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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80 |
복원된 죽수서원 신실(神室)
(전남 화순군 한천면 모산리 연주산 천일대)
․ 중종 15년(서기 1520) 학포가 증리에 죽수사 창건. 정암을 봉향(奉享)
․ 선조 3년(서기 1570) 유림들이 모산리 천일대로 이건. 사액(賜額). 정암을 봉향(奉享)
․ 인조(仁祖) 8년(서기 1630년) 김장생(金長生)과 사림의 건의로 조정에서 학포를 동향(同享)6)하도록 허락
(2) 심곡서원(深谷書院)
학포집에 학포가 정암을 방문하여 사우(師友)를 삼고 종유한 곳이 용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필자의 생각으로는 상현리가 정암의 생가이고 후손들이 이 마을에 많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정암의 생가가 한양이고 후손들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에는 거의 살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나서, 조정암의 묘와 심곡서원이 이곳에 있게된 연유를 알기 위하여 백방으로 조사하여 보았다. 조정암의 탄생지와 생가는 전술한 바와 같이 한양 땅 운니동이라는 것이 확실하고 경기도 용인과는 어떤 연관이 있어서 조정암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되었는지, 또 왜 심곡서원이 용인에 세워졌는지 용인시와 수지읍 관계자들에게 문의하였지만 바랐던 답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인 1987년 제주 양씨 문중에서 대표로 온 양회영(梁會英)7)이 심곡서원에 제위답(祭位畓)8)을 헌납하면서 당시 심곡서원 관계자들로부터 받아놓은 각서에 기록된 분들의 주소를 단서로 그 분들의 소재 파악에 들어갔다. 어렵사리 그분들의 전화번호와 소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는 80~90객이 되어 있었다.
원장(院長)이었던 용인군 용인읍 금양안리(龍仁郡 龍仁邑 金良安里) 254번지의 정운상(鄭雲象)씨는 이미 고인이 되었고, 총무였던 수원시 이의동(水原市 二儀洞) 196번지의 심춘택(沈春澤)씨는 찾을 길이 없고, 서한이었던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龍仁郡 水枝面 上峴里)의 한구석(韓龜錫)씨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전화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천만 다행히도 재무를 보았던 수원시 하동(水原市 下洞) 116번지에 살던 윤영기(尹永基)씨가 지금은 수지읍 상현동으로 이사하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갑게 응대해주는 그분으로부터 귀중한 증언을 듣게 되었다.
조정암이 청년시절(19세 무렵) 부친이 서거하자 이곳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에 묘를 조성하고 3년 간의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던 관계로 정암의 묘를 여기에 쓰게 되었고, 그러한 연유로 이곳 지방 유림들의 소망으로 심곡서원도 이곳에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정암의 부친인 조원강(趙元鋼)의 묘도 정암의 묘와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이다.
기묘사화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조정에서는 선조 9년(서기 1576) 역적의 수괴로 낙인 찍혀진 정암을 신원(伸寃)하여 영의정에 추증하고 다음 해에 ‘도덕이 있고 학식이 넓으며 올바른 도리를 행한다.’하여 그에게 ‘문정(文正)’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서원과 사묘(祠廟)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심곡서원에 관련한 내용은 용인시가 운영하고 있는 다음의 인터넷 싸이트에서 알아보았다.(http://city.yongin.gyeonggi.kr/tamgu/f_tamgu_in.htm)
조광조의 묘(墓)9)가 이곳 용인에 있었기 때문에 지방 유림들은 일찍부터 이곳에 서원을 세우기 위한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재력이 부족하여 서원을 설립하지 못하고 있다가 선조 9년(서기 1576) 이계(李棨) 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 유림들의 뜻으로 동방 이학의 비조(鼻祖)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10)와 그 도학적 법통을 이은 조광조 두 분의 묘소 중간 지점인 용인군 수지면 죽전리에 ‘죽전서원(竹田書院)’을 건립하고 두 분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 때 이 죽전서원(竹田書院) 건물이 불타버려 선조 28년(서기 1595) 지방 유림들의 공의로 정암의 묘소 아랫마을인 경기도 용인군 수지면 상현리 203번지에 심곡서원을 창건하여 조광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게 되었다. 그 후 효종 원년(서기 1650) 조정에서 ‘심곡(深谷)’이라 사액하고 53,341평의 전답을 하사하였다. 또 서기 1958년에는 유림들의 합의로 형제간의 혈육도 할 수 없는 의리를 행한 학포 양팽손을 추가 배향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심곡서원은 고종 5년(서기 1868)과 고종 8년(서기 1871) 두 번에 걸친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사액서원(賜額書院)11)이었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남아 있는 47개의 서원 중의 하나로서 그 명망을 유지해 왔고, 선현(先賢)의 제향(祭享)과 지방의 유교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던 것이다.
