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은 현재 한국의 교육제도를 독일식(혹은 북구라파식)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 카페 『교육공화국』cafe.daum.net/edurepublic 을 운영하고 있다.
이 인터넷 동호인 운동의 주된 사상은 이렇다 : “현재 한국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정책과 입시 제도이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사교육 비용은 급증하고 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허덕거린다. 언론과 보수 단체들은 하향평준화를 비판하고 그 대신 자립형 고교, 자율형 대학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개혁의 방향은 유럽식 내지 독일식의 교육제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전 교육의 국립화 내지 공립화를 의미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입시가 사라지고 사교육이 필요 없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력, 학벌, 학연을 단절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전 교육기관을 국립화하는 재원은 26조에 달하는 사교육비 절약함으로써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국가주의 혹은 공화주의는 지역간의 차이와 소외를 극복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교육 정책이다. 이런 교육 제도의 정립을 위해서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 개혁운동을 『 교육공화국 』운동으로 부른 이유는 교육을 통하여 공화국(Republic)의 이념을 달성하기 하려 하기 때문이다.
우선 공화국의 이념은 위대한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이 말하는 것처럼 (사회의) 어느 한 계층이 아니라 모든 계층이 행복하도록 통치되는 그런 국가사회를 말한다. 이는 또한 고대의 로마의 공화주의 정치에서 실제로 행해졌던 그러한 정치 이념이다. 이런 공화주의 이념은 국가의 위기 시에 국가의 독립과 통일성을 위해 개인이 자발적으로 희생한다는 애국주의를 내포한다. 그리고 고대 로마의 역사에서 보여지는 사적인 것에 대한 공적인 것의 우위성, 사리사욕에 앞서 공공복리를 위해 부자들이 기꺼이 사재를 털어서 대규모의 건축과 토목공사를 벌였던 그런 국민적 윤리(Ethos)와 시민정신이 이 시대 한국에서 절실히 요청되는 가치관이다. 그리고 우리 시대 독일에서 보여지는 ‘기업가는 생존건설자(Exsistenzgründer)이며 애국자이다’ 라는 사회윤리 등, 이런 정신을 필자는 공화주의 정신이라고 부른다. 공화주의 정신이란 다시 말해 국민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국민적 통합을 추구하는 정치사상이다.
이런 애국주의적 공화주의에 비해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에 기초해서 독재나 권위주의에 반대하며,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절차적 정치의 개념이다.
그런데 역사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처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민주주의는 법적, 제도적으로 국가시민의 자유와 평등을 담보하지만 실제로는 야만적 자본주의의 착취구조 때문에 많은 인간들이 시민적 자유마저 상실하고 노예상태로 전락하는 것을 체험했다 ; 이런 배경에서 칼 맑스(K. Marx)의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 사상이 등장한다. 그런데 공산주의는 시장과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계급 없는 사회, 무차별적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역시 엄청난 역사적 오류였음을 지난 세기는 스스로 보여주고 있다. 그 이유는 주지하는 바, 공산주의가 분배의 평등만을 내세웠지 생산과 효율이라는 자본주의의 장점을 그 체제 내에서 살릴 수 없었기 대문이었다. 더 많은 생산과 발전 그리고 능률을 위해서는 자본이 축적되어야 하고 또 이를 위한 개인간, 집단간의 소득의 불평등을 허용해야 한다. 그리고 사유재산이 분배적 정의에 따른 분배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 개인 재산과 소유는 합당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한다 : 사회적 평등과 불평등이라는 두 가지 반대되는 원리들은 둘 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덕목이며 또 이 둘은 서로 의지하고 서로 살린다(相生)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처럼 평등만을 강조하는 사회도 그런 평등을 감독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다시금 특권층이 발생한다. 봉건적인 불평등의 계층구조는 근대의 시민 혁명으로 평등화되었다. 이런 논리는 현실에서도 통용된다 : 사회 구성원에게 다양성과 자유를 주려면 먼저 공통적인 평등적인 조건을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회란 완전한 평등만으로도 살 수 없고 또 완전한 차등만으로도 살 수 없다. 이 테마는 다른 기회에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필자는 우선 이런 사회존재를 잠정적으로 평등과 불평등의 변증법적 통일이라고 규정해둔다.
여기서 말하는 불평등이란 달리 말하면 다양성 혹은 차이성을 말한다. 그래서 불평등을 인정한다는 말은 실은 개인간의 여러 가지 종류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 사상, 정서, 체력, 나이, 지식, 온갖 종류의 능력 등등. 불평등이란 말에는 사회적 차별대우나 착취 혹은 특권 등의 뉘앙스가 있기는 하나 원래는 그 의미가 단순히 “같지않음, 다름” 등의 뜻이다. 따라서 이런 개인들 간의 다양한 차이와 개성,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면 필연적으로 경제적 차이도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경제, 사회적 차이가 선천적으로 확립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 다시 말해 부모가 부자라고 해서 그 자녀도 자동적으로 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적 부와 권력은 그 사람이 자기의 일평생 노력으로 획득한 것에 한정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유산의 상속에 반대하고 그 사회적 환원을 요구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사회의 모순은 부와 특권뿐만 아니라 지식까지 대를 이어 세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유와 국민의 통합 그리고 평등이라는 공화주의 정신에 위배되는 반사회적인 관습이다. 특히 교육 문제에 있어서 공화주의 정신은 실종되고 가진 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특권적인 교육의 혜택을 주어 그들이 현재 지닌 부와 권력을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넘겨주기 위하여 혹은 더 나은 신분으로의 상승을 위해서 처절한 사투를 부리고 있다 : 영어 조기 교육, 조기 해외 유학, 외국어 해외연수 그리고 고액과외 등은 국민들간의 갈등과 대립을 심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요즘 한참 문제인 강남의 일류 학원들과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 등은 가난한 서민들의 꿈과 삶의 의욕을 좌절시킨다. 서민들은 꿈도 꿀 수 없는 교육환경을 강남의 부유층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베풀고 있다. 좋은 교육을 받은 자가 좋은 미래를 소유하기에 소위 말하는 빈익빈 부익부의 현상이 굳어 지고 있다. 어느 강남지역 출신의 한 대학생은 이렇게 자신의 사교육 체험을 설명하고 있다 :
“고등학교 2학년 때에는 반 장 어머니의 권유로 드림 팀에 가세했다.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서 두 달 동안 강남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수능 전문가들을 모시고 공부했다. 가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부모님도 정말 많이 망설였지만 누구보다 내가 너무 나도 하고 싶어 했기에 정말 말 그대로 빚을 얻어서 합류하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까지 특별히 부모님 속을 썩이거나,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 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는데 그 날 부모님께 수백만원의 돈을 받아 가면 서 가장 죄스럽고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때 는 그것을 안 하면 왠지 뒤쳐질 것 같고, 모처럼의 좋은 기회를 스스로 놓쳐 버리는 것만 같았다. 바보처럼 울면서 꼭 좋은 대학 가서 출세할 거라고, 부모님 호강시켜 드릴 거라면서 비장한 각오를 했다”.
또 이 학생은 강남의 족집게 과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강남 주요학교의 개교 이후 모든 시험문제를 철저히 분석하고 시험문제를 내는 선생님의 성향까지 파악하고 있던 학원의 세심한(?) 지도" 때문에 학교 시험점수가 올라갔었다고 실토했다. 이러니 강남지역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이 서울 다른 곳의 진학률보다 5-10배 더 높다. 또 그 서울대 출신이 대한민국을 주무른다. 따라서 대한민국은 강남공화국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남 역시 학교가 아니라 결국 그 학원들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다. 한국의 저력은 강남의 학원이나 족집게 고액과외 선생들에게서 나온다고 할까? 독일에서 이런 말을 한다면 다들 미친 소리라고 할 것이다. 한국 정말 미쳤다. 공화주의 교육으로 미친 나라를 바로 세워야 한다.
필자는 위에서 개인의 차이, 특히 능력의 차이와 그에 따른 보수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만약 한 개인이 내적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해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면 그리고 이런 사례가 대규모로 발생한다면 이는 공동체의 파멸을 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출발의 평등과 결과의 차등 인정이다. 다시 말해 교육기회의 완전한 균등을 원한다. 그런 다음에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학업을 마치고 난 사람들이 어떻게 부와 권리를 모으고 늘이는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자유에 맡기자는 것이다. 이런 모델을 필자는 독일의 교육시스템에서 찾고 있다. 거기서는 부자집의 아이나 가난한 집의 아이나 모두 같은 학교, 같은 선생,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고 또 같은 수영장, 같은 축구장에서 취미생활을 한다. 그러면서 독일의 국력은 막강하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위대한 과학자와 예술가들이 나왔다. 미국이 물론 국력 세계 1위라고 하지만 미국은 독일과 달리 엄청난 땅과 자원이 있는 자원 강국이다.
그리고 유럽의 국가들은 세계대전이후로 미국에 많은 인적 자원을 빼앗겨야 했다.
그런데 현 정부는 국민복지나 공화주의 정책에 근거한 교육투자가 아니라 미국식의 시장주의와 사교육 우선의 관점에서 현행의 교육제도를 바꾸려고 한다. 이것은 실은 김영삼 정부 때부터 추진된 잘못된 교육개혁 정책이다. 이들 정치인들은 현재 한국교육의 최대 문제인 입시위주의 교육에 대해 전혀 개선책을 내어 놓지 못하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현재의 정부 교육 방침에 반해 필자는 대학 입시제도의 폐지를 요구한다. 그리고 전대학의 국립화, 공립화를 통해 공교육을 정상화하고 독일에서처럼 대학 졸업시험제도를 통해 대학과 대학생의 학력을 통제하기를 바란다. 이게 선행되지 않으면 어떤 입시제도의 개혁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해방이후 한국 사회는 수십 번에 걸친 대학 입시제도를 단행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 그런 북새통 속에서 아이들만 죽어났다. 루쏘는 청소년기를 제 2의 탄생이라고 규정했다. 즉 중 고등학교 시절은 한 인간의 주체성과 내면성이 형성되어지는 인생의 가장 순수하고 격정적인 시기이다. 그런 시절 한국의 청소년들은 한 대학생이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집에서는 입시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압력과 학교에서는 같은 또래 친구들과의 경쟁, 살벌한 학습 분위기, 주입식 교육방식, 선생님들과의 수직적인 관계, 체벌 등으로 인해 학생들을 오히려 혼란에” 빠지고, 인격을 형성하기는커녕 좌절과 고통 그리고 폭력 앞에 노출되고 있다. 학교 폭력과 청소년 자살은 이제 우리 시대의 상처이다.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은 그야말로 입시의 도구로 전락했다. 입시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사람이 입시를 위해 있는지 모를 형편이 되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I. Kant)는 “인간을 단순히 수단으로만 대우하지하지 말고 동시에 목적으로서 대우하라”라고 했다. 땅 위의 다른 모든 것들은 인간을 위한 수단으로서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결정하는 자유가 있고 스스로 삶의 목적을 결정해 나간다. 다시 말해 인간은 자유 그 자체이다. 이 것을 무시하고 단순히 사람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만 본다면 그것은 인간성 자체의 부정이다. 따라서 학생을 좋은 학벌을 위한 도구로만 본다면 그의 인격은 송두리째 파괴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김송희씨는 “이제 한국에서 제일이라고 하는 대학을 가기 위해 각 개인의 개성과 장점을 무시한 채,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이 정리해준 것들을 무조건 외우는 암기력으로 인간 자체를 줄 세우는 잘못된 교육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부르짖었다.
인간의 개성과 인격은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 동물들은 단순히 본능적으로 존재하지만 인간은 타고난 천성과 능력을 개발하여 문화를 창달하고 자연을 관리하는 사명이 있다.
그리고 인력양성과 국가 경쟁력 강화라는 현 정부(김대중 정부)가 추진하는 교육정책과 소위 인적자원 개발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오늘날 한국의 교육정책은 정보사회, 지식사회에 부응하는 인력양성과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국민의 지적 능력 개발에 부응한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으며” 라는 국가의 교육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이 있다. 이런 인력 양성이라는 국가적 정책 덕분에 그간의 한국의 고도의 경제 성장이 이루어져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지나친 입시위주의 학교교육의 한계가 노출되고 있으며 더 심각한 문제는 대학의 학벌이 고착화되어 사회적인 통합과 유동성이 막히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식사회를 위한 인프라 구축이라는 정부의 구호는 그러나 심각한 모순에 빠져있다.
그리고 또 문제는 정보사회, 지식사회에 부응하는 인력과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과 대안이다. 왜냐하면 인재 양성을 하는 주체는 인재, 즉 사람(학생)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재는 마치 공장에서 좋은 물건을 생산하듯이 만들어 질 수 없다. 인간 개발은 자기 개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은 근본적으로 자기 교육(Bildung)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교실과 교과서와 교사는 학생들이 스스로 인식하고 발견하는데 보조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류의 위대한 교육자,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는 교육과 학습의 방법에 대해 산파술(maieutic)을 주창했다 ; 즉 지식을 산출하는 자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 자신이라는 것이다. 교사는 단지 그 곁에서 학생이 스스로 지식과 진리를 산출하도록 도와주는 산파(産婆)의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배우는 자는 그 자신이 말하자면 진리의 산모(産母)이다. 그런데 우리는 통상적으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영혼에는 무한한 능력이 있다. 교육 혹은 학습이 가능한 것은 결국 이런 인간의 정신과 영혼의 무한성 때문이다. 따라서 간단한 수학 공식 하나를 가르치더라도 주입식이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그런 공식을 도출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교육의 원리는 자기 인식, 자기 산출이다. 그렇지 아니하고는 학생이 선생을 앞지를 수 없고 후배가 결코 선배를 능가할 수 없다. 이런 교육과 학습의 원리를 무시하는 입시위주의 타율적 공부는 결코 인간의 정신을 불구로 만들뿐이다.
그리고 교육을 통한 국가 경쟁력의 강화라는 정부시책도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배우고 익히는 식의 전통적인 공부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식과 산출의 학습이 저절로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한다; 가령 기업이나 업체에서 특히 필요한 새로운 아이디어나 아이템 혹은 노하우(knowhow), 노웨어(nowhere)등은 전혀 교과서나 교수나 강의실에서 찾을 수 없다. 따라서 주입식, 암기식, 문제 풀이식 공부는 급격히 변하는 세계화 시대에 거의 도움이 되지 는다.
우리 나라같이 국토가 좁고 역사가 긴 나라에서는 교육이 전체 국민의 최고의 관심사이다. 그런데 현행의 입시위주의 교육은 학생들에게 자유롭고 자발적인 학습대신 입시준비를 위한 억지 공부를 시킨다. 공부는 정신의 작용이라서 일이나 행동처럼 강제로 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입시위주의 학습은 정부가 바라는 창의적인 인재 양성을 할 수가 없다. 필자의 확신에 따르면 현행의 교육제도는 지식강국을 꿈꾸는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결코 달성할 수고 따라서 국가 경쟁력의 강화를 이룰 수 없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는 교육공화국 운동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는 공화주의적 교육, 즉 국가교육주의를 말한다. 이는 (대학)교육 민영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이는 교육의 시장주의에 대비되는 교육의 사회주의를 말한다. 또 이는 교육을 통해 공화국의 이념 수행이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민족의 통일과 자주 독립 그리고 민족의 번영과 복지 등등 이 모든 것의 기초에는 모든 국민의 공교육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부분은 몰라도 교육만큼은 국가주도로 해야 한다는 것을 필자는 독일에서 경험했다. 국가주의 교육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획일적이고 강제적인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는 교육의 기회를 국민에게 제공하고 국민들은 자유롭게 공공적인 시설과 기관을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국가주의라고 해서 한국에서 보는 것처럼 중앙 집권적인 교육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의 주체는 지방정부가 행사한다. 따라서 지역별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이 발전할 수 있고 또 학교라는 행정 조직이 중심이 아니라 교수중심, 교사중심의 인격적 학교운영, 대학 운영을 말한다.
필자는 헤겔 철학을 전공했다. 헤겔은 국가를 통해 진정한 국민의 자유가 실현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런 헤겔의 주장에 대한 비판도 많지만 한가지 아직도 그의 국가적 사상이 타당한 경우는 바로 교육이다, 미국처럼 대학교육을 철저히 시장주의 원리에 따라 운영할 때 국민들은 겉으로는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철저히 자본주의 경제질서에 예속된다, 즉 빈익빈 부익부라는 새로운 신분질서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국민들을 자본주의의 신분질서에서 해방시키고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자체의 발전을 위해서 전 교육에 대한 국가적인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이런 것이 교육공화국 운동이고 현재는 주로 인터넷 교육개혁운동으로 이루어 진다 그러나 앞으로는 학생운동, 민중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어질 것이다. 이 운동은 정치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오기 까지 숱한 난관이 있었다. 보면 알겠지만 이 책의 중요한 자료는 2001년 경희대 학생들이 쓴 레포트들이다. 학생 레포트들은 이 나라 교육의 모순이 직접 체험화된 생생한 보고서였다. 필자는 이미 철학 교재 2권을 출판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원래 교육학을 공부하지 않은 필자로서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였다. 그리고 필자는 한국 교육 현장의 경험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처음에는 필자의 논문들과 학생 레포트를 병립하는 방식으로 책을 편집했었다. 그러나 그런 책의 출판이 출판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필자는 부득이 학생 레포트들을 필자의 논문들 속으로 수용하는 방식을 택했었다. 학생 레포트와 거기에 대한 필자의 평론을 다시 해체하여 기존의 나의 논문에 수용하는 작업은 수월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출판사로부터 4번 출판을 거부당했었다. 그 때마다 필자는 책의 내용과 구성을 고쳐나갔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집에서는 한국에서 나온 교육학 개론들도 많이 수용을 했다. 그러면서 제목도 5번 이상을 바꾸었다. 이제 최후로 형성된 책 제목은 『교육공화국 – 교육모순의 해결을 위한 실천 철학』이다. 이 책은 주로 가톨릭 대학교(부천) M 203 연구실에서 집필되었다. 이런 혜택을 준 가톨릭 대학 철학과에 감사를 표하고 또한 모든 과정에 함께하신 주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국민들에게 평안을!
2003.02.08
성수벧엘 교회 옥탑방에서. 안재오.
목차
서문 ------------------------------ 1
1. 이해찬 1세대의 외침 ------------------ 12
2. 한국의 교육정책의 정립을 위한 준비 ------------- 16
3.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남북문제는 지역문제로 축소된다 25
4. 사교육비는 자본의 낭비이다 --------------- 26
5. 점점 벌어지는 지역간의 차이 ----------------- 31
6. 대학 교육 시스템 분류 ------- 32
7. 교육공화국 운동 취지문 ------ ------------- 37
8 . 공화국의 이념 ------------------ ------ 42
9. 플라톤의 교육학------------------------- 42
10. 소크라테스의 교육학 --------------------- 45
11. 서울대 학생들에게 고함 ------------------- 48
12. 학벌 철폐운동과 대학 평준화 운동 ------------- 51
13. 대학 민영화 주장에 대하여 ----- ----------- 52
14. 출발의 평등, 결과의 평등 ----- ------------ 57
15. 미국 공립학교의 인성교육에 대해 -------------- 59
16. 미국 교육, 더 이상 한국 교육의 모델이 될 수 없다 - -- 62
17. 창의력과 무관한 한국의 수학교육 -------------- 65
18. 대언론관, 보수, 진보 -------------------- -67
19. 부동산 투기억제와 특수목적고 설립 -------------- 69
20. 서울대 지역할당제에 대한 의견 ---------------- 71
21. 메모리와 프로세서 -한국교육의 맹점- ------------- 73
22.학벌 없는 사회 운동의 몇 가지 문제 --------------- 76
23. 프랑스와 독일의 교육제도 비교----------------- 81
24. 고교평준화 위헌 문제 ---------------------- 84
25. 논리와 윤리 - 한국인들의 사유의 근본적인 결점 -------91
26. 수능시험에 반대하는 논리들 (외부 평가와 내부 평가) -----93
27. 기여입학제 그리고 대학자율화의 문제점들 ------------- 96
28. 분배구조의 개선 ---------------------------100
29. 민주노동당 교육정책 지지 --------------------- 102
30.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소감 ---------------- 103
31. 신자유주의 문제 (市場과 非市場) ------------------ 108
32. 제도의 변화, 의식의 변화---------------------- 112
33. 학교제도 – 단선제와 복선제 ------------------ --- 115
34. 독일 대학에서의 경쟁 -------------------------- 120
참고문헌 ------------------------------------ 125
미주 ---------------------------------------126
1. 이해찬 1세대의 외침
필자는 2002년 1학기 경희대학교에서 교양과목 [사회 윤리의 제문제]를 강의 했었다. 그 때 나의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은 한국의 교육, 사회제도에 대해 비판적인 글을 레포트로 작성했었다.
그리고 우리 학생들 중 대다수가 소위 이해찬 1세대라고 불리는 1983 년생, 2002학번들이 많았었다. 그들은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의 교육 정책인 소위 “열린 교육”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열린 교육을 받고 난 그들은 “단군이래 최저 학력”을 소지했었다고 놀림을 받은 세대이며 또 나중에는 입시제도의 변덕으로 큰 피해를 본 당사자들이다. 그 중 한 학생은 이렇게 자신의 입시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
“각자의 특기와 적성 하나만을 가지고도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그 이해찬 씨의 1세대라고 하는 사람 중에 나도 한 사람이다. 실로 엄청난 교육 정책의 뒤집기와 흔들기로 어찌나 마음 고생을 시켰던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가 없다. 단군 이래 최저 학력이란 말을 들으면서도 여러 가지 불이익과 어려움을 당했던 세대가 바로 올해 입학한 우리 1학년들인 것이다”.
물론 이해찬 장관 혼자 우리나라 조령모개식, 임기응변적 교육 정책 변화의 책임을 전부 질 이유는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상징적으로 그런 사태를 보여주고 있다.
대학생들의 레포트에서 필자가 느낀 것은 이들 이해찬 일 세대라고 불리는 학생들은 얼마 전까지 직접 입시의 노예가 되어 신음했었고 따라서 한국 교육제도의 질곡과 모순을 가장 생생하게 경험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그 질곡을 벗어나서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과거를 관찰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들 학생들의 생생한 고백을 통해 필자는 교육개혁의 필요성과 방향성을 잡았었고 또 필자의 평소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어떤 학생은 그들이 몸소 겪은 교육여건을 “신뢰와 존경과 교권을 상실한 교원들, 학습의욕을 져버리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학생들, 통제 불능의 무질서한 교실 수업, 불신과 갈등에 찬 살벌한 학교분위기, 허탈감과 분노를 안고 교직을 떠나는 수많은 퇴직 교원들, 이러한 일그러진 학교 풍경”이라고 표현했었다. 또 그는 이 시대의 모순을 이렇게 진단했었다 : “사실 우리나라의 교육과 교실은 교육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의 형성으로 이미 몇 십 년 전에 붕괴됐다. 다만 당시에는 용수철 같은 아이들을 마냥 누르고 있었고, 이제는 그들을 누르고만 있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 아이들이 사방으로 튀어 나가고 있을 뿐이다. 결국 시대의 변화에 알맞게 교육체계와 제도를 바꾸지 못한 결과, 잘못된 틀 안에서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모두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교실을 떠나는 아이들과 교사들은 정녕 ‘일그러진 우리시대의 모습’이다. 무엇이 이렇게 교실 붕괴를 초래했을까? 그것은 총체적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의 부족과 또 그로 인한 잘못된 정책에서 온다고 보여진다. 사회 현실의 인식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하루 아침에 생긴 순간적인 현상이 아니라 벌써 수 십년 간 누적되어 온 왜곡과 파행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사적, 사회적 병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국부적인 수술이나 개선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혁명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마치 프랑스 대혁명이 수백 년 묵은 구 질서(앙샹 레짐)를 폭파시키고 자유, 평등, 박애의 새로운 공화국을 건설한 시초가 된 것처럼 교육의 대혁명이 잘못된 제도의 질곡에 빠진 이 나라 수천만의 생명을 구출할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의 글에 다른 자료들이 인용부호 없이 삽입된 경우도 있었으나 필자는 여기서는 그런 것을 일일이 비판하지 않았다. 그런 베낀 부분이 교육 현실의 객관적인 서술이라는 면에서 존중하고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으로서 수용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지나간 시절의 고통과 앞으로의 걱정이 표현된 글들을 읽으면서 도달한 결론은 독일식의 교육 사회주의, 교육 국가주의였다. 현 정부가 추진중인 교육 시장주의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고통을 무시하고 있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의 교육기간동안 아이들의 정신과 육체는 병 들어간다. 김대중, 이해찬 식의 교육개발은 지식기반사회의 인재양성이라는 허울좋은 구호 속에 실은 인재를 썩히고 있다. 야당인 한나라당은 집권하면 지금보다 더 시장주의 교육을 시행할 것이다. 물론 그들의 표현은 ‘하향평준화 깨트리기’ 혹은 ‘교육의 수월권(秀越權) 보장’ 혹은 ‘수준별 교육’이니 하는 구호가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한국의 고질병인 학벌사회를 묵과하는 어떤 입시제도나 명문고등학교 설립 혹은 대학 자율화 등의 논리도 현실의 왜곡된 구조를 해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와 인간 소외의 질곡을 더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학생들의 레포트에 일일이 논평을 붙였다. 그런데 그 방향성은 학과점수의 기준이 아니라 주로 교육공화국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객관적인 평가라기 보다는 교수의 주관적인 관점이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글이 자료들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베낀 부분도 많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일일이 지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자료들이 한국교육의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것이 많아 학생들의 개인적인 한계를 많이 보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내용적으로 비슷비슷한 글들이 많다. 그러나 그 생생한 개인적 체험의 진실성 때문에 지루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학생들이 쓴 레포트에 논평을 붙여 다시 학생들에게 레포트를 돌려 주는 것이 독일에서 교수가 학생 지도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 방법을 실현하기는 힘들었다, 왜냐하면 박봉의 강사 월급에 비해 그 일이 너무 시간을 많이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경희대 학생들의 레포트는 특별히 출판을 위한 것인 만큼 한 번 모든 레포트에 논평을 붙여 보았다. 80개의 레포트를 읽고 논평을 쓰는데 꼬박 20일이 걸렸다. 평소 강의 과제 레포트는 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독일에서는 학부생 레포트부터 박사과정 레포트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까지 교수가 지도하는 방식은 같다 : 세미나하고 참고서적 알려주고 레포트 제목을 주고 쓴 레포트 비평해 준다. 그러나 그런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거기서 공부해 본 사람은 다 알 것이다. 예를 들어 레포트 -거기서는 단순히 숙제(Hausarbeit)라고 한다- 하나 제대로 쓰는데 6개월이 걸린다. 잘못 쓰면 지도 교수가 성적을 인정하지 않고 거부하든지 아니면 고치라고 되돌려 준다. 그러면 또 한 학기 지나간다. 그러다 보면 한 10년 금방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과정, 즉 자기기 쓴 글을 지도 교수의 논평과 같이 다시 돌아 보며 새로 고치는 과정에서 엄청난 공부를 하게 되고 생각은 심화된다. 우리나라에서 창의력과 독창성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대량적인 객관식 시험으로는 절대로 학생들이 독창성과 깊이 있고 풍부한 전문지식을 획득하도록 유도할 수 없다. 앞으로 한국에서도 이런 주관식 시험으로 평가해야 한다. 따라서 수능시험 같은 대량적, 획일적, 객관식 국가고사는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 객관식은 미국의 학습능력 적성시험(SAT)이나 한국의 수능시험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비교육적인 장치이다. 이는 전국규모의 대단위 시험에 필요한 제도이다. 독일에서는 대학입학 자격시험(Abitur)은 각 고등학교 마다 따로 보며 출제는 졸업생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이 한다. 이게 시험의 원래적인 의미이다. 본래 모든 시험이란 배운 사람에게서 마지막으로 테스트 받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자동차 면허시험에서도(도로 주행) 시험관 옆에 학원 선생이 동승하고 학과시험에서도 시험관이 수험생이 푼 답안지를 현장에서 같이 보고 틀린 곳을 수험생에게 지적해 준다. 결국 학생 교육과 평가의 주체는 담임교사라는 말이다. 우리는 이 단순한 원리를 잊고 있기 때문에 수능 시험 때마다 전국규모의 혼동이 발생한다. 뒤에서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수업과 시험은 서로 떨어질 수 없다.
2. 한국의 교육정책의 정립을 위한 준비
오늘은 순수 학문적 관심을 좀 벗어나 한국의 현실, 아니 그 현실의 일부인 교육 현실을 비판하고 새로운 교육의 이상을 제시하고, 또 그것을 현실화하기위한 노력의 광장입니다. 많은 관심과 성원 그리고 가차없는 비판으로서 교육의 발전을 성취하기를 원합니다.
사실 이 교육 문제는 필자의 독일 생활 9년 내내 부심한 문제입니다.
필자는 독일에서 유학시 쾰른 지역의 한국인 교회에 출석하였으며 또 거기서 그곳의 교포 2세들과 친하게 지냈으며 그들을 통해 독일이 모두가 꿈꾸는 교육의 유토피아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국의 학교와 청소년을 생각하며, 귀국하면 독일식 교육개혁을 일으키리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더욱이 나의 어린 자녀들이 앞으로 한국에서 교육 때문에 받을 고통과 무거운 짐을 생각하니 때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독일에서 목회하시던 어떤 목사님의 아들은 가족이 다시 귀국하면서 자연히 다니던 독일학교에서 한국의 초등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아이는 결국 한국 교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독일에 돌아가 지금은 어떤 교민 집에 머물며 다시 그곳 독일 학교에 다닌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한국에 와서 지방의 어떤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이해하지 못한 것은 숙제를 하지 않았다고 선생님이 매를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 애는 한국의 교실에서 거의 정신 이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 잘못된 한국 교육의 희생자들입니다.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진다면 한국인은 그 우수한 재능으로 인하여 선진국 대열에 금방 합류할 것입니다.
