 꾸며진 성당이 15명이 앉기에는 너무 적어 은인들의 도움으로 현재 새로 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수리, 14처를 꾸민 정원 손질을 다시 해야하고 앞으로 방도 더 늘려야 합니다."
조 신부는 6월부터 본격적으로 보속을 위한 영성 피정 프로그램을 시작한다면서 그 때가서 원하는 단체들이 연락해줄 것을 요망했다. 6·25때 '죽음의 행진'에 참가했던 유일한 생존자인 조 신부는 풍요 속에 가려 하느님을 멀리 하는 현대인에게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속에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 주려는 열정으로 노후를 보내고 있다.
* 조신부가 귀국한 후 피정의 집(게세마니 집)은 인제군 신남천주교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주 : yyhome53 )
한국생활 57년 조필립 신부
---월간태백(강원일보사 발행) 97년 3월호---
의미라는 말에만 들어서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게 삶이다. '왜 사냐면 웃지'라는 말이 있다. 일견 인생의 희로애락을 관조한 삶의 예지가 담긴 표현처럼 들리지만 혈기방장한 젊은이에게 어디 삶이 웃어버린다고 될 일인가. 차라리 '삶은 터무니없어'라는 한사람의 비명이나 중얼거림을 대할 때 더 공감이 되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로 삶은 웃어버릴 일도 , 더더욱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때마다 난감해진다. 그 난감함이란 자기 생을 더 이상 변명할 수 없을 때 느껴지는 당황스러움일 것이다. 조필립(81·한국명 趙善喜·필립 크로스비)신부의 삶을 대하면서도 그러한 당황스러움이 느껴진다. 80평생의 대부분을 낯선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바친다는 것. 그것은 분명 평범한 이들이 쉽게 이해하고 말아 버릴 수 없는 삶의 향기이다.
인제군 신남근처 야트마한 산정에 자리한 '게쎄마니의 집'(인제군 남면 부평3리)에 도착한 것은 약속시간보다 40여분 빠른 시각이었다. 식사시간을 피하려 했던 의도가 어긋나 한참 망설인 후에야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인기척이 들리고 머리색이 하얀 노(老)신부가 나타났다. 조 필립신부였다. 조 신부를 따라 거실로 들어가며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조 신부가 입고 있던 헤진 팔꿈치였다. 그러나 끝까지 헤진 팔꿈치 얘기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섣부른 아첨과 웃음으로 넘겨버릴 것이 아니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간 감기 때문에 춘천에 있는 병원에 누워 있다가 나왔어요. 하지만 아직 몸은 건강한 편입니다. 1년전부터 무릎과 팔의 관절이 아픈것만 빼고는 생활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팔순에 건강한 조 신부가 유독 관절이 아픈 이유는 홍천 간성 원통 등지에서 가난한 본당과 공소을 꾸려가느라 노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땅파고 못질하는 '노가다 신부'
땅을 파고 못질하는 대부분의 일들을 직접 나서서 하는데 몇해전 기도의 집을 지을 때도 한번은 인부와 같이 일을 하면서 인부는 모래를 퍼나르고 조 신부는 자갈을 퍼나르고 있더라는 것이었다. 모시고 있던 전교사(임숙녀·세례명 보나)가 놀라 사연을 물어보니 남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으려는 조 신부가 자청해서 자갈을 퍼나른 것이었다고 했다.
사실 조 신부의 검소한 성품과 미덕은 따로 말할 필요 없이 80평생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몸에 밴 겸손 때문에 자신의 얘기는 별로 하지 않으려 했지만 전교사의 이야기 속에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도 자신의 칭찬이 나오면 연신 손을 내저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 감기 때문에 춘천의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런 일이 있었다. 엑스레이 촬영을 위해 윗옷을 벗자 팔꿈치와 겨드랑이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소매가 다 닳아 떨어진 내복을 입고 있는 것이었다. 임씨는 의사와 간호사의 눈을 피해 얼른 내복을 벗겨 감추었다. 퇴원하던 날, 임씨가 버스안에서 "신부님 그 때 제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세요."라고 말하자, 조 신부는 "그거 깨끗이 빨아서 냄새 안나요."라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평상시에도 옷을 2벌 이상 가지고 있는 것이 죄스럽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조 신부는 그래서 가끔 아는 사람들이 옷을 선물할라치면 대부분 주위 사람들에게 도로 나누어준다. 외출을 하게 될 때도 거의 버스를 이용하고 잠을 잘 때도 절대로 여관이나 남의 집에서 신세지는 법 없이 꼭 골롬반 수도원에 들어가 묵는다.
