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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노선
룻기는 여호수아, 사사기와 다른 점이 있다. 여호수아와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대적의 싸움이었다. 그래서 지도자는 영도력과 큰 능력이 필요했었다. 그런데 룻기는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는 계보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두 가지 면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면은 능력의 면이고 또 한 면은 생명의 면이다. 능력의 면과 생명의 면은 다 필요하지만 신약의 경륜 안에서 볼 때는 능력의 면보다 생명의 면이 훨씬 중요하다. 이것을 깊이 인식하기를 원한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 왕국이 건설될 때까지 여러 사사가 있었다. 이 사람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그 주변에 있는 적들을 제압하면서 지탱해 왔다. 이 기간은 일종의 혼돈 기간이었다. 모세나 여호수아 같은 절대적인 지도자가 없었고 그 때 그 때 사사들이 나와서 몇 년씩 다스렸다. 이런 시대에 룻이 나왔고 룻기가 쓰여 졌다.
능력의 노선
사사들은 일과 활동과 능력에 있어서 놀라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일과 활동과 능력에 비해 그들의 인격, 그들의 생명은 그렇게 볼만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여호수아나 갈렙까지도 그 생명의 탁월한 면이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사사기의 대표적 인물로 삼손이 있다. 능력을 대표하는 사람, 능력의 영을 크게 받은 사람이다.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했다고 했다. 능력의 영은 그에게 강했는데 생명의 영은 아주 결핍되어 있었다.
삼손은 분명히 엄청난 능력이 있었다.
그는 나실인으로서, 머리에 삭도를 한 번도 대지 않았고, 독주를 마시지 않았으며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다. 이런 그의 생활은 그의 생명이나 인격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신성한 법규에 따른 것이다. 그 스스로가 그런 사람인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오는 법률을 따라서 나실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생명의 무궁한 능력을 좇는 신약의 원리와는 다르게 율법 안에서, 규정 안에서 나실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신성한 생명이 부족하다.
우리가 세상에서 보더라도 율법적으로 훌륭하고, 신앙생활이 모범적이고 철저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법규에 따른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생명이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삼손에게서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난다. 나실인으로서의 정결한 생활이 있는 반면 이 부분만 벗어나면, 즉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먹지 않는 이런 법규에 해당되는 것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이 사람은 아주 형편없는 사람으로 드러났다. 자기의 육체적인 정욕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여러 여자들을 상대하였고 더욱이 모두 이방 여자들을 상대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과 이방 백성을 구별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것은 오로지 자기의 육체를 제어하지 못하는 약점 때문이었다. 법규 안에 있는 면은 반듯하지만 법규 안에 있는 것을 벗어난 면은 형편없는 모습이다.
율법주의자들을 보면 그렇다. 법규에 있는 대로는 아주 잘 한다. 가령 안식일 날이기 때문에 일하지 않는다. 버스도 안 탄다. 버스 값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철두철미하게 신앙생활을 고집하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정해진 규정을 제외하고 나면 그들은 아무런 능력이 없다. 그 기준만 떠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그 기준 앞에서는 철두철미한데 그 기준 밖에서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는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법규에 틀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실인의 서원에는 ‘이방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라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그 점에 대해서는 자유다. 그는 아무런 제한이 없었고 자기 안에 생명의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여자로 인해 계속 실수를 하면서도 또 그렇게 하였다. 마침내 여자로 인해 머리를 깎이게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되고, 눈이 뽑히게 되었다.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크게 감동했으므로 신의 능력 곧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했다. 그런데 다른 한 면으로는 정욕도 충만하였다. 이런 사람을 볼 때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도 충만하고, 육신의 정욕도 충만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에 어떻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 사사가 되었는가? 이런 의문이 닥쳐올 때 참으로 난감해진다.
삼손은 분명히 여호와이 신이 크게 감동한 사람이다.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행동을 했는가? 여호와의 신이 감동했기 때문에 능력은 있었지만 그 생명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오늘날의 삼손도 있기 때문이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 불덩이 같은 사람이 있다. 은사를 받아서 그의 손만 대면 병이 고쳐지고 설교하면 수천 명이 회개한다.
