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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
장소 |
내용 |
비고 |
08:00 |
잠실역 주변 |
서울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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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0 |
목면시배유지 |
문익점과 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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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0 |
도전리마애불상군 |
다양한 불상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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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0 |
겁외사 |
무소유를 실천한 성철 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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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0 |
남사고가마을 |
흙돌담길이 정겨운 고가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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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 |
점심식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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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 |
단속사지 |
초연한 아름다움이 풍기는 단속사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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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0 |
남명조식유적지 |
고고한 선비 남명 조식선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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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0 |
내원사 |
깊은 계곡 맛을 가지고 있는 신라의 고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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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0 |
대원사 |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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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 |
구형왕릉 |
가야의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소중한 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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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0 |
생초IC |
산청 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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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
잠실역 주변 |
서울 도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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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일정이나 기타 궁금한 점이 있으면 강사(오덕만 선생 011-417-7481)에게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지리산(智異山)
지리산은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삼신산의 하나로 알려져 왔으며, 신라 5악 중 남악으로 '어리석은 사람(愚者)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智者)으로 달라진다 해서 지리산'이라 불리어 왔다. 지리산은 백두산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 이곳까지 이어졌다는 뜻에서 두류산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고, 불가에서 깨달음을 얻은 높은 스님의 처소를 가리키는 '방장'의 그 깊은 의미를 빌어 방장산이라고도 하였다.
지리산국립공원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으로 경상남도 하동군, 산청군, 함양군, 전라남도 구례군, 전라북도 남원시 등 3개 도, 5개 시.군, 15개 읍. 면에 걸쳐 있는 곳으로 그 면적이 440.517㎢에 이르고 있으며, 이를 환산하면 무려 1억 3천 평이 넘는 면적이 된다. 이는 계룡산국립공원의 7배이고 여의도 면적의 52배 정도로 20개 국립공원 가운데서 육지면적 만으로는 가장 넓다.
지리산은 남한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인 천왕봉(1,915.4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 10여 개의 고산준봉이 줄지어 있고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이르는 주능선의 거리가 25.5㎞로서 60리가 넘고 지리산의 둘레는 320㎞로서 800리나 된다.
천왕봉에서 발원되어 흐르는 물로 계곡을 형성하고 있는 칠선계곡을 비롯하여 뱀사골계곡, 대원사계곡 등 수없이 많은 계곡과 불일폭포, 구룡폭포, 용추폭포 등 뛰어난 자연경관은 명산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으며, 화엄사, 쌍계사, 연곡사, 대원사, 실상사 등의 대사찰을 비롯한 수많은 암자와 문화재는 이곳이 한국 불교의 산실임을 증명하고 있다.
지리산은 수많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삶터를 제공해주는 생명의 산이기도 하다 .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능선에서 마치 양손을 벌리듯 15개의 남북으로 흘러내린 능선과 골짜기에는 245종의 목본식물과 579종의 초본식물, 15과 41종의 포유류와 39과 165종의 조류, 215종의 곤충류가 자라고 있다.
지리산에서 발원한 물이 덕천강과 엄천강, 황천강을 이루고, 해발 1,000m가 넘는 봉우리가 20여개, 재가 15곳에 이른다. 또 지리산에서 솟는 샘과 이름을 갖고 있는 전망대, 바위의 숫자만도 각각 50여개, 마야고와 반야도사, 호야와 연진 등의 설화에 이상향과 신선의 전설을 안고 있는 지리산. 한때 지리산의 350여 군데에 절과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 국보만도 7점, 보물 26점에 지방문화재와 주요 사적지, 민속자료까지 헤아리지 않아도 지리산은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산이며, 어떤 수식도 필요 없는 산이다.
목면시배유지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를 재배한 곳이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백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고려 우왕 9년(1383)에 하사한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는 1997년에 세운 것이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전문설명
단성현 원당면 배양촌 앞에 홍무 16년(계해 1383)에 문익점의 비를 세우고 명종18년(1563)에는 비각을 세운다. 인조 원년(1623)에 비석을 중건하고 비 전면에 효자리라는 석자를 새기고 따로 『전중현대부 지청도군사 문익점위모려묘 삼년시방해구집심불역이라고 홍무십육년계해이월일 정표안렴사봉상대부 지고성군사 최복인이 육십육자』를 썼다고 읍지는 기록하고 있다.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때 급제하여 정언이란 벼슬에 오른다. 서장관으로 사신을 수행하여 원나라에 가게 되었다. 마침 목면 종자를 얻게 되었다. 그것을 몰래 숨기고 귀국한다. 장인이 되는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단성 땅에서 재배하도록 한다. 삼년 만에 비로소 크게 번지게 되었다. 목면심기에 성공한 것이다. 목화를 따서 씨아에 넣고 물레에 틀어 실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정천익의 창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로써 목화를 심고 실을 짜는 일이 전국에 퍼지게 되었다. 이럴 즈음 문익점은 종3품의 중현대부로 청도군수로 재임 중 어머니를 잃는다. 그때가 고려말엽이었다. 이때는 왜구가 극성스럽게 침입하여 여기저기에서 피해를 받고 있었다. 단성에도 왜구가 침입하여 난리가 났다. 그러나 문익점은 꼼짝 않고 어머니 묘를 지켜 여묘(廬墓)살이 3년을 보냈다. 조선조의 태종은 그의 이런 효성과 목화수입의 공로를 인정하여 『증참지의정부사강성군』에 봉하였고 그를 사모하는 후예들은 도천서원을 짓고 배향하였다. 이 서원은 임진왜란 때 불탔던 것이 광해군 4년((1612)에 중건되었다.
