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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서양철학 수용, 그리고 프랑스 철학의 위상
2018년도 조선대학교 우리철학연구소 학술대회,
2018년 5월 11일(금요일) 10:30-18:30. 조선대학교 경상대학 이주현관,
* 서양 철학의 수용(?): 지정학적 위상이 있을까?
- 철학은 포괄적이지만, 프랑스 철학은 철학의 (탈)영토화 작업 중.
우리나라 서양 철학 유입에서 프랑스철학의 위상이라는 과제를 두고 글을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제목인지 처음에는 잘 몰랐습니다. 서양철학 전반을 이야기하지 않고서 프랑스 철학을 말할 수 없고, 또 하나는 프랑스철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규명하지 않고서 우리나라에서 프랑스철학의 위상을 말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서양에서 말하는 철학이란 무엇인지, 그 중에서 어떤 것이 우리나라에 철학이란 이름으로 수입되었는지, 그리고 프랑스철학이 무엇인지, 그러고 나서 우리나라에서 프랑스 철학의 수입은 어떤 위상을 이루어졌는지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즉 고백하자면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 공부를 시작한지 마흔여섯째 해입니다. 서양 철학이 유입된 것을 해방 이후로 한정하기에는 한말에도 일제시대의 경성제대에도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런 수입이 주로 일본을 통해서 부분적으로 중국을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해방과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대학들이 서양의 제도를 본떠서 철학과를 만들고 서양철학을 시작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화는 학문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못했기에 일제시대의 철학의 연장이었다가, 미국을 통한 서양철학 수입으로 영미 철학이, 즉 일제의 잔재와 더불어 앵글로색슨 철학이 주류를 이루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프랑스철학이 소개 된 것은 주로 철학 이외의 불문학, 사회학, 교육학, 정치경제학에서 관심으로 이루어졌다가, 철학 쪽에서 제기된 것은 소련과 동구의 몰락 이후에 이정우가 ‘푸꼬’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였으며(1994), 그 다음으로 21세기가 들어서서 푸꼬 다음으로 구조주의와 라깡의 정신분석학, 데리다와 들뢰즈가 소개되면서 관심을 증가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는 철학도로서 항상 문제 거리였습니다. 먼저 서양철학자들의 관심을 봅시다. 탈레스가 자연의 생성에서 원질을 문제 삼았다고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뭣꼬?(ti esti)라고 물으면서 다양한 실증적 탐구를 하였는데, 저술이 없습니다. 플라톤은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바빌론의 현자는 황제에게 이 세상의 모든 문헌을 세 마디로 줄이면 ‘태어나서 살다가 죽는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플로티노스는 근원이자 유출인 일자와 합일을 강조하였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연 즉 신이 권능을 가지고 펼쳐서 만드는 이중성(naturante 와 naturée)을 다루었습니다. 루소는 자연과 동화가 삶이라 여겼으며, 프랑스 혁명가들과 그 후예들은 스토아학자들의 자연(숙명)에 따라 살라고 했습니다. 칸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피히테는 인간의 사명을 주제로 삼았습니다. 벩송은 그의 마지막 저서에서 우주는 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합니다. 들뢰즈는 자연의 준안정성이 새로운 생성(되기)을 만들며 철학자는 개념을 생산한다고 합니다. 어느 것이 철학을 진솔한 모습인지 아직 저도 모릅니다.
여기서 지나가는 이야기로 한 가지. 프랑스 철학에 관심이 많은 윤구병은 이런 말을 자주하곤 했습니다. 윤구병은 ��철학을 다시 쓴다: 있음과 없음에서 함과 됨까지(2013)��(21쪽)에서 primum vivere, deinde philosophari(프리뭄 비베레, 데인데 필로소파리) 즉 “생이 먼저이고 철학은 나중이다”라고 합니다. 벩송에게서 산다는 것이 철학의 중요성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플라톤이 철학한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한 것과 비교하면, 두 철학자 사이에 대조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 둘 사이의 철학적 사고와 삶의 사유에 대한 대비를 강의하신 분은 박홍규 선생입니다. 박홍규는 형이상학의 근본문제를 정지와 운동, 이데아와 플라노메네 아이티아로 두고 평생을 탐구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둘(플과 벩) 사이의 철학적 위상에서 차히가 있다고고 할 것입니다. “차히”는 비교나 대조로서 따져볼 수 있는 차원의 차이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히라고 한 것입니다. 물론 프랑스 사전에는 1820년대에 차이(différentiation)와 차히(différenciation)가 다른 경우에 쓰인다고 ��로베르 소사전��에서도 분명히 하였습니다.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을 쓰고 영어판의 서문을 써주면서 자기 글에서 차이는 수학과 물리학에서, 차히는 생물학과 심리학에서 쓰여진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서양철학에서 차히가 있다는 것을 강조한 박홍규는 플라톤을 평생 연구하면서도, 벩송이 당대의 실증과학으로 고대철학과는 다른 새로운 철학을 시도했다는 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로서는 형이상학의 두 종류 형상형이상학 대 질료형이상학의 두 극(極)에서 각각이 통일성을 갖는 개념으로 정신과 물질을 상정할 수 있고, 두 극의 중간참이라고 할 수 있는 위상에서 영혼과 신체가 마주 접근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논리상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정신과 물질은 정지와 흐름이라는 차원으로, 그리고 현실에서 가깝다고 여기는 영혼과 물질은 사유와 연장이라는 개념으로 다루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실의 표면에서 이 양자의 범위들이 겹치는 공간(환경, 위치)에서, 크게 보아 우주적 측면에서 정신과 물질로 다루어온 과정으로 여기는 것이 축소하여 인간에게 있어서 사유와 연장이 서로 뒤엉켜서 여러 공간들과 시간들이라는 개념들을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뒤엉킴에서 문제거리들이 발생하는데, 거기에서 문제에 해답을 찾는 경우와 문제거리를 해소해가면서 살아가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관점의 형이상학만이 이중성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의 이중성, 자연의 이중성, 단순성의 이중성, 단위(l'unite)의 다중성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두 극의 중간참에서 즉 표면에서 하나의 단위인 인간은 개인으로서 단일성(개체)이라 하지만, 개인의 내포성은 이중성을 넘어서 다중성일 것입니다. 들뢰즈가 프로이트를 비판하면서 한 마리의 늑대가 아니라 예닐곱 또는 무리의 늑대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표면에서 개인이라는 단위는 양극의 단위와 달리 거의 무한정의 질들을 포함하는 다양한 이질적 단위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과정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되기 전에 배운 다양한 학문들과 다양한 사람들의 만남에서 이루어진 인격성은 가족 내에서 이루어진 인격성에 덧붙여 졌다하더라도 가족형성체 속의 단위를 넘어서 다양성(다양체)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철학이든 개별학문이든, 사유이든 개별 삶이든, 인간은 부딪힌 문제거리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삶에서 유용, 실용, 편리 등을 통한 편안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자(humaniste)의 관점이 있는가 하면, 삶에서 가난, 질병, 고통, 고뇌를 해소하고자하는 평정의 길을 가는 인도주의자(humanitaire)의 관점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대상, 주체와 객체 사이에서 인간의 지배와 질서를 요구하는 (상품)자유주의자(liberaliste)가 있는가 하면, 인간으로서 자연과 사회에서 스스로 자율을 행사하며 자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유를 누린다고 여기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가 있습니다. 이런 분류가 불편하게 여겨지지만, 인간은 살아가면서 불편과 곤란하고 위협과 위험에 처한 상황을 벗어나는 노력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즉 누구나 문제거리가 생기면 해결하면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문제거리의 해결 또는 해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려 봅시다. 수학자 오일러(Euler, 1707-1783)는 많은 수학 문제를 여러 갈래로 풀어본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수학에서 한 문제를 50가지로 풀 수 있다고도 하였습니다. 철학사에서도 파스칼이 어린나이에 푼 어떤 수학 문제나 베르그송이 대학시절 푼 어떤 수학 문제가 수학사 연보에 실린 것은 이제까지 풀지 못했던 문제를 푼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풀어놓았던 방식과 달리 풀었다는 것, 즉 달리 생각하는 방식으로 풀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찌 수학만이겠습니까? 다른 이야기지만, 저는 어느 날 요리책 시리즈를 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계란으로 요리를 할 수 있는 것이 50가지가 넘었습니다. 들여다보니, 달걀을 껍질을 깨지 않고 삶고 굽고 등으로 여러 방식이지만, 깨어서 하는 것도 우리말로 수란(반쯤 익히는 것), 완전히 익히는 것,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서 익히는 것들, 따로 익히는 것들 여러 방식들이 있습니다.