은사와 설교 두 가지가 다 충만한 사람도 있다. 성경의 기초적인 복음,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 아들을 전파하고,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는 것을 전파한다. 능력은 이렇듯 대단하지만 그의 인격은 보잘 것 없을 수 있다.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임했다. 많은 사람들에게도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 오순 절 날 임했던 성령을 받은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뜨겁다. 뜨거울 때는 모든 것이 다 떠나가고 하나님으로만 충만해진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년에 가서 실패하는 경우를 본다. 젊었을 때는 자기 육신을 제어하지 못하고 늙은 후에는 자기 욕심을 제어하지 못해서 형편없는 사람으로 전락되는 것을 본다.
늙은 후에는 신의 능력도 떨어진다. 젊었을 때 불타던 능력이 어디로 가 버리고 없다. 늙은 후에는 병도 안 고쳐지고 능력도 안 나타나고 기적도 안 일어나게 된다. 늙어서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이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기드온은 유명한 사사였다. 전쟁에서 뛰어난 용사였다. 그런데 아들이 72명이다. 많은 처첩이 있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한 것은 사실인데 그의 생활은 이런 모습이었다.
야일이라는 사람은 22년간이나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그런데 아들이 30명이다. 30명의 아들들에게 성읍을 하나씩 주었다고 했다. 그는 30개의 성읍을 가지고 있었다.
입산이라는 사람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아들이 30명이고 딸이 30명이다. 딸들은 다 외국으로 시집보내고 며느리들은 다 외국에서 수입했다. 아들들을 이방인과 결혼시킨 것이다. 분명히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한 사람인데 이렇다.
압돈이라는 사람은 8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다. 아들이 40명이었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능력의 영과 생명의 영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첫 사람 아담은 산 혼이 되었던 것과 같이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주는 영이 되었나니.” 어떤 생명을 주는 영인가? 과정을 거친 생명이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나님 보좌에 오르신 생명의 무궁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그 영이다. 여호와의 신은 그에게 임했을지 모르지만 생명주는 영이 없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생명이 결핍된,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었다. 단지 발람의 당나귀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했던 것처럼 외부에서 어떤 능력이 와서 일을 했을 뿐이었다.
오늘 날 어떤 사람이 뛰어난 일을 할 때도 자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힘이 와서 한다. 인격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힘이 와서 하는 것이다. 병을 고쳐도 힘이 와서 하는 것이지 자신의 생명이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왔다.
물론 이 능력도 하나님이 필요하시기 때문에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했다. 야일과 입산과 압돈과 삼손, 이런 사람에게도 다 그러했다. 이스라엘 백성을 다른 백성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이런 사람들을 사용했다. 이런 쓰임을 보고 사람들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다.’ 라고 생각하기 쉽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경륜에 맞는 사람들이라면 계속 이런 사람들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들로서는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선인 성육신이 이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항상 깊이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그 사람을 통해서 인격이 되려고 하신다는 것이다. 전 성경의 중심 줄거리는 성육신을 향해가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인격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위해 사람을 창조했다.
이 근본적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다른 것들은 일시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삼손이 당시에는 필요했었다. 비록 정욕을 제어하지 못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블레셋을 쳤다. 하나님께서 삼손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근본적인 경륜과는 관계가 먼 것이다. 적을 물리쳤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지는 않는다. 단지 그 경륜을 보호하기 위해 바깥에서 일했을 뿐이다. 경륜의 중심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백성을 보호한 목적은 무엇인가? 거기서 성육신하기 위해서 그 백성을 보호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브라함, 이삭, 다윗의 역사가 있었다. 많은 선지자와 사사, 하나님의 종들이 나왔다. 그런데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이 나온 것이다. 이 사람이 안 나왔으면 다 헛일이다. 쭉정이에 불과하다. 잎이 아무리 무성했을지라도 열매가 열리지 않으면 가을이 되었을 때 다 헛일이다.