지금 시배의 터전으로 알려진 곳에는 사적비가 서 있다. 산청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문익점묘
남평 문씨로서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충정공 문숙선의 아들인 삼우당(三憂堂) 문익점(1329∼1398) 선생의 묘소이다.
공민왕 9년(1360)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오르고 1363년 좌정언에 있을 때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이때 충선왕의 서자인 셋째 아들 덕흥군 왕시가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최유와 본국의 김용 등과 비밀히 음모를 꾸며 왕위에 오를 것을 원나라 순제로부터 승낙을 얻은 후, 덕흥군을 왕으로 삼아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였고, 이에 명망이 높은 문익점 선생에게 동조할 것을 강요했으나 선생은 이를 끝내 거절하고 절의를 지켰다. 원의 지원까지 받은 이 계획은 공민왕 13년(1364) 최영에게 패하면서 실패하였다.
문익점은 이 계획에 동참하였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중국 운남성으로 귀양을 갔다. 귀국할 때 목화씨를 숨겨와 장인 정천익과 함께 재배하여 의류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우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전위주부, 좌사의대부 등에 올랐는데 이성계 일파의 개혁을 반대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죽은 후에는 조선 세종 22년(1440)에 영의정의 관직이 내려졌고, 강성군에 추봉되었으며, 세조 때에는 사당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선이다.
묘소는 사각형의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좌우에는 문인석과 망주석, 석등이 세워져 보존되고 있다.
문익점 신도비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 선생의 공적을 적고 있다.
문익점(1329∼1398)은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과 순유박사 등을 지내었다. 공민왕 12년(1363)에는 서장관이 되어 원나라에 간 일이 있었는데, 당시 원나라에 와 있던 고려사람 최유가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였다가 최영에게 패한 일이 생겨, 문익점도 그 누명을 쓰고 귀국과 동시에 관직을 삭탈 당하였다. 귀국할 때 붓뚜껑 속에 목화 몇 송이를 숨겨와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으며,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하여 전국에 퍼지게 하였다. 훗날 조식은 그의 이러한 공로를 기리어 시를 지어 찬양하기도 하였다.
비는 조선 순조 34년(1834)에 세운 것으로, 강화도 물 가운데에서 돌을 캐어 각 고을의 성주들이 협력하여 등짐으로 3년여를 옮긴 후 마을의 도로변에 세워놓은 것이라 한다. 그 후 1935년에 실화로 비각은 불에 타 없어지고, 1943년 조선총독부와 경상남도청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삼우당 효자비
이 비석(碑石)은 가로 160㎝, 세로 50㎝의 돌로 된 비이다. 문익점 선생이 살았던 마을에 서 있는 비로,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이 돌아가시자 묘 곁에서 움막을 짓고 살았다. 당시는 왜적의 침입이 잦아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노략질이 심하여 모두 피난을 가고 있었는데, 그 만이 홀로 평상시와 같이 곡을 하고 있었다. 왜적도 그의 이러한 효성에 감동하여 나무를 다듬어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고 써서 세워 놓도록 하니, 그 때부터 이 지역이 평안하였다 한다. 그 후 조정에서는 고려 우왕 9년(1383)에 조정에 정려를 내리면서 이 마을을 효자리라고 명명하였다.
비각 안에 모셔둔 비는 낮은 사각 받침돌 위로 비 몸을 세운 모습으로, 비 몸의 윗변은 살짝 둥글게 다듬었다.
도전리 마애불상군
여러 가지 형식으로 새겨졌지만 대개 비슷하여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으며, 소발의 머리칼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글고 단아하지만 이목구비가 마멸이 심한 편이다. 몸은 사각형이면서도 단정하며 통견의 법의를 밀집되게 나타내어 신라 말 고려 초 특히 고려시대의 불상 특징이 강하게 엿보이고 있다. 탄력과 세련미가 줄어졌으나 단정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이 불상들은 불상의 옷 입음새나 수인 등 세부표현에서 다소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수인의 경우 선정인, 시무외인, 보주를 든 손모양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불상 옆에 새겨진 '□□선생'이란 명문과 관련하여 보면 흥미 있는 불상으로 여겨진다.
특이한 불상군의 구성은 당시의 특징적인 배치 방법으로 주목되며,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이루어지면 그 중요성은 한결 높아질 것으로 생각된다.
겁외사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바로 옆에 성철스님 생가와 겁외사가 있다. 성철 스님은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의 초대 방장을 지내셨고 조계종 제6대 종정이시기도 했다.
