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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誾의 挹翠軒遺稿 第4券
행장(行狀)
망실(亡室) 고령 신씨(高靈申氏) 행장
은(誾)은 아룁니다.
망실(亡室) 의인(宜人)은 성은 신씨(申氏)이고 보계(譜系)는 고령(高靈)에서 나왔다. 고령부원군(高靈府院君) 휘 숙주(叔舟)란 분이 있어 세종(世宗), 문종(文宗), 세조(世祖), 예종(睿宗), 성종(成宗)을 섬기면서 정난 공신(靖難功臣), 익대 공신(翊戴功臣), 좌익 공신(佐翼功臣), 좌리 공신(佐理功臣)으로 책훈(策勳)되고 벼슬이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졸(卒)한 뒤에는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받고 성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이분이 아들 휘 면(㴐)을 낳았는데 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로 있다가 정해년의 난리에 죽었다. 이에 조정이 포상하여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추증하였다. 이분이 휘 용개(用漑)를 낳았다. 이분은 지난해 겨울,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로 있다가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나갔다. 군(君)은 바로 이분의 장녀이다. 모친은 밀산 박씨(密山朴氏)이니, 지금 의정부 좌찬성인 건(楗)이 그 외조부이다.
군은 성화(成化) 기해년(1479, 성종 10) 1월 모일에 태어났다. 처음 세상에 태어나서는 외가에서 자랐는데, 어릴 때 영특하고 단정하였으며 놀고 장난하는 것이 모두 여인의 범절에 맞았다. 그래서 찬성공(贊成公)이 어질다고 여겨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계축년 봄, 군의 나이 15세에 나에게 시집왔는데 잠영(簪纓)의 집안에서 자랐으면서도 교만한 모습이 없었고 시부모의 집에 들어와서는 예경(禮敬)의 행실을 다하였다. 나의 누이들과 더불어 어버이를 모신 자리에서 기쁜 기색으로 담소하며 매우 화락하니, 시부모들이 매우 좋아하였다.
병진년(1496, 연산군 2)에 내가 과거에 급제하였고 정사년에 분가(分家)하여 살았다. 길쌈에서부터 담장이며 집의 건물에 이르기까지 안팎의 일들을 모두 군이 도맡았는데 일 처리가 매우 찬찬하고 꼼꼼하였다. 비복(婢僕)을 부릴 때에는 조금이라도 예의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엄히 꾸짖어 상하가 분명하고 집안이 숙연하였다.
나는 성품이 소루(疏漏)하고 나태할 뿐 아니라 군이 어질다 하여 집안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당시에 은의 내외 왕모(王母)들이 모두 무양(無恙)하였는데 군은 철 따라 좋은 음식을 장만해 바치느라 늘 급급하여 여념이 없었다. 내왕모(內王母) 한씨(韓氏)는 규범(閨範)이 매우 높고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 신명(神明)과 같았는데 사람들에게 자주 말하기를, “우리 손부(孫婦)는 참으로 어질다.” 하였으며, 외왕모(外王母) 이씨(李氏)는 아직도 강건한데 나에게 말하기를, “네가 태어날 때 내 나이 예순이었으니, 오늘 네 아내의 봉양을 받을 줄 어찌 알았겠느냐.” 하였다. 나는 행검(行檢)이 없어 남들과 시주(詩酒)를 즐기기만 좋아하고 집안의 형편은 아랑곳하지 않았는데 군이 힘을 다해 비용을 마련하여 나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려고 애썼으며 내가 남에게 베풀 일이 있으면 역시 즐거운 마음으로 내 뜻을 따라 주었다. 그리하여 집안이 가난했으나 나는 그런 줄 알지 못하게 하였다.
평소에 내가 군과 약속하기를, “어떻게 하면 군과 함께 녹거(鹿車)를 끌고 향촌(鄕村)에 돌아가 작은 집을 짓고 살며, 위로는 부모를 받들고 아래로는 자손을 기름으로써 평생의 즐거움을 이룰 수 있을꼬.” 하면 군은 문득 기뻐하며 “이것이 나의 뜻입니다. 산수(山水)의 비용은 내가 마련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러므로 내가 벼슬을 얻으면 군은 기뻐하지 않았고 벼슬을 잃으면 군은 슬퍼하지 않았으니, 정의(情義)가 참으로 나와 맞았다. 대저 사람은 누군들 내조(內助)를 받지 않는 이가 있으랴만 어리석은 나의 경우에는 실로 남들보다 더하였다.
올해 2월에 내가 남행(南行)하여 보령(保寧)의 수영(水營)에서 외삼촌을 뵙고 3월 10일쯤에 군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말을 달려 집에 돌아오니 군의 병이 이미 깊었다. 군은 나를 보고도 말하지 못하였으며 나 역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군은 나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으나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한참 만에 말하기를, “오시는 게 어이 이리 더뎠소. 하마터면 얼굴을 보고 영결(永訣)하지도 못할 뻔했구려. 그러나 이렇게 하루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될 줄 생각이나 했겠소.” 하였다. 병이 위중해지자 군은 손수 글을 써서 나의 누이들에게 주어 아이들을 부탁했으며, 그리고 말하기를, “살아서 시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했으나 불효한 사람이 되지 않고 싶었소. 그러나 지금 병이 낫지 않으니, 어이하겠소. 내가 죽은 뒤에는 이 글을 보기를 나를 보듯이 하구려.” 하였다. 군은 글을 다 쓰고는 나를 시켜 읽게 하고 들었다. 듣기를 마친 뒤 군은 길게 탄식하였으며, 임종에 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잘 계시오, 잘 계시오. 나는 이제 가오.” 하였으니, 정신이 흐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군은 6남을 낳았다. 장남 인량(寅亮)은 이제 겨우 9세인데 장자(長者)들이 보고는 모두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한다. 아버지를 따라 여막(廬幕)에 거처하면서 고기를 먹지 않고 거상(居喪)한 지 어언 3년이다. 그 사이에 병이 든 적이 있어 육즙(肉汁)을 만들어 주었더니, 물리치고 먹지 않았으며 그 뒤로는 나물죽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그 아래 대춘(大春)은 이제 겨우 8세이고, 그 아래 대붕(大鵬)은 태어난 지 2년 만에 요절했다. 그 아래 딸 여순(女順)은 겨우 5세이고, 그 아래 딸 여항(女恒)은 겨우 3세이다. 그 아래 아들 동숙(同叔)은 태어난 지 채 석 달이 안 되었다. 나와 군은 모두 해년(亥年)에 태어났는데 이 아이가 태어난 것도 해년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동숙이라 지었다.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용모가 매우 아름다워 군이 사랑하였다. 그래서 군이 병중에 탄식하기를, “우리 아이가 매우 아름다워 장성하는 것을 보려고 했는데 마침내 보지 못하게 되는구나.” 하였다. 군이 졸(卒)한 날은 3월 16일 계미일이고, 장례일은 5월 7일 임신일이다. 애통하도다.