구약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업적이 많다. 그 때 그 때 필요한 일들을 해 왔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 얻은 결론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다. 이 한 사람을 향해 지금까지 역사가 진행해 왔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그 모든 계보들은 어디를 향해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을 낳기 위해서 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한 아들을 얻는 것이 목적이다. 사람 속에서 성육신하는 것, 사람 속에서 인격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여호수아서와 사사기를 볼 때 이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일은 했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중심에 있지는 않았다.
이 사람들이 필요치 않다는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가 있으니 군대를 이끌고 가나안에 입성을 했고, 기드온이 있으니 블레셋을 쳐서 물리쳤고, 삼손이 있으니 블레셋을 제압했고, 뼈다귀 하나로 삼백 명을 쳐서 죽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을 왜 보호했는가? 성육신한 아들을 위해서 보호한 것이다. 거기서 아들을 낳기 위해서 보호한 것이다. 이 아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다 헛일인 것이다.
그래서 사사기에서 위대한 용사들이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룻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많은 용사들이 나온 이유는 룻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룻을 보호하여 다윗 왕 한 사람을 낳기 위해서 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있다.
병원의 원무과나 약제과 직원들은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도록 돕는 사람들이다. 수술을 할 때는 칼을 잡고 수술하는 의사를 위해서 여러 면에서 돕는 사람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 한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수술이 끝나면 다 해산한다.
그리스도가 나온 후 이스라엘은 자기의 임무가 다 끝나 버렸다. 지금 유태인들은 자기들이 나라를 회복해서 이 세계를 다스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소용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기서 이미 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껍데기는 필요 없게 되었다. 곡식을 키울 때를 생각해 보라. 싹이 날 때는 싹이 중요하고 잎이 날 때는 잎이 중요하고 가지가 날 때는 가지가 중요하고 꽃이 날 때는 꽃이 중요하다. 그런데 추수할 때가 되면 알맹이만 쓰고 다 버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어디로 흐르는가를 모르면 방황하게 된다. 경륜의 중심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만 따라 가다가 열매를 얻지 못한다. 이런 사람의 대표적인 예가 삼손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이 흐트러졌고, 마지막에 후회하고 회개해서 또 다시 블레셋을 무찔렀다. 삼손이라는 사람 자신은 엉망진창인데 하나님의 신이 임할 때만 놀라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전에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크게 임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설교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전도하면서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했다. 그러니 그 일을 하고 나면 성령은 떠날 것 아닌가. 우리는 이런 일을 해 왔었다. 구약은 이렇게 흘러왔다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노선
그런데 신약의 경륜은 그렇지 않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우리 가운데 계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하나님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신약의 경륜이다.
이 신약의 경륜 안에서 볼 때 룻기는 놀라운 책이다. 왜냐하면 사사기가 구약이라면 룻기는 신약인 셈이고, 사사기는 ‘능력’ 이라면 룻기는 ‘생명’ 이다. 룻기에는 능력의 위대함이 아무데도 없다. 여기서 중요한 사람 몇 사람에 대해 다시 더 생각해 보자.
가. 나오미
나오미는 유태인으로서 모압 땅에 갔다가 망해서 돌아온 여자다. 남편은 베들레헴을 떠나기 전 재산을 다 저당 잡혔다고 할 수 있다. 자기 땅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었으면 모압 땅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농사지을 것이 없어서 모압 땅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두 아들의 기업까지 다 잃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을 따라서 살지 않고 그것을 떠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 기업을 가지고 그것을 운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떠난 것이다. 관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나오미의 남편은 결국 징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두 아들도 역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 오직 나오미 한 사람만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였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하느냐.” 라고 했다. 여기서 나오미는 너무 가난하고 빈 사람이 되어서 아무 것도 없는 사람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나오미는 모압에서 하나님을 거역하거나 그에게 반항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경륜 안으로 돌아왔었다. 만일 하나님이 자기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거역했으면 모압 땅에서 안 돌아왔을 것이다. ‘나를 이렇게 못살게 하고, 이렇게 저주한 하나님을 나는 안 믿겠다.’ 라고 하면서 안 돌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나오미는 다시 그 전능자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 여자는 경건한 여자였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앙망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거룩한 땅으로 돌아와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경륜에 어그러지지 않게 하나하나 처리한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결코 하나님의 경영을 떠났던 사람이 아니다. 자기 남편이 떠났던 것이다.