말년에 주로 합천 가야산의 백련암에서 지내셨으며, 1993년 11월 82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셨다. 성철스님의 열반 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성철스님의 말이 사람들 사이에 많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이 곳 묵곡리는 1912년 음력 2월 19일 성철대종사가 태어난 곳으로 해인사 성철스님 문도회와 산청군은 1998년 성철대종사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단순한 생가복원 차원을 넘어서 성철스님기념관을 세워 수행의 정신과 그 가르침을 기리고 겁외사를 건립하여 종교를 뛰어넘는 선 수행, 가르침, 포교의 공간을 조성하여 2001년 3월 30일 문을 열었다.
성철대종사는 비록 우리와 똑같은 속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영원한 진리와 행복을 찾고자 하는 일념으로 부처의 길을 택하여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철저한 수행과 무소유의 삶으로 수행자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 “우리시대의 부처”로서 추앙받고 있는 이 시대의 성인이다.
성철대종사의 부친인 율은 이상언 옹의 호를 따 율은고택으로 명명한 생가는 크게 유물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으로 구분된다.
유물전시관에는 성철스님이 평소 지녔던 두루마기와 고무신을 비롯하여 평소의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는 소장 도서와 메모지, 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있다. 안채전시관과 사랑채전시관은 성철스님의 생가를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니고 당시의 일반적인 한옥의 형태로 이루어진 기념관이다.
겁외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라는 의미로서 늘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고 자했던 성철대종사의 수행자적 의지가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겁외사는 대웅전과 선방, 누각, 요사채 등이 부속 건물로 있으며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김소석 화백이 그린 성철대종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성철대종사 생가복원과 겁외사 창건의 의미는 성철스님 개인을 추앙하자는 것이 아니라 누구라도 성철스님을 따라 깨달음을 향한 의지와 실천이 굳으면, 속인으로 오셨다가 부처님으로 가신 성철스님처럼 영원한 진리를 함께 할 수 있다는 표본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겁외사는 추모의 공간이 아니라 발심의 공간인 것이다.
남사마을
남사마을에는 토담 돌담이 공존하고 있다. 대개 마을 내 반가(최씨 고가, 이씨 고가)나 사양정사, 이사재 주위는 토담이 잘 남아 있으며, 마을 안 서민들이 거주하는 민가에는 돌담이 많이 시용되어 전통사회의 신분에 따 담의 구조와 재료, 형식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상류층의 건축물 주위에 쌓은 토담은 대개 메쌓기 한 석축 위에 찰쌓기 방식으로 토담을 쌓은 것이다. 즉 토담 하부에 길이 50-60cm정도의 큰 막돌을 2-3층 메쌓기한 후 그 위에 황토를 편 다음 막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벌려 놓고 돌 사이에 황토를 채워
남사마을의 묵은 토담과 돌담은 마을주민들이 남사천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강돌을 사용하여 주택 외곽과 밭 주위에 쌓은 것으로 경남 서부지방의 반촌의 전통적인 공간구조와 담장형식과 구조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마을의 문화 관광자산으로서 뚜렷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최씨 고가
남사마을 중앙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집으로 안채와 외양간채, 사랑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으며 1930년대 지은 집이다.
사랑채 좌우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2곳에 설치하고 있는데 동측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눈에 지각될 수 있는 개방적인 형태인데 반해서 서측의 중문은 통과하더라도 익랑채와 안채가 직접 눈에 띄지 않도록 안으로 담을 ㄱ자로 둘러쳐 시각을 차단하는 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사대부 주택에서 유교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난 것으로 남녀의 공간분할과 여성공간에 대해 독립성을 갖기 위해 택한 뛰어난 배치 수법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간(前後退間)이 있는 5량구조 팔작집이다. 뒤쪽 툇마루의 후퇴간의 폭이 커서 각방 뒤편으로 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벽장이 놓이고, 특히 부엌과 건너방 뒤에는 방으로 분할되어 홑집형식에서 겹집형식으로 변화 발전하는 형태를 나타낸다. 건물고가 높고 부재들이 견실하며 이중방문의 조각장식은 섬세하고 아름다워 사대부 주택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동향한 아래채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은 앞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으로 꾸몄다. 남쪽에 개방된 대청이 있고 이어 온돌방을 두었다.
광채는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서쪽을 향하여 서 있다.
사랑채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전후퇴간이 있는 5량구조 팔작집이며 사랑채 좌우에 안마당으로 통하는 중문을 2곳에 만들었는데 동쪽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한 눈에 보이고, 서쪽 중문은 외양간채와 안채가 직접 눈에 띄지 않도록 안으로 담을 둘러놓았다.
남녀 사용공간을 나누어 공간의 독립성을 부여한 뛰어난 배치로 사대부가의 유교적 전통을 엿볼 수 있는 집이다.
사양정사
사양정사는 한말의 유학자 계제 정제용(1865-1907)의 아들 정덕영과 장손 정정화가 남사로 이전한 후 선친을 추모하기 위하여 마련한 정사로 1920년대에 지어졌다. 정제용은 포은 정몽주의 후손으로 한말의 유학자인 후산(後山) 허유와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장서(巴里長書)를 작성한 면우 곽종석의 문인이다.