한번은 서울병원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밤늦게 돌아온 조 신부의 모습이 몹시 지쳐 보이고 다리가 퉁퉁 부어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사람이 많아 겨우 입석표를 끊어 버스로 내려 왔는데 서울서 인제까지 서서 왔다는 것이었다. 전교사가 안타깝고 화가 치밀어 "신부님 자리를 양보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하고 물으니 "있었지요. 하지만 그 사람은 좌석표를 가진 사람이고 나는 입석표를 가진 사람이니 그 사람이 앉아서 가는게 당연하지요. 그래서 사양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한국생활 1년만에 감옥살이
조 신부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40년, 24살 청년때 성골롬반 선교사로 들어왔으니 올해로 한국생활 57년째다. 40년 홍천본당 보좌신부로 부임받은 그는 41년 12월 대동아전쟁 발발로 일제가 외국인 사제를 잡아들이자 한국생활 1년만에 낯선 땅에서 감옥에 갇혔다.
"아마 12월 8일이었을 겁니다. 그때 옷을 제대로 걸치고 가지 않아 무척 추웠어요. 감옥에서 덜덜 떨고 있는데 옆방에서 주교님(초대 춘천교구장 퀸란주교)이 당신의 외투를 벗어 보내셨어요. 어린 보좌신부가 어금니를 부딪칠 정도로 떨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나 봅니다. 하지만 제가 어떻게 주교님의 외투를 입겠습니까? 다시 돌려보냈지요. 그런데 옆방에서 주교님이 '보좌신부가 주교의 말을 안 듣는다.'며 호통을 치시는 거예요. 그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주교님의 옷을 입고 있던 기억이 납니다."
조 신부는 출감 후 고향 호주로 추방되었다가 47년 다시 한국행을 신청해 홍천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6·25가 터지자 주위으 만류를 뿌리치고 본당을 지키고 있던 조 신부는 북한군에게 체포됐다. 교황청대사, 개신교선교사 등과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다시 미군포로 7백명과 함께 중강진의 수용소로 끌려갔다.
"평양을 거쳐 만포에서 중강진까지 열흘동안 눈속을 밤낮없이 걸어서 이동했습니다. 낙오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전쟁기간 내내 수용소에서 보냈다. 혹독한 추위와 열악한 배급 등 최악의 조건이었지만 조 신부는 그 때 이야기를 자세히 밝히려 하지 않는다. 다만 다시 살아 나오게 돼서 하느님과 석방해준 북한사람에게도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모진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종전후 시베리아와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에서 서방측에 넘겨진 조 신부는 고향으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54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때부터 홍천, 포천, 간성, 원통의 본당 사목으로 봉사해오고 있는데 기도와 강론 등 사목활동외에 삶의 대부분을 가난하고 병든 주위 사람들을 돌보는 수고와 노동으로 일관해오고 있다.
아일랜드식 기도의 집 운영
'게쎄마니의 집'은 89년 신남성당을 마지막으로 본당사목일을 떠난 조 신부가 직접 지은 기도의 집이다. 조 신부 자신이 신학생시절 참석해 영적도움을 받았던 아일랜드의 피정프로그램을 옮긴 것이다.
"하루 한끼만 먹고 기도하면서 보속(補贖)의 시간을 갖는 집입니다. 여기서는 맨발로 걸어다녀야 합니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현대인들이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대자연 속에서 묵상을 하고 돌아가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즘도 새벽 5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조 신부는 오전시간에 기도와 미사를 드리고 오후에는 기도원 주위를 가꾸는 일이나 망가진 기계와 전기제품을 수리하며 보낸다.
신부가 되지 않았다면 기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조 신부는 이것저것 기계 고치은 일과 목수일을 유난히 좋아한다. 아버지와 고향에 남아있는 남동생도 기술자라고 하는데 우연히 엿본 옷장 맨위 서랍에는 옷가지 대신 쓰다 남은 전깃줄과 각종 기계 부속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저녁 시간에는 주로 독서나 편지를 쓴다. 조 신부는 고향인 호주외에도 유럽이나 미국에 많은 친구들이 있다. 성탄절에는 5백여통의 카드가 세계 각국에서 날아오는데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답장을 써보낸다.