언어에서도 해소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7천6백만 동포가 동일한 한 단위라고 할 수 있지만, 동일하지 않은 말투(parole)들을 따라 갈라놓으면 표준말들 이외에는 방언들이 되듯이 여러 말씀씀이가 있습니다. 물론 하나의 표준어는 필요하지만, 꼭 하나의 방식으로 가르치려는 것은 전체를 하나로 엮는 통일성을 사고하는 자들의 편리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력 또는 상층은 자기 말씀으로 행하라고 은연중에 강요하고 명령합니다. 다양성이 인정된다고 불편하다고 여기십니까? 사투리를 쓰는 가정에서 표준말을 쓴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상층의 언어로 하는 철학도 있고, 다른 말씀으로 하는 철학이 있다고 해서 무슨 탈이 날 것이 있겠습니까? 언어가 달라도, 중국어, 유럽어 사어가 된 희랍어 라틴어 산스크리트어라도 그 속에서 배우고 익히며, 그 속에서 그 시대를 깊이 있게 다루는 것도 학문의 중요한 사명입니다. 들뢰즈 표현으로 하나가 n 방식으로 소통되는 것이 독재적이고, n-1로 소통되는 것이 민주적이라 하였습니다. 논리학도 수학도 물리학도 하나로 통일을 이룬 것이 없음에도 통일과학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없는 것에 대한 희구이거나 또는 가설로서 상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먼저 있었다거나, 인간의 사고에서 선천적, 초월적 이라는 표현으로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고자 하는 사고에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들뢰즈/가타리가 상층의 하나를 인정하는 사고를 폴리스 사고라고 하고, 심층으로 퍼져가는 사유를 노마드 사유라고 하면서, 둘이 거쳐 하는 공간이 다르다고 합니다. 전자는 홈패인 공간을 가고 있고, 후자는 매끈한 공간을 퍼져 나간다고 합니다. 심층에서 새로운 길은 매끈한 공간처럼 거의 무한히, 무한정하게, 비결정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한정된 사고의 길을 점점 더 세밀하게 미시적으로 연결하여 복잡하면 할수록 그 길의 질서를 지켜야 한다고들 합니다. 다른 한편 아직 알려지지 않고 이리저리 가고 있는 사유의 길은 알려진 길보다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사람들은 부정하지 않습니다. 달리 생각하기는 단순히 철학사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철학함에 있어서, 철학자들은 크게 보아 세 부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물음을 던지기 전에 자명한 진리 또는 원리가 먼저 있다고 인정하고 그 범위와 범주에 맞는 사실들을 모아서 입증하여 논리를 전개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여러 실증적 사실들을 모아서 일반적 법칙을 세우고 그 법칙에 맞는 추상적 논리를 세우려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들 둘과는 달리 원리도 법칙도 먼저 앞세우지 않지만, 자연과 사물들에서 여러 경향들이 일정한 양식으로 반복하는 생성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생성의 부분들이 갖는 구체적 실증의 자료들을 한 양태들 속에 모와서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런 형성을 개별학문으로 보고, 이 학문들이 성립하는 근본적 토대로서 질료의 성질 또는 자연의 성질을 재규명하는 길입니다. 첫째의 것을 관념론 또는 합리론이라 부르고 둘째를 실재론 또는 경험론이라고 불렀습니다. 셋째를 생성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주목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앞의 두 학설들은 탐구와 전개 방식에서 먼저 있다는 것에 대한 규정으로 정지 또는 완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그리고 있다는 것 전체에 대해 하나의 통일성(또는 단위, 동일성)을 인정하는 경우이며, 이로서 이들의 설명과 해석에는 머리말과 같은 방법서설이 제기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에 비해 생성론, 즉 자연의 자기 발전론에서는 시작이 어떻게 될지, 전개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며, 기다려보아서 이루어지는 과정에 따라 구성과 도식 또는 표현과 지도를 달리 구별해야 할 것이기에 방법후설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마도 철학이 잡다한 것의 종합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면 잡다의 본성에 대한 자료와 탐구가 있고, 그리고 이들의 종합에 대한 새로운 방식은 나중에서야 구현하게 될 것 같습니다. 물론 서설이 하나를 전제로 해서 귀결로 답을 찾는 방식이었다면, 후설에는 전제도 질적 다양성이고 또 여러 길들에 대해 나중에 이론이 나온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양성을 내포한 다양체는 새로운 길이기도 합니다. 개념론에서도 철학의 시작은 놀람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예전에 제가 그 놀람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이 무질서한 것들에서 질서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로서는 그런 질서가 있기는 있는가? 예외 없는 것이 없다는데 ... 심지어는 그런 사회적 질서 자체가 비질서이며 억압과 폭력으로 만들어진 적폐질서는 아닐까? 그런데 그런 질서를 말하는 자들이 얼마나 자기들의 이기심과 과오를 감추기 위한 도구정도로 사용하고 있지 않냐고, 그러니 다른 질서가 있지 않을까요? 그 다른 질서도 질서라고 하면서 방향이 다른 질서도 또한 질서라고 했습니다. 두 개의 질서가 뒤바뀌고 있는 세상이라는 느낌인데, 들여다보면 종교심과 같은 하나의 질서가 데우스엑스마키나가 개입하듯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반대자들은 우연적 질서를 주장합니다. 