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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宗門(종문)의 淵源(연원)
中始祖(중시조)의 入島(입도)와 그 動機(동기)에 關(관)하여
우리 入島 中始祖(입도중시조)는 禦侮將軍(어모장군.정4품 당하관 諱(휘) 邦輔(방보)와 敎授官(교수관: 향교 교수중 으뜸인 교수로 지금의 학교장과 같음) 諱(휘) 邦佐(방좌) 두분이시다.
이 두분은 己卯士禍(기묘사화 1519년)에 被謫(피적:꾸짖임을 당함)되어 滅門之禍(멸문지화:명문이 큰 재앙으로 집안이 망하는 화)를 면하고 救命(구명:목숨을 구함)하기 위하여
1520년대에 입도한 流亡人(유망인: 정치적 망명 및 피난 온 사람)인 漢陽人(한양인: 본관이 한양인 사람)이시다.
1. 光武四年(광무4년, 1900년) 南原趙氏 家譜(남원조씨 가보): 邦輔祖系 族譜(방보조계 족보), 修譜(수보)시의 序文(서문: 입도조의 13세 宗孫 永煥(종손 영환)씀)에
「惟我落南始祖以來(유아낙남시조이래)…, …우리 입도(낙남) 시조 이래로…」즉 入島 中始祖(입도 중시조)는 禦侮公 邦輔祖(어모공 방보조)라 기록하고 있고
癸酉譜(계유보: 1933년에 만든 邦佐祖系 族譜:방좌조계 족보)의 序文(서문)(입도조의 13세손 文彬(문빈)씀, 造水派)에
「…敎授公爲入島中祖己先代(교수공위입도중조기선대)…, 교수공 입도 중시조의 입도 그선대…」 즉 入島 中始祖(입도 중시조)는 敎授公 邦佐祖(교수공 방좌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入島己先代의 기록(尊銜 및 履歷:존함 및 이력)이 두 派譜(파보)가 똑같다.
庚子譜(경자보: 1960년에만든족보)의 서문(造水派(조수파), 入島祖(입도조)의 14세손 南奉(남봉)씀)에
「本 濟州道 入道(본 제주도 입도)는 中始祖 邦輔 邦佐(중시조 방보 방좌) 형제가 謫居求命(적거구명)이 도내 無繼(무계) 無傳(무전) 四百余年(사백여년)이다가…」라고 기록하고 있다.
戊辰譜(무진보: 1988년에 만든 족보 上卷(상권)의 沿源錄(연원록: 근원을 따라 가 본 기록)에
「濟州 入島 中始祖(제주 입도 중시조)는 …… 禦侮 諱 邦輔, 敎授官 諱 邦佐 兄弟(어모 휘 방보,교수관 휘 방좌 형제)분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의 入島 中始祖(입도 중시조)는 禦侮公 邦輔祖(어모공 방보조)와 敎授公 邦佐祖(교수공 방좌조) 兄弟(형제) 두분임이 확실하다.
2. 입도한 후 邦輔祖系(방보조계)는 19世까지 邦佐祖系(방좌조계)는 17世까지 자손이 번성하였다. 1세를 30년으로보아 1520년대에 入島(입도)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3. 입도 14세손인 南洙(남수: 邦佐祖系 造水派(방좌조계 조수파)이고 牧師(목사)임)가 펴낸 漢陽趙氏(한양조씨) 世譜文獻要鑑濟州派(세보문헌요감제주파)(1984년 재단법인 西歸院(서귀원) 발행)에
「本道(제주도)에 漢陽趙氏(한양조씨)가 처음으로 발을 부친 때는 기원(서기) 1521년경으로 己卯士禍(기묘사화) 이후에 滅門之禍(멸문지화)를 피하여 가족과 노비들을 이끌고 멀리 濟州道(제주도)에 와서 定着(정착)하게 되었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4. 戊辰譜 上卷의 沿源綠에
「入島(입도) 經緯(경위)에 대하여 최근까지 조사 확인된 바로는 中宗(중종) 14년(1519년) 己卯士禍(기묘사화)와 관련 趙氏(조씨) 일족이 被鏑(피적)되어 全羅道 海南 蘆花島(전라도 해남 노화도)를 거쳐 1530년경(1520년경의 오기임, 이는 跋文(발문)에서 밝히고 있음.)에 入島(입도)한 것으로 알려졌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下卷(하원)의 「跋文(발문: 책의 끝에 적은 글)」일의 3. 「中始祖 入島 經緯(중시조 입도 경위)에 대하여」란에는
「…兄弟(형제)가 歲末(세말)에 歸鄕(귀향)하지 아니하자 己卯(기묘) 翌年(익년: 뒷해) 즉 1520년초 모친 長興高氏(장흥고씨)가 上京(상경: 서울에 올라가다) 寓居處(우거처: 타향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곳)에 가보니 行方不明(행방불명: 간 방향이 또렷하지 않음)이였다.
