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야고보서 1:1 >
야고보서의 주제는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한다는 것이었다. 온전하게 구비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미 어떤 기본적인 것이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그래서 여기는 기초적인 믿음이니 은혜라는 말들이 없다. 이미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더 온전하게 하려고, 더 구비해서 완비하게 하려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내용만을 보고 많은 비판을 가하는 사람들도 있어왔다. 루터는 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같은 책‘이라고 하며 무시하고 멸시를 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일 뿐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기 때문에 행위를 이야기하는 이 야고보서는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서는 야고보서대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귀중한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것이 이미 벌써 어떤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말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꼭 ‘지푸라기 같은 책’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시간엔 ‘구비하여 온전하게 되는 문제’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오늘은 ‘하나님과 주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는 제목으로 말씀 드리겠다.
야고보는 예수의 육신의 동생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인도하던 장로급에 속하는 인도자였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교회의 기둥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살아 계셨을 때는 육신의 형제들이 어느 정도 무시를 했다는 흔적이 보인다. 요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출세하길 원하시면 서울로 가보시지 왜 시골에 계십니까?’하는 식으로 빈정거렸던 일이 있었다. 이것은 결국 무시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라고 하면, 세상을 어떻게 뒤바꿔보려고 생각을 한다면 갈릴리 시골에 있어서야 됩니까? 사람은 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나면 제주로 간다는데 형님도 한 번 가보시죠?‘라며 호의적인 말이 아닌 비아냥거리는 말이었다.
그런데 부활 후엔 역시 사도가 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했을 때, 육신의 형제에서 영과 생명 안에서 종이 된 놀라운 전환을 보게 된다. 이것이 온전하게 되는 모습이다.
육신으로 태어난 것에서 끝나지 않고 거기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육신으로는 형제간이니까 무시할 만도 하고 멸시할 만도 했을 수 있다. 물론 예수님의 행동이 부적절했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시골뜨기 청년이 무슨 세상을 바꾼단 말이냐?, 유태교의 오랜 전통의 물결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는 이런 세상에서 형같은 사람이 이런 물결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하는 뜻이다. 개인적으로 절대적인 평가를 해서 무시를 하는 것보다 그런 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큰 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영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어려서 같이 자라다 보면 뭐든지 다 알지 않는가? 설사 커서 뭐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뭐, 그 녀석...’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벌거벗고 놀던 친구들은 ‘야, 그 녀석 대통령 되었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선지자가 고향에서 영접을 받지 못한다‘는 말이 속담처럼 흘러 내려오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의 육신의 형제들도 아마 어려서 같이 놀지 않았겠는가? 팽이치기(?)도 하고 혹시 때리고 싸우고 밀고 치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이니까 당연히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알지만...
저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은 저의 어렸을 때의 일을 잘 모르니까 그래도 ‘천하에 없는 목사님’이라고 생각하지만(모두 웃음) 시골에 가서 어려서 놀던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예수님도 매한가지이다.
여러분도 지금 여기서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백성이고 권속이고 이스라엘이고 장차 새예루살렘의 소망을 가지고 있는 위대한 사람들이지만 여러분들이 살던 시골에 가면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그러니까 형제들이 예수를 무시했다는 사실은 결코 무리한 일이 아니다.
다만, 육신의 형제의 입장이 바꿔지기가 더욱 어려운데 야고보가 이렇게 바꿔져서 자신을 종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이 놀라운 변화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지극히 온전하게 된 모습이다.
육신의 일과 영의 일! 이것은 서로 노선이 다르다. 같은 노선에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노선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 노선을 전환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알이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일이 같은 혈통 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도 신기한데, 이것은 계통이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번데기와 나비는 서로 모양은 다르지만 한 계통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지나면 번데기는 나비가 될 수 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나비와 새는 전혀 노선이 다르니까 죽었다 다시 깨어난다 할지라도 번데기가 다시 새가 될 수도 없고, 새의 알에서 나비가 나오는 법도 없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셨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하겠다는 말을 기히 여기지 말아라’라고. 이것은 두 노선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근원도 가는 목적지도 다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형제 되었던 야고보가 가지고 있었던 혈통과 지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는것은 육신상으로 보면 사람은 그 사람이지만 이미 다른 계통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사람이 되었다.