한편 선조 38년(서기 1605)에는 이정구(李廷龜)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현감 정종선(鄭從善)과 이시윤(李時尹) 등과 함께 논의하여 포은의 묘소 아래 즉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리에 충렬서원을 중수하고 포은을 배향하였다. 그 후 충렬서원(忠烈書院)은 ‘충렬(忠烈)’이라 사액되었으며, 정보(鄭保)와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심곡서원 건물로는 사우(祠宇)․일조당(日照堂)․재실(齋室)․장판각(藏板閣)․내삼문(內三門)․외삼문(外三門)․홍살문 등이 있다. 사우(祠宇)에는 조광조와 양팽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지붕의 좌우에 방풍판(防風板)을 달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일조당은 강당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합각(合閣) 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으며, 목판벽(木板壁)으로 각 칸마다 판자문비(板子門扉)를 달아 사면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일조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 및 유림의 회합과 학문의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정면 4칸, 측면 반 칸의 합각 홑처마로 된 서쪽에 재실(齋室)은 원생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지금은 개축하여 경기도 유림회 수지지회 사무실 및 서예교실로 쓰이고 있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로 된 동쪽의 장판각에는 67종 486책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5년에 도난을 당하여 《정암집(靜庵集)12)》․《조선사(朝鮮史)》등만 남아있었는데, 서기 2000년 필자가 방문하였을 때에는 이 것 마저 또 도난을 당하여 이제는 단 한 권의 책도 없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 삼간의 사당(祠堂)이 있고 정암과 학포를 함께 배향하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현재 매년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13)에 춘추제(春秋祭)를 지내고 있으며, 2001년 이후 정암의 16대손 조성달(趙成達)이 서원에 충효교실과 한문서예 학당을 연 후로는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양일을 택하여 분향을 하고 있다. 이 서원은 서기 1972년 5월 4일자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원내에 있는 수령 500년의 느티나무14)가 경기도 보호수 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서원에 소속된 재산으로는 전답 4,700평, 임야 약간 등이 있다.15)
서기 1958년부터는 여기에 학포를 추가 배향하게 되었는데 그 후, 서기 1987년 이후부터는 다음에 제시한 각서와 같이 두 분을 동배향(同配享)하여 춘추로 향사하기로 철석같이 약속하였다. 그런데, 아직도 두 분의 위패를 동열배향(同列配享)하여 봉향하지 않고 차일피일하면서 곡배각축(曲配各祝)16)으로 봉향하고 있다는 점이 매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정암의 제자라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정암집의 문생록에도 학포는 없다. 참고로 다음에 정암의 문생 33인을 조사 열거한다.