조 신부는 사실 한국에서보다 호주와 미국 등에서 더 유명하다고 한다. 외신기자들도 많이 찾아오는데 한번은 고향 호주에 다니러 갔을 때 그곳에서 모르는 대학생이 신부님 얘기를 많이 들었다며 인사를 해와 당황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특히 호주에선 조 신부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5∼10달러의 주머니돈을 붙여오는 할머니나 꼬마 친구들이 꽤 많다고 했다.
"강원도 사람 가난하지만 착해요"
한국생활 50년이 넘지만 조 신부가 가본 한국의 명소라곤 설악산과 딱 한 번 가본 경주가 전부다. 그나마도 외국서 손님이 찾아와 안내하느라 따라간 것이다.
카톨릭교도였던 어머니의 신실한 신앙이 성직의 길로 이끈 것 같다는 조 신부. 그에게 인간의 근원적 감정인 향수(鄕愁)에 대해 물었다.
"나의 고향은 호주 빅토리아주의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반사막성 기후를 가진 곳인데 특별한 그리움은 없습니다."
하지만 혈육의 정마저 없을 리 없다. 고향에 여동생 2명과 남동생 1명이 살고 있지만 1년에 단 한 번 생일날에만 전화를 한다. 그때마다 전화기를 통해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오면 조 신부는 눈물을 글썽인다. 하지만, 그토록 좋아하시는 거 더 하시라고 평시에 전화를 걸어드리면 절대로 하지 않는다. 당신을 위해 쓰는 돈은 최소한으로 적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한평생을 강원도 산골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고자했던 조 신부에게 가끔 주위 사람들이 "한국에서 57년 살았으니 여기가 제2의 고향이겠네요?"라고 물으면 "호주보다 한국에 더 오래 살았기 때문에 여기가 제1의 고향"이라고 대답한다. 가난하지만 착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강원도 사람들이 좋다는 조신부는 "한국이 자신을 필요로 하고 일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한국에서 살겠다."고 했다.
기도의 집 앞 골짜기 사이로는 소양호가 오목하게 파고 들어과 경관이 매우 좋다. 때문에 날씨가 풀리면 '게쎄마니의 집'을 찾아 잠시 쉬어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운이 좋으면 삶의 의미도 조금 엿볼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소양호의 시원한 바람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내가 아는 조신부님
마르코님이 2004. 8. 18일에 http://www.diocc.or.kr 에 올린 글
소양호 수평선 멀리 잔잔한 파도가 일고있다. 산기슭을 자르며 작은섬도 만들고, 산허리라도 만들 듯 조였다 풀렀다 소양호는 오늘도 낚시배 하나 띄워 본다. 인제군 신남 부평리. 맥고개를지나 300여m를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자그마한 팻말이 하나있다.
<게세마니 동산>
작은 산봉오리를밀어 까치창이달린 성당이 아름답고 . 장미,백일홍,유채꽃닮은 꽃들이 잔디 사이로 피고지는 이곳에 올때면 내 발길을 멈추게하는 그라지오라스꽃도 피어있네.
책갈피속 간직한 은행잎처럼, 잊혀지지않는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어린시절. 배고픔과 구호품이 전부였던 1950년대말은 말그대로 보릿고개시절이였다. 당시,외국인 선교사 한분을만나 구호품과함께 세례를 받았는데 그 선교사 이름은 조필립보(Philip Crosbie) 신부라했다.
6.25당시 홍천에서 피납되어 춘천.서울.개성.평양.개천.강게.만포.자성.후장.중강진. 다시 만포로 초산.신의주 압록강따라 포로생활 끝에 다시 홍천으로 오신 것이 나와 첫번째 만남이었다. 1940년대 골롬반 소속으로 한국에오셨고 아일랜드 유목민 혈통이란다. ( 그의 저서: MARCH TILL THEY DIE 죽음의행진 : 카톨릭출판: 기나긴겨울 - 조선희 지음 .허종열 옮김 )
콩밭을 밀고 그위에 대리석으로 성당을 짓고 종탑위 십자가에 비둘기가 날아들고 노을이걸리면 한포기 그림이었다. 삼종을 울리기 위하여 높은 성당 앞 계단을 올라오시던 종지기 베드로 할아버지. 홍천성당은 내 유년의 전부였다.
나는 당시 복사를하였고 제대위에는 다반사 그라지오라스꽃으로 꽃병을 채웠다. 미사드리기 몇분전 나의 일이다.
