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유럽의 연금술사들은 헤르메스의 이미지에서 수은을 보았다. 물방울처럼 흔들거리며 빛나는 액체로 된 금속 말이다. 분명 물처럼 흐르는데 금속이며 또한 공기 중에 퍼져 모습을 감추기도 한다. 나타났다 사라지며 액체, 고체, 기체의 성격을 한꺼번에 가지고 있다. 수은을 라틴어로 메르쿠리우스(Mercurius)라고 부른다. 메르쿠리우스는 헤르메스의 로마식 표현이다. 여기서 영어의 머큐리(mercury)가 나왔다고 한다. 머큐리는 수은이자 수성 그리고 헤르메스다. 태양계의 가장 작은 별인 수성 역시 지구에서 보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오늘은 동쪽 하늘에 떴다가 며칠 후면 서쪽 하늘에 갑자기 나타나는 식이다. 고정되어 있는 우리 사고 틀의 이쪽과 저쪽을 제멋대로 오가는 것들은 모두 헤르메스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헤르메스는 도둑과 사기꾼 들의 신이기도 하다. 제우스를 아버지로 마이아(Maia)라는 요정을 어머니로 해서 태어난 헤르메스는 태어나 걷기 시작하자마자 도둑질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형이자 태양신인 아폴론의 소 떼를 훔쳐 불에 구워먹은 것이다. 아폴론은 자신의 소가 한꺼번에 사라진 사실을 알고 헤르메스를 의심했지만 그가 범인임을 증명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헤르메스가 소의 발에 갈대를 묶어 뒤로 끌고 갔기 때문이다. 소의 발자국은 발에 묶인 갈대빗자루 때문에 모두 사라져 버렸고 헤르메스는 시치미를 뚝 떼고는 오히려 형이 죄도 없는 자기를 의심한다며 아버지 제우스에게 능청을 부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소의 가죽과 뼈로 멋진 리라(lyra)를 만들어 화가 잔뜩 치밀어 오른 아폴론에게 선사한다. 아폴론의 기분이 어땠을까? 아폴론은 헤르메스가 선물한 일곱 줄 리라가 아주 맘에 들었다.
예뻐하자니 얄밉고 미워하자니 귀여운 동생, 헤르메스의 가벼운 이중성을 잘 보여 준다. 그의 행동은 선악을 판단하는 무거운 기준의 대상이 아니다. 때로 그 무거운 기준은 계명을 적은 돌덩이에만 갇혀 있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헤르메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에 특히 인기가 높았다. 아시다시피 당시는 원거리 무역상들의 자본력으로 세워진 도시국가들이 과거와는 다른 정치경제적 이념으로 세계를 변화시켜 가던 때였다. 중세의 엄격하고 고정된 틀에 갇힌 세계가 무너지고 서로 다른 생각과 문화가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흘러 다니던 시대였다. 오늘날 유럽의 박물관에서 전 세계 관람객들을 끌어모으고 있는 예술작품의 상당수가 당시의 산물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의 거장이 모두 그때 활동했다. 이들의 작품 속에는 서로 다른 지류로부터 흘러 들어온 문화가 아무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뒤섞여 있다. 기독교가 이슬람과 섞이고 일신교의 상징과 다신교의 상징이 한데 어우러진다. 한 예로 보티첼리의 그림에 등장하는 마리아(Maria)는 동시에 비너스(Venus)다. 미켈란젤로가 만든 다윗(David)의 얼굴에는 당시 피렌체의 권세가인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얼굴이 겹쳐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그림은 인물들의 애매한 표정과 몸짓 때문에 수많은 해석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헤르메스는 메디치 가문의 수호신이자 연금술의 신이며 언어와 화폐의 수호자다. 물론 오늘날에는 통신과 커뮤니케이션 영역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각주[1] 그리고 ‘에르메스’라는 멋진 불어식 이름으로 백화점의 눈부신 조명을 받으면서 명품의 마법적 아우라를 풍기기도 한다.
하나의 신이 여러 곳에서 여러 다른 면모로 나타난다. 헤르메스의 지팡이가 그러하듯이 일견 서로 달라 보이고 때로는 모순되는 듯 보이는 것까지도 아무런 무리 없이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헤르메스가 안내하는 세계다. ‘세 배나 위대한 헤르메스’라는 뜻을 지닌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Hermes Trismegistus)라는 인물이 남겼다고 전해지는 에머랄드 석판 위에는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큰 것이 곧 작은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은 아래에도 있으니 오직 존재하는 것은 생명과 한 이치다. 이것을 움직이는 자 또한 그와 하나다. 신성한 경계에는 안도 없고 밖도 없다. 큰 것도 없고 작은 것도 없다. 위와 아래 또한 없는 것이다.”