또한 한국의 교육개혁, 사회개혁 그리고 정치문제 등에 대해 나는 쾰른 대학에 유학 중이던 많은 한국인 학생들과 점심 먹고 나서 매일 거의 두 시간씩 토론하였습니다. 그 중 일부는 귀국했고 필자와 가장 많이 이야기를 한 채이병씨(토마스 아퀴나스 전공)는 이제 학위논문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가 귀국하면 다시 정치와 사회 전반에 관해 많은 토론을 나누고 싶습니다. 독일에서 토론이 붙은 만큼 자연히 우리의 관심은 조국의 교육적 상황들 이외에도 독일의 교육제도와 교육의 현실을 지향했었습니다. 유학생 동료들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필자는 따로 시간을 내어 여러 나라의 교육제도를 서로 비교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한국의 교육 현실을 역사적, 세계적인 좌표 안에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필자는 다른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사회가 당면한 수없이 많은 문제 영역 중에서도 교육개혁의 문제가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현금의 IMF 사태 이후 관치금융의 근절과 대기업 구조개혁 등의 문제 그리고 지난 7월 남북 정상회담 이후부터의 분단의 극복과 통일의 문제 등이 시급한 문제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대학 입시제도를 비롯한 수 많은 교육 정책의 문제들이 도사리고 앉아 있습니다. 해마다 장관이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은 바뀌고 새로운 개선책들이 나오지만 아직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풀리지 않은 채 대학생들은 등록금 인상 저지 투쟁을 벌이고 그에 못지않게 고등학생, 중학생 그리고 심지어는 초등학생까지 학교 문제, 재단의 비리 규탄시위를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더욱 근원적인 문제는 한국의 고등교육 기관과 그 학문적 수준이 극히 저조하다는 것입니다. 신문 지상을 통해 이미 늘리 알려진 것처럼, 한국에서 제일 똑똑하다는 국립 서울 대학교의 연구 실적이 세계에서는 대단히 저조합니다. 그와 또 다른 이유에서 어떤 사람들은 서울대를 폐지하자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 나는 나의 어머니와 또 많은 한국의 부모들의 교육열, 치마바람 등의 사실들을 생각해 봅니다. 자기 몸 희생하면서 오직 자식들 잘되기 만을 바라는 어머니들, 이들의 노고와 희생이 이제 어디에서나 보람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못된 교육에서 잘못된 역사, 비참한 현실이 나옵니다. 사실 지난 IMF 경제 위기도 권위주의적이고 불합리한 정치 뿐만 아니라 그간 수 십년에 걸쳐 누적된 잘못된 교육의 역할이 중차대 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대학교육을 받지 않은 현 김대중 대통령이 그 이전의 고등교육을 받은 대통령들보다 똑똑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 우리 나라 교육이 얼마나 인재를 키우지 못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충 이 정도로 교육의 문제 상황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교육 모순의 핵심적 고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육이, 일본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인재 양성보다는 인재 선발에 치중한다는 것입니다. 필자는 독일에서 유럽인들에 의한 일본 교육제도 비판의 시각을 감지했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일본 교육의 약점이 인재의 교육, 양성(Bildung)보다는 인재의 조기적인 선발(Auswahl)에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일본 특유의 입시지옥을 암시하는 것 입니다. 이런 일본 교육에 관한 구라파의 평가는 한국의 경우 그대로 적용됩니다. 입시 중심의 교육을 극복하고 교육과 양성 중심의 교육이 한시 바삐 정착되어야 합니다.
사실 일본의 교육 문화는 우리에게 너무 친밀하고 내면화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일본 교육 제도에 대해 객관적인 시점을 확보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사무라이 유치원(엘리뜨 유치원)에 대해서 필자는 우연히 독일 TV에서도 보고 귀국하여 한국 TV에서도 보았는데, 그 방송의 태도가 두 나라에서 완전히 달랐습니다; 독일 RTL 방송은 추운 겨울에도 웃통 벗고 달리는 일본 유치원의 아이들의 모습을 보여준 뒤 그렇게 시키는 유치원을 풍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어린이 방송프로를 보니 그것을 멋있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필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6년 개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개근 및 전근 등을 선생님들이 장려하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쉬워 6년 개근이지 실제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개근을 하기 위해 어린 안재오는 섭씨 40 도의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밥하는 누나의 등에 업혀 등교했었고 이를 본 담임 선생님은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독일에 살아 보니까 그런 일, 즉 (심하게) 아픈 애가 학교에 가는 것은 칭찬 받을 일이 아니라 또라이 짓이었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의 경우 아픈 애는 -다 나을 때까지- 유치원에 갈 수 없고 또 다 나아서 유치원에 다시 갈 때는 반드시 의사의 증명서, 즉 다른 아이에게 그 병이 전염될 수 없다는 증명서를 부모가 가지고 유치원에 갑니다.
이런 일본식의 군사문화, 권위주의 문화는 또한 중고등학교에서 복장검사를 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소병국씨는 그의 학교시절을 이렇게 회상합니다 : "학교 다니면서 머리검사와 복장검사에서 항상 걸려서 교무실에 밥먹듯이 끌려 다녔다. 정말 할말이 많다. 이 말이 제대로 표현한 것인지 모르겠으나, 교복에서부터 시작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참견하고 모든 것을 규제하는 것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교복을 입는 것은 사실 입는 쪽에서도 아침마다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고 편한 점도 많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교복 입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불만을 가진 것은 그 외의 것들이다. 가방을 늘어뜨려서 메지 마라. 레이스 달린 양말을 신지 마라, 길이가 긴 양말은 접어서 신어라. 굽이 높은 구두 신지 마라. 머리는 귀밑 3cm까지다. 머리가 너무 짧다. 등등등...몸에 부착되는 것들은 하나하나 일일이 다 간섭받는다".
필자 역시 고등학교 시절 머리칼이 좀 길다고 담임선생님이 바리캉으로 나의 머리에 고속도로를 만든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글을 보니 현재 복장 규제가 20년 전보다 더 심해진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지엽적인 현상을 넘어서 도대체 왜 한국에서 이렇게 규제와 간섭이 심한지 한 가지만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것은 군사문화의 잔재라고 보입니다. 교육기관에서 학생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군인을 키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육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군대에서는 오직 명령과 복종입니다. 우리 교육 역시 개성과 창의성보다는 수동적 암기와 적응만을 문제시 합니다. 수능시험은 실은 순응(conformity, agreement) 시험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대학 나왔다고 할지라도 문제해결의 능력은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현실은 늘 바뀌기 때문입니다. 현실 자체가 창의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공식이나 법칙은 때로 무용지물입니다. 성장기의 인간에게 충분히 시간을 주어야 합니다. 입시지옥은 이를 방해하고 모두 군바리같은 획일성만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입시지옥, 보충수업, 학원공부 없는 자율적인 학습과 교육의 가능성을 찾아야 합니다.
또 다른 일본식 교육 풍조의 예로 조기 교육 붐을 들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자세히 말하는 것은 본 논문의 취지를 벗어 나기 때문에 한 가지만 말하면, 한국의 학부모들의 조기교육열은 역시 일본의 모방이라는 것이며, 필자의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은 예능의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기 교육이 해롭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적으로 정신활동을 시작하는 성년기가 되면, 필요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어린 시절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습득한 영어 단어, 문장 몇 개는 그 때 아무런 차이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나는 이것을 인간 정신의 무한성이라고 명명합니다. 또한 엄마의 손에 끌리어 강제로 받는 학원이나 개인 지도는 아동의 학습 흥미를 쇠퇴시키기 때문에 결국 안 하느니 보다 못한 것입니다.
다시 한번 요점을 정리하면 인간 정신의 자발성은 그것이 책임의식과 결부될 때 무한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결국 그런 정신의 소유자가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필자는 일본에 대해 하등의 편견이 없습니다. 그리고 필자가 만난 일본인들은 인간적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과거에 일본이 한국을 지배했기 때문에 혹은 근래 일본인들의 복고주의, 우경화, 재무장, 역사왜곡의 역겨움 때문에 이렇게 일본의 교육 방식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일본식의 교육제도가 인간성의 고유한 발전을 방해하고 또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다시 대학 교육의 문제로 돌아 갑시다. 필자의 견해를 따르면 오늘 날 세계적으로 보아 대학 교육 제도는 근본적으로 양대 조류가 있으며 또 그 양대 조류를 혼합한 세 번째 조류가 있다고 봅니다: (유럽)대륙식, 영미식 그리고 일본식. 대륙식의 대학 교육을 시행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스웨덴 등 유럽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있으며, 그 모범은 독일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영미식은 영국과 미국 등에서 시행하고 그 모범은 역시 미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식은 일본, 한국 대만 등에서 시행되고 그 모범은 당연히 일본입니다. 위의 세가지 유형의 대학제도를 설명의 편의를 위해 간단히 독일식, 미국식 그리고 일본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독일식은 근본적으로 교육의 국가주의라고 규정됩니다. 여기서는 모든 국민의 교육 비용을 원칙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가 부담합니다, 그러니 교육의 주체도 자연히 개인이나 단체가 아니라 (국가)정부가 됩니다. 이 때 실제로 학생이 지불하는 교육비나 등록금이 극히 적습니다 - 독일의 경우 2000년 현재 평균적으로 교통카드 포함해 한학기에 십만원 (190 마르크, 1 마르크= 510원). 여기에 비해 미국식의 경우 대학교육의 주체는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아니라 각 개별 대학입니다. 따라서 미국은 대학교육의 개인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에서 주정부의 교육부에서 하는 일도 대학 재정지원이나 장학금지원 그리고 통계 등에 국한되고 있습니다. 또한 연방정부의 교육부에는 우리나라처럼 대학담당 부서가 전혀 없다. 이는 달리 말해 국가 차원의 대학 교육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현재 대학 자율화를 부르짖는 한국 정부의 경우 이 대목을 벤치마킹해야 합니다. 앞으로 상세히 논하겠지만 정부가 진짜로 대학의 자율화, 자립화를 원한다면 교육부의 대학담당 부서를 없애고 중앙적인 대학정책을 폐지하면 미국과 같은 대학의 자율화, 자립화는 금방 이루어 집니다.)
미국식의 대학 정책은 대학의 개인주의(개별 대학 중심주의) 그리고 대학교육의 시장주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대학 입학부터 졸업까지 전과정을 대학 총장이나 이사회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대학은 사립이나 공립을 막론하고 하나의 회사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가장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총장(President)은 사장이고 교수는 사원 그리고 학생은 손님인 셈이지요. 따라서 등록금 문제도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결정됩니다, 즉 좋은 대학은 엄청 비싸고 (평판이) 좋지 않은 대학은 그만큼 쌉니다. 그래도 등록금이 독일보다는 평균적으로 월등 비싸고 한국 보다도 비쌉니다. (한 학기 5,000,$ - 20,000, $)한국의 경우 사립 대학이나 공립 대학이나 모두 교육부의 대학정책을 따른다는 점에서 독일식입니다, 그러나 대학재정의 대부분이 등록금 수입에 의존하는 면에서는 미국식입니다.( 일본도 이와 유사할 것으로 사료된다.) 다시 말하면 정부는 대학을 통제만 하고 재정 책임은 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대학의 학사 행정을 모두 그 대학 자치에 맡기면서도 많은 재정 원조를 합니다. 한국의 대학 교육의 현실은 이처럼 획일적-중심적 요소와 자유주의적-탈중심적 요소의 혼합에서 오는 혼란의 양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야기되는 문제가 결국 입시지옥, 과열 사교육, 재단비리 등의 사회적 부조리와 무능한 인재의 배출이라는 국가적 손실입니다. 지금 교육 행정은 가능한 미국식 대학 자율주의를 지향합니다. 필자는 미국식에 대한 편견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에서 벌써 십년 이상 대학 자율화를 떠들면서도 아직까지 그것이 정착되지 않는 것을 볼 때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부가 미국식의 대학교육의 자율주의, 시장주의를 선포하면서도 실제로는 모든 것을 획일적-국가중심적으로 처리하는 자기 모순을 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우리나라의 초,중,고등학교 교육은 국가차원에서 마련하는 교육과정을 근거로 한다. 따라서 학교교육의 실제는 교육과정의 영향 하에 있게 되고, 학교교육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교육과정을 아는 것이 요구된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중앙 집권적인 획일화된 제도를 말합니다. 그런데 독일 같은 곳에서 국가 교육주의를 실시하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처럼 “국가차원에서 마련하는 교육과정”을 실시하지 않습니다. 독일에서 모든 교육행정의 중심은 지방자치 단체입니다. 국가란 단순히 공적인 실체(public thing)를 말합니다. 그것이 꼭 중앙정부를 뜻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독일에서는 각 주(州) 교육 장관들이 서로 모여 지방의 차이를 조정합니다. 따라서 국가교육주의라고 해도 그것은 우리나라처럼 하향식의 획일적인 관료주의가 아니라 상향식의 탈중심주의를 의미합니다.
지금껏 교육부 장관들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미국식 대학 시스템의 장점만 보고 그것이 작동하는 기본조건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육부의 대학교육 지원국을 폐지하면 대학 자율화 절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역시 혁명적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교육 정치인들은 한 제도의 개혁이 요청하는 복잡한 현실의 총체적 요소들을 보지 못하고 일면적이고 근시안적인 태도로 현실을 조급하게 칼질하려 했으나 그들은 도리어 항상 그 (잘못된) 현실에 의해 스스로 난자되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지식기반 사회와 신지식인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교육은 지식기반사회를 이끌 신지식인을 길러내는데 주력해야 한다”라고 국정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씨는 역대 대통령들 가운데서 비교적 지식과 상식은 풍부하나 문제는 그의 실천적 통찰력과 의지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정부는 지식기반 사회라는 좋은 구호를 BK21같은 전혀 엉뚱한 정책과 연결시켜 한국사회의 망국적 병폐인 학벌사회를 더욱 고착화시킨다는 점입니다. 하긴 이 것은 벌써 김대중 이전 김영삼 정부가 시작한, 미련한 정책이었습니다. 이들 민주화된 국가의 초대 두 정부는 실은 군사정권보다 교육에 대해서 더 황당한 일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저도 독일 유학시절(1991-99)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즉 잘하는 대학 30개를 골라 거기에만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할 계획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 유학생들은 그런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 “교육을 시장의 논리에 맡기지 말라”고 우리는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가 깨달은 것은 인문학(Humanities)및 그 밖의 기초 학문들은 앞으로는 대학에서 찬밥 신세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이런 교육의 시장주의, 소비자 중심주의는 학문의 황폐화를 가속화했습니다.또한 이런 시장주의 원리를 도입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철학자라는 사실을 알고는 어떤 후배는 “철학이 스스로 무덤을 팠어”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상세히 밝히겠지만 철학과 인문학이야말로 지식기반 사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과 미국에서도 대학에서 철학내지 인문 교양을 더 실시하려고 합니다.
철학의 정신은 기업의 정신, 상업의 정신과 일맥상통합니다. 필자의 출판 예정인 저서 “논리의 탄생”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겠습니다. 철학은 지도자 양성의 학문이요, 세상 이치의 학문이요, 머리를 영리하게, 논리적으로 만드는 탁월한 학문입니다.
김영삼 정부 이래로 한국의 교육 정책을 장악한 미국출신의 학자, 관리들 그들은 “미국 교육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다음 정권부터 우리는 결코 교육 현실을 방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일본과 미국의 대학제도를 흉내내어 국립대학마저 민영화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전대학의 국영화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는 결코 미국에 대한 감정적 반대가 아닙니다. 미국에서 배울 것은 많지만 미국의 사회제도, 교육제도는 NO 입니다.
우리 민족의 특성은 강력한 자발성입니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 학부제, 대학원 중심제, BK21 등의 각 대학의 사정에도 맞지 않는 중앙집권적인 대학정책을 없애면, 교육부 재정 지원 없이 그 학교 등록금 수입만 가지고도 지금의 상태보다 훨씬 좋은 대학의 수준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학부제, 대학원 중심제, BK21 등의 정부 시책이 그 자체로 나쁘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각 대학이 스스로 자유롭게 취사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육부가 과감하게 대학의 자율화를 취하지 못하는 이유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것은 과감한 자유, 자율화가 야기할 사회적 혼란 때문입니다.예를 들면 기부금 입학의 경우 미국에서라면 그것은 대학 행정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한국같이 좁고 역사가 오래된 나라에서 사람들은 유달리 시기심이 강하고 (사회적) 차별대우를 결코 참지 못합니다. 따라서 미스코리아의 특혜 입학에 대해 우리 사회나 언론은 그렇게 예민하고 시끄러운 것입니다. 이 정도로 교육적 상황의 묘사와 그 문제의 제기를 시도했습니다. 앞으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대안을 추적하겠습니다. (끝)
3.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남북문제는 지역문제로 축소된다.
a) 통일의 준비 - 남한의 사회변혁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통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독일의 경우에 보는 것처럼 통일은 분단국의 정치적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공산권 주민들이 대거 자유진영으로 탈출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동서독 정부는 지금의 남북한 정부처럼 꾸준히 통일을 위한 회담과 선언 그리고 노력을 경주했으나 결과는 불가능이었다. 그래서 서독정부도 통일되기 조금전인 1986년 통일을 향한 정치적 노력을 거의 포기했었다. 그러나 뜻밖에 1989년 10월 드디어 역사적인 동 서독 통일이 이루어 졌다. 그 당시 유명한 기자는 “독일 통일은 신의 선물이다”라고 했다. 그 과정은 한마디로 동독에 염증을 느낀 주민들이 헝가리, 폴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통하여 대거 탈출 내지 망명을 시도했고 얼마 후 동독에서 대규모 반정부 데모가 발생한 때문이었다. 당시 서독 수상은 이러한 동독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들을 환영하고 서독에, 즉 독일연방공화국에 동독을 포함시켰기에 통일의 과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 방법도 환영, 영접 통일론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남한이 북한을 같은 형제요, 국민으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 때는 곧 도래한다. 문제는 독일의 경우에서 보는 것처럼 통일 이후의 문제이다. 서독 시민들은 통일 된지 13년이 된 오늘까지 통일세금(Solidaritätszuschuß)를 소득에 따라 일년에 몇 십 만원씩 희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인들은 서독에 대해 소외감과 열등감 그리고 적대감마저 가지고 있으며 자신들을 2등 국민으로 치부한다. 서독인들은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을 더욱 높여 다시 쌓자는 말을 한다. 잘못하면 다시 분열될 우려도 있다. 통일의 문제는 결국 지역간의 차이문제로 전환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협상과 회의를 통해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물론 그런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결국 통일은 남으로 내려오려는 북의 인민들의 의지와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려는 남의 준비 및 결단에 달려있다. 탈북자의 문제에서 보듯이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감을 느낀다면 통일되어서도 이런 현상은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교육공화국’ 자료에서 지역문제의 해결의 실마리가 교육제도의 개선에 있음을 밝혔다. 미국식 학교 자율주의 시장주의는 결코 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도리어 (피)교육의 자유, 교육의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정부나 한나라당의 교육정책처럼 학교자율화, 차별화를 주장할 때 우리는 남한 사회의 분열을 막을 수 없고 하물며 장차 통일 준비하는 교육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리고 남한이 북한을 포용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장점-무상교육, 사회복지-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된다. 경제적으로 그리고 사회적, 도덕적으로 남한이 우월하다면 북한의 존립이유가 사실상 사라진다. 따라서 필자의 통일론은 냉전적 적대감에 기초한 무력통일, 흡수통일도 아니고 진보적 남북 해체론 혹은 연방제(연합제) 통일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남의 포괄성, 정당성에 기초를 두고 북한의 국민들의 자발적 소원에 남한이 부응하는 남한중심적 통일이다. 그러나 필자는 현재의 대한민국의 상태는 아직 북한에 비해 월등히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다.
b) 통일의 주체에 관한 남한의 정치적 역사적 정당성
북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통일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고 자부한다. 그리고 북한 정부는 자신들이 역사적으로 더 많은 민족적 항일운동을 했고 따라서 자신이 통일의 주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일 그들의 주장처럼 일제강점기에 우익보다 좌익이 다소간 더 치열히 항일운동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곧 북의 정통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그런데 해방후의 과정을 보면 북한이 일인독재에 시달리고 있을 때 남한의 민주세력은 지칠 줄 모르는 화산처럼 독재자들의 폭거에 치열히 투쟁하여 이제 민주주주의를 달성했다. 필자는 이런 남한의 민중과 학생들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하는 노력 그리고 그들의 자유정신과 그 성과에서 남한의 정치 도덕적 우월성을 인식한다. 이제 우리는 선배들의 운동정신을 이어받아 사회개혁을 완수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통일의 필수적인 준비이다. (끝)
4. 사교육비는 자본의 낭비이다
1) 평준화 깨기의 스캔들
근래 한국은 대통령 후보 경선과 최규선 게이트 그리고 대통령 친인척 비리 등의 시끄러운 소용돌이 정국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핫 이슈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하자 대표적 보수언론인 C일보는 아니나 다를까 평상시 그들의 십팔번 레파토리 '국가 경쟁력' 과 '교육개혁' 가락을 다시 들고 나왔다. "평준화깨기"가 그 타이틀곡이다. 이전까지 그들은 평준화를 전면 거부했으나 요즘은 상당히 전략적으로 섬세해져 "평준화의 틀은 유지하면서 자립형 사학을 획기적으로 늘리자"라고 평준화와 차별화를 동시에 주문하는 방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는 결국 영미식 제도를 말한다. 필자는 2002. 3.18 일치 한겨레 신문 '왜냐면'에서 교육제도를 크게 영미식과 (유럽)대륙식으로 나누었었다. 영미식이란 다시 말해 중등교육의 경우 대다수의 공립학교와 극소수의 명문 (자립형)사립학교를 유지하고 대학의 경우 자율적, 독립적 운영을 하는 시스템을 말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평준화니 비평준화니 하는 개념이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공화주의적 교육모델을 가지느냐 아니면 개인주의 내지 자유주의적 교육모델을 가지느냐 하는 문제이다. 국가주의 모델이 반드시 평준화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령 가령 프랑스 같은 경우 그 나라는 국가주의 교육철학의 틀 내에서 (대학)엘리트주의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현재 신문지상에서 논의되는 교육의 수준화니 수월권의 쟁취니 자율화, 다양화 또는 교육개방이라는 허다한 구호들은 결국 모두 영미식 모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사교육비 지출의 문제점들
그런데 이런 각종의 영미식 교육정책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하나의 중요한 문제에 대답을 해야 한다: 사교육비의 문제이다. 교육의 자율, 개방을 하면 사교육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으로 그들은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대학 자율화의 대표적인 나라인 미국의 경우 자녀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예능, 체육) 등의 과외공부 비용이 엄청나다. 또한 대표적인 명문 사립학교를 육성하는 영국의 경우 아이를 낳기도 전부터 엘리트 유치원, 학교에 등록부터 시켜야 한다는 -그것도 2-3대 전에- 이야기를 주위에서 듣는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적 경험은 과거의 일류중학교, 명문고등학교 등이 있을 때 학부모들의 치마바람이나 과외가 얼마나 극성스러웠는지 알려준다.
만약 이런 사정도 모르고 오직 자녀교육 하나에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대한민국에서 명문고(자립형 사립고)를 부활시킨다면 엄청난 사회적 혼란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쉽게 예측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해결책은 영미식의 자립형 고교, 자율적 대학이 아니라 (유럽)대륙식의 공립학교, 전대학의 국립화이다. 그리고 이런 공립, 국립 학교 내에서도 얼마든지 영재 교육, 엘리트 교육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현재 독일과 프랑스의 교육현실이 보여주고 있다. 독일의 경우 범상하지 않은 아이들은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영재학교에 보내진다. 그리고 프랑스의 경우 예를 들어 국립행정학교에서는 프랑스의 정치, 경제지도자를 양성한다. 따라서 현행의 우열 혼합반이라는 한국 고교의 현실은 참다운 교육의 실현과 더불어 해소될 것으로 믿는다. 특히 이 문제는 지나친 입시경쟁으로 인해 모두들 대학에 진학하려고 해서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대륙처럼 대학 입시가 아니라 졸업이 문제가 되는 사회에서는 입시경쟁이 사라진다. 따라서 자연히 입시를 위한 사교육이 발 붙일 틈이 없다. 그 대신 대학에 가서는 낙오되지 않기 위해서 다들 열심히 공부한다. 독일의 경우 고등학교(김나지움)에서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지 않던 아이들도 대학에 가서는 스스로의 책임감에서 정신병원에 갈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공부한다. 참고로 독일의 각 대학에는 모두 심리상담소가 있고 거기에서 학업의 스트레스를 이기기 위한 심리-정신 훈련 프로그램이 정기적으로 실시된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생의 때에 짊어질 학업부담감을 거기서는 대학에서 짊어진다는 것이다. 자라나는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 나라가 부흥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때에 얼마나 공부해야 하는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필자는 독일에서 어떤 여학생이 지도교수로부터 그녀가 1년간이나 매달린 연구논문이 부실하다는 논평을 받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우는 것을 보았다. 필자 역시 학위 논문을 쓸 때 한국에서 볼 수 없는 혹독한 훈련을 받았었다. 한국에서처럼 학생들이 비싼 등록금을 내고 공부하는 경우 지도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낙제를 시키거나 나쁜 학점을 주기가 대단히 어렵다.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등록금만 꼬박 꼬박 부을 수 있으면 누구나 졸업할 수 있는 것이 한국 대학의 실상이다. 심지어 어느 대학 구내 식당 복도에서 한 여학생이 "심심한데 졸업이나 해 버릴까?" 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필자는 고소를 금치 못했었다, 독일의 대학 과정과 한국의 그것이 극명히 대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입학생의 50%이상 탈락하는 독일의 대학 졸업, 숫한 학생들이 학업(전공) 스트레스로 심리 치료를 받는 독일. 나는 그곳에서 한국 유학생 중 미친 사람을 여럿 알고 있다. 독일의 대학은 정말 무섭다. 그것도 미국처럼 명문 대학은 없지만 어느 대학에서건 다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한다. 이 것이야 말로 국가 교육주의의 모범적인 사례이다.
만약 독일에서처럼 학생들이 국가의 세금으로 공부한다면 인격적이면서도 학문적인 학생지도가 가능해 질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대학을 국립화하는 예산은 어디서 충당하나 하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 현재 우리나라의 사교육비가 26조라고 한다. 이는 국가교육예산 21조원을 훨씬 넘어서고 있다, 따라서 만약 사교육이 원천적으로 절약될 수 있다면 교육 국가주의, 공화주의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 나라 국민들 돈이 없는 게 아니다. 단지 그 돈을 잘못 쓰고 있을 뿐이다. 사실 사교육비는 자본의 낭비이다.
한국교육의 병폐인 사교육비의 부작용에 관해 어떤 학생은 이렇게 말한다 : "생산의 재투자에 쓰여 져야 할 돈들이 사교육비로 지출되고 만다면 경제가 어려운 이 시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사교육비의 경제적 비효율성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런데 비효율적인 사교육을 근본적으로 폐기 처분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이 벌써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시행되고 있다. 다시 말해 과외가 없는 나라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이 학생은 "그러나 지금의 사교육비 지출은 사회에 필요한 인재 배출의 목적이 아닌 단순히 진학위주의 교육이므로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 자본의 낭비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참 올바른 지적이다. 이는 매년 26조의 사교육비가 결국 자본의 낭비에 불과하며 국민들이 고통스럽게 벌어들인 돈을 쓸데 없는 곳에 엄청나게 퍼붓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교육이 다 낭비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입시대비 학원비용 및 과외비로 지출되고 있다. 이 돈들은 원천적으로 생산을 위한 재투자에 지출되어야 하는 돈들이다. 만약 우리가 독일식의 국가교육주의를 채택할 경우 이 돈이 절약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국민생산은 늘어 나고 따라서 세금수입도 더 늘어날 것이다. 물론 학원이나 과외가 사라질 운명이라면 그 종사자들은 순간적으로 일자리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들도 원래의 일자리로 복귀하거나 다른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생들 중에 과외지도를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이들은 사교육이 사라질 때 과외지도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니냐 하는 불안을 표시하는 친구들이 있어서 여기에 대한 설명을 좀 하겠다.
GDP수준이 높은 나라는 아르바이트 수당도 높아 진다. 가령 독일에서 여름 방학 아르바이트 해서(2-3개월) 한화로 약 7-8 백만원 또는 1000 만원 버는 한국인 유학생들도 많다. 그러면 1년 학자금을 완전히 스스로 충당할 수 있다.
그리고 뛰어난 학원 선생님들은 학교로 복직을 할 수 있다면, 현재 한참 땅에 떨어진 공교육의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사교육을 철폐한다고 해서 즉 학원이나 과외를 못하게 되어도 순간적으로는 혼란이 발생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이 문제들도 잘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는 주어진 현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식의 시장 교육주의를 받아들일 경우 사교육비는 지금보다 더 폭증할 것이다. 독일식의 국가교육주의는 평준화와는 다른 개념이다. 지금 한국의 평준화는 "학교별로 평가를 통한 경쟁"이 없다. 그러나 독일 경우 학교별 제반 자료가 공개되며 학생이나 학부모는 이를 참고로 해서 가고 싶은 고등학교에 갈 수 있다. 이 모든 꿈같은 일들이 국가 교육주의 하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 (끝)
5. 점점 벌어지는 지역간의 차이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가구의 계층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졌다고 한다.
계층간 뿐만 지역간 수준의 차이도 점점 벌어지는 것 같다. 특히 교육 시설과 여건에 있어서 지방과 서울의 차이는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며칠 전 고향(부산) 친구들과 모처럼 만나 이야기를 하다가 부산의 학부모들이 서울, 특히 강남에 자식을 보내 공부시키느니 차라리 해외에 유학을 보내겠다는 말들을 한다는 것을 알고 쇼크를 먹었다. 즉 강남에서 학원보내는 것이 해외에서 유학하는 것보다 더 비싸다는 것이다.
또 어떤 상당히 잘 사시는 부산의 대학교수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에게 목동에 작은 아파트(14평)를 하나 장만해 주었는데 거의 2억 가까이 되는 거금을 투입하고 난 뒤 지금은 빚 때문에 고민하신다는 말도 들었다.
부산은 그래도 한국 제 2의 도시인데 거기서도 이제 서울과의 수준차이를 지각하고 소외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면 다른 작은 지방의 도시나 농어촌은 얼마나 큰 괴리를 느낄 것인가? 알다시피 지방 대학에는 졸업생들은 취업이 거의 불가능하고 이제 신입생도 잘 오지 않는다. 어떤 여학생은 "후지고 비전 없는 지방대학"라는 다소 지나친 표현을 하기는 했지만 여기서 우리는 현재 한국사회의 엄청난 모순,즉 지방과 서울의 격차를 다시금 뼈저리게 느낀다.
