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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1세 |
조선 성종 19년 |
1488년 (戊申) |
◙능성현(綾城縣) 쌍봉리(雙峯里)에서 무신년 9월 19일 기묘에 탄생하다. 혹은 광주(光州) 이장(泥場)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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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 |
성종 23년 |
1492년 (壬子) |
◙마을 아이들과 길거리에 나가 놀다가 우레를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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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 |
성종 24년 |
1493년 (癸丑) |
◙비로소 배움의 길에 들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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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
성종 25년 |
1494년 (甲寅) |
◙현 백일장(縣 白日場)에서 장원하다. |
장원한 시의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
8세 |
연산군 원년 |
1495년 (乙卯) |
◙가정에서 공부하다.
부친 승지공(承旨公)이 임번(林樊)에서 도(道)를 지키며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소년 학포도 이때부터 경사(經史)를 배우며 비록 작은 말일지라도 그 취지(臭旨)를 모두 이해하여 알았다. 기상이 훤출하고 마음가짐이 엄정하여 열 살 안에 소문이 각 고을에 퍼져 나갔다.
‘능주의 양신동(梁神童)이라고.’ |
․승지공(承旨公)의 휘(諱) 이하(以河))
․임번(林樊) : 초야
․경사(經史) : 유교의 경전(經典)과 사기(史記)
․취지(臭旨) : 냄새와 맛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17세 |
연산군 10년 |
1504년 (甲子) |
◙부인 금산김씨(錦山金氏)에게 장가들다.
학생 김섬(金銛)의 딸이고 진사 김경행(金敬行)의 손녀이고 금산군(錦山君) 김신(金侁)의 후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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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 |
중종 원년 |
1506년 (丙寅) |
◙장남 응기(應箕)가 태어나다. ◙이 해에 정암 조광조(趙光祖)를 찾아 용인(龍仁)을 방문하다.
장성하자 학포는 도를 구하려는 데에 뜻을 두고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기를 한결같이 하며 의리(義理)를 연구함을 근본을 삼으며 경제(經濟)에도 뜻을 두고 임금을 바르게 보좌하고 백성을 잘 살게 할 것을 마음먹었다. 그리고 일찍이 배우는데 사우(師友)가 없음을 걱정하다가 마침내 정암을 찾아가 연치(年齒)를 상관하지 않고 세상을 경영할 뜻을 찾아보고 성리의 깊은 뜻을 토론하였다. 모든 사물에 깊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공부를 하여 반드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깨닫는 것을 가정과 나라만큼이나 중하게 여길 정도로 힘을 썼다. 정암도 학포의 학식과 재주 행실이 보통 사람과는 동떨어지게 뛰어났음을 인정하고 장차 세상에 쓰일 큰 그릇이라고 보게 되었다. |
․필자 조사에 의하면 용인(龍仁)이 아니라 조광조의 생가가 있었던 한양(漢陽) 운니동(雲泥洞)이다.
․경제(經濟) : 政治
․연치(年齒) : 나이, 정암이 6세 연상
․격물치지(格物致知) : 주자학에서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를 연구하고 지식을 넓혀감 |
20세 |
중종 2년 |
1507년 (丁卯) |
◙봄에 향시에 참여 합격하고, 가을에 예부시(禮部試)에 나갔으나 시험을 보지 않고 돌아오다.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는데 출제하기 전에 한 아전이 와서 시제(試題)를 전해주면서 뇌물을 요구하거늘 학포는 크게 그를 꾸짖고 응시를 하지 않고 돌아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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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23세 |
중종 5년 |
1510년 (庚午) |
◙큰따님 정씨 부인(鄭氏夫人)이 태어나다. ◙봄에 생원시(生員試)에 2등으로 합격 하다. ◙반궁(泮宮)에서 거처하다.
이때 정암은 진사(進士)의 방수(榜首)가 되었다. 소과에 동방(同榜)이 된 두 사람은 상종하며 강론하고 질의하기를 빠진 날이 없었다. 정암이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양동년(梁同年)과 더불어 이야기를 하면 마치 지초(芝草)나 난초의 향기가 그대에게서 풍기는 것 같다.’ 고 하였다. <靜菴曰 吾與梁同年語 如芝蘭之薰人 又稱其氣象(정암왈 오여양동년어 여지란지훈인 우칭기기상)> 또 학포의 기상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공(公)은 비 개인 뒤의 가을 하늘이요, 엷은 구름이 막 걷힌 뒤의 밝은 달이라.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욕망일랑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깨끗함 뿐이요.’ 라고 하였다. |
․반궁(泮宮) : 성균관(成均館)
․양동년(梁同年) : 같은 해 소과에 합격한 양 학포
․지초(芝草) : 향기가 나는 풀
여제후추천 섬운초권 명월교교 인욕정진 (如霽後秋天 纖雲初捲 明月皎皎 人欲淨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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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
중종 6년 |
1511년 (辛未) |
◙정월에 아버지 승지공(承旨公)의 상을 당하다. ◙3월 승지공을 화순군 도곡면 신성리(新星里) 호동(虎洞) 뒷산 축좌(丑坐)에 장사 지내다. ◙사림이 월곡에 승지공의 사우(祠宇)를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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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26세 |
중종 8년 |
1513년 (癸酉) |
◙4월 부친상을 탈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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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
중종 9년 |
1514년 (甲戌) |
◙둘째 따님 정씨 부인(鄭氏夫人)이 태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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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
중종 11년 |
1516년(丙子) |
◙봄에 문과에 제3으로 합격하다. 글제(題)는 애산부(崖山賦)였다.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를 제수(除授)하다.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을 배수(拜受)하다.
일찍이 서빙고(西氷庫)의 얼음을 쟁이는 일을 감독하다가 의정부의 비위를 거슬러 사인(舍人)에게 곤욕을 치른 일이 있었는데 학포는 사모(紗帽)를 벗어 땅에 내던지면서 말하기를 ‘내가 이 물건(사모 즉 벼슬) 때문에 욕을 당한다.’ 하고 당당하게 나와버리니 한때 사람들이 모두 그 기개를 높이 샀다. ◙한성부(漢城府) 참군(叅軍) 에 제수되다. ◙봉상시(奉常寺) 주부(主簿)에 임명되다.
․정자(正字) : 홍문관의 정9품 벼슬 ․제수(除授) : 추천을 받지 않고 임금이 바로 벼슬을 줌 ․사인(舍人) : 조선시대 의정부의 정4품 벼슬 ․사모(紗帽) : 관리들이 쓰는 갓 ․직장(直長) : 장흥고의 종7품 벼슬 ․배수(拜受) : 공손한 마음으로 삼가 받음 ․참군(叅軍) : 한성부 정7품 벼슬 ․주부(主簿) : 봉상시의 종6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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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관(弘文館) : 조선시대 삼사(三司)의 하나, 경서(經書)와 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옥당(玉堂)이라고도 함
․장흥고(長興庫) : 조선시대 돗자리 종이 유지(油紙) 따위를 대주고 관리하던 관아
․서빙고(西氷庫) : 조선시대 동빙고와 함께 얼음의 채취․보존․출납을 맡아보던 관아
․봉상시(奉常寺) : 조선시대 제향(祭享)과 시호(諡號)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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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0세 |
중종 12년 |
1517년 (丁丑) |
◙둘째 아들 응태(應台)가 태어나다.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에 임명, ◙곧 공조(工曹) 좌랑(佐郞)으로 옮기고, ◙형조(刑曹)에 천임(遷任)되다. ◙11월 1일에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간언(諫言)을 한 탓으로 체직(遞職)이 되었다가 ◙윤 12월 1일 다시 정언(正言)으로 복직되다.