그 우연적 질서 중에서 잘 만들어진 질서가 바로 한 질서라고 할 때는 전자의 주장자처럼 하나의 질서가 있다는 주장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어려운 점은 우연의 질서가 하나의 질서로 진행하는 과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마찬가지로 데우스엑스마키나를 영접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임시적으로 하나의 질서를 가정할 수 있고 그 질서에 맞지 않는 다양한 질적 차히들도 있습니다. 이런 주장에는 자연이 스스로 자기에 의해 자신을 만들어간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즉 하나의 질서의 주제자 또는 절대자 또는 신이라는 것을 상정하는 듯한 하나의 질서론자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한 질서론이 표면의 깊이로 탐구해 들어가면 갈수록, 한 질서란 차히를 차이들로 규정하거나 자기에 맞게 환원하려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n개가 각각에 관여하고, n개는 하나로 환원된다는 것이 착각이라는 것입니다. 근세 철학의 시대에도 만물은 하나의 통일체 또는 제일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지배적인데, 그것은 관념들 중의 관념인 선의 이데아가 하나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 하나가 선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 문제입니다. 그 하나는 어느 때도 선인 적이 없습니다. 그 하나가 종교적으로 얼마나 많은 순교자를 만들어 냈는지를 역사 속에서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나 진정한 순교자는 무한이 열려있다는 주장 때문에 로마 교황청에 잡혀 와서, 교리성에서 설득하다 하다가 안 되어 교황청 광장에서 산채로 태워서 죽인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 순교자인 부르노가 열린 무한을 이야기 할 때는 n-1의 세상을 확신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달리 살고 생각하기는 홈패인 공간을 지나가는 것과 매끈한 공간을 지나가는 것 이상으로, 하나에서 차이의 구별과, 다질 속에서 차히의 생산은 전혀 다른 길입니다. 질서는 어느 쪽이 더 질서인지를 묻는 것은 하나의 답이 있다는 수학적 논리에 빠진 것이고, 오랫동안 넷 중의 하나를 뽑는 사지택일 시험에 시달린 강박관념에 불과할 것입니다. 천안함의 폭발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달리 사유하는 자들에 대해, 자신들이 증거와 설명이 맞다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자들의 강박관념과도 닮았습니다. 이는 달리 말하는 자들을 제거하지 못하여 생긴 히스테리의 극한으로 파라노이아에 빠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들뢰즈/가타리 그런 류의 인간들은 항상 아버지밖에 모른다고 비판하면서 정신분석학 아니라 분열분석학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프로이트를 비판하면서 아버지 또는 유일신앙을 비판하고,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해서, 들뢰즈/가타리가 아무 권력이나 제국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파쇼라고 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모든 것을 부정하는 듯한 이 저자들에게 무엇을 목표로 삼고 있으며, 무엇을 반대할 것인가가 문제라고 합니다. 하나의 지배 또는 그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여기며, 그 하나에 속하는 자유란 상품자유주의자(le liberal)의 것이며, 두 철학자가 말하는 자유는 인성자유주의자(le libertaire)의 것입니다. 상층론자는 겸손한 척하면서 좀 알아듣게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해 달라고 합니다. 번역이 불가능한 것을 번역해 줄 수 없지 않습니까? 차이와 차히처럼, 달리 읽어보고 달리 생각도 좀 해보면 좋겠습니다.
* 철학사 도입
달리 읽기, 달리 생각하기, 달리 살아보기 등은 말로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의 철학 수용과 프랑스철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때(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 대학에서 교양필수이던 시절에 대학들은 철학개론을 교재로 편찬하였습니다. 그 교재들이 앵글로색슨의 영향 하에 있었던 것은 우리나라 철학사의 소개서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영미 쪽에서입니다. 럿셀(Russell, 1872-1970)은 영국 분석철학의 입장에서 철학사를 소개하면서, 그래도 그가 중국에서 철학 강연을 한 덕분에 제목을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and Its Connection with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1945��(최민홍, 집문당, 1980?)로 이름 붙였습니다. 19세기 영국 낭만주의에다가 시인 바이런을 한 장으로 할애 할 정도로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이 넘쳐납니다. 램프레히트(Lamprecht, 1890-1973)의 ��서양 철학사(Our philosophical traditions: A Brief History Of Philosophy In Western Civilization, 1955)��(김태길 외2, 을유문화사, 1963)는 영국의 공리론과 로크의 사유재산의 인정을 강조한 미국철학의 대표입니다. 프랑스 철학을 전공했던 이광래는 미국 철학자 스텀프(Samuel Stumpf: 1918-1998)의 ��소크라테스에서 사르트르까지(Socrates to Sartre: a history of philosophy, 1966)��(종로서적, 1983)를 번역하였는데, 프랑스 계몽주의를 완전히 빼버리고, 데카르트, 콩트, 베르그송,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 퐁티 등을 소개합니다. 그래도 미국 시각을 통한 소개입니다. 영국 제수이트 신부이며 철학사가인 코플스톤(Frederick Charles Copleston, 1907–1994)의 ��철학사(A History of Philosophy (1946–75)��(11권)에는 소련철학을 따로 제10권에 쓴 것이 주목할 만합니다.