사양정사란 ‘泗水’ 남쪽의 학문을 연마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여기서의 ‘사수’는 공자의 고향인 중국 산동성 곡부에 있는 강 이름인데 공자를 흠모하는 뜻으로 남사마을 뒤에 있는 개울을 사수라 부르고 정사가 개울의 남쪽에 있어 사양정사라 이름 하였던 것이다. 건립이후 주로 자손을 교육하고 문객을 맞아 교유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사양정사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으로서 천장이 높고 부재가 튼실하며 치목이 정교할 뿐 아니라 다락과 벽장 등 수납공간을 풍부하게 설치하였으며 또한 당시로서는 새로운 건축 재료인 유리를 사용하여 근대기 한옥의 변화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4칸의 광을 넣어 7칸의 장대한 규모로 구성한 대문채에는 충절을 상징하는 홍살 넣은 솟을대문을 달아 사양정사의 품격과 풍부한 경제력을 나타내었다.
이씨 고가
남사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으로 1700년대 건축이다. 남북으로 긴 대지에 안채, 사랑채, 익랑채, 곡간채가 안채를 중심으로 ㅁ자형으로 배치되고 사랑채는 안채와 앞뒤로 나란한 병렬배치이고, 사당은 곡간채 뒤측이지만 안채 좌측 전면에 있고 시각적으로 막혀 ㅁ자형으로 배치되어 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인다.
집터의 서남방에 자리 잡은 대문간을 들어서면 바로 사랑마당이고, 이 마당 북쪽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반의 크기를 가진 사랑채가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랑채 남쪽에 자리 잡은 외양간채는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로 외양간과 광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 동쪽에는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의 중문간채가 자리 잡고 있는데, 중문과 광이 있고 출입문은 안마당 쪽으로 터놓았다.
중문을 들어서서 보이는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전후 퇴칸이 있는 5량 구조로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는 팔작집이다. 대청이 2칸을 차지하고 있고 건너방 툇마루는 대청보다 20㎝가량 올리고 그 밑에 아궁이를 설치한 전형적인 남부 일자형 평면이다. 일반적으로 사대부의 주택에서 안채의 부엌위치는 사당의 방향과 반대편이지만 여기서는 특이하게 사당과 같은 동측에 부엌이 놓여있다.
아래채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 크기로 동향하였는데, 남측단에 부엌과 방·대청 등을 배치하고 앞면에는 개방된 툇마루를 만들었다. 서향한 광채는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안쪽은 칸을 나누지 않았다.
시각적으로 막혀있는 특이한 배치를 보이고 있고, 일반 사대부 주택 안채에 있는 부엌 위치가 사당 방향과 반대인 점과 달리 이 집은 같은 방향으로 놓여 있는 점이 특이하다.
단속사지
이 단속사지에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삼층석탑은 신라중기 이후의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갖추고 있다.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으로,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은 크기로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쌍탑의 배치와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단속사지서삼층석탑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서쪽에 세워진 것이 이 탑이다.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나, 동탑에 비하여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랫단은 가운데에 2개씩을 두고 윗단은 1개씩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처마를 직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밋밋한 경사가 흐르는 윗면은 네 귀퉁이에서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다.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점이나, 탑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어드는 수법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 기단의 너비가 넓어지고 4면에 새긴 가운데기둥의 수가 아래기단은 2개, 윗 기단은 1개로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수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남명 조식 유적
조식유적은 조선중기의 위대한 유현이며 뛰어난 실천 도학자였던 남명선생이 만년에 강학하던 산천재를 비롯하여 사후 그를 모시던 덕천서원 등을 일괄 지정한 유적지이다.
남명 조식(燕山君 7년 1501∼선조 5년, 자 건중, 별호산해, 본관 창녕)은 남다른 재질과 용공(절제)으로 일찍부터 학덕을 갖추어 대성하였으나 사환(벼슬)에는 나아가지 않고, 평생 동안 선비와 처사(산림)로써 굳건히 일관하였다. 38세 때 헌릉참봉을 시작으로 여러 번 벼슬이 제수되고 왕이 면대하기를 청(징소) 하였으나 매번 상소(封事)로써 의견을 개진하였을 뿐 나아가지 않았고, 오직 66세(명종) 21, 1566)되던 해 10월 초에 상경하여 왕을 잠시 뵈옵고는 곧 귀향하였다. 사후 광해군 7년(年)(1615)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다.
경상도의 북(안동)과 남(진주)에서 동년생으로 다 같이 불세출의 홍유석덕에 이른 퇴계이황이 연구와 사색과 저술을 통해 천도(理致)를 밝힘에 보다 힘썼다면, 남명은 반궁(自省)과 체험과 실천을 통해 의리의 숭상(時弊)의 구제(救濟)에 보다 힘썼다고 할 수 있다.