헤르메스처럼 정해진 경계를 무시하면서 마음대로 오가는 존재를 트릭스터(trickster)라 부른다. 트릭스터는 말 그대로 ‘트릭을 쓰는 자’다. 트릭스터는 전 세계 신화 속 어디서나 고개를 내민다.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같은 트릭스터는 인간의 부러움을 살 만한 초월적이고 마법적인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트릭스터가 그렇지는 않다. 트릭스터는 때로 하찮고 바보스러우며 어설픈 면모를 보인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코요테의 모습에서 트릭스터를 본다. 코요테는 언뜻 개처럼 보이기도 하고 이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늑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코요테의 생김새 자체가 그처럼 애매하다. 개가 되었다, 이리가 되었다, 늑대가 될 수 있기는 하지만 개도 이리도 늑대도 아닌 동물인 셈이다.
어느 날 코요테의 모습을 한 트릭스터가 지나가는 들소 한 마리를 물어 죽였다. 그는 오른팔로 들소 가죽을 벗겼다. 그러자 갑자기 왼팔이 가죽을 낚아챘다. 오른팔이 다시 왼팔에게서 가죽을 빼앗았다. 그러더니 오른팔과 왼팔이 들소 가죽을 두고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내놔! 이건 내거야!’ 화가 난 오른팔이 왼팔에게 칼을 휘두른다. 싸움은 점점 격렬해져 결국 싸움에 진 왼팔은 온통 칼에 벤 상처투성이로 피를 뚝뚝 흘리게 된다. 그때서야 정신이 돌아온 코요테는 울면서 외친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했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거야?’
며칠이 흘러 그날을 까맣게 잊은 코요테가 이번에는 고라니 한 마리를 잡았다. 그는 고라니의 간으로 여자의 질을 만들고 콩팥으로 가슴을 만들어 자기 몸에 붙이더니 아주 예쁜 여자로 변신한다. 그러고는 지나가는 여우를 유혹해 합한 뒤 아이를 낳고, 어치와 합해 아이를 낳고, 서캐와도 합해 아이를 낳는다. 그 뒤 인간의 마을로 들어가 추장의 아들과 결혼하더니 아들을 넷이나 낳았다.
어느 날 정처 없이 길을 걷는데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나를 씹는 사람은 똥을 쌀 것이다.’ 목소리가 나는 곳을 살펴보니 작은 알뿌리가 내는 소리였다. 트릭스터는 알뿌리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한다. ‘나는 이걸 씹어도 절대로 똥을 싸지 않을 거야.’ 한참을 걸어가던 그는 ‘그 많던 알뿌리가 대체 어디로 간 거지? 대체 그 따위 것들이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다는 거야? 난 똥이 마려울 때 똥을 쌀 뿐이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갑자기 방귀가 나왔다. 그러자 그는 ‘아하, 이게 그 의미로군, 하지만 난 방귀만 좀 뀌었을 뿐이야, 난 여전히 위대한 트릭스터라고.’ 그런데 또다시 방귀가 나온다. 이번엔 좀 전보다 냄새도 소리도 더 센 것 같다. ‘내가 어리석었나? 사람들이 나를 바보라 부르는 게 이래서인가?’ 또다시 방귀가 나온다. 소리는 좀 전보다 훨씬 더 컸고 이번에는 살가죽이 따끔거릴 정도다.
그러더니 또다시 터져 나오는 방귀와 함께 몸이 앞으로 날아가 버렸다. ‘방귀가 나를 밀어 던졌지만 난 결코 똥을 싸지는 않을 거야.’ 계속 다짐을 했지만 방귀는 계속 나왔고 그 힘은 점점 세져만 갔다. 하늘로 치솟았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무릎과 손이 엉망이 되더니 이번에는 아예 거꾸로 곤두박질쳐 배가 땅에 털퍼덕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말았다. 트릭스터는 계속 다짐을 한다. ‘그래 계속해보라지. 그래도 나는 절대로 똥을 안 쌀 테니까.’ 점점 세져만 가는 방귀의 힘에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그는 주변의 커다란 통나무를 부둥켜안고 매달렸다. 그랬더니 통나무가 뿌리째 뽑혀 하늘로 치솟아 버렸다. 높이 솟은 미루나무도 커다란 참나무도 소용없었다. 트릭스터는 마을로 뛰어가서 마을에 있는 집과 사람, 개 등등 모든 것을 자기 배 위에 올려놓았다. ‘이번에는 괜찮겠지.’ 웬걸. 방귀가 폭발하더니 배 위에 올려놓은 모든 것이 공중에서 사방으로 날아가 버렸다.