이 구절은 지방대학을 무시하는 교만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을 보는 지방대학 사람들은 자기모멸에 빠질 것이 아니라 교육공화국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 한다. 필자 역시 지방대학에서 강의하는 강사로서 우리 학생들이 당하는 무시와 박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공화주의 대학교육을 실시하는 독일의 경우 지방이니 수도니 하는 구분이 없다. 그리고 도대체 출신 대학이니 동문이니 하는 개념도 없다. 거기서 모든 대학생은 진정으로 하나이다. 그리고 대부분 학생들은 학교를 2-3 번 바꾸기 때문에 자기 모교의 정체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서울대, 연세대 혹은 고려대 같은 각 학교의 정체성(identity)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우리나라는 국민들 활동의 모든 것이 자녀교육이라는 한가지 목적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시골이나 지방을 떠나 물가나 땅값이 비싼 서울로 자꾸 모여드는 이유도 자식 교육 잘 시키기 위해서이다. 정부도 지역간의 불균형을 없애기 위하여 그간 산업이나 행정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지만 실효가 없었고 인재들은 자꾸 서울로, 수도권으로 모여들고 있다.
어떤 교수님은 "지방으로 내려가는 것은 밀리는 것이다"라고 하시며 필자에게 (직업문제로) 지방으로 내려가지 말 것을 충고해 주셨다. 이 문제는 결국 교육제도의 개선으로 밖에는 풀리지 않는다. 필자는 한겨레 『왜냐면』2002. 3,19 일자에서 (전)대학의 국립화를 주장했었고 그 가능성을 원론적으로 타진했다.
지금 같은 대학, 고등학교의 자율화는 결코 교육의 소외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필자는 서울시 교육감이 서울에서 자립형 사립고의 허용을 막은 것은 잘한 일이라고 본다. 보수 언론들은 선동적인 정치 이슈가 없으면 지면에 국가경쟁력과 (미국식의) 교육제도 도입을 외친다. 필자는 남북 통일 이전에 지역적 통일을 요청한다. 문화, 교육, 산업의 지역적 다원화, 민주화야 말로 이 시대의 이념이다.
6. 대학 교육 시스템 분류
본인은 독일에서 9년 간의 유학기간 동안에도 항상 한국의 교육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에서 오는 교육개혁의 뉴스들과 독일의 교육상황을 비교해 보곤 했다. 그리고 같은 유학생끼리 이 문제로 많은 토론을 한 기억이 새롭다. 이제 귀국한지 2년이 넘었고 스스로도 한국 교육의 현실에(대학 강사) 직접 참여하면서 보고 느낀 점이 많아 이 문제에 관한 소견을 간단히 밝혀 보고 싶다.
교육개혁의 논의를 주도하는 한국의 메이저 신문들은 미국의 우수 고교, 대학의 예를 들면서 한국의 교육의 난맥을 질타한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같이 (고교)평준화가 학생들의 학력을 하향시키고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킨다고 한다. 오늘 날 공교육의 난맥과 그에 따르는 교육이민의 증가 역시 엘리트 학교의 부활과 더불어 사라진다고 역설한다.
교육부의 개혁 정책의 난맥 역시 비판된다. 이제는 재경부와 KDI까지 나서서 교육의 평준화 정책 대신 우열정책을 쓰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이런 문제의식이 모두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분명 현행의 교육제도와 그 현실은 붕괴 일보직전에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에 있어서 너무 일방적인 견해들만이 판을 치고 있어서 그 반대 의견을 제시하고 진정한 교육개혁의 논의를 시작해 보고 싶다.
여기에 답하기 전 우선 거시적인 고등 교육제도의 유형별 분석이 있어야 하겠다. 여기서는 대학교육개혁의 문제만을 고려해 보겠다. 대학교육의 올바른 방향이 정해지면 그 밑의 단계의 교육은 자동적으로 윤곽이 잡히게 된다.
필자는 현재 시행중인 세계의 대학 교육 시스템을 1)독일식 2)미국식 3) 한국식 의 3 가지로 분류한다. (한국식은 근본적으로 일본식이라고 해야 하나 세부적인 차이 때문에 편의상 한국식으로 통칭한다.
(1) 교육 시스템의 분류
a) 독일식의 경우 교육정책과 교육 재정을 국가가 전적으로 맡아 하는 대학교육의 국가주의를 뜻한다. 오늘 날 구라파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이는 달리 말하면 교육의 평등주의 내지는 ‘기회균등주의’라고 할 수 있다. 대학교육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 내지 정부이다. 물론 이 정부는 꼭 중앙정부를 뜻하지는 않는다.
b) 미국식의 경우 대학 교육의 정책과 재정을 근본적으로 개별대학이 맡아서 하는 대학교육의 개인주의, 자율주의를 뜻한다. 물론 국가와 정부의 대학에 대한 재정지원이나 연구비, 장학금 등의 지원은 있지만 대학 행정이나 정책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이 제도는 달리 말하면 대학교육의 자유주의 또는 시장주의라고 할 수 있다.
c) 한국식의 경우 a)과 b)의 절충, 혼합 방식으로서 기본적으로 국가, 정부가 대학 교육 정책을 통괄 추진한다. 그러나 대학 재정은 대부분 대학 자율에 맡기는 방식을 취한다. 기타 사립대와 국립대의 차이가 있지만 여기서는 도외시한다. 이 경우 입시지옥이라는 문제가 나타난다.
지금까지 교육 개정 문제에 대해 이런 한국식 또는 일본식- 교육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재 미국 교육제도만을 맹목적으로 수용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아니 교육 담당자들은 이 두 체제의 차이점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고 두 체제의 장점만을 도입하려고 하다가 망한 것이다.
(2)양자택일의 논리
현실에서 이미 확인된 것처럼 우리나라 기존의 교육제도, 즉 일본식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유럽인들은 일본의 교육제도를 이렇게 비판했다 : 일본대학은 인재의 양성(Bildung)보다는 선발(Auswahl)에 치중한다. 이는 우리나라에도 똑같이 해당된다 : 어떤 대학에 입학하느냐 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을 거의 결정한다. 일본이나 한국의 불합리적인 교육제도는 청소년들의 균형 있는 발전을 저해하고 국가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남은 것은 독일식과 미국식의 두 가지이다, 즉 대학의 국가주의와 개인주의.
이 두 가지는 모두 훌륭한 제도이다; 우선 독일식의 경우 장점은 교육의 기회균등이 완전히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육재정을 전적으로 국가가 책임지기 때문에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국민은 무상으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그 외에 음악, 무용, 스포츠 교육의 기회까지 사회적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가난한 서민들의 자녀들도 아무런 서러움 없이 교육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독일식 (대학)교육의 단점은 정부의 재정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교육의 관료화, 경직화 등이 있다.
또 미국식의 장점은 대학의 자율에 기인한다. 대학의 성립부터가 시장구조에 기초하기 때문에 학교는 항상 사회적인 필요성에 기민하게 반응한다; 따라서 산학(産學)의 연계성이 잘 되고, 인센티브를 통해 연구자들의 연구실적을 크게 올릴 수 있다. 특히 공업과 기술의 무한 경쟁의 시대, 철저한 지식 독점의 시대에 엘리트 교육의 필요성이 증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가의 재정부담이 크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식 교육의 단점은 소외된 계층은 영영 교육의 기회가 줄어들고 범죄가 증가하며 또 부(富)의 세습화, 대물림이 생긴다는 것이다. 흑인 청소년 범죄의 악순환을 상기하자.
필자는 우리 국민들에게 이 두 가지 교육의 대안을 두고 한 번 고민해 보라고 하고 싶다. 어느 쪽이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한 시스템을 취하면 그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까지도 모조리 가져와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 정부는 미국식의 대학 자율주의도 해보고 싶고 독일식의 평등주의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싸게 먹히고 후자는 대다수 국민들의 정서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제도를 고려할 때, 한국의 교육 현실은 어느 한 정책을 일관성있게 밀어 부치기 어렵다는 것이다. 미국식의 대학 개인주의, 자율주의의 경우 그것을 시행하기는 쉽다 : 한국 교육부의 대학교육지원국을 폐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여론이나 국민의 심리가 대학교 자율이 야기하는 현상들을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기부금 입학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생각해 보자. 그러나 독일식의 전교육 국가부담을 하자니 재정적인 지원이 안 된다. 이런 딜렘마에 처한 것이 오늘의 우리의 교육 상황이다.
현재 독일 수상인 슈뢰더(G. Schroeder)의 경우 아주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가 이차 대전에서 전몰하고 어머니가 청소부를 해서 자녀를 키운, 극히 가난한 가정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교육의 국가주의 덕택으로 독일의 제 일인자 수상의 자리에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그가 자주 하는 말 “나는 나의 출생을 안다”(Ich weiβ , woher ich komme)은 그의 성장 배경에 대한 인식을 말하며 결코 수상이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잊지 않겠다는 말이다.
대학의 경우 등록금이 없고 학자금융자(Bafög)까지 받을 수 있는 독일은 가히 교육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근래에는 학생의 수는 증가하고 시설과 교수의 수는 부족하여 대학개혁을 외치는 소리가 -예를 들면 등록금 제도의 재도입- 많기는 하다.
그 반면에 교육의 국가주의의 단점은 엄청난 국가 예산이 교육에 투입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회 복지 제도가 잘 된 북구의 나라에서 거의 그렇듯이 소득이 높은 사람들은 소득의 50% 정도를 세금으로 바쳐야 한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값비싼 독일식보다는 값싼 미국식을 선호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대학)교육의 국가주의의 경우 사교육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으므로 우리도 한번 이 제도의 도입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아야 한다.
독일의 경우 어떤 학교이건 간에 입학은 쉽고 졸업은 어렵기 때문에 입학시험을 위한 사교육이 필요 없다는 점이다.
(3) 독일식 대학제도 도입가능성 - 사교육비를 절약하여 재원을 증대한다.
입시지옥의 한국은 매년 26조원의 사교육비(과외비)를 쓴다고 한다. 그러나 국가주의의 경우는 입학시험보다는 졸업시험(Examen)을 중시하기 때문에 입학을 위한 사교육은 불필요하다. 따라서 26조원의 사교육비를 대학 재정으로 돌릴 수 있다면 독일식 제도의 도입은 가능해 질 것이다.
요즘 고등학생을 가진 부모의 경우 백만원 이상의 과외 비용을 쓰는 경우가 많다. 굳이 세율을 높이지 않더라도 만약 그 백만원을 교육비로 지출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경우를 생각해보자. 그 돈을 저축, 투자, 소비에 쓴다고 하면 경제는 그만큼 활성화될 것이고 세수는 증대되며 따라서 굳이 소득세니 교육세를 더 거두지 않아도 국가의 세수는 늘어나고 교육재정을 위한 자유공간은 늘어날 것이다. 그럴 경우 학원 선생들이나 과외 지도하는 대학생들은 피해를 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독일식 제도의 조건은 대학교수의 자질과 권위의 문제이다. 졸업시험제도를 도입할 경우 그 평가에 반발하는 학생이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교수의 자질과 권위가 낮은 경우 이 문제는 심각하다. 독일의 경우 대학 입학은 자유로운 반면 졸업은 어렵기 때문에 신입생의 50%정도가 중도에 탈락한다. 졸업시험(대부분 논문)에서 떨어지는 일부의 학생들은 왕왕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독일식 제도를 도입할 경우 교수자격을 강화해서 그들의 연구 및 평가 능력을 함부로 무시할 수 없게 해야 한다. 독일의 교수자격시험(Habilitation)이 하나의 참고가 될 것이다. 한마디로 독일식 제도의 승패는 교수의 능력과 권위에 달려 있다.
따라서 미국식보다 독일식이 도입하기 더 어렵다: 더 많은 준비와 결단이 요구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까지 그렇게 대학자율화를 부르짖고 미국식의 도입을 추진했으나 안되고 있다. 미국식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국가예산을 절감하고 대학의 자율적 역량을 키우기 때문에 장점이 크다. 더욱이 산학 연계가 잘 되어 대학의 사회적 순발력이 크다.
오늘은 이 정도로 제도를 비교해 보았다. 필자의 견해는 미국식 아니면 독일식의 교육제도를 선호한다, 단 현행의 일본식 입시지옥만은 반드시 뿌리 뽑아야 한다.
미국식과 독일식은 서로 장단점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미국식의 제도는 그 경제적, 산업지향적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한국현실에 도입가능성의 약점이 있다고 본다. 실은 이 제도가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뿌리가 깊고 동일한 혈통 집단의 경우 국민 구성원간의 동질성이 강하게 요구된다 ; 이는 최근의 톱스타 유승준의 병역기피, 혹은 거짓말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상기하면 금방 알 수 있다. 그가 설령 아무리 뛰어난 가수라 할지라도 대한민국 젊은이의 보편적인 의무를 피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런 나라는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다. 차별대우라는 말은 한국에서는 허용될 수가 없다. 나쁘게 말해 국민들의 시기심이 높다. 따라서 미국식 혹은 대학 자율화의 논리가 한국에서 적용되기는 불가능하다.
7.교육공화국 운동 취지문 (2002. 5.25)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앞으로 우리의 정체성(identity)을 "교육공화국"으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운동도 교육공화국운동으로 부르려고 합니다. 이번 주에는 우리의 개혁의 목표를 구호로 설정해 보겠습니다.
첫째 : 교육 해방입니다.
이는 특히 현재의 입시지옥 현상과 관계해서 초, 중, 고 생들의 과중한 학습의 부담을 덜어 주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현행의 대학입시 위주의 획일적인 교육이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타율적이고 비인간적인 학교생활을 시정하자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수업을 들은 한 학생은 이 문제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
“즉 내가 여기서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개인 각자가 뚜렷한 자아 정체감을 갖고 자신이 원하는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교육 여건이 이미 유럽에는 열려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시선을 더 넓혀야 합니다. 주어져 있는 현실이 우리의 숙명이 아닙니다. 여럿이 원하면 의지가 됩니다. 한 학생은 이 문제와 관련해 독일의 교육제도를 모범으로 들면서 한국의 현실을 이렇게 비판했습니다 : “독일의 경우 대학의 서열이란 없다. 자신의 적성과 교수 등을 보고 자신이 대학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졸업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대학을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과다 교육열도 생기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나라 교육실정은 교육에서는 인성보다는 얼마나 좋은 대학을 가느냐가 행복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다. 때문에 우리나라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교육에 온 힘을 쏟아 붓고 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서 부모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조기교육이니 고액 과외 등으로 인한 사교육비의 지출은 엄청 크다”.
위의 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한국의 아이들은 벌써 유치원서부터 자유롭게 놀지 못하고 과중한 학원부담, 학업부담에 시달립니다.
앞에서도 내가 언급한 것처럼 아이들의 교육은 놀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국의 과도한 조기 교육 열풍은 일본에서 배운 것이며 이는 아동교육이 아니라 아동학대라고 규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획일적인 입시지옥에 시달리다 보니 한국의 아이들은 독창적인 자기 세계의 개발을 하지 못하게 되고 거의 다 붕어빵처럼 비슷비슷한 모양과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의 교육에서 가장 큰 맹점은 독창적인 자기개발의 불가능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분야에 대한 흥미를 갖게 되어 집중적으로 파고든다 하더라도 그 분야가 영어나 수학 또는 과학계열이 아니면 독창적이 자기개발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합니다.
무조건 대학의 졸업장을 요구하는 사회분위기 때문에 특별한 전공이나 기술도 인정받기 힘든 게 사실입니다. 따라서 각 개인의 고유한 특기나 소질이 개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음악이나 미술 등 실기 위주의 과목들도 항상 대학이라는 울타리를 필요로 합니다. 독일이나 다른 선진국의 경우 이런 과목들은 굳이 대학이라는 명칭이 아닌 학원이나 아카데미 같은 실습위주의 기관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런 학교에서는 졸업장도 실은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언제라도 오디션 보고 바로 오페라나 오케스트라에 입단이 가능합니다. 한국인 들 이것 저것 아는 것은 많으나 제대로 아는 것, 제대로 하는 것은 극히 저조합니다. 이제부터는 대학은 일반교육보다는 전문인 양성을 목표로 운영해야 합니다. 사실 한국에서 대학의 전공 그리고 학과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이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학생들의 대다수가 그들의 전공에 관계없이 영어 책이나 법전을 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납니다.
전문성과 실천을 중시하지 않는 한국의 교육은 사회적 수요와 공급의 심각한 불일치를 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육이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사용 혹은 활용이 더 중요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 지식을 쓸 수 없다면 배움은 공허한 노력에 불과합니다. 대학교육 받은 사람은 많으나 그런 직장을 가진 사람은 적습니다 : 대부분의 대졸자들은 자기 교육과 무관한 일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면 무엇 하러 그렇게 힘들여 대학 입시준비하고 엄청난 등록금 내며 졸업장을 따야 하는지 회의가 듭니다. 이 모두가 내실보다는 간판만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의 형식주의에 기인합니다. 또한 한국의 학벌주의 풍조도 여기 큰 몫을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은 인재의 양성보다는 인재의 선발에 치중하는 대학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불과 18세에 사람의 전 인생을 결정하는 시험을 봅니다. 한 번 서울대는 영원한 서울대! 한번의 시험으로 귀족과 노비가 분류됩니다.
그런데 조선일보나 한나라당 그리고 현정부가 추진하려는 미국식의 교육시장주의 혹은 신자유주의는 이런 교육의 해방기능, 즉 각개인의 소질과 능력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자기발전을 가능케 하는 여건을 오히려 더 악화시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추구하는 명문학교(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등)와 학벌주의는 입시지옥과 과외 활동을 지금보다 더 부추키고 그만큼 아이들을 입시의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조기교육 및 과외공부로 인해 동심은 멍들고 신체기능의 발육은 현저히 저하됩니다. 따라서 잘못된 교육으로부터 아이들을 해방시키고 합리적이고 자연적인 교육의 도입을 우리는 주장합니다. 여기서도 우리의 모델은 역시 독일의 초중등 교육입니다. 거기에는 거의 모든 학교가 공립이지만 우리나라의 강제적인 평준화와는 다르게 학교를 선택할 권리가 개인에게 주어집니다.
현행 평준화의 문제는 그것이 너무 획일적이고 강제적이어서 학생이나 학부모가 학교를 선택할 기회를 주지않는다는 것입니다. 국가가 교육의 주체가 된다고 해서 강제나 추첨 등의 우연적인 방식으로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됩니다. 국가나 정부도 국민 개개인의 의사를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현행의 주입식, 문제 풀이식, 암기식의 교육과 학습, 그것도 과중한 공부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합니다.
둘째: 교육의 자유입니다.
이는 특히 대학교육의 문제와 관련해서 모든 국민에게 (피)교육의 기회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합니다. 교육 받을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제가 자료실 1번 글에서도 표현한 것처럼 육이오 사변의 월북자들이 월북한 동기가 대개 북에서 공짜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남한에서도 인도적이고 인륜적인 교육의 기회균등의 원리와 교육받을 자유를 실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북한에 비해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 인륜적으로 우월성을 정립해야 합니다. 아직도 한국에는 돈이 없어서 똑똑한 친구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한 사회적 통합과 빈부 격차의 해소가 아니라 그 정반대로 가난해서 공교육 및 사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래서 더욱 가난해져 가는 계층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렇게 개탄하고 있습니다 : “OECD에 속한 선진국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는 학급당 40~50명의 학생들을 몰아넣고, 북한이나 동남아 후진국도 중학교는 물론고등학교 의무교육까지를 실시하고 있는 터에 우리는 중학교 의무교육조차도 극히 제한적으로만 실시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친구도 집에 돈이 없으면, 즉 그래서 사교육을 받지 못하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꿈을 꾸지 못하는 것이 요즘 현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혹은 한국인들에게 돈이 없어서 전교육을 무상으로 못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지 국민들은 엉뚱한 곳에 그 돈을 뿌리고 있을 분입니다. 독일처럼 한국 정부에서 전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1년간 5조원의 비용이 들 뿐입니다. 그 돈은 1년간의 사교육비 26조에 비하면 적은 돈입니다. 그리고 사교육이 거의 없는 구라파처럼 우리도 사교육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26조원을 절약할 수 있다면 그것이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엄청납니다. 따라서 대학을 비롯한 전 교육기관의 공립화는 시행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처럼 교육해방, 교육자유야 말로 전국민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기초입니다. 학부모들이 과중한 교육비부담에서 해방되고 또 아무리 가난한 가정의 자녀라고 할 지라도 그에게 실력만 있으면 유치원에서 대학원까지 공부할 수 있는 나라 는 곧 도래할 것입니다. 우리모두 힘을 내 이일을 성취하고 함께 웃읍시다.
8 . 공화국의 이념
새로 교육공화국에 가입한 회원님들과 우리를 성원하는
국민 여러분께 고맙다는 인사를 올립니다.
월드컵의 열기가 조국의 하늘을 찌르는 요즘 한국의 16강 진출을 기원하며 우리는 공화국 혹은 공화주의의 개념을 한번 알아보려고 합니다. 공화주의의 원조는 그리이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그의 대저 "국가" 4권 첫 머리에 이렇게 공화국의 이념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이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나라를 어느 특수층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이끌어 나가야 하네"
이처럼 한 국가의 특수한 계층만 행복하고 나머지는 슬프고 고통받는 나라가 아니라 가능한 전 국민, 전 계층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 바로 공화국의 이념입니다. 여기에 비해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 절차의 공정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화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배타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입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 헌법 1조 1항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 오늘날 플라톤의 저 목소리가 한국의 땅에서 울리고 있는지 한번 살펴 봅시다.
9. 플라톤의 교육학 : 조기 교육의 폐단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어제 한국은 월드컵 16강전에서 미국과 1대1 로 비겼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번 찬스가 있었으나 제대로 다 살리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14일에 있을 대 포르투갈 전에서는 우리 선수들이 100% 기량을 다 발휘하기를 빕니다.
지난 편지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국가" 편에서 공화주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모든 국민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이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나라를 어느 특수층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 이끌어 나가야 하네"
그리고 플라톤은 그의 명저 국가 다른 곳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이렇게 진술합니다:
“여보게, 자네, 국가의 법률이란 어느 한 특수층의 행복을 위해서 만들어지고, 그 밖의 사람들은 무시해 버리는 그런 것은 아니라네. 그것은 국가 전체의 행복을 가져오도록 하는 것이며, 따라서 전 국민을 설득하여, 그들을 화합시키고, 공공 이익을 위해 이바지하도록 하며, 거기서 얻는 이득을 서로 나눠 갖도록 하는 것이라네. 그리고 나라의 그와 같은 인물을 길러내는 것도 국법이 맡은 일이네. 또한 국법은 그들을 멋대로 놓아두지 않고 단결을 도모하네”.
위에서 소크라테스는 국가의 목적과 기능에 대해 동서 고금을 통하여 가장 본질적인 서술을 하고 있습니다. 즉 국가의 목적은 전체의 행복이다. 또 국가는 공공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국가를 통해 이익을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공화국에 중요한 문구는 바로 공공의 복리를 도모할 인물을 키우는 것이 바로 국가와 국법(國法)이 존재하는 이유라는 진리입니다.
플라톤의 교육학 내지 교육철학에 대해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역시 플라톤의 명저 '국가'의 제7권에 나온 문장을 소개합니다. 플라톤은 어떤 학문이나 공부도 강제로 시켜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작중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
"어떠한 지식도 자유인이 노예와 같이 강제로 배워서는 안 되기 때문이네. 왜냐하면, 육체적인 일은 강요하여도 몸에 해롭지는 않지만, 억지로 습득한 지식은 머리 속에 조금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네. (...) 그러므로 교육은 억지로 시켜서는 안 되네. 특히 어릴 때의 학습은 일종의 오락이어야 하네. 그래야 비로소 아동의 소질을 잘 알 수 있으며 , 어떤 방향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적합한가도 잘 파악할 수 있네."
이 얼마나 현대적인 인식입니까? 플라톤은 지금으로부터 2400년전 벌써 개개인의 소질과 적성의 차이를 알고 부모나 교육자들이 그런 자녀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라고 경고합니다. 이런 현철의 교훈을 가지고 현재 한국의 교육 현실, 특히 조기 영어교육의 부작용을 볼 때 우리 시대가 얼마나 둔하고 욕심만 많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근래 신문에 영어 발음을 위해 자식의 혀를 수술시키는 일부 몰지각한 강남의 부모들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조기교육의 압박때문에 정신병 걸리는 아이들도 많다고 합니다. 서양에서는 벌써 2400년 전부터 아동의 성장에 따르는 학습의 적절한 시기와 개인적 소양의 차이를 알았고 따라서 오늘날 일본과 한국에 몰아치는 조기교육 같은 것은 결코 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젊은 부모들의 조기 교육 열풍은 실은 일본에서 배워온 것입니다)
플라톤은 자유인에게는 절대로 강제적 공부를 시키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억지로 습득한 지식은 결코 머리에 남아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한국에서 시행되는 입시위주의 주입식 강제 교육은 사람의 머리를 더욱 단단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해 창의적인 사고가 아니라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는 인간을 배출한다는 것입니다. 획일적 교과서 중심의 공부, 입시위주의 문제풀이 공부는 현실문제 해결에 기여를 하지 못합니다. 이런 학습은 사람의 머리를 경직화 시킵니다.
국민 여러분!
한시 바삐 한국의 초 중고 학생들을 과도한 조기교육이나 입시교육의 억압에서 해방시켜야 합니다. 제가 만난 독일의 교포 고등학생들은 그들이 방학 때 한국의 친척집을 방문하여 한국의 고등학생들의 실태를 보고 와서는 "한국의 학생들이 너무 불쌍해요!"라고 하며 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교육과 정치의 개혁을 위해 노력합시다.
10. 소크라테스의 교육학 - 무지의 지와 산파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과 철학을 다 말하기란 쉽지가 않다. 여기서는 주로 그의 교육학적, 철학적 방법론인 산파술의 문제만을 간략히 고찰해 보기로 하자.
소크라테스는 그의 제자인 플라톤의 진술에 의하면 당시 가장 지혜롭고 올바른 사람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올바른 삶의 방식과 덕과 지혜 그리고 영혼의 중요성을 가르쳤다. 이런 중요한 시대적, 실천적 사명을 수행하면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철학적, 방법론적 개념을 정립했다고 한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귀납적 추리(inductive arguments)와 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이다. 귀납 또는 귀납적 추리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개별자(particular)에서 보편자(universal)를 추리하는 논리적 과정을 말한다. 예를 들어 훌륭한 항해사가 그 방면의 전문가이고 또 훌륭한 운전사 역시 그 방면의 전문가이라면 우리는 “훌륭한 사람은 전문가이다”라고 일반적으로 추론할 수 있다. 오늘 날 이런 귀납추리는 과학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볼 수는 없지만 상식적 판단에는 많이 활용되고 있다. 우리 속담에 “하나를 보면 둘을 안다” 는 것이 있는데 이 역시 귀납법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가 철학사적으로 최초로 정의(定義, definition), 혹은 '보편적 정의(universal definition)' 라는 문제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 보편적 정의라는 문제를 가지고 당시의 지혜롭다고 자처하던 사람들의 무지를 폭로하였다. 예를 들면 그가 사람들에게 “덕(德)이 무엇이냐?”라고 물어보면 사람들은 그에게 ‘나라를 다스리거나 유용하다거나 현명한 것이 덕(德)이다’ 라고 답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의 반문은 ‘그것은 덕(德)에 관한 보기, 즉 하나 하나의 덕을 나열한데 지나지 않고, 덕(德) 그 자체는 아니다’ 라고 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소크라테스가 구체적인, 개별적인 사례(instance, example)와 보편적 개념 혹은 보편적 정의를 구분했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상식으로 구분하는 보편과 특수 혹은 본질과 현상 등의 범주는 소크라테스에 기인한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한 덕(德) 그 자체 혹은 덕(德)의 정의를 실체화, 형이상학화한 것이 바로 플라톤의 이데아이다.
이런 보편자 문제와 더불어 소크라테스는 산파(産婆)술을 자신의 교육철학적 원리로 내세운다. 이는 본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서양의 교육과 철학의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중요한 문제이니 만큼 플라톤의 대화 <테아이테토스>에서 직접 인용한다.
“나는 산파의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신이 정해 놓은 걸세. 그리고 낳는 일은 하지 못하도록 막아 버렸네. 그러므로 실제로 나 자신은 전혀 지혜가 있는 사람이 못되며, 또 나로서는 자기 자신의 정신에서 그런 지혜의 발견은 전혀 볼 수 없네. 그러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나와 교제를 하는 사람은, 처음에는 전혀 무지하게 보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누구나 이 교제가 깊어짐에 따라, 만일 신이 용납하기만 하면 그 사람 자신이 보기에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생각에도, 놀라울 만큼 진보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일이네. 그런데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서 그들이 배워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출산하는 것일세”.
이 대목에서 필자는 서양의 교육방법론, 학습론의 뿌리를 인식한다. 우리는 배운다, 공부한다 라고 할 때, 흔히 독서나 주입식 수업 혹은 암기를 통한 지식의 습득을 말한다. 공부를 잘한다 함은 주어진 내용이나 교과서를 이해하고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결국 순응 내지 적응을 잘한다는 것이다. 이런 풍조는 성현의 말씀이나 경전을 무조건 옳다고 보고 맹목적으로 수용하는 전근대적 학습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러나 위의 소크라테스의 교육론, 학습론 그리고 진리론은 그렇지 않다. 교사는 진리나 지식을 전달하고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학생 스스로 진리와 지식을 산출하게끔 도와주는 자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남자를 위하여 산파 역할을 하는 것이며” 또 육체의 해산이 아니라 “정신의 해산을 돌보는” 역할로 생각한다. 인류의 영원한 교사 소크라테스 자신은 (진리와 지식이라는) 아기를 낳지 못하도록, 즉 불임으로 규정된다.
이런 사상은 또 ‘무지(無知)의 지(知)’라는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명제와 관련이 있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인 『변명』을 보면 당시의 사회풍조가 잘 나타나 있다. 당시의 지식인이라고 뽐내던 소피스트들은 스스로 사회적인 능력과 기술을 돈을 받고 가르치고 있었다, 즉 그들은 토론이나 재판 혹은 대중집회에서 상대를 압도하는 변론술, 웅변술을 팔고 다녔었다.