배필의 의리는 크니,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함께 가더라도 유감이 없을 수 없다. 계축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성(歲星)이 아직 일주(一週)하지도 않았는데 백 년을 함께 살려던 계획이 여기에서 그치고 만단 말인가. 비록 함께 늙지 못하고 함께 가지는 못해도 1, 2십 년만 더 살아서 아들이 장가들고 딸이 시집가는 것만 보면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아직 어린애들이 모두 강보에 있는데 군만 홀로 버리고 떠나 나의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니, 이는 모두 내가 불초하여 생긴 일이다. 군이야 운명인 것을 어이하리오.
무덤의 터를 선조고(先祖考) 교하부군(交河府君)의 묘소 아래에 잡았으니, 기실 양지현(陽智縣) 남쪽 금곡촌(金谷村)의 기슭이다. 군을 왼쪽에 묻고 오른쪽은 비워 두었으니, 내가 죽으면 합장(合葬)하여 골육이라도 함께 흙으로 돌아감으로써 나의 무궁한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한 것이다. 우리네 사람이 세상에 사는 즐거움은 이처럼 덧없이 짧은 것이 슬프다. 그런데 평소의 행적마저 가려져 드러나지 않는다면 떠난 사람이야 무슨 한이 있으랴만 산 사람의 입장에서야 차마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장사(葬事)에 한군(韓君)의 명(銘)을 얻지 못하면 장사 지내지 않은 것과 같다.” 하였으니, 내가 아내를 장사 지냄에 도리어 우리 사화(士華)의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삼가 행장을 받들어 보내어 부탁을 드립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D-001]녹거(鹿車) : 사슴이 끄는 작은 수레이다. 후한(後漢) 발해(渤海) 사람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환소군(桓少君)이 덕을 닦으며 검약하게 사는 포선(鮑宣)에게 시집가서, 청고(淸高)하게 살려는 남편의 뜻을 따라 시집올 때 데리고 왔던 종들과 사치한 복식을 다 돌려보낸 다음, 짧은 삼베 치마를 입고 녹거를 끌고 시댁으로 와서는 몸소 동이를 들고 물을 길어 부도(婦道)를 실천했다고 한다. 《小學 善行》
[주D-002]장사(葬事)에 …… 같다 : 당(唐)나라 장계우(張季友)의 말이다. 한군(韓君)은 한유(韓愈)를 가리킨다. 원문에는 명(銘) 자가 기(記) 자로 되어 있다. 《五百家注昌黎文集 卷29 唐故尙書虞部員外郞張府君墓誌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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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군의 휘(諱)는 은(誾)이고 관향은 고령(高靈)이다. 그의 10대조 박지순(朴之順)이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무훈(武勳)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고 그 뒤 대대로 명망과 관작이 끊어지지 않았다. 증조 박지(朴持)는 청하 현감(淸河縣監)을 지냈고 할아버지 박수림(朴秀林)은 교하 현감(交河縣監)을 지냈고 아버지 박담손(朴聃孫)은 지금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이고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제용감 직장(濟用監直長) 이이(李苡)의 딸이다. 박군이 성화(成化) 기해년(己亥年, 1479년 성종 10년) 모월 모일에 태어났는데, 영리하고 수려하여 보통과 달랐으며 정신과 골격이 해맑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 같아 바라볼 때 속세의 사람 같지 않았다. 4세에 글을 읽을 줄 알았고 8세에 대략 대의(大義)를 알았으며 15세에 문장에 능하였는데, 지금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신용개(申用漑) 공이 보고 기특하게 여겨 자기의 딸을 아내로 삼아 주었다.
부인 신씨(申氏)는 또한 고령(高靈) 사람으로서 어질고 부덕(婦德)이 있어 박군의 덕을 잘 떠받들었고 박군보다 1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남 사화가 묘지(墓誌)를 저술하였다. 4남 2녀를 낳았다. 큰아들 박인량(朴寅亮)은 지금 15세인데, 어려서부터 기특한 상이 있었으므로 박군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성취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아들 박대춘(朴大椿)은 지금 14세이고 셋째 아들 박대붕(朴大鵬)은 요사(夭死)하고 넷째 아들 박동숙(朴同叔)은 지금 7세이다. 큰딸은 지금 12세이고 둘째 딸은 지금 10세이다. 금년은 실로 정덕(正德) 기사년(己巳年, 1509년 중종 4년)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挹翠軒遺稿 解題
1.
박은(朴誾, 1479~1504)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26세의 나이로 생을 마친 천재 시인이다. 요절했음에도 그가 이룬 성취는 걸출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뒷날 정조는 그를 ‘조선조에서 제일가는 시인’으로 추앙하고, 그의 유고집인 《읍취헌유고(挹翠軒遺稿)》에 어제 서문을 써 주었으며, 그 책을 간행하여 반포토록 명하였다. 실로 용재(容齋) 이행(李荇, 1478~1534)과 더불어 16세기 초 한시 문단을 대표하는 대시인이었다고 하겠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경사편 5 논사류 2에 보면, 〈동국(東國) 제일의 인재(人材)에 대한 변증설〉이 있다. 그 글에서 이규경(李圭景)은 이황(李滉)의 덕(德), 최립(崔岦)의 문(文), 유형원(柳馨遠)의 경륜(經綸), 이순신(李舜臣)의 도략(韜略), 김상헌(金尙憲)의 절의(節義), 남이(南怡)의 무용(武勇), 서경덕(徐敬德)의 천문(天文), 박연(朴堧)의 악학(樂學), 황공도(黃公圖)의 총명(聰明), 김장생(金長生)의 예학(禮學), 정렴(鄭)의 선술(仙術), 흥령(興嶺)의 산술(算術), 이광사(李匡師)의 필법(筆法), 김인후(金麟厚)의 풍채(風采), 송미수(宋眉叟)의 효행(孝行)과 함께 박은의 시를 동국 제일로 꼽았다.