정암 문생록(靜菴門生錄) 기 준(奇 遵), 김광원(金光遠), 김대유(金大有), 나 식(羅 湜), 민 의(閔 義), 박세후(朴世煦), 박 소(朴 紹), 반석수(潘碩粹), 백인걸(白仁傑), 성수침(成守琛), 성수종(成守琮), 심광언(沈光彦), 안 담(安 曇), 양산보(梁山甫), 윤 관(尹 寬), 윤 변(尹 抃), 이 기(李 夔), 이연경(李延慶), 이희민(李希閔), 이충건(李忠楗), 이문건(李文楗), 장 잠(張 潛), 정 원(鄭 源), 정의손(鄭義孫), 정 환(丁 煥), 정 황(丁 熿), 조 욱(趙 昱), 조희윤(趙希尹), 최여주(崔汝舟), 허백기(許伯琦), 홍봉세(洪奉世), 홍순복(洪舜福), 홍 황(洪 遑) |
이런 일로 학포의 후손들이 2월과 8월에 올리고 있는 춘추제에 참여하여 아래 각서에서 약속한 대로 해 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합리적인 인사들은 동의하여 고치겠다고 하지만 편향적인 시각을 가진 쪽의 반대로 아직 바로잡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또, 춘추제에서 학포의 독축시(讀祝時)에 벼슬을 ‘증이조참판(贈吏曹叅判)’으로 하고 있는 데, 이 것은 학포의 벼슬이 선조 11년(서기 1578)에는 이조참판으로 증직되었고 다시 2차로 헌종 8년(서기 1842)에는 ‘이조판서(贈吏曹判書)’로 증직되었는데도 이를 확인하지 않고 행하고 있어서 이를 시정해 달라고 순천시 해룡면 출신으로 춘추제에 참례하고 있는 학포의 14대손 양회안(梁會安)이 요구하였으나 현재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에 제시한 각서에서는 영구히 양위(兩位)를 동배향(同配享)할 것을 약속한 각서(覺書)로 2매로 되어 있으며 사인펜으로 작성하였고, 크기는 B5로 관계자들이 서명(署名) 날인(捺印)하고 간인(間印) 하였다.
<원문을 그대로 이기 함>
覺 書 |
一. 龍仁郡 水枝面 上峴里 203番地 所在 深谷書院
二. 配享位 趙靜菴先生과 梁學圃先生과 同配享17)
三. 當 書院의 財産이 貧弱한 關係로 春秋 享祀가 어려웠던 次 梁會榮氏 門中에서 莫大한 協助를 하였음.
四. 等等 關係로 因하여 春秋 享祀의 配享을 永久히 存續할 것을 掌議會에서 決議하였고, 院長 以下 幹部 等이 署名 捺印함.
1987년 11월 20일
深谷書院
龍仁郡 龍仁邑 金良安里 254
院長 鄭雲象 印
水原市 二儀洞 196
總務 沈春澤 印
龍仁郡 水枝面 上峴里
財務 尹永基 印
水原市 下洞 116
書澣 韓龜錫 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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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상현리 20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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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 사당 내의 두 분 위패(位牌)18)
사당 내에는 정면에 ‘贈領議政文正公靜菴趙先生 神位’라고 쓰인 조정암의 위패, 그리고 우측면에 ‘學圃梁先生 神位’라고만 쓰인 학포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춘추로 두 분을 곡배각축으로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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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의 일소당(日照堂) 건물
심곡서원의 외삼문(外三門) 중 정문을 들어서면 마당 한 가운데 있는 건물로 지금도 여기에서 경기도 유림들이 후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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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의 일소당(日照堂) 뒷문의 문설주 위에 붙어 있는 현판
(3) 용강서원(龍岡書院)
이 서원은 조선 순조 21년(辛巳, 서기 1821)에 전남 순천시(順天市) 해룡면(海龍面) 중흥리(中興里)에 사론(士論)으로 ‘용강사(龍岡祠)’라 이름지어 처음 건립하고 양팽손과 양신용(梁信容) 양위(兩位)를 봉안하여 춘추로 향사하여 왔다.
그러다가 고종 5년(서기 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70년 사림과 후손들의 간절한 소망을 문중 도유사(都有司)를 맡고 있던 15대손 임승(壬承)19)과 득승(得承)20)의 주도로 중건하면서 현재의 순천시 금곡동(金谷洞) 256번지로 이건하였다.