" 앗데옴 귀렛스피갓 유벤뚜뎀메암"
라틴어로써 그뜻은 모른다. 미사중에 신부님과 주고 받던 복사 기도문이다. 당시는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
이 이방인을 아버지삼아 내 삶은 이어졌고, 언제쯤인가 필립보신부님은 다른성당으로 가시며 나와 헤어졌다. 소문으로는 포천.원통.간성. 등에 계셨으며 마지막으로 신남성당이 아닌가 싶다.
이곳. 게세마니동산에서 다시 만남은 35년여 만이었다. 많은이는 그를 사제라부른다. 성인이라 부르는 이도 있었다. 부평마을에서는 식복사와 부부란다. 아낙네들 말에 내가 웃으니 따라웃는다. 그들이 "그럼 아니냐?"고 반문한다.
"먹을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먹을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다. 주님의말씀 들을 수 없어 굶주릴 것이다."
"하늘나라가 너희들 것 이라 했는데 -" 그래서 젊음과 청춘, 한 인생을 불사렀나보다.
반세기를 넘게 한국에서 살아온 이방인. 분단의 비극 38선 위에 작은 성당을 짓고 주교님이 <게세마니동산>이라 이름하여 준 곳에 이방인은 가고 없지만, 지금 이곳에 봄비가 내리고 있다.
그가 머므르던 곳에 봄비를 맞으며 그라지오라스 꽃이 다시 피워지겠지만 그의 손길이 닿던 장미도 피어나고 노을에 더욱 붉게 물들여지겠지만, 먼 호주에서 매년 찾아오는 크리스마스카드가 끊길 때면, 내 영혼과 육신의 아버지라 칭하던 필립보, (조선희) 신부님도 추억으로가겠지, 전설속으로 잊혀지겠지. 그 이름 불러불러도 부메랑이되어 돌아오겠지.
기나긴 겨울
조선희 신부의 포로생활 억류기에 대한
가톨릭 신문사 곽승한 기자의 소개글
사제품을 받은 그 이듬해인 1940년 한국 땅을 밟은 26세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호주인 신부가 있었다. 필립보 크로스비(한국명:조선희) 신부. 그는 84세의 나이로 본국에 돌아갈 때까지 약 58년간 춘천교구 사제로 살았다. 그 기간 동안 그는 연금을 당하거나 3년간 생사를 넘나드는 포로 수용소를 전전하며 억류당했다. 모두 한국전쟁 때문에 겪은 고통이었다.
조신부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에 체포되어 3년간의 포로 생활을 겪었는데, 당시의 삶을 수기 형태로 남겨두었다. 이 책은 그의 포로 수기를 번역한 것으로, 지난 1955년 아일랜드에서 출간돼 거의 50년 동안 묻혀 있다가 마침내 우리말로 번역되어 빛을 보게 됐다.
그간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회고록이나 수기가 대체로 전쟁의 경과와 양상을 시간에 따라 기술하거나 특정 전투 및 저자의 활약상을 기록한 것에 치우쳐 있었다면, 이 책은 벽안의 선교 사제가 온몸으로 겪은 생생한 전쟁 체험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단연 눈길을 끈다.
책에는 당시의 포로들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아픔들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간수들의 잔인함과 거의 아사지경에 이르는 굶주림, 의약품이 전혀 없는 상황, 죽음의 행진에 이르기까지 포로들이 겪었던 온갖 고통을 50여명의 다양한 민간인 포로 그룹과 주변인들의 삶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이 특별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죽어 가는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의 고통의 신비를 깨달아 가는 선교 사제의 삶」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체포한 사람들과 간수들까지도 하느님과 함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 『마지막 날에는 아무도 그분을 뵙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조신부의 모습은 순교 성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장면이다.
이밖에도 책은 초대 춘천교구장이었던 퀸란(한국명:구인란) 신부의 모습을 비롯해 골롬반선교회와 파리외방전교회 등 전쟁과 함께 체포된 선교사들이 동토의 땅에서 생존을 위해 겪었던 마음가짐과 자세를 사실 그대로 전하고 있다. 그래서 깊은 감동을 준다.
한편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는 서문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포로생활을 담담하게 술회하면서도 한결같이 사제다운 온유와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간직한 신부님의 글은 더욱 깊은 존경과 감동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했다.
한국 농촌 사목에 평생을 바친 조필립보 신부 |2006-05-26 15:00 | 다음 오픈 지식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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