한편 허균(許筠)은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박은을 김계온(金季昷)ㆍ김시습(金時習)ㆍ이행(李荇)ㆍ김정(金淨)ㆍ정사룡(鄭士龍)ㆍ노수신(盧守愼)과 병칭하고, 그들을 명나라 복고파인 전후칠자(前後七子)와 비교하였다. 곧 허균은 그들이 하경명(何景明)ㆍ이몽양(李夢陽)ㆍ왕세정(王世貞)ㆍ이반룡(李攀龍)에게는 못 미친다하더라도 오국륜(吳國倫)ㆍ서중행(徐中行)ㆍ장가윤(張佳胤)ㆍ왕세무(王世懋)ㆍ이세방(李世芳)ㆍ사진(謝榛)ㆍ여민표(黎民表)ㆍ장구일(張九一)보다는 뒤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홍대용 역시 《항전척독(杭傳尺牘)》의 〈추루에게 준 편지〔與秋書〕〉에서, 박은과 노수신(盧守愼)을 동방의 이백ㆍ두보라고 일컬었다. 박은은 운격(韻格)은 고상하나 웅혼한 맛이 적고, 노수신은 체재는 힘차지만 쇄락한 기상이 없다고 비판하되, 두보의 여운을 체득하여 울연히 조선 중엽의 정종(正宗)이 되었던 권필(權韠)마저도 고상한 맛은 박은만 못하다고 하였다. 요컨대 두보의 고상한 품격을 체득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가가 아마도 박은에 대한 조선 문인들의 정론(定論)이었던 듯하다.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稗官雜記)》 권2에서, 유희령(柳希齡)이 편찬한 《대동시림(大東詩林)》의 선별관을 비판하면서, 시를 모은 것이 70여 권이나 되는데도 이규보(李奎報)의 배율(排律)과 박은의 〈제잠두록후(題蠶頭錄後)〉 장편을 뽑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 하였다. 박은의 시, 특히 장편의 〈제잠두록후〉를 높게 평가해서 한 말이다.
2.
박은은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인 최보(崔溥, 1454〜1504)에게서 수학하였다고도 하고, 김종직으로부터 직접 학문을 배웠다고도 한다. 15세에 이미 문장으로 명성을 날려 신숙주(申叔舟)의 손자인 신용개(申用漑, 1463〜1519)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되었다. 26세 때 갑자사화의 화를 당하였는데, 후대 사람들은 그를 ‘천재적 시인이자 의지가 굳은 지사(志士)’였다고 평가하였다.
박은은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 본관은 고령이다. 고령 용담촌에서 한성부 판관 박담손(朴聃孫)과 경주 이씨(慶州李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세 때 독서할 줄 알았으며, 8세 때 대의에 통하였다. 15세에는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17세 되던 1495년(연산군1)에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인 1496년에는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사가독서인(賜暇讀書人)에 선발되어 김일손(金馹孫), 남곤(南袞), 정희량(鄭希良), 홍언충(洪彦忠), 이주(李冑), 그리고 장인인 신용개 등과 함께 용산(龍山)의 호당(湖堂)에서 독서하였다. 이때 〈논시정 10여조(論時政十餘條)〉를 올렸는데, 그것이 당시 지식인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 뒤 천추사(千秋使)를 수행하여 중국에 갔는데, 나이가 어려 중국 학자들이 처음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그의 글을 보고서 놀라며 칭찬을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박은은 승문원 권지(權知)와 홍문관 정자(正字)를 역임하고 수찬(修撰)에 있으면서 경연관을 겸하였다. 일찍이 홍문관 관원들이 서쪽 변방에 성 쌓는 일이 이롭지 못하다고 직언하다가 권신의 미움을 사서 신문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는 상소를 올려 권신들을 벌줄 것을 건의하였다. 열흘 동안이나 상소를 올려도 들어주지 않자 더욱 힘써 간청하여 끝내 연산군의 윤허를 받아 냈다. 이 일이 있은 뒤부터는 직언을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20세 때 무오사화를 당하여 스승인 김종직과 일문의 인사들이 모두 옥사를 면치 못하였다. 그 역시 화를 당하였으나 친구였던 남곤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였다. 이 당시 조정을 좌지우지하던 유자광(柳子光)의 전횡은 극에 달했고, 사림들은 사기를 잃어 그의 뜻을 어기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박은은 유자광과 성준(成俊) 등의 횡포를 상소하였다. 이에 성준은 하관의 직에 있는 자가 장관을 비방한다고 하여 죄줄 것을 연산군에게 고하였다. 평소 박은의 직언을 꺼려 오던 연산군은 다른 일에 그를 연루시켜 하옥하고 고문토록 하였다. 성준 등이 직접 나서서 가혹하게 고문하였으나, 박은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벼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자연 속에 묻혀 살며 시와 술로 소일하였다.
25세 되던 해 그의 아내 고령 신씨(高靈申氏)가 백일도 안 되는 막내아들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났다. 신씨의 나이 25세였다. 이듬해(1504) 봄에 그는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탐탁해하지 않았다. 이해에 이르러 유자광을 비롯한 간신들의 횡포가 더욱 극심하였으며, 연산군의 비행도 극에 달하였다. 연산군은 관원들의 언로를 폐쇄하려고 탄압을 가하였다. 이른바 갑자사화이다. 이때 박은은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서울로 압송당해서 신문받았다. 그가 굴복하지 않자 진노한 연산군은 그를 ‘거짓으로 충성스러운 체하여 스스로를 편안히 하였다〔詐忠自安〕’는 죄명으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효수토록 명하였다. 박은은 죽음에 임해서도 얼굴 색 하나 변치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은 그가 죽은 지 나흘 뒤인 6월 19일에 의금부로 하여금 그의 친구들도 곤장을 쳐서 유배토록 하였다. 8월 16일에는 전교를 내려 그의 시신을 들판에 포쇄(曝曬)케 한 다음, 평지와 같게 묻도록 하였다. 연산군 11년에는 그에게 ‘음흉하고 사특하여 남을 해친 사람〔淫邪害人〕’이란 죄목을 추가하였다.