남명의 학문은 스스로 강조한 바와 같이 경의로써 대표되는데 경은 안으로 궁리명선(窮理明善)하는 용공이며 의는 경한 바를 밖에서 실행하는 용단으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 같다. 이같이 고고(孤高) 강의(剛毅)한 기상을 깔고 있는 남명의 학풍은 최영경, 정인홍, 정구, 김우옹 등 발군의 여러 제자들을 통해 후일에 이르도록 퇴계나 율곡학파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학맥으로 전승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곽재우, 김면, 정인홍 등 경상우도 의병의 주축이 이 문하에서 군기하여 국난극복에 크나큰 공덕을 세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제 정인홍이 그 후 대북파의 영수로서 광해군 정권과 연계되고 처형된 까닭에 조선후기는 물론, 금일에 있어서도 남명에 대한 이해와 평가 및 천양(闡揚)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남명은 현 합천군 삼가면 토동(외토리)에서 생장하고, 30세 되던 중종25년(1530)에 처향(妻鄕)이던 현 김해군 대저면 탄동(주박동)으로 옮기어 산해정을 지어 경의(敬義)공부에 몰두하였다. 48세(명종 3, 1548)에 다시 향리(토동)로 돌아와 학복당과 뢰용정을 지어 찾아드는 많은 학자(門人)을 가르쳤고, 61세 되던 명종 16년(1561)에 이곳 사리(사륜동), 당시는 진주목 덕천동)로 재차 옮겨 산천재를 지어 제생(諸生)에게 강학하던 중 11년 후에 서거하였다. 그러므로 현재 김해의 산해정, 삼가의 뢰용정(경북문화재자료 제29호) 등도 남아 있으나 만년에 거처하던 이곳 일대가 남명의 유적지 중 가장 대표적인 곳이다.
이 같은 실정을 고려하여 1984년 1월에 이르러 이곳 유적의 각 건물이나 석물이 갖는 문화재적 평가보다도 그 전체를 일괄하여 남명선생의 학덕과 교육(講學)을 오늘날에 되살려 숭앙 천양하는 상징적 중심체(紀念物)로써 사적 제305호로 지정하였다.
조식유적은 크게 산천재 권역(사리)과 약 1km 서방에 떨어져 있는 덕천서원 권역(원리)으로 나눠지고, 전자는 다시 강변에 자리한 산천재(와 그 외의 유적이 진주∼지리산간대로로 인해 양분되어 있다.
조식 선생은 많은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하고,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全身四十年前 전신사십년전 (사십 평생 살아온 이내 몸의 더러움을)
千斛淸淵洗盡休 천곡청연세진휴(맑은 못 깊고 넓어 남김없이 씻어냈네)
塵土能生五內 진토능생오내(오장 속에 티끌 혹시라도 남았다면)
直今腹付歸流 직금복부귀류(당장 이 배를 갈라 물에 흘려 보내리라)
남명선생 문집책판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의 시문집을 널리 간행하기 위해 만든 책판이다.
조식은 평생 학문에 힘썼으나 과거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1567년 임금이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다만 왕을 만나 난을 다스리는 방도와 학문을 마칠 것임을 밝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상생활에서도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의가 아닌 것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같은 시대에 살았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학풍을 만든 인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에 위기가 닥치면 몸소 앞장서서 싸움에 참여하였다. 그가 죽은 후 차례로 대사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여러 서원에 그의 위패가 모셔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선조 37년(1604)에 선생의 제자인 정인홍에 의해 해인사에서 간행되었으나, 불에 타버려 광해군 14년(1622)에 관찰사 유영순의 도움으로 다시 간행하였다. 그 후 『산해사오연원록』,『연보』,『언행록』등이 추가로 간행되었다. 또한 고종 31년(1894)에 이들 문집을 다시 보완하고 수정하여 새로이 간행하였으며, 광무 1년(1897)에 선생의『연보』를 수정, 보완하여『남명선생편년』을 간행하였다.
이것은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과 생애를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이다.
내원사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는 위치에 절묘하게 자리한 절이 내원사다. 절이라기보다 어느 양반집 후원같이 정갈하고 그윽한 분위기가 인상적인 곳이다.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하여 덕산사(德山寺)라 하였으나 그 뒤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어 그대로 방치되다가 1959년 원경스님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당시 절 이름도 내원사로 고쳤다.
장당골쪽의 계곡을 따라 숲속 계단을 올라가면 장당골 계곡 맞은편에 있는 소담한 절을 마주하게 된다. 내원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절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하는 반야교이다. '반야'란 지혜를 의미한다. 세속의 모든 번뇌를 잊어버리는 지혜를 반야교에서 얻어, 절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맑은 물소리와 더불어 천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며, 반야교의 가운데 서면 계곡의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으며, 흐린 날에는 계곡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로운 물안개도 감상할 수 있다.
반야교를 지나면 일주문이나 불이문 같은 입구도 없이 양반집 후원 같은 경내에 들어서게 된다. 계곡의 물소리로 인해 사찰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대웅전 앞마당을 단풍나무가 주변에서 둘러싸고 있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심우당, 비로전, 산신각, 칠성각, 요사채가 있으며 건물의 규모는 한결같이 작다. 보물로 지정된 비로전에 봉안된 석남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고려시대에 건립된 내원사삼층석탑이 있다.
대웅전 앞 계단 위에서 앞마당을 보면 더욱 정겹다.