위에서 말한 사회적인 능력과 기술을 흔히 덕(德, arete)이라고 부른다. 이는 동양적인 군자의 덕(德)과는 다소 다른 개념이다. 그 뜻은 탁월성, 뛰어남(excellence)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탁에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자라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는 이를 즉시 인정하지 않고 왜 다른 당시의 똑똑한 사람들을 놔두고 자신이 가장 현명한 자인지를 계속 스스로 물어 보고 또 당시의 현명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지혜와 식견을 판단한다. 위에서 미리 언급한 것처럼 당시의 유명한 사람들은 덕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해 한결같이 특수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묻는 것은 arete (= 덕)의 일반적인 정의(定義)인 것이었다 : 소크라테스는 덕(德)의 본질을 물었는데 사람들은 덕(德)의 특수한 경우를 나열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지식인들과 소크라테스의 차이점은 전자는 덕(德)의 본질이 모르면서 잘 안다고 착각한 것이요, 후자는 모르면서 모른다고 스스로 인식한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해서 소크라테스는 델포이의 신탁, 즉 자신이 당시 가장 현명하다는 명제를 이해하기에 이른다.
소크라테스는 따라서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
“분명히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 그 사람과 나는 선(善)이나 미(美)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도, 그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줄을 모르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대수로운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내가 모르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아닐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진리를 모르지만 무엇이 허위인지는 잘 파악하고 있었고 따라서 당시의 소피스트들의 잘못과 또 지도자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폭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허위를 벗기고 상대의 약점을 노출함으로써 진리를 찾는 젊은이들이 스스로 지식을 잉태하고 산출하게끔 도와주었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배워서가 아니라 그와 교제하는 가운데서 “자기 스스로 여러 가지 훌륭한 것을 출산하는 것일세”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련의 사건이 그가 억울하게 독배를 마시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다시 말하면 당시의 불순한 지식인이었었고 청년들에게 불온한 이념을 선동하고 반정부적인 일을 사주, 교사한 죄목으로 고발되었던 것이었다. 그는 오늘 날의 양심수이고 비전향 사상범인 것이었다. 이런 사정은 오늘날과 다를 바가 없다.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고 참으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성서의 구절을 상기시킨다.
필자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aieutic)에서 서양적 학문과 교육의 이념을 본다. 이는 외부적인 것 -예를 들면 교사나 교재 등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인 영혼, 정신이 진리와 지식의 모태라는 것이다. 교사나 교재는 영혼이 진리를 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산파와 참고서의 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지식의 자기 산출이(Selfproduction of knowledge) 학교교육의 최종목표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많이 배우고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발견하고 발명하고 창조하는 것에 교육의 목표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의 입시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문제풀이식 학습은 철저히 잘못된 것이다. 공식을 이용한 응용문제의 풀이가 아니라 그런 공식과 원리를 스스로 도출하고 이해하며 다른 것들(공식, 원리)과의 연관성을 추구하는 눈을 열어 주도록 해야 한다. 이는 또 성현의 말씀은 무조건 외운다는 동양적, 유교적 교육원리와도 다른 것이다.
이런 소크라테스의 고유한 교육방법론인 산파술은 그의 제자 플라톤에 의해 상기설로 바뀌게 된다.
11. 서울대 학생들에게 고함 –학벌문제와 관련해서-
친애하는 서울대 학생여러분!
나는 현재 교육개혁 사이트 교육공화국(cafe.daum.net/edurepublic)을 운영하는 안재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홍익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철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나도 1985년 경 서울대 대학원에서 공부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서울대신문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이유는 최근의 학벌 철폐 운동과 관련해서 서울대 학생들의 각성을 촉구하기 위해서 입니다.
1) 서울대, 개혁의 주체인가 개혁의 대상인가?
우선 이런 문제를 제기합니다.
내가 서울대에 다니던 시절만 하여도 서울대는 꺼지지 않는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민주화와 인권문제 노동문제에 대해 서울대 학생들은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서울대가 기득권의 대명사가 되어 많은 학우들로부터 또는 사회로부터 경원시되고 있습니다. 그간 나는 독일에 오래 있어서 이런 대학생들간의 갈등에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어떤 지방 국립대학 신문을 보니 ‘권력을 쥔 서울대여 사라져라’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쩌다 이런 지경에 까지 오게 되었나 하는 격세지감이 듭니다. 무엇이 민주화와 반독재를 위하여 단합하던 학우들을 이렇게 갈라 놓았는지 모릅니다. 이제 대학에는 자기 학교의 문제 외에는 더 큰 시대적 보편적인 주제는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7-80년대에도 서울대 출신들이 지금처럼 한국 사회의 노른자위를 많이 차지했었지만 한편으로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시대의 보편적 문제를 위해 희생한 많은 학우들이 있었기에 서울대는 욕을 먹지 않고 진보적인, 민족적인, 사회적인 명성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그 때에는 교육을 통해 정치를 개혁하려 했었지만 이제는 민주화가 이루어졌기에 정치적 후진성은 그 때처럼 절박한 시대적 과제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교육의 부조리가 우리 시대의 화제로 등장했습니다. 그 때 서울대는 대학생 운동의 지주로서 선구자로서 운동을 리더해 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인 학벌구조의 정점에서 다른 학생들의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현역인 학생들의 책임은 아니라 역사적인, 구조적인 학벌 시스템 자체에 대한 비판이겠지만 간접적으로는 현재 관악에 몸담고 있는 서울대생을 겨냥하기도 합니다.
2) 학벌없는 사회와 교육공화국 운동
이런 사회적인 변화에 맞추어 “학벌없는 사회”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대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 번 쓴 것처럼 기존의 일류대를 폐지한다고 해서 한국의 고질적인 병폐인 학벌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운동의 결점은 너무 현재의 모순의 폭로에만 매달려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비해 본인이 벌리고 있는 교육공화국 운동은 학벌 문제를 비롯한 한국의 교육관련 부조리를 근원적으로 치유하려고 합니다. 나는 최근의 한 문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교육공화국 운동을 통해 사교육과 대학입시를 철폐하고 그 대신 고교 졸업시험으로 대학입학 자격을 주며 더 나아가 대학에도 입학시험이 아니라 졸업시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학생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독일이나 북구라파의 대학제도에서 그 모범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서울대 폐지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교육 사회주의, 교육 국가주의를 통해 난마와 같이 얽힌 한국사회의 교육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전대학의 국립화 내지 공립화를 말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재원은 현재의 사교육비 26조원을 절약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교육공화국 홈페이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현재 한국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정책과 교육제도이다. 공교육은 붕괴되고 사교육 비용은 급증하고 학생들은 입시지옥에서 허덕거린다. 언론과 보수 단체들은 하향평준화를 비판하고 그 대신 자립형 고교, 자율형 대학을 부르짖는 소리가 높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영미식의 교육제도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의 교육개혁의 방향은 유럽식 내지 독일식의 교육제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이는 전 교육의 국립화 내지 공립화를 의미한다. 이 제도의 장점은 입시가 사라지고 사교육이 필요없게 된다는 점이다. 또한 이는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학력, 학벌, 학연을 단절시킬 수 있다. 그리고 전 교육기관을 국립화하는 재원은 26조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절약함으로써 원칙적으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교육의 국가주의 혹은 공화주의는 지역간의 차이와 소외를 극복하고 통일을 준비하는 교육정책이다. 이런 교육 제도의 정립을 위해서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3) 결론
서울대 학우 여러분 !
우리 다시 한번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지양하고 학벌 때문에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봅시다. 교육공화국 사이트를 방문해 주기를 바라고 이제 새로운 차원의 학생운동이 관악에서 다시 한번 불붙기를 바랍니다.
2002-10-16 안재오
12. 학벌 철폐 운동과 대학평준화 운동에 대해 (2002.6.11)
국민 여러분!
그간 플라톤의 교육철학, 국가철학을 연구를 했으나 오늘은 시급한 현실의 문제로 돌아와서 현재 진행중인 학벌 철폐 운동과 대학평준화 운동에 대해 한 번 알아 보겠습니다.
우리와 유사한 이런 기존의 교육개혁운동, 사회운동에 대한 교육공화국의 입장을 잠시 정리하겠습니다.
1) 학벌 철폐 운동 : 이는 현재의 왜곡된 한국의 학벌 제도에 대한 비판이고 그를 극복하기위한 운동입니다. 우리도 이런 운동단체와 손을 잡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운동의 하나의 약점은 운동의 추진세력이 불확실하고 운동의 목표와 방향성이 미약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회운동은 결국 정치운동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단순히 학벌타파 하나만 가지고는 대중적 지지도를 얻기 어렵습니다. 교육개혁은 단순한 학벌타파나 일류대 문제를 넘어서 한국 사회 전체에 걸친 문제입니다.
더 나아가 교육혁명은 지역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국토의 균형잡힌 발전을 도모하며 또 통일을 준비하는 사회적 변혁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개혁이며 동시에 혁명이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학벌 철폐운동은 교육공화국 운동 안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앞으로 그분들과의 대화를 통해 두 운동이 연대하는 방안을 모색해 보겠습니다.
2) 대학평준화 문제 : 교육공화국 운동 역시 겉으로는 대학평준화 운동과 유사합니다. 신문에서 대학평준화를 말할 때 흔히 독일이나 프랑스의 대학제도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준화라는 개념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의 중, 고등학교 평준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평준화는 국가의 강제적 , 획일적 평준화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공화주의(=국가주의, 사회주의) 교육은 국민에게 국가에서 교육의 기회를 골고루 분배한다는 것을 말하고 또 국민(=학생)은 학습기관 선택의 자유를 가져야 합니다. 현재의 평준화는 학생에게 전혀 학교선택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이는 전체주의적이며 파시스트적인 교육제도입니다.
공화주의 교육제도는 국가적인 평등성과 개인적인 자유가 병존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학평준화라는 개념대신 공화주의 혹은 국가주의 교육이라는 말을 씁니다.
또 대학 평준화 운동의 약점은 학벌 철폐운동과 마찬가지로 현상적이며 지엽적인 문제를 사태의 본질로 착각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학벌철폐운동과 대학평준화 운동과 연대하면서 교육공화국 운동 속으로 이 들을 포용하는 노력이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p.s.오, 필승 코리아! 오늘 있는 월드컵 축구 미국과의 대전에서 한국이 반드시 이기기를 기원합니다.
13. 대학 민영화 주장에 대하여 (2002.6.25)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은 부자들(재계)과 소위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대학교육 및 학원의 민영화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이는 또한 김영삼 정부부터 김대중정부에 이르는 정부의 교육정책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교육공화국은 이들의 주장에 반대합니다.
그러면 이들의 주장과 그 반대이유를 간단히 보겠습니다
대학 민영화 내지 자율화는 결국 교육의 시장화를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의 시장화에 대해 맹목적으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 대학이 철저히 민간주도로 운영되지만 미국의 대학의 평균 수준은 높습니다. 문제는 그런 제도를 한국에 도입할 때 생기는 부작용이 크다는 것입니다.
작금의 대학 민영화 주장에 따르면 현행의 관치 교육은 인간(피교육자)의 획일화를 가져왔고 부실한 학교운영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학원을 완전히 민간에게 맡김으로써 교육의 다양성과 차별성을 유도하고 자유와 개성을 발전시킨다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을 망각한 추상적 관념론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현재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문제인 입시지옥과 학벌문제의 해소에 대해 이들 자유주의자, 민영화주의자들은 답변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민영화는 교육을 통한 계층간의 갈등, 즉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더 심화시킵니다.
교육의 다양성이라고 하지만 이는 철저히 교육을 자본주의 내지 상업주의, 즉 현금가치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런 철저한 영리추구의 교육제도는 경제 발전에도 해롭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교육을 완전히 민간과 시장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교육에 엄청난 정부 예산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한국의 교육정책이 대학의 자율화,민영화를 벌써 실험해 보았지만 제대로 되지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 입시제도의 변천사를 보면 우리 나라가 처음부터 대학 입시와 정원의 국가관리 제도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대학 자율이 가져온 부작용을 막기 위하여 그런 제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수진씨가 수집한 입시제도 변천사를 보면서 나는 많은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건국 이후 최초로 대학자율의 원칙 위에서 입학을 각 대학의 자유에 맡겼더니 잘 안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 대학 단독고사와 국가고사가 거듭 번갈아 반복되었습니다.
둘째 국가적 시험제도, 예를 들면 전국규모의 연합고사, 국가고사, 예비고사, 학력고사 그리고 최근의 수능시험 등이 도입된 사회적 필연성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즉 대학자율화 논리에 의거하여 각 대학별로 단독시험을 시행하게 했더니 항상 부정입학이나 정원초과 등 자율의 부작용이 심했기에 정부 차원에서 국가고사로 보충하거나 대체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대학 자율화, 민영화를 하자는 것은 역사적인 반동 내지 복고주의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자율화의 논리가 이제는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 토록 여러 번 시행해서 매 번 부작용이 있었다면 이제는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대학 입학 제도는 더 이상 개별 대학 자율에 맡길 것이 아니라 입학시험 자체를 폐기처분하고 고교졸업시험으로 대학입학의 자격을 정해야 합니다. 이제는 수능시험마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최근의 일부 사립대가 주장하는 소위 기부금 입학제나 민영화, 자율화 등이 얼마나 국민의 정서에 맞지 않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대학 입시제도 변화의 역사는 우리 대학제도가 (유럽)대륙식으로 가야 함을 알려 줍니다. 교육의 자유, 교육의 해방 역시 국가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자들은 국가와 개인을 철저한 대립의 관계로 봅니다. 그들은 국가란 개인의 자유를 구속하는 외부적인 강제 장치로 봅니다. 특히 최근에 유행하는 신자유주의 역시 국가나 정부의 간섭보다는 개인이나 개별 기업 혹은 개별 학교의 자유와 자율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는 진실은 국가의 통제가 약해지면 질수록 그리고 개인의 자유가 많으면 많아질수록 개인간의 차이도 커집니다. 이는 다시 말하면 형식적으로는 자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본의 노예 상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위대한 철학가, 혁명가 맑스(K. Marx)는 이런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모순을 인식했었습니다. 가령 현재 한국 대학의 시간 강사들의 경우 -본인도 시간 강사입니다- 그들은 대학 강의의 45%를 맡아 하면서도 보수는 교수들의 10% 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학교나 학과에 전혀 불평도 못하고 그나마 주어진 강의 시간 다음 학기에는 끊어지지 않을까 학기말만 되면 전전 긍긍합니다. 그러면서도 법적으로는 대학측에게나, 정부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학과 서로 자유로운 노동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현재 노동자의 많은 부분이 계약직입니다. 그들은 정규직의 50%정도의 수입을 받으며 직장의 안정도 없이 항상 해고되지 않을까 벌벌 떨며 일하고 있습니다. 민영화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 그들은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는 지식인들입니다.
형식적 자유가 아니라 실질적 자유를 달라 ! 이것이 소외된 계층의 논리입니다.
그리고 요즘 조선일보, 교육부, KDI 혹은 진념 전 재경부장관이 주장하는 비평준화 내지 대학자율화라는 것이 실은 교육의 민영화 혹은 시장주의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게 경제논리로 보아 합당하게 보이고 첨단 산업과 부응하고 또 예산도 많이 들지 않지만 그 도입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문민정부 이래로 계속 (미국식) 교육의 민영화, 시장주의를 추진했지만 아직까지 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민의 정서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완전한 교육기회의 평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신분이나 재산에 관계없이 "누구나 하면 된다"라는 평등주의야말로 한국의 발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국민들의 강한 평등, 아니 기회균등에의 열망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 일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우리와 문화적, 역사적, 기타 여건적으로 비슷한 나라의 교육시스템을 수입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 민영화주의자는 "대학의 신입생 선발권이 자율화되면 각 대학은 장기적인 발전계획에 따라 차별화된 선발 기준을 만들 것이며, 소양이 각각 다른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커질 것이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시 너무 이상적인, 관념적인 생각입니다. 만약 교육의 시장주의를 채택하면 모두 자본주의적인 가치 위에서 대학들을 평가하게 되고 그러한 한 각 대학의 고유성과 차이는 시장이라는 환경 위에서는 모두 현금가치로 환원되어버릴 것입니다. 실제 현재 미국의 대학시장이 그렇습니다. 각 대학이나 학과들은 철저히 랭킹이 있습니다 - 물론 한국처럼 그 랭킹서열이 영원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우리가 미국에 대해 잘 모르는 사실은 대학의 서열의 기준이 그 대학 졸업자가 받는 초봉(연봉)의 평균액이라는 것입니다. 신문에서 말하는 무슨 교수들의 연구업적이나 시설 등도 학교를 평가하는 중요한 요소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결국 졸업생들이 받는 보수입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같이 입사한 동기사원이라고 할지라도 출신학교에 따라 월급이 다릅니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하에서 자유란 결국 돈의 자유를 말합니다. 돈 없는 자는 자유가 없습니다. 돈이 없는 자는 좋은 교육 기회를 가지기 어렵고 따라서 타고난 소질과 개성을 개발하기도 어렵습니다. 각 개인의 소양과 대학의 장기적 운영계획 등등 모두 말은 좋지만 돈의 논리, 시장의 논리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니 민영화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소비자 중심,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란 문자 그대로 돈 많은 교육소비자, 교육수요자 중심의 교육제도를 의미합니다. 돈 가진 자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디를 가든지 좋은 대우를 받습니다. 그들은 은행이나 호텔에서 VIP손님이고 백화점이나 식당에서도 특권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제는 교육과 학교에서도 사람들은 가진 돈에 따라 귀족과 빈민으로 차별대우를 받으란 말입니까? 한국의 부모들은 설령 당신들은 헐벗고 비참하더라도 자식의 세대에서는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육 시장주의자들은 교육의 소비자, 수요자 주권을 내세움으로써 철저한 자본주의의 신분제도를 도입하려고 합니다. 민영화주의자는 교육문제에 있어서도 시장의 지배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시장을 믿는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육 시장주의의 원산지인 미국의 공교육은 무너지고 그곳의 유색인종들은 2등의 교육을 받고 2등의 국민으로 성장합니다, 아니 흑인들은 거의 모두 학교를 중퇴하고 마약과 범죄로 빠집니다. 이런 강력범을 소탕하고 형무소를 운영하는데 엄청난 돈을 투자하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부자나 빈자나 같이 교육받는 곳이 독일입니다. 더 나아가서 어떤 경우 같은 교육을 받으면서도 부자는 회비를 많이 내고 빈자는 회비를 면제받습니다. 이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김영삼 정부와 김대중 정부의 비극은 제대로 미국의 교육시스템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미국 유학 출신의 장관들이 이 나라의 교육을 시장주의라는 전대미문의 혼동으로 밀어 넣은 것입니다. 이제 정치가들의 완전한 생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각 당의 대통령 후보들도 공약은 거창하게 내세우지만 당선 후에는 전혀 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한국은 필승 코리아의 에너지로 축구의 엄청난 도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는 그 에너지를 사회 개혁과 교육 개혁에 돌려야 합니다.
14. 출발의 평등, 결과의 평등 (2002.6.28)
공화주의 혹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즉 사유재산제도와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재산을 모으기 위한 출발점의 평등을 주장한다, 즉 교육 기회의 완전한 평등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비해 공산주의는 결과의 평등을 주장한다, 그들은 "사유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 라고 개인소유와 시장을 완전히 부정합니다.
물론 세금제도를 통해 부자들의 소유를 일부 사회로 환원할 수는 있지만 재산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교육공화국의 입장은 바로 출발점의 평등을 정립하는 것입니다. 물론 똑같이 출발하더라도 개안 별로 엄청난 차이를 가져 오는 것이 자본주의입니다. 하물며 출발점에서도 기득권층에게 프리미엄을 부여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미국 같은 극도의 자본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적 국가에서는 교육의 불평등이 심각합니다. 미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자녀를 학비가 비싼 사립학교에 보낼 수가 없습니다. 비싼 사립 학교들은 자기 학생들에게 좋은 교육과 훈련을 시켜 사회적으로 성공하게 도와줍니다. 따라서 이런 곳에서는 빈익빈 부익부 라는 사회적 악습이 퍼지게 되고 가난한자, 소외된 자들은 소위 빈곤의 악순환(vicious circle of poverty)을 벗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달리 말해 부의 세습과 더불어 지식의 세습이 대를 이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한국 역시 이런 미국의 나쁜 제도가 서서히 정착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간 한국의 부모들은 교육을 통한 사회적 지위이동 혹은 자녀의 장래를 위해 엄청난 희생과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다시 말해 서민들의 모든 노력과 활동은 결국 자녀의 사교육비, 학원비를 공급하기 위해서 입니다.
한국에 사교육비의 부담이 얼마나 큰지 어떤 학생은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엄마가 파출부를 다니거나 과외를 시킬 수 없다는 무능력함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그 막중한 사교육비를 공교육비로 전환할 수 있는 정치적인 역량입니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국민들 편하고 학생들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이제 죽음의 공중곡예(salto mortale)를 해내야 합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결국 독일식(유럽식) 국가교육주의입니다. 나는 그것을 직접 보고 왔습니다. 다른 독일 출신 박사, 교수들은 거기서 교육의 이상을 직접 보고, 살고 왔지만 귀국하면 독일은 독일, 한국은 한국 하며 현실에 순응하고 맙니다. 하면 된다 하는 정신으로 공화주의 교육을 위해 전진합시다.
15. 미국 공립학교의 인성교육에 대해 (2002.7.4)
다년간 미국에서 교육학을 연구하고 현재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의 부교수로 재직하는 황용길 교수는 최근 그의 저서 <부자 교육, 가난한 교육>이라는 책에서 미국의 인성교육(affective education)의 실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인성교육은 실용주의 교육과 적성교육의 전철을 밟아 또다시 부익부 빈익빈을 초래합니다. 아이들을 착하게 만든다며 인성교과에 치중하다 보니 자연히 공립학교 아이들은 공부를 게을리 하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손해를 아이들은 여전히 가난한 공립학교 아이들 뿐입니다. 사립학교 아이들은 인성교육에 아랑곳하지 않고 그 울타리 안에서 얌전히 앉아 공부만 했지요."
지난 경희대 과제물에서 입시지옥에 지친 우리 대학생들은 고등학교에서 입시준비보다는 인성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성교육이나 이해찬식의 "열린 교육(open education)" 모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예전에 실험해본 교육 방법입니다. 황용길씨의 지적처럼 인성교육이나 열린교육 모두 학생들의 실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학과중심으로 공부하는 사립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낮은 (명문)대학진학률을 가져 왔습니다. 그리고 인성교육은 특별히 따로 할 필요가 없고 지식이나 학과 중심으로 교육하면서 부가적으로 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 현상을 인성교육의 부재에서 찾는 견해도 있어서 여기에 대해 조금 분석을 해봅니다. 즉 교과서 위주의 교육, 지식 위주의 교육이 인간의 사회성, 책임성, 도덕성을 약화시키고 이기적인 인간을 배출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는 온갖 비리와 부정에 대해 그 원인이 학과중심의 교육 혹은 지식 중심의 교육이라는 견해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학생은 “부정, 부패 방지를 위해 무엇보다도 인성 교육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형식적으로 행해왔던 그런 식의 인성교육이 아니라 진정으로 우리라는 개념을 알 수 있고 정직함만이 삶에 도움이 된다는 교훈을 줄 수 있는 그런 교육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성교육이란 인간의 사회성과 도덕성 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결국 도덕교육입니다. 왜냐하면 도덕이란 개념의 범위는 대단히 넓기 때문입니다: 도덕(moral, ethics)이란 일체의 올바른 것, 좋은 것에 대한 탐구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고 따라서 인간은 서로 어울려 살 수 있는 덕성을 어릴 때부터 함양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는 윤리, 도덕이 실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윤리, 도덕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비윤리적, 비도덕적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실천 윤리는 학과 시간에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성교육의 예로 드는 것이 주로 사회,-자원 봉사활동인데 이런 사회 활동 내지 자원봉사 활동에 학교교육의 초점을 맞출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봉사활동이나 인성교육의 다른 문제는 이것이 과연 좋은 가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점수라든지 시험등과는 연결이 어렵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학교교육은 기본적으로 평가하고 테스트할 수 있는 과목을 중심으로 해야 합니다. 이런 요점을 모르고 학과와 인성교육을 혼동할 때 미국의 공교육이 보여주는 바처럼 교육의 파탄이 초래됩니다.
이런 인성교육에는 개인의 취미 생활이나 특기활동이 포함됩니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이런 특활 활동이 많이 있고 이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한 대학생은 “또한 미국의 교육에서는 국, 영 ,수만의 교육이 아닌 야구나, 카약, 수영 등의 여러 가지 C.A활동들을 학생들에게 제공하여 이수하게 하였다. 이런 C.A활동은 우리나라처럼 시간 채우기 식의 교육이 아닌 정말 자신이 하고 싶고 취미를 살릴 수 있게 전문 강사를 초빙한다든가 갖은 시설들을 학교에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반면에 한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취미나 특기 등을 살릴 기회를 얻기가 힘들며 학교 교육과 학원 교육에 끌려 다니며 12년의 세월을 보낸다” 라고 미국의 실질적이고 흥미있는 특기 적성 교육과 한국의 시간 때우기 식의 특기 적성을 비교,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특기 적성 교육도 한국에 와서는 모두가 입시교육으로 변질되어버립니다.
그러나 특기 적성 활동의 한국적인 모순이외에도 어떤 본질적인 문제가 거기에 숨어 있습니다. 위에서 황용길씨가 지적한 것처럼 특기, 적성 교육, 인성교육을 주로하는 공립학교의 경우 대학진학률이 저조하다는 것입니다. 즉 미국의 초. 중. 고교의 경우 사립과 공립의 차이가 뚜렷이 납니다. 먼저 미국 고교의 90%를 차지하는 공립학교의 경우 그 학생들은 대다수 흑인종과 히스패닉 계열(스페인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클링턴 전 대통령의 딸 첼시가 가려고 했다가 포기한 워싱턴의 공립학교는 70%의 학생들이 학교를 중도에 그만두었고 흑인 남학생의 75%는 전과자로 변했고 여학생의 14%는 미혼모로 변했고 아이들의 성적도 미국 최하위권이라고 합니다. (황용길 지음: 부자 교육, 가난한 교육 15-16쪽 참조). 미국의 공립학교는 많은 경우 폭력과 파괴 그리고 총기사고가 판을 치는 살벌한 곳이 태반입니다. 그리고 그 곳 대부분 학생들의 학력은 극히 저조합니다. 그런 학교에서 특기와 적성은 실로 무의미합니다.
결국 미국의 풍요롭고 자유로운 생활은 소수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일류)교육은 철저히 부자들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부(富)의 세습을 넘어서 지식의 세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부시, 빌 클링턴 그리고 아들 부시 등 최근 미국의 3대통령이 모두 예일대 법대 출신이라는 것이 미국의 현실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인성교육은 학과(체육, 음악, 미술 포함)를 하면서 덤으로 배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은 인성교육, 즉 실천 윤리를 수반합니다. 그리고 인성교육은 학교보다는 가정에서 더 효율적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정상적인 이론(학과 공부)과 실천(인성 교육)이 제대로 조화롭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입시위주의 교육이 사라져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국민 여러분, 이런 미국의 공사립 학교의 실태로 우리 현실을 바라보면 시사점이 많습니다. 현재 정부(교육부)나 한나라당은 평준화 학교에서는 열린교육이다, 맞춤식 교육이다 혹은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다 하여 미국의 공립학교 모델로 하여 7차 교육과정 개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다른 한편 정부는 자립고교의 설립을 추진합니다. 자립고교는 미국의 귀족적인 사립고교와 같은 역할을 하고 대다수의 평준화 학교들은 멍청이를 만드는 인성교육이나, 적성 교육이다 하는 미국의 공립학교와 같이 될 게 뻔합니다.
이런 멍청한 정책을 펴는 근본적인 까닭은 황용길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미국 유학출신 교육학 박사들의 과오입니다. 이렇게 그는 말합니다.
"현장 경험이 없는 미국 박사들의 탁상공론이 한국 교육에 위기를 몰고 왔습니다.아는 것이라고는 미국밖에 없는 (그것도 껍데기만 ) 사람들이 그 동안 우리 교육계의 지도층을 형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교육이 현재 겪고 있는 위로부터의 붕괴현상은 외국의 교육관을 비판없이 받아 들이는 이들 교육 전문가와 관료들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황교수는 한국의 특수성을 부각하고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공교육이 우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공교육의 회복이야말로 한국을 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 교육공화국의 입장과 일치하는 점입니다.
이렇게 미국에서 20년 이상 교육을 연구하고 또 현장에서 활동하는 미국교육의 권위자는 우리 나라가 결코 미국의 모델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역설합니다. 그리고 덧붙혀 그는 20세기 초반 미국이 독일의 교육제도를 모델로 하여 개혁했기 때문에 미국의 대학과 산업이 발전했다고 지적합니다.( 같은 책197쪽 참조)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
이제 왜 우리가 미국식의 모델이 아니라 독일식 (혹은 유럽식) 교육모델을 추구하는지 명료하게 인식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교육보다는 공교육을 통한 전 국민의 창의성 개발 - 이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끝)
16. 미국 교육, 더 이상 한국 교육의 모델이 될 수 없다.
본인은 2002년 1학기에 경희대학교에서 ‘사회윤리의 제 문제’ 란 교양 과목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에게 ‘한국교육의 현실’이란 주제로 학생들에게 레포트 과제를 내 주었다. 레포트들을 읽어 보니; 그들은 한국 교육의 문제가 입시위주의 교육에 있다고 했다. 그들은 매번 바뀌는 교육정책에 비판적이었다. 특히 우리 반에는 단군이래 가장 학력이 낮다는 이해찬 1세대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조령모개식의, 임시변통적인 입시제도 개혁의 희생자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우수한 인재 양성을 위해 설립된다는 ‘자립형 사립고’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어떤 학생은 자립형 사립고 역시 기존의 과학고나 외국어고처럼 입시위주의 학교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그는 “현재 제도 하에서는 우수한 인재라는 것은 돈 많은 집의 자식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라고 비판했다. 결국 학생들은 사교육이 아니라 공교육의 정상화를 통해 한국의 청소년들은 입시지옥에서 벗어나 인간적인 성장과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중지를 모았다.