수소문 끝에 南海(남해)의 孤島(고도: 외로운섬) 蘆花島(노화도)에 가 있음을 알아내고 高氏(고씨)는 家産一部(가산일부)를 정리하여 不遠千里(불원천리:천리 길도 멀다 여기지 않음) 찾아가 보니 다시 행방불명이었다. 다만 濟州方面(제주방면)으로 流放(유방: 정한곳 없이 떠 돌아감 즉 정처없이 들어감)된 것이 아니겠는냐 하는 뜬 소문뿐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5. 邦佐祖(방좌조)의 外系(외계:외가족)을 알아보기 위하여 高氏 문중회 총본부인 高氏宗門會(고씨종문회)에 보관중인 高氏(長興高氏(장흥고씨)도 濟州高氏의 일분파임)의 모든 족보를 열람해 보았으나 瓊(경)祖(조)의 配位(배위:부인) 濟州高氏의 부친인 仲敬(중경)의 함자를 찾지 못하였으며
濟州高氏 典書公(제주고씨 전서공)의 21世孫(세손)에 仲卿(중경)(禦侮將軍:어모장군)인 함자가 보이나 그의 선친인 20世孫 純理(순리)의 이력이 1558년 明宗戊午年(명종무오년)에 天安郡守(천안군수) 太學敎授(태학교수) 春秋館事(춘추관사) 贈(증) 通訓大夫(통훈대부)(천안군수, 성균관교수, 춘추관에서 일을 보다.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의 품계를 받다)라 기록하고 있고
南平文氏 世譜(남평문씨 세보)에 邦佐祖(방좌조)와 仲卿(중경)의 孫(손) 孝彦(효연)이 同로 記人(기인)되고 있어 우리의 邦佐祖(방좌조)와는 년대가 맞지 않아 仲卿(중경)과 仲敬(중경)은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다.
6. 邦佐祖(방좌조)의 妻家系(처가계: 부인쪽)인 南平文氏(남평문씨) 보첩을 보았더니 南平文氏 南濟公派 世譜(남평문씨 남제공파 세보)에 입도 15세손으로 時鳳(시봉)이 올라 있고 그 둘째 사위로 우리 邦佐祖(방좌조)가 올라있다.
이는 우리의 보첩과 일치되는 일이므로 그 종친회 회장인 문창송(80세이고 용담2동에 거주)에게 문의 하였더니
時鳳公(시봉공)은 明宗(명종) 10년(1555년) 別刀浦(별도포: 지금의 제주시 별도봉 동쪽 포구)로 친입한 왜구를 물리쳤(조선왕조실록인 명종대왕실록에도 올라있음)으며 建功將軍(건공장군:종3품)의 품계를 받으신 선조이시고
둘째 사위인 邦佐公(방좌공)은 己卯士禍(기묘사화)에 피적되어 입도 山地(산지:지금이 이도1동)에 살았던 鄕班(향반)이였다는 말을 조상들의 구전으로 전해오고 있어 자기도 그렇게 알고 있다고 증언해 주었다.