다음으로 독일 쪽에서입니다. 독일 카톨릭 신학자인 힐쉬베르거(Johannes Hirschberger, 1900-1990)의 ��철학사Geschichte der Philosophie��(2권, 1949-1952)인데(강성위 역, 이문출판사, 1983. 1987), 독일이 루터파가 중심인데 네오토미즘 영향의 책을 번역할 수 있었던 것이 색다릅니다. 슈퇴리히(Hans Joachim Störig, 1915–2012)의 ��세계 철학사 Kleine Weltgeschichte der Philosophie, 1950��(1963개정판, 개정1999년 17판)(박민수, 자음과모음, 2008)이 있는데, 칸트와 독일 관념론, 네오칸트주의의 연속으로 독일철학의 강조입니다. 노르웨이 철학자들로서 군나르 시르베크(Gunnar Skirbekk, 1937-)와 닐스 길리에(Nils Gilje, 1947-)의 ��서양 철학사 1 2.(History of Western Thought: From Ancient Greece to the Twentieth Century, 2001)��(윤형식, 이학사, 2016)가 있는데, 다윈과 프로이트, 아인슈타인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앵글로색슨 철학사이면서, 북유럽의 입장입니다. 칸트 헤겔 맑스 등은 장(章)으로 소개되고 프랑스 학자들은 장의 소절(小節)로, 즉 푸꼬와 데리다를 한 소절로 다루면서 들뢰즈를 빠뜨렸습니다. ��그림으로 읽는 철학사(Atlas Philosophie 1991)��(페터 쿤츠만 외 2인, 홍기수 외, 예경, 1999). 독일에서 출간된 이 책은 한쪽은 도표로 다른 한쪽은 설명으로 되어 있는 특이한 철학사이면서 일반 철학사보다 깊이도 있는데, 프랑스를 소개 정도로 하는 앵글로색슨 위주인데, 프랑스어판에서는 현대 프랑스철학자들을 첨가하였습니다. 소설 같은 철학사로서 노르웨이 작가가 쓴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 1952-)의 ��소피의 세계(Sofies Verden, 1991)(장영은, 현암사, 1994)도 앵글로색슨 입장입니다. 여기에 다른 입장으로 쓰여진 철학사 하나를 더 소개해야 할 철학사가 있습니다. 군사독재의 고문의 후유증을 딛고 일어선 이을호가 오랜 기간을 노력하여 완역하였던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연구소 발행으로 ��세계철학사 12권��(부록1권 포함 13권)(이을호, 중원문화, 2010)가 있는데, 유물론의 시각에서 고대 바빌론에서 현대 제3세계의 각 나라 철학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서양 철학사 소개는 주로 앵글로 색슨의 철학사입니다. 그처럼 프랑스에서 나온 철학통사의 소개는 없습니다. 물론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미 또는 독일 현대철학을 소개한 여러 책들은 있습니다만, 프랑스 철학를 알려주는 간추린 소사로서 로비네(André Robinet, 1922-2016)의 ��프랑스 철학사(La (Philosophie française, 1987)��(류종렬, 서광사, 1987)와 그 다음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프랑스 철학사(1992)��가 강원대 이광래 교수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철학을 구분하는 방식에도 있습니다. 오랜 관습으로 유럽철학을 소개할 때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으로 구별하는 일제의 방식이 지배적이었는데, 이제는 앵글로색슨 철학과 라틴계 철학으로 구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일제와 미국의 영향 하에 120년을 지내다 보니 프랑스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수가 적은 것도 이유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대학의 교수 수에서도 프랑스철학의 전공자가 매우 적습니다.
* 프랑스 철학의 연구자들
프랑스철학의 수입이란 측면에서 소수의 연구자들을 보면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라 카톨릭 철학 또는 네오토미즘을 소개한 경북대학교의 이효상(1906-1989), 베르그송의 강독을 오래하여 창조적 진화 해설이 작품으로 남아있는 서울대의 박홍규(1919-1994), 데카르트 소개와 말년에 들뢰즈/가타리의 “안티외디푸스”를 번역한 숭실대의 최명관(1926-2007), 사르트르를 소개한 포항공대의 박이문(1930- 2017), 까뮈와 가브리엘 마르셀을 소개한 경북대의 이문호(1932-2001), 프랑스에서 철학, 신학, 문학으로 학위를 하고 교원대 국민윤리 교수를 한 변규룡(1934-), 미국에서 공부했지만 사르트르의 연구서로 <자유와 비극>(문학과 지성사, 1979) 남긴 경북대의 신오현(1938-), [철학과 소속은 아니지만 고려대 김화영(1942-), 상명대 박정자(1943-)도 사르트르 연구서가 있다.] 프랑스 구조주의와 현상학을 소개한 정신문화연구원의 김형효(1940-2018), 루방대학에서 유학하고 프랑스교철학을 소개한 남기영(1942-), 베르그송 사상을 인민 속에 실행하는 충북대 교수를 지내고 변산공동체를 이끄는 윤구병(1943-), 프랑스철학을 소개하고 고등학교 철학교육을 강조한 강원대 이광래(1946-), 그리고 “베르그송 연구”(문학과 지성사, 1985)의 유고집을 남긴 성균관대 김진성(1947-1984) 등이 프랑스 철학 수용의 첫 세대라 할 만합니다. 특히 김진성이 일찍 타개 하지 않았다면 2세대의 선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루뱅 대학에서 연구하고 온 충남대의 송영진(1950-)을 더해야 할 것입니다.
이쯤에서 세대 구분을 하는 것은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진 다음에 프랑스 좌파 철학의 관심이 높아지기도 하고, 그리고 경제학과 윤소영의 알뛰세 논문(서울대, 1982) 이후로 범위를 확장하여 맑스와 알뛰세에 대한 철학적 읽기가 이어졌으나, 실재로 프랑스 철학적 관심의 물결은 이정우가 1994년 ‘푸꼬’로 서울대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난 뒤입니다. 1995년부터 일간지와 학술지 등에 프랑스철학의 논의가 일기 시작하였고, 2000년부터 들뢰즈가 영미문학자와 사회과학자들에 의해 도입되면서 프랑스철학이 널리 회자되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2000년에 철학아카데미가 문을 열면서, 제도권에서 하지 못했던 프랑스 사상에 대한 강의들을 개설하면서 프랑스철학이 실질적으로 관심과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철학은 그래도 명맥을 유지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베르그송을 전공한 최우원(1955-)이 부산대학교에서, 조광제(1955-)는 독일 현상학에서 프랑스 현상학으로 확장하여 메를로퐁티를 철학아카데미에서 강의하였습니다. 그리고 김진성의 제자로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박종원(1956-)이 베르그손의 불씨를 살리고, 경희대 교수인 최정식(1958-, 최화)은 박홍규를 이어서 플라톤과 베르크손을 강의하고,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나온 이정우(1959-)는 철학아카데미에서 푸꼬를 넘어서 들뢰즈 그리고 현대철학의 제반문제를 다루고 있으며, 서울 시립대교수로서 차건희(1959-)는 프랑스 유심론과 레비나스를 다루며, 연세대 출신이면서 서울대에 자리 잡은 김상환(1960-)은 데카르트에서부터 현상학적 관심을, 게다가 혼자서 프랑스 현대철학 전반을 다루고 있었는데, ‘혼자서’란 서울대 서양철학과 16명교수 중의 단 한명이기 때문입니다. 알뛰세르로 서울대서 학위한 문성원(1960-)은 부산대에서 사회철학적 관심을 넘어서 레비나스 들뢰즈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 중이며, 삐아제를 전공한 문장수(1960)는 경북대에서 이문호를 이어서 프랑스 인식론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베르그송으로 프랑스에서 학위를 한 류지석(1960-)이 1960년까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철학과는 소속은 아니지만 가타리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인 윤수종(1960-)을, 사구체 논쟁, 학문공동체 수유너머의 주축중의 한사람이며 들뢰즈 소개로도 알려진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이진경(박태호, 1963-)을, 출판계에서 활동하며 들뢰즈와 네그리 등을 다루는 정치철학자 조정환(1956-)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나이 상으로 배열상 늦었지만, 들뢰즈 연구와 프랑스 현대철학 소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서강대 교수인 서동욱(1969-)도 있습니다.
