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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남리 항공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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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천군은 금강하류 지역과 서해 연안습지를 낀 고장으로 예로부터 강과 갯벌에 크게 의존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자연 환경은 크게 모습이 바뀌어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20여년 전 금강하굿둑이 막히기 이전만 해도 금강 하구에는 갈대밭이 무성했고 우어, 뱅어, 황복, 뱀장어, 참게 등 기수역에서 사는 각종 어족자원으로 풍성한 삶을 누렸습니다. 40~50년 전까지 비인면 장포리나 서면 도둔리에는 원시적 어로 방법인 독살이 있어 고기떼를 다량으로 포획했습니다. <뉴스서천>은 이러한 강과 갯벌을 낀 마을들을 찾아 어르신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옛 모습을 돌아보는 장기 연재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10회에 걸쳐 장암리-원수리-망월리-옥포리-와초리-완포리-죽산리-용산리-신성리 등의 강마을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번 호부터는 장항읍 옥남리에서 시작하여 서면 부사리까지 이어지는 해안선을 더듬어 갯마을의 옛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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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리천 하구 모습. 보이는 마을은 솔리 마을이며 포구는 송림리에 속한다. | 마서면 서쪽에 있는 서태산에서 남서 방향으로 2km 가량 길게 내리뻗은 산줄기는 옥남4거리 부근에서 소멸되는데 소멸되는 지점에 있는 작은 동산을 누에머리(잠두 蠶頭)라 부른다. 장항읍 옥남리는 누에머리 서쪽 바닷가 마을이다. 옥남리는 본래 서천군 남부면의 지역인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솔리와 비두리, 남전리의 일부를 합하여 옥남리라 하여 서남면에 편입되었다가 1938년 10월 1일 장항읍으로 편입되어 옥남정이라 부르다가 해방 이후 1947년 일본식 이름을 다시 고쳐 옥남동으로 불렀다. 이후 1988년 5월 1일 정부의 읍면동리 명칭 변경 법률에 따라 옥남리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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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태산 줄기가 남서쪽으로 내려와 멈춘 곳. 이곳을 누에머리(잠두)라 부른다. | 누에머리 동남쪽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지며 들판 북쪽에 ‘날머리’(비두 飛頭)라 부르는 마을이 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형의 작은 산 남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지금은 들판이지만 옛날에는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이곳은 1923년 일제가 만든 5만분의 1 지도에는 염전으로 나와 있다. 옥남리 서쪽에 있는 마을을 솔리(率里)라 하는데 소나무가 많아서 솔리라 한다는 말도 있다. 이 마을에는 부자가 끊이지 않고 나왔는데 추씨 성을 가진 부자는 만석꾼으로 불렸다. 그는 6.25때 서천등기소에서 북한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일제는 1929년 솔리와 남쪽 송림리를 잇는 길이 500m의 제방을 쌓아 안쪽을 논으로 만들었다. 이 제방을 옥남방조제라 하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장뚝, 또는 솔리뚝이라 부른다. 옥산리나 옥북리, 화천리에서 나오는 물은 솔리천을 이루어 옥남방조제에 있는 수문을 통해 서해로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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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 일제 때 쌓은 제방 | 솔리 바닷가에서 남전리 백사마을로 이어지는 모래톱을 솔리백사장이라 부르는데 점차 뻘에 묻히고 있다. 소나무 방풍림이 울창하고 해당화, 갯메꽃 등 사구 식물들을 볼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 왜가 백제를 돕기 위해 천 여척의 배를 보내와서 “백사(白沙)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백강전투에서 왜의 대선단이 정박한 곳이 바로 이 모래톱으로 추정된다.
솔리천이 흘러드는 갯벌은 바지락, 백합, 동죽 등 조개가 지천이어서 주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도 조개를 잡고, 배를 타고 나가 온갖 수산물을 건져 올려 130여호에 이르는 큰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나 금강하굿둑이 완공되며 솔리천 하구 갯벌에 점점 토사가 쌓여가고 조개 생산량도 점차 줄어 지금은 바다에 나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고 마을 세대수도 50여호 남짓으로 줄었다.