박은은 죽은 지 3년 뒤 중종이 즉위하면서 신원되어 도승지를 추증받았다. 현재 마을 어귀에는 1984년 6월 10일에 전국시가비동호회에서 건립한 읍취헌시비가 있다. 시비 앞면에는 그의 대표적 시 〈복령사(福靈寺)〉의 시구 후반부를 새겼고, 뒷면에는 김동욱 박사가 그의 일생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박은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형해(形骸) 밖을 방랑하는 문사(文士)인 ‘만랑(漫郞)’이고자 하였다. 만랑이란 말은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용주도독 겸 어사중승 본관경략사 원군표 묘비명(容州都督兼御史中丞本管經略使元君表墓碑銘)〉 중 “원결(元結)이 양수(瀼水) 가에 살면서 자칭 낭사(浪士)라 하고 낭설(浪說) 7편을 지었다가, 뒤에 낭관(郎官)이 되자 당시 사람들이 ‘낭자(浪者)도 부질없이〔漫〕 벼슬을 하는가?’ 하고는 ‘만랑’이라 불렀다.”는 고사에서 나온다. 박은이 〈영통사(靈通寺)에서 흥취를 기록하다〉, 〈사화(士華)의 시에 차운하여 이호숙(李浩叔)의 유가야산록(遊伽耶山錄)의 뒤에 적다〉라는 시와 〈잠두봉(蠶頭峯)에 노닐며〉 넷째 수에서 만랑의 고사를 끌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박은은 동방급제한 김천령(金千齡)을 위해 〈김인로 명행기(金仁老名行記)〉를 적어 고인의 풍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군은 모습이 간정(簡靜)하여 겉보기에는 쉽게 가까이할 수 없을 듯하나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흥미진진하게 담소를 늘어놓아 듣는 사람이 피로한 줄 몰랐으며, 때로 술잔을 잡고 고금을 담론할 때에는 흉금이 시원스러워 조금도 고집과 격의가 없었으니, 참으로 개제군자(愷悌君子)라 할 만했다.” 이 묘사는 곧바로 박은 자신의 자화상이라고 하겠다. 또한 그 글의 다음 찬(贊)은 바로 자찬묘지명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행실이 닦이지 않은 것도 아니요 / 行非不修也
세상에 쓰이지 않은 것도 아니건만 / 世非不用也
수명만은 유독 길지 못하였으니 / 而年獨莫之與也
장차 누구를 탓하랴 / 將誰尤
하늘을 탓해야 할 것인가 / 其尤天乎
3.
박은의 시문은 갑자사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없어졌다. 박은이 죽고 3년 뒤인 1507년(중종2)에 지우인 이행(李荇)이 150여 편의 시문을 모아 《읍취헌유고》를 간행하였다. 이때 친구들 사이에 전하는 시를 주로 모았으므로 그 절반 가까이가 친구들과 주고받은 화답시이다. 이외에 송별시나 기행시도 많다. 저작 시기는 박은이 22세 때부터 시작하여 26세로 요절하기 전까지로 한정되었다. 현전하는 시 대부분이 그가 파직을 당한 이후에 쓴 것이어서 불우한 삶에 대한 회한의 감정이 짙다.
심수경(沈守慶)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따르면 이행이 《읍취헌유고》를 간행한 뒤, 박은의 아들 박공량(朴公亮)이 산일(散逸)된 글을 수습하여 별고(別稿)를 만들었다. 이 별고가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이다. 1548년(명종3)에 박은의 손자 박유(朴愈)와 박무(朴懋)가 인쇄하여 두 개의 원고를 하나로 합해 상하권을 만들었으며, 심수경이 발문을 적었다. 유고의 권말에는 이행ㆍ이원(李沅)ㆍ이우(李堣)의 오언율시가 한 수씩 수록되어 있었다. 이행의 시는 이러하다.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나 / 天欲斯文喪
문장도 없어지고 세상도 파리하네 / 時如殄瘁章
백 명이라도 이 사람과는 못 바꿀 걸 / 百身人莫贖
만고 동안 밤만 될 것 같다 / 萬古夜還長
한묵은 독서삼매에서 나왔고 / 翰墨餘三昧
풍류는 연석, 문을 주름잡았네 / 風流盡一場
차마 어찌 호해주를 / 忍將湖海酒
공연히 국화 옆에 부을까 / 空酹菊花傍
그러나 이후 간행된 여러 간본에는 심수경 발문의 별고(別稿)가 모두 빠져 있다.
1651년(효종2)에 이르러 정두경(鄭斗卿)ㆍ오준(吳竣)ㆍ조석윤(趙錫胤)ㆍ채유후(蔡裕後)ㆍ박장원(朴長遠)이 상의하여 전라 감사 심택(沈澤)에게 부탁해서 전주(全州)에서 문집을 중간하였다. 중간본은 4권 1책의 목판본으로, 이행(李荇)과 정두경의 서(序), 묘지명을 권수에 싣고 권1~3에는 시를, 권4에는 행장 등의 문을 실었다. 시는 저작순으로 배열하였다. 현재 연세대학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709년(숙종35)에는 유득일(兪得一)이 통제사(統制使)로 나가는 정홍좌(鄭弘佐)에게 부탁하여 2권 1책의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 3간본은 중간본에 빠진 고율(古律)ㆍ절구(絶句)ㆍ장(狀)ㆍ기(記)ㆍ연구(聯句) 등을 장르별로 엮어서 승문원 관원에게 선사(繕寫)하도록 하고 자양(字樣)을 조금 늘여 판각하였다. 현재 간송미술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암고서박물관,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795년(정조19)에 이르러 정조는 홍문관에서 《천마잠두록》을 열람하고는 그 가운데 본집에 누락된 시문을 선별하고, 《허암집(虛庵集)》, 《해동묵적(海東墨蹟)》, 《용재집(容齋集)》에서 뽑은 시를 증보하여 평안도 순천부(順川府)로 보내 간행하게 하였다. 총 4권 2책의 목판본이다. 이 4간본은 권수(卷首)에 심환지(沈煥之)가 지은 〈어제서(御製序)〉와 목록을 싣고, 부록에 〈초간본서〉와 〈중간본서〉 등 3편을 실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43년(헌종9)에는 김학안(金學顔)이 충렬사(忠烈祠) 소장의 3간본 가운데 완결(刓缺)된 곳을 보완하여 중인(重印)하였다. 이 5간본은 3간본의 권말에 들어 있던 묘지명을 권수에 편차하고, 김학안의 발문을 권말에 첨부하였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의 영인표점본은 1795년 간행의 4간본(서울대학교 규장각장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문집은 본집 4권과 부록 합 2책이다. 본집의 권1부터 권3까지는 시, 권4는 문을 수록하였다. 시는 시체(詩體)에 따라 구분하여 배열하고, 기간의 문집에서 가져다가 증보한 작품에는 출전을 밝혔다. 권1은 부(賦) 1편, 사언(四言) 1수, 오언고시 41수를 실었다. 권2는 칠언고시 26수, 오언절구 6수, 칠언절구 33수를 실었다. 권3은 오언율시 54수, 칠언율시 61수, 그리고 연구(聯句)를 실었다. 연구는 1502년에 이행ㆍ남곤ㆍ이영원(李永元)과 함께 잠두(蠶頭)를 유람할 때 지은 것이다. 권4는 기(記) 1편, 김천령(金千齡)을 위한 제문(祭文) 1편, 그리고 박수림(朴秀林), 조모 한씨(韓氏), 부인 신씨(申氏), 안호(安瑚)의 행장(行狀) 4편을 실었다. 부록으로는 1509년에 이행이 지은 묘지명과 1761년에 김원행(金元行)이 지은 묘표를 실었다. 끝에는 초간 때 이행이 쓴 서문, 중간 때 정두경이 쓴 서문, 3간 때 유득일이 쓴 서문을 수록하였다.