사람들은 공중에서 떨어지면서 분을 못 이겨 서로에게 화를 냈고 개들은 마구 울부짖었다. 트릭스터는 이 광경을 보더니 웃겨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바로 그때, 뱃속이 말할 수 없이 쓰리더니 드디어 똥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금씩 나오던 똥이 점점 많아져 모든 것을 뒤덮으면서 쌓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똥더미로부터 달아났다. 나무 위로 올라갔지만 소용이 없었다. 똥더미는 점점 높이 쌓였고 그는 점점 높이 올라갔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어진 트릭스터는 몸이 미끄러지면서 그만 ‘풍덩!’ 하고 자신의 똥더미 속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 그는 결국 자신의 똥으로 온몸이 뒤덮인 채로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한다.
어릴 적 본 만화영화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 하는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트릭스터 코요테는 헤르메스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신하는 존재다. 어리석고 우스운 코요테에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창조주의 면모를 부여했다. 그는 스스로 여자로 변신해 여우와 어치와 서캐의 자식들을 낳았으며 재미삼아 산과 평원을 만들고 땅에 색칠을 하기도 한다. 이 모든 행동에 별로 심각함은 없어 보인다. 그에게는 정해진 가치도 규율도 별로 의미가 없다. 옳은 행동인지 그른 행동인지, 내 행동이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나중에 내게 찾아올 이익과 불이익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해서도 아무런 고려가 없다. 어찌 보면 정말 대책 없는 캐릭터다. 그래서 그는 어리석어 보이고 무모해 보이며 때로는 우스워 보이기도 한다. 그의 행동에는 별로 악의가 없지만 그가 불러오는 결과는 엄청날 때도 있다. 그래도 그는 자기 행동의 결과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는 듯이 행동한다.
만약 일상생활 속에서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어떨까? 매사가 정해진 규율과 질서에 맞춰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트릭스터는 짜증 그 자체일 것이다. 실제로 트릭스터 유형의 사람들은 바로 그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인해 화를 당하기도 한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이 믿고 따르는 규율과 질서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그의 행동은 영웅적 위반과는 다르다.
영웅적 위반은 기존의 규율을 위반하기는 하지만 그가 따르는 다른 규율에 충실하므로 그의 위반은 충분한 명분과 합리적 근거를 지닌다. 게다가 영웅의 위반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어 기존 규율의 제어력을 무력화시키게 되면 그는 새로운 규율을 정초하는 자로 떠받들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트릭스터는 다르다. 그의 행동은 모방 불가능하며 위반이 특별한 목적을 지니지도 않기 때문에 그 결과에 목매지도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그뿐이다. 게다가 그는 위대해 보이지도 진지하지도 심각하지도 않으며 하찮아 보이기까지 한다. 그 때문에 그의 하찮음과 가벼움은 힘의 대결을 삶의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희생양으로 삼게 만들기도 한다.
융은 트릭스터를 그림자 인격의 일종으로 보았다. 우리는 나름대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하나의 그림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국적, 성별, 학력, 직업, 가족관계 등 사회적으로 공인된 자신의 위상뿐만 아니라 가치관과 취향, 외모 등의 개인적인 자아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로 구성된 자아상 말이다. 우리는 그 그림을 토대로 스스로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여기며 다른 이에 대해서도 그런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취향과 가치관, 태도 등이 삶의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지만 정작 나는 알지 못한다.