․전적(典籍) : 성균관의 정6품 벼슬 ․공조(工曹) : 조선시대 6조의 하나. 산택(山澤)․공장(工匠)․영조(營造)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좌랑(佐郞) : 6조의 정6품 벼슬 ․형조(刑曹) : 조선시대 6조의 하나. 법률․소송(訴訟)․노예(奴隸)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형조 좌랑 : 형조의 정6품 벼슬 ․천임(遷任) : 임무를 옮김 ․사간원(司諫院) : 조선시대 3사(三司)의 하나. 임금에게 간(諫)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정언(正言) : 정6품 벼슬 ․체직(遞職) : 직책을 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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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成均館) : 조선시대 유교의 교육을 맡아보던 최고의 국립 교육기관
․실록초선:양팽손위사간원정언 사신왈 팽손역학등제 상유반궁 유강항지명 시론여지고득배시직 ․(實錄鈔選:梁彭孫爲司諫院正言 史臣曰 彭孫力學登第 嘗遊泮宮 有强項之名 時論與之故得拜是職) ․(실록에서 뽑다. 양팽손을 사간원 정원을 삼다. 사관은 말한다. 팽손은 학문을 힘써 과거에 급제하여 일찍이 반궁에 유학할 때에 성격이 꿋꿋하다는 말을 들어 당시의 여론이 좋게 생각했기 때문에 이 직책에 임명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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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
중종 13년 |
1518년 (戊寅) |
◙2월에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다.
◙3월에 대간(臺諫)들을 어여삐 봐 달라고 임금께 청하다.
◙4월 4일에 종묘(宗廟)의 여름 제사를 지내려는데 하루 전, 제물로 쓰일 소가 종묘 문을 들어서다가 죽어버려 대사간 김양진(金楊震)과 함께 그 대처 방도를 ‘상께서 먼저 몸을 꾸짖는 제사를 지낸 뒤에 대제를 지내셔야 합니다’고 주상께 아뢰다. |
․경연(經筵) :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론하던 자리
․입시(入侍) : 대궐에 들어가 임금을 알현하던 일
․대간(臺諫) : 사헌부 사간원의 간관
․종묘(宗廟) : 조선시대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왕실의 사당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1세 |
중종 13년 |
1518년 (戊寅) |
◙5월 이조(吏曹) 좌랑에 임명되다. 학포가 이조판서(吏曹判書) 안당과 참판(參判) 김극복 그리고 좌랑 이약빙(李若冰)과 함께 정청(政廳)에 들어갔는데 때마침 지평(持平)의 자리가 비었는지라 장원(掌苑)인 김식(金湜)이 비록 직차(職次)는 낮았으나 그를 발탁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다.
◙9월 1일에 차자(箚子)를 올려 소격서(昭格署)를 파할 것을 청함. 소격서의 일로 삼공 육경 시종들이 누차 논계(論啓)를 했지만 윤허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학포와 6조의 낭관(郎官) 28인이 차자(箚子)를 올려 소격서를 파할 것을 청한 것이다.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위해 호당(湖堂)에 들다.
대제학(大提學) 신용개(申用漑)의 추천에 의해서이다.
․사가독서(賜暇讀書) : 조선시대 학자 양성의 방법으로 군신 중에 나이 적고 총민한 자를 뽑아 교대로 휴가를 주어 한가하고 고요한 곳에 들어가 연구에 전심토록 하는 제도. 조선시대 사가독서(賜暇讀書)는 정승에 오르는 필수 과정임 ․신용개(申用漑, 1463~1519)의 자는 개지(漑之)요 호는 이락정(二樂亭)․송계(松溪)․수옹(睡翁), 시호는 문경(文景),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신숙주(申叔舟)의 손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8년(성종19)에 별시문과에 급제, 1492년 사가독서했다. 대제학․대사헌을 거쳐 1518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이조(吏曹) : 조선시대 6조의 하나. 문관의 선임과 훈봉(勳封), 관원의 성적 고사와 포폄(褒貶 : 칭찬함과 나무람)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
․지평(持平) : 사헌부 정5품 벼슬
․장원(掌苑) : 조선시대 궁중의 과채(果菜)․화초(花草)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장원서(掌苑署)의 정6품 벼슬
․차자(箚子) : 간단한 상소문
․소격서(昭格署) : 조선시대 도교의 일월성신(日月星辰)에 제사 지내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호당(湖堂) : 조선시대 문신들이 독서하던 독서당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 정2품 벼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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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2세 |
중종 14년 |
1519년 (己卯) |
◙정월에 셋째 아들 응정(應鼎)이 태어나다. ◙정월 26일에 사간원 정언(正言)을 특수(特授) 받다. ◙2월 11일에 조강에서 익명서(匿名書)를 논하다. 지난 해 8월 21일 밤에 어떤 사람이 익명으로 글을 써서 화살에 묶어 가지고 의정부와 사간원의 문짝에다 쏘았는데 그 내용이 “김정 조광조 이자 한충 김안국 권발 유인숙 신광한 공서린 문근 김구 윤자임 정응 최산두 이청 이약빙 유용근 기준 장옥 김식 박훈 박세희 이희민 양팽손 등이 조정을 변란하여 장차 사직을 위태롭게 하려는 데도 주상이 그들의 간특한 꾀에 휘둘리고 있거늘 대신들은 어째서 묵묵히 앉아있기만 하는가” 였다. 그러나 의정부나 사간원에서 모두 왕께 알려드리지 않았는데 이해 2월 11일 밤에 또 건춘문(建春門)에다 익명서를 쏘아서 승정원(承政院)에서 즉시로 아뢰었다.
◙3월 1일 아침 강의에서 정암과 함께 여악(女樂)을 없앨 것을 청하다.
◙양사(兩司)를 사직하다.
◙4월 22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임명되다. |
․정언(正言) : 정6품 벼슬
․특수(特授) : 특별 제수
․익명서(匿名書) :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임금께 상소한 글
․건춘문(建春文) : 경복궁의 동쪽 문
․승정원(承政院) : 조선시대 왕명을 출납하던 기관 ․여악(女樂) : 임금의 어머니인 자전(慈殿)을 위한 내전의 잔치에서 기생들이 하던 노래와 춤
․양사(兩司) : 사헌부, 사간원
․사헌부(司憲府) : 조선시대 3사의 하나. 정사를 비판하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가려내어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리던 관청 ․지평(持平) : 사헌부 정5품 벼슬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2세 |
중종 14년 |
1519년 (己卯) |
◙현량천과(賢良薦科)에 뽑히다.
조정암이 무인년 겨울부터 현량과를 두어 사람을 취하려고 하였으나 주상의 뜻이 결정되지 못하던 중 조광조가 말하기를 ‘주상이 치평에 뜻을 두신 지 오래인데 아직껏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인재를 얻지 못한 탓입니다. 만약 이 법을 행하면 인재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정부와 예조에서 마침내 절목(節目)을 만들고 재행이 겸비한 사람 56인을 천거했는데 학포는 포선규위(褒善糾違)의 조목에 올랐다. 이 달에 주상이 몸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김식(金湜), 김정(金淨), 류인숙(柳仁淑), 이자(李耔), 박훈(朴薰), 김안국(金安國), 김정국(金正國), 안당(安瑭), 기준(奇遵), 정광필(鄭光弼), 이연경(李延慶), 박세희(朴世熹), 윤자임(尹自任), 송호지(宋好智), 류용근(柳庸謹), 한충(韓忠), 정응(鄭譍), 최숙생(崔淑生), 최산두(崔山斗), 서경덕(徐敬德) 양팽손(梁彭孫) 등 28인을 책(策)에 올려 취했는데 학포도 거기에 들었다. ◙이조정랑(吏曹正郞)을 받다. ◙홍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를 받다. ◙홍문관 수찬(弘文館 修撰)으로 이동되다. |
․현량과(賢良科) : 조선 중종 시대 조광조에 의하여 실시된 관리 채용 제도.
․포선규위(褒善糾違) : 선을 포상하고 과실을 탄핵함
․조선시대 이조정랑은 정5품으로 정승에 오르는 필수과정임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2세 |
중종 14년 |
1519년 (己卯) |
◙경연(經筵)에서 시강(侍講)을 하다.
학포가 대각(臺閣)에 있을 때부터 항시 경연에 들어가 시강을 해오다가 이때에 영상 정광필(鄭光弼)의 천거로 기준 박세희 최산두와 함께 강관이 되었으니 세상에서 ‘사학사(四學士)’라 칭했다.