내원사에는 풍수와 관련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해온다. 이 절터가 풍수상 명당 터라 전국에서 찾아오는 관람객으로 큰 혼잡을 이루게 되어 수도하는데 많은 지장을 주게 되었다. 주지스님이 이를 걱정하였더니 어느 노승이 말하기를 '남쪽의 산봉우리 밑까지 길을 내고 앞으로 흐르는 개울에 다리를 놓으면 해결될 것이다.'하고 홀연히 떠나버렸다. 이튿날부터 대중스님들이 총동원되어 개울에 통나무로 다리를 놓고, 봉우리 밑까지 길을 낸 다음 모두 쉬고 있는데 돌연히 고양이 울음소리가 세 번 들려왔다. 이상히 여긴 사람들은 무슨 징조인지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 후 풍수설로 해명하기를 앞에 있는 봉우리는 고양이 혈이고, 절 뒤에 있는 봉우리는 쥐의 혈인데 여기 길을 내고 다리를 놓으니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이 있고 나자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 스님들이 조용히 수도에 정진할 수 있게 되었지만,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절은 전부 불타 버리고 말았다. 절이 불타고 있을 때 이 절에 기거하던 세 분의 장사스님이 개울에서 커다란 통나무에 물을 길어 불을 끄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왼쪽에서 길어 쏟는 물은 오른편 개울에 떨어지고, 오른편에서 쏟은 물은 왼편 개울에 떨어지며, 앞에서 쏟은 물은 뒷산 봉우리에 떨어져 결국 불길을 잡지 못하고 절이 전소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 절에는 '장군수'라는 약수가 있었고, 두부를 만들 때 사용했다는 큰 맷돌과 여름이면 김치독을 채워 두었던 웅덩이가 개울 옆에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다.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소담한 절, 내원사는 계절마다 느낌이 달라 운치를 더하지만 특히 대웅전 마당의 단풍나무가 물드는 가을에 더욱 멋이 있으며, 그 포근함으로 인해 하룻밤 머물고 싶은 곳이다.
삼층석탑
내원사의 대웅전 앞에 서 있는 탑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건립하고 정상부에 상륜을 장식한 신라시대 일반형 석탑이며 높이 4.8m이다. 이 석탑의 북쪽에 옛 법당지가 있고, 주변에 석등부재와 석탑의 상륜부재, 각종 조각석의 파편 등이 높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는 남향한 1탑 가람으로 현재의 위치가 원 위치임을 알 수 있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면석은 같은 돌 4매로 구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개의 우주와 두개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고 옥개석 받침은 4단씩이며 물매는 얕고 추녀는 직선이다. 옥개석 상면에 2단의 받침으로 그 위층의 탑신석을 받고 있는 점과 특히 기단부의 구성 및 각부의 양식 수법, 지붕돌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의 석탑의 원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서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것이 뚜렷하게 보이지만, 불에 타서 심하게 손상된 상태이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4단씩 두었으며, 수평을 이루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서 크게 치켜 올려져 있다.
대원사
대원사는 정갈하고 단아하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을 간직하고 바위틈을 흐르는 청정한 물소리와 더불어 비구니들의 맑은 미소를 벗하는 곳이다. 산청군 삼장면 유평리 지리산 자락에 위치한 대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며, 양산 석남사·예산의 견성암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대원사로 들어가는 길은 완만한 계곡과 금강송이라 불리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어 선계에 이르기 위한 길목으로 착각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방장산대원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이 단청의 화려함과 크기의 웅장함으로 방문객을 반긴다.
일주문에서 계곡을 따라 300m 가량 올라가면 산지가람 형태를 지닌 아담한 건물을 만나게 된다. 계단을 올라 천왕문에 이르는 것이 마치 학이 날개를 벌려 뭇 중생들을 선계로 안내하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천왕문에 올라 대웅전을 바라보면 창을 통해 보는 듯한 푸근하고 아담한 느낌을 받는다. 천왕문을 지나 2층 누각 봉상루를 통과해 대웅전 앞마당에 들어서면 대웅전과 원통보전이 또 다른 계단 위에 서 있고, 비구니 도량답게 키 높은 파초가 초록의 싱싱함을 더해 준다.
대웅전 왼편의 원통보전은 팔작지붕의 형태이지만 크기에 변화를 준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원통보전을 끼고 뒤로 돌아가면 다시 아담한 계단이 있는데 계단 중간에 장독들이 3열 횡대로 정연히 서 있다. 이 장독대는 우리나라 사찰의 전형성을 띠고 있어 전국적으로 그 명성이 자자하다. 특히 장독의 형태가 어깨선이 떡 벌어진 우람하고 장중한 경상도 장독이므로 보는 이로 하여금 장골의 기개를 느끼게 한다. 탐스러운 장독으로 인해 대원사의 된장이나 장맛을 한 번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데 대원사에서 공양이라도 하게 되면 금상첨화이다.
장독대 위쪽으로는 산왕각이 있다. 작은 들꽃과 백일홍과 같은 정원수들이 작은 키로 길목마다 잘 다듬어져 있어 청정도량다운 분위기를 저절로 느끼게 된다. 장독대 오른편으로 시선을 두면 담 넘어 대원사다층석탑이 눈맛을 돋구는데 수려한 자태미와 더불어 견고하고 강하면서도 그 깔끔함이 주위 경관과 잘 어울리다. 장독대에서 서서 보는 다층석탑의 넉넉함과 다정함도 대원사에서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묘미이다.
대웅전 오른쪽의 참배객 출입금지로 되어 있는 나무문을 지나 계단으로 오르면 전국의 비구니들이 한 번쯤 거쳐야 하는 선방인 사리전이 있고, 그 앞에 근년에 보물 제 1112호로 지정된 대원사다층석탑이 있다. 그 외에도 추사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요사채가 여러 동 있다.