나오미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안식하기를 원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분배 받기를 원했으며, 그리스도의 계보에 연결되기를 원했다. 그가 돌아온 것은 위대한 것이었다. 모압 땅으로 갔다가 아무 것도 없이 빈손이 되어서 고향 땅으로 되돌아 왔다. 자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위대하다. 이것은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우리가 사탄의 종이 되었다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그 형상이다.
그러면 이것이 능력에 의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오미가 능력이 있어서, 능력의 신에 감동되어서 모압 땅에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나오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하신지라, 모압 땅에서 나오미가 봇짐을 싸들고 베들레헴으로 왔다.”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 그는 너무 가난했다. 완전하게 거지였다. 이런 거지였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능력과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가 능력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능력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것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가난함이 하나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 것이지 능력이 아니다. 우리는 능력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의 일을 하니까 하나님과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는 우리가 능력이 있을 때가 아니라 가난할 때다. 집을 나갔던 둘째 아들이 능력이 있을 때 아버지께 돌아간 것이 아니다. 그가 아주 가난했을 때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가난한 거지였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은 그의 인격이 완전히 빈 사람이 된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온전하게 가난해진다면 그 때 우리 인격이 깨끗해진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의 것이요.” 어떻게 가난한 자가 되는가? 능력으로 가난해지는가? 우리는 능력으로는 가난해질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가난해지려고 해도 능력이 있으면 가난해질 수 없다. 능력이 없어야 가난해진다.
하나님은 때때로 어떤 사람에게 크게 감동케 해서 그를 통해 능력으로 일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난해 지지는 않는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일한다 해도 내 인격에는 변화가 없다. 아무리 능력을 받아도 가난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고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 되어서 베들레헴 땅으로 되돌아 왔던 것이다.
나. 룻
룻은 시모를 따라왔다. 그는 능력이 있어서 따라온 것이 아니다. “룻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하신지라. 그가 그의 시어머니를 따라 왔다.” 이런 말이 룻기에는 없다. 룻이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서 시어머니를 따라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우리는 ‘여호와의 신이 감동함으로 내가 하나님을 따라갈 것이다.’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전에 ‘나에게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하시고 내게 임하시면 내가 하나님 앞에 참으로 가깝게 갈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어 하나님께 가지 못했다. 여호와의 신이 내게 감동하면 능력을 행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킨다든가 만 명을 회개 시킨다든가 하는 일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아니다.
룻은 시모를 따라올 때 능력에 의해서 따라온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에 의해서 오게 되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했다.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서 된 것이 아니다. 자기에게 남다른 능력이 있어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지극히 가난한 인격으로 말한 것이다.
이것이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과 일치한다. 신약 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라오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신약에 계시된 생명의 영이다. 주님을 따라갈 때 신에 감동해서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좇아오라. 그렇지 않은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다.” 라는 것은 가난한 자로 주님을 좇으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어서 십자가를 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해서 십자가를 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해서 질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를 지는 의미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신 초를 해융에 발라서 입에 댔을 때 그것을 거절했다. 그것은 마취제였다. 그것을 먹으면 십자가에 달리는 고통이 감소된다. 그래서 그것을 입에 대 주게 되어 있는데 거절했다. 마취제를 마시고 십자가에 달렸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마취과 의사를 데려와 예수님을 마취시켜 놓고 십자가에 못 박았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인격적인 문제다.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문제다.