진강(進講)을 할 때에는 언제나 옷을 단정히 하고 모습을 엄숙히 하며 마음을 정돈하고 생각을 많이 하여 오직 임금의 마음을 감격시키고 성학(聖學)에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향을 피우고 목욕재계하고 다시 향을 사르고 책에 절을 하는 법을 취하였으니 주상이 ‘근신한 사람’으로 지목했다.
학포가 진강하기를 “대학(大學)에 지지선(止至善)과 중용(中庸)에 치중화(治中和)는 임금의 학문의 표준입니다. 그 근본은 경(敬)이고 그 요체는 신독(愼獨)에 있으며 그 발단(發端)과 입두(入頭)는 치지(致知)에 있으니 이것이 위로 통하고 아래로 통하며 처음에서 끝까지 통하는 것으로써 짧은 순간 급박한 상황에서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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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강(侍講) : 왕이나 세자 앞에서 경서를 강의하던 일
․대각(臺閣) : 사헌부와 사간원을 이르는 말
․진강(進講) : 임금 앞에서 글을 강론
․성학(聖學) : 임금의 학문
․대학(大學) : 공자의 제자 증자(曾子)가 지은 책으로 4서의 하나
․지지선(止至善) : 지극한 선(善)에 그침
․중용(中庸) : 4서의 하나. 중용의 덕과 도를 인간 행위의 최고 기준으로 삼은 유교의 경전
․치중화(治中和) : 중(中)과 화(和)를 이룩함
․신독(愼獨) :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몸을 삼가 함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2세 |
중종 14년 |
1519년 (己卯) |
주상이 묻기를 “공문(孔門)의 학문은 무슨 일을 하는 것인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인(仁)일 뿐입니다.” 하였다.
주상이 “무엇을 인(仁)이라고 하는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인(仁)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성인이 그 본연의 마음을 가지려고 먼저 치지(致知)를 하고 뜻을 성실히 하여 그것으로 인정(仁政)을 하고 사업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정을 바로잡고 만민을 다스리는 것이 반드시 이 마음에 근본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10월에 정국공신(靖國功臣)의 훈을 삭탈할 것을 청하다.
◙11월 15일 ‘신무문의 변’(기묘사화)이 일어남. 전한(典翰) 정응(鄭譍)과 더불어 신구제현소(伸救諸賢疏)를 올리다. ◙12월에 관직을 삭탈당하다. ◙파직(罷職)하여 능성의 옛집으로 돌아오다. 이에 학포는 파직되어 능성의 옛집으로 돌아와 마침내 적소(謫所)에 부처된 정암과 밤낮으로 상종하게 되었다. |
․치지(致知) : 사물의 도리를 깨달아서 알게 됨
․정국공신 : 1506년 9월 중종반정에 공을 세운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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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2세 |
중종 14년 |
1519년 (己卯) |
◙정암을 곡(哭)하고 염습(殮襲)하다. 12월 16일에 정암에게 사사의 명이 내리고, 20일에는 금부도사에 의해 그 명이 집행되는 자리였다. 학포가 정암의 손을 잡고 결별하면서 서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다만 “각자 우리 왕에게 해야할 도리를 할 뿐이라” 고 하였다. 이날은 바람도 매섭고 눈도 많이 내려 사람들이 그 추위를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나 학포는 홀로 적려(謫閭)의 밖에서 종일토록 울고 몸소 염(殮)을 하여 빈소를 마련하고 맏아들인 응기(應箕)로 하여금 설전하여 슬픔을 극진히 하였다. 학포는 신병으로 집으로 돌아가 쉬었다. |
․정암을 위한 설전이 끝나자 학포는 자식들과 집안의 종복을 시켜 그날밤으로 60리 눈길을 걸어 이양면 증리 중조산 밑에 가매장하였다. 그리고 종복 둘을 남겨 정암의 시신을 돌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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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 |
중종 15년 |
1520년 (庚辰) |
◙아들 지돈(知遯)이 태어나다. ◙봄에 정암의 체백을 용인으로 보내 장례를 치르었다. 이 때 학포는 화병으로 장례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여름에 정암을 위해 죽수사(竹樹祠)를 지었다. |
․11월에 승지 한승정(韓承貞)에 의해 논척(論斥)을 당하다. |
34세 |
중종 16년 |
1521년 (辛巳) |
◙넷째 아들 응필(應畢)이 태어나다. ◙학포당(學圃堂)을 건립하다. 조정에서 기묘 여당(餘黨)에 대한 옥사가 계속되지 학포는 세상일에 뜻을 끊고 깊이 몸을 숨겨 감추고 쌍봉 마을의 시내 위에 정자를 짓고 은행나무를 심었으며 정자에는 ‘학포’란 액호를 붙여 정신과 마음을 수양하는 곳으로 삼았다. 그리고 ‘춘산계은사(春山溪隱辭)’를 지어 자기 심중을 표현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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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4세 |
중종 16년 |
1521년 (辛巳) |
◙김정(金冲庵) 기준(奇服齋) 두 사람이 후명(後命)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설위(設位)하여 곡하다. ․설위(設位) : 위패를 차려놓음 |
․후명(後命) : 귀양살이를 하던 죄인에게 사약을 내리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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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 |
중종 17년 |
1522년 (壬午) |
◙자암 김구(自庵 金絿)의 남해 비소(匪所)로 시를 부치다. ◙생도들을 사절하여 돌려보내다.
학포는 스스로 근신하는 마음을 지녀 집 뜰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러나 남도의 학도들이 제자가 되어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자가 많았는데 모두 사절하여 보내면서 --중략-- “기왕에 배운 것이나 존중하게 여기고, 알았던 것이나 행하면 되는 것이지 나의 문전에 올 것이 없네” 라고 하였다.
◙장흥(長興=冠山)의 적소(謫所)에 찾아가 영천 신원량 잠(靈川 申元亮 潛)을 만나다. |
․비소(匪所) : 유배지(流配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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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
중종 18년 |
1523년 (癸未) |
◙다섯째 아들 응덕(應德)이 태어나다. ◙남해로 가서 김자암을 만나고 서회시(敍懷詩)를 주고 받다. ◙신제 최산두(新齋 崔山斗)가 찾아오다. ◙음애 이자(陰崖 李耔)를 곡하다. ◙귤정 윤구(橘亭 尹衢)가 찾아오다. |
․서회시(敍懷詩) : 품은 생각을 말로 나타낸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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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
중종 19년 |
1524년 (甲申) |
◙신영천(申靈川)에게 시를 보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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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38세 |
中宗 20년 |
1525년 (乙酉) |
◙아들 지명(知命)이 태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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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
중종 22년 |
1527년 (丁亥) |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 형조 정랑(刑曹 正郞)에 배하였으나 모두 취임하지 아니하다.
◙은사인 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을 영광에서 만나다. 관수정(觀水亭)에 시를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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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세 |
중종 23년 |
1528년 (戊子) |
◙11월 모 부인(母夫人)의 상사(喪事)를 당하다.
모 부인은 해주 최씨(海州 崔氏)로 사직(司直) 증 좌통례(贈左通禮) 혼(渾)의 따님으로 문헌공 최충(文憲公崔冲)의 후손이다. 뒤에 숙부인으로 추증되다.
․숙부인(淑夫人) : 조선시대 외명부의 한 품계. 정3품 당상관의 아내의 칭호 |
․모 부인(母 夫人 : 어머니
․사직(司直) : 조선시대 5위(五衛)에 속하던 정5품 벼슬
․좌통례(左通禮) : 조선시대 통례원의 으뜸 벼슬로 예식에 관한 일을 담당하던 정3품의 관원 |
42세 |
중종 24년 |
1529년 (己丑) |
◙정월에 모 부인(母 夫人) 최씨(崔氏)를 호동(虎洞) 뒷산에 장사하고 승지공의 묘에 부장(祔葬)하다.