2005년부터 프랑스 철학회가 발족하면서, 프랑스 철학에 관심도 점점 높아갔으며 젊은 연구자들이 생겨나서 프랑스 철학이란 영역이 이루어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만큼 프랑스 사상을 다루는 폭도 넓어졌습니다. 프랑스 유학자들이 주축이 되고 국내에서 연구자도 많아졌습니다. 베르그손의 황수영(1962-), 외국어대 박치완(1962-), 고려대 출신 홍경실(1962-), 푸코의 심세광(1963-), 들뢰즈의 박정태(1963-) 충북대교수이며 스피노자의 박기순(1965), 건국대 교수이며 라깡의 김석(1965-), 푸꼬의 허경(1965-), 숭실대 교수이며 랑시에르의 박준상(1966-), 파리1대학 박사이며 과학 철학 관심자인 이지훈(1966-), 베르그손과 시몽동연구의 김재희(1967-), 메를로-퐁티의 정지은(1967-), 바디우의 서용순(1968-), 미국 유학자이며 구조주의 연구자로 최원(1968-), 천개의 고원 번역자로 잘 알려진 김재인(1969-), 들뢰즈 학위자로 경상대교수인 신지영(1971-) 등등 여기서 미처 나열하지 못한 교수, 연구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학제간연구가 활발하여 이제는 철학과가 아니더라도 정치, 사회, 의학 문학, 언론, 영상, 회화,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프랑스철학과 연계가 있습니다. 학제간 관심을 가져야 할 분야 중에서 의학에서 히포크라테스를 전공한 연세대 교수 여인석(1965-)은 캉길렘의 번역자이기도 합니다.
일반인들이나 앵글로색슨 사고에 젖은 사람들이 프랑스 철학에 대한 이해의 미숙함과 오해로 인해 떠도는 이야기로 프랑스 철학을 잡화상이라느니 페스트푸트 정도로 여기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교육제도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서 옵니다. 한편으로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 졸업전(고등4학년)에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서는 필히 철학시험(바칼로레아)을 거쳐야 합니다. 말하자면 프랑스 고등학생들은 철학이 필수과목이고, 그것도 일 년 동안 논술을 위한 공부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 철학교수는 교수자격시험을 통과한 공무원입니다. 이런 제도에 대한 이해가 없이, 프랑스 국민이 전체가 관심을 갖는 프랑스 철학에 대한 이해는 어렵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철학이 대학에서 필수과목에서 제외되고, 대학생들이 선택과목으로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프랑스에서는 교육부가 철학 교과서를 만드는 것도 아니지만, 전문연구자들이 저술한 다양한 개론서, 철학소사전, 철학사, 철학자들의 중요저술에 대한 요약집들을 많이 출판합니다. 게다가 인식론을 위한 각 개별과학에서 각 분야의 전공자들이 소개하는 간편한 책들도 매우 많습니다. 이에 대한 소개로는 우리나라에 알마출판사에서 나온 시리즈가 있습니다. 제도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가 프랑스철학을 수용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 참조1: 프랑스 교육부 시행안(1970)의 내용
* 철학의 개념
인간과 세계 : 의식, 무의식, 욕망, 정념, 환상, 타자, 공간, 지각, 기억, 시간, 죽음, 현존, 자연과 문화, 역사, (14)
의식과 이성 : 언어, 상상, 판단, 관념, 과학적 개념의 형성, 이론과 경험, 논리와 수학, 생명의 인식, 인간의식의 구성, 비합리적인 것, 의미, 진리, (12)
실천과 목적 : 노동, 교환, 기술, 예술, 종교, 사회, 국가, 권력, 폭력, 권리, 정의, 의무, 의지, 인격, 행복, 자유, (16)
인간학, 형이상학, 철학. 으로 되어 있다. 중요 개념상으로 42개 인 셈이다.
# 참조2: 1970년 기준으로 철학사를 위해 공통으로 다루어야 할 철학자들을 제시한다.
플라톤* - 아리스토텔레스* - 에피규로스 - 류크레티우스* - 에픽테투스* - 아우렐리우스 - 아우구스티누스 - 토마스 아퀴나스- 마키아벨리 - 몽테뉴 - 홉스 - 데카르트* - 파스칼 - 스피노자* - 말브랑쉬 - 라이프니쯔 - 몽테스키외 - 흄 - 룻소* - 칸트* (20명 *8명) 헤겔* - 꽁트* - 꾸르노 - 키에르케골 - 맑스 - 니이체 - 프로이트 - 훗설* - 베르그송* - 알랑 - 바슐라르 - 메를로퐁티 - [83년 시안에서 사르트르 - 하이덱거 첨가] 이 시기에는 류크레티우스에 별표가 있다. (14명 *4명); 합하여 (34명, *12명)] 1990년에 푸꼬가 첨가되었다. 아마도 철학도 다른 학문처럼 소수화(미분화)되어 감에 따라, 많은 영역들이 탈영토화를 가속화 시켰다.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이 개별학문으로 성립했듯이, 사회학, 심리학, 인류학, 언어학, (정치)경제학, 법(률)학, 행태학, 환경학 등이 새로운 영역들을 확보하고 있다.
이 책에서(1980년 판으로부터) 줄인 5개 항목의 내용: 1권에서 2장 '인간학'과 8장 '인간의 운명'을 통합하였고, 2권에서 5장의 '쾌락과 고통'과 6장 '놀람(감동)'을 삭제했으며, 3권에서 4장 '논리학'과 5장 '수학'을 통합하였고, 4권에서 10장의 '행위, 존재, 가치'를 삭제하였다. 그리고 몇 항목에는 극히 일부분의 첨가한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철학소사전들을 내는 쪽에서는 “문명”의 항목을 제외하고 “문화”의 항목으로 대체하고 있다.
*프랑스 철학의 다양체: 철학들(복수)
철학이 무엇인지, 왜 관점의 차이가 있는지를 얼핏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서양 철학에 대한 소개와 이해가 편향되었다는 것을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프랑스와 달리 우리제도가 일제를 이어 미국식으로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철학사를 중심으로 유입된 방식을 보았는데, 겉으로만 보아도 앵글로색슨 철학 대 라틴계 철학의 차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철학사와 철학 개념들을 다루는 방식을 들여다보면, 그 구분은 차이가 아니라 차히가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철학을 다루는 방식으로 하나는 개념들을 중심으로 철학사를 탐구해 들어갈 것인지, 각 개념들의 위상과 그 연결 또는 확장을 들여다 볼 것인지 하는 개념론 중심의 이해가 있을 수 있고, 다른 하나으로 인류사에서 철학을 다룬 인물들을 중심으로 편년체로 다루면서 각 시대의 주요인물을 다룰 수 있습니다. 요즘은 지식의 고고학적 탐구 방식이라고 합니다만 이름만 거창할 뿐입니다. 언어학의 용어를 빌어서 보면 통시태와 공시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사적 관심을 위주로 전개할 것입니다.