양신용(梁信容)은 학포의 증손이고 학포의 장자인 응기(應箕)의 손자이다. 자는 경중(景仲). 호는 장춘(長春)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자신이 노쇠하여 참전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아들을 의병으로 보내고 자신은 해룡면 앵무산에 망성암(望聖菴)이라는 암자를 짓고 국권회복을 기원하였다. 아마 ‘망성암’이라는 암자도 ‘성상(聖上) 즉 임금을 바라보며 나라를 걱정하는 암자’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며, 후세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애국 충절을 기리고자 그를 ‘망성암공’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다음에 용강서원의 평면도를 실어 사명(祠名)과 문명(門名)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남 순천시 금곡동 256번지에 정남향으로 자리잡아 담장으로 빙 둘러 쌓인 서원의 외삼문인 지춘문(遲春門)21)을 들어서면 마당에 이가원(李家源)이 신해년(서기 1971) 7월 용강서원이라 쓴 현판이 붙은 강당 겸 거실이 있고, 마당 동․서쪽에 각각 동재와 서재가 살림집으로 쓰이고 있으며, 석자이상 될 듯 싶이 높게 쌓아 올린 단(壇) 위에 내삼문이 있다. 이 내삼문인 이정문(頤情門)22)을 들어서면 사당인 낙천사(樂天祠)23)에 학포와 망성암공 양위(兩位)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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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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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나무 ○ |
樂天祠 |
향나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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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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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 |
頤情門 |
○동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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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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龍岡書院 (辛亥七月 李家源敬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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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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遲春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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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용강서원 평면도
150*110 |
순천 용강서원
(전남 순천시 금곡동 256번지)
전라남도 문화재 자료 121호이다.
나. 추모(追慕)
학포의 향사는 매년 음력 10월 5일 학포의 묘소에서 가을 시제(時祭)와 월곡의 부조묘에서 음력 8월 18일 기제사로 모셔지고 있다.
쌍봉 마을 앞 쌍봉천을 건너서 오른쪽으로 뻗어 나가는 들판을 300여m 쯤 가면 중조산(中條山), 일명 대산(大山) 입구의 산기슭에는 양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가 마을을 조금 비껴서 북서향을 바라보고 자리잡고 있다. 이 제각 뒤로 뻗은 골짜기 길을 타고 올라가면 길 오른쪽에 「학포천」(學圃阡)24)이라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고, 완만히 오르는 산길을 따라 5분쯤 올라가면(제각에서부터 약 470보) 큰 봉우리 밑에 「증 정부인 김해김씨지묘」가 있고, 거기서 왼편으로 약 20도쯤 방향을 바꾸어 100보쯤 계속 올라간 곳에서 오른쪽을 바라보면 가파른 경사면이 나타나며 웅장하게 다가오는 준령 위에 학포의 묘소가 자리잡고 있다. 좌향(坐向)은 손좌(巽坐)25)이고 보아서 오른쪽 봉분에는 학포와 금산 김씨 부인을 합폄(合窆)26)하였고 왼쪽은 청주 한씨 부인의 봉분이다. 이 자리를 사람들은 비봉포란(飛鳳抱卵)27) 형국이라 부른다.
좌향도(坐向圖)
155 * 95 |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의 중조산 전경
쌍봉 마을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중조산(中條山 : 大山)이 보이고, 그 정상에서 약간 내려와 중봉에 학포와 세 부인들의 묘가 있음
126*88 |
학포의 묘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종조산 중턱 우뚝한 작은 봉우리 위에 자리 잡은 학포의 묘소. 보아서 오른 쪽에는 학포와 금산 김씨 부인을 합폄하고 왼 쪽에는 청주 한씨 부인을 모시었음
125*87 |
학포의 묘소에서 시제 모시는 후손들
(이양면 쌍봉리 중조산 음력 10월 5일)
140*100 |
학포천(學圃阡)
중조산 입구 영모재(永慕齋)에서 뒤로 난 산골짜기를 약 30미터쯤 올라간 길섶 오른쪽에 학포의 13대손 재경(在慶)에 의해 자연석에 「학포천」이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이것은 학포의 묘소를 찾아가는 이들에게 안내판의 구실을 한다.
154*200 |
학포의 묘비를 세 번째 다시 세우는 과정
서기 1547 년(명종 2년)에 처음 세웠던 묘비를 서기 1675 년(숙종 원년) 5대손 병사(兵使) 우급(禹及)이 다시 만들어 세웠고, 이것을 서기 1955년(을미) 3월에 14대손 회숙(會淑)이 도유사(都有司)가 되어 세 번째 다시 만들어 세웠다.