◙휴암(休庵) 백사위(白士偉, 仁傑)가 찾아오다. |
․호동(虎洞) : 현재 화순군 도곡면 신성리
․부장(祔葬) : 합장 |
43세 |
중종 25년 |
1530년 (庚寅) |
◙2월에 모친상을 탈상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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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44세 |
中宗 26년 |
1531년 (辛卯) |
◙봄에 용성(龍城 : 현 남원시 금지면 택내리)으로 가서 안사제당 처순(安思齊堂 處順)을 만나다.
한 달이나 머물면서 경의(經義)를 토론하고 군자와 소인의 소장(消長)의 이치(理致)를 논하다. |
․군자(君子) : 학문과 덕이 높고 행실이 바르며 품위를 갖춘 사람 ․소인(小人) : 도량이 좁고 간사한 사람 |
46세 |
중종 28년 |
1533년 (癸巳) |
◙봄에 은서(恩敍)하였으나 취임하지 아니하고 병을 핑계로 도외시하다.
심정․이항․김극폭 등 삼간(三奸)이 죽은 뒤 수찬 구수담(修撰 具壽聃). 이준경(李浚慶) 등이 입대(入對)하여 기묘당인들이 아무 죄 없이 오랫동안(14년) 쫓겨 나 있으니 그들을 수서(收敍)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비로소 깨닫고 귀양 간 김구․박훈․최산두를 먼저 놓아 주고, 김정국․권발․구수복․윤세호․이사균․공서린․장옥 및 학포 등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학포는 명에 응할 생각이 없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주상께서 비로소 깨달아 선류(善類)들을 다시 복직시켜 주시는데 어찌 한번 나가서 포부를 펴 볼 생각을 안 하는가?” 하였다. 학포는 말하기를 “내가 세상에 큰 죄를 받은 사람인데 무슨 면목으로 다시 나아간단 말인가?” 하고 드디어 병을 핑계하여 나서지 않 |
․은서(恩敍) : 은총을 내려 등용함
․입대(入對) : 임금 앞에 나아가 임금의 자문에 응하던 일
․기묘 당인(己卯 黨人) : 기묘에 화를 입은 사람 들
․수서(收敍) : 관직에 등용
․선류(善類) : 착한 사람들 즉 기묘당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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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46세 |
중종 28년 |
1533년 (癸巳) |
고 더욱 몸을 감추고 그대로 일생을 마치려는 듯 했다.
그러다가 김안로(金安老)가 득지(得志)하여 의정 김근사(議政 金謹思)를 사주하여 「수용(收用)의 의론(議論)」을 저지함으로써 정광필은 김해로 귀양을 가고 구수복은 용천(龍川)으로 귀양을 가고 나머지도 모두 내쫓기니 학포만이 홀로 화를 면했다. 사람들이 학포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
․득지(得志) : 바라던 것이 뜻대로 됨
․「수용(收用)의 의론(議論)」 : 임금이 기묘 당인을 복직시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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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 |
중종 29년 |
1534년 (甲午) |
◙신영천(申靈川)이 찾아오다. ◙이 해에 증정부인 금산김씨(贈貞夫人 錦山金氏)가 돌아가니 능성현 쌍봉의 중조산(中條山)에 장사 지내다. ◙김자암(金自庵)의 부고를 받고 글을 지어 곡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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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 |
중종 30년 |
1535년 (乙未) |
◙안사제당(安思齊堂)을 곡하다. 늦게야 부음(訃音)을 듣고 용성(龍城)으로 갔다가 사제당(思齊堂)에 차운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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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세 |
중종 31년 |
1536년 (丙申) |
◙부인(夫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를 맞이하다. ◙학포가 ‘제협서율부’(除挾書律賦)를 짓다.
그 이유는 기묘 이후 권력을 탐하는 간신들이 사림을 참예(斬刈)하니 소․대학(小․大學) 책을 금(禁)하게 하는 것이
․청주 한씨(夫人 淸州韓氏) : 학생 한효공(學生 韓孝恭)의 딸 |
․‘제협서율부’(除挾書律賦) : 협서(挾書) : 책을 옆에 끼다. 즉 협서에 대하여, 학문을 열심히 못하게 함에 대하여 논한 글
․참예(斬刈) : 칼로 목을 뱀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49세 |
중종 31년 |
1536년 (丙申) |
되어 감히 선인(先人)들의 학문을 말하지 못하게 되었고, 조금이라도 언행을 가다듬는 선비가 있으면 ‘기묘의 여당(餘黨)’이라 말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선비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고 도의가 상실되니 학포가 개탄하여 부(賦)를 짓고 미의(微意)를 부치다.
◙최산두(崔山斗)를 곡하다.
학포가 최공(崔公)과 더불어 경연(經筵)의 옛 동료로서 언제나 함께 시강(侍講)을 했으며 당화가 일어났을 때에도 같이 척출(斥黜)을 당했으므로 그가 작고하자 학포가 유독 통석(痛惜)해 하였다. |
․여당(餘黨) : 잔당
․미의(微意) : 자기의 마음이나 성의를 겸손하게 이르는 말
․척출(斥黜) : 벼슬을 때어 내 쫓음
․통석(痛惜 : 몹시 애석함 |
51세 |
中宗 33년 |
1538년 (戊戌) |
◙2월에 관작(官爵)이 회복되고 경연(經筵)의 명(命)이 있었으나 부임(赴任)치 아니 하다.
정유일(丁酉日)에 대사헌 양연(梁淵)과 대사간 김희열 (金希說)이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 삼흉을 탄핵(彈劾)하여 사사되었고, 12월에 관학(舘學) 유생 이충남(李冲南)․윤희성(尹希聖) 등이 상소하여 기묘 제현들의 억울함을 진술하여 그 말이 극히 절실하니 왕이 이 상소문을 대신들에게 보여주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
․경연(經筵)의 명(命) : 왕세자(王世子)의 강관(講官)
․탄핵(彈劾) : 조선시대 사헌부나 사간원 관원들이 정치의 잘못이나 벼슬아치의 비행 따위를 들어 논박하는 일
․관학(舘學) :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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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51세 |
中宗 33년 |
1538년 (戊戌) |
‘김안국은 서용(敍用)을 하고 양팽손 이약빙 김정국 신광한 유인숙 박영 이청 등은 직첩(職牒)을 되돌려 주는 것이 옳겠노라’ 하였다. 이에 이조가 불치사판(不齒仕版)되고 파직되어 직첩이 거두어졌던 사람을 관료명부에 다시 기록하였으며, 또 다시 전교하기를 “전 교리 양팽손에게 직첩을 돌려주는 것이 옳겠노라” 하니 이에 학포는 관작이 회복된 것이요, 또 곧 경연관의 명이 내린 것이다.
◙여섯째 아들 응국(應國)이 태어나다.
◙운정 정상공 광필(雲汀 鄭相公 光弼)을 곡하다.
정공(鄭公)의 부음이 이르자 학포가 목이 쉬도록 곡을 하며 “우리들이 화를 당했을 적에 정상공(鄭相公)이 힘써 구해주지 않았던들 조정암 김충암 등 제공(諸公)이 반드시 장사(杖死)를 면하지 못했을 것이요, 우리들 역시 간신들의 모함으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애통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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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敍用) : 조선시대 면관(免官) 당하였던 사람을 다시 임용하던 일
․직첩(職牒) : 조정에서 벼슬아치에게 내리던 임명장
․불치사판(不齒仕版) : 관료명부에서 삭제됨
․장사(杖死) : 곤장을 맞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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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51세 |
중종 33년 |
1538년 (戊戌) |
◙8월에 사헌부(司憲府)의 계척(啓斥)을 당하다.
학포가 누차 은서(恩敍)를 받고도 응하지 않으면서 초야에 묻혀서 끝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자 조의(朝議)에 거슬리게 되어 권간(權奸)이 헌부(憲府)를 사주(使嗾)하여 계(啓)하기를 “예조정랑 양팽손이 패려(悖戾)한 일이 많으니 청컨대 파직을 하소서” 하였다.