어느 서양 철학사를 보든지 구술의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 시대로, 즉 단편이나마 남아 있는 문헌을 근거로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그들 말대로 서구 중심주의와 백인중심주의 사고라 합니다. 이런 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요즘 언어학에서는 220만 년 전에 경추가 바로 선 유인원에서 소리와 목소리를 구분했다고 하기도 하고, 고고학에서 빙하기 이전에 간빙하기에 이미 유목과 목축의 동반기로서 개의 가축화를 말하기도 하고, 권력의 힘을 제국이라 표현하며 그 영향권을 도구의 사용으로 본다면 후기 구석기에 제국이 성립하며(제국답지 않지만), 적어도 동기(銅器)의 공동화의 현상이 수천킬로까지 연결되는 아나톨리아 구리 장신구 시대에 권력이 실재하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젖혀두더라도, 계몽기 시대 이후에 철학은 목축과 농업, 보관과 분류를 하는 토기 또는 그릇 등이 인간 불평등을 가져왔다고 추론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연을 황폐화하고 미래의 인간의 모습에 대한 불안만큼이나 과거의 인간의 족적을 통해 새로운 길을 찾고자하는 노력일 것입니다. 들뢰즈 표현으로 탈영토화의 길, 또는 탈주선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탈주선은 지구를 떠나 새로운 행성(달이든 화성이든)에서 인공지능의 기계를 통해 그 자연을 개척하여 먹거리와 잠거리를 마련하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이보그 같은 인간을 상정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양이 철학사를 이성을 통해 본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간략하지만 다양하게 훑어보는 것으로 해야겠습니다. 탈레스 이래로 자연철학(또는 유물론) 대 존재론(또는 관념론)으로 대비 되는 시대를 지나, 자연과 인간을 종합적으로 사유한 사람은 아마도 소크라테스일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중요한 것은 외국과의 전쟁과 그리스 내 펠로포네소스 전쟁을 거치면서 아테네 제국의 성립과 몰락 시기를 살았고, 내부적으로 인민이 자각하는 시기에 청년에게 기대를 걸었던 인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작품을 남기지 않았기에 몇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상층에부터 심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들(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알키비아데스, 플라톤, 크세노폰, 파이돈, 메가라학자들, 퀴레네학자들, 그리고 중요한 퀴니코스 학자들입니다. 우리는 퀴니코스학자들 중에 안티스테네스를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일본과 미국의 영향아래서 퀴니코스와 스토아학자들에 관심이 적었고, 연구자도 거의 없었는데, 이제 정암학당에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상층의 관념론으로는 알려져 있다시피 고대의 플라톤에서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세기를 이어서 중세의 교부철학자와 신학자와 토마스주의자가 이어갑니다. 이들은 하늘 또는 저세상과 같은 위상에 완전함과 영원함이 실제로 있다고 합니다. 이데아든 에이도스든 천국이든 실재하고, 현실은 가상 또는 허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는 이 실재하는 세계를 이끄는 하나의 무엇이 있다고 하여, 플라톤주의자는 선의 이데아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는 부동의 원동자, 유일신앙자들은 창조적 신을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월을 소크라테스 죽음 이후 갈릴레이 재판까지 거의 2천년 계속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구의 상층주의자들은 심층을 도외시, 무시, 배제, 억압, 지배, 식민화 등으로 대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들에게 음모론에 빠졌다들 합니다. 그 음모론이란 말도 심층이 상층에 대해 저항, 항거, 항쟁을 실행하려는 욕망을 억압하려는 의도일 것입니다.
학문적으로 플라톤은 박홍규의 말을 빌면 정지와 운동 두 가지를 동시에 놓고 사유한 첫 철학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앵글로 철학사에서 플라톤이 정지의 철학자 이데아의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플라톤이 상층의 정지가 영원하고 동질적이고 실재하는 것이고 철학의 대상으로 에피스테메이며, 현실에서 운동하고 변화하는 것이 철학의 대상이 아니고 물체와 그림자와 같은 것을 다루는 것을 독사(doxa)라고 하여 배제하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플라톤은 선분의 비유를 보면, 독사에서는 물체가 여러 그림자들을 갖는데 그림자들을 보고 물체를 알 수 있듯이, 에피스테메에서는, 수학적 도형의 추론을 통하여 소위 말하는 도형(원圓)의 이데아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그의 사유에서, 그림자 같이 변하면서 이데아를 수용하지 못하는 아페이론(플라노메네 아이티아)을 버린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도 그의 관심은 상층이며, 괜히 아카데미아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말라고 했겠습니까. 그리고 원의 도형과 같은 이데아들이 각자 자족적으로 공존하는 이데아 세계가 있다고 합니다. 그 이데아의 총괄적 하나를 상정한 것이 선의 이데아인 것이 원과 같은 미학적 아름다움 때문이라고들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형상과 질료를 상층과 심층으로 놓을 수 있고, 그는 상층의 형상들 위에 부동의 원동자가 있습니다. 원동자는 영원하고 완전하기에 움직이지 않지만 타 존재들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료(hyle)는 플라톤의 아페이론을 닮았으나, 질료에는 처음부터 형상이 들어있으나 드러나지 않았고, 변화와 목적을 위한 활동에서 형상이 드러난다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 비해 현실적이라고들 합니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플라톤을 따르면서 단지 플라톤이 선분의 비유에서 끊어 놓고 유비적 관계에 두었던 것을, 정도의 차이에 의해 아래에서 위로 단계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둘은 고대철학 시대에서 형상론 또는 상층론의 중심철학자 입니다. 어째든 두 철학자는 플라노메네와 질료 등이 문제거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소위 플라톤주의자들은 무시했거나 배제한 것으로 보이며, 둘 다 상층(제국)의 철학에 기여한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시대적으로 아테네 제국은 일찍 무너졌으며,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랐던 마케도니아 제국도 무너지고,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에 의해 지중해 제국이 성립했습니다. 이들이 3백년을 이끌어온 과정에 대해, 그리고 학문적으로 5백년을 이어온 것에 대해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단지 로마시대와 겹치는 시대에 알렉산드리아 살았던 플로티노스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플로티노스는 이 완전자 또는 부동자를 퍼져나가는 유출자로 운동자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유출자(샘 또는 빛에 비유하는)는 하나이며 통일체이지만 무한한 권능을 가진 이질자들의 총체와 닮았습니다. 그 빛 또는 물줄기 멀리가면 갈수록 희박화 된다고 보았습니다. 스피노자와 벩송은 이 유출자를 생명이라 보았던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플로티노스를 플라톤의 아류로서 신플라톤주의자라고 하는데, 벩송은 그가 전혀 다른 철학적 사유를 한 것으로 봅니다. 플라톤에서는 상층에서 심층을 가는 길의 방법을 “티마이오스”편에서 그럴듯한 이야기(mythe 신화)라고 하고, 유비적으로 상층으로 올라가는 방법의 길을 “폴리테이아” 편에서 변증법(dialectique)라고 합니다.