우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다. 육신이 어떻게 발전해서 이렇게 되었냐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다른 생명이 흘러 들어와서 이런 사람이 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육신의 계통과 일을 요한복음 1장에서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라고 표현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계통이다. 아담 안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아서 손자가 되고 하는 육신의 혈통이다. 이런 속에는 혈통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혈통 속에는 육정(의지, 감정)이라고 하는 것이 혈통-육신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육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서 또 사람의 뜻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장 상층구조에 있는 것이 사람의 뜻이다. 제일 밑바탕에 있는 것이 피라면, 그 위에는 감정(육정)이란 것이 있고, 그 위에는 사람의 뜻이 있다. 이 사람의 뜻에서 조직이나 제도가 나온다. 이런 것을 가지고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만들어간다.
단순히 혈통적인 존재들은 단지 혈통 때문에 관계가 된다. 육정의 관계 속에 있는 것은 육정의 관계 속에서만 관계가 된다. 사람은 그보다 조금 더 낫기 때문에 사람의 뜻이라는 것 때문에 친구도 되고 원수도 된다.
짐승들은 특별히 원수도 없고 특별히 친구도 없다. 생긴 것이 같으면 친구가 된다. 같은 피니까, 같은 혈통이니까 개는 개들끼리 만나면 친하고 소는 소들끼리 만나면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단순히 혈통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친해지지 않는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친해지지 않는다. 어떤 감정과 의지가 서로 통해야되는 경우가 있고, 그것도 한 계단 올라가면 사람의 뜻과 생각에 의해서 사람의 관계가 형성된다. 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수록 더 정신화되고 의지화 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그것과 정 다르게 영의 계통, 인격의 계통은 또 다르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안에 육신도 있고 영도 있다는 개념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것을 말한다. 어차피 인간 속에 영이 있든지 육이 있든지 그것은 어차피 인간이다.
영의 생각이니, 육의 생각이니 하더라도 어차피 사람 속에서 나온 것이니까 사람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영의 계통’이라는 표현을 할 때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거룩이라고 표현한다. ‘거룩하다’는 ‘구별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에서 구별된 다른 계통이라는 뜻이다.
아담이라는 사람을 만들 때 흙으로 만드셨다. 거기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산 혼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도 계통이 두 개 있다. 흙이라는 계통과 생기라는 계통이 있어 서로 다르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구별된 것은 하나님과 통하도록, 교통이 되도록, 하나님이 연관을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육신과 하나님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육신에게는 어떤 교통을 할 수 없다. 짐승은 육신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교통이 안 된다. 그런데 사람은 교통이 된다. 다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이것이 헝클어지고 망가지고 타락되고 변절되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교통을 하려고 해도 정상적인 교통이 되지 않는다.
수신기가 고장이 나면 전파 수신이 잘 되지 않는다. 요즘은 다 TV도 좋고 라디오도 좋고 해서 구별하기가 힘든데 옛날에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들으려면 상당히 어려웠다. 잡음이 상당히 많이 나고 잘 나가다가 딴 소리가 나는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기계가 나쁘기 때문에 전파가 잘 교통되지 못해서 우리에게 포착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담은 꼭 그렇다. 어떤 때는 들리는 것 같고 또 어떤 때는 안 들리는 것 같다. 또 어떤 때는 다른 것으로 왜곡되어 들리기도 한다.
우리가 마이크를 사용해도 내 음성 그대로 나갈 수도 있고 다른 음성으로 나갈 수도 있다. 우리가 버스를 타서 안내방송을 들어보면 코맹맹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분명히 차장은 코맹맹이가 아니지만 앰프가 싸구려여서인지 코맹맹이 소리를 낸다. 그것은 변질된 소리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만난다 하더라도 마치 그렇게 코맹맹이 소리 하는 사람처럼 된다. 전혀 엉뚱한 짓을 하게 되고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된다. 그것이 가장 역력히 드러난 곳은 종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교신한다고 하는 그 종교 안에 가 보면 너무나 엉망진창이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많다. 변절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최선과 진실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엉망진창이다. 그것은 결국 기계가 나쁘기 때문이다. 육신의 계통에서 나온 것들은 다 이런 변질을 가지고 오기 때문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예비하셔서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그 길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셨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무생물에서 생물로 생물에서 인격으로 인격에서 영으로 이런 식으로 어떤 차별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교통하기 위해서 우리의 인격을 주의하시고, 십자가 안에서 새로 태어난 한 인격을 필요로 하시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인격만이 하나님과 교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까 공장이 아~주 깨끗한 곳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먼지가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반도체를 만들 때 그 안에 먼지가 들어가 버리면 잡음이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맑은 공기를 위해 공기 청정기를 설치해두고 마스크를 쓰고 가운을 입고 머리털 하나도 날리지 않도록 해서 반도체를 생산해낸다고 한다. 그래야 순도가 좋은 반도체가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그래야 소리가 제대로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십자가로 말미암아 죽고 다시 난 것, 그 사람이 진실하게 사람의 자리에 있는 것, 그것이 아마 순수한 반도체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무엇이 들어오면 - 전기가 들어오면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만들어서 음성이 되도록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순도가 순수해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실 때 왜 이스마엘은 안되고 꼭 이삭이어야만 했던가? 하는 이유가 바로 반도체와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로 가셔야만 하셨던가? 우리는 왜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가?’하는 모든 이유가 다 거기에 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과 교신이 되고 하나님을 통역해내려면 그 반도체가 순수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갈고 닦고 금욕도 하고 명상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거절하셨다. 사람의 노력을 통해서 순수해지다든지, 깨끗하게 된다든지, 진실하게 되는 것을 다 거절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가 진실해지거나, 거룩해지거나, 깨끗해지더라도 그 속은 도로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또 그만큼의 교만이 자신 속에서 나오게 된다. 내가 내 노력을 통해서 진실해졌으면 내가 진실해진 만큼 난 또 그만큼 교만해진다. 내가 순수해졌으면 순수해진 것만큼 더 교만하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도저히 쓰실 수가 없다.
