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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경상록자원봉사단 원문보기 글쓴이: 향원
기회 외 2편
강순희
전 초등학교 교사
대경상록아카데미 수필창작교실 회원
기회
나에게도 기회가 왔다. 복권 당첨으로 돈벼락을 맞는 기회가 아니었다.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 내가 가진 작은 것을 함께 나눌 기회였다. 어르신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잠시 친구가 되어드리는 시간이었다. 작은 나눔은 큰 행복이 되어 되돌아 왔다.
지난 37년 남짓,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며 보람도 많이 느꼈다. 지난 해 2월말, 명예퇴직을 하고 무조건 쉬자는 생각으로 어영부영 1년을 보냈다. 올해 봄부터는 공무원연금공단 대구연금센터의 아카데미과정 강좌를 들으면서 평생교육의 대열에 들어섰다. 그리고 대경상록자원봉사단의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생활의 활력을 되찾고 있다. 대경상록봉사단에는 캄보밴드, 색소폰, 하모니카, 오카리나 등 각종 악기 연주반과 치료가요, 가곡합창 등 음악 동아리들이 많고, 수지침, 마술, 풍선아트, 미술치료 등 다양한 동아리가 있다. 아카데미 과정 강의와 동아리 운영은 재능 기부를 해 주시는 교수님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동아리 활동은 ‘배워서 남 주자.’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다. 배우고 익힌 것을 자원봉사를 필요로 하는 곳에 가서 마음껏 펼친다. 특히 음악활동은 어르신들의 스트레스와 우울증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손뼉을 치며 간단한 신체 동작을 하면 뇌가 활성화 되고 치매도 예방할 수 있다. 노인 인구 10명 중 1명이 치매라고 한다. 노인이 노인을 돌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나도 치료가요 동아리에서 열심히 가요를 배우고 있다. 노래 실력은 늘지 않았지만 손뼉 치며 노래하다 보면 스스로 치유되는 것을 느끼고 있다.
치료가요 동아리 회원들은 한 달에 두 번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주로 봉사활동을 가는 곳은 S노인복지센터이다. 65세 이상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 치매, 중풍 등 노인성질환을 앓고 계신 어르신들을 돌보는 요양기관이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신체적, 정신적인 기능을 유지하도록 도와 드리는 곳이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어 기능이 떨어지고 몸이 불편한 분도 있고, 98세인데도 노래 가사를 외워서 부르는 기억력이 좋은 분도 계신다. 몇 몇 어르신은 무표정하게 앉아 노래와 박수도 따라 하지 않아서 안타깝기도 했다. 지도교수님은 늘 가요반주기를 들고 다니며 몇 년 전부터 봉사활동을 해 오고 있다. 회원들도 기꺼이 그 뜻에 동참하여 함께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나는 올해 4월부터 처음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어르신들이 계시는 곳에서 하는 봉사활동이라 걱정이 앞섰다. 어떤 분들일까? 그분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 쭈뼛쭈뼛하고 어색할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노란 조끼를 입고 어르신들 앞에 서서 정중하게 인사부터 드렸다. 고개를 들고 그분들과 마주 한 순간, 반짝이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한 분, 한 분은 바로 우리들의 부모님이었다. 노래를 부르러 간 것이 아니고 따뜻한 손길과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눈길이 마주치면 미소 짓고, 손동작을 가르쳐 드리며 마주 잡은 손으로 온기를 나누었다. 봉사활동은 바로 사람들과의 따뜻한 만남이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 그것은 이미 내가 오랫동안 해 온 일이기도 했다. 눈빛과 표정으로 마음의 대화를 하고 노래를 부르며 서로 소통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노래를 부른다. 흘러간 옛 노래도 부르고 최신 가요도 소리 높여 부른다. 어르신들의 노랫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진다. 율동을 곁들인 가요도 선보인다. 흥에 겨운 어르신들이 율동을 따라하며 즐거워하신다. ‘내 나이가 어때서’ 노래를 유난히 좋아하시는 할아버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춘다. 몸이 불편하신 분이라 넘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하며 손을 잡아 드린다. 가장 연세 많은 할아버지께서 ‘울고 넘는 박달재’를 가사 하나 틀리지 않고 끝까지 부른다.