위 오른쪽 사진은 서기 1955년 새 묘비 제막식, 위 왼쪽 사진은 묘비 앞에 선 후손들 왼쪽부터 두 번째가 회숙(會淑) 회국(會國) 권승(權承)이 보인다. 중간 오른쪽 사진은 앞줄 오른쪽이 종손 동욱(東旭) 뒷줄 가운데가 동기(東器)이다. 중간 왼쪽 사진은 왼쪽부터 종손 동욱(東旭) 지승(祉承) 동기(東器)이다.
126*88 |
증정부인 김해 김씨의 묘
학포의 제3부인 “김해 김씨는 학(鶴)의 여요 명수(明壽)의 손이라 생이남(生二男)이요, 공의 묘 계하(階下) 손좌(巽坐)에 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김해 김씨가 학포와 어떤 인연으로 삶을 함께 하게 되었는지는 근거를 찾을 수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학포가 17세에 혼인하였던 금산 김씨 부인 그리고 금산 김씨 부인이 돌아가신 후 맞아들인 청주 한씨 부인은 평생을 월곡 본가를 지키었고, 학포가 관직에 등용된 한양생활에서부터 임종시(학포 29~58세)까지 30년 동안을 지근(至近)에서 모셔온 분이 바로 김해 김씨 부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또, 쌍봉마을 앞에는 김해 김씨 충신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김해 김씨들이 옛날 쌍봉마을을 비롯한 인근에 많이 살았을 것이고 따라서 김해 김씨 부인은 쌍봉 출신이었을 것이라 본다.28)
김해 김씨 부인의 묘소는 학포의 묘소 바로 15미터 아래에 있다. 그렇지만 너무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볼품이 없게 된 상태였던 것을, 1995년부터 1999년까지 이양면 오류리에 사는 12대손 정묵(正黙)이 사재를 들여 처음으로 묘비를 세우고 봉분의 둘래석을 두른 후 묘역을 정비하였다. 상석(床石)과 망주석(望柱石)은 본래 없었던 것을 1675(을묘)년 우급(禹及)이 세웠던 학포의 묘비를 1955(을미)에 개수(改竪)할 때, 옛 비는 지석(誌石)과 함께 경내의 임자방(壬子方)에 묻고 상석과 망주는 김해 김씨 부인의 묘소로 옮겨 놓았다. 이제 3백 25년이 지난 지금 강화도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어진 이 망주는 문화재 급에 속하는 귀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2) 제각(祭閣)
쌍봉 마을 앞 쌍봉교(雙峰橋)를 건너 쌍봉천 하류로, 시멘트로 포장된 왼쪽 둑길을 타고 300여m 쯤 가다가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100m 쯤 들어가 중조산 입구의 산기슭에 닿으면 제주 양씨 제각인 영모재(永慕齋)29)가 마을을 조금 비껴서 북서향을 바라보고 자리잡고 있다. 이 영모재는 세워진지 너무 오래되고 관리인이 살지 않아 보존 상태가 너무 허술하였다.
그러던 것을 영모재가 너무 허술하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던 후손들이 마음을 모아 서기 2000년에 들어 대폭 수리하고 바로 잡아 제청 및 부속 건물의 중수를 완료하고, 그 해 음력 10월 5일 학포의 시제 일을 기하여 준공식(竣工式)30)을 가졌다.
다음은 영모재 중수기(重修記)이다.