그런데 벩송에 따르면, 플로티노스는 이것을 거꾸로 보았는데, 그럴듯한 이야기로서 일자가 물질로 향하는 변형의 길이 변증법적이고, 일자로 향하여 합일하는 것이 이야기(신화적)이라고 하는데 의식은 일자와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이며, 힘들고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그는 세 번했다나?). 내용을 지닌 일자가 실재적이고 구체적이며, 소위 형상이라는 것은 내용을 다 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물체라는 것이 그 설명입니다. 완전자는 운동하고 유출하면서 생성하고, 변화의 끝에서 물질로 화한 것은 자기의 운동과 힘을 소진하는 경우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즉 이데아는 소진된 껍데기에 속하는 것으로, 요즘 표현으로 상징 또는 기표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대 플로티노스의 재해석적 입장 사이에는 커다란 차히가 있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상계에는 완전자가 있다고 하는데 비해, 플로티노스입장에 따르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껍데기라는 것입니다. 물론 상층철학자, 토마스주의자, 주지주의자들은 플로티노스의 의미 방향을 플라톤과 같은 방향으로 두어 완전자와 일자가 같은 것으로 해석하였고, 이것은 앵글로색슨 철학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들과 달리 본 철학자는 스피노자와 벩송이며, 플로티노스의 일자는 심층이라는 것입니다. 이 심층을 생명, 욕망으로 보면 달리 사유하는 철학자들의 관점이 보입니다.
통시적 철학사 흐름에서 플라톤주의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양면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서양고중세의 2천년을 거쳐 왔습니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와 과학의 발달이 구세기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 만을 이야기 합니다. 천문학과 망원경의 발달은 저세상에 대한 관점을 완전히 바꾸어 놓습니다. 구시대의 잔재는 브루노를 교황청에 불러서 설득시키려했지만, 브루노는 우주는 열려있고 무한하다(이 말은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전설은 허구다)고 주장하다가, 교황청 광장에서 산채로 화형을 당했습니다. 순교자 아니 순학자. 시대는 변곡점을 넘어서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갈릴레이는 하늘의 등속도 운동이 지상에서 등속도 운동이라는 운동의 상대성을 주장하였습니다. 벩송이 철학사에서 첫 전환이 하늘의 운동이 빗금을 타고 지상에 내려왔다고 합니다(도표 하 참조). 이를 받아서 철학자로서 데카르트는 영혼과 신체,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을 이야기(discours) 합니다.
근세 철학은 이원론의 시대인 것으로 알려진 것은 오해일 것입니다. 신학 또는 관학철학 대 비강단의 철학의 시대일 것입니다. 13세기에 유럽 각 나라에서 대학이 세워졌지만 계몽기에 이르기까지 칸트를 제외하고 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가 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세 철학 200여 년 동안에 표면의 양면성이 갈라진 것을 어떻게든지 봉합하여 위계를 정하고 싶었다고 보여 집니다. 역시나 영혼 또는 정신의 우월성을 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물체 또는 신체에 대한 의미를 달리 보는 쪽을 일반적으로 유물론자로 봅니다. 흥미로운 철학자가 둘 있습니다. 하나는 스피노자이며 다른 하나는 루소입니다. 스피노자는 이원론이 아니라 양속성론(변용론)을 내세우며, 변용론을 생성하게 하는 것으로 자연 즉 신이라고 합니다. 이런 발언은 서양 철학사에서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1960년대 프랑스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신체의 수동성 또는 수용성에서 능동성 또는 되기(변용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의 근원에는 플로티노스에 닿아있다고 하기도 하고, 또한 생명사상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루소는 신에 매인 사고에서 벗어나, 숲에는 악마도 마녀도 없는 평온한 상태로 여기고 식물채집을 즐겼습니다. 이보다 지금까지 수난으로 여긴 수동성을 능동적인 정열로, 인간들 사이의 상보관계에서 동정이라는 의미를 연민으로, 자기 사랑을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 달리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루소와 동시대 흄은 관념 연합의 현상론에서 상층으로 통합에 회의를 품었고, 이에 깜짝 놀란 칸트는 이를 다시 상층의 하나로 통합하려고 했으나 스스로가 형이상학이 불가능하다고 하면서 대학과 제국에 협력하였으며, 들뢰즈 표현에 따르면 폴리스철학(정주적 철학)으로 하늘의 별과 같은 순수한 도덕심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우리 도표에 의하면 프랑스혁명과 칸트 이후에 넓게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요즘 근대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할 때는 근대철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곡점을 만든 근대의 다양성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일 겁니다. 푸꼬는 정신병과 의학, 지배와 감옥, 통제와 병원 등을 통해 다양하게 근대의 변곡점들을 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19세에는 부챗살처럼 펼친 개별학문들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벗어나는 시기, 즉 상층에서 표면이 아니라 표면에서 내부로 들어가는 시기입니다. 개별학문으로 수학에서 비유클리드 기하학, 군론이, 원자론에서 전자와 양성자, 입자설과 파동설이, 게다라 열역학과 전자기학이, 화학에서 물질의 자기변화와 결합 등에서 압축과 폭발이 있다는 점이, 그리고 생물학에서 계몽주의의 분류학을 거쳐서 변형론과 진화론이, 피의 순환이래로 의학에서 생리현상의 여러 회로들이, 그리고 사회학, 정치경제학, 인류학, 문법학에서 벗어난 언어학, 동물행동학, 여러 갈래의 심리학 등 여러 학문들이 제각기 자기 영역의 테두리를 만들면서 등장합니다. 이런 학문을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으로 나누는 것은 단순한 이원론일 뿐입니다.
철학은 여러 과학들이 태동하는 시기에 형이상학의 불가능을 넘어서고자 합니다. 한편으로 상층론을 새롭게 치장하여 복원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즉 다시 논리와 통일성의 길로 올라가는 길로 모색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여전히 철학은 학문의 왕이라는 또는 만학의 토대라는 자부심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은 19세기가 제반 학문들의 독립시기입니다. 고대에 귀족이 이데아론으로 중세의 신학자들이 종교로 갖는 지위를 이제 국가에 옮겨놓고 대학교수들이 차지하려는 형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상층의 권력은 현존 또는 실재하며, 그것을 옹호하는 정주적(구태) 세력이 학문하는 자들로 등장한다. 통일과학을 염두에 둔 대학인들로서 주지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아직도 인류가 위험과 위협에서 안전을 도모하며 편안을 위해 유용(공리), 실용, 편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humaniste). 그러나 인류에 대한 위협은 가난과 질병(콜레라, 페스트, 결핵)도 있으며 이를 해소하는 것이 인간다운 것이라 합니다(humanitaire). 이런 문제에 대한 고민은 상층론에 밀려 심층에서 아직도 잘 알려지지 않은 생명과 심리의 내면으로 파고 들어가고 있습니다. 20세기 말에는 심리측면에서 파라노이아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정신분석과 분열자 탐구를 중심으로 하는 분열분석은 이런 대비들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상층론이 헤겔의 방대한 철학적 사유에 힘입어 그리고 신칸트학파의 인지적 지식이론을 자료로 삼아 그리고 표면의 현상을 포함하여 내면에서 올라오는 현상까지를 포괄하려는 폴리스의 학문이 사회학, 인류학, 정치경제학, 행동학, 심리학을 포획해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다른 길이 있다는 것, 즉 달리 말하기에 이어서, 달리 살기를 주장하는 푸꼬의 말년의 탐색은 학문계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실행되었다는 점입니다.