미리 계획해 놓은 프로그램에 얽매이지 않고 중창, 독창, 어르신들 독창, 손동작을 곁들인 동요 부르기, 치매 예방 체조를 하다 보니 약속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함께 웃고, 노래하고 손뼉 치다 보니 기분 좋은 땀이 흘러 내렸다. 활동을 마무리 할 시간이 되면 어르신들 곁으로 다가가 사진을 찍는다. 한 분, 한 분의 손을 잡고 “건강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나누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잡은 손을 놓지 않으려는 할머니의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뒤로하고 “또 오겠습니다.”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긴다.
기회란 누구도 갖지 못한 행운을 내 손에만 거머쥐는 것이 아니다. 기회란 이미 내 곁에 와 있는 행복을 스스로 발견하고 땀 흘려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자원봉사는, 몸을 움직여 땀을 흘려야만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농사와 닮았다. 과일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겠지. 따뜻한 말과 사랑 가득한 눈빛을 전하는 소소하고 작은 몸짓이 봉사라고 생각한다. 봉사는 남모르게 하라고 했다. 말없이, 꾸준하게 봉사를 해 오시는 분들이 주변에는 너무 많아 부끄럽다. 은퇴 후 세상에 이제 막 발을 내민 햇병아리가 ‘봉사’라는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5년 후, 아니 10년 후도 오늘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작은 것을 나누려는 마음은 큰 행복의 메아리로 되돌아 올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의 노랫말이다.
‘한 치 앞날 모르는 것이 인생인 것을
웃다가도 한세상이고
울다가도 한세상인데
욕심내 봐야 소용없잖아
가지고 갈 것 하나 없는데…….’
비밀번호가 틀립니다.
강순희
“비밀번호가 틀립니다.”
새벽 3시, 현관문의 디지털 도어 록에서 난데없이 안내 음성이 튀어 나왔다. 누군가 도어 록의 뚜껑을 위로 열고 비밀번호를 잘못 누른 것도 아닌데 비밀번호가 틀렸다니 참 황당한 일이다. 도어 록이 오작동을 한 것은 그날 새벽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 한 달 전부터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상황과 맞지 않은 안내 음성이 들리고 심지어 경보음까지 “왱왱.” 울렸다. 이상하게도 꼭 한밤중이나 새벽에만 오작동을 했다. “문이 열립니다.” “문이 닫혔습니다.” 등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의 그 곱고 상냥한 목소리를 새벽에 들으면 섬뜩하기까지 했다. 엘리베이터 소리도 나지 않았고, 인기척도 없었고, 문을 열어서 확인해 보면 누가 손을 댄 것도 아니었다. 도어 록을 처음 설치해 준 열쇠 가게 아저씨께 도움을 청했다. 이것저것 살펴보더니 원인을 찾지 못하고 건전지 4개만 갈아 끼워 주셨다.
“아픈 곳은 많아서 환자가 증상을 호소하는 데 의사는 정확한 병명을 얘기해주지 못하는 상황 같다.”며 한번 사용해보라고 한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길 바라며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낮에는 조용했다. 그러나 일주일 후 결국 새 것으로 바꾸었다. 그 전날 밤에 심하게 오작동을 해서 결국 새것으로 교체하고 안내 음성도 들리지 않게 설정했다.
디지털 도어 록은 기존의 열쇠 대신 비밀 번호나 반도체 칩, 스마트카드, 지문 등 디지털화한 정보를 열쇠로 활용하는 첨단 잠금 장치라고 하는데 오작동을 하니 오히려 더 불편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옮겨 가면서 우리는 엄청난 변화와 속도를 따라가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많은 양의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고 저장하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교직에 있을 때, 아침에 출근하면 컴퓨터의 전원을 켜는 것으로부터 일은 시작되었다. 업무시스템에서 일을 처리하느라 하루의 대부분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도 했다. 나는 늘 최신 기기들 앞에서 움츠러들었다. 앞사람이 잘 사용하던 복사기도 내가 하려면 종이가 끼여 고장이 났다. 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를 앞두고 있으면 인터넷이 안 되는 등 컴퓨터는 꼭 말썽을 부렸다. 요즈음 도시열차를 타면 옆자리에 앉은 노인들도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보거나 게임을 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버스 정류장에는 정보시스템에 의해 전광판이 버스 도착 시각을 알려 준다. 사람들은 손 안의 컴퓨터인 스마트폰을 통해 세상을 들여다보고 사람들과 소통한다. 편리한 반면 디지털 시대의 부작용인 디지털 치매도 걱정해야 하니 아날로그 방식에 더 애착이 간다. 아날로그는 낡은 것이나 사라져가는 문화를 뜻하기도 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새롭게 조명되기도 한다.
