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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 AFC U-23 챔피언십 카타르와의 4강전에서 권창훈이 결승골을 넣은 뒤 환호하고 있다. photo 연합 |
축구선수 신태용은 월드컵에 단 한 번도 뛰어 보지 못했다. 미드필더인 그는 폭발적 스피드나 저돌적 드리블과는 거리가 먼 선수였다. 하지만 누구보다 영리했다. 뛰어난 축구 센스로 그라운드를 지배한 그는 한국 프로축구의 전설이 됐다.
영남대 출신으로 축구계에선 ‘비주류’로 꼽혔던 그는 성남에서만 13시즌을 뛰며 무려 6번(1993~1995, 2001~2003) K리그 정상에 섰다. MVP(최우수선수)에도 두 차례(1995·2001) 선정됐고, 신인왕(1992)과 득점왕(1996)도 차지했다. 46세인 그와 비슷한 세대인 황선홍(48)·홍명보(47)·서정원(46)·최용수(45) 등과 비교할 때 대표 경력에선 떨어졌지만, K리그에서만큼은 그의 성과를 능가할 선수가 없었다.
신태용은 은퇴 후 지도자가 되어서도 남다른 행보를 이어갔다. ‘지도자 신태용’을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바로 호주다. 2004시즌을 끝으로 성남을 떠나 호주 프로축구 A리그 퀸즐랜드 로어와 계약한 신태용은 2005시즌 발목 부상으로 한 경기를 뛰는 데 그쳤다. 그런 그에게 퀸즐랜드는 코치직을 제안했다. 신태용의 지도자 입문이었다.
호주에서 코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수평적인 리더십을 배웠다. 성남 시절 주장으로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그가 호주에서 권위의식을 내려놓게 된 것이다. 신태용은 “호주에서 코치로 있으면서 생각에 큰 변화가 있었다”며 “호주에선 감독이 코치나 선수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관계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누며 함께 팀을 만들어 갔다”고 했다.
호주의 경험은 이후 신태용의 ‘형님 리더십’으로 나타났다. 2009년 K리그에서 코치 경험도 없이 곧바로 성남의 지휘봉을 잡은 그는 선수들과 격의 없이 대화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팀을 하나로 만들었다. 집중력 있게 하루 한 번만 훈련했고, 강제적인 합숙 문화도 없앴다. 선수들과는 수시로 안부 문자를 주고받았다. 이는 곧 좋은 성적으로 이어졌다.
2009년 성남을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그는 이듬해인 2010년 AFC(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감독 경력 2년 만에, 그것도 40세의 젊은 나이에 이룬 아시아 정복이었다. 2011년엔 모기업이 예산을 줄여 주축 선수들이 대거 팀을 빠져나갔지만 FA컵 우승을 일궈 내는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다.
그는 성남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려놓은 뒤 “이 정도면 ‘난놈’ 아니냐”고 스스로 말했다.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 인터밀란 등을 거치며 수많은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우승 제조기’ 주제 무리뉴 감독이 스스로 ‘스페셜 원(Special One)’이라 부르는 것에 빗댄 말이었다. 실력이 뒷받침된 거침없는 언변은 신태용 감독의 주가를 더 높였다.
2년의 야인 생활, 코치로 부활
2012시즌이 끝나고 신태용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성남 지휘봉을 놓았다. 한동안 해설위원 등을 하며 야인 생활을 한 신태용 감독은 2014 브라질월드컵이 끝나자 대표팀 코치로 선임됐다. 감독이 아니라 코치를 선택한 것은 그동안 K리그에서 정상의 길을 걸어온 그의 행보를 생각할 때 의외의 결정이었다. 신 감독은 “한국인이 감독이었다면 그 아래에서 코치를 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울리 슈틸리케 감독과 신태용 코치의 조합은 막강한 시너지 효과를 발휘했다. 국가대표팀은 작년 호주 아시안컵에서 선전 끝에 준우승을 차지했고, 중국 동아시안컵에선 정상에 올랐다.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에선 6전 전승으로 최종 예선 진출을 손쉽게 확정했다. 이 과정에서 선수 파악에 일가견이 있는 신태용 코치의 힘이 컸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2018 러시아월드컵만을 바라본 그에게 지난해 1월 새로운 미션이 주어졌다. 2016 리우올림픽 감독직이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을 일구고 리우올림픽을 준비하던 이광종 감독이 급성 백혈병 증세로 지휘봉을 놓게 되면서 신태용 감독이 갑작스레 그 자리를 맡게 됐다. 호주 아시안컵이 끝나고 제의를 받은 그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부담스러운 자리일 수밖에 없었다. 월드컵이 아시아에 4.5장의 본선 진출권을 주는 것과 달리 23세 이하가 출전하는 올림픽은 단 3팀만 본선에 나갈 수 있다. 만약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면 국가대표팀 코치 자리도 내놓을 각오를 해야 했다.
신태용 감독은 이를 운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주어진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리우올림픽에 나가는 1993~1994년생은 이른바 골짜기 세대였다. 기성용·구자철·김영권 등 런던올림픽 동메달 세대(1989~1990년생), 손흥민·이재성·김진수로 대표되는 92라인(1992년생)에 비해 이 세대엔 이름 있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A매치를 뛴 선수도 1994년생 권창훈이 유일했다.
그래도 그는 뚝심 있게 대회를 준비했다. 지난 1월 카타르에서 막을 올린 2016 AFC U-23 챔피언십이 올림픽 최종 예선 무대였다. 3위 안에 들어야 리우올림픽으로 갈 수 있었다. 신태용 감독은 ‘개인은 약할 수 있지만 팀은 강하다’는 신념으로 팀플레이를 만드는 데 역점을 뒀다. 다양한 전술을 구사할 수 있도록 철저히 훈련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신태용호는 이번 대회 조별리그 3경기에서 모두 다른 포메이션으로 임했다. 2승1무로 합격점을 받은 대표팀은 요르단과의 8강전에선 고전했다. 신태용 감독은 후반 상대가 적극적으로 공격을 시도하는 상황에서 재빠른 전술 대처를 하지 못해 고전했다. 1 대 0으로 힘겹게 승리한 한국은 1월 27일 4강전에서 홈팀 카타르를 만났다.
8강전에서 교훈을 얻은 신태용 감독은 이번엔 보란 듯 팔색조 전술로 상대를 교란했다. 그는 이날 측면 공격이 뛰어난 카타르를 맞아 수비적인 스리백 전술로 전반을 소화했다. 후반전 한국의 선제골이 터진 이후엔 공·수 균형을 맞춘 4-2-3-1로 전형을 바꿨고, 카타르의 동점골이 나오자 공격적인 투톱을 가동해 결국 3 대 1 승리를 이끌었다. 신 감독은 경기 전날 황희찬과 문창진을 따로 불러 “너희가 사고를 한번 쳐서 영웅이 되어라”고 했다. 이들은 후반 교체로 들어가 맹활약했다.
결승 진출로 세계 최초의 8회 연속 올림픽 본선 진출을 이룬 신태용 감독은 대회를 치르는 동안 몸무게가 2㎏ 빠졌다고 했다. 부담을 모르는 듯 늘 유쾌한 신태용 감독에게도 이번 대회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무대였던 것이다. 신태용 감독의 향후 목표는 확실하다.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언젠가 성인 국가대표팀을 지휘해 보는 것이다. K리그에서 화려한 성과를 남겼지만, 상대적으로 초라한 대표팀 경력 때문에 2인자의 이미지가 강했던 신태용 감독은 이제부터가 그의 축구 인생 전성기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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