박은의 시로 현전하는 작품은 친구들 사이에 흩어져 전해 오던 것으로, 모두 300여 수이다. 이들 시편은 1502년 파직당한 후 실의와 좌절의 나날을 보내던 시기부터 1504년 지제교로 임명될 때까지 만 3년 정도에 제작된 것이 대부분이다. 여러 시 선집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들은 이행, 남곤, 정희량 등의 지기에게 주거나 그들과 수창한 것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지금 청와대가 들어서 있는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산 1번지 북악산(백악산) 남쪽 기슭을 조선 중종 연간에는 대은암동(大隱巖洞)이라고 불렀다. 남곤의 집이 그곳에 있었고, 그 아래 시내를 만리뢰(萬里瀨)라고 했다. 박은은 이행과 함께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 남곤이 기묘사화(1519)로 죽은 뒤, 주인이 여러 번 바뀌다가 그 집은 신응시(辛應時)의 소유가 된다. 권별(權鼈)의 《해동잡록》은 《동국여지승람》을 인용하여, 박은이 백운암 만리뢰(白雲岩萬里瀨)를 시제(詩題)로 하여 다음 시를 지었다고 하였다.
주인에게 산봉우리가 있으니 / 主人有峯巒
내 집의 향 사르는 화로요 / 吾家之薰爐
주인에게 산골 시내가 있으니 / 主人有磵石
내 집의 처마 낙수로다 / 吾家之簷溜
1502년(연산군8) 3월, 관직에서 물러난 박은은 개성의 천마산을 이행ㆍ혜침(惠忱)과 함께 유람하였다. 그리고 그때 지은 시들을 《천마록(天磨錄)》으로 엮었다.
이 유람에서 박은은 파직당한 처지를 한탄하지 않았다. 〈6월 18일 밤에 택지ㆍ선지와 함께 흥천사에서 잤다. 택지는 밤이 늦어서야 찾아왔는데, 관청의 일 때문에 한강에서 왔다.〔六月十八夜 與擇之善之宿興天寺 擇之入夜乃赴 蓋以官事自漢江來也〕〉라는 제목으로 지은 3수의 연작을 예로 든다.
반송 우거진 사리각에 / 盤松舍利閣
구름 낀 달밤 청량한데 / 雲月夜淸凉
우연히 세 사람 마주 대하니 / 偶作三人對
그 누가 세상일 바쁘다 하랴 / 誰言萬事忙
옷고름 헤쳐 놓고 자적하며 / 解衣唯取適
술 들어 미치고자 했네 / 把酒欲成狂
스님에겐 괴이하게 여겨지겠지 / 應被居僧怪
고담을 또한 어이 헤아리랴 / 高談又叵量
스님 찾아 옛 절에 들러서 / 尋僧過古寺
달 기다리며 솔그늘에 기대니 / 待月倚松陰
싸늘한 밤기운 스며들고 / 夜氣來相襲
맑은 바람 옷깃을 날리네 / 淸風爲散襟
친한 벗들 모두 여기 모였으니 / 知音俱在此
예전부터 오늘 같은 날 드물었네 / 自古少如今
마음속 품은 생각 다 털어놓으니 / 更盡開懷抱
세상일 따위야 아랑곳없지 / 寧敎一事侵
밤중에 다급하게 문 두드리며 / 敲門夜靜急
손님이 총총 찾아왔는데 / 有客來怱怱
한강의 비를 흠뻑 맞은 채로 / 却帶漢江雨
소매엔 남산 바람 가득하네 / 滿袖南山風
좋은 기약 그르칠까 걱정했더니 / 久訝佳期誤
모두 모여 함께 웃음 나누네 / 悠然一笑同
이런 놀이 맘껏 즐겨야겠지만 / 玆遊無不遂
다만 술단지 빌까 걱정이네 / 但恐酒尊空
첫 수의 수련과 함련은 모임의 인상적인 장면들을 묘사하였다. 소나무 그늘이 우거진 사리각, 비 그치고 달이 구름 사이로 나온 청량한 여름밤이다. 경련에서 박은은 친구들과의 만남에 고무된 심경을 토로하였다. 2수와 3수에서는 박은과 이행이 절을 찾은 장면을 대비시켰다. 박은은 파직당하고 시와 술 그리고 지우들과의 만남으로 소일하고 있다. 하지만 이행은 관가의 일을 마치고 밤이 늦어서야 비를 흠뻑 맞으면서 약속 장소로 왔다. 서로 다른 인생의 모습을 암시하고 있는 듯하다. 2년 뒤 박은은 갑자사화를 만나 효수당했다. 반면 이행은 무오ㆍ갑자ㆍ기묘사화를 겪으며 노비로 강등되거나 네 차례 유배되는 등 고통을 겪었지만 끝내 대제학의 지위에 올랐다.
천고의 절조로 일컬어지는 박은의 대표작 〈복령사(福靈寺)〉는 비가 온 3월 3일에 지은 것이다. 그 절에는 신라의 의상(義湘)이 월지국(月支國)에서 가져왔다는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이 모셔져 있었다. 박은 일행은 혜침으로부터, 김부식(金富軾)이 과거에 급제하기 전 이곳에 제단을 차리고 정성을 다하였더니 나한상이 웃었다는 일화를 들었다.