수요일마다 박물관대학에 간다. 12 강좌 중 두 번째로 구석기 문화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인류 도구 발달의 99%는 구석기시대에 이루어졌고 0.1%의 시간 속에서 현대 문명이 탄생했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약 25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출현하였고 구석기인들은 현재의 모양과 같은 뼈바늘을 사용해서 옷과 신발을 만들어 입고 추위를 이겼다고 한다. 또 매머드의 뼈와 가죽을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 직립보행으로 손이 자유로워지면서 도구와 불을 사용했고 음식을 익혀 먹었다. 고기를 익혀 먹음으로써 소화가 빨라지고 영양 공급을 통해 인지 능력이 발달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동굴 벽에 코뿔소, 말, 양 등의 그림을 그렸고 상아를 이용해서 목걸이 장식을 만들어 누군가에게 걸어주었다고 한다. 우리와 똑같이 생긴 손으로 손자국을 찍어 동굴 속에 벽화로 남겨 놓았다. 정교한 손은 모든 의식주를 지배해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20만 년 전의 구석기 유적이 강, 하천, 동굴 주변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특히 구석기의 종류가 많고 기술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기능이 다 달랐다는 점이 놀라웠다.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구석기인들이 벌써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수십만 년이라는 시간 너머의 그들이 왠지 가깝게 느껴졌다. 돌과 나무와 진흙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익숙함일까? 현대 문명을 탄생시킨 0.1%의 시간 속에서는 아날로그와 디지털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첨단 디지털의 혜택을 누리고 있으면서 아날로그 방식에 향수를 느낀다. 첨단 기술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최첨단 제품을 팔면서 감성에 호소하는 광고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서가에는 책이 넘쳐난다. 길고 널찍한 테이블에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백발의 노신사는 신중하게, 오랫동안 책을 고르고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스쳐가는 도심 한가운데 시간이 멈춘 듯한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끼게 하는 곳을 발견했다. A중고서점이다. 한 권의 책을 고른 나에게 여직원은 컴퓨터가 있는 쪽으로 안내하며 인터넷 서점의 회원 가입을 권했다. 그 자리에서 컴퓨터로 회원가입을 했더니 스마트폰으로 알림 톡이 왔다. 모바일 사이트에 가입 신청을 해 주셔서 고맙다고.
‘어휴, 모바일 사이트는 또 뭐야?’
시월 마지막 날의 축제
강순희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바람 한 점 없었다. 수필 반에서 산행을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수필 반에서는 가끔 지하철역에서 만나 도시 외곽의 산을 오르고 있다. 등산을 마치면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 때문에 짐을 가볍게 하여 트레킹하는 기분으로 거북이 산행을 하고 있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지하철 1호선 대곡역에 내렸다. 일찍 도착해서 기다리던 문우들께서 반갑게 맞아주셨다.
지난 9월에는 대구수목원 뒷산인 청룡산을 올랐다가 화원 쪽으로 내려와 남평문씨본리세거지와 인흥서원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청룡산 줄기인 수목원 근처의 산을 오른 후 한실마을을 거쳐 수목원의 국화축제를 둘러본다는 계획이었다. 대진초등학교 근처에 도착하니 학교 건너편에서 산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보였다.
“처음에 오르막이고 그 뒤로는 오르락내리락 대체로 평탄합니다.”