이런 관점에서 본인은 신간 도서 황용길 저: <부자 교육, 가난한 교육>이란
책을 보았다. 황용길씨는 미국에서 25년 이상 교육학을 연구하고 현재 루이지에나 대학교의 부교수로 있는 미국 교육의 이론과 실제 모두에 능통한 학자이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미국의 공교육은 세계에서 가장 낙후했고 그 반대로 사교육은 탁월하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잘못된 미국의 공교육의 이론을 그대로 수입하여 한국의 학교교육을 혼란으로 몰아가는 교육학자들과 관리들이었다.
예를 들어 김대중 정부 이해찬 전 교육부 장관이 추진한 열린교육 그리고 맞춤식 교육, 적성교육 혹은 인성교육 등은 모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수십년 전에 실험되었고 이제는 그 폐해 때문에 용도 폐기 처분되기 일보 직전이라고 한다. 미국의 공립학교는 이런 잘못된 교육철학 때문에 구제불능의 상태라고 한다. 클링턴 전 미국 대통령도 공립학교 개혁을 추진하려 했으나 결국 완수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이다. 황용길씨는 또 인성교육이나 열린 교육 모두 학생들의 실력을 하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학과중심으로 공부하는 사립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낮은 (명문)대학진학률을 가져 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또 그는 인성교육은 특별히 따로 할 필요가 없고 지식이나 학과 중심으로 교육하면서 부가적으로 하면 된다고 한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황교수는 한국의 특수성을 부각하고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공교육이 우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에서 공교육이 그토록 부실하면서도 국력이 강한 것은 사교육의 우월성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은 그런 미국식 교육 모델을 결코 따라갈 수 없다. 따라서 공교육의 회복이야말로 한국을 살리는 것이다.
필자가 알기에 독일의 중. 고등학교 교육은 학과 중심으로 하면서도 한국에서 와는 달리 입시준비가 아니기 때문에 학생들의 자발적인 흥미와 탐구력을 유발한다. 한국의 학생들은 오직 성적위주, 입시위주의 학교수업에 대한 반발 때문에 인성교육을 동경하였다. 그러나 인성교육이나 적성. 특기 등은 일반교육으로서 문제를 가진다. 그런 것들은 입시나 시험과는 무관한 개인적인과외 활동으로 하면 좋은 것이다. 한국에서 문제는 모든 교육과목이 입시로 귀착된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부분적인 입시제도의 개선이 -국가고사, 본고사, 예비고사, 학력고사, 내신, 면접, 논술시험, 수능시험 등등으로 불리어진- 아니라 입시제도의 폐지가 요청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일이나 그 밖의 유럽대륙 국가들처럼 전 대학을 공립화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본인의 교육개혁에 대한 [왜냐면] 7.13 김영환씨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도 답변을 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서울대학이 아니라 3-40개의 서울대학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그 외에 세부적인 플랜은 다른 기회에 말하고 싶다.
17. 창의력과 무관한 한국의 교육
한국은 대단한 공부의 나라이다. 요즘 우리 가족은 초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의 숙제 때문에 비상 사태이다. 그 애가 1학년 때는 그래도 아내가 도와주어서 숙제를 무난히 마치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엄마와 딸 둘이 붙어서 밤 9시까지 노력해야 겨우 하루의 숙제를 마치곤 한다. 아내는 전업주부이고 딸애는 피아노 학원 다니는 외에 다른 사교육은 받지 않는다.
하도 아내와 딸이 힘들어 하길래 같은 학급의 친구의 어머니에게 아이의 숙제가 너무 많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그녀는 “남편이 집에 들어 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아이의 공부만을 보살핀다” 라고 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사실 우리는 독일에 오래 살다가 들어와서 그런 불평을 하는지도 몰랐다. 나는 애가 무슨 숙제를 그렇게 하는지 궁금하여 보니 주로 수학 문제 풀이였다. 사칙 연산 및 응용 문제였다. 그런데 그런 계산문제를 열심히 푼다고 창의력이 개선되지는 않는다. 독일에서는 심지어 학생들이 구구단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다. 그것은 그들이 둔해서가 아니라 그 나라 교육방침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사칙연산은 계산기를 이용하면 훨씬 더 잘 풀 수 있다. 그런 기계적인 것은 이제 기계에게 맡기고 사람은 더 중요하고 기계가 풀지 못하는 문제를 풀려고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일본의 수학 시험을 본받아서 주로 공식의 암기와 그것을 이용한 응용문제의 풀이에 수학의 초점을 둔다. 독일에서 수학은 어떤 주어진 사태를 수학화, 모델화하는 능력을 추구한다. 따라서 그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공식이나 법칙이 어떤 것인지 찾아내고 그들의 연관성을 제시하는 것이 답이다, 즉 우리처럼 문제의 정답을 수치로 나타낼 필요가 별로 없다. 결국 수학을 사고와 논리의 일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죽어라 연습문제만 푸는 한국의 수학교육!
그리고 타율적으로 강제된 열심은 결코 창의력을 높이지 못한다. 나는 딸의 방과후 공부를 하루 2시간으로 못박았다. 못 푸는 문제는 아내에게 대신 풀어주라고 했다, 왜냐하면 숙제 다 못하면 학교에서 혼나니까. 내 딸의 장래아빠가 책임진다. 애들은 놀만큼 놀아야 한다.
수학 외에도 한국의 교육은 기본적으로 암기를 중심으로 한다. 이런 획일적이며 단편적인 지식을 주입시키는 한국 교육 때문에 큰 피해를 본 사람들 중의 하나가 바로 필자이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세계사 과목을 무척 좋아했었다. 나는 주로 역사의 흐름이나 큰 사건들, 예를 들면 십자군 전쟁 등이 역사 발전에서 지니는 의미나 개념을 인식하려고 노력했으나 세계사 시험에서 나오는 문제는 항상 단답식이나 객관식이었다 ; 가령 ‘카노사의 굴욕을 당한 황제는 0 0 0 이다’ 의 빈칸을 메우는 문제나 혹은 어떤 사건의 연대를 묻는 문제가 태반이었다. 어떤 대학생은 그래서 “교문을 나서자 마자 잊어버릴 수밖에 없는 단편적 지식만을 암기하는, 현실로부터 유리된 교육이 문제다” 라고 서술했다.
그런데 내가 독일 유학 시에 놀란 것은 거기서 수학시험마저도 구두시험을 치렀다는 어떤 물리학 전공 학생의 이야기였다. 다시 말해 수학도 논리적 사유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등학교수학 교과서 이름도 ‘사유와 계산’ 등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 수학을 잘한다는 사람들이 독일에 와서 수학의 낙제점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이유는 지나친 응용문제풀이 위주의 수학공부나 시험이 진정한 수학적 사유를 중시하는 독일과 다르기 때문이다.
입시위주의 객관식 시험이나 단답형 문제는 학생의 창의력을 키워주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가 창의적 학습을 해야 하는 이유는 현실 그 자체가 항상 새롭다는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창의성은 예술이나 문화 콘텐츠의 생산에만 필요한 코드가 아니라 실은 현실과 생존의 문제이다. 하다못해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평범한 삶도 늘 새로운 의식과 각성을 요구한다. 더욱이 기업이나 산업 발전 그리고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는 엄청난 창조적인 에너지가 필요하다. 변화하지 못하면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나 작금의 한국의 입시제도나 수능시험등은 모두 암기와 응용이라는 두 가지 코드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그런 방식만 연습해서는 절대로 남을 앞지르는 문화를 창조할 수 없다. 독일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대학 자격시험) 보는데 몇 일 씩 걸린다 ; 학생들은 그 때 우리나라 사법고시보다 더 많은 시간에 걸쳐 모든 자료를 참고하면서 한 편의 논문을 써 내는 경우도 있다. 우리 나라 대학교수의 논문이 독일 대학교 석사과정의 논문보다도 못한 경우도 많다
18. 대언론관, 진보, 보수
필자는 신문을 본지가 오래된다. 고등학교(1973-76) 시절부터 동아일보를 구독해 보았었다. 그 때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이 있었고 우리는 그 운동을 지지했었다. 즉 박정희 독재 치하에서 동아는 정부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게재했었고 정부의 사주를 받은 광고주들이 동아일보 광고를 중단해버린 것이었다.
독일 유학시절에는 쾰른 대학 정기 간행물실에 한겨레 신문이 비치되어 있어서 그 신문을 보았었다. 거기서 한국인 유학생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귀국해서 다시 동아일보를 보니 옛날 만 못했었다. 그래서 조선일보를 찾게 되었었다. 그런데 조선일보는 나에게는 좋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필자가 9년간의 독일 체류를 마치고 돌아 와서 신문 및 매스컴에서 느낀 가장 큰 이슈는 바로 안티 조선 운동이었었다. 이제야 겨우 왜 그런지를 다소 이해하게 되었었다. 그리고 문제는 필자가 인터넷 교육개혁운동을 하면서 그 참고기사로서 한겨레 신문과 조선일보 기사를 이용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왜 조선일보 기사를 이용하느냐 하면서 필자에게 비판과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회원님들께!
감사와 안부를 전합니다. 이번 편지의 주제는 대언론관 및 우리의 정치적 입장입니다. 이는 대내적인 진보 + 대외적인 보수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저의 글을 잘 읽어 보시고 비판, 수정, 동의 등의 각자의 거기에 대한 견해를 밝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의 사견이니 그렇게 이해하시고 중지를 모아 공적인 입장을 만들어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조선일보 및 보수 언론에 대해서 말하겠습니다. 조선일보는 알다시피 일제 말기에 노골적으로 친일 활동을 하여 민족의 정기를 흐렸으며 또 80년 전두환의 폭거를 옹호함으로써 이익을 취한 신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안티 조선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진보 지식인들이 그 신문의 안보상업주의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의 입장은 조선일보를 보되 비판적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일보를 보지말자는 안티 조선일보운동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조선일보가 현재 지나치게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고 또 과거에 큰 과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식기반 사회라는 면에서 볼 때 현재 다른 신문들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의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주고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순적으로) 주로 한겨레에 글을 게재하면서 한겨레와 함께 조선일보도 구독해 봅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공화국은 안티 조선대신 "조선일보 회개와 사죄 운동"을 추진합니다. 이는 "우리는 조선일보를 사랑한다, 그러니 너희의 과거의 범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라, 그리고 조선일보 다시 태어나라 입니다"라는 요구로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에도 1930년대 까지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족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도 한 때 조선일보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안티 조선에 대한 나의 또 다른 대안은 이 것입니다.
안티 조선 열심히 해도 별로 조선일보 절독이나 폐간을 시키지 못합니다. 이는 조선이 내세우는 반공, 안보 이념 때문입니다. 이 번 서해안 사태에서도 나타났듯이 북한은 경계와 주의를 요구하는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국민들의 안보, 반공 심리에는 역사적으로 타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역대 군부독재 세력들이 안보를 볼모로 인권을 탄압하고 민주화를 방해했기 때문에 반공 이데올로기= 친미 독재 라는 공식이 성립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독재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반공, 안보를 주장하는 보수세력이라도 그들이 예전처럼 바로 파시즘이나 권위주의로 볼 수 없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육공화국의 이념은 대내적인 진보(복지국가)와 대외적인 보수(자유 민주주의,반공,안보논리)의 결합입니다. 조선일보가 그렇게 부자층을 옹호하고 소외된 계층의 진실을 외면하지만 가난한 독자들이 이 부자신문을 그렇게 많이 보는 이유는 바로 그 안보논리와 그를 실제로 증명하는 북한의 계속적인 만행 때문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면서도 공화주의적, 사회민주적인 칼라를 가진 신문이 나오면 조선일보는 저절로 폐간될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구성을 보면 지금까지
진보주의 = 친북 + 사회복지(서민층, 소외된 층 권리 옹호)
보수주의 = 반공 + 신자유주의(기업가, 부유층 이익대변) 의 두 가지입니다.
그러나
교육공화국 = 반공 + 사회복지라는 제 3의 길을 가려고 합니다. 이에 대해 회원여러분의 많은 비판과 수정을 바랍니다”.
19. 부동산 투기억제와 특수목적고 설립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또 다시 강남 지역의 집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건교부 장관이나 재정부 차관의 말을 들어보면 그 원인이 그 지역의 학군과 학원에 있다고 합니다. 신학기를 앞두고 강남지역으로 자녀를 유학시키기 위한 학부모들의 열기가 그 지역의 아파트 값을 폭등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부동산 투기 억제를 위해 건교부 장관은 강남외 수도권지역에 특수목적고를 신설하는 정책을 구상중이라고 합니다(조선 2002.8.12일자 1,3면 참고). 또한 재경부 차관은 “서울 강남의 주택시장 과열을 막기 위해 수도권지역에 특수목적고(특목고)의 신설 등을 통해 교육여건을 개선키로 교육부와 합의했다” 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미 “경기도 의왕 등 수도권에 특목고가 설립되고 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정부 당국자들의 임시방편적인 사고 방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물어 보고 싶은 것은 부동산 폭등만 없다면, 지방에는 특수목적고의 설립이 필요 없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특목고 외의 대다수의 일반 고등학교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대다수 서민들의 자녀가 다녀야 하는 별 볼일 없는 학교란 말입니까?
그리고 강남의 학원들 때문에 그곳의 땅값이 폭등하고 있습니다. 그 문제 해결을 위해 건교부, 재경부, 교육부는 강남 외의 지역에 특목고의 신설을 논의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한국이 가진 입시지옥과 학벌구조라는 병리적 구조 하에서는 그런 얄팍한 수단이 부동산 투기를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더 큰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Identity)입니다.
정부의 발표는 대한민국이 강남공화국이며 기껏해야 수도권 공화국이라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정부의 발표는 대한민국이 강남공화국이며 기껏해야 수도권 공화국이라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지방 주민들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정부의 특수목적고나 자립형 사립고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학교들은 곧 입시명문고를 말합니다. 결국 정부의 대책은 우수한 학생들이 아니 돈 많은 집의 학생들이 모이는 특수고를 강남 이외의 수도권 지역, 즉 강북지역이나 수도권 신도시 등에 신설함으로써 강남 지역의 땅값 오르는 것을 막겠다는 것입니다. 특수목적고나 자립형사립고 그리고 최근에 그 도입이 거론된 국제고 등은 한국의 현실에서 볼 때 모두 부와 학벌까지 세습시키려는 신자유주의적인, 시장교육주의적인 사고의 일환에 지나지 않습니다.
좁은 한반도 땅덩이 위에서 서로 살 부비며 살아가야 하는 대한민국에 왜 이렇게 차별과 분열 그리고 소외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미국처럼 땅도 넓고 인종도 다양하다면 특수고니 자립고니 국제고 혹은 서울대니 명문대니 하는 것들을 감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월드컵 축구 응원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일체감은 분명 차별이 아니라 평등이고 하나된 조국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결론을 도출하겠습니다.
우리(나)는 유럽 대륙식의 의무 무상교육제도를(유치원에서 석사까지) 도입하고 사교육과 입시제도는 철폐하기를 주장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특목고 같은 입시명문고의 출현에 대해서도 부정적입니다. 물론 특목고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최근 관계 장관들의 발상을 보면 그것은 분명 입시명문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특목고의 신설이 부동산 투기의 억제에 이용될 수 있겠습니까? 대한민국 돈이 없어서 유럽대륙식의 공교육제도를 도입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는 교육의 시장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 즉 교육의 공영화를 주장합니다. 이 문제에 관한 여러분의 많은 비판적인 견해를 환영합니다.
20. 서울대 지역할당제에 대한 의견
최근에 우리 사회에 하나의 신선한 충격을 던지고 있는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지역할당 입학제도에 대해 간단히 소견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본인은 교육, 특히 대학교육의 민영화, 기업화, 시장주의를 배제하고 유럽대륙에서 널리 행해지는 교육의 국가주의 내지 교육의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울대 지역할당제는 교육부조리라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문제를 해결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런 문제의 인식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즉 한국의 학벌구조 질서의 꼭대기에 있는 국립서울대의 총장이 사회 계층의 고착화와 그로 인한 사회적 분열과 갈등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우선 필자에게 공감을 야기한다. 그러나 그런 절실한 문제의식에 비해 정총장이 제시하는 해법은 너무나 미미하여 도무지 그런 일을 왜 하려고 하는지 모를 지경이다. 교육의 소외지역인 한국의 농어촌에서 각 군마다 한 두명 서울대에 공짜로 입학시켜 준다고 해서 달라질 일이 무엇일까? 정 총장은 미국의 명문대학의 예를 들면서 대학입학 지역별 쿼터제가 사회통합에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으로는 약자들에 그러한 사회적인 배려는 본래의 의도와는 반대로 명문대의 주가를 더 올리고 사회적인 고착화를 -예를 들어 부의 세습, 지식의 세습 등- 더 지속적으로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음을 무시할 수 없다. 즉 다시 말해 사회가 교육을 통한 계급고착이라는 중증에 걸려있는데 몇 사람의 가난한 자들에게 계층상승의 기회를 보시(報施)함으로써 ‘우리는 하나이다’ 라는 허위의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모순인 교육제도는 환부를 도려내는 수술없이는 불가능하다. 암환자에게 보약이나 마취제를 투여한다고 해서 병이 나을리 없다.
따라서 본인의 입장에서는 전 대학을 공립화하고 입시를 철폐하며 사교육을 자연히 필요없게 만드는 독일이나 프랑스 같은 교육사회주의외에는 길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재원은 현재 한국의 26조나 되는 사교육비를 절약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마련할 수 있다. 교육개혁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과 결단의 문제이다.
이런 원론적인 비판이외에도 대학입학 지역할당제는 교육 행정과 기득권층으로부터의 반발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강남지역은 벌써 역차별의 논리를 힘차게 전개하고 있고 그 밖에 한국의 교육개혁이 번번이 그래 왔듯이 법과 제도의 사각지역을 노리는 위장전입자니 뭐니 하는 온갖 사기꾼들이 판을 칠 것이 벌써부터 우려된다. 그리고 각 군에서 2명을 선발한다고 할 때 그 기준은 또 무엇인가 하는 행정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따라서 필자는 입학할당제를 두 가지 관점에서 비판한다 ; 첫째 교육공화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역사적 구조적 모순인 학벌제도는 근원적인 수술없이 사소한 개선과 개혁으로 도저히 고치지를 못한다. 이는 벌써 수십 번에 걸친 대학입시제도 개선과 또 교육개혁이 항상 잡음과 부작용만을 야기했지 언제 한번 입시지옥의 노예가 된 이 나라 아이들을 정신적 압박으로부터 해방시켜주어 그들이 건전한 학교교육을 받고 자기 성장을 할 수 있도록 한 적이 있었냐는 것이다. 우리는 왜 우리의 과거의 경험에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것일까? 몇 번해서 안 되면 그것은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바꾸라는 것이다. 대학입시제도가 꼭 있어야할 국가적인 필연성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시험만 가지고 다들 대학입학 잘한다. 미국만이 우리의 선생인 것은 아니다.
유럽에서는 자신의 과거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구제불능으로 여긴다. 더 이상의 무의미한 순간적이고 임시적인 교육개혁에서 벗어나서 교육시스템 아니 사회시스템 전체를 반성하고 새로운 길을 헤쳐 나가야 한다.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이라고 노자(老子)는 말했다. 반대로 도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 예를 들어 자유민주주의가 안 되면 사회민주주의로 가야하고, 미국식의 교육 시장주의가 안 되면 독일식의 교육 사회주의로 가야 한다. 누구 말처럼, 생각을 바꾸면 길이 보인다.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앵글로색슨족은 전통적으로 대학교육은 사적인 문제로 취급한다. 그러나 그런 나라가 세상에서는 극히 소수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유럽 대륙은 앵글로 색슨족과 반대로 대학교육을 공적인 일로 인정해 왔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를 보더라도 고등교육은 항상 국가적으로 관장해 왔다. 우리는 따라서 미국보다는 유럽대륙의 나라들과 더 유사한 나라이다.
신자유주의가 아무리 지구상의 대세라고 하더라도 교육만큼은 그 목록에서 빼달라고 하고 싶다.
지역할당제에 대한 두 번째 비판은 그 실효성, 현실성의 문제이다. 자칫 잘못하면 입학제도 개혁이라는 기회비용에 비해 부작용이라는 투자손실이 더 커지는 결과가 되기 쉽다, 이는 벌써 경험적으로 증명되었다. 따라서 본인은 서울대 정운찬 총장의 사회정의 의식은 높게 사지만 그의 너무 좁은 시야 때문에 실천적인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끝)
21. 메모리와 프로세서 -한국교육의 맹점-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추석에 인사드립니다.
한가위 온 겨레가 다 즐거워 하는 명절이기를 빕니다. 본인은 한국의 암기식 , 주입식 교육과 학습에 대해 컴퓨터의 메모리와 프로세서란 관점에서 그 맹점을 파악해 보았습니다.
”사람이 컴퓨터를 만들었지만 때로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을 통하여 사람의 정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컴퓨터를 통한 사람의 이해, 특히 인간의 지성의 이해에 필요한 컴퓨터의 두 가지 주요 기능이 메모리 기능과 프로세서 기능이다. 필자는 교육 문제, 특히 한국의 교육의 성과를 정확히 통찰하고 또 이를 개선하기 위해 하나의 명제를 만들었다 ; 즉 한국의 교육은 두뇌의 메모리 기능만을 강화시키지 프로세서 기능을 강화시키지는 못한다. 이것이 그 동안 꾸준히 강단에서 직접 가르치고 또 연구한 본인의 결론이다.
왜냐면 그 동안 한국의 초중고 교육이 입시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교육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이런 경향이 별로 개선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특히 큰 문제는 대입 수능 시험 같은 객관식 내지 선다형의 대규모 획일적 시험은 성장하는 인간의 두뇌기능을 메모리 중심으로 고착화시킨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 최고의 시험이라고 할 각종 국가고시도 결국 암기 요령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지 하는 의문이 든다.
짧은 시간 내에 실력을 평가하는 시험은 거의 대부분 판단이나 추론 같은 고차적인 사유능력보다는 객관적인 데이터의 반복 능력을 테스트한다. 다시 말해 시험장에서 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써야 하는 시험은 데이터의 처리능력이나 분석 능력 혹은 생산적 가공능력이 아니라 데이터 자체의 기억 내지는 정리에 주안점을 둘 수밖에 없다. 이런 암기식 교육 때문에 한국인의 사고의 융통성과 창조력이 저하되고 있다. 특히 시험 중심의 학습은 판단력과 추리력 그리고 논리적 비판력을 키워주지 못한다. 그래서 박민정씨는 이렇게 말한다 :
“아주 어린 아동들도 인간관계와 거기에 수반되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경험한다 하지만 우리 나라의 획일화된 교육을 받음으로 사고능력이 떨어져 가는 것 같다. 나 또한 암기위주의 교육을 받아왔고 창조적이기보다는 이미 주어진 교재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대학에 와서 나의 주장을 펴기가 쉽지 않다”.
사실 한국 대학생들의 지적 능력과 사회적 책임감은 독일의 고등학생보다 못하다는 말을 한다. 독일에서는 (인문계)고등학교 졸업만하면 지방 신문의 기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학생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 대학생들 실제로 많이 어리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윤리 대신 철학을 배운다. 우리나라에서도 윤리 대신 철학을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윤리는 철학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고능력의 향상에는 철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객관식 시험은 평가하고 채점하기에 편하지만 학생들의 주체적이고 독창적이며 생산적인 사유를 방해하고 주어진 현실에 적응력이 뛰어난 학생들만을 우수한 인재로 선발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평가하는 교사의 경우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채점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 문제에 관해 학생들과 논쟁할 필요가 없다.
필자의 경우 대학 기말고사 평가 후에 수업시간에 나누지 못한 치열한 공방전이 나와 학생들 사이에 벌어진다. 그래서 보통 학기말 마다 학점 평가를 두고 내가 준 학점에 불만인 학생들과 수십 번 이상의 메일 교환을 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비록 받은 학점을 수정에 성공하지는 못해도 강사가 일단 그들의 질문에 성실하게 답변했다는 이유만으로 대부분 감정 상하지 않고 잘 끝난다.
따라서 나는 교육기관에서 평가를 할 때 가능한 주관식, 논술형 그리고 숙제형의 시험평가를 하기를 원한다. 이런 평가는 가르치는 자 역시 많이 배우고 교사의 논증능력을 키워준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어느 한 쪽이 교과서와 일치한다고 진리를 독점한다는 것은 독재 교육일 뿐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언급하지만, 지나친 교과서 중심의 교육이나 학습은 사고의 경직화를 초래한다. 교과서 역시 몇 사람의 인간들이 만든 책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교과서 역시 언제나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입시위주의 주입식, 암기식 혹은 문제 푸는 요령위주의 교육은 데이터 입력의 기술을 요구할 뿐이지 그 데이터를 처리하는 능력을 함양할 수는 없다.
이런 메모리 위주의 한국 교육에 비해 독일의 교육은 필자가 아는 한 프로세서를 키우는 교육이다. 이는 다시 말해 주어진 데이터를 처리하고 또 스스로 데이터를 수집하며 최종적으로 스스로 데이터를 생산하는 데 교육과 학습의 초점을 둔다. 따라서 독일에서 대학교육을 마친 사람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능력과 책임감이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된다.
거기에 비해 입시위주로 공부한 한국의 대학생들은 현실에서 무너진다, 왜냐하면 현실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현실은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따라서 고정된 지식을 암기하기만 하면 되는 공부는 하면 할수록 고집과 흑백논리만 커진다, 지적 융통성은 사라지고 머리가 꽉 막힌 사람이 된다.
한국의 IMF가 일어난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 머리 좋다는 서울대니 명문대 출신의 정치인, 고위 공무원들 그리고 기업인들, 그들이 IMF의 주범이었다. 그들 똑똑한 사람들은 실은 대학입시 내지 각종 시험의 수재들일 뿐이었다.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 잠도 하루에 4-5 시간 밖에 자지 못하고 학교와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교육의 결과는 적응력과 융통성과 문제 해결능력 없는 무능한 인간, 고정관념과 편견에 찬 똥고집,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적인 인간들을 많이 양산하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고 뛰어난 능력으로 국가와 민족을 빛 낸 사람들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한국이 그토록 교육과 훈련에 많은 투자를 한 셈 치고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시다시피 획일적인 시험 중심의 교육에 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 그런데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시험치는 기술만 익히는 학생들의 지성과 감성 그리고 체력이 과연 제대로 성장 할 수 있을까?
독일에서 필자가 한글 학교 교사로 교포 2세를 가르칠 때 들은 이야기이다 : 어떤 유학생이 독일에서 자라는 한국인 아이들에게 한국의 위인 세종대왕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고 한다; 즉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드느라고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아이들은 “밤에 자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요?”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과연 그렇다. 사람이 밤에 잠자지 않는다면 낮에 제대로 활동을 할 수가 없다. 이처럼 유럽에서는 인간의 상식과 보편성을 중시하고 교육도 그런 기반에서 건전하게 이루어진다. 이에 반해서 자본주의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는 인간의 욕구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극단적인 자유주의와 법치주의가 미국의 특색이기 때문이다. 거기서는 돈 벌기 위한 모든 것이 허용된다. 한국 역시 이런 미국식의 문화를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있다. 이제는 한국의 사회적 모델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 내지 북구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한국의 교육이나 시험제도는 주어진 정보나 지식을 잘 기억하고 반복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주어진 정보나 지식을 스스로 가공하고 처리함으로써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는 필자의 평소의 주장, 즉 대학입시와 사교육을 철폐하고 공교육의 정상화를 통해 진정 자유롭고 공평한 교육과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끝)”
22.학벌 없는 사회 운동의 몇 가지 문제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의 하나가 소위 학벌 문제라는 것은 다 알려져 있다. 그런 중에 학벌없는 사회 운동이 최근 사회적으로 큰 호응을 불러 일어 켰다. 그런데 필자는 그 운동의 취지문을 읽어 보고 몇 가지 문제점을 느꼈다. 이 운동을 주도하는 김상봉선생 , 정영섭선생 그리고 김동훈 선생이 쓴 글들을 읽어 보고 나서 필자는 몇 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우선 김상봉 선생의 글 안티학벌선언을 읽어 본다.
----------------------------------------------“학벌없는 사회 취지문"
우리의 꿈은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단순한 차이가 차별의 원인이 됩니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이유로, 출신지역이 다르거나, 인종 또는 국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리고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아니면 마음 속에 품은 생각과 신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 받는 사람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차별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의 삶을 불행하게 하면서도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차별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학벌에 의한 차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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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첫 문장에서 나는 김상봉의 글이 너무 단순한 평등의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첫 문장 : "우리의 꿈은 차별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에서 특히 그런 문제를 느낀다. 나의 생각에 의하면 사회의 평등과 불평등(혹은 차별)은 둘 다 사회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요소이다. 문제는 부당한 차별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근본 문제는 학벌이나
학력에 의한 차별이 아니라 정확히 말하면 부당한 그리고 불공평한 차별의 문제이다. 능력이나 업적에 따른 차별대우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원리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세부적인 견해는 이 책의 "서론 : 교육공화국의 이념"에서 밝혔다.
따라서 학벌문제와 관련된 한국 사회의 모순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라 옳지 못한 차별이라는 점이다. 즉 일류대란 간판만을 보고 한 사람의 능력이나 가치를 전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적인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문제이다. 더 나아가서 그런 학벌이 고착화되어 사회적인 유동성을 막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표현하면 기득권층이 자신의 특권을 대물림시킨다는 점이다. 즉 부의 세습 뿐만 아니라 교육과 지식까지 세습시킨다는 점이다.
김상봉의 "학벌없는 사회 취지문"을 더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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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한 사람의 사회적 신분을 결정하는 잣대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부와 권력은 극소수의 상류대학 출신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을 통틀어 모든 공직과 경제계, 언론계, 학계 그리고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이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권력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극소수의 학벌문중에 의해 장악되어 있습니다. 그런 우리 사회에서, 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 그리고 대학을 나왔더라도 이른바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유형 무형의 차별과 무시를 받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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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실제와 부합하는 올바른 서술이다. 그런데 한 가지 나의 의문은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학벌 위계 질서'를 타파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학벌 타파! 말은 좋지만 어떻게 하는 지가 불투명하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한국 교육의 문제는 교육이 사회적 유동성을 막고 사회적 계층을 고착화시키는 이른바 인도의 카스터 제도에 비교할 수 있다.