2011년 장항생태산단이 지정 고시되며 옥남2리 대부분은 산단지역으로 수용돼 마을을 떠나야 한다. 날머리 마을과 617번 지방도 동쪽에 있는 13가구는 교회와 함께 정든 집과 땅을 헐값에 내주고 이사를 해야 하는 처지이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토지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이미 땅값이 올라버려 보상을 받은 돈으로는 인근에서 땅을 사 집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 주민 증언
“대합은 딴딴한 뻘에서 나오는데 지금은 뻘이 쌓여 안잡힌다”
지난 2일 뉴스서천 취재팀은 장항읍 솔리마을(옥남1리)을 찾아 정병태(73)씨를 만나 마을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는 이 마을에서 태어나 한번도 이 마을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농사를 짓다가도 한가한 틈을 타 바다에 나가 조개를 잡아 오던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하굿둑 막은 뒤로 바다가 변했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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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리 주민 정병태씨. | 방조제를 여기서는 장뚝이라 하는데 왜정 때 쌓았다. 장뚝이 없었을 때에는 배가 마을 안으로 들와왔다고 옛날 어른들이 말했다. 6.25 나던 해가, 내가 열 한 살이었는데 일곱 여덟 살 먹었을 때 바닷가에 솥단지 걸어놓고 불을 때서 소금을 굽던 모습이 기억이 난다. 그때 소금은 짜지도 않고 참 맛이 있었다.
고깃배들도 많았는데 하굿둑 생기면서 많이 변했다. 그때는 꼬랑(갯골)도 넓었는디 지금은 좁아지고 높아졌다. 자꾸 뻘로 메워지고 있다. 옛날에 고기도 참 많이 잡혔다. 숭어, 대하가 많았다. 물이 쓰면 고막, 반지락… 아시레섬에가서 굴도 따왔다. 지금은 별로 없응게 안다닌다. 바다도 사람이 자꾸 댕기면 길이 난다. 그런데 지금은 푹푹 빠지니까 못 다닌다.
여기 앞바다에 지금도 가무락이 잡힌다. 근력 없는 사람은 할 수도 없다. 옛날에는 농사 한가한 때면 대합(백합) 잡으러 바다 많이 다녔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대합을 잡았는데 지금은 나가봐도 없다. 대합은 딴딴한 뻘에서 잡히는데 지금은 뻘이 쌓여 안 잡힌다. 고막도 많이 잡았다. 여기치 고막은 전라남도 벌교 이런 데서 올라오는 거하고 다르다. 여기치는 크기가 크다. 피조개도 나왔는데 피조개는 아시레섬 있는 데 자갈밭에서 나왔다. 키조개는 아시레 뒤 쪽에서 나왔다.
해방조개도 참 많이 나왔다. 배를 타고 나가 틀을 넣고 배에서 당겨서 잡았다. 사리 때 되면 꽃게도 잡아와서 장항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새만금 막으면서 더 없다. 지금 배있는 사람들은 개야도 근처까지 나가야 한다.
대나무로 고기잡는 살을 엮어서 아시레 섬 앞에다가 쳐놓았다. 물 들어왔다 쓰면 거기에 다 모인다. 동네 사람들 쪽대 메고 나가 꽃게 같은 것 잡았다. 농사를 지어가면서 바다를 다녔다. 그런데 지금은 바다를 못 다녀 주민들 부수입이 많이 줄었다.
전에는 젊은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노인들만 산다. 옛날에는 130가구 됐다. 지금은 40~50가구나 될란가… 송림리는 집들이 산재해 있어 큰 동네가 아니었는데 이 동네는 한 데 모여 있어 큰 동네였다. 학교도 두 칸 짜리 있었는데 해방바람에 무너졌다.
8.15 해방되던 해에 불어온 태풍이 해방바람이다. 지은 지 얼마 안됐는데 허물어졌다. 학교 무너진 뒤로 중앙국민학교(초등학교)로 편입됐다. 산업단지 생긴다고 해서 2리 사람들 걱정이 많다. 마을을 다 떠나게 생겼다. 여기 1리 사람들은 떠나지 않게 됐지만 농지가 다 그 안에 있다. 이쪽에는 농지는 별로 없다. 걱정들이 많다. 이 동네도 도로 저쪽은 수용돼 다 떠나게 됐다. 이사 못나간다고 이의 신청한 사람들도 있다. 여기는 밭도 없다. 바다도 없고 농지도 없고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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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여년 전까지 정병태씨가 대합잡이에 사용하던 그렝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