언제나 안내를 해 주시는 L선생님의 말씀에 마음을 다잡고 열 한명의 산행 회원들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졌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쁜 숨을 쉬며 산을 올랐다. 드디어,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쉼터에 도착했다. 간단한 운동 기구와 벤치가 놓여 있고 훌라후프를 돌리고 있는 등산객도 보였다. L선생님께서 나누어 주신 오이를 먹고 갈증을 풀었다. 오이를 신호탄으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간식 나누기가 시작되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커다란 간식 봉지를 하나씩 안겨 주셨다. 보온병에 커피까지 담아 오셔서 산 속에서도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땀을 식히면서 달콤한 간식까지 먹고 나니 세상 부러울 것 없었다. 그 때 M선생님께서 J선생님을 향해 독창회를 제안하셨다. J선생님은 산행을 할 때 가끔 연습 삼아 산에서 가곡을 부르셨다. 동네에서도 오페라 가수로 불린다며 J선생님은 유쾌하게 웃었다. 청중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숨을 고르는 모습이 당당하면서도 신중해 보였다. 드디어 소프라노의 고운 목소리가 청량한 가을바람을 타고 산 속에 울려 퍼졌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김현승 시, 안정준 곡 ‘가을의 기도’였다. 가을날에 어울리는 노래를 선곡해서 악보까지 준비해 온 열정에 모두 큰 박수를 보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노래해야 발표회 무대에서 더 자신 있게 노래할 수 있다며 용기를 낸 것이다. 모두 음악에 취해 학창시절 배운 가곡을 흥얼거리며 산길을 내려왔다. 산을 벗어나기 전에 한실마을 동제를 지내던 큰 느티나무 앞에서 음악회의 2부 순서가 시작되었다. 노래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계신다. 대구시청 공무원 합창단인 ‘컬러풀 코러스’의 단원이신 C선생님이다. 이탈리아 가곡인 ‘돌아오라 소렌토’를 원어로 불러주셨다. 이어서 가곡 ‘우리 어머니’도 테너의 멋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반주도 없이 야외에서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은 타고난 음악성도 있지만 꾸준하게 갈고 닦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산 속 음악회의 막을 내리고 한실마을로 들어섰다. 한실이란 골이 깊고 크다는 뜻이다. 한실마을은 기와집과 돌담 등이 남아 있었지만 2008년 주택단지로 지정 고시되어 개발 중이며 마을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고 한다. 도심에서 가까운 탓인지 옛날 기와집 등이 카페와 식당 건물로 증축 되면서 상업화되어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근처에는 대단지 아파트 공사도 한창이었다. 한실마을을 지나 저수지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주변의 산들이 봉긋봉긋 곡선을 이루며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웠다. 다시 걸어 내려와 옆문을 통해 수목원 안으로 들어갔다. 대구수목원은 쓰레기를 매립한 곳으로 1997년부터 매립지를 복토하는 방식으로 약 6년간의 개발 끝에 2002년 5월 공립대구수목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분재원, 선인장 온실 등 21개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50여종, 15만 그루의 나무와 900개 화단에 1300여종, 30만 포기의 초화류를 관리 운영하고 있다고 표지판에 적혀 있었다.
수목원의 끝자락에 있는 한국식 정원부터 시작해서 거슬러 내려오면서 관람을 했다. 산대장이신 L선생님은 몇 걸음 앞에서 우리를 이끌며 관람을 해야 하는 핵심적인 장소를 짚어 주셨다. 열대 과일원과 종교관련 식물원은 온실을 짓고 새로 문을 연 곳이어서 볼거리가 많았다. 산림문화전시관 안에도 들어가 살펴보았다. 드디어 분수대를 앞두고 길 양 옆으로 늘어선 국화 화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국화꽃 송이 마다 짙은 향기를 내뿜고 벌들은 꽃잎 속에서 윙윙거렸다. 국화 축제의 중심인 잔디 광장과 분수대 근처에 도착했다. 국화 분재도 있고 동물, 캐릭터 등의 모형과 국화꽃으로 장식된 터널도 있었다. 만여 점의 국화가 전시되고 있다고 하니 온통 국화 천지였다. 솟을대문 모형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산대장님의 안내로 대국을 전시하고 있는 온실에도 들어갔다. 땀과 정성으로 빚어낸 예술 작품이었다. 빛깔과 꽃잎 모양이 독특한 다양한 대국을 볼 수 있었다.
계절의 문 뒤에 숨어서 꽃봉오리를 맺은 국화가 수목원 뜰로 나와 활짝 웃고 있었다. 국화 향기로 숨을 쉬며, 일상에 찌든 마음도 쉬고, 가을 숲의 한가운데를 거닐었다.「숨 · 쉼 · 숲의 공간 대구수목원」이라고 써 붙인 글귀가 인상 깊게 다가왔다. ‘시월의 어느 멋진 날’은 바로 오늘 같은 날이리라. 가을 산을 오르고 국화 축제 마당으로 내려와 함께 즐겼다. 아름다운 것은 함께 누려야 더 빛이 난다. 늘 소통하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문우들의 매력도 발견할 수 있다. 내게 없는 장점과 능력을 가진 문우들을 보며 매력을 느꼈다. 매력은 당당하게 드러낼 때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산행 여정은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배가 슬슬 고파지면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수목원을 벗어나 역시 L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식당으로 향했다. 매콤한 낙지볶음 비빔밥을 맛있게 먹었다. 웃음이 넘치는 훈훈한 분위기에서 시월 마지막 날의 축제 일정을 마무리했다. 지하철역에서 헤어질 때 산대장님은 수업을 마치고 학생들을 보내는 선생님처럼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