이런 교육의 카스트화를 막는 대책은?
이는 단순히 현재의 몇개 일류대의 문을 닫고 이류대(죄송!)에 돈을 더 지원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나는 교육공화국 운동을 통해, 즉 사교육과 대학입시를 철폐하고 그 대신 고교 졸업시험으로 대학입학 자격을 주며 더 나아가 대학에도 입학시험이 아니라 졸업시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학생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독일이나 북구라파의 대학제도에서 그 모범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서울대 폐지같은 미봉책이 아니라 교육 사회주의, 교육 국가주의를 통해 난마와 같이 얽힌 한국사회의 교육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문제는 서울대와 몇몇 일류대만 없애고 나면 학벌문제는 한국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기존 명문대의 소멸 후에 신흥 명문대가 출현하지 않는 보장은 있을까? 마치 고교평준화 이후 신흥명문고가 생겨난 것처럼.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서울대를 정점으로 한 극소수의 학벌문중"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 평준화 이후에도 대학별 서열은 발생할 수 있고, 이는 주로 학교간에 경쟁과 우열에 따라 가려진다.
따라서 한국 사회의 문제는 서울대와 일부 명문대의 기득권이 고착화 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사회적 지위 이동(social mobility)을 막고, 건전한 대학간의 혹은 학생간의 경쟁을 방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벌 없는 사회운동의 김상봉은 경쟁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하면 경쟁과 평등을 조화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경쟁을 완전히 부정한다면 공산주의로 가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경쟁 없이는 발전도 없다. 그리고 김상봉이 지적하는 학력 차별의 문제는 현행의 분배구조를 고쳐야지 풀리는 문제이다. 한국에는 똑똑한 사람 그래서 높은 교육을 받은 사람은 무조건 많은 보상을 받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독일이나 스웨덴 같은 북구에서는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반드시 거기에 비례해서 보상받지 않는다. 오히려 3D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더 보상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들이 하기 싫어 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사회적 토론과 합의가 있어야 할 것 같다.
교육 사회주의 내지 국가주의는 현재의 (고등학교)강제적 평준화에 반대하고 있으며 교육기관의 선택에 국민들의 자유로운 결정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국가에서 전대학을 운영하더라도 그 중에서 일류대가 생길 수 있다. 이런 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이점에서 교육공화국 운동은 학벌없는 사회 운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서울대나 몇몇 명문대의 개혁, 비판 내지 폐쇄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우리는 경쟁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문제는 공정한 경쟁을 위한 조건의 마련이다.
그리고 학벌 철폐보다 더 비중을 두는 것은 대학입시와 사교육의 폐지이다.
그리고 교육이나 취업에 있어서 시작, 즉 입학과 입사, 보다는 끝이나 결과를 중시하는 시스템이다. 소위 학벌보다는 능력위주의 사회를 추구한다. 그리고 이런 제도를 위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이다.
사실 독일에서 필자가 경험한 것은 학벌의 폐지가 아니라 참다운 능력, 실력을 계속 점검하는 사회적 시스템이었다.
가령 필자가 아는 한 독일인 친구는 대학마친 후 남들이 부러워하는 업체에 전산팀장으로 취업이 되었지만 일이 너무 고되어서 입사 후 6개월 내내 퇴근 후 집에서 잔업을 처리해야 했고 일이 고달파서 밤마다 울어야 했었다. 그러니 일류 업체,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하더라도 별로 좋아 할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난다. 거기서는 돈을 많이 주는 대신 어렵고 힘든 일이 맡겨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힘든 과업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은 중소기업에 취직하더라도 곧 대기업이나 좋은 업체에 들어 갈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류대나 일류 기업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한 번 그런데 들어갔다고 해서 그 사람의 전인생이 결정되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지금 학벌제도의 폐해는 한번 일류 대학에 입학하면 그것이 한 인간의 평생의 가치판단으로 낙인되어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독일처럼 결과와 실력을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가 형성되면 설령 일류대니 명문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처럼 그렇게 큰 사회적 영향력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은 무경쟁의 유토피아가 아니라 능력과 실력이 제대로 평가될 수 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필자는 교육의 공화주의야 말로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제도라고 결론내린다. 영미식의 신자유주의, 시장주의가 아니라 도리어 교육의 진정한 국가주의, 공화주의야말로 개인과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다.
그리고 공정하게 실력이 인정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서울대의 개혁이 아니라 전 대학 시스템의 혁명적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경쟁 없는 사회, 경쟁 없는 대학 그리고 학교간의 우열이 없는 평준화한 사회가 아니라 공정한 경쟁의 조건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공정한 조건만 주어지면 그 다음에 오는 차별이나 차등은 감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교육제도는 경쟁과 평등을 잘 조화시킨 제도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학벌구조는 공정한 경쟁을 막고 있다. 교육이 사회적 유동성을 억압하고 사회적 카스트화를 촉진하고 있다. 이는 교육의 사회적 지위 이동 기능이 더 이상 작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 학교가 도리어 결국 사회 발전과 화해를 저해하고 분열과 갈등을 증폭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23. 프랑스와 독일의 교육제도 비교
1) 학벌의 정의 :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국어 사전(최신 국어대사전, 한갑수 감수 1974)을 열어보니 [학벌(學閥) : 같은 학교의 출신자나 같은 학파의 사람끼리로 만들어지는 배타적인 당파]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한국은 국립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여 학벌의 위계질서가 뚜렷한 사회이다. 그리고 또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계층구조가 고착화하여 건전한 사회적 유동성을 심히 저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인재란 돈 많은 집의 자식이다, 부의 세습뿐만 아니라 이제는 학벌의 세습까지 이루어지고 있다”라는 말들이 나오는 실정이다.
따라서 서울대나 기타 명문대의 위계질서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런 위계질서의 강화 및 고착화가 더 큰 문제이다.
또한 여기서 현재 학벌 문제는 일부 학벌철폐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서울대나 명문대를 폐교시킨다고 해소되는 성질의 사안이 아니다. 고교평준화 이후 신흥 명문고가 출현한 것처럼 서울대 폐지 후에 또 다른 명문대, 일류대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따라서 필자는 학벌지양을 위해 대학 평준화니 서울대 폐지론이니 하는 주장은 문제의 피상적, 임시적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본다. 필자의 해법은 교육의 사회주의, 국가주의이다.
2)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제도 비교
필자는 교육의 사회주의 그리고 국가주의를 잘 시행하는 나라로서 독일을 꼽는다.
먼저 교육의 시장주의, 신자유주의를 선도하는 미국과 교육의 국가주의를 시행하는 대륙유럽을 비교, 분석해야 하나 지면의 한정 때문에 바로 유럽대륙의 두 나라, 즉 프랑스와 독일을 비교한다.
프랑스는 모든 대학이 국립화되어 있기는 하지만 국가 엘리트주의를 실시하는 나라로서 ENA 라는 학교와 에콜 폴리테크닉은 한국의 서울대의 지위와는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근래에 한국 지식인 사회에서 프랑스가 대학 평준화의 모범적인 국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지만 흔히 고등전문학교라고 번역되는 그랑제콜(Grand Ecole) 이 대학(University)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기관이며 이곳의 출신들이 프랑스 사회를 움직인다고 해도 틀인 말이 아니다. 즉 프랑스의 고등교육 시스템은 대학(University)과 그랑제콜(Grand Ecole)로 이원화되어 있기 때문에 프랑스의 대학 혹은 고등교육이 평준화되어 있다는 것은 실은 무의미한 말이다.
같은 국가주의 교육을 실시하면서도 독일은 교육의 사회주의, 평등주의를 제대로 실천하는 나라이다. 독일에서는 대학간의 횡적 및 종적인 이동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학교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비해 영미식의 교육은 학연과 학벌을 –하버드 출신이니 예일대 출신이니 하는- 상당히 존중한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 도무지 누가 무슨 학교를 나왔는지 전혀 관심을 쓰지 않는다. 거기는 우리나라나 미국 같이 동문의식이나 모교개념이 거의 없다. 다시 말하면 서울대니 경희대니 하는 대학교의 울타리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기의 사정과 관심에 따라 혹은 좋은 교수를 찾아 이 학교 저 학교 옮겨 다닌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배울 점은 한국의 대학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교수를 뽑을 때 본교 출신을 잘 뽑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야심 많은 학자들은 교수자격 시험(Habilitation)과정을 할 때 모교를 떠나 다른 곳에서 공부한다. 즉 자기의 실력을 홈 그라운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인정받으려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아는 한 이런 나라는 세상에서 극히 드물다. 그러니 자연히 학벌이니 학연이니 하는 것들이 독일에서 생겨날 수가 없다. 실로 독일에서 예를 들어 그 나라 수상이 어느 학교, 어느 대학 나왔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퇴학이니 전학이니 편.입학 등이 자유이다. 독일에서 퇴학 (대학의 경우)이라는 것은 단순한 서류절차에 불과하다. 학기마다 퇴학, 전학 하는 이들로 교학과가 북적거린다. 진짜 이나라는 교육의 자유와 평등을 이룩한 위대한 국가이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교육제도 만큼은 독일의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시 말해 교육부재와 교육망국이라는 오명을 달고 있는 현행의 한국 교육은 이제 독일식의 제도를 모델로 하여 근본적으로 완전히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데 교육의 국가주의, 사회주의라고 해서 모든 대학을 획일적으로 평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학교간에 경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독일대학의 교수들은 죽어라 공부하고 연구한다. 독일대학의 학생들은 심한 학업 성취 스트레쓰를 강하게 받는다. 그래서 각 대학마다 심리, 정신 상담 센터가 있다.
그리고 평준화 문제와 관련해 중요한 점은 독일에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교육을 무상으로 지원하고 개인은 마음대로 학교를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독일의 학생들은 그래서 보통 대학졸업까지 2-3개의 대학을 편력한다. 필자 역시 독일 유학시절 쾰른 大와 부퍼탈 大를 다녔다.
독일은 우선 등록금이 없으니 학업의 부담이 없고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대학입시가 없다는 점이다. 고등학교 졸업시험이 곧 대학 입학자격시험이다. 그리고 독일의 아비투어는 대부분 수험생의 출신학교에서 치루어지고 또 시험문제도 출신학교 교사들이 제출한다. 이러니 자연히 교사들의 권위가 서고 또 사교육도 전혀 필요 없게 된다. 이제 우리의 교육개혁의 모델도 이런 독일의 제도를 따라 새로 정립되고 또 노력의 목표도 정해져야 한다.
그리고 독일에도 좋은 대학, 좋은 과가 있고 또 의대니 공대 등 실습 때문에 입학생을 무제한 받을 수 없는 학과들에는 입학제한이 있다, 그러나 그 경쟁은 그렇게 심하지 않다. 예로서 필자가 아는 한인교포 장석철군의 경우 고교졸업시험(Abitur) 성적이 좋지 않았지만 고교 졸업 후 그는 2-3년간 간호사로 일했고 그 후 곧 의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독일에서는 졸업 후 시간을 기다리면 기존의 성적이 상향 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입학시험이 아니라 졸업시험이 거기서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끝)
24. 고교평준화 위헌 문제
1) 문제의 발단 - 평준화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
요즘(2002년 말) 우리의 국내외 정세는 어수선하다.
미국이 이라크에 선전포고를 주장하고있고 북한은 남한이 햇볓정책을 펴는 동안 꾸준히 핵개발을 해왔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교육공화국의 입장에서 북한과 미국 둘 어느쪽이 옳은지를 일단 유보하겠다.
필자의 세대(1958년생)는 항상 입시개혁의 과도기에 살았었다. 우리보다 1년 앞 선 세대들은 처음으로 중학교에 시험을 치르지 않고 들어갔었다. 필자의 초등학교 5학년 때 중학교가 무시험으로 되었었고 또 중학교 3학년 때 부산에서는 최초로 고등학교 입시에 본고사가 사라졌었다. 그래서 연합고사를 통해 고등학교에 입학했었다. 필자는 부산에서 연합고사를 치르고 뺑뺑이를 돌려 고등학교를 배정 받았었다. 그런데 필자가 연합고사를 보고 나서 대구에 있는 이모 집에 놀러 갔었는데, 그 때 대구에서 고등학교 교편을 잡고 계시던 이모부가 대구에 아직 명문고 입시가 남아 있으며 나에게 한 번 시험에 도전해 보라는 말을 듣고 나서 필자는 다시 부산에 내려와 보름 정도 입시 공부한 뒤 다시 대구에 가서 (본고사)시험을 보고 운 좋게도 명문 경북고에 입학했었다. 그런데 우리시대의 입시와 같은 여건이 아직 남아 있으니 소위 비평준화 지역이라고 불리는 곳들이다.
그런데 어떤 보고서를 보니 고교입시 비평준화 지역의 아이들은 우리시절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때부터 힘든 입시 준비공부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비평준화 지역이었다. (...)고등학교도 시험을 쳐서 성적대로 입학을 했고 그래서 중학교 때부터 야간 자습을 해야만 했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중학교 입시가 있던 시절에는 아이들은 늦어도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 입학 시험 준비에 시달려야 했었다. 중입, 고입 그리고 대입 등등 갖가지 시험이 차례로 저승 사자들처럼 서서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었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볼 때 입시를 많이 폐지하여 -그 실제 이유야 뭐든 간에- 한국 청소년의 정상적인 발전에 기여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고교 평준화 정책이 학생들을 지나친 입시준비의 사교육의 압박에서 해방시켜 그들의 정신적, 육체적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최근에 이런 평준화, 즉 무시험을 반대하고 다시 비평준화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특히 법조인들을 중심으로 많이 발표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테마는 고교평준화의 위헌시비이다. 지금까지 고등학교 입시 비평준화지역이던 수도권지역이 평준화되면서 그곳 주민들은 고교평준화 시비에 대한 헌법 소원을 제기한 상태이다. 이는 그간 비평준화 지역의 명문고등학교들이 그 지역의 부동산 가격 상승에 많이 기여했으나 이제 무시험, 평준화가 실시되면 명문고가 사라지고 따라서 부동산 혜택이 사라지니 그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평준화 위헌 소원을 한 것이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변호사들이 법적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법학자, 변호사 그리고 정치인들이 비평준화, 즉 고교입시제도의 부활을 요청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지난 3월 전 경실연 총무 이석연 변호사는 고교평준화가 국민의 학교선택권과 학교의 학생 선발권을 무시하는 위헌이라고 주장했었다. 여기에 간단히 여기에 간단히 이석연씨 관련 기사를 게재한다.
(서울=연합뉴스) 박세용 기자 =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낸 이석연(李石淵) 변호사는 4일(2002.3) "능력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라는 헌법 정신을 무시한 고교평준화 등 현 교육정책은 공교육을 황폐화하고 국가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위헌적 제도"라고 주장했다.
이 변호사는 이날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특강에서 `정부의 경제사회정책의 헌법적 문제점'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하고 "학생.학부모의 학교선택권과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본질적으로 제약하는 현 교육제도를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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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헌법 해석의 문제 - 문자적, 피상적, 이기적 해석을 비판한다.
그런데 위의 신문 보도만 가지고서 이석연씨의 주장을 완벽히 알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그의 생각의 요지는 여기 드러나 있다고 보인다. 그러면 이석연씨의 주장을 분석해 보자. 우선 그가 고려하는 헌법구절은 아무래도 헌법 31조 1항이다. 이를 인용한다.
"헌법 제31조 ①항 :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
그런데 이석연씨는 이 구절에서 전반부, 즉 <능력에 따라>만을 보고 있다, 그는 그러나 구절의 후반부 <균등하게>를 도외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라는 헌법 구절을 지나치게 능력 중심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능력이란 개념이 1) 천부적인 개인의 고유한 능력이라는 자연적인 의미와 2) 부와 권력 등의 사회적인 영향력 하에 나타나는 학교의 성적이나 시험점수 등의 실증적 의미 둘 다를 내포하는 애매한(ambiguous) 개념이다. 따라서 이 말의 사용은 특히 한국에서 날카로운 분석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부터 원어민 교사한데서 영어를 배우고 초등학교부터 서울대 입시를 겨냥하여 논술과 심층면접을 준비하며 방학 때마다 외국어 해외연수를 가는 부유한 가정의 어린이와 집안이 너무 형편없어서 학교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린이의 성적을 비교하여 전자가 능력이 더 있다 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물론 이런 극빈 가정이나 결손가정의 어린이는 극히 소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불평등을 도외시하고 능력이나 실력을 말하는 것은 극히 피상적인 견해이다. 따라서 능력을 단순히 현상적으로 드러난 시험점수로만 해석한다면 이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수능)시험점수는 그가 받은 과외지도나 사교육의 영향을 많이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실증법 구절만 무조건 맹종하는 법조인들, 법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김철수는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라는 헙법 구정을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하는 것이 평등의 이념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같은 것을 다르게, 다른 것도 같게 하려는 인간들의 사회적 욕망이다. 특히 한국처럼 학력이나 학벌이 사람의 한평생을 좌우하는 나라에서는 자녀의 취미나 적성보다는 무조건 일류대에 가고 봐야 한다는 생각이 팽배하다. 한국에서는 법의 규정처럼 학습자의 인격이나 개성 그리고 능력 등이 거의 존중되지 않는다. 그러니 이석연이나 김철수가 주장하는 대로 평준화를 철폐하고 옛날식의 엘리트주의를 도입한다고 해도 이런 경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 반대로 학습자의 인격이나 개성 등은 더 억압, 말살되고 초등학교부터 입시지옥의 나락으로 타락할 것이 뻔하다. 어떻게 이렇게 법(法)아는 사람들의 역사의식, 사회의식이 고루한지 모르겠다. 그들은 나쁘게 말해 현재 사회 기득권층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물론 현행의 평준화에 큰 문제가 있고 따라서 필자도 이를 반대한다. 그 문제란 학군제에 따르는 고등학교 강제 배정이다. 이를 김철수는 “그런데 학생이나 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은 무시한 채 근거리 통학이라는 명목으로 학교를 강제 배정하고 있는 것은 기본권 침해도 이만저만한 침해가 아닌 것이다” 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자립형 사립고의 도입이나 (일류)학교의 학생 선택권이 아니라 독일식의 제도, 즉 국가에서 전 교육을 담당하고 국민은 자신의 관심에 따라 다닐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이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학교배정이 우리나라와는 달리 미리 학부형이 그 학교의 사정을 알고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준다. 김철수나 이석연의 주장처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평준화를 깨고 다시 옛날처럼 고교입시를 부활하여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주는 행위는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될 악습이다. 이는 역사의 시계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수구적 아니 퇴행적 사유이다.
위의 법조인들의 문제는 현재의 교육 파탄, 교실 붕괴라는 현상을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하향) 평준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예전처럼 명문고가 부활되면 작금의 이런 부조리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견되는 그 결과는 절대적인 아동 인권의 말살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도 한국의 사회에는 학벌주의 풍조에 발맞추어 중고등학교는 오직 대학입시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아이들을 학습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 최근의 한 초등학생이 학원에 가는 부담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었다. 그런데 한국의 교육기본법은 “교육내용·교육방법·교재 및 교육시설을 학습자의 인격을 존중하고 개성을 중시하여 학습자의 능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강구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무관하게 진행된다. 오직 하나의 목표를 향하여 전 학생, 전 국민이 돌진하고 있다.
위에서 필자는 현행의 평준화제도가 이석연, 김철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위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위법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 있어서 필자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들은 명문고의 설립과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허용하라는 미국식 제도의 도입, 즉 교육의 시장주의, 개인주의를 주장했었고 필자는 헌법과 법률의 취지를 살리기 위해 독일식 교육, 즉 교육의 국가주의, 사회주의를 주장했었다.
문제는 이들 법조인들의 주장을 따르면 실질적인 불편등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라는 헌법의 구절을 보면 기회균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교육기회는 국민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에 무관하게 주어져야 한다. 즉 교육은 철저히 평등주의적인 관점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헌법 31조 1항, 즉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를 해석할 때 여기서 능력 개념은 피교육자의 부모나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따른 차이를 무시하고 오직 개인의 자연적인 소질과 재능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인들은 현상적인 능력 개념, 즉 시험점수나 성적만을 능력의 본질로 간주하고 이에 근거하여 현행제도를 비판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피상적인 능력개념이 사교육의 영향에서 독립될 수 없고 따라서 그것이 천부적인 개인의 재능이나 능력과는 거리가 먼 사회적 형성물이란 점을 밝혔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위헌적, 위법적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해석, 이는 단순히 문자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국민적 생활의 총체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결론적으로 현행의 평준화는 위헌의 소지는 안고 있으나 그 해결책는 다양한 가응성을 허용한다. 즉 이석연이나 김철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입시제도의 부활과 학교의 학생선발권을 주어서 학교를 차등화시켜 나가든지 아니면 독일식으로 국가적으로 평등한 교육제도를 시행하고 그 위에서 개인이 자유롭게 학교를 선택하든지 하는 두 가지이다. 그리고 위헌여부를 떠나 "학교선택의 권리는 반드시 국민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이석연씨의 주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 그래서 우리도 현행의 (강제적) 고교 평준화에 반대한다.
3) 교육공화국 - (피)교육의 자유, 졸업시험제도의 도입 요구
고교평준화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평준화 반대가 곧 이전의 명문고 부활과 연결되지 않는 전략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조인들 및 정치인들(이회창, 정몽준, 노무현등)은 비평준화를 신자유주의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현행의 평준화를 유지하되 소수의 명문고를(자립고, 특목고등) 다시 세운다는 논리이다. 이는 결국 미국식의 교육시장주의로 전환하는 발상이다. 이는 벌써 한국에서 충분히 그 피해를(입시경쟁) 경험한바 있다.
따라서 교육공화국의 정책은 입시정책의 혁명적인 개혁을 요구한다. 설령 명문고나 자립형 사립고가 생긴다고 할 지라도 대학입시를 폐지하고 고교졸업성적으로 입학하게 하고 또 대학에서도 입학보다는 졸업시험을 중시함으로써 평준화니 비평준화니 하는 소모적인 논쟁의 종식을 도모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평준화, 비평준화 논쟁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현행의 대학입시제도를 폐지하고(대학 입학의 자유) 그대신 대학과정에서 결과적인 평가를 계속 수행함으로써 대학졸업의 자격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기위해서는 전대학의 (재정의) 공립화가 필요하다. 아니 사립을 굳이 없애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문제에는 정부의 관리를 받도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네델란드의 경우 사립을 인정하고 재정도 전적으로 국고에서 보조하면서 학사관리는 한다고 한다)
이런 관점에서 위에서 전 경실연 사무총장 이석연 변호사와 김철수 교수의 평준화 반대 논리를 게재했었다.
참고로 독일에서는 전교육을 무상으로 실시하면서도 "학생.학부모의 학교선택권"이 인정되고 있다. 그 대신 학교의 학생선발권은 인정되지 않고 있다.
25 . 논리와 윤리 - 한국인들의 사유의 근본적인 결점
요즘(2002.10.16) 검찰 수사관이 용의자를 수사하다가 고문, 구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이 터져 정국이 벌집을 건드린 듯이 요란합니다. 이런 경우 나는 한국의 경찰 검찰, 그리고 다른 법조인들의 정신적 상태를 한번 상기합니다. 그들은 국가의 공권력을 자칭하지만 실은 역대 정원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인권을 짓밟은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들은 비윤리적, 비도덕적 일뿐 아니라 더 큰 문제는 논리적 능력이 극히 초보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악할 뿐 아니라 머리가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형사 콜롬보를 본 경험이 있습니다. 거기서 콜롬보는 몇 가지 단서와 용의자들의 진술만을 가지고 스스로 문제의 관련성을 하나식, 둘씩 풀어냅니다. 그런데 한국의 경, 검찰은 이와 반대로 전혀 상황을 논리적으로 분석, 판단, 추리하지 않고 혐의자들의 자백을 중심으로 우격다짐의 수사를 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결국 이번 검찰들의 고문수사는 그들이 얼마나 수사력과 추리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인은 논리적 사유의 연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느낍니다. 필자의 신간 "논리의 탄생"은 그런 관점에서 국민들의 논리적 교육을 목적으로 쓰여진 하나의 참고서입니다. 그리고 학벌차별이나 지역감정 같은 야만적인 문제도 근원적으로는 국민들의 합리적, 논리적 사유의 결핍에서 야기되는 문제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은 그림을 봅시다
주체(Subject) 속성(Attributes)
<인간(주체)과 그의 속성의 관계>
여기서 보는 것처럼 우리나라 사람들은 전체와 부분을 혼동하는 오류를 흔히 범합니다. 즉 한 사람의 내용은 그림 좌측의 속성(attributes)의 전부인데 우리사회는 그 중의 하나인 학력으로만 그 사람의 역량을 평가합니다. 이것이 형식주의 혹은 간판주의의 오류입니다. 즉 한 주체의 역량을 오직 한 두 가지 형식으로만 판단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도외시하는 논리적 오류입니다.
또는 지역감정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지역 출신의 정치가가 반드시 나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습니다. 한나라당의 이회창씨가 집권하더라도 경북, 대구지역의 주민들에게 아무런 특별한 이익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국민들은 환각에 빠져 있습니다. 국민들은 기분과 이익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민적 혼동을 깨우치는 것이 우리 운동의 목적입니다. 이는 제도개혁과 더불어 논리적 사유, 합리적 사유의 훈련을 통해 이루어 집니다.
그리고 수능시험 같은 획일적인 시험은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사유하게 하여 그렇게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나쁜 평가 방식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교육(수업)과 평가(시험)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내가 배운 그 선생님이 나의 성적을 산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대학입시를 없애고 출신 고등학교의 교사들이 학생들의 최종적인 평가를 해야 합니다. 또한 거기서 교사의 권위가 나옵니다. 가르치기는 A 선생이 하고 평가는 B(예를 들면 교육청)가 한다는 것은 극히 잘못입니다. 교육의 본성상 교육과 평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26. 수능시험에 반대하는 논리들 (외부 평가와 내부 평가)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귀하의 글 잘 보았습니다.
부모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사교육의 필요성이 점점 더 증대되어지는 사정이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한 학생은 점점 늘어만 가는 학원생활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 “일반 고등학생의 일과를 보면 새벽같이 학교를 가서 공부한 후 집에 와서 쉬는 게 아니라 학원에 가서 그날 배운 것을 다시 배우고 예습을 한다. 어느새 학원은 우리나라 교육에 있어서 필수가 된 것이다”.
학교와 학원은 본래의 상호관계를 뒤집어 이제는 학원이 주(主)가 되고 학교는 종(從)이 되었습니다. 학교는 실은 학원 생활에 지친 아이들의 휴게소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애들에게 “밥 먹어라, 학원가라”는 말만 해주는 지극히 파편적인 자식-부모 관계로 전락했습니다. (입시) 학원이 없는 나라 우리 나라 좋은 나라. 이런 나라들이 세상에 많이 있습니다. 우리라고 왜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합니까? 독일의 경우는 하다못해 어린이 발레학원이나 음악학원도 모두 공립(시립)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능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부부 같은 가난한 한국인 유학생들도 애들을 음악학원에 보낼 수 있었습니다. 또 같은 학원에 보내더라도 부자들은 회비를 많이 내고 가난한 사람들은 공짜로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니 빈익빈 부익부를 초래하는 사교육이 없는 학교교육 중심의 사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는 힘이 없어서 현 제도의 모순을 보고만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문제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공감한다면 언젠가는 우리나라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고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정상적인 공교육을 마비시키고 힘든 사교육을 강화시키는 원인은 우선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학벌구조입니다. 즉 대학 입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기 때문에 수험생 및 학부모 그리고 온 나라가 수능 및 대학입시에 초조하게 매달리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능력평가가 대학교육의 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작에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러니 서양에서는 "한국에는 (인재 육성을 위한) 교육은 없고 (인재의)선발만 있다" 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학벌철폐가 절실한 시점입니다.
둘째는 -첫째와 연관되는 문제인데- 수능시험 문제입니다. 수능, 즉 외부적, 획일적, 집단적 시험이 학생들, 국민들의 사고를 획일화시키고 결국 획일적인 인간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한국의 대학생들은 사고의 다양성, 개성, 독창성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논리적인 판단력, 추리력이 나쁩니다.
최근 검찰이 수사하다가 피의자를 물고문하고 구타하여 죽인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윤리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논리적인 문제입니다. 즉 한국의 검사, 법조인들이 불법적인 패륜아들이며 동시에 머리도 극히 나쁘다는 것입니다. (형사 콜롬보를 상기해 봅시다, 범인을 머리로 잡아야지 몽둥이로 잡아서는 안됩니다)
수능대신 독일에서와 같이 고교졸업시험으로 평가를 대체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능의 폐단은 선생닝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교사, 학생 그리고 전 교육과정을 수능의 노예로 타락시킨다는 점입니다. 사교육 역시 그런 수능의 부산물입니다.
평가는 교육자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내신 같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가르치는 교사가 배우는 학생의 성적을 최종적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설령 고등학교 교육이라고 할지라도 각 교사나 학교 그리고 학생들은 다 개별적이고 다릅니다.
같은 공식을 가르쳐도 엄청나게 다른 방식으로 지도하거나 학습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기본적으로 지식을 매개로 한 인격적이고 개별적인 만남의 사건입니다.
따라서 같은 교과서로 지도하더라도 교과 과정도 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능이나 다른 외부적인 평가가 학습의 최종 목표가 되면 결국 교육, 학습, 교사, 학생 모두가 그 외부평가의 수단이나 도구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러니 한 학생에 대한 평가는 결국 그를 직접 가르친 사람만이 가장 잘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교육의 상호작용(교사-학생의 인격적, 지식적,학문적 관계)과 분리된 어떤 외부적인, 획일적인, 기계적인 평가시스템에 반대합니다. 독일에서는 자기가 배운 학교, 교실에서 배운 교사들이 제출한 문제로 고교졸업시험을 보고 그것이 또한 대학 입시자격시험이 됩니다. 그리고 대학에서도 졸업시험으로 평가를 하기 때문에 입학시험의 비중이 그렇게 크지않습니다.