7. 濟州鄕校(제주향교)의 자료를 열람해 보니
崇德己卯(숭덕기묘:1639년) 正月(정월)의 懸板(현판: 글씨를 새겨서 벽위에 거는 널판으로 鄕校(향교)의 鄕案(향안)중 가장 오래된 것임)의 板刊(판간)인 「耽羅鄕籍(탐라향적)」에 彦祥祖(언상조)가 高士徽(고사휘)와 같이 올라있다.
濟州高氏 靈谷派譜(제주고씨 영곡파보)에 高士徽(고사휘)는 文忠公(문충공) 得宗(득종, 호는 靈谷(영덕), 1388년 제주에서 출생)의 6세손으로 중종(1506-1544년) 중엽에 출생하였고 武科(무과)에 급제한 후 部將(부장)과 縣監(현감)을 지낸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彦祥祖(언상조)도 中宗中葉(중종중엽) 이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즉 1520년대에 邦佐祖(방좌조)가 입도하여 文時鳳(문시봉)의 二女 南平文氏(이녀 남평문씨)를 夫人(부인)으로 맞이하였으며 中宗中葉(중종중엽) 이후에 彦祥祖(언상조)를 낳으셨으며 彦祥祖(언상조)는 軍資監主簿(군자감주부)를 지내셨다.
8. 金奉鉉(김봉현: 한림읍 금악리 출신)이 1956년에 쓰고 1981년 일본의 도서간행회에서 발간한 「濟州島流人傳(제주도유인전)(李朝(이조)의 政爭(정쟁)과 流配(유배)된 政客(정객)을 중심으로)」의 「政爭(정쟁)에 의한 流配(유배)와 都落(落鄕:낙향))」란에
「…李朝(이조) 중기부터는 士禍(사화), 政爭(정쟁)과 궁정을 둘러싼 음흉한 권력투쟁이 격렬히 전개되어 정치적 보복이 되풀이되므로 敵對分子(적대분자)로 눈 찍힌 사람은 용서없이 섬으로 보내어졌다.
그 때문에 近緣者(근연자: 그때 가까이 인연을 맺고 있는 사람)들은 화가 두려워 이 섬에 떨어지는 자가 이어졌다.
…이 섬에 낙향해 온 사람들의 동기를 각 씨족의 족보를 살펴보면 거의가 정치적 박해를 두려워 피난해온 사람들이다.
本貫:漢陽, 姓氏:趙氏. 入島祖名:趙邦輔. 理由: 都落(본관:한양. 성씨:조씨. 입도조명:조방보. 이유:도락(落鄕 낙향:거처를 서울에서 시골로 옮김. 실은 피난이거나 망명임). 入島年代(입도년대) 中宗(중종) 14년(1519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9. 1980년 姜龍三(강용삼)이 쓴 「濟州의 人脈(제주의인맥)」漢陽趙氏(한양조씨)란에
「濟州 入島祖(제주입도조)인 趙邦輔(조방보)와 趙邦佐(조방좌)형제가 滅門之禍(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해 제주에 낙향한 것은 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난지 2년후인 1521년이였다. 낙향이라기보다 사살상의 유배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0. 1982년 濟州道(제주도)가 발행안 「濟州道誌(제주도지)」하권의 제8장「人物(인물)」, 第一節(제일절) 「濟州道 歷代人物 名單(제주도역대인물)」3.「李朝(이조) 및 日帝時代(일제시대)」란에
「△康永(강영), △趙邦輔(조방보), △趙邦佐(조방좌), △許光孫(허광손)…」등 88명의 이름이 올라있으며,
濟四節(제4절) 「李朝時代 및 日帝時代」란에
「△趙邦輔.趙邦佐 - 漢陽趙氏 濟州 入島祖이다. 형제인 이들은 己卯士禍가 일어나자 1521년 滅門之禍를 면하기 위해 각각 가족과 노비를 이끌고 제주에 入島했다.