중조산하 학포선조의 영모재는 서기1923年(계해)에 옛 건물을 헐고 개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몇 차례 보수하였으나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보기 딱할 정도로 허름하여 우리 쌍봉 종회에서 솔선 중수를 결의하고 2000년 5월 착공하여 다음과 같이 공사를 마쳤습니다. 본재(本齋)와 동․서재(東․西齋)와 문간채는 번와(翻瓦)31) 보수한 후 낡은 불럭담을 철거하고 자연석으로 신축 미장하였으며, 본재 편액과 현시(懸詩) 10판을 신장(新粧)하였고, 마을 앞부터 제각까지의 진입로를 확포장하였으며, 입구변 언덕을 석축조경하였고, 학포천 표석을 찾아 묘도(墓道) 가에 세웠으며, 못 가에 있던 절혜전(節惠前) 신도비는 문간 앞으로 옮겼고, 쌍봉 마을 앞에 있던 절혜후(節惠後) 신도비는 바로 그 옆으로 옮겨 세웠습니다. 그러나 어찌 이것으로써 문사를 다했다하겠습니까. 뒷날 재전(齋前)과 경내외를 더욱 잘 가꾸어 떳떳한 조상의 제실(祭室)로 영전(永傳)하기를 바랍니다.
단기 4334년(서기2001) 신사 음 10月 5日
제주양씨 학포공 제4자 참봉공파종회
회장 16대손 東日 謹識
125*90 |
영모재 전경(옛 모습)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 마을 건너 중조산 기슭
125*90 |
영모재 전경(새 모습)
2000.10.5 중수
126*88 |
영모재의 제청(祭廳)
2000.10.5 중수
(3) 신도비(神道碑)
학포의 신도비(神道碑)32)는 두 기(基)이다.
본래 학포의 신도비는 세울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학포의 벼슬이 정오품 홍문관 교리로서 신도비는 종2품(從二品)33) 이상의 벼슬아치만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포의 제3자 응정(應鼎)의 귀(貴)34)로 인하여 선조 11년(서기 1578) 마침내 학포의 벼슬이 종2품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는 자격을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정조 9년(서기 1785) 문헌공(文憲公)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의 찬(撰)35)으로 학포의 10대손 쌍봉의 진영(進永)36)이 주장하여, 13대손 재경(在慶)37)이 신도비를 세웠다. 신도비가 세워진 장소는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영모재 앞이다. 이 비를 사람들은 구비(절혜전 신도비)라 한다.
그러다가 기묘 명현들에게 내려진 시호(諡號)38)가 학포에게도 내려져야 한다는 호남 유생들의 삼차에 걸친 청시소(請諡疏)39)로 헌종 8년(서기 1842) 시호를 내릴 수 있는 자격인 정2품 이조판서인 정경(正卿)40)으로 학포의 벼슬이 증작(贈爵)41)되고, 철종 14년(서기 1863) 학포에게 절혜(節惠)42)가 「혜강(惠康)」으로 내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벼슬의 증작 사실과 시호 받은 사실을 신도비에 기록하기 위하여 고종 34년(서기 1897) 문충공(文忠公)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이 다시 찬한 것을 재경(在慶)의 주장으로 쌍봉인들이 자금을 염출하여 신도비를 다시 세웠다. 새로 세운 신도비는 쌍봉마을 입구 풍영정(風詠亭)43) 옆에 세워져 있다. 이것이 신비(절혜후 신도비)이다.
125*176 구비 |
절혜전 신도비(舊碑)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영모재 앞에 있으며, 학포의 13대손 재경이 정조 9년(서기 1785년) 이계(耳溪) 홍문헌공(洪文獻公) 양호(良浩)의 찬으로 세웠다. 이 비에는 이조참판을 추증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26*177 신비 |
절혜후 신도비(新碑)
(전남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 마을 입구)
구비가 정경(正卿)의 절혜가 있기 전에 세워졌던 까닭에 이조판서를 가증하고 혜강으로 시호가 내려진 내용을 기록한 새로운 신도비를 고종 34년(서기 1897년)에 쌍봉마을 사람들의 공동부담으로 세워졌다. 비문은 연재(淵齋) 송문충공(宋文忠公) 병선(秉璿)이 지었다.
(4) 월곡의 부조묘
학포의 부조묘는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월곡리 562번지 외 4필지 총 4,650㎡의 종가 부지 한 쪽에 세워져 있다. 이 부조묘에서 학포의 기일(忌日)인 매년 음력 8월 18일에 기제사(忌祭祀)를 향사하고 있다.
월곡 종가의 부조묘가 언제 지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서기 1990년 4월 종회에서 자금(資金)44)을 모아 제1단계 사업으로 부조묘의 신실(神室) 중수와 경내의 조경을 마쳤다. 그리고 후손들의 내왕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주차장을 조성하였다.