융은 한 개인의 자아상 너머에 진정한 ‘자기’가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는 개인성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러나 한 개인의 내부에서 삶의 전 과정을 추동해 나가는 일종의 ‘진아(眞我)’이기도 하다. 이 전체적인 ‘자기’에서 내가 나라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나머지 영역이 나의 그림자로 남아 있게 되는 거다. 그림자는 항상 삶의 한 부분으로 기능하지만 그림자를 자각하지 못하는 이에게 그림자는 자아가 아닌 타자에게 투영된다. 나의 보이지 않는 뒷면을 다른 이에게 비추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이의 얼굴에서 나의 감춰진 얼굴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트릭스터는 그림자의 양면성이 작동하기 시작할 때 나타난다고 한다. 트릭스터는 그림자의 언저리에서 살고 있다. 내가 ‘나’의 정체를 식별하기 위해 구별과 선택과 배제의 경계를 그어 놓은 선을 트릭스터는 이리저리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한다. 나의 인격을 구성하는 요소이면서 내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부분의 바깥에는 부정적인 얼굴의 트릭스터가 얼굴을 내민다. 그래서 그를 악마라고 규정짓는 순간 그는 모습을 바꿔 천사의 얼굴로 찾아온다. 그는 로마 출입구의 신 야누스(Janus)처럼 이쪽과 저쪽 모두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때론 선한 얼굴로 다가와 우리를 유혹하는가 하면 갑자기 가증스러운 악마로 변해 우리를 구렁텅이에 처넣어 버리기도 한다. 어지럽고 혼란스러우신가? 그러나 트릭스터의 가혹함 때문에 우리 삶이 현재의 미적지근한 평화에서 벗어나 삶의 생생함 속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트릭스터는 나타났다 사라지며 그가 나타나는 순간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가능해지고 쉬워 보이는 일도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만다. 때로는 기적을 일으키는 존재이면서 때로는 악운을 불러들이기도 하는 존재다. 우리가 트릭스터를 우리 편이라고 쉽게 속단했다가는 트릭스터에게 뒤통수를 맞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그를 적이라고 밀쳐 낼 수도 없다. 그는 무엇에도 별로 악의가 없지만 그렇다고 선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바람에 갈대가 이리저리 흔들리듯 트릭스터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움직인다. 그 바람의 방향과 의도에 우리가 상상하는 합리성이 개입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그 원인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하곤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는 거대한 원인-결과의 연쇄물처럼 보인다. 과학은 그 인과의 그물망이 가진 메커니즘을 이론화하고 싶어 한다. 이론으로 변모한 세계상은 우리를 안심시킨다. 마치 세계가 그 이론대로 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이 만들어지고 우리는 환상을 진짜로 믿고 안심한다. 그러나 삶이 이론대로 움직이고 세계가 이론대로 움직이기만 하는가? 인위적으로 구성한 사회제도와 시스템은 바로 이론을 현실적 강제력을 지닌 세계로 전환시켜 놓은 결과다. 그리고 우리 삶은 꼼짝없이 그 그물망에 사로잡혀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시스템은 어디까지나 시스템일 뿐이다. 삶은 살아 있는 것이며 인간의 손아귀로 다 포착하기에는 그 존재성이 너무나 복잡하고 신비롭다.
모든 제도는 이편과 저편을 가르지만 그 선을 넘나드는 자는 항상 존재한다. 우리 마음을 구성한다고 여겨지는 보이지 않는 선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고정시킬 수 없는 우리 내부의 자연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선을 자꾸만 넘나들며 결국에는 그 선을 무너뜨려 버리고 만다. 우리는 우리가 정해 놓은 규율을 지키려고 애쓰지만 더 큰 힘은 그 규율을 비웃는 것이다. 나는 절대로 똥을 싸지 않겠다는 코요테의 다짐을 떠올려 보자. 그는 결국 제가 싼 어마어마한 똥더미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는가 말이다. 코요테의 중대결심을 형편없이 처박아 버리는 것은 작은 알뿌리의 목소리다. 그는 자연의 작은 속삭임을 우습게 알았고 자신의 다짐 따위로 그 작은 힘을 쉽게 무력화시킬 수 있을 줄 알았을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우스운 존재가 되어 버린다. 세상을 모두 자기 똥으로 뒤범벅을 해 놓고 그 안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그렇다고 트릭스터가 한심한 존재이기만 한 걸까? 그는 스스로 몸을 여자로 변신시켜 아이를 만들기도 하고 산과 평원을 만들기도 하는 존재다. 세상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기도 하고 때로는 늙은 현자(賢者)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 삶의 지혜를 전해 주기도 한다. 어린 악동이자 늙은 마법사, 재치 어린 광대이자 슬픈 바보, 왕이자 거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반대 인격을 한 몸에 지닌 자가 바로 트릭스터다.
바로 이 혼란스럽고 믿을 수 없는 존재, 어떤 틀에도 고정되거나 가둘 수 없는 존재, 그것이 트릭스터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삶의 다른 차원으로 인도하는 존재다. 그는 우리가 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영토, 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영토로 우리를 이끈다. 바로 꿈의 문지방을 넘게 해 주는 것, 그것이 트릭스터의 역할이다. 트릭스터를 만나거든 삶의 동반자로 삼으시길. 뿔 달린 도깨비가 방망이를 휘둘러 황금을 가져다주고 철없는 요정이 우리를 덫에서 빼내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