대원사는 548(진흥왕9)년에 연기(緣起)조사가 창건하여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1천여 년 동안 폐사되었던 것을 1685(숙종11)년에 운권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의 옛 절터에 사찰을 건립, 대원암(大原菴)이라 개칭하고 선불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 제일의 강당이 되었다. 1890(고종 27)년에 혜흔선사의 암자가 무너져 크게 중건하였다. 서쪽에는 조사영당을 보수,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대원사라 개칭하고 큰스님을 초청하여 불교를 공부하니 전국의 수행승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1914년 1월 12일 밤에 다시 불로 절이 모두 타버린 것을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1917년 전, 누, 당, 각, 요사채 등 12동 184칸 의 건물을 지었다. 여순반란사건과 한국전쟁 등으로 폐허가 되어 방치되다가 1955년 9월에 비구니 법일화상이 주지로 임명되어 1986년까지 대웅전, 사리전, 천광전, 원통보전, 봉상루, 범종각, 명부전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부근에는 옛적 선비들이 수학했다는 거연정, 군자정이 있다.
대원사는 깊은 산속에 호젓한 산사가 깃들여 있다는 사실, 절집의 맑은 분위기, 그리고 비구니들이 용맹정진하고 있다는 숙연성 때문에 몇 번을 찾아도 좋은 절이다.
다층석탑
대원사 다층석탑은 신라 선덕여왕 15년 (646) 에 자장율사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의 사리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8층의 탑신을 세운 모습으로,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일부만 남아있다.
기단의 위층은 이 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으로 모서리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기는 대신 인물상을 두었고, 4면에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처마가 두꺼우며 네 귀퉁이에서 약간 들려있다. 8층 지붕돌에는 금방이라도 고즈넉한 경내를 깨울 듯 풍경이 달려 있다.
자장율사가 처음 세웠던 탑이 임진왜란 때 파괴되자 조선 정조 8년(1784)에 다시 세워 놓은 것으로, 드물게 남아있는 조선 전기의 석탑이다. 전체적인 체감비율이 뛰어나고 조각은 소박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탑에서 서광이 비치고 향기가 경내에 가득했다고 하며, 마음이 맑은 사람은 근처 연못에 비친 탑의 그림자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도 한다.
전 구형왕릉
가락국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는 왕릉은 구형왕 구해(九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 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왕릉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무인석이 있는데 이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에 세운 시설물이다.
이 무덤을 구형왕릉이라고 명칭을 붙인 것은 홍의영(1750~1815)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근처에 있는 왕산사에 전해오고 있는 ≪산사기권≫에 구형왕릉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하였다. 다른 자료인 ≪산청현유지≫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홍의영 ≪왕산심릉기≫에 이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 것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보여 진다. 전하기로 약 200년 전에 마을 사람들이 산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큰 목궤를 민경원이란 사람이 내려다보았더니, 그 속에서 구형왕과 왕비의 영정과 옷, 활, 칼 등의 유물과 함께 명승 탄영(坦渶)의 왕산사기가 나와서 이를 가지고 왕릉을 다시 찾게 되었고, 그 유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조선 정조 17년(1793년)에 덕양전을 짓고, 가락종친이 봄가을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구형왕은 나라를 지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방장산(지리산)자락의 왕산(王山)으로 들어가 4년여를 지내시다 붕허하셨다.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 16번지 구형왕릉은 사적 제214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조정에서 제향을 모시도록 배려했다. 정조 11년(1798)부터는 가락종친회에서 봄·가을로 구형왕과 계화왕후의 음덕을 기리는 제향을 받들고 있다. 구형왕은 세 아들 세종, 무력, 무득은 신라에 들어가 나라의 융성을 크게 기여했으며, 특히 구형왕 증손자 김유신은 화랑으로 장군이 되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여 가락인의 기개를 드높였다.
김유신 장군은 태대각간에 이어 사후 162년 흥무대왕으로 추촌 되었고 가락종친의 중시조(中始祖)로 추앙받고 있다. 산청 구형왕릉은 700만 가락후손들의 성지요 전통 한방의 고장 산청의 관광명소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가야고분군
태봉산 남쪽의 언덕에 위치한 무덤들이다.
원래는 100여기 이상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개간과 도굴로 대부분 파헤쳐져 지금은 능선을 따라 2∼3기만 확인할 수 있다. 봉분의 규모는 외형상 대형이 지름 25∼30m·높이 6∼8m이며, 중형은 지름 15∼20m·높이 4∼5m, 소형은 지름 10m 내외, 높이 3m 정도이다.
내부는 돌로 돌방(석실)을 만들고 천장을 좁혀 뚜껑돌을 덮고, 입구와 통로가 있는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이라 생각된다.
아직 조사가 없어 정확한 연대나 성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이 무덤들은 내부구조와 주변에서 수습된 토기조각, 그리고 전면에는 경호강과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5세기경의 가야시대 지배층의 것으로 여겨진다. 가야 무덤에 대한 연구 뿐 만 아니라 가야사의 실체 해명에 있어서도 중요한 유적으로 생각된다.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여행프로그램 [別有風景]
한비야 씨는 여행이란 무엇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서 수많은 나를 만나는 일이라고 합니다.