여호와의 신이 크게 감동해서 전혀 아프지 않게 된다면 십자가를 지기가 편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나는 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물론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병은 고칠 수 있다. 그렇지만 능력 주신다고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는 도저히 회개가 안 됩니다. 그러니 성령을 나에게 주셔서 회개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신으로 감동케 해서 우리를 회개케 하시지 않는다.
옛날에 어떤 중학생이 밤중에 술을 잔뜩 마시고 나에게 왔다. “목사님, 내가 이렇게 죄를 많이 짓는데 하나님은 왜 나를 그냥 둡니까? 미리 막아 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어린 나이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고학(苦學)을 하다가 결국은 세상에 빠졌다. 처음에는 순진하고 착했었다. 시골 교회에서 주일 학교에 나갔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고학하겠다고 상경했는데 세파에 시달리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이런 아이가 나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면 좋을 텐데 왜 빠지도록 두었을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나쁜 길로부터 막아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해 지면 죄를 안 짓겠지, 성령이 충만하면 내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겠지, 내 인생을 컨트롤 하겠지.’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된다면 일시적으로는 자신을 제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영속적으로 제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해서 내가 죄를 짓지 않게 해 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이것은 신약에 계시된 원칙이 아니다.
신약에 계시된 원칙은 성육신의 원칙이다. 과정을 거친 그 영이 우리에게 옴으로써, 과정을 거친 인격을 먹음으로써, 우리 안에서 과정을 거친 그 인격이 살아나야 한다. 하나님이 초월적인 능력으로 죄짓지 않게 해 준다든가, 인격적인 생산을 할 수 있게 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룻은 절대로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서 시어머니를 따라온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인격으로 그 시어머니를 따라온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님 가시는 곳에 내가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곳이 천당이든 지옥이든 주님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것이다.
“나는 꼭 천당만 가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혹시 당신이 지옥에 가면 나는 안 가겠습니다.” 라는 뜻이다. “나는 당신이 지옥으로 가더라도 당신이 가는 대로 가겠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인격의 문제이지 초월적인 능력의 문제가 아니다. 초월적인 능력이 와서 이렇게 할 수는 절대 없다.
다. 보아스
보아스를 주목해 보자. 그는 절대적으로 온당한 사람이었다. 자기 욕망에 좌우되지 않는 사람, 요동치 않는 사람이었다. 사사기에 나오는, 욕망에 사로잡혔던 사람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그가 잠들어 있는 사이에 룻이 들어왔다. 보아스가 깨어보니 룻이 누워 있는 것이다. 룻이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라고 했다. 그 때 그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무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仁愛)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내 딸아 두려워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참으로 나는 네 기업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 이 밤에 여기서 머무르라. 아침에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려 하면 좋으니 그가 그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행할 것이니라.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울지니라.” 라고 했다. 그는 룻을 축복하고 고귀하게 평가했다. 룻을 사랑하고 존중하였다. “너는 현숙하고 아름다운 여자다. 내가 너와 결혼하고 싶지만 나보다 먼저 기업 무를 자가 있다. 그 사람이 나보다 우선인 한 내가 그에게 물어 보아야겠다. 그 사람이 싫다면 그 때 내가 너와 결혼하겠다.” 하고 신중한 입장을 취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신중하고 자상하고 자애로운 사람이었다. 갈 때 보리를 되어 주고 “딸아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하나님께서 너를 복 주실 것이다.” 라고 했다.
보아스에게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대적과 싸우려면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야 한다. 그러나 성육신하는 아들이 되려면, 초월적인 능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능력 행하는 사람을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과 성육신의 길은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가 사사기의 복음을 전하려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 룻기의 복음을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 아들을 낳는 복음 때문에, 생명의 노선 때문에 우리가 필요하다. 주님의 회복, 주님의 재현, 주님의 확산, 주님의 건축, 이런 모든 문제들은 초월적인 문제가 아니고 생명의 문제다.
