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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도발전 연구회 교회용어의 잘못된 표현
한국교회
발전연구원(원장 이성희 목사)이 6월 3일 오후 4시 서울 연지동 기독교회관 세미나실(709호)에서 ‘한국교회 잘못된 예배용어, 이것만은 고치자’라는 주제로 연구발표회를 개최했다.
김세광 교수(서울장신대 예배학)는 강연에서 “한국교회 안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 중 비성서적·비신학적·비기독교적 낱말과 술어 등을 조사해, 문제 있는 용어들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변경하고자 한다”며 잘못 사용되고 있는 주요 용어들과 변경안을 제시했다.
◈기도와 관련된 용어
1. 당신→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말 2인칭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3인칭에서 극존대어로 쓰일 수 있으나, 기도시 하나님은 ‘우리 간구를 들으시는 분으로’ 2인칭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당신’이란 호칭은 맞지 않다.
2. 기도 드렸습니다, 기도 하였습니다→ 기도 드립니다, 기도 합니다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 아뢰는 우리의 간구다.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영원한 현재성을 띠고 있다. 그러므로 기도의 마무리는 과거가 아닌, 현재로 끝내는 것이 옳다.
3.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주님, 하나님 아버지
‘~시여’는 어법상 문제가 있다. 현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시여’를 붙여서는 안 되고,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라 해야 옳다.
4. 우리 성도님들이→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5. 대표 기도→ 기도 인도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이는 ‘기도 인도’라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만인제사장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6. 사랑의 예수님→ 사랑의 하나님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께 우리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7. 참 좋으신 하나님→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 등
성경에는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로,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으로 표현한 말이다. 우리가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 ‘미운 하나님’, ‘야속한 하나님’ 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8.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사용불가)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지금도 살아있다’는 표현은 ‘언젠가는 살아있지 못할지 모른다’ 또는 ‘아직도 살아 계시는 하나님’ 등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
9. 중보기도→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단 한 분의 중보자시다(딤전 2:5).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예배, 예식과 관련된 용어
1. 사회자→ 인도자(예배시)
사회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우리 문화권에서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하나님을 향한 예배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단순한 사회자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로 부름이 타당하다.
2. 성가대→ 찬양대
1960년대까지 한국교회는 찬양대라는 이름이 통용됐고, 성가대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성가대(세이카다이)’라는 용어가 그대로 수입되면서 성경에도 없는 ‘성가대’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성가는 모든 종교에서 쓰이는 용어며, 찬양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 행위에 속한다.
3.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설교시 사용불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4. 대예배→ 주일예배
큰 예배가 있고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행위가 바로 예배다.
5. 열린 예배→ 열린 집회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 집회’를 말한다.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엄밀하게 따져 예배보다는 전도집회에 가깝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사건 안에 나타난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6. 예배봐 준다(사용불가)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 참된 감사와 찬양과 헌신과 고백의 응답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나를 대신하여 예배를 ‘봐 준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7. 준비 찬송(사용불가)
하나님께 영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찬송을, 자리를 정돈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말은 잘못된 것이다.
8. 예배/예식/기도회(구별사용)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9. 헌금→ 봉헌
예배 순서 중 헌금은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었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즉,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축소시키는 것이다.
10. 축제→ 잔치
축제는 본래 제사의 이름으로, 묘문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묘 문제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 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다.
11. 하나님의 축복→ 하나님 주신 복,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축복은 복을 비는 의미인데, 하나님은 복의 근원으로서 복을 주시는 분이다. 따라서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 주시옵소서’가 타당하다.
12.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룻기, 욥기, 잠언, 아가
‘기’와 ‘서’는 의미상 중복표현으로 볼 수 있다.
13. 시편 O장 O절→ 시편 O편 O절
몇장은 산문에서만 쓸 수 있는 것이다.
14.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 사랑하는 하나님
말하는 이가 동사 ‘사랑하시는’의 주체가 될 수 없다.
15.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 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주기도문은 단순히 외우는 것, 즉 암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마디 한 마디 뜻을 바로 새기면서 음송해야 하는 것이다.
16. 영시예배, 자정예배→ 송구영신예배
17. 기도회 폐회합니다→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예배는 OO회와는 구분되기 때문이다.
18.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다. 거의 ‘그가 대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 일요일(공일)→주일
그리스도인은 일요일은 ‘주의 날’을 뜻하는 주일이라고 해야 한다.
20. 기도를 시작할 때 성경구절을 읽는 것에 대해
기도는 하나님을 향하여 아뢰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신 말씀을 그 분께 다시 들려드린다는 일은 경우에 맞지 않다.
21. ‘지금은 처음 시간이오니’(사용불가)
기도 이전에 이미 입례송, 묵상기도, 개회찬송, 성시교독, 신앙고백, 회중찬송 등의 순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22. 예수 공로 의지하여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쓰기에 바람직하지 못한 용어들
도로아미타불, 공염불, 보살같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신선놀음, 도사, 신주 모시듯 한다, 명당자리, 넋두리, 도깨비 장난, 일진, 살, 귀신 같다, 액, 운수, 운, 수, 재수, 사주팔자, 터줏대감, 손, 운명 등등
선행,구제, 헌금(연보) 그리고 사랑에 대해주의 말씀은...
2011/01/06 00:15
http://blog.naver.com/hangian/150100263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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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고 날씨가 많이 추워지고 연말 연시가 되면서 주위의 어려운 상황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수고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많은 부담이 되었습니다. 정기적으로 매월 후원하는 곳이 있긴 하지만 '또 기부를 해야할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마음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별로 기부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상황이라 마음의 부담만 커졌구요.