한동안 진행되었던 위례역사문화연구회의 정기답사를 2009년 9월, 102차로 끝내고 송파문화원의 '테마가 있는 문화탐방'이라는 강좌로 변경되다보니 우리 회원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되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금년 4월부터 새롭게 여행 프로그램을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프로그램 이름을 고민하다가 이백의 시 <산중문답>에
問爾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묻노니, 그대는 왜 푸른 산에 사는가.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현) 웃을 뿐, 답은 않고 마음이 한가롭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 띄워 물은 아득히 흘러가나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별천지 따로 있어 인간 세상 아니네.
이란 詩가 떠올랐습니다. 별유천지(別有天地)라는 말을 별유풍경(別有風景)으로 바꿔보니 보통 볼 수 없는 특별히 좋은 풍경을 표현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이제 좋은 인연으로 만난 사람들과 함께 별유풍경(別有風景)을 구경하러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자유와 평화로움이 가득한 곳으로 말이죠.
여행일정은 종전과 같이 매월 4째 주 화요일에 진행되며 접수 및 신청은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02-3401-0660)으로 하셔야 합니다. 1회 참가 시에 회비는 4만원이며, 3개원 단위로 신청을 하실 경우에는 10만원입니다. 강사는 오덕만 선생님이 진행하실 계획입니다. 회원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회차 |
일자 |
탐방주제 |
탐방지 |
1 |
4월27일(화) |
매화의 그윽한 향을 간직한 고을, 산청 |
목면시배유지 → 겁외사(성철스님 생가) → 남명조식유적지 → 중산관광지(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 내원사 → 대원사 → 구형왕릉 → 단속사 |
2 |
5월25일(화) |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이 만들어질 거창 |
수승대(거북바위, 요수정, 관수루, 구연서원) → 정온선생종택 → 황산마을 신씨고가 → 거열산성 → 건계정 → 감악산연수사(푸른샘물의 약수)→ 감악사지부도 |
3 |
6월22일(화) |
두메산골 길을 가다 보면 소슬바람이 가슴을 시원케 하고 이름 모를 산꽃이 반겨주는 평창 |
진부장 → 신기리 → 새재 → 봉산리 → 봉산리 양지마을 → 대광사와 봉산계곡 → 자개골 → 구절리역 → 대기리 노추산과 이율곡 선생 → 안반데기 |
4 |
7월27일(화) |
신비함과 순수함을 간직 화천 |
평화의 댐 → 꺼먹다리 → 파로호 → 위라리칠층석탑 → 화천향교 → 계성사지석등 → 화음동정사지 → 인민군사령부막사 → 화천수력발전소 |
5 |
8월24일(화) |
자연에 심취해 정작 깊은 의미를 지닌 문화유산을 소홀히 했던 고성 |
건봉사 사리탑 → 간성향교 → 화진포 (금구도, 화포리 고인돌) → 문암리 선사유적지 → 화암사 수바위 |
6 |
9월28일(화) |
산삼과 산약초가 유명한 고장 함양 |
학사루 → 함양상림 → 함양석조여래좌상 → 남계서원 → 청계서원 → 안의광풍루 → 용추사 → 심원정 → 농월정 → 동호정 → 군자정 → 거연정 |
7 |
10월26일(화) |
청정한 자연과 향토문화가 어우러진 괴산 |
각연사 → 미륵산성 → 우암송시열 관련 유적 → 산맥이옛길 |
8 |
11월23일(화) |
풍요롭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충절과 예학의 고장 논산 |
관촉사 → 계백장군묘소 → 돈암서원 → 개태사 → 상계사 → 성삼문묘 → 견훤왕릉 → 강경젓갈시장 → 명재고택 |
9 |
12월28일(화) |
서해안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한 당진 |
당진면천읍성 → 면천향교 → 영탑사 → 영랑사 → 안국사지 → 필경사 → 김대건신부생가지 |
10 |
1월25일(화) |
하늘의 뜻과 땅의 기운, 사람의 정성이 하나로 어우러진 금산 |
개삼터 → 태고사 → 보석사 → 남이자연휴양림 → 육백고지전승탑 → 백령성지 → 서대산 → 칠백의총 |
11 |
2월22일(화) |
북부에는 궁예, 남부에는 이 성계와 관련된 땅이름이 많은 포천 |
포천향교 → 구읍리석불입상 → 구읍리미륵불상 → 반월산성 → 청성사 → 용연서원 → 채산사 → 인평대군묘 → 성석린 선생 묘 |
12 |
3월29일(화) |
치악산과 섬강이 휘감아 흐르며 유구한 전통과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원주 |
강원감영 → 박경리문학공원 → 원주시립박물관 → 충렬사 → 국형사 → 보문사 → 입석사법천사지거돈사지흥법사지 |
회 비 : 3개월(100,000원), 1개월(40,000원)
회비입금: 국민은행 836301-04-002170(예금주: 오덕만)
접수처 : 위례역사문화연구회 사무국(담당: 오유정 02)3401-0660)
위례역사문화연구회 평생교육원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193-17 광진빌딩 2층 ☏ 3401-0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