․패려(悖戾) : 도리에 어그러짐 |
․계척(啓斥) : 물리칠 것을 올린 글 ․조의(朝議) : 조정의 의논 ․권간(權奸) : 권력을 가진 간신 ․사주(使嗾) : 남을 부추김 ․계(啓) : 웃 사람에게 올리는 글 |
52세 |
중종 34년 |
1539년 (己亥) |
◙낙안(樂安) 백현(栢峴)에 집을 짓다.
학포가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전장(田庄)도 두었는데 외손인 무안 정운(務安 鄭澐)이 그 유업을 전해 받았고 호군(護軍) 김천희(金天禧)가 또다시 정운(鄭澐)의 외손이 되어 거기에서 살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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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현(栢峴) : 우리말로 ‘잣고개’인데 이는 현재의 벌교읍 척령(尺嶺) 임. ․전장(田庄) : 논과 밭 ․호군(護軍) : 조선시대. 오위(五衛)에 속해 있던 정4품 무관 벼슬 |
53세 |
中宗 35년 |
1540년 (更子) |
◙아들 응태(應台) 응정(應鼎)이 사마과(司馬科)에 함께 합격하다. ◙강수 박훈(江叟 朴薰)을 곡하다 |
․사마과(司馬科) :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의 시험(試驗) |
54세 |
중종 36년 |
1541년 (辛丑) |
◙정월에 헌부(憲府)의 계척(啓斥)을 당하다.
헌부(憲府)가 아뢰기를 ‘영덕(盈德) 현령 양팽손은 백성을 다스리게 해서는 안 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했으나 윤허(允許)하지 않았다. |
․중종 33년 관작 회복이후 왕으로부터 여러 직첩이 내려졌으나 불취하였기 때문, 문집에는 학포에게 영덕현령을 제수했다는 기록이 빠져있다. |
연령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 고 |
58세 |
인종 원년 |
1545년 (乙巳) |
◙7월에 인종(仁宗)이 승하하니 능성현의 마당에 들어가 몹시 슬퍼하다.
◙8월 18일에 학포당(學圃堂)에서 고종(考終)하다. 학포가 자주 흉계(凶啓)에 올랐지만 힘써 그것을 외면하면서 왕의 보살핌에 만 분의 일도 보답하지 못하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임금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다짐하지만 조정과 왕실에 간신들만 득실거리는 어려움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두 임금마저 연달아 승하하심에 놀라고 애통하여 울부짖으며 식음을 폐하다가 그 길로 병을 얻자 8월 17일에 이르러 문하생 수인(數人)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학포는 이튿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세수를 하고 새 옷을 갈아입더니 얼마 안 되어 베개에 의지하여 돌아가니 고이 잠든 것 같은 모습이었다.
◙10월 능성현 쌍봉의 중조산 손좌원(巽坐原)에 장사지내다.
◙금산김씨부인(錦山金氏夫人)과 합폄하다
◙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이 와서 조상(弔喪)하다. |
․고종(考終) : 제 명대로 살다 죽음
․흉계(凶啓) : 기묘 당인을 모함하여 임금께 올리는 글
․손좌원(巽坐原) : 동남쪽을 등지고 앉은자리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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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서거(逝去) 후(後)
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33년 |
선조 11년 |
1578년 (戊寅) |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弘文館 提學 禮文館 提學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를 증직하다.
셋째 아들 응정(應鼎)이 귀하게 됨으로써 조정에서 추증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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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 |
선조 12년 |
1579년 (己卯) |
◙증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돌아가다.
학포의 묘 좌측에 장사하다.
|
․정부인(貞夫人) : 조선시대 외명부의 한 품계. 정2품, 종2품인 문․무관의 아내의 칭호 |
85년 |
인조 8년 |
1630년 (庚午) |
◙죽수서원에 정암과 함께 배향하다.
학포가 정암을 위하여 중조산 아래 서원동에 죽수사를 지었고(서기 1520년), 그 후 50년 뒤인 선조 3년(서기 1570년)에는 사림들이 고을 동쪽 연주산 아래 천일대로 옮겨 짓고, 죽수서원으로 사액이 되었는데 이때에 와서 사림들이 조정에 청하여 학포를 함께 모시게 되었다. 사계 문원공 김장생(沙溪 文元公 金長生)이 일찍이 말하기를, “양학포선생은 정암선생과 사우(師友)의 의(誼) 가 있고, 그리고 조선생이 이곳에 귀양온 일도 또한 우연(偶然)한 것이 아니오, 또 뜻도 같고 화(禍)도 같이 당했으니 사후에는 |
|
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85년 |
인조 8년 |
1630년 (庚午) |
원(院)도 같이 한다는 것이 실로 우견(愚見)에도 합합니다.” 하였다. 이에 사림이 조정에 청하였기 때문에 배향하도록 하였다. 천일대에 각하여진 바로는 「정암 학포의 죽수서원 유지(遺址)」라고 되어있다. |
․우견(愚見) : 남 앞에서 자기의 의견을 낮추어 이르는 말
|
130년 |
숙종 원년 |
1675년 (乙卯) |
◙우급(禹及)이 묘비를 다시 세우다. 명종 2년(정미, 서기 1547)에 세웠던 묘비를 학포의 5대손 전라병사 우급(禹及)이 강화도에서 가져온 돌로 이때에 다시 세웠다. 또한 학포와 부 이하(以河) 조부 담(湛) 등 3대의 비도 함께 세우고, 문답 20두락을 장만하여 문중에 헌납하였다. |
․우급(禹及)의 세계는 학포의 5남 즉 응덕(應德) ↓ 산항(山抗) ↓ 철용(哲容) ↓ 일남(一南) ↓ 우급(禹及)이다
|
135년 |
숙종 6년 |
1680년 (庚申) |
◙가장(家狀)이 이루어지다. 가장가학가장가장가장을 지은 것은 학포의 현손 세남(世南)이다. 이에 앞서 학포의 3자 응정(應鼎)이 류미암 희춘(柳眉巖希春)으로부터 행장을 받고 조남명 식(曺南溟植)으로부터 묘갈명을 받고 이귀암 정(李龜巖楨)으로부터 묘지를 받았는데 정유재란 때 모두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이 때에 와서 다시 현손 세남(世南)이 가장을 지은 것이다. |
․가장(家狀) : 한 집안 조상의 행적에 관한 기록 ․세남(世南)의 세계는 학포의 3남 즉 응정(應鼎) ↓ 4남 산축(山軸) ↓ 만용(曼容) ↓ 세남(世南)이다.
․산축(山軸)의 처는 고경명(高敬命)의 손녀이다.
․만용(曼容)은 정유재란 시 산축이 바다에 투신할 때 모친이 임신 중이어서 유복자로 태어남. 자손들이 그를 한림공(翰林公)이라 함 |
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227년 |
영조 48년 |
1772년 (壬辰) |
◙행장(行狀)이 이루어지다.
능주목사 무극재 양주익(无極齋梁周翊)이 지었다. 학포의 행장은 문절공(文節公) 미암(眉巖) 류희춘(柳希春)이 지었으나 정유재란 때 잃어 전해지지 못하여 학포의 8대손 달인(達仁) 달현(達顯)이 현손 세남(世南)이 지었던 가장(家狀)을 바탕으로 다시 무극제에게서 받았다. |
․행장(行狀) :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일생의 행적을 기록한 글
․능주목사 무극재 양주익(无極齋梁周翊)은 본관이 남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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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년 |
영조 51년 |
1775년 (乙未) |
◙호남 유생 생원 남언극(南彦極) 등이 상소하여 시호를 청하다. |
|
240년 |
정조 9년 |
1785년 (乙巳) |
◙신도비가 이루어지다. 비문은 이계 문헌공 홍양호(耳溪 文獻公 洪良浩)가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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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년 |
순조 3년 |
1803년 (戊辰) |
◙호남 유생 유학(幼學) 송규(宋鍷) 등이 상소하여 시호를 청하였으나 뜻을 관철하지 못하다 |
․유학(幼學) : 벼슬을 하지 아니한 유생을 이르던 말 |
276년 |
순조 21년 |
1821년 (辛巳) |
◙순천의 선비들이 용강(龍岡)에 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이 용강서원에 학포와 함께 그의 증손 부사(府使) 장춘(長春, 梁信容)을 배향하다. |
․부사(府使) : 조선시대 종2품의 외직 |
295년 |
헌종 6년 |
1840년 (更子) |
◙학포집(學圃集)을 만들다.(1, 2차)
학포의 12대손 박매(博山) 출신 즙(楫)이 2년에 걸쳐 월곡에 기거하면서 경자(1840) 신축(1841) 연이어 두 번을 활자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
․한양 조형복(趙亨復) 신재식(申在植)이 서문을 쓰고, ․박기수(朴綺壽)와 10대손 찬영(纘永), 12대손 즙(楫)이 발문을 쓰다. |
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297년 |
헌종 8년 |
1842년 (壬寅) |
◙3월에 호남 유생 진사 기상풍(奇象豊) 등이 상소하여 정경을 증하고 절혜의 전을 베풀어 줄 것을 다음과 같이 청하다.