절은 바로 신라의 옛 절 / 伽藍却是新羅舊
천 개의 불상 모두 서축에서 온 것이라네 / 千佛皆從西竺來
예로부터 신인(神人)도 대외(大隗)를 헷갈렸는데 / 終古神人迷大隗
지금 이 복된 땅은 천태산과 같구나 / 至今福地似天台
스산한 봄기운이 비를 내리려 하니 새가 먼저 지저귀고 / 春陰欲雨鳥相語
늙은 나무는 정이 없건만 바람은 절로 슬프구나 / 老樹無情風自哀
인간만사는 한바탕 웃음거리도 못 되고 / 萬事不堪供一笑
청산도 오랜 세월 거치면 뜬 먼지뿐인 것을 / 靑山閱世自浮埃
함련의 상구(上句)는 《장자》 서무귀(徐无鬼) 편의 고사를 끌어 왔다. 황제(黃帝)가 대외(大隗)를 만나러 구자산(具茨山)으로 가는데 방명(方明)이 수레를 몰고 창우(昌㝢)가 수레 우측에 타고 장약(張若)과 습붕(謵朋)이 앞에서 말을 인도하고 곤혼(昆閽)과 골계(滑稽)가 뒤에서 수레를 호위하고 가서 양성(襄城)의 들판에 이르자 이 일곱 성인이 모두 길을 잃어 길을 물을 데가 없었다. 우연히 말을 먹이는 동자를 만나 물어보고서야 길을 알았다고 한다. 여기서는 복령사를 찾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다.
한편 함련의 하구(下句)에 나오는 천태(天台)는 중국의 천태산(天台山)으로, 신선인 마고할미가 사는 곳이라 한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 사람인 유신(劉晨)이 완조(阮肇)와 함께 천태산에서 약을 캐다가 길을 잃고 선계(仙界)의 여인들을 만나 반년을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이미 수백 년 세월이 흘러 자기의 7대 손자가 살고 있었으므로 다시 천태산으로 갔다고 한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고사가 나온다. 손작(孫綽)의 〈천태산부(天台山賦)〉에 “도사를 단구에서 방문하여, 불사의 복지를 찾노라.〔訪羽人於丹丘 尋不死之福庭〕”라고 하였다.
경련은 천기를 누설한 단명구(短命句)라고 한다. 상구는 봄날 구름이 깔려 비가 오려 하자 새가 먼저 알고서 운다고 하였다. 정치적인 불행을 예견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하구는 나무가 늙어 꽃을 피우지 못하여 무정하다고 하였다. 바람에 서걱대는 늙은 나무를 시인의 처지에 비유한 것이다. 미련(尾聯)에서는 세상만사가 한바탕 웃음거리일 뿐이고 청산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초탈의 심사를 말한 것이다.
같은 해 7월 기망과 10월 보름에는 이행ㆍ남곤과 함께 서울의 잠두봉(蠶頭峰) 아래에서 뱃놀이하였다. 그때 화창한 시들을 엮은 것이 《잠두전후록(蠶頭前後錄)》이다. 그해가 마침 임술년이라서 소동파의 적벽(赤壁) 고사를 흠모하여 〈전적벽부〉와 〈후적벽부〉가 지어진 날짜에 뱃놀이하고 시문을 주고받은 것을 남곤이 정리한 것이다. 잠두봉은 양화도(楊花渡) 동안에 있으니, 오늘날 말하는 절두산(切頭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가을두(加乙頭 들머리)나 용두봉(龍頭峰)이라고도 불렀다. 조선의 문인들은 제천정에서 배를 띄워 노량ㆍ용산ㆍ마포의 강류를 따라 이곳 잠두봉 아래까지 유람하고는 하였다. 신광한(申光漢)은 그 서문에서 박은의 교유와 문학을 “문으로 벗을 모으고 벗으로 인을 돕는다.〔以文會友 以友補仁〕”라는 명제로 규정하였다.
《잠두록》에 수록된 다음 시는 저물녘부터 새벽까지의 뱃놀이 광경을 묘사하였다.
황혼에 배 놓아 흐르는 물 가르며 / 黃昏放舟擊流光
서쪽의 푸른 파도 바라보매 끝이 없네 / 西望滄波無界畔
사공이 노 멈추고 나에게 하는 말 / 篙師止棹報余言
잠두봉 지나면 파도 더욱 급합죠 / 若過蠶頭波更悍
어촌에 닻을 매고 상선에 기대니 / 漁村繫纜倚商舶
코고는 소리가 요란하구나 / 唯聞鼾睡聲如鍛
조물주가 명월을 아끼는지 / 天公似亦惜明月
일부러 엷은 구름 보내어 은하수를 가리네 / 故遣微雲綴淸漢
버드나무는 아득히 깃대처럼 서 있고 / 楊柳茫茫旄纛立
등불은 깜박깜박 별처럼 빛나네 / 燈火點點星斗燦
서쪽에서 소낙비 몰려와 한바탕 소리 내니 / 快雨西來忽一聲
큰 물고기가 물결 가르며 도망치네 / 大魚劈浪皆奔竄
이때 옷을 여미고 술잔을 재촉하며 / 是時擁褐促傳觴
그대의 좋은 시구 튕겨져 나옴을 기뻐하네 / 喜君秀句驚發彈
영통사의 옛 시령을 지금 다시 시행하니 / 靈通舊令今復徵
시령 엄하고 재주 모자라기에 벗어나고파라 / 令嚴才窘我欲逭
술잔을 들어 달에게 묻고 소선(소동파)을 불러 보니 / 擧觴問月喚蘇仙
날개가 돋아 광활한 허공을 나는 듯하네 / 浩浩憑虛生羽翰
동녘 틀 무렵 물살이 넘치니 / 東方欲曉水氣漲
그야말로 천지가 나뉘기 전 혼돈 때와 같구나 / 正如混沌初未判
삐걱삐걱 노 저어 물안개 속으로 들어가니 / 鳴櫛又侵煙霧去
넓은 초원 긴 사장엔 물새가 어지럽네 / 草遠沙長亂鵝鸛
양화도 나룻가에 종일토록 비 내리는데 / 楊花渡邊終日雨
봉창 아래 지은 맑은 시가 구슬처럼 빛나네 / 篷底淸詩富璀璨
잠두봉을 지나 어촌에 정박할 때 은하수에 구름이 끼어 있었다. 멀리 버드나무가 깃발처럼 서 있고 등불은 별처럼 깜박이는데, 홀연 소낙비가 내린다. 일행은 영통사의 구령(舊令)에 따라 시구를 지으며 밤을 보냈다. 다시 달이 뜨자 술잔을 기울이며 소동파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하였듯이 자신도 날개가 돋는 듯하다고 하였다.