그 때 자금이 충분치 못하여 부조묘 앞마당과 주변의 환경정리가 완성되지 못하고 부족한 상태로 남아 있으며 종회를 개최하기 위한 종회각(宗會閣)45), 문집을 간행하면서 만들어진 목판을 보관하기 위한 경장각(敬藏閣)46)의 보수는 제2단계 사업으로 계획되어 아직 미진(未盡)한 상태로 남아 있어서 관계자 및 후손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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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90년 4월 29일 중수된 전남 화순군 도곡면 월곡의 부조묘 전경
169*105 |
120*88 |
월곡의 부조묘 사당 안
서기 1990년 경오 4월 29일 월곡 마을 종가의 부조묘를 중수하고 환안제(還安祭)를 지내기 위해 제단에 차려 놓은 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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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조묘 환안제 때 학포의 신주(神主)를 모셔 가는 17대 종손 성훈(聖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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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부조묘 중수 환안제
서기 1990년 4월 29일 드디어 중수된 부조묘에 환안제를 모시게 되었다. 이 때 이 일의 추진을 맡은 회장은 학포의 15대손 학승(學承)이었고, 부회장은 회석(會石), 총무는 16대손 동초(東超), 사회는 동기(東琦)였다. 부조묘 환안제에 초대 받은 지역 유지 및 유림 그리고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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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부조묘 중수 환안제에 참례한 화순지역 유림 및 후손들
이 때 정암의 종손과 광주의 한문학자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도 참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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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음력 8월 18일. 월곡의 부조묘에서 학포의 제사를 모시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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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부조묘의 앞마당에 있는 경장각(敬藏閣)
학포집 발간 후 판각을 보관해 왔는데 지금은 판각이 유실되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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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곡의 부조묘의 앞 마당에 있는 종회각(宗會閣)
(5) 병풍(屛風)
학포의 15대손 쌍봉출신 용승(湧承)은 학포 문중의 여러 가지 문사(門事)를 했던 13대손 재경(在慶)의 손자로 선조인 학포의 여러 유묵들이 한 곳에 소장되어 있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후손들로서는 이렇게 흩어져 있는 선조의 유묵을 직접 대하기는커녕 그 모습이 어떠한지 구경조차 하기 힘든 처지에 있었던지라 이러한 사실을 늘 안타까워하고 있던 차, 후손들이 이를 소장하면서 조상을 섬기는 마음을 돈독히 하였으면 하는 염원으로 하나의 방도를 생각하였다. 그것은 모사품을 만들어 소장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던 차 후손 용승은 마침 학포의 16대손 순천의 경희한의원 원장 동식(東植)이 일본의 동경박물관에서 촬영해 온 소상팔경도를 입수하게 되었다.
또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산수도와 산수매죽도 목판본, 그리고 용승(湧承)의 조부인 재경(在慶)이 선조 학포가 그린 연지도(蓮芝圖) 양본(兩本 : 두 폭)이 경성 김추사(金秋史)의 본가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고 거금을 주고 사들여 월곡 종가에 봉안하였던 연지도, 또 학포의 14대손 양회대(梁會大)가 추심하여 소장하고 있는 묵죽사계도, 그리고 종가 소장의 교지, 친필 등을 수소문하여 복사하고, 여기에 종훈과 학포의 약사를 간략히 기술하여 8폭병풍으로 제작하였다. 크기는 완전히 펼쳤을 때 360×154㎝이고 전후(前後) 14面으로 되어있다.
문중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경향 각지에 흩어져 사는 문중의 희망자들이 앞을 다투어 저렴한 가격으로 소장하게 되었다.
116*72 |
108*72 |
학포관련 병풍
이 병풍의 전면 팔폭은 소상팔경도이고,
후면 육폭은 친필 2면, 국립박물관 소장 산수도, 산수․매죽도(山水․梅竹圖), 연지도(蓮芝圖), 교지와 시호 등이다.
펼친 병풍의 크기 : 가로 12자×높이 5자 2치(36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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