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태조어진(朝鮮太祖御眞) 보물 제931호 경기전
동구릉 재실
건원릉 가는길
동구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소재이며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했다.
사적 제193호.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建元陵)이라 이름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綏陵)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전해진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河崙)이 나가 살펴보고 택정했다고 전한다. .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穆陵),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崇陵),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徽陵),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惠陵),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元陵),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景陵),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서울근교에있어 휴일이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고 있으며, 우리집과는 20분거리에 있어 자주 찾는다
목릉쪽에서 흘러 내리는 건원릉 앞 금천교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 74세)의 능호는 건원릉(健元陵)이며 단릉(單陵)이다.
건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동구릉의 하나로 중앙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했다.
이 자리는 조선 개국의 실력자이며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잡은 태종(이방원)이 결정한 곳이다.
원래 태조는 애첩 신덕왕후 강씨와 함께 묻히고자 여러 차례 수릉(壽陵·생전에 미리 정해놓는 무덤) 자리를 물색했다.
신덕왕후가 승하하자 한양 도성 안 경복궁 서남방의 황화방(皇華坊)에 신덕왕후의 능침을 만들고 자신의 능침도 오른쪽에 조성했다.
그러나 태종은 부친이 잡아놓은 수릉 대신 도성 밖 동북방에 있는 양주의 검암산 아래에 태조릉을 조성했다.
도성 안의 수릉을 옮긴다는 명분을 앞세워 계모 신덕왕후의 능도 옮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후 태종은 도성 안에는 왕실이나 사가의 무덤을 쓰지 못하게 하고, 도성 10리 밖에 능역을 조성하도록 했다.
이 제도는 후에 ‘경국대전’에 법문화됐다. 그래서 지금도 도성 안에는 왕릉이나 무덤이 한 기도 없다. 현명한 도시계획이었다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
모든 능원이나 묘지에는 잔디가 심어져있다.
그러나 조선 제1대 태조능의 봉분에는 유일하게
잔디가 아닌 갈대억새풀이 심어져있다. 그 까닭은 태조 임금이 고향 함흥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아들 태종(이방원)이 아버지를 먼 북녘땅에 모시지는 못하고
태조가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향수에 젖어있는것을 보고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에 사초를 입혔다고 합니다.
(동구능 해설자님의 말씀)
태조 임금의 릉
본관 전주(全州). 자 중결(仲潔). 호 송헌(松軒). 성 이(李). 휘(諱) 성계(成桂).
시호 지인계운성 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즉위 후 휘를 단(旦), 자를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비(妃)는 한경민(韓敬敏)의 딸 신의왕후(神懿王后), 계비는 강윤성(康允成)의 딸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함경도 영흥(永興)에서 아버지 이자춘(李子春)과 어머니
최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1335년(충숙왕 4년)에 출생하였다. 그의 선조는 전주에 살았으나 고조부
이안사 대에 간도지방으로 이주해서 증조부 이행리, 조부 이춘, 부친 이자춘까지 원나라
지방관리를 지냈다. 원나라가 쇠퇴하자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하였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고려에 내부(來附)한 뒤 이듬해 유인우(柳仁雨)가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이에 내응(內應)하여 공을 세웠고, 후에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가 되었다.
1361년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토벌하였으며, 같은 해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개경(開京)이 함락되자, 다음해 사병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 탈환전에 참가하여 제1착으로 입성, 전공을 세움으로써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승진되고, 원(元)나라의 나하추[納哈出]가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침입하자
함흥평야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1364년 원나라 연경(燕京)에 있던 최유(崔濡)가 충숙왕(忠肅王)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추대하고 1만 명의 군대로 평안도에 침입하여 공민왕을 폐하려 하자
최영(崔瑩)과 함께 이들을 달천강(악川江)에서 대파하고, 이어 여진족(女眞族)의 삼선(三善) ·
삼개(三介)가 함경도 화주(和州)에 침입한 것을 격퇴하였다. 이성계는 출정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하여 무인으로서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익대공신(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1368년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 ·
문하성지사(門下省知事)로 승진, 1372년(공민왕 21) 화령부윤(和寧府尹)이 되고, 1377년(우왕 3)
왜구가 개경을 위협할 때 서강부원수(西江副元帥)로서 이를 격퇴하였다. 1380년 양광 ·전라
·경상도도순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巡察使)가 되어 운봉(雲峰)에서 왜구를 소탕하고 1382년
찬성사(贊成事)로서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었다. 다음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함경도에 침입한
호바투[胡拔都]의 군대를 길주(吉州)에서 대파하였으며, 1384년 동북면도원수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함경도 함주(咸州)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첫댓글 이렇게 우리나라 능 전부를 답사하여 집대성 해 놓으면 그 것 자체가 보물 되지요.........이제 시작했으니 천천히 전국의 능을 다 기록해 보아요.....
카페에다 전세집을 얻어 놓았는데 막상 ,모든게 미비해서 부담이 되지만 여~러분들의 도움을 얻어서 꾸려 볼께요!!!!
수첩뒤에 stamp 받은 것을 궁능관리소에 첨부했더니 많은 책자가 왔습니다.
대단한 관심 아니고선 할수 없는일 동생 대단 하구려//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네요?
우리나라 왕의 능에 대해서 답사를 하고 글로 작성한다는게 쉬운일이 아닐텐데
의욕이 대단하십니다. 하엿튼 건승을 빕니다
너무 사진 자료들이 많아서 뒤죽박죽 입니다.
큰 의미는 있었던게 아니고,그냥 맹목적으로 그런데가면 동병상련 이라고 같은 생각으로 교류 할 사람들이 참많습니다.
나씨아즘마저는문화가있는날건원릉능침에1번올라가서기도드리고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