손꼽는 名門(명문)출신으로 그 榮達(영달)이 보장되고 있었으나 己卯士禍(기묘사화)는 이들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趙光祖(조광조)의 추천으로 官職(관직)에 올랐던 친족은 물론 그 친지들까지 파직되거나 쫒겨나 뿔뿔이 흩어지는 悲運(비운)을 맞아야 하였다.
그러므로 趙邦輔, 邦佐형제의 濟州入島는 사실상의 流配(유배)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1. 1988년 제주도가 발행한 「濟州先賢誌(제주선현지)」 제3장 향토인물란에
「入島祖인 趙邦輔, 邦佐 형제가 滅門之禍를 면하기 위해 제주에 낙향한 것은 가문의 기둥이였던 靜庵 趙光祖(정암 조광조)등 新進士類(신진사류: 새 선비들)를 몰아내기 위한 대 옥사인 기묘사화가 일어난지 2년후인 중종 16년(1521년)이였다.
낙향이라기 보다 사실상의 피난이였다. 그만큼 이들 형제의 입도는 기묘사화에서 비롯되었고 그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漢陽趙氏의 제주 入島는 己卯士禍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만큼 긴밀한 연관관계를 가졌다해도 지나침이 없다.
역사적으로 漢陽趙氏를…. 趙光祖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던 친척은 물론 친지들까지 파직되거나 쫓겨나 뿔뿔이 흩어지는 비운을 맞은 것이 그것이다.
始祖 趙之壽(시조 조지수)의 13세손(癸酉譜(계유보)에 의한 세대임)인 趙邦輔, 邦佐 형제의 제주 낙향은 이러한 가문의 수난 때문이었고 먼 훗날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保身策(보신책: 한몸을 보존하여 가는꾀)이었다.
… 후학을 가르치는데 전념하고 人智(인지)를 일깨우면서 파란만장의 생을 마쳤다. 특히 이들 형제의 儒敎哲學(유교철학)은 이 지방 儒林(유림)들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전해진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濟州의 性氏別(성씨별) 中始祖(중시조) 및 入島祖一覽(입도조일람)」의 「入島背景(입도배경) 및 動機(동기)」에 대해서는
「己卯士禍(기묘사화)가 일어나 家門(가문)의 기둥이었던 趙光祖(조광조)등 士林派(사림파) 선비들이 被禍(피화)되고 儒敎(유교)의 理想政治(이상정치)를 추구하려던 꿈이 무너지자 가문의 변란을 면하기 위해 핀신 낙향」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12. 1997년에 발간된 「濟州儒脈六百年史(제주유맥육백년사)」의 「流亡人들의 渡來와 儒學(유망인들의 도래와 유학)」란에 보면
「…. 그들의 도래(바다건너 제주도에 들어옴)는 실로 여러 가지 기구한 사연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대종을 이룬 것은 정치적 망명인들이였다고 할 것이며 근세에 이르러서는 더욱 그것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사화나 당쟁에서 숙청되거나 피난한 사람들, 권좌나 권력에서 축축되거나 그것을 기피하려는 사람들, 난리나 역모사건 등에 연루되어 피낭이 필요했던 사람들….
그 가운데에서도 제주도에 인맥을 잇고 여러모로 크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보면 대충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藝文館(예문관) 大提學(대제학)을 지낸 怒齊韓(노제한), 左贊成(좌찬성)…, 趙邦輔(조방보)와 趙邦佐(조방좌), 高麗(고려)의 名臣(명신)…하나 하나 열거하기가 어렵다….
제주의 인맥은 바로 이들에 의해서 이어져 갔으며 儒脈 또한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鄕校 書院의 學脈」란의 「인조원년(1623년) 濟州牧 鄕案(제주목 향안: 제주목사가 관할하는 구좌읍에서 한경면까지의 양반들의 이름을 쓴 기록으로 실은 天啓(천계)3년 7월 일 鄕案(향안)이다)」에 高承豪(고승호)…,趙彦祥(조언상), 趙彦福(조언복), 趙翰(조한), 趙翊(조익), 許棋壽(허기수)…등 入島 邦佐祖의 두 자식과 두 손자가 올라 있다.