그러다 이에 대해 제가 성경공부를 통해 배운 내용을 통해 구제나 헌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리스도인(개신교인이든 천주교인이든 어느 교파든 상관없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성경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할지에 대해 제가 성경을 배우고, 깨달은 내용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족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교리에 이런 내용이 혹시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참고하신다고 생각하고 읽어 주시고, 제 글솜씨는 좀 어눌하니 인내가 좀 필요하실듯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한다는 얘기가 아니라 구제와 헌금, 그리고 이에 관련된 사랑에 대해서 간략하게 써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눅10:25~37)를 다들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마지막으로 올라가셨을 때, 어느 율법사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어떻게 써 있냐'고 물으셨고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이를 행하라'고 대답하셨구요. 이 율법사는 '그럼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이 비유의 결론은 '이웃(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죠.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동일하게 자비(선행)를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이웃에게 자비or구제를 베푸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자비를 베풀라고 해서 자연스럽게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먼저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에 가운데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내어쫓으시고, 5천명과 4천명을 먹이셨지만 예수님의 목적은 복음전파, 제자양육, 십자가대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는 곳곳마다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왔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실 수 있는 선한 일을 하신 것(물론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신 예언 성취의 측면도 있습니다만)이지 이를 위해 무료 급식소나 무료 치료소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막1:37~9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다른 마을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해서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먹을 것이 없어 무리가 기진할까 염려하셔서 9천명(5천명+4천명;물론 남자 숫자만)을 먹이셨을 뿐 그후 다른 큰 무리에게 먹을 것을 주신적이 없습니다. 그외에도 복음서 여기저기서 예수님께서 선행을 베푸셨지만, 선행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라(이것이 목적이며, 병고침, 귀신추방, 구제 등의 일은 부차적인 것)고 하셨습니다(눅9:1~6, 마28:19~20).
그렇다면 구제와 헌금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고후9:6~7을 찾아보면(고전9장은 연보or헌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고린도교회가 유대교회의 기근을 돕기위해 이전에 작정한 (구제)헌금을 미리 준비할 것을 설명), 헌금을 통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헌금하지 말 것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음의 즐거움으로 헌금하길 바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죠. 게다가 만물이 하나님 것이기에 우리가 드린다한들 하나님이 부해지시는 것도 아니고 안드린다고 한들 하나님이 가난해지시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나의 축복(많이 심으면 많이 거둔다)을 위해 하는 것이 좋은 것이죠.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헌금하라고 강요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마6:32). 그리고 어떤 사역이든지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죠지뮬러 형제님의 경우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죠. 고아들을 먹이는데 개인적으로 특정인에게 부탁한 일이 없고, 오직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어낸 훌륭한 믿음의 기도를 드린 선배님이시죠.(우리의 믿음이 중요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사건이 행2:44~45에 나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가진 것을 나누고, 자기의 소유를 팔고 물건들을 서로 통용한 일인데요. 이를 통해 교회내에서 궁핍한 사람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 역시 자원함으로 이루어 졌음을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행5:1~11)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중에도 늘어나는 성도들을 다 감당하기에는 조금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행6:1~6을 볼때, 이방인(헬라파 유대인)출신의 과부들이 자주 구제(도움받는 일)에서 제외당함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이 주목할 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2)' 공궤는 '음식을 준다'는 의미인데, 사도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일보다 더 중요한 일(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을 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마땅하니 집사들을 따로 세울 것을 결의하게 됩니다. 그래서 집사들은 교회 내에서 공궤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들 집사 중에 그 유명한 스데반과 빌립이 있었지요.
그런데 더 재밌는 것은 이 집사들(스데반과 빌립)이 공궤하는 일뿐 아니라 전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사도들이 집중하겠다고 한 일)에도 매우 열심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빌립은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으로 성경에 기록됩니다(행21:8). 비록 교회의 필요에 따라 집사로 뽑혀 공궤하는 일을 맡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지상사명(마28:19~20)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주신 명령이라는 것을 인정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끝으로,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바로 앞에 언급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요13:34~35에서 서로 사랑할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갈6:9~10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착한 일을 하되, 믿음의 가정들에게 더욱 그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로 볼때, 믿는 자들 서로간에 사랑하고, 믿는 자들에게 착한 일을 먼저 해야함을 알 수 있습니다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선을 베풀어야 하구요. 가장 훌륭한 선행이 무엇인지 잠시후에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형제를 또는 자매를 사랑하고 있냐는데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결론인데요.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위의 기초와 동기는 '사랑'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이 사랑에 감사하며 나도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죠. 근본적으로 우리에겐 사랑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랑을 알게 된 것이죠. 이 사랑을 알 때(또는 알아가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요14:21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계명을 지키게 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전도해라', '구제해라', '헌금(연보)해라'라고 말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합시다'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물론 사랑이전에 전도, 구제, 헌금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도 사랑의 표현이니까요. 단지 큰 흐름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죠).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13:8)'고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선행)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지상사명'(땅위의 사명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최우선의 사명 이란 뜻)이라고 부릅니다. 그 후에 구제도 있고, 교제도 있는 것입니다. 또 이를 위해서 교회가 필요한 것이며, 실제로도 많은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 교회는 안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듯 이미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각 교회의 상황에 따라 조금씩 모습이 다른 것이 정상이라고 생각됩니다(이것에 대해서도 설명할 것이 많지만 이것이 주제는 아니니;;). 좀 두서 없이 쓴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시간도 늦고 해서 수정은 나중에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혹시 읽어보시고 의견이 있으시면 어떤 내용이라도 댓글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