사사들은 분명히 능력이 많았고 큰 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지는 못했다. 사사들 중에 그리스도의 계보에 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업적은 대단하지만 다 군대로, 용병으로 일했을 뿐이다. 아무 업적이 없던 룻이, 아무 업적이 없던 나오미가, 아무 업적이 없던 보아스가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어갔다.
우리가 무엇을 취할 것인가? 업적인가, 생명인가? 이 생명의 노선을 몰랐을 때는 업적의 길에 대해서 대단한 유혹을 받았었다. 그것밖에 없는 세상이었기에 ‘나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할 수 있는가? 나도 어떻게 하면 하루에 삼천 명을 회개시키는 역사를 일으킬 수 있는가?’ 라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사람은 능력이 있는데 왜 나는 없는가?’ 라는 열등감이 있었다.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었다. 그런데 생명의 길을 알고 난 후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가 이 생명의 경륜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업적에 대한 미련이나 부러움이 사라졌다. 그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나는 사업의 유혹에서 풀려났다.
사사들은 용감했고 놀라운 업적을 남겼지만 그리스도의 계보에 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나오미와 룻은 지극히 가난했고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지만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확고한 노선을 정해 준다. 오직 그 생명만이 그리스도를 하나님에게서 사람에게로 이끌고, 오직 그 생명만이 이 노선을 지켜주고, 오직 그 생명만이 그리스도를 다시 산출하게 하고, 오직 그 생명만이 그리스도를 다시 사역(使役)하게 한다.
모든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역자들이 필요하고 사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역은 이 생명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그리스도를 공급하지는 못한다. 전도를 하면 ‘기독교가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있다.’ 이것은 전파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공급할 수는 없다. 소위 전도는 인격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영리를 가지고 전도를 한다면 그리스도에 관하여 전도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공급하지는 못한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공급할 사람을 필요로 한다. 자신을 주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너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한 그 증인은 객관적인 증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나의 복사판이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재현이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대리자가 될 것이다.” 라는 말은 결코 그리스도에 관하여 설명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 아니다.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사역할 사람이 필요한데 이것은 초월적인 능력으로 공급하는 것이 아니고 인격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사의 노선에 의하지 않고 룻의 노선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룻은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의 아들에게서 다윗 왕이 태어난다. 그렇지만 사사들은 그런 아들을 낳지 못했다. 30명 70명씩 아들을 낳았지만 하나도 소용없었다. 70명 아들 가운데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든 사람이 없다. 딸이 30명이고 아들이 30명이니 사위와 며느리까지 120명이지만 한 사람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들지 못했다. 많이 낳았지만 헛일이다.
능력의 영인가, 생명의 영인가? 우리는 무엇을 취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느 노선을 주시려고 하시는가? 우리가 룻의 혈통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낳는 가족 안으로, 혈통 안으로 들어오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이 땅으로 이끌어지기를, 다시 말하면 육신 안으로 이끌어지기를 원하신다. 그 노선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낳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산출함으로써 온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기를 원하신다. 이런 노선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의 복음이 필요하다. 밖에는 지금도 능력의 역사가 많이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그리스도가 나오지는 못한다. 아들이 나오지는 못한다. 사사 시대에 반드시 룻이 있어야 했던 것처럼, 유명한 사사들이 많았지만 가난한 한 여자가 필요했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께는 가난한 룻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낳기 위해서 룻이 필요하다.
사사들이 대적과 싸우는 것도 다 우리를 위한 것임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사의 길과 룻의 길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하나님이 나를 어디로 부르는지를 알아야 한다. 어디로 부르는지를 모르면 우리가 사사가 되어서 그리스도를 낳으려는 착각에 빠질 수가 있다. 사사는 그리스도를 낳을 수 없다. 단지 그들은 그리스도를 낳기 위한 외벽을 지켜줄 뿐이다.