이조판서 김도희(金道喜)가 아뢰기를 “증 참판 양팽손은 도학의 연원이 문정공 조광조에게서 나왔고, 경연에서 강학을 할 때에는 기준 박세희 최산두와 더불어 공(功)을 같이 하였으며 죽기를 무릅쓰고 정쟁(廷諍)을 하여 사(邪)를 누르고 정(正)을 붙잡기는 정응(鄭譍)과 상소를 같이 했고 당고삭탈에는 최숙생(崔淑生)․이자․김안국과 더불어 그 화를 같이 받아 시종 한결같은 절의를 지켰으니 바로 옛날 송나라 때의 「원우의 당적」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 스승인 효헌공 송흠(孝憲公 宋欽)이 우리 동방에 도를 전할 사람으로 기대를 했고 동년인 조광조도 말하기를 ‘내가 양동년을 보면 마치 지초 난초의 향기가 그에게서 풍긴 듯 한다.’하였고, 문익공(文翼公) 정광필도 크게 치하를 하며 ‘옥당(玉堂)의 조제(調劑)하는 책임이 큰데 이제 양학사(梁學士)를 보니 내가 걱정이 없다.’하였고, 또 경학(經學)으로 천거를 하여 영관(瀛舘)에도 오르게 되어 기준 박세희 최산두 등과 더불어 낮이나 밤이나 시강(侍講)을 하 |
․정쟁(廷諍) : 조정에서 남의 잘못을 간함
․사(邪) : 바르지 아니한 일
․정(正) : 바른 일
․당고삭탈(黨錮削奪) : 기묘 당인을 폐출하여 가두고 벼슬을 빼앗는일
․절의(節義 : 의리를 지키어 한번 품은 뜻을 바꾸지 않는 일
․원우(元祐) : 宋나라 哲宗(1056~1093)의 연호, 어린 철종을 도와 재상이 된 사마광(司馬光)이 前 재상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모두 폐지하고 구법(舊法)으로 대체하여 국정을 운영하자 그를 ‘원우(元祐)의 재상’이라 불렀고, 그러다가 몇 달이 안 되어 사마광이 죽자 그를 따르던 자들은 ‘원우(元祐)의 당적(黨籍)’에 올라 냉대를 받았으나 북송말(北宋末)부터 명신(名臣)으로 추존을 받은 사실조제(調劑) : 왕을 도와서 바르게 이끄는 일
․옥당(玉堂) : 영관(瀛舘) : 홍문관 |
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297년 |
헌종 8년 |
1842년 (壬寅) |
였으니 세상에서 말하는 ‘경연(經筵)의 4학사’가 이분들입니다. 기묘의 제현들이 신원(伸寃)이 되고 포상되고 현양(顯揚)된 분이 전후해서 한 두 분이 아니니, 예컨대 안당․이자․김안국․박세희 같은 분이 모두 작시(爵諡)의 증을 받았는데도 양팽손만이 홀로 은례(恩例)에서 빠져 밝은 시대의 흠전(欠典)이 되지 않을까 하옵니다. 이는 아첨하는 말이 아니라 실로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 정경(正卿)의 벼슬을 증해 주시고 절혜의 전(典)도 허락해 주옵소서. 정경은 높은 벼슬인데 갑자기 가증(加贈)을 해 준다는 것은 실로 어려울 일이고 신중해야 할 줄로 압니다마는 기묘 제현들이 거의 다 포양(襃揚)의 전을 받았는데 양팽손같은 깊은 학문과 훌륭한 절행을 가지고 홀로 이렇게 빠지고 있으니 사림의 공론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정경으로 가증해 주는 것이 실로 사의(事宜)에 합당한 줄로 압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수학(邃學)과 명절(名節)로써 홀로 이렇게 빠졌으니 사림의 공론이 있음은 당연하다. 정경으로 가증을 함이 사의(事宜)에 합당하다는 것을 복계(覆啓)하여 판정을 내리노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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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伸寃) :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
․현양(顯揚) : 이름이나 지위 따위를 드러내어 드날림
․작시(爵諡) : 벼슬과 시호
․은례(恩例) : 은혜를 받은 예
․흠전(欠典) : 흠의 본보기
․가증(加贈) : 조선시대 벼슬한 사람이 죽은 후 나중에 공이 인정되면 벼슬을 더 높여 주는 제도
․포양(襃揚) : 칭찬하여 장려함
․수학(邃學) : 학문의 깊이가 심오함
․명절(名節) : 명분과 절의
․복계(覆啓) : 계(啓)에 답(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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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297년 |
헌종 8년 |
1842년 (壬寅) |
◙5월에 조정에서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資憲大夫 吏曹判書兼知 經筵 義禁府事 弘文館 大提學 禮文舘 大提學 知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都摠管) 을 증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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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9년 |
헌종 10년 |
1844년 (甲辰) |
◙7월에 호남 유생 진사 류치영(柳致榮) 등이 상소 하여 시전(諡典)을 청하다.
◙10월에는 예조판서 서좌보(徐佐輔)가 아뢰기를 증 이조판서 양팽손에게 역명(易名)의 전을 내려달라는 일로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양팽손은 수학명절(邃學名節)이요. 기묘 제현과 더불어 똑같이 탁월하여 이미 정경의 벼슬을 가증했는데, 많은 선비들이 또 역명을 청하니 공론이 오랫동안 안타까워했음을 알 수 가 있습니다. 절혜의 전을 내리심이 사의(事宜)에 합당한 줄로 압니다.” 하였다. 전교하기를 “초기(草記)해 올린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역명(易名) : 시호(諡號)
․초기(草記) : 초고나 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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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년 |
헌종 12년 |
1846년 (丙午) |
◙시장(諡狀)이 이루어지다.
시장을 지은이는 경산 문충공 정원용(經山 文忠公 鄭元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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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308년 |
철종 4년 |
1853년 (癸丑) |
◙묘지명(墓誌銘)이 이루어지다. 묘지명을 지은이는 송사 기공 우만(松沙 奇公 宇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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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년 |
철종 14년 |
1863년 (癸亥) |
◙시호를 ‘혜강(惠康)’이라 내리다.
‘부지런하고 사(私)가 없으므로 혜(惠)라하고 연원(淵源)이 유통(流通)하므로 강(康)이라 한다.’ 즉 「시근무사왈 혜, 연원유통왈 강(施勤無私曰 惠, 淵源流通曰 康)」이라 하여 ‘혜강(惠康)’으로 하다. |
․연원(淵源) : 근원 ․유통(流通) : 잘 흐름 |
352년 |
고종 34년 |
1897년 (丁酉) |
◙또 신도비(神道碑)를 다시 만들어 세우다.
구비(舊碑)의 비문이 정경과 절혜가 내리기 전에 쓰여졌던 까닭에 비문을 새롭게 다시 지어 세우게 되었다. |
연제 송문충공 병선(淵齊 宋文忠公 秉璿)이 찬(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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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7년 |
고종 39년 |
1902년 (임인) |
◙학포당 유지비와 서원동 유지비를 세우다.