이처럼 성적에 대한 외부평가가 아니라 내부평가, 즉 가르친 자가 배우는 자의 실력을 최종적으로 평가한다면 사교육은 저절로 없어 집니다. 사교육 받는 목적이 외부평가 내지 대학 입시의 대비이기 대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내부평가 시스템 및 졸업시험제가 정착되고 대학에서도 입학보다는 졸업을 중시할 수 있기 위해서는 대학의 민영화, 자율화가 아니라 공영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경우도 입사보다는 입사후의 성과와 결과를 더 중시할 때 입학, 입사, 입시에 관한 모순이 모두 사라질 것입니다.
대전성모여자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이런 사정을 널리 알려주시고 계몽해 주십시요. 이는 오늘, 내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설령 내가 고교,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도 학벌 문제, 입시문제가 나와 무관할 수 없습니다. 지금 교실은 붕괴되고 고등학생들은 입시지옥에 시달리고 또 대학생들은 학벌의 폐해로 인해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장래가 어둡습니다, 몇몇 명문학교 학생들의 제외하고는.
이처럼 대학 입시제도의 개혁은 학벌문제 해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육공화국의 이념을 인식하고 전합시다. (끝)
27. 기여입학제 그리고 대학자율화의 문제점들
1)들어 가면서
최근 다시 신문. 방송에서 대학 기여입학제의 논란이 일고 있다. 지난해 3월 정부에 기여입학제 도입을 건의해 논란을 일으켰던 연세대는 지난 4월 부산에서 3당 정책책임자를 초청해 기여입학제 토론을 벌이는 등 그 동안 분위기 조성에 앞서왔다.
또 19일에는 교육 당국의 불가 방침에도 불구하고 내년도 입시부터 기여입학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마련 중이라고 밝히면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쟁점화할 태세다.
그리고 연세대 이외의 다른 사학들도 이런 추세에 언감생심 동조하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이런 유명 사립대의 기부금 입학제는 부족한 사립대학의 재정문제의 해결과 또 국제적으로 경쟁력있는 학원을 지향하기 위한 고심의 결단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기부금 입학에 대한 반대 여론 역시 만만치 않게 제기되어왔다, 즉 기부금 문화가 없는 한국의 여건상 대학 입학과 기부금 헌납은 직결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고, 이는 결국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일류대학)입학 자리를 돈 많은 집의 자녀들이 빼앗는 논리라는 것이다.
필자의 입장 역시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2) 기부금 입학과 대학 자율화
최근(11.27) 조선일보에 실린 한양대 조진수 교수의 기고는 기부금 입학이 결국 대학 자율화, 민영화 그리고 교육의 시장주의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여입학제는 (미국식의) 대학 자율화 제도의 일부라는 점이다.
“이런 현실 속에서 사학의 운명은 학교와 학생(학부모)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사학이 제공하고 싶은 교육의 질에 따라 재정을 스스로 확보하고 학생은 자기의 수학능력과 경제적 능력을 고려하여 학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결국 사학재정의 완전 자율화를 의미한다. 재단의 능력에 따라 등록금으로 해결하든 기여입학제를 이용하든 사학이 알아서 할 일이다”.
기부금 입학제는 따라서 미국식의 대학 자율화, 민영화로 가기 위한 단계적 조치로 이해되어진다. 사실 한국의 사립학교들은 이름만 사립이지 실은 입학 정책부터 등록금문제에까지 정부의 통제와 간섭을 따르고 있다.
미국은 대학교육에 대해 정부 통제가 없는 나라이다. 교육 부총리가 있는 우리나라에 비해 미국의 경우 연방 교육부는 생긴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 역할 역시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그리고 특히 고등교육은 건국 초기부터 철저히 민간의 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주립대학 같은 공립학교 역시 재정지원에 대해서만 정부가 개입하고 있다. 신입생 선발 방식과 정원수 조절, 학과 커리큘럼, 재정정책, 교내행정, 학사관리 등은 철저히 각 대학의 자유 재량권에 맡겨진다.
이 모든 요소들은 인력시장의 수요와 공급이라는 시장원리에 의해 자동적으로 조정되어 진다. 시시한 대학들은 등록금을 싸게 하더라도 학생들이 몰리지 않을 것이고 좋은 대학들은 엄청난 등록금을 내더라도 사람이 몰릴 것이 뻔하다, 마치 현재 미국의 대학 시장이 그러하듯이.
그러므로 대입 수능 시험기간에 온 국민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한국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미국은 가지고 있다.
따라서 기부금 입학이나 혹은 학원 민영화, 자율화, 시장주의 등은 한국에서 제대로 시행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국의 경우 미국과는 너무 다른 교육 인프라와 전통 그리고 가치관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조건의 차이를 무시하고 미국 대학의 몇 가지 좋은 제도 만을 가져온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사립 대학의 경영난과 경쟁력 제고를 위한 재정 확보문제도 기부금 제도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해결 되어야 한다.
3) 교육 공화주의
필자는 교육개혁 관련 인터넷 사이트 “교육공화국”
( cafe.daum.net/edurepublic )을 운영하면서 한국의 교육의 양대 모순, 즉 학벌제도와 입시지옥을 탈피하기 위해서 독일식의 교육사회주의, 교육국가주의를 하자고 부르짖어 왔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기부금 입학제를 비롯한 대학 자율주의는 득(得)보다 실(實)이 많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이 제도의 장점, 아니 그 주창자들이 주장하는 장점은 대학의 경쟁력 향상과 국가 경쟁력 향상이다. 그리고 그 제도의 폐단은 다 알다시피 학벌주의와 입시지옥의 악화라는 점이다.
우선 전자의 경우 몇몇 일류 대학은 분명 지금보다 더 넉넉한 재정적 지원 위에서 학문연구와 학생복지를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나 대학간의 차이는 지금보다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대학은 기업체처럼 영업이 안될 때는 문닫거나 통폐합 내지 판매(양도)가 가능해져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육을 , 특히 고등교육을 국가의 큰 일로 생각해온 한국의 역사적 전통에서 볼 때 이런 철저한 미국식의 교육 시장주의 현실은 소화하기 어렵다, 아니 불가능하다 -필자의 느낌을 따르면-.
혹자는 말하기를 그렇게 철저하게 미국식 시장주의를 하지는 말고 부분적으로 수용하자, 가령 기여입학제도만 수입하고 나머지는 지금의 틀을 고수하면 된다, 라고 말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시스템의 한 부분을 채택하면 결국은 전체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절충이나 타협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재 연세대가 원하는 대로 기여입학제가 실현되고 만약 잘된다면 국공립대에서도 그 제도를 도입할 것이 뻔하다. - 참고로 일본의 경우 동경대 독립법인화제도(민영화)가 도입되었고 한국에서도 서울대를 민영화하려는 시도가 있다 -.
미국은 주지하는 것처럼 상위 5% (혹은 2%) 대학 출신자들이 국가를 이끌어 가는 명문 대학 중심의 나라이다.
따라서 전체로 볼 때 기여입학제 내지 대학 민영화제도가 과연 국가의 경쟁력을 높일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미국처럼 땅이 넓고 인종이 복잡한 나라에서는 이처럼 소수의 엘리트가 국가를 이끌어 가는 것이 좋을 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처럼 역사가 깊고 인구밀도는 높고 작은 나라에서는 미국식의 철저한 자유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시장주의를 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모델은 미국이 아니라 우리와 역사적, 자원적 환경이 비슷한 (북부) 유럽, 특히 독일의 교육제도가 적합하다.
독일의 경우 전 대학의 수준이 비슷하고 따라서 학벌이 없는 유일한 나라이다. 거기는 대학이라는 울타리가 없다: 학생들은 자신의 계획과 취향에 따라 이 대학 저 대학 옮겨 다니면서 공부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처럼 강제적인 평준화나 획일적인 교육정책은 없다. 국가가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국민은 선택한다. 따라서 모든 대학이 공립이지만 경쟁은 있다. 대학교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과이고 학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지도 교수의 이름이다.
독일은 대학중심이 아니라 교수중심의 대학제도를 가진 나라이다.
그러나 같은 유럽 대륙국가이지만 프랑스는 미국보다 더 극심한 국가 엘리트주의를 택하는 나라이다. 국립행정학교(ENA)라는 입학정원 120인 작은 대학의 출신이 프랑스의 정, 재계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다. 그러니 흔히 말하는 “프랑스 대학 평준화”라는 말은 아무 의미가 없다.
파리에 있는 유명한 대학들은 학구적 명성이 있지만 정작 사회적인 부와 권력을 쥐는 것은 “국립행정학교(ENA)”와 “공과대학(Ecole Polytechnique)” 출신자들이다. 전자는 드골 대통령이 만들었고 후자는 나폴레옹이 만든 국가 지도자 양성 기관들이다.
결론적으로 기여입학제나 대학자율화는 학벌제도와 입시지옥을 더 악화시킨다. 그리고 대학 재정은 기부금이 아니라 국가 예산에서 지원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재정은 현재 공교육비의 몇 배에 달하는 사교육비를 절약하여 조달해야 한다. 독일식의 교육 사회주의, 국가주의는 입학시험이 필요 없다. 그러니 자연히 사교육은 사라진다. 이것이 교육공화국의 기초이다.
지금 한국의 학생들이 교육제도의 희생이 되어 삶을 포기하고 있다. 최근 한 초등생이 학원 스트레스로 자살했고 한 재수생은 수능에 대한 비관으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언론과 정치권은 교육시장주의, 비평준화, 특수목적고, 자립형사립고 등을 더 강화하려고 안달이 났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청소년들이 죽어야 교육의 개혁이 일어날 것인가?
일부 언론은 입시지옥과 학벌제도의 희생자들을 사회적인 부적응자 내지 약자로 간주하고 “호랑이가 약한 자기 새끼를 (죽도록) 버리는 것”처럼 이들을 경쟁사회 부적응자를 몰아가고 있다.
막아야 한다! 국가 경쟁력도 사람이 살아야 있다. 사람을 죽이는 제도가 어떻게 경쟁력을 높인다는 말인가? 사교육을 철폐하고 입시를 없애는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끝)
28. 분배구조의 개선
교육공화국의 이념인 사교육과 입시제도 폐지 그리고 교육 공립화 등의 문제에 대해 아직 회원들 간에 많은 의문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학벌주의가 교육사회주의를 실시한다고 해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란 한 회원(ID: 신라의 달밤)의 문제제기가 있어서 차제에 여기에 관한 조건을 좀더 분석해 봅니다.
학벌주의가 쉽게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 가치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부와 권력의 배분이 학벌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이지요.
좋은 학교를 나오면 평생 좋은 직장, 출세, 권력 그리고 부가 확보된다면 작금의 죽음을 부르는 사교육의 병폐나 일류대 병이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현금의 학력과 사회적 가치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면 아무리 교육의 사회주의를 도입한다고 할지라도 학벌폐해는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북구의 선진국들은 벌써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우리의 처방은 이렇습니다 : 현재의 사회적 가치의 배분 시스템을 다소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대학졸업자가 반드시 고졸자보다 더 많이 부의 분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가치관은 북구, 특히 스웨덴 등에 많이 퍼져 있습니다. 즉 공부를 많이 했다고 반드시 돈을 더 벌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 잘하거나 똑똑한 사람이 그만큼 돈도 많이 벌어야 한다는 원칙은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독일에는 이런 하나의 사회적 합의가 있다고 합니다. 대졸자나 고졸자나 그들이 평생 벌어들이는 돈은 같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대졸자가 월급은 더 많지만 공부의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돈벌이 기간은 짧게 되고 반대로 빨리 돈을 벌기 시작해서 오래 벌어들이는 고졸자 내지 전문대 졸업자는 월급이 적기 때문에 결국 더하기 빼기 제로라는 것이지요.
결론; 너무 현행의 한국적 분배체계만을 불변적인 진리로 볼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하나 사족으로 말한다면 자본주의 꽃인 미국의 경우 사장은 말단 사원의 200배 이상 벌고 있습니다.
또 북구에서는 대학(석사) 마치기 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리고 또 대학 졸업 후에도 직장이 확실히 보장되지가 않습니다. 거기에 비해 실업학교를 나오고 또 장인(Meister)이 되면 어지간한 대졸자보다 더 돈을 더 법니다. 그리고 대부분 실업학교는 기업에서 실습을 받기 때문에 졸업과 더불어 확실한 일자리를 얻습니다.
하여간 이런 식으로 사회적 가치의 배분에 대해 새로운 합의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사회적 통념을 파괴해야 합니다.
실제로 제가 독일의 소도시에 살면서 이런 점을 체험했습니다. 우리 마을(Stotzheim)에 사는 우리와 친한 부부가 있었는데 그 부부는 둘 다 대졸자로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데 남편은 실업고등학교 현직 교사이고 부인은 체육교사였는데 아이 셋을 낳고 퇴직한 후 지금은 아이들을 다 키우고 난 뒤 유치원의 보조교사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부는 그 마을의 가난한 가정이었고 그 마을의 유지들은 대부분 실업고를 나온 후 장인이 된 수공업자(Handwerker: 목수, 보일러공, 지붕 기술자, 건축업자)들입니다.
하나 재미있는 것은 독일에서 이런 수공업자(Handwerker)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것입니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즉 대학이나 좋은 대학의 매력을 떨어 뜨릴수 있는 사회적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그런 일을 하도록 해주고 못하는 아이들은 그런대로 적성에 맞는 직업을 주도록 합니다.
독일에서 보니까 (한국에서는 그렇게 귀하게 여기지 않는) 보일러 공(기술자)이 대단한 부를 소유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국에서 건너간 간호원, 광부들 많은 경우 그들은 좋은 차타고 좋은 집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청소부도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회 한번 만들어 봅시다. (끝)
29. 민주노동당 교육정책 지지
오늘(12.16) 대통령후보 3차 합동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교육개혁에 관한 이회창, 노무현, 권영길 후보들의 견해를 들어보니 그 중 권영길 후보가 평소 우리 교육공화국의 견해와 가장 유사합니다. 특히 권후보는 수능시험의 폐지 그리고 자립형 사립고 반대, 교육개방 반대를 표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교육공화국의 견해를 반영하는 듯이 공정한 경쟁을 주장합니니다. 그런데 대학 평준화를 위한 부유세 신설은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본 카페의 입장은 대학입시의 폐지는 자동적으로 사교육의 불필요를 유발하고 따라서 사교육비 26조원를 절약할 수 있고 이 돈으로 전대학을 무상 국립화시킨다는 복안이었습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민주 노동당이 교육공화국의 정책과 가장 부합합니다.
물론 다른 문제에 대한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세 후보 가운데 가장 교육의 고통과 소외를 인식하고 있습니다.
입시지옥과 학벌의 철폐를 위해서는 교육의 사회주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권후보의 발언 중 유럽식 대학제도를 언급했는데 더 자세히는 독일식입니다.
프랑스식은 철저한 국가 엘리트주의를 신봉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대주의적이라고 할 정도로 독일을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독일만이 입시, 사교육 그리고 학벌이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교육 선진국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경제는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경제에는 신자유주의 요소가 좀 필요합니다.
이점에서 권영길 후보는 아직 낡은 사회주의, 사회복지의 이상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회창, 노무현 후보보다는 훨씬 한국 사회의 아픔과 구조적 모순을 아는 후보가 권영길 후보입니다.
친애하는 교육공화국 회원여러분,
본인은 위에서 열거한 논점에서 권후보를 지지 합니다.
이점 고려해 주십시요.
30.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소감 (02.12.24)
1)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는 도덕적 정치의 승리이다.
노무현 당선자와 그를 지지하는 노사모의 승리는 우리 나라 정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값진 투쟁의 기록입니다. 노무현씨가 그의 정치적 이념인 지역감정 해소와 국민통합을 걸고 싸우다가 냉혹한 현실의 벽에 부딪혀 분루를 삼켜야 했을 때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이 발족되어 그를 지지했었고, 또 김민석 민주당의 전의원이 배신하고 정몽준의 국민통합 21로 갔을 때 노무현 지지 희망 복돼지를 분양하며 정치 후원금이 몇 십억이나 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한국의 국민성이 아직 부패하지 않고 한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그 청정한 도덕성과 지조를 잃지 않고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입니다.
사실 노무현씨를 지지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믿음은 노무현이 자기 입신출세나 부귀공명을 초개와 같이 여기고 오직 대의와 원칙 그리고 소신을 굽히지 않는 유일한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감합니다. 그간 한국의 정치인들이 보여준 작태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부정부패와 해바라기라는 두 단어가 그들의 속성을 여지없이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회창씨가 패배한 이유도 바로 그 기존의 정치 지도자의 모습, 즉 부도덕한 특권층이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병역비리문제로 이회창씨는 벌써 이 나라 민중들의 소망을 져버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젊은이들은 “노무현은 선거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깨끗한 패배자로 남을 것이다” 라는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노무현이야말로 더러운 구시대를 마감하고 새 시대를 열어갈 용기있고,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이라는 것입니다.
2) 노무현의 승리는 시작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그런데 이번 대선에 많은 문제가 드러났습니다. 노무현이 내세우는 지역갈등의 해소와 국민통합은 여전히 실현이 요원합니다. 15대 대선(1997)보다는 지역갈등이 약간 줄어 들었으나 14대 즉 1992년과 똑 같은 지역편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반도의 서부지역은 모두 노무현을 지지했었고 동부지역은 약속이나 한 듯 이회창에게 표를 몰아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것은 노사모나 인터넷 그리고 젊은 유권자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지역몰표(몰빵)입니다. 그리고 영, 호남에서는 젊은이들 마저 지역정서를 극복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고질 병페인 지역감정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리 생각해 볼 때 이런 지역주의적 승리는 노무현의 태생적 한계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지역주의 극복, 삼김 정치 청산을 외쳤다면 그는 호남의 정서를 대변하는 김대중당 -새천년 민주당에 들어 갔어는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구시대의 청산을 위해서는 김영삼이나 김대중 등 구정치인들의 정당에 입당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믿습니다. 거기서는 지역감정이나 부정한 검은 돈의 압력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운동권 출신들이 새 정당을 창당했으나 민중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항상 실패하고 역시 더러운 꾸정물들의 정당에서 같이 더러워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운동권에서 제도권으로 영입한 정치인들, 모두 한심합니다.
여러분!
노무현이 부르짖는 새 정치, 혹은 정치개혁, 이들은 결코 기성 정치권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는 노무현의 인격을 신뢰하고 그의 정치적 소신과 용기를 가상히 여기면서도 결코 그의 정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치는 대통령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맥과 조직이 같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것처럼 노무현의 사람들이 새천년 민주당을 개혁한다고 해도 문제는 노무현을 밀어준 그 지역 세력을 무시할 수 없고 결국 그는 그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기 불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아마도 노무현의 앞으로의 행태는 그의 전임자인 김대중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또 문제는 이번 선거 기간에 노무현이 보여준 정몽준과의 후보 단일화는 노무현의 기회주의적 속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 둘은 서로 완전히 정치적 견해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회창과 붙어서는 둘 다 떨어지니 그들은 비열한 생각에서 후보단일화를 한 것입니다.
노무현이 1990년 김영삼의 삼당 합당을 야합(野合)이라고 비난하고 민자당을 탈당했지만 이제 보니 노무현 역시 야합을 했습니다. 노무현 역시 그가 그토록 비난한 구시대 정치인들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노무현 역시 한 때 신선한 도덕성으로 모처럼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으나 그 나물에 그 밥이라는 속담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노사모와 넷티즌 역시 선거의 열기 속에서 이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 당선자를 사랑하고 밀어주고 좋은 충고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초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원칙과 소신을 밀고 나간다면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민노당과의 관계 및 교육공화국의 정체성 확립 - 신자유주의 문제 -
이번 16대 선거의 큰 특징의 하나는 민주 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약진입니다. 15대에서 1.5% 지지율을 받다가 이제는 3.9%의 지지율을(약 일백만표) 확보했습니다. 저는 그의 교육정책을 동조했습니다. 즉 수능시험 페지, 전교육의 무상 의무교육화 는 교육공화국의 입장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민노당이 미군철수를 주장하고 또 부유세를 신설하여 교육재원으로 활용한다는 진보, 사회주의 노선에는 결코 찬성할 수 없습니다. 부자의 돈을 빼앗아 가난한자를 위해 쓴다는 것은 사회주의의 기본 사상입니다.
우리 교육공화국도 교육사회주의를 지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육에만 평등주의, 사회주의를 인정하고 경제에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합니다. 우리의 정책은 따라서 혼합정책(policy mix)입니다. 요즘 말로 퓨전(fusion)입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점이 쉽게 설명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진실을 말해야 합니다. 저는 독일의 사회, 교육제도를 이상으로 삼아 한국의 고질병인 학벌과 입시지옥을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최근 독일의 경제는 상당히 나쁩니다. 지나친 사회복지와 약자보호 때문에 기업이 발전하지 못하고 침체에 빠져있습니다. 신자유주의는 그 이전의 복지국가 이념에 반대하고 나온 정치, 경제 사상입니다. 서구의 복지국가에서 실업자가 늘고 사회지출이 심해지면서 경제는 휘청거렸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은 : 기업만이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것입니다. 약간 덧붙이면 국가나 공기업도 고용, 즉 일자리를 창출하기는 하지만 비효율적이고 영업이익을 남기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국민의 세금만 낭비하는 수가 많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기업을 통해 실업을 해결하는 것보다 차라리 직접 실업자에게 수당을 주는 것이 낫다는 말도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자본가, 기업가들, 부자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들만이 기업활동을 통해서 효율적으로 일자리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이들에게 혜택을 주고 기업하기 쉽게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런 조처로서 흔히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말합니다. 즉 고용과 해고(구조조정, 정리해고)를 쉽게 만들어 주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직장에서 해고당하더라도 곧 다른 직장에서 고용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합니다. 유럽에 비해 미국의 경제가 강한 것은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신자유주의를 말하면 한국에서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의 욕을 먹습니다. 즉 피고용인, 직장인의 생존을 함부로 마치 파리 목숨처럼 여길 수 있느냐. 하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정리해고를 하지 못하는 대신 57%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했습니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총알받이입니다. 즉 정규직은 잘리지 않고 비정규직은 언제나 수시로 잘릴 수 있는 제도입니다.
따라서 도리어 정리해고를 제대로 시행함으로써 비정규직, 파견직을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 노동자의 세계도 완전히 이원화되어 있습니다.
이런 제도(신자유주의, 노동의 유연화)가 꼭 필요한 다른 이유는 국제화, 세계화 때문입니다. 강성조조가 있는 한국에 해외 기업들이 들어오기를 꺼리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우 국내기업 마저 보따리를 싸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기업하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4) 결론: 평등과 자유
국민 여러분!
위에서 말한 이유에서 교육공화국은 교육의 평등화, 사회주의를 지향하지만 노동,경제부분은 신자유주의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과 우리는 같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학벌제도는 인도의 신분 제도인 카스트처럼 대학생들과 젊은이의 진로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도 그런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누차에 걸쳐 제가 말한 것처럼 전 대학의 국립화하여 학벌제도를 청산하는 것 하나 실천하기도 엄청 어렵습니다. 이 것은 서울대 하나를 개혁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학생들은 본인의 소신, 즉 입시폐지, 사교육불필요, 무상교육, 전대학 국립화 등을 황당하게 보고 있었습니다. 즉 이상은 좋지만 과연 현실적으로 실천 가능한 이야기냐? 대학 공립화에 따르는 그 많은 재원은 어디서 가져오느냐? 등의 비판적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저의 답변은 사교육의 폐지였습니다. 지금 사교육비가 26조원입니다. 대학입시폐지는 자연히 과외폐지를 야기합니다. 민노당은 현재 전대학을 무상교육시키는 비용으로 10조원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 재원을 부유세 10조에서 마련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국의 세율이 그렇게 낮지도 안습니다.
그리고 입시와 학벌을 폐지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자발적인 능력은 지금의 2 배이상 향상됩니다. 그리고 따라서 GDP도 2-3배 증가됩니다. 현재 잘못된 전공, 학과, 학교 때문에 대학생들 열심히 전공 공부하지 않고 딴 일에 몰두합니다. 그리고 학벌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청년들의 영혼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빨리 학습과 교육의 자유, 해방이 와야 합니다.
한국인들은 잘 하던 놀이도 멍석 깔아주면 안 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자발성과 능동성 그리고 창의성이 뛰어난 민족입니다. 교육의 평등주의, 사회주의, 국가주의 만이 현행의 수동적, 암기식, 강제 학습을 능동적, 창의적 학습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을 독일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모든 것은 다 받아들일 수는 없고 경제와 고용, 노동 문제는 신자유주의를 취하며 그 대신 사회보험을 우리 능력에 맞게 도입하여 사회불안을 대비해야 합니다.
평등은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서 있습니다. 빈익빈 부익부 그리고 부와 학벌의 세습은 자유롭고 창의적인 경제, 학문, 예술 활동을 방해합니다. 우리는 사회당, 민노당처럼 평등을 위한 평등이 아니라 자유와 생산, 창조를 위한 평등, 즉 출발점의 평등을 주장합니다. (끝)
31. 신자유주의 문제 (市場과 非市場)
교육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입장이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고 하자 많은 논란이 있었다. 실은 필자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새로운 각성이 있었다. ‘학벌 없는 사회라’는 ID를 가진 사람이 이런 교육공화국의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을 비판하여 여기에 대한 방어의 글을 쓴다.
앞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근래 서구의 전통적인 좌파 정당들이 자기 변혁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네델란드 그리고 독일의 경우 사회복지 지출을 감소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도입하려 합니다. 독일의 경우 최근 실업률이 높고 성장이 둔화되고 있습니다. 미국과의 일인당 소득차이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현재 세율문제에 대해 필자가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북구라파 식의 높은 복지비용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습니다. 독일의 경우 노동 비용이 미국보다 20%이상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독일의 경우 생산비에는 세금을 비롯한 고율의 의료, 실업 그리고 노후 연금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국제화의 시대에 생산원가의 절감과 경영합리화는 가장 민감한 기업의 관심입니다. 이제 기업들은 조국이 없습니다. 그들은 오직 경제성과 효율성을 좇아 철새처럼 이동하며 사업을 운영합니다. 경영합리화에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인력(노동력) 관리입니다. 왜냐하면 인력은 다른 생산의 요소들처럼 그때 그때의 수요에 따라서 공급을 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업은 수시로 노동력이나 인력을 가감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해 고용과 해고를 자유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업이 원하는 노동 유연화는 노동자의 편에서 보면 생존의 위협입니다.
그런데 서구 복지국가들의 경우 지금까지 그들 사회의 장점이던 고용의 안정이 이제는 하나의 경제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 노동이 가장 유연한 미국은 유럽에 비해 계속 높은 성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독일 정부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고 사회복지비용을 줄이려고 노력했으나 노동조합의 반발로 개혁(친기업적인)을 더 추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필자가 독일에 머물던 1999년에 독일의 주가지수(Dax)가 5000대였는데 지금 3000도 안 됩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적인 불황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경우 경기침체가 더 심합니다. 독일 정치인들도 이런 자기들의 약점을 알지만 복지혜택에 익숙한 국민들은 복지의 감소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생산시설을 해외로 이전하고 실업자가 많아지면 국가적인 파탄이 옵니다. 필자는 독일 체류시절부터 이런 복지국가의 구조적인 취약성을 인식했습니다. 약자를 보호하려다가 잘못하면 전체가 다 망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국가적 보호를 줄이고 개인의 책임을 높이자는 물결이 일어 났습니다. 이 것이 토니 블레어가 말하는 "제3의 길" 입니다. 우리 나라의 김대중 정부가 말하는 생산적 복지도 그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그러면 전반적으로 사회복지를 줄이는 가운데 어떻게 교육 국가주의를 추진할 재원의 마련하는지를 논하겠습니다.
이는 본인의 지론, 즉 사교육비 내지 과외비의 절약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대학 입시를 폐지하고 대학입학자격시험(고등학교 졸업시험)을 그것을 대체할 경우 국민들은 사교육의 압박에서 풀려나 사교육비, 과외비 지출을 절약하고 대신 그 돈을 경제활동 내지 소비활동 등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업은 더 돌아가고 그만큼 GDP는 높아지고 따라서 세수도 많아진다는 논리입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사설학원에 종사하거나 학습지 교사들이 다른 산업체에 재취업이 가능하다면 경제 성장은 획기적으로 높아집니다.
그리고 이런 활발한 경제의 성장을 위해서도 현행의 학벌제도는 없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는 가능한 세금이나 기업부담을 줄이고 (결국 사회보험을 줄이고) 기업가에게 투자와 고용창출을 증대시킨다는 전략입니다.
신자유주의의 노동시장 유연화는 고용창출을 가져오고 자본이 한국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막아 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노동시장 유연화가 고용창출을 야기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답변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노동시장 유연화가 도리어 고용불안과 실업증대를 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기업이 쉽게 직원을 해고시키고 또 채용할 때 노동자의 생존은 위협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를 해고시키기 어려워 계속 채용할 때 회사가 망할 수도 있습니다.
(노동시장 유연화 = 고용창출)에 대한 설명은 이렇습니다.
대기업의 경우는 뒤로 미루고 우선 중소기업이나 이제 창업하는 신생기업의 경우를 봅시다. 이들은 자신부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고용안정을 요구하는 정규직을 채용하기가 힘듭니다. 고용보호가 법제화되어 있어서 노동 시장이 경직화되어 있는 경우 기업주는 일단 신규고용을 꺼리게 됩니다. 따라서 초기의 기업은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을 원합니다. 따라서 노동시장 유연화는 우선 중소기업이나 신생기업에게 고용의 부담을 덜어 줍니다. - 중소기업이 중요한 이유는 한 나라의 일자리의 70% 이상을 이들이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는 노동자가 한 직장에서 해고되더라도 곧 다른 데서 고용될 확률이 높습니다.