뒷날 유천(柳川) 한준겸(韓浚謙)이 심수경과 함께 박은의 《잠두록》을 보고서 각자 소감을 읊은 시 세 수를 화운(和韻)하여 이식(李植)에게 보여 주었다. 이식은 그 시의 운을 따라 시를 지었다. 그 가운데 박은을 애도한 시는 다음과 같다. 《택당선생속집(澤堂先生續集)》 권2에 나온다.
성대한 시대라면 옥당의 거목이 되셨을 분 / 蓬館翹材際盛時
송백 같은 곧은 절조 세한이라 바뀔쏘냐 / 貞松不爲歲寒移
만고토록 청승의 명성 독차지할 잠두봉 / 蠶崖萬古專淸勝
학동이 함께 노닐면서 걸출한 솜씨 다퉜도다 / 鶴洞同時較崛奇
겁석이 재로 변하듯 뒤바뀐 허무한 세상 속에 / 劫石揚灰浮世變
잡초에 난초 파묻히듯 미인의 모습 시들었네 / 孤蘭埋草美人遲
맑디맑은 종경(鍾磬) 소리 후세에 전해 오니 / 鏗然金石遺音在
일찍 떠난 저세상 길 탄식만 하지는 않으리다 / 不向脩泉嘆短期
이식은 박은이 어린 나이에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을 말하고, 또 26세의 나이로 사형당하였던 것을 애도하였다. 이행은 곧 이식의 증조부로, 이 시에 나오는 학동(鶴洞)은 이행의 서실(書室)이 있던 곳이다. 시에서 ‘겁석(劫石)’은 부처가 겁(劫)의 뜻을 설명하기 위해 비유한 사방 40리(里) 되는 석산(石山)이다. 100년마다 사람이 한 번씩 와서 옷깃을 살짝 스치기만 하여 그 석산이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이 1겁(劫)이라 한다. 그런 석산도 말세의 겁화(劫火)를 당하면 삽시간에 소진되어 재만 날린다는 설화에서 나온 것이다.
박은은 〈밤에 얘기를 나누려 용재에 가려던 차에 미리 시 한 수를 보내다〔將赴容齋夜話先簡一詩〕〉라는 시에서 “세상에 함께 난 것 자랑할 만한데, 가까이 사니 뉘라서 멀다 하느뇨.〔共生宇宙已堪誇 室邇誰言人自遐〕”라고 하였다. 곧 이행은 박은의 죽마고우로 그가 정치적ㆍ가정적인 불행을 겪을 때 가장 의지했던 친구였다. 〈우중에 술에 취해 회포를 읊은 시를 써서 다시 택지에게 보내 드린다〔雨中被酒懷發詞聊復書呈擇之〕〉라는 시의 “자주 찾아 주니 참으로 지기로다. 말이 많아지는 건 그댈 만났기 때문〔數過信知己 多言從此翁〕”이라는 구절에서도 박은과 이행의 절친한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박은은 벗인 이행에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시 〈동강에서 써서 택지에게 보이다〔東江書示擇之〕〉에서 부조리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보였다. 도입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리 먼 길을 친구의 약속에 달려가서 / 千里爲赴鷄黍約
밤이 새도록 다시금 비바람 소리 듣는다 / 終宵更聽風雨聲
강산이 내 일생에 우연히 손에 들어오니 / 江山百年偶入手
세상의 득실 그 무엇인들 마음 쓰리오 / 得失何物能關情
모이고 흩어짐은 하염없이 구름이 오가는 듯 / 聚散悠悠雲去來
우리 삶은 덧없이 빨라 등잔불이 깜빡이는 듯 / 生死忽忽燈滅明
그저 마음에 맞으면 빙그레 웃을 일이니 / 逌然會意聊一笑
이 육신은 금석처럼 견고한 것 아니라네 / 此身不譬金石貞
이 육신 가지고 억지로 세상사에 골몰하여 / 强將此身供役役
높은 관직을 얻고 공훈을 세우려고 하니 / 駟馬高盖取勳名
무엇이 다르랴 나무가 재목이 되고자 하다가 / 何異木生願爲材
끝내 그 때문에 재앙에 걸리는 줄 모르는 것과 / 不悟終爲禍所嬰
내 보건대 오동나무는 재목이 가장 좋기에 / 我觀梧桐材最良
산 남쪽에서 날마다 다투어 도끼로 베어 가 / 山陽日日斤斧爭
거문고와 기둥으로 쓰일 만한 것이 못 되면 / 朱絃金柱已不可
때로 쪼개져 땔감이 되어 불 속에서 우나니 / 有時折爲薪槱火中鳴
예로부터 마른 오동을 소중히 보관하는 법 / 古來枯甲十襲藏
세속에 섞여서 비루하게 살아가진 않지 / 未及曳尾泥中生
……(후략)……
박은은 지난 시절을 반성하면서 우회적으로 현실 정치를 비판하였다. 높은 재주를 지녔지만 그 뜻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은거하게 된 사실에 비분하였다.
4.
박은은 우리나라 한문학사에서 해동 강서시파(江西詩派)의 맹주로 추대된다. 일찍이 신위(申緯)가 “학문이 재주에 부합한다고 한 시대에 평가되었나니, 용재(容齋)는 바른 깨달음으로 선문(禪門)에 들었다네. 해동에도 또한 강서파가 있었으니, 늙은 나무 스산한 기운의 읍취헌이라네.〔學副眞才一代論 容齋正覺入禪門 海東亦有江西派 老樹春陰挹翠軒〕”라고 일컬은 이래로, 박은은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를 배운 해동의 강서시파로 알려져 왔다.