그래서 이스마엘을 거절하시고 이삭을 선택하셨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난 그리스도를 택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을 위해서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도 그렇다. 분명히 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이렇게 번역되어 나가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저렇게 번역되어 나간다.
종종 이런 경우를 볼 때가 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얘기를 할 때 ‘목사님이 이렇게 얘기를 하셨다’라고 얘기를 할 때가 있는데 자세히 들어보면 내가 한 얘기가 아닐 때가 있다. 분명히 내가 한 말이 아닌데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자기에게 그렇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그렇게 들려왔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저한테 직접 듣기 전에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모두 웃음) 직접 듣기 전에는 남의 말을 절대 들으면 안 된다.(모두 웃음) ‘남이 그러더라’하는 말을 들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사람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에 따라서 상대방의 말을 흡수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누구 이야기를 듣고 와서 ‘누구누구가 이러더라’라는 얘기를 100%들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 주관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더라’는 말 자체도 전달하는 사람 자신의 말이다. 자기 말이 아니면 전달하겠는가? 자신의 말이니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사람 자신의 말로 알아들어야지 그 전의 사람의 말로 알아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괜히 멱살 잡고 싸우게 된다. 여러분도 혹시 내게 와서 멱살 잡고 싸우자고 할 사람이 있을 지 모르니까 미리 이렇게 발표를 해 두는 것이다. (모두 웃음) 분명히 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난 내가 한 말을 알고 있는데 다르게 말하기 때문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자기대로 듣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가 짖는 것을 보면 아무리 들어봐도 ‘멍멍멍’이란 소리로 들린다. 그런데 미국 사람들 귀엔 ‘바우와우’로 들린다. 아마 어려서부터 뭔가 입력이 되어있어서-어른들이 개가 짖을 때 ‘바우와우’라고 얘기했겠죠? - 그 다음부터는 개가 짖으면 ‘바우와우’로 들리는 것이다. 우리에겐 ‘멍멍’으로 들리는데... 지극히 단순한 것이라도 이렇게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 자신과 교통해서 당신을 나타내야 하는데 당신이 ‘멍멍’했는데 사람들이 나가서 ‘바우와우’라고 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죽고 다시 난 그 생명을 필요로 하고 계신다.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필요로 하고 계신다. 왜 꼭 100살에 나야되며, 왜 꼭 할례를 받고 나야되는가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이 일은, 이 계통은 전적으로 하나님으로 부터 시작한 계통이어야 한다. 이스마엘은 분명히 하나님의 목적도 거기에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방법도 거기에 섞여 있었다.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아브라함의 방법을 택했다는 말이다.
오늘날 그런 경우가 많지 않은가? 하나님의 목적과 일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그것은 이스마엘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바로 그러하다. 목적은 하나님의 목적인데 세상의 방법을 쓴다. 그러면 일은 잘될 것 같은데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섞여 버리면 이스마엘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창대해지긴 하나 그것이 순도가 틀리기 때문에 다른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스마엘이 광야로 내침을 받았을 때 하갈이 슬피 울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울지 말아라. 내가 너로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실재적으로 이스마엘은 큰 민족이 되었다. 그러나 크긴 하지만 순도가 없다. 순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나올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으로밖에는 이룰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세상의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다. 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방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잘 되는 것 같은데 뒤로 가 보면 문화만 나와버리고 만다.