이는 1623년에 翰祖(한조)와 翊祖(익조)가 鄕班(향반)에 올랐으므로 이때 翰(한), 翊(익) 兩祖(양조)가 30대 후반내지 40대초반으로 우리의 入島祖 敎授公은 1520년대에 입도하였음을 증거할 수 있다.
13. 2000년에 발간된 「濟州鄕校誌」「聞望(문망: 이름이 널리 알려져 높이 우러러 보는 사람)」에
「趙邦輔」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賜死(사사:임금이 죽일 죄인에게 사약을 내려 자살하게 한 일)되니 그와 연루된 멸문지화를 면하기 위하여 동생 邦佐를 비롯한 전가족을 率家(솔가: 식속을 거느림)하여 중종 16년(1521년)에 입도하여 납읍에 정착한 한양조씨 입도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4. 己卯士禍에 忠武公派(충무공파)(版圖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는 被謫者(피적자)가 없다.
忠武公派大宗會(충무공파대종회) 회장인 趙泰勳(김태훈)의 증언 중에
「아무리 찾아 보아도 충무공파 족보의 기록에는 자손들이 癸酉靖亂(계유정난)이나 己卯士禍(기묘사화)를 전후하여 一派(일파)가 제주도로 흘러갔다는 根據(근거)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15. 癸酉譜의 서문에
「…摠管公暉之子良琪年十三世複被皇命致大功於元朝授以錦袍玉帶承襲父爵(총관공 휘의 아들인 양기는 13살에 또 다시 황제의 명을 받아 큰 공을 세웠으므로 원나라로부터 비단도포와 옥으로 장식된 띠를 받고 아비의 작위를 이어 받았다)」라 쓰고 있으며
庚子譜의 서문에는
「名顯國廷(명현국정: 국가의 조정에 높은 벼슬에 이름이 나타남.)이 自摠管公 諱 暉 先祖(총관공 휘 선조를 사작)으로 麗末登壇(려말등단: 고려말에 올라가)이 百千載(백천계: 많이 실여 있음)이 子子孫孫 如此盛矣자자손손여차성의)라」라고 쓰고 있어
총관공과 그 아들 良琪에 대한 稱頌文은 있으나 版圖判書公(충무공)系의 칭송문은 없다.
이상의 문헌들을 살펴보건데 우리의 중시조의 입도는 기묘사화를 떠나서 생각할 수가 없다.
가문의 趙光祖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으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신변의 위험을 느낀 邦輔祖(방보조)가 가솔과 동생 邦佐祖(방좌조)를 데리고 한양에서 아주 먼 제주도를 목적지로 정하고 流放(유방)하다가 전라도 남원을 거처 입도한 후 戶口單子(호구단자:지금의 호적과 같은 것)를 만들때 멸문지화를 면하고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漢陽趙氏(한양조씨)로 하지 않고 南原趙氏(남원조씨)로 기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옛 문헌인 典古大方(전고대바) 권 1의 萬姓始祖編(만조시조편)을 보면 趙氏姓(조씨성)은 豊壤趙氏(풍양조씨)를 비롯하여 26본관만이 올라 있으며 그중에 南原趙氏(초기의 후구단자에는 南原으로 표기된 것도 있음)는 없기 때문이다.
앞의 여러 기록들을 종합분석하여보건데
우리는 기묘사화 이후에 멸문지화를 면하고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제주에 유망되어온 한양인으로 총관공파의 후예임이 확실하다.
<2005년 족보 부록중에서>
첫댓글 제주도입도조(濟州島入道祖) 漢陽趙氏(한양조씨) 濟州入島祖(제주입도조) 邦輔祖(방보조)/邦佐祖(방좌조)단소의 사진을 게시할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