주지하다시피 강서시파란 송나라 강서 사람인 황정견의 시풍을 배운 사람들을 일컫는다. 여본중(呂本中)은 이 일파의 시인을 기록한 〈강서시사종파도(江西詩社宗派圖)〉를 만들었는데, 황정견과 25명의 시인들을 모았다. 여본중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남송에 이르러 이 유파는 점점 더 커져 시단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파는 당나라 두보의 시를 모범으로 삼아, 시법을 중시하고 자구를 극도로 정련하였다. 그 가운데 황정견ㆍ진사도ㆍ진여의(陳與義)를 두보의 후계자로 보아 1조 3종(一祖三宗)이라 칭하였다. 남송 초기에는 이 시파의 시가 애송되어 《강서시파》 137권, 《속파(續派)》 13권이 편집되었다고 한다. 강서시파에 속한 시인들은 점철성금(點鐵成金)을 목표로 각고의 노력을 하며 시를 지었다. 그래서 기교 위주의 형식주의적인 작품을 형성했다고 운위된다.
사실 신흠(申欽)의 《청창연담 하(晴窓軟談ㆍ下)》에도 보면, “읍취헌의 시는 한결같이 소동파와 황산곡(黃山谷)을 모방하였는데, 선천적으로 재주가 매우 뛰어나 자연적으로 터득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끝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장편 또한 뜻에 운치가 있는데, 이는 작위적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으로서 정말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따라갈 수 없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박은의 시세계 가운데 어떠한 국면이 강서시파의 경향을 띠는지 지적하기란 매우 어렵다. 이미 조선 중엽에 학당(學唐)을 주장한 허균(許筠)이나 권응인(權應仁) 등은 박은의 당시풍을 고평하였고, 조선 후기의 남용익(南龍翼)과 홍만종(洪萬宗) 등은 복고적인 시학에 바탕을 두어 박은의 시를 고평하였다. 이에 비해 김창협(金昌協)은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배격하는 관점에서 박은을 조선 제일의 대가로 추대한 바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정조 역시 박은의 시를 높이 평가하였는데, 특히 그의 시를 두고 ‘천기(天機)가 넘쳐난다’거나 ‘천성(天性)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 또 박은의 시가 ‘당조송격(唐調宋格)’이 있다고도 하였다. 이는 박은의 시가 당시의 풍격과 송시의 서술 방식을 겸비하였음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박은의 시는 당시풍과는 달리 자구의 조탁에 치중한 면이 있다. 두보의 율시에서 요체(拗體)의 수법을 배운 것도 그 한 예이다. 바로 그러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간의 논자들은 박은의 시를 두고 해동의 강서시파로 평가했다.
박은이 자구의 조탁에 치중한 사실은 그의 대표작 〈영보정(永保亭)〉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보정은 충남 보령(保寧)의 수영(水營) 안에 있던 정자 가운데 하나다. 박은의 이 시는 《대동시선(大東詩選)》에도 선록될 만큼 회자되었다. 보령은 본래 고만(高巒)이라 하였는데, 1392년(태조원년)에 수군만호(水軍萬戶)가 왜구와 싸우다 전사했고, 1408년(태종8)에도 충청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현인귀(玄仁貴)가 왜선 20여 척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수영은 현재의 보령시 주교면(舟橋面) 송학리(松鶴里) 송도(松島)에 있다가 회이포(回伊浦)로 옮겨졌다. 1509년(중종4)에는 비로소 석성이 축조되었다. 박은의 시는 이러하다.
땅은 새가 날개를 치며 날아오르려는 형국 / 地如拍拍將飛翼
누각은 한들한들 매인 데 없는 뜸 같아라 / 樓似搖搖不繫篷
북쪽으로 바라보매 운산은 어드메가 그 끝인고 / 北望雲山欲何極
남쪽으로 와 띠처럼 두른 산세 이곳이 제일일세 / 南來襟帶此爲雄
바다 기운은 안개가 되고 이어서 비를 뿌리며 / 海氛作霧仍成雨
물결 형세는 하늘에 닿고 절로 바람을 일으킨다 / 浪勢翻天自起風
어둑한 중에서 마치 새가 우는 소리 들리는 듯 / 暝裏如聞鳥相呌
앉았노라니 몸도 경계도 공(空)임을 깨닫겠노라 / 坐間渾覺境俱空
이 시의 수련은 부동의 땅과 누각을 하늘을 나는 새와 항해하는 배에 비김으로써 표현이 역동적이다. 게다가 밑에 있는 땅을 새에 비기고, 그 위에 세워진 누각을 배에 비김으로써 상하가 뒤바뀌게 한 착상도 기발하다.
그렇지만 정약용은 정범조(丁範祖)에게 준 서신〔上海左書〕에서, “중간(重刊)된 《읍취헌집》을 보았는데, 〈영보정〉 시는 어째서 가작인 줄을 모르겠다.”고 하였다. 지형은 무엇과 같고 누대는 무엇과 같다는 구절은 형태와 모형을 새기고 그린 듯하지만 혼탈(渾脫)하고 환전(幻轉)하는 생생한 시법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뜸〔篷〕이란 것은 대로 엮어서 배〔舟〕를 덮는 기구이므로 주(舟)나 선(船)이라는 글자 대신 사용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고도 하였다. 이에 비해 “비 갠 냇물 맑고 맑아 한양의 나무 비추고, 꽃다운 풀 파릇파릇 앵무 물가에 돋았구나.〔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洲〕” 같은 당시(唐詩)는 전혀 노력을 기울인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지형(地形)과 시물(時物)이 시인의 정서와 함께 찬연히 드러나 있다고 하였다.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황학루(黃鶴樓)〉 시에 보이는 경물 묘사를 혼탈(渾脫) 시법의 예로 대비시킨 것이다. 곧 당시와 달리 박은의 시는 비유어나 묘사어의 조탁을 중시하였다. 그렇기에 당시와 달리 혼탈하고 환전하는 생생한 시법을 구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은 시의 이른바 강서시풍이 지닌 속성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박은의 산문은 몇 편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산문에도 공력이 있었으리라는 사실은 〈김천령 명행기(金千齡名行記)〉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4편 남은 제문 가운데 조모 한씨와 부인 신씨를 위한 행장은 여성을 위한 일대기로서 그 문학적ㆍ여성사적 가치를 상론할 필요가 있다.
2006년 8월 일
한국고전번역서
참고문헌
洪順錫, 「挹翠軒 朴誾 연구」, 《국문학논집》 11(단국대학교, 1983).
홍순석, 《朴誾의 生涯와 詩》(일지사, 1987).
홍순석, 《박은 시문학 연구-자료편》(한국문화사, 2004).
李鍾黙, 《海東江西詩派硏究》(태학사, 1995).
김은정, 「박은론」, 《한국한시작가연구》 4(한국한시학회, 태학사, 1995).
출처: 한국학고전번역원
脫凡 崔榮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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