학포당이 없어진 터와 서원동 터를 잊지 않기 위해 두 비를 세우고 그 비문을 모두 찬정 면암 최공 익현(贊政勉菴崔公益鉉)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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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비를 모두 학포의 13대손 재경(在慶)이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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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4년 |
순종 3년 |
1909년 (己酉) |
◙죽수서원유허비를 세우다.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진 죽수서원의 터를 잊지 않기 위해 쌍봉 사는 13대손 재경(在慶)이 세우다. 비문을 심석재 송공 병순(心石齋宋公秉珣)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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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367년 |
일제 강점기 |
1912년 (壬子) |
◙묘표(墓表)가 이룩되다. 판서 조공 종필(趙公鍾弼)이 지었다.
◙용강서원 유허비를 세우다. 비문은 송사 기공 우만(松沙奇公宇萬)이 지었다. |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
369년 |
일제 강점기 |
1914년 (甲寅) |
◙3차 문집이 만들어지다.
13대손 재경(在慶)이 월곡의 14대 종손 회원(會源)의 협력으로 연보를 첨부한 문집을 쌍봉에서 판각으로 간행하다. |
한산조종필(漢山趙鍾弼)이 발문을 쓰다. |
377년 |
일제 강점기 |
1922년 (壬戌) |
◙학포당이 중건되다.
학포의 14대손 회락(會洛)에 의해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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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 년 |
일제 강점기 |
1940년 (庚辰) |
◙4차 문집이 만들어지다.
월곡의 종가에서 회규(會奎)가 재형(在亨)의 협력으로 문집을 간행하였다. 이때 학포가 조정에 있을 때의 사적을 이조실록에서 뽑아 증보하였는데 이 힘든 일을 10년에 걸쳐 학포의 14대손 모산사람 정제(正齊) 회갑(會甲)이 하였고 또 그의 친필로 판각하여 인출하였다. |
홍경모(洪敬謨)가 서문을 쓰고 안동김영한(安東金寗漢)이 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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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년 |
일제 강점기 |
1942년 (壬午) |
◙5차 문집이 만들어지다.
학포의 16대손 월곡사람 동욱(東旭)이 증보한 문집을 간행하다. 4차 간행본에 행장과 죽수서원 정향축문 등 2편만 추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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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410년 |
대한 민국 |
1955년 (乙未) |
◙학포의 묘비를 개수(改竪)하다.
1675년 5대손 우급(禹及)이 세웠던 묘비를 280년 지난 이 해 3월 14대손 회숙(會淑)이 도유사가 되어 세 번 째 다시 세우다. |
․개수(改竪) : 다시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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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6년 |
대한 민국 |
1971년 (辛亥) |
◙4월 23일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에 죽수서원을 다시 세우다.
능주의 유림과 양씨 후손들은 애석하게 철폐된 죽수서원을 다시 건설할 것을 결의하여 도유사에 양회인(梁會仁)․총무에 양재술(梁在述)․장재(掌財)에 양재진(梁在珍)․감사에 양회윤(梁會潤) 제씨를 선임하여 1960년에 기공한지 11년만인 이날 준공하여 예성(禮成)을 보게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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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년 |
대한민국 |
1985년 (乙丑) |
◙학포당을 중수하다.
전라남도 문화재 즉 지방기념물 제 92호로 지정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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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년 |
대한 민국 |
1990년 (庚午) |
◙4월 29일 월곡 종가에 부조묘(不祧廟)를 중수하고 환안제(還安祭)를 지내다. 이때 경장각 종회각도 함께 중수하였다.
․환안제(還安祭) : 옮겨 놓았던 신주를 다시 제자리에 모심 |
․부조묘 중수 위원회 회장은 學承, 부회장은 會石, 총무는 東超, 간사는 達承이었다. ․환안제의 사회는 東琦가 보았다. |
446년 |
대한 민국 |
1991년 (辛未) |
◙죽수서원을 월곡에서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천일대(天日臺)의 옛터에 원지 복설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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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7년 |
대한 민국 |
1992 (壬申) |
◙2월 화순문화원에서 학포양팽손문집을 국역하여 발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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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후 |
왕조 |
서기 |
사 적(事 績) |
참고 |
448년 |
대한 민국 |
1993년 (癸酉) |
◙1월 1일 학포 관련 병풍을 만들다.
학포의 15대손 쌍봉 출신 용승(湧承)이, 학포의 16대손 순천의 경희한의원 원장 동식(東植)이 일본의 동경박물관에서 촬영해 온 병풍으로 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와 또, 국립중앙박물관의 산수도 그리고 산수매죽도 연지도 교지 친필 등을 복사하고 학포의 약사와 함께 기술한 것을 8폭병풍(14面, 360×154㎝)으로 제작하여 문중의 희망자들이 소장하도록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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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국역학포집’이 만들어지다.
5차 간행본을 바탕으로 16대손 쌍봉 출신 동일(東日)이 이백순(李栢淳)의 번역으로 국역 문집을 중간하다. |
14대손 회순(會洵)이 서문을 쓰고, 이백순(李栢淳)이 발문을 쓰다. | |||
455년 |
대한 민국 |
2000년 (庚辰) |
◙영모재(永慕齋)를 중수(重修)하다.
쌍봉 후손들이 주동이 되어 낡고 훼손된 제각을 중수하고 경내를 정비하고, 신도비(구비)를 원위치에서 30여m 왼쪽으로 옮겨 세웠다. 이 일을 주동한 사람은 16대손 동일(東日)이었다. 후손과 일부 특지가들이 모금한 6천만원과 자신이 5천만원을 부담하여 약 1억 1천만원을 들여 음력 10월 5일 시제일에 준공을 보았다. 그리고 준공식과 제수 비용 등을 자신이 추가 부담하고 나니 총 비용이 약 1억 2천만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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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학포의 배위(配位)1)
학포의 배위는 17세에 혼인하여 본가를 지켜 온 증정부인(贈貞夫人) 금산김씨(錦山金氏)와 47세에 사별하고, 이어서 49세에 맞이한 증정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가 있었으며, 도학정치라는 청운의 뜻을 펴기 위한 한양의 관직생활 4년(29세~32세)과 쌍봉의 학포당 은둔 시절 26년(32세~58세)을 가장 가까이서 보살펴준 증정부인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있었는데 다음은 그 분들을 조사한 것이다.
(1) 금산김씨(錦山金氏)
‘학포는 연산군 10년(갑자, 서기 1504)에 17세에 학생 김섬(金銛)의 딸이고 진사 김경행(金敬行)의 손녀이고, 금산군(錦山君) 김신(金侁)의 후손인 증정부인 금산김씨(錦山金氏)와 혼인하다.’고 연보에 기록되어 있다. 금산김씨의 외조부는 장수현감(長水縣監) 경주인(慶州人) 이재인(李在仁)이다.
증정부인 금산김씨는 전남 곡성군 삼기면 금반리 출신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거기에는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후손으로 전남 곡성군 삼기면 금반리(全南 谷城郡 三岐面 金盤里) 김영현(金永賢, 061-362-2270)과 광주시 북구 각화동 금호타운 3동 503호 김영의(金永義, 062-266-6902)를 통해 확인하였다.
김섬(金銛)은 금산군(錦山君) 신(侁)의 8세손으로 2남 2녀를 두었는데 큰 아들은 희안(希顔)이고 작은 아들이 희증(希曾)이다. 큰 사위는 양팽손(梁彭孫)이고 작은 사위는 손대로(孫大老)이다.
증정부인 금산김씨는 학포와 혼인하여 월곡으로 시집 온 이후 만 30년 동안 5남 2녀를 낳아 훌륭하게 키웠다.
(2) 청주한씨(淸州韓氏)
학포는 첫 부인 금산김씨의 3년 상을 마치고, 49세인 중종 31년(병신, 서기 1536) 청주인(淸州人) 학생(學生) 한효공(韓孝恭)의 딸 증정부인(贈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청주한씨는 1남을 낳았고, 학포가 서거한 후에까지 월곡 본가를 지키며 가정의 모든 일을 맡아 처결하였다.