이렇게 하여 경제위기를 극복한 나라가 네델란드입니다. 거기는 대다수의 국민이 비정규직이고 많은 경우 비정규직 직장을 두개 이상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노조가 강성이고 (정리)해고가 어려운 경우 정규직 노동자는 보호가 되지만 비정규직은 전혀 직장이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용자측은 해고하기 힘든 정규직 보다는 비정규직, 계약직을 선호하게 되고 기업 경영에 어려움에 처할 때 비정규직을 우선 해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현재와 같은 강성 정규직 노조가 정리해고를 필사적으로 반대할 때 해외 자본의 국내 유치가 어려워지고 기존의 기업들도 생산라인을 해외로 옮기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의 노사문제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입니다.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가 노동력의 수급을 불변적으로 유지할 수 없고 경영의 전략이나 경기 상태에 따라서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구조조정이나 정리해고를 수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경우 경영 상태에 대한 노사간의 충분한 이해와 합의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실업자에 대한 사회적인 안전망이 정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 하에서 정규직과 계약직의 차별은 철폐되어야 합니다. 설령 계약직으로 입사하더라도 1-2년 지나면 정규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어쨌든 지금처럼 같은 노동자 사이에서도 기득권층과 소외된 층이 있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를 없애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노동시장 유연화는 창업을 촉진하고 고용을 증대합니다.
그러나 교육부분은 독일식으로 , 즉 철저한 국가주의, 사회주의 모델로 해나가야 합니다. 요즘 정치권의 문제는 교육부분에 마저 시장원리를 도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교육에 대해서만은 이 신자유주의를 배제한다는 논리입니다. 지금 서구 복지국가들의 경우 교육비 부담보다는 실업, 의료, 연금보험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도저히 기업이나 국가에서 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필자의 생각은 그런 여러 가지 분야의 사회보장에서 우선순위를 두고 교육에 우선 집중한다는 전략입니다. 물론 현재 우리나라의 의료 보험, 실업보험, 연금보험, 사회보장 등은 극히 초보적이기 때문에 계속 이들을 확대해 나가야 합니다. 따라서 제가 구상하는 교육사회주의와 경제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란 달리 말해 현재 독일에서 의료와 연금보험 예산을 삭감한 모양이 됩니다.
따라서 본인은 "교육과 자본주의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충분히 했다고 생각합니다.
즉 자본주의 하에서 그 자본주의를 더 잘하기 위해서 교육의 평등주의를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사회라고 해서 모든 사회적 시스템이 시장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 시장주의 + 비시장주의(非市場主義) " 라고 도식화할 수 있습니다. 신자유주의란 위의 도식에서 시장주의를 더 많이 하자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자유주의, 아니 극도 자유주의라 할지라도 비시장(非市場)부분을 완전히 없앨 수 없습니다. 가령 국회나 군대 그리고 사법부를 시장주의로 할 수는 없지요. 우리는 교육 역시 이런 비시장(非市場) 부분에 포합시킵니다.
의료 보험, 연금보험 등은 여러 가지 모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공보험과 사보험의 병행주의 등-
친애하는 학벌없는 사회(ID)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은 정통적 사회주의 모델 혹은 북구형의 사회복지국가 모델이나 아니면 미국처럼 철저한 시장주의 등 모두가 우리에게 맞지 않습니다. 시대는 우리에게 융합(fusion)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주의적인 교육체제와 신자유주의적인 기업정책, 노동정책 그리고 토니 블레어 방식의 온건한 복지정책을 융합했습니다.
귀하와의 더 많은 생산적인 토론이 있기를 빕니다.
32. 제도의 변화, 의식의 변화
1) 신호등 위반
우리나라의 사회문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흔히 한국인의 의식 혹은 양식을 비판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TV뉴스에서 “근래 고속도로변에 쓰레기를 버리는 파렴치한 운전자들 때문에 당국이 많은 수고와 경비를 들여 힘들게 그 쓰레기를 치우고 있다” 라는 경우이다. 이 경우 우리는 시민의식의 부재니 도덕성 결핍이니 하는 말들을 한다. 그런데 필자는 많은 한국의 사회문제가 시민의식 부재라기 보다는 사회 구조적 문제로 본다. 예를 들어 새치기하거나 신호등을 어기고 빨간불에도 살금살금 전진하는 차량 운전자들을 비난한다. 그런데 필자는 독일에서 거의 8-9년 운전을 한 경험이 있고 따라서 도로신호규칙을 거기서는 100% 지켰었다. 그런데 한국에 오니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빨간 신호등에도 뒤에서 오는 차들이 주행하기를 요구했었고 따라서 본의 아니게 신호규칙을 어길 수 밖에 없었다. 요즘은 이런 상황에 잘 적응해서 신호등 앞에서 주위를 살핀 뒤 스스로 야금야금 차를 진행시킨다. 그런데 한국인들이 항상 그렇게 교통법규를 어기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중앙선 침범은 , 특히 두줄 노란선의 경우, 운전자들이 스스로 규제하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신호등 위반은 운전자의 양식이나 시민의식이 문제가 아니라 신호등 시스템이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횡단보도 앞에 신호등이 있으면 운전자들이 쉽게 빨간 신호를 어길 수 없다. - 독일이나 구라파의 경우 이렇다 - . 그러나 한국처럼 신호등이 횡단보도보다 한참 떨어진 저쪽 건너편에 있는 경우 운전자가 요령을 피울 기회가 많아진다. 즉 횡단보도와 신호등의 간격이 길기 때문에 눈치를 보아서 그 때 길 건너는 사람이 없으면 차를 전진한다. 독일의 경우는 빨간 신호를 보고도 요령 피울 생각을 거의 못한다, 신호를 그대로 지켜야 한다. 이처럼 우리나라 도로신호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정도 있을 것이지만 한시 바삐 신호등을 횡단보도 바로 앞에 설치해야 한다. 그러면 빨간신호 어기는 사람은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다.
2) 아이들 방
독일의 가정 생활과 한국의 그것을 비교해 볼 때 현저한 차이점은 우리나라 아이들이 가정에서 독일보다 훨씬 많은 잔소리를 듣는다는 점이다. 우리도 독일에서는 큰집에서 입식(立式) 생활을 하다가 현재 한국에서는 교회 옥탑방에서 좁게 좌식 생활을 하는데 우리 애들은 과거 독일에서보다 지금 한국에서 훨씬 많은 잔소리를 부모로부터 듣는다는 점이다. 좌식 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물건들이 자연히 방바닥에 굴러 다니게 되고 그러니 그것을 제때 정리하지 못해 부모로부터 야단을 맞는 것이다. 따라서 큰방이 주어지고 또 입식 생활이 되면 아이들의 고통은 줄어든다. 그리고 큰 방을 주면 애들끼리 싸울 일도 훨씬 줄어든다. 형제간에 잦은 다툼은 작은 방에 함께 기거할 때 발생한다.
이는 환경이나 구조 때문에 개인이 편하고 잔소리와 불평을 적게 듣고 살기도 하고 불편하고 서로 싸우고 또 잔소리 많이 듣고 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갈등이 그 환경의 조건에 따라 증대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
물론 인간의 모든 문제가 주변 환경이나 구조 때문에 생기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환경이나 구조를 바꿈으로써 도덕적 비난을 줄일 수 있다. 우리 애들이 독일에서는 착해서 잔소리를 듣지 않았고 한국에서는 못되어서 잔소리를 많이 듣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길가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거나 빨간 신호등을 어기는 사람들도 양심의 문제라기 보다는 구조와 제도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특히 쓰레기 방치의 경우 문제는 요즘 서울시 거리에 예전처럼 쓰레기통이 없다는 사실이다. 구청이나 시청에서 도로변 쓰레기통을 치운 이유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시민들은 가까운 곳에 쓰레기통이 없으면 자기 쓰레기를 어디엔가에 버려야 한다. 따라서 쓰레기통을 설치함으로써 선량한 시민들을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우(愚)를 막아야 한다.
3)부모의 과잉 교육열 – 존재가 의식에 선행한다.
최근 천안의 한 초등학생이 학원공부가 부담스러워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반응은 여러 가지 였다. 학벌주의와 대학입시라는 근본적인 모순을 덮어두고 이를 학부모의 지나친 교육열로 호도하려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학부모들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 한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지금과 같은 광적인 사교육 열풍은 그 어떤 제도나 정책 앞에서도 수그러 들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논리적인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즉 한국의 학벌구조 때문에 학부모들이 광적으로 사교육을 시키는 것이지 반대로 학부모들의 교육열이 학벌구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설학원이나 과외교습으로 내모는 것은 단적으로 말해 학벌주의, 즉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출세하지 못한다” 라는 의식과 그런 의식을 뒷받침하는 현실이다. 의식이니 생각이니 하는 것들은 사회적 현실의 반영이다. 그래서 칼 맑스(K. Marx)는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라고 갈파한 것이다. 물론 모든 의식이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사회적 의식 혹은 가치관은 분명 사회적 구조의 반영이다. 따라서 (사회적)존재의 변화, 즉 구조와 제도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잘못된 사회적 제도와 구조 때문에 얼마나 많은 죄없는 희생자가 나오는가! 마찬가지로 신호등 체계를 조정함으로써 한국인의 시민의식이 부족하니 사회적 책임감이 없다느니 하는 불필요한 불평은 절약될 수 있다. 내가 능력이 있어 큰 방을 가진 집으로 이사갈 수 있다면 우리 애들의 다툼과 부모의 꾸지람은 훨씬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사회 구조변화, 제도변화가 사람들의 의식을 선행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까지 계속 교육개혁을 정부가 추진했지만 아직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을 보고 제도 개혁 보다는 사람의 변화를 강조했다.
물론 교육개혁에 있어 제도의 변화와 사람의 변화 둘 다 중요하다. 그러나 우선 제도의 변화에 강조점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변화와 개혁이 항상 부작용을 초래한 것은 실은 그 기본 방향의 설정 없이 눈앞에 보이는 문제만을 임시 변통적으로 고치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육의 자율주의, 시장주의를 가지고는 결코 현실의 복잡한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한나라당의 공약처럼 95% 평준화와 5%비평준화 같은 전략은 이 나라 학생들과 부모들의 어깨 위에 엄청난 짐을 지우는 행위이다. 그리고 선진국의 방법도 기본적으로 두 가지 다른 시스템이 있다. (미국과 독일) 이 중 우리에게 알맞은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입시지옥과 학벌구조를 철폐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아이들이 고통받고 희생되는 불행을 피할 수 있다. 물론 이 일이 엄청난 변화를 요구하는 민족적 대 결단을 요구한다.
33.학교제도 – 단선제와 복선제
1) 수준별 수업의 부재와 하향 평준화 문제
한국의 교육제도에 시장주의 원리를 도입하라는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김대중 정권의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이런 정책을 추진했었고 현재도 꾸준히 그런 방향으로 교육제도, 학교제도를 변형시켜 가는 중이다. 이런 정부시책 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자립형 사립고의 설립 허용이다. 이 학교의 설치 목적은 “하향 평준화에 불만을 느껴 교육이민을 떠나는 중산층 이상의 욕구를 해소하고 외화 낭비를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그런 교육이민을 떠나려는 중산층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귀족 학교를 개설할 경우 이 번에는 가난한 서민층이 모두 이 나라를 떠나려 할 것이다. 물론 그들은 돈이 없어 자녀를 외국 행 비행기에 태우지는 못 하겠지만 그 대신 대한민국에 대한 그들의 불만과 분노는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공교육이 일반화된 독일에서 보니 상류층들도 의식이 바뀌어 일반 학교에 자녀를 보내면서도 특권의식이 없었다. 오히려 그런 것을 당연히 여겼다. 부자나 가난한자나 같은 학교, 같은 선생에게서 배우고 같이 놀고 같은 시립 수영장에서 할인 요금으로 수영하고 등등. 또 우리 딸 안셀라는 가난한 외국인 학생의 아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잘 나가는 검사의 딸 레나(Lena)와 같은 유치원, 같은 발레 학원에 다녔었다, 더욱이 우리는 유치원 회비를 면제받았었고 레나는 아빠를 잘 둔 덕에 많은 회비를 물어야 했었다. 그리고 필자는 학생 신분으로서 유치원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여 상류층의 인사인 레나의 부모들과 만남에서 아무런 열등감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못했었다. 한국이라면 이런 일이 상당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고교평준화를 철폐하고 대학도 완전 자율화, 민영화하여 경쟁 체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이 지적하는 현행 교육제도의 문제점 그 중에서도 평준화 제도의 문제 점은 그것이 소위 수준별 수업을 못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하향평준화를 가져왔다는 통찰이다. 이들은 또 과외를 억제하기 위해 고교 무시험과 평준화를 도입했으나 그 결과는 사교육비가 증가하고 교육의 불평등을 더 심화시켰다는 이론을 제기한다.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논거 중에 수준별 수업의 부재와 하향평준화 문제에 대해서만 다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평준화가 사교육을 부추키고 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주장은 상당히 억지처럼 보인다.
이들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에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수준별 수업의 문제와 학교선택의 자유권의 문제이다. 필자는 두 번째 문제에서는 이미 위에서 독일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 대안을 여러 번 제시했다. 그러면 이제 수준별 수업의 문제를 교육의 국가주의, 공화주의 안에서 풀어가 보려 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대안은 복선형(複線 型) 학교제도이다. 그러기 위해 학교제도에 대해 연구해 보기로 하자. 학교제도는 크게 단선형과 복선형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학교제도는 국제적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크게 복선형 학제(dual system)와 단선형 학제(single ladder system)로 구분된다”.
2) 전통적인 의미의 복선형 학제, 단선형 학제
복선형 학제는 한 사회에 두 개 이상의 학교제도가 병행하고 있고 그 사이에는 원칙적으로 이동이 없는 교육체계이다. 이 제도는 원래 교육을 통해 사회적 신분 질서를 고착화시키기 위해 만들어 졌는데 영국이 그 대표적인 나라이고 귀족이나 상류계층은 인문고를 나와 명문대학에 진학하여 사회의 지도층이 되도록 교육받고 그 반면 평민들은 실업학교나 기술학교를 나와 기능공이나 실무직에 종사하도록 규정된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이런 복선형 학제가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그 반면에 “단선형 학제는 지배계급과 서민 사이의 교육적 차이를 없애고 모든 국민에게 골고루 그들의 능력에 따라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이다”. 그래서 “복선형 학제가 「보다 적은 사람에게 보다 좋은 교육」을 시키는 제도라면 단선형 학제는 「보다 많은 사람에게 보다 값싸고 보다 좋은 교육」을 시키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단선형 학제의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고 일본, 한국, 중화민국이 등이 이를 따르고 있으며 복선형 학제는 구라파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채용하고 있다. 대충 이런 것이 기존의 단선형, 복선형 학제에 대한 규정이다. 이처럼 단선형 학제는 미국형이라고 불리며 “모든 국민에게 개방된 단일계통의 학교제도라는 점에서 민주적 학교계통(democratic school system)”을 의미한다. 반면 구라파형은 각 계급을 위한 학교 사이의 연결이 이루어 지지 않고 전 국민에게 평등하게 개방되지도 않으며 엄격한 계급적 성격을 띠었기에 계급적 학교제도(caste school system)이라고 불리었다.
그런데 이런 기존의 미국에서 나온 학설을 보면 미국은 민주주의의 나라, 교육기회균등의 나라이고 유럽은 귀족주의의 나라, 교육불평등의 나라라고 간주하기 쉽다. 그러나 지금의 사정은 이와 정반대이다. 미국이야 말로 차별적인 교육 정책과 제도를 가진 나라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지금까지 서술의 주된 목적이었다.
3) 학제 개념의 변동 – 복선형 학제가 수준별 수업을 가능하게 한다.
위에서 서술한 학교제도는 세계 제2차 대전 전까지는 타당한 구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많은 학제의 변화가 있었고 특히 구라파와 독일에서 종래의 복선제의 단점을 보완하여 이를 계급적, 신분적 계통이 아닌 “개인의 능력, 적성에 기초를 둔 계통성, 다시 말하면 교육목적별 계통성”으로 바꾸었다. 따라서 능력, 적성의 단계에 의하여 계통간의 이행이 전제가 된다. 특히 독일에서는 “모든 종류의 학교가 평준화되어 있으므로 학생들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서 횡적 및 종적 이동(전.편입학)이 항상 가능하다”. 그러므로 더 이상 독일의 복선형 학교제도가 계급적, 신분적, 폐쇄적 제도라고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독일이야 말로 가장 개방적인 학교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중요한 문제는 독일에서 학벌이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독일의 학제는 가장 민주적이고, 선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독일이나 프랑스의 학제는 더 전문적으로 말해 단선제도 복선제도 아닌 이 둘의 종합 형태인 분기형(分岐型) 으로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독일의 기초학교(Grundschule)는 모든 어린이의 공통학교로서 이 위에 복선형 학교계통을 유지시키고 있다. 즉 기초학교를 마친 후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과 소질, 적성에 따라 대학 준비학교인 김나지움(Gymnasium)이나 실업계 학교라 할 수 있는 주요학교(Hauptschule) 혹은 실업학교(Realschule)에 진학한다. 앞에서도 여러 번 말했듯이 학교선택은 개인의 선택이다. 상극학교 진학시 기초학교의 성적이나 교사의 판단은 학부모나 아동의 결정에 참고 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독일의 조기 진학 결정에 대한 우려는 실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는 이처럼 독일에서 조기에 진학이 결정되는 것에서 수준별 수업의 가능성을 찾는다. 독일에서 기초학교 4학년을 마치게 되면 상급학교 진학을 결정해야 하는데 그 결정은 개인의 자유에 따라 하게 된다. 물론 기초학교 담임 선생님이 그 학업성적에 따라 진학 지도를 하지만 그것은 권유에 불과하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그 부모나 아동이나 대부분 담임의 권유에 동의한다. 한국에서처럼 공부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많은 공부를 하라는 것은 아이들의 정신건강에 해가되기 때문에 대부분 아이들의 적성과 소질에 맞는 진학을 한다. 간혹 성적 나쁜 애들이나 그 부모들이 억지로 인문고등학교(김나지움)에 가겠다고 하는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경우는 소수이다. 왜냐하면 재능이 없는 학생이 인문고를 졸업하고 설혹 대학에 입학한다고 하더라도 졸업이 어렵기 때문에 중도에서 타락하는 비율이 50%가 넘는다. 그러니 입학자유라는 독일식 대학제도가, 작금의 한국에서처럼, 실업고에는 가지 않고 인문고에만 진학하려 하거나 또는 명문대에만 몰리고 비명문대에는 가지 않으려고 하는 현상을 초래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조기 진로 결정은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처럼 획일적으로 평준화할 경우 아동간의 수준차이 때문에 수업이 제대로 안되고 이른바 하향 평준화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해 교육 시장주의자들은 과거의 명문고를 부활시킴으로써 학교간의 차이를 유발하고 따라서 거기에 맞는 수업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현행 미국처럼 엘리트 사립학교와 질 낮은 공립학교라는 이원적인 구성을 가지고 수준별 수업을 하자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는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학교를 평준화, 공립화할 경우 단선형 학제가 아니라 복선형 학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와 같이 복선형제도는 더 이상 계급적인 학제가 아니라 교육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위해 필요하고 더 나아가서 교육의 국가주의, 사회주의를 채택할 때 반드시 필요한 제도적 장치이다.
결론적으로 민주적, 개방적 학제였던 미국식의 단선형 제도는 이제 그 형식만 남았고 그 실제 내용은 자본주의 신분제도를 반영하는 계급주의적 도구로 변했고 반대로 한 때 신분적, 계급적 사회질서를 대변했던 독일의 복선형 학제는 이제 교육의 다양성과 개방성을 제시하고 학생의 능력과 소질에 맞는 수요자 중심의 학제로 변했다. 그리고 미국의 단선형 학제는 사회적 지위 이동(social mobility)을 방해하는 반면 독일의 개선된 복선형 학제는 도리어 이를 가능케 한다. 덧붙여 단선형 학제는 자본주의 시장질서 안에서 반드시 학벌주의라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앞으로 한국에서도 실업 교육의 매력이 더 커질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이제 전문대에 가는 사람이 늘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대학 졸업후 다시 전문대에 입학하기도 한다. 그만큼 이제는 한국인들도 이름보다는 실리를 찾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산직을 뽑는데 대졸자들이 우르르 몰려가기도 한다. 확실하고 빠른 직장이 보장되면 그리고 노력의 여하에 따라 사회적 성공이 보장된다면 굳이 길고 어려운 대학 진학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34. 독일 대학에서의 경쟁
독일식 교육제도, 대학제도가 한국의 모순된 교육현실을 치료하는 대안이기는 하지만 하나의 문제는 모든 대학교를 국립으로 할 때 대학사회의 관료화와 경직화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 경제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공기업의 특징은 그 조직 속에 경쟁이 적기 때문에 변화에 대한 발 빠른 대응과 발전이 더디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대륙식의 공교육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북미식의 교육정책을 가미하여 교육의 자발적인 질적 향상도 함께 추구해 나가야 하겠다. 예를 들어 학교별로 경쟁우위를 차지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더 많은 교육비 배당정책과 기업의 대학에 대한 투자를 장려하여 학교간 경쟁을 유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라고 문제점을 잘 지적해 주었다. 이런 생각은 백번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가 더 인식해야 할 것은 대학 발전을 위해 전체 대학조직을 꼭 가장 중요한 행정단위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대학교육의 주체인 교수들의 업적을 잘 관리하면서 교수 간의, 학과 간의 경쟁이 얼마나 발생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월급이 거의 호봉수와 일치하는 한국의 대학과는 달리 독일 대학의 경우 교수 간의 서열은 철저히 실력 위주로 결정된다 : 독일에는 C2, C3, C4 등의 교수 직급이 있는데 C4는 정교수 혹은 영미권의 경우 석좌 교수라고 할 수 있다. C3는 대학교수라고 불리어 지며 C2는 전문대학 교수를 말한다. (그런데 독일의 전문대학은 한국과 달리 석사 학위를 수여한다)
흔히 오디나리우스(Ordinarius)라고 불리는 C4교수와 대학교수 C3교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C4교수들은 보통 연구소의 감독직(Direktor)을 맡으면서 그 밑에 개인 비서 하나와 조교 몇 명을 거느리게 된다. 그리고 봉급의 차이도 많다. 예전에 독일 대학교에는 이런 속담이 있었다 : “ 도시보다 대학이 더 크고 대학보다 교수가 더 크다”. 이 말은 대학 교육과 학생지도 문제에 있어서 대학이라는 조직 혹은 교육청이라는 상위 관청 보다 더 영향력이 있는 것은 학생을 직접 지도하는 책임을 맡은 평교수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좀 바뀌었지만 학생지도에 있어서 어떤 대학규정보다도 ‘교수아버지’(Doktorvater)라고 불리는 지도 교수 한 사람의 결정이 더 우선권을 가진다. 한국에서는 대학 교무과니 교학과니 행정본부니 하는 행정부서의 결정이 개별 교수들보다 우위에 있지만 독일에서는 모든 대학 업무의 중심에 교수의 학생지도가 있다.
따라서 독일식으로 대학을 운영할 경우, 대학조직을 하나의 독립적 회사 법인체로 보는 영미식과 달리, 대학은 기본적으로 대학교수들의 모임이라는 다소 느슨한 조직이 된다. 그러므로 위에서 제기된 대학간의 경쟁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우선 대학의 기본 틀을 전체 대학조직보다 개별 교수들의 능력과 업적에 둠으로써 대학간의 경쟁이 아니라 교수들 간의 경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개별 교수의 경쟁력, 그 다음은 그가 속한 학과의 경쟁력, 그리고 연구소의 경쟁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학 자체의 경쟁력이 발생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이다.
극심한 학벌 중심의 한국에서와는 달리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 하는 문제보다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했느냐 혹은 어떤 연구소에서 연구했느냐 하는 것이 독일에서는 더 중요한 문제이다. 따라서 같은 박사학위를 하더라도 그 전공분야에 따라 논문의 사회적 평가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헤겔 철학 연구로 유명한 교수 밑에서도 헤겔 철학이 아니라, 예를 들어, 칸트철학 연구로 학위를 딸 수 있다. 그러나 후자는 전자보다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일이다. 이를 위해 개인적인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한다.
필자의 쾰른 대학의 지도 교수였던 뒤징(K. Düsing) 교수는 독일 철학계에서 헤겔 철학 분야에서 탁월한 공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도 원래는 뒤징 밑에서
7-8년이나 헤겔 철학 연구를 했으나 이 분이 워낙 깐깐해서 학위를 마칠 수가 없어서 결국 그간 쓴 논문을 가지고 부퍼탈의 바움(M. Baum) 교수에게로 가서 보이고, 바움이 지도를 승락하자 나는 지도교수를 바꾸었다. 그런데 뒤징 교수는 자기 밑에서 공부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그들이 동양인 유학생들이거나 혹은 독일 학생들이거나 간에- 헤겔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는 박사학위를 비교적 쉽게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헤겔 철학의 경우 아직 아무도 그에게서 학위를 받지 못했었다; 심지어는 독일인 학생들도 그에게서 박사를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필자는 그에게 머물러 있어봐야 도저히 승산이 없겠다는 판단을 했고 그래서 부퍼탈의 바움(M. Baum) 교수에게로 날아 간 것이었다. 뒤징 밑에서 헤겔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특히 한국인, 일본인 등 동양인 유학생들- 그런 사정을 모르고 피눈물을 흘렸었다 : 예를 들어 일본 동경대 출신 ‘타다’라는 학생은 16년이나 뒤징 밑에서 노력했지만 학위를 하지 못했었다. 필자의 쾰른 대학 동기들도 마찬 가지였다. 이는 다시 말해 독일대학의 교수들, 특히 정교수(C4)들의 경우 자기의 전문 핵심 분야(Schwerpunkt)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완벽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독일에서는 저명한 교수의 전문 해심 분야에서 그와 같은 주제의 논문을 쓰지않은 사람은 앞으로 대학에서 교수되기가 극히 어렵다. 따라서 독일 학생들은 그들이 학계에 진출하여 교수가 되기를 원한다면 사계의 유명한 교수를 찾아가 반드시 그 핵심 전문 분야의 학위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계의 대가라고 할지라도 그의 비핵심 분야에서는 남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칸트 철학은 기본적인 학과이므로 거의 모든 철학 교수들이 칸트를 상당히 알고 따라서 그 분야에서 학생을 지도할 수 있다.
따라서 독일 대학 학위 중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지도교수의 핵심 전문 분야와 일치하는 연구를 하여 거기서 학위를 하는 것이다. 자랑 같지만 독일 대학교육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하여 필자의 경우를 잠시 소개하겠다. 필자는 독일 부퍼탈(Wuppertal) 대학교를 졸업했고 지도교수는 바움(M. Baum) 교수였다. 이 교수는 칸트와 헤겔 두 가지 철학에 모두 능통한 학자이다. 그는 현재 독일 칸트 협회의 제 1회장 직을 맡고 있으며 또한 헤겔 연구에도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런 사람 밑에서 헤겔이나 칸트를 한다는 것은 극히 모험적인 일이다. 뒤징 교수와 마찬가지로 바움 교수 역시 자기의 핵심 분야에서 학위를 주지 않기로 유명했다. 왜냐하면 핵심 분야에 있어서의 명성 때문에 그의 제자가 시시한 논문을 내놓았다가는 지도 교수의 명성에 오명을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헤겔 논문을 교정해 달라고 바움 교수에게 맡겼더니 그는 “안씨, 우리 모험을 감행합시다(Herr Ahn, riskieren wir uns)” 라고 말 했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움 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 헤겔 철학의 전문가이다. 그런데 그의 박사아들(Doktersohn)이 세상에 내어 놓는 논문에 하자가 있다고 알려지면 바움 교수의 지금까지 쌓은 명성은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모든 제자의 박사학위 논문은 기존의 학설에다 그 사람의 고유한 새로운 이론이 첨가된 것이기 때문에 학계에서 꼭 그대로 인정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물론 지도 교수가 철저히 지도, 감독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이론에는 어떤 허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바움 교수는 필자의 박사학위 논문을 받아 주면서 “우리 모험을 하자”라고 말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제자의 논문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스승의 명예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에서 지도교수(박사아버지)와 박사과정 학생(박사아들)은 공동의 운명체이다. 즉 아들의 영예는 아버지의 영예이고 아버지의 영예는 아들의 영예이다.
그리고 또 독일대학에서 그 교수들을 만나면서 느낀 것은 교수의 이미지가 한국에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이었다 : 한국의 교수들은 대체로 가난하고 점잖고 소심한 혹은 주눅든 선비의 모습을 풍긴다면 독일의 교수들은 세상물정 모르는 꽁생원, 책상물림보다는 날카로운 판검사나 정력적인 사업가 등 강한 실무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그리고 한국에서 흔히 철학자를 묘사할 때 사회성을 일탈한 기인이나 사이코로 그리는 수가 많은데 알고보니 이게 일본에서 굴러 들어온 철학의 분위기였다. 독일철학의 본고장인 독일 대학의 철학 교수들은 실은 건실한 생활인이고 직업인, 사회인이었다. 그리고 독일의 훌륭한 교수들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것들은 그들이 모두 잘 싸우는 씨름선수와 같다는 말이다; 유명한 교수들은 모두 기존의 학설이나 통설을 깨고 나와야 한다. 다시 말해 (학문적) 투쟁없이 명성도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앞에서 언급한 뒤징 교수는 헤겔과 셸링의 철학사적 관계에 대해 지금까지의 통설, 즉 예나시절(1801-1807) 헤겔은 예나대학에서 그의 친구 셸링의 조교로 있으면서 셸링의 학설을 전적으로 배우고 수용했다는 종래의 이론을 반성(Reflexion)개념과 사변(Spekulation)개념의 상관관계 연구를 통해 뒤집었다, 즉 예나시절 헤겔도 셸링에게 부분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함으로써 뒤징은 독일 철학계의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교수의 이런 비판적인 면, 투쟁적인 면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서로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는 것이 한국 대학 사회의 불문률이다. 그러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은 학문과 대학의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이런 학문적 투쟁성의 부족으로 인문학은 인기를 상실했다. 이제 캠퍼스에서 교수들끼리 치열하게 진리를 위해 싸울 때 인문학은 다시 부활 할 것이다.
이정도로 독일 대학에서의 교수의 위치와 학문적 경쟁에 대한 고찰을 마친다. (끝)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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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법의 철학 (후편)』, 번역 이동춘, 박영문고 134, 서울 1982.
Rüdiger Ahrens : Amerikanische Bildungswirklichkeit heute, 1981 Hildesheim, New York.
첫댓글 "나는 교육공화국 운동을 통해 사교육과 대학입시를 철폐하고 그 대신 고교 졸업시험으로 대학입학 자격을 주며 더 나아가 대학에도 입학시험이 아니라 졸업시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대학생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부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