구라파, 미국 등 기독교가 지나간 많은 나라들이 그러하다. 마지막 남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기독교 문화만 남는다. 다시 말하면 이스마엘이다. 창대해졌다. 지금 10억 이상의 인구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되었으니까 얼마나 커졌으며 창대해졌는가?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무리 창대해도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없다. 이삭은 비록 적지만 그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이 계통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말미암아야 한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이렇게 말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야고보가 육신의 형제간에서 어떤 다른 세계로 바꾸어졌기 때문에 자기의 형님을 자기의 주님이라고 한 것이다. 육신으로는 형님이 아닌가? 우리가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종과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 된 야고보는’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주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이라고 말했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다른 세계라는 말이다.
물론 집에서는 틀림없이 ‘형님!’이라고 했을 것이다. 밥을 먹으면서도 ‘주님!’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 어머니도 계시는데 어머니 앞에서 형님을 보고 주님이라고 했겠는가? 어머니 앞에서는 형님은 형님이니까 형님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공적으로 나올 때는 자기는 종이었다. 이것은 다른 세계로 나오기 때문이었다. 육신 안에서가 아닌 영 안에서, 쉽게 말하면 인격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도가 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도 물론 사도가 될 때 이런 원리 안에서 사도가 되는 것이겠지만 특별히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야고보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다. 다메섹에 가다가 예수를 만나서 변화된 사람이 되었고, 또 베드로 같은 사람들도 예수를 따라다니다가 제자들이 되었다. 하지만 야고보는 한 집에서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서 모든 것을 다 아는 동생이었다. 그 동생이 자기 형님을 주님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다는 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보다 더욱 그것을 분명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를 하나님이 이렇게 쓰신 것인지 모르겠다.
육신의 관계에서 교회의 관계로 교회의 관계에서 인격적인 관계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영적인 관계로 우린 이렇게 늘 단계를 바꾸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적인 관계는 부르심 안에 있는 관계이다. 그런데 인격적인 관계는 본받음 안에 있는 관계이다. 그 분이 우리의 본이 되는 관계이다. 영적인 관계는 변화된 관계이다.
그러니까 우린 이런 단계에 오면서 옛 모습이 없어지고 만다.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육신은 그대로 있는데 다른 세계로 와 있다. 오늘 우리가 육신적으로, 시공간적으로는 송현동 빌딩 4층 대구교회라고 간판을 붙여놓은 이 자리에 와있다.
그런데 영 안에서 우린 여기 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 안에 와 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교회 안에 와 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이렇게 저렇게 만난 사람들이지만 우리가 교통하게 될 때에는 다른 것으로 교통하게 된다.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생명 안에서 교통하고 있다. 이것이 교회 생활이다.
천주교에서는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신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신부’라는 말이 ‘영적인 아버지’라는 뜻일 것이다. 또 ‘인격적인 아버지’라는 뜻도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신’자를 써서 ‘신부’라고 말했을 것이다.
사도바울도 디모데를 향해서 말할 때 ‘내가 복음으로써 너를 낳았다’고 했다. 육신의 아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했다. 이것은 육신의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처음 창세 때부터 이런 것을 예정하고 있었다. 맨 처음 사람이 지어지기 전에 천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중심이 천사에서 사람으로 바꾸어졌다.
가인이 분명히 형이었지만 혈통이 아벨로 바꾸어진다. 그리고 형인 이스마엘에서 동생인 이삭으로 바꾸어진다. 그리고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에 르우벤은 장자였다. 그렇지만 이 장자권은 유다와 레위와 요셉에게로 분산되어 갈라지게 된다. 왕권은 유다에게로, 제사장권은 레위에게로, 축복은 요셉에게로, 이렇게 세 가지로 갈라지게 된다.