다른 한편 심층론 또는 질료형이상학은 정지로부터가 아니라 운동으로부터, 형상으로부터가 아니라 생성으로부터 전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학문들이 늦게서야 움튼 것은 과학의 발달이 그리고 인간의 이성의 발달이 그 만큼 늦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야 원자 안으로 들어가 전자와 핵, 그리고 양성자와 중성자, 더 나아가 20세기에 미립자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생물학에서 세포의 내부를 생명체의 순환의 여러 방식들을 들여다본 것도 같은 시기이다. 그리고 분자로 그리고 DNA로 더욱이 자연산 단백질의 합성에대한 연구는 20세기 후반이 아니었습니까.
철학에서 심층론, 즉 깊이로 들어가는 학문에 대해 수학과 물리학뿐만이 아니라 생물학과 의학과 심리학에 관심을 갖는 철학자로써 벩송을 꼽는 것은 그의 생애시기에 내부로 들어가는 각 학문들(수학, 물리학, 생물학, 심리학)이 성과를 이루었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행운입니다. 벩송도 자신의 저서에서 하늘에서 빗금을 타고 내려온 것은 갈릴레이였고, 그리고 이원론의 시대를 거쳐서 표면에서 내부로(dedans) 들어간 사람은 자신이라고 하면서, 철학사 큰 흐름에서 자신의 위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앵글로색슨 사고에 젖은 이들은 그래도 어떤이는 철학사의 실증적 연관에서 중요한 사람은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이라고 하기도 하고, 프로이트는 자신이야 말로 뉴턴과 다윈 다음으로 획기적인 전환의 인물이라고 자서전에 썼습니다. 프로이트의 관심에서 내부로 라는 측면에서 무의식이 실재한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발견인데, 이런 문제거리를 먼저 제기한 이는 사실상 벩송입니다. 벩송은 무의식의 덩어리 즉 기억은 실재할 뿐만 아니라 현재에 그리고 현실에 닿아있다고 합니다. 벩송이 자신의 새로운 철학을 말할 때 이제까지는 외부에서 철학을 대하는 태도 - 주관과 객관 - 인데 비하여 그의 철학은 내부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는 플로티노스와 스피노자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런 심층에서 출발을 들뢰즈/가타리가 생성 또는 되기로 간주하여, 철학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를 다시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표면에서 심층으로 즉 안으로(dedans) 철학에 대한 반성은 벩송에서부터 이지만, 형상론 또는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을 중심으로 서술했기에 읽는 이에 따라서는 그가 주지주의의 우선성을 인정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왔습니다. 벩송의 글을 읽으면 형상론 또는 상층의 논리를 따라가면 선결문제 미해결의 오류에 빠지고, 그래도 맞다고 여기는 것은 착각이며 오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벩송이 고대철학에도 해박했는데도 그의 출판된 저술에서는 그 내용이 조금만 나오기에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스토아의 글도 읽었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흥미로운 것은 고르기아스의 3불가론을 심리학적으로 읽었다는 점입니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소크라테스의 이뭣꼬(ti esti)도 주요관심사라는 것이다. 이런 점을 알려주는 것은 그의 플로티노스 강의록인데 1999년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들뢰즈는 이런 관점을 알았기나 한 것처럼 국가박사 학위 주논문과 부논문을 쓰는 시기에 그리고 그것들의 발표와 동시에 ��의미의 논리(Logique du sens, 1969)��를 발표하였습니다. ��의미 논리��는 그의 관점에서 본 철학사이며, 첫 장부터 플라톤이 아니라 플라톤주의 즉 앵글로 색슨의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스토아의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괜히 철학사 전반을 조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이고자 합니다. 의미(le sens)는 기본적으로 “방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두 개의 다른 방향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면 들뢰즈는 벩송주의자임에 틀림이 없으며, 시대를 뛰어넘어 스피노자와 플로티노스, 게다라 스토아와 퀴니코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에게 맥을 잇고 있습니다. 그가 심리 질병에 관한 논의에서 가타리를 만나 상층에서 심층으로 가는 정신분석학이 아니라 심층에서 표면으로 그리고 새로운 생성으로 가는 분열분석학을 하게 되는 것은 의기투합만이 아닙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한 가지 말하자면, 원자나 입자의 우연적 결합(회오리, 빗금운동)에서 자유를 찾는 소박한 유물론자들에 비하여, 진솔한 유물론은 진동과 흐르는 물질(유동)에서부터 시뮬라크르를 생성하고 창발하며, 사유를 통해서 창안하는데서 자유를 실현하는 인성자유주의자(libertaire)의 방향을 잡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바슐라르는 자신의 철학을 물의 철학이라 부르고 벩송의 철학이 불의 철학이라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철학은 내부의 붉은 마그마에서 표면의 물과 토지, 그리고 그 위로 공기의 철학이 있다고도 합니다.
상층의 철학이 앵글로 색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심층의 철학은 라틴계에서 면면이 이어받고 있습니다. 이런 철학적 사유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우리가 잘 갖지 못한 것은 서양 고대철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점에 있기도 합니다. 플라톤 전집을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해준 세대가 박홍규의 다음 세대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프랑스철학을 누구도 형이상학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박홍규선생이 베르그송을 강독하면서 플라톤과 대척점에 베르그송을 두고, 정지와 운동, 결정론과 비결정론, 목적론과 생성론으로 대립적 구조에서 강의를 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그나마도 이런 담론들의 위상들을 구별하면서 논의를 할 수 있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서양철학사 수용이 짧아서 편향적이고 일방적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이제는 일방통행과 편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맛을 볼 시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한번 더 말한다면 서울대 서양철학과 16명 중에서 고중세 3명을 제외하고라도 그 많은 학자들이 앵글로 색슨에 경도되어 있으며 프랑스 철학 교수가 1명이라는 것은 우울한 현실입니다. 이것은 학문의 유입과정상 일본제국주의와 미국제국주의의 그늘에서 묶여 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입니다. 라틴계 철학연구자를 3명 정도를 뽑아서, 이제는 남북이 소통하는 과정에서고 폭넓고 깊이 있는 사유를 할 수 있는 장(場)이 열리고, 게다가 세계와 더불어 새로운 창안과 창발의 길을 열어가는 시대가 만들도록 노력할 때인 것 같습니다. (51PKA)
- 참조: 마실에서 천사흘밤 이야기 http://cafe.daum.net/milletune
* 다음페이지로 두 개의 도표가 있다.
표: 하 (상층 – 표면(이중성) - 심층) 상층(논리와 수학) 대 심층(생명과 영혼)
표: 가 생명(욕망, 권능, 영혼)은 자기에 의한 자기실현
# 류종렬 교수님의 “우리나라에서 서양철학의 수용, 프랑스 철학의 위상”의 논평문
- 도승연(광운대학교)
(51PLA)
다시 올림 22 0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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