(청주한씨 친가의 자세한 내력은 아직 조사하지 못하였음)
(3) 김해김씨(金海金氏)
학포집의 연보에는 증정부인 김해김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렇지만 족보에는 김해김씨 부인의 기록이 있었다.
탐문 결과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금소동에 김해김씨 선조들의 묘와 제각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 매년 음력 10월 4일이 시제를 모시는 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날이 서기 2001년에는 양력으로 11월 18일 일요일이었다.
그 날에 쌍봉문회 총무인 학포의 14대손 회영(會榮), 쌍봉마을 15대손 필승(必承) 그리고 16대손 동일(東日) 회장 등 세 종친들을 모시고 김해김씨 시제에 참례하여 김해김씨 석성공파(石城公派) 선조 각위에 봉향할 때, 우리 일행도 김해김씨 외손의 자격으로 분향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석성공파 사손(嗣孫)으로부터 김해김씨 석성공파(石城公派) 가문이 증정부인 김해김씨의 친가임을 확인하였고, 김해김씨 부인의 친가가 다음과 같은 가계를 뿌리로 하고 있는 명문거족이었음도 알 수 있었다.
(가) 김해김씨의 쌍봉 입향(入鄕) 사유
옛날 가락국의 김수로왕의 51세손 목경(牧卿)의 벼슬은 금녕군(金寧君)으로 그 후손들을 사람들이 ‘경파(京派)’라 불렀다.
김수로왕의 56세손이요 금녕군(金寧君)의 5대손인 진손(震孫)의 벼슬은 호조판서이고 4남을 두었다. 장남이 영견(永堅)인데 좌익공신 이등(左翼功臣 二等)으로 참판공파(參判公派)의 파조이고, 차남은 영서(永瑞)로 횡성공파(橫城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또, 3남은 영정(永貞)으로 안경공파(安敬公派)의 파조이고, 4남은 영순(永純)으로 석성공파(石城公派)의 파조이다. 사람들은 이 4남인 석성공파를 ‘경4파(京四派)’라 하였다.
위의 영순(永純, 石城縣監)이 4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세응(世應), 차남 세보(世輔), 3남 세발(世潑), 4남 정(汀)이다.
위의 장남 세응(世應)의 벼슬은 호조좌랑(戶曹佐郞)으로 연산군 1년(서기 1495)에 당론에 불응하니 지금의 보성(寶城) 땅인 산양(山陽)으로 귀양을 오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웃 고을인 능성현 쌍봉의 수려한 산수를 보고 머물러 살게 되었다. 또, 자칭 일옹(逸翁)이라 하고 누차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호를 매정(梅亭)이라 하고 시를 지으며 살았다. 4남을 두었다. 장남은 견수(堅壽)인데 후손이 김해에, 차남은 종수(宗壽)로 후손이 경기도에, 3남은 경수(慶壽)로 대전과 해남 무안에 많이 살고 있으며, 4남은 명수(明壽)인데 벼슬은 의금부도사로 쌍봉 선영을 지켜왔다.
위의 명수(明壽)는 2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학(鶴)이고 차남은 홍(鴻)이다.
위의 학(鶴)은 2남 3여를 두었다. 장남은 조언(朝彦)이고 차남은 조망(朝望)이다. 조언(朝彦)은 벼슬이 금천현감(衿川縣監)을 거쳐 봉순대부동지중추부사까지 올랐다. 큰 사위는 제주인 양팽손(梁彭孫)으로 호는 학포요 벼슬은 홍문관교리 시호는 혜강(惠康)이다. 둘째 사위는 광산인 김우(金瑀)로 석성현감이며, 셋째 사위는 보성인 선국형(宣國衡)인대 벼슬은 영월군수이다.
위의 조언(朝彦)이 4남을 두었는데 장남이 인갑(仁甲)이요, 호는 오재(梧齋) 벼슬은 철산부사이며 증병조판서(贈兵曹判書)이다. 차남인 의갑(義甲)은 임진란에 충신이며 증병조참의이고, 3남은 예갑(禮甲)으로 임진란에 공을 세웠고, 4남은 지갑(智甲)으로 역시 임진란에 공을 세웠다. 인갑과 의갑 형제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 창의사 김천일 병사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참전하여 중과부적으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였다.
위의 인갑(仁甲)이 시엽(時燁)을 낳았는데 병자호란에 충신이니 증 승정원 우승지의 벼슬을 내렸다. 쌍봉에 나라의 특명으로 이들 삼충의 충신각(忠臣閣)을 세우도록 하였다. 지나가는 이들의 눈에 띄게 하여 그들을 본받게 하였다.
학포의 처가는 현금소동(現金巢洞)이라 전하고 있다. 당시 금소동에는 30여호가 거주하였으며 증리에서도 오재공(梧齋公) 후손들이 거주하였다. 또, 쌍봉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의 매정(梅亭) 마을의 대로변도 현재는 논과 밭으로 변하였지만 당시에는 김해김씨 후손들이 살았었다.
입향조인 세응(世應)의 후손들은 전국에 퍼져서 8만여명이 흩어져 살고 있다.
위의 사실을 제공한 사람은 전남 영암읍 서남리 109-1에 사는 여신당한약방(如神堂漢藥房 ☏061-473-2033) 김정태(金正泰)이다. 그는 수로왕의 73세요, 입쌍봉한 세응(世應)의 15대, 명수(明壽)의 14대 사손(嗣孫)이다. 그는 쌍봉의 ‘팔한지가(八漢之家, 학포의 집안)가 유배 당하여 풍비박산된 세응(世應)의 가솔을 돌보아주고 김해김씨 족보 및 김씨 집안의 문집 등을 보관했다가 되돌려 주었으며, 임란 후 능주 목사였던 박자원의 도움으로 석성공파(石城公派)의 족보와 문집을 만들 수 있었다.’고 증언해 주었다.
(나) 김해김씨 부인의 친가 계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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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卿(首露王 51世孫, 官은 金寧君, 世稱 京派)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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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世 |
57世 |
58世 |
59世 |
60世 |
61世 |
62世 |
63世 |
震孫----- |
-永堅(左翼 |
功臣二等, |
叅判公 |
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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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戶曹判書) |
-永瑞(橫城 |
公 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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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貞(安敬 |
公 派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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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純---- |
-世應---- |
-堅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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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城公 派祖) |
(戶曹佐郞) |
-宗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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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城縣監) |
(號 梅亭, 逸翁) |
-慶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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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謫山陽,入綾城) |
-明壽---- |
-鶴----- |
-朝彦---- |
-仁甲(號梧齋) |
-時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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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禁府都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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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衿川縣監) |
(贈兵曹判書) |
(贈承政院右丞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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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甲---- |
-時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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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軍器寺主簿) |
(贈兵曹參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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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禮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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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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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女(梁彭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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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人,弘文館校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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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次女(金 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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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光山人, 石城縣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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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女(宣國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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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寶城人, 寧越郡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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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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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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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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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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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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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쌍봉 마을 앞의 김해 김씨 충신각
쌍봉마을 앞의 김해김씨 충신각(忠臣閣)은 조선 선조 26년(서기 1593)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김인갑(金仁甲), 그의 아우 김의갑(金義甲) 그리고 조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전사한 김시엽(金時燁)의 충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김인갑(金仁甲)은 선조 23년(서기 1590)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 판관을 지냈으며, 김의갑(金義甲)은 역시 형과 함께 서기 1590년 무과에 급제한 후 바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터에 나가 싸웠다.
또, 김시엽(金時燁)은 김인갑(金仁甲)의 아들로 광해군 13년(서기 1621) 무과에 급제한 후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기 때문에 조정에서 이 각을 세우도록 하였다.
나라에서는 이들 3인은 각각 병조판서, 군기시 주부, 승정원 우승지로 추증하였다.
전남도에서는 문화재 자료 제 59호로 지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