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의 역사
1. 당구의 기원
당구의 기원을 살펴보면 상당히 오래 된 경기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확한 당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자료가 없으며 지금으로부터 약 550여 년 전에 `빌리어드`라는 말이 일상 생활 중에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으로서 대략적인 당구 경기의 기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당시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모진 학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왕녀 스튜어트의 편지 가운데 `나를 사형에 처할 장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나의 `빌리어드 테이블`은 그 방에서 철거될 것이다.`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당구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스페인 기원설, 영국 기원설, 프랑스 기원설이 있다. 그러나 정설로서는 14~15세기에 걸쳐서 크리켓과 비슷한 옥외 스포츠였던 것을 실내 게임으로 개량, 유럽 각지에서 발달해 간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Complete Gamester」(1674년刊) 중에서는 십자군에 의해 동방에서 유럽으로 반입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고안되었다고 하는 스페인 기원설을 취하고 있고 14세기경 국기 크리켓을 실내에서 실시하게 된 것이 그 시초라고 하는 것이 영국 기원설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1571년 프랑스 종교 전쟁 무렵 찰스 9세의 왕실 예술가였던 드비니가 고안, 간단한 규칙을 만들었다고 하는 프랑스 기원설이 유력하다. 또한 셰익스피어의 저서 「안토니오와 클레오파트라」중에 당구(billiard)라는 것이 씌어 있는데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쨌든 당구의 원형은 지상에 2개의 둥근 공─King(킹)이라고 하는 원추형의 것─을 놓고 Maces(메스)라고 하는 구부러진 막대기의 한쪽 끝을 어깨에 얹고 다른 한쪽 끝을 쥐고 돌을 쳐서 굴리는 옥외 경기였다고 한다. 그 후 유럽에서는 같은 형식의 실내 경기로 발전해서 일정한 형태를 가진 틀이 있는 테이블 위에서 공과 공을 부딪쳐서 득점을 겨루는 게임으로 발달해 왔다. 영국에서는 상아 공을 2개 사용하여 당구대에 Ironarch(아이언 아치)라고 하는 아치 모양의 관문을 세워서 이 아치를 빠져 나가게 해서 양끝에 뚫린 구멍에 공을 넣는 게임으로 변화해갔다. 18세기가 되자 테이블 위에 구멍을 뚫고 그 속으로 공을 떨어뜨려서 득점을 겨루는 형태로 개량되어 갔지만 이것은 아이언아치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초는 테이블 중앙에 구멍을 뚫거나 4구석에 구멍을 뚫었지만 테이블의 모양이 장방형으로 정해지고 나서는 테이블 4구석과 긴 쿠션의 중앙에 각 2개 총 6개의 구멍이 뚫리고 이 구멍에 공을 떨어뜨리게 되었다. 이것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포켓 게임의 원형이다.
2. 4구폐지와 3구게임의 보급
1870년에 들어서자 설비도 한층 충실하고 기술도 더욱 발달하여 1500점 게임, 하이 런 919점 이라고 하는 기록을 내는 선수가 나타나서 4구는 쉽고 유치하다고 하여 서서히 쇠퇴해 가고 서구권 경기의 주류는 3구로 이동해 갔다. 1876년 9월에 이루어진 슬론슨과 섹스톤의 시합을 끝으로 4구 경기는 폐지되고 이후 모두 3구가 되었다. 미국에서 4구가 폐지되기 3년 전인 1873년에 프랑스의 가르니에라고 하는 선수가 도미, 뉴욕에서 3구 묘기를 연출했다. 이 때의 경기대회에서 코너에 공을 모아 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제가 생겼다. 즉,‘만년구’의 규칙이 있어 코너의 4인치 반의 선 안에 표적공이 모였을 때는 그 선 안에서 3회 이상 쳐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규제이다. 이 규제 속에서 어떻게 연속 득점을 거듭하느냐라고 하는 연구가 계속되어 쿠션을 따라 공을 흩트리지 않고 치는‘아메리칸 세리’가 고안되었다. 영국에서 포켓 게임이 발달하고 있었던 무렵 프랑스에서는 전혀 다른 포켓을 이용하지 않는 게임이 연구되어 퍼져 갔다. 1770년대에는 2개의 공으로 하고 있었던 지금까지의 방법에 제3의 공으로서 붉은 공 1개를 첨가한 3개의 공에 의한 게임이 고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