결혼식에 많은 들러리가 있다. 결혼식을 하려면 여러 방면에서 준비하는 것이 많다. 그러나 주인은 신랑과 신부밖에 없다. 하나님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많은 천사와 사사들, 많은 용사들이 동원될 것이다. 그렇지만 결혼하는 것은 신랑과 신부밖에 없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고 가야 지름길로 간다. 이것을 모르고 가면 멀리 외곽을 돌아가는 것밖에는 안 된다.
룻의 노선은 생명의 노선이다. 나오미와 룻과 보아스로 연결되는 이 노선에서 그리스도가 나왔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생명의 공급이 되고 양식이 되었다.
사사들은 누구였는가?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어떤 일이 필요해서 불렀던 사람들이다. 집을 지키기 위해서, 떡을 만들기 위해서, 나무를 잘라오기 위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부름 받았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하는 일과 룻의 일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룻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하고 거기서 아들을 낳는 사람으로 발견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십자가의 길을 보이시고 그 길로 우리를 이끄셨다. 이 길은 우리 자신으로 따라가야 되는 길이지 우리 자신 아닌 어떤 것으로도 따라갈 수 없다. 기술로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영에 감동해서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다. 절대 그 길과는 다른 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십자가를 주실 때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여 죽게 되었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해서 이때 왔나이다.” 라고 했다. 그 때 하나님의 신이 크게 감동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했던 것은 자기 자신으로 하는 것이었지 성령이 감동해서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성령이 와서 감동하여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기를 원하지 않고 자신의 분명한 인격으로 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십자가다. 내가 비몽사몽간이 아닌 온전한 정신으로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옮겨 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하기를 원한다.
성령에 취해서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술에 취한 듯이 우리가 여호와의 신이 감동해서 하늘인지 땅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 당신 원대로 하십시오.”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깨고 나면 “내가 언제 그랬습니까?” 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정신으로, 총총한 정신으로, 그것이 어떤 것인가도 알고, 자기를 버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버리기를 원하는 것이지, 비몽사몽간에 버리기를 원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황홀경 속에서 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종교적인 황홀경 속에서 나도 모르게 버리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전에 나는 신비로운 황홀경 속에서 내가 마쳐지기를 바랐었다. 그래서 기도를 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경험을 안 주셨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런 경험을 주셨으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얼마나 쉽고 좋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다 아시기 때문에 안 주셨다.
성령에 취하는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한 때는 되었지만 다 실패한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시험에는 성령도 소용없더라.” 라는 말이 나왔다. 성령 충만하면 안 보이는 것도 다 보일 것 같은데 시험지를 대하면 안 되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런 말이 나오겠는가? 그런 것을 원했으니까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생명의 노선, 그리스도의 노선, 아들의 노선은 인격의 노선에서 나오는 것이지 결코 신비적인 능력의 노선에서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것을 보니 내가 믿어야 되겠구나.’ 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무슨 영을 받았다든지, 무슨 영에 감동했다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 오죽했으면 천당 가는 표를 팔 때 그것을 사겠는가. 우리가 자기 정신으로 사겠는가. 어떤 사람이 이 표를 백만 원에 사면 반드시 천당에 간다고 했다 하자. 그 말을 듣고 자기 정신으로 살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겠는가. 그것을 판 사람에게 기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적 없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아무리 말 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무슨 수로 종이에 도장을 찍어서 천당 가는 표라고 속여서 팔 수 있겠는가. 그런 사기꾼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졌다.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신비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에는 천주교회의 제도적 권위를 믿고 면죄부를 샀던 것이다.
이런데 속은 사람들은 어떤 말씀을 전해도 전혀 소용없었다. 집회할 때마다 태극기를 펴 놓은 사람이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성경 어느 곳을 펴 놓으면서 이것이 태극기라고 했다. “당신은 이것이 믿어집니까?” 하니 믿어진다고 했다. 어떻게 그것이 태극기로 믿어졌을까? 어떤 신비를 보지 않았으면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신비로운 길이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인격의 문제다. 우리가 일을 할 때는 능력이 필요할 수 있다. 기드온이 블레셋 사람을 섬멸할 때는 능력이 필요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을 칠 때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낳는 데는 능력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재생산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확실하게, 진실하게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대로 따르지 않으면 아들을 낳을 수 없다. 그것은 종교적인 신비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룻기는 사사시대 속에 있다. 사사시대 속에서 룻이 나왔다. 하나님은 사사의 길에 있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룻을 필요로 했다. 많은 능력의 역사가 있었지만 알맹이만 뽑아서 사무엘서로 연결된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의 아들이 다윗 왕을 낳는다. 사무엘서는 다윗 왕에 대한 기록이다. 많은 사사들이 있었지만 쭉정이는 버리고 룻만 뽑아 가는 셈이다.
주님이 우리를 어떤 노선 안으로 부르시는가? 세상은 사사시대라 한다면 교회는 바로 이 세상 속에서 룻의 노선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즉 룻과 같다. 룻을 통해서 아들을 낳아야 되는 것처럼 교회도 아들을 낳기 위해 있는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세상이 한다. 우리가 교회로 부름 받은 것은 사사(師士)안에서 부름 받은 것이 아니고 룻 안에서 부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집안, 그리스도의 계보는 왕가(王家)와 같다. 나라에는 장군도 있고 신하도 있고 백성도 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중심은 왕가이다. 임금과 왕비가 아들을 낳는데서 왕가의 혈통이 이어져 간다. 교회는 바로 그 왕가와 같다.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로 된 왕가와 같다.
교회가 세상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은 세상이다. 장군도 있고 변방도 있고 총리도 있다. 요즘 그런 것이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것과 교회는 다르다. 교회는 그저 왕비일 뿐이다. 아무 능력도 없지만 단지 아들만 낳는다. 왕비가 칼을 쓸 줄 아는가? 활을 쏠 줄 아는가? 아무 것도 못한다. 오직 한 가지 아기 낳는 것밖에 못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의 영의정이 아무리 높아도 왕비와 차원이 다르다. 왕비는 칼을 가진 자보다도 더 필요하고, 붓을 가진 자보다도 더 필요하다. 절대로 없으면 안 되는 자리다.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의 각 부분이다. 교회는 세상일을 하는 곳이 아니고 아들을 낳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재생산하는 곳이다. 그리스도를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이 필요한가? 룻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가난한 사람이 필요하다. 보아스에게는 룻이 필요했듯이 하나님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일하기 위해서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필요할 수 있다. 장군의 역할을 맡기려면 힘센 사람을 뽑아야 한다. 힘없는 사람은 칼도 감당치 못할 것이다. 관운장의 칼 청룡언월도를 마른 사람에게 맡기면 휘두르기는커녕 80근이나 되는 칼의 무게에 눌려서 꼼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칼을 맡기는 데는 9척 장신을 찾을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낳기 위해서, 자기의 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자가 필요하다. 교회가 바로 집과 같다. 하나님의 집이다. 거기서 그리스도를 재생산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재생산 하려는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룻으로, 나오미로 부름 받기를 원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대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길 어귀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무엇을 해야 좋을지를 몰랐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게 방황했습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중심 노선 안으로 부르셨습니다. 룻이 당신의 경륜 안으로 들어왔던 것처럼 오늘 우리를 베들레헴으로, 당신의 집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람 안으로 이끌어 내는 노선 안으로, 그리스도를 생산하는 노선 안으로, 그리고 또 다시 그리스도를 모든 인류 안으로 공급하는 노선 안으로 불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산제사로 주님 앞에 드려져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실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기를 원하고 인격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인격으로 하나님이 표현되기를 원하고 다시 공급되는 일에 우리 자신으로 쓰이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사들의 시대에서 룻을 부르신 하나님. 생명의 줄을 잇기 위해서 가난한 한 여자를 부르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 길이 지켜지기를 원하고, 우리를 통해서 그 길에서 생산되기를 원하고, 그 길에서 우리가 다시 공급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