또 아론과 모세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아론이 형이고 모세가 동생이지만 모세가 하나님과 더 가깝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그것을 다시 번역할 때 아론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는 분명히 아론이 형이었지만 모세가 그의 주였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다. 그러나 그 왕은 다윗으로 바꿔지게 된다. 아담은 그리스도로 바꿔졌다. 신약시대에 오면 사도행전에 보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모였다.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열 둘이라는 것 속에 자신의 경륜을 넣어 놓은 것과 예수님이 열 두 명을 택한 이유를 알았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의 구도 속에 열 한 개로는 안 된다. 성막이 네모났기 때문에 네모난 성곽을 사방으로 지키려면 열두 지파가 필요하다. 새 예루살렘도 역시 열 두 문으로 되어있다. 모든 것이 열 두 개로 되어있다. 그런데 사도들이 열 한 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 때 베드로가 일어서서 ‘우리가 열 둘이 아니냐? 그런데 가롯유다 한 사람이 배반하고 갔다. 그래서 열 한 명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 중 한 사람을 천거해서 제비를 뽑아서 우리 중 모자라는 한 사람을 채우자.’라고 담대히 말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맛디아’란 사람은 그 날 한 번 나오고 그만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열 한 명으로도 되는가? 계시록에 보면 새 예루살렘의 기초석에 열 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거기에 가롯유다가 들어가 있겠는가? 물론 없지 않겠는가? 거기엔 누가 들어갔을까? 바울이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전혀 사람이 생각할 수 없었던 다른 한 사람이 나타남으로 말미암아서 열두 사도가 되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만들었던 맛디아는 ‘바울’로 바꿔지게 되었다.
이 원리는 아브라함이 만났던 멜기세댁에 의해서 증거된다. 사람들은 아론이라는 혈통을 가지고 제사장의 혈통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히브리서를 보면 ‘아론은 자기가 낳기 전에 이미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이 제사장으로 섬기고 십일조를 드렸던 사람은 멜기세댁이다. 그러니까 아론보다 더 높은 자가 멜기세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는 ’족보도 없고 난 날도 없고 죽은 날도 없다.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다‘고 표현했다. 이것은 전혀 다른 계통에서 왔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의 권한은 바로 이 멜기세댁의 족보와 계통을 따른 것이다. 아론과 같이 육신적이고 세상적이고 종교적인 제도에 의해서 제사장이 된 것이 아니고, 멜기세댁과 같이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제사장이라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서 히브리서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서 우린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이미 다른 계통을 준비하고 있었고 거기서 비로소 완성이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그는 보이는 것이고, 시간적이고, 육신적인 것이지만 다음에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먼저는 육신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부활한 몸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 부활한 몸 안에서 완성이 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거두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원한 것으로 거둔다.‘ 거두는 이것에 완성이 있다. 우리가 나무를 가꾸면 열매를 거두는 것에 완성이 있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인간도 육신으로 타고난 이 인간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열매를 맺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이 육신 안에 있는 인간을 드려서 썩지 아니하는 것으로 바꿀 때, 욕된 것을 심어서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꿀 때 비로소 완성이 생긴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거기서 완성된다. 육신으로는 완성이 불가능하다.
우리 나라에서도 유명한(?) 사람 중 ‘완전한 남성, 완전한 여성’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는 완전한 남성이었다. 그런데 완전한 여성이 없어서 새로운 인류의 씨를 퍼뜨리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는 실패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완전한 남성이 다시 와야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둘 째 아담이 아니고 셋 째 아담이 와야한다는 것이다. 그 셋 째 아담은 완전한 남성이다. 그 완전한 남성에다 완전한 여성이 있어야 하는데 그 완전한 여성이 한반도 어딘가 있었던 모양이다.(모두 웃음) 그래서 둘이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무죄하다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일본에서 선교를 받아서 한국에 나와서 신문 보급을 하고 있는 어떤 여자를 만났다. 그래서 집에 와서 얘기를 해보니까 그 아들은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확신한다고 했다. 완전한 남성과 완전한 여성이 결혼해서 낳았으니까, 무죄한 사람끼리 결혼해서 낳았으니까 무죄하다는 것이다. 개와 개가 만나서 낳았으니까 ‘개새끼’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다.(모두 웃음) 말은 맞는 말 같은데 육신 안에서 완성을 생각해서 그렇다. 사람은 육신 안에서 완성되도록 되어있지 않고 인격 안에서 완성되는 존재이다. 그것을 몰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아도 그런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여간 육신을 좇아가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완전한 육신을 찾게 되었던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람은 원래 죽지 않도록 지어놓았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종교 안에 들어오면 죽지 않는다’라고 한다. 참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면 모르지만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또 많다. 바보 멍청이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도 공부 많이 한 사람들도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도 따라가는 것을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은 정말 요지경 속이다.
인간은 육신으로 완성될 존재가 아니다. 인격 안에서, 영 안에서 완성될 존재이다. 우리가 만일, 육신 안에서 완성된다면 인간은 다 실패자이다. 어떤 사람도 실패자가 아닐 수 없다. 창세기 5장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되어있다. 그것은 700, 800, 900살 먹고 다 죽었다는 것이다. 왜 죽었다는 말을 열 번이나 계속하는가? 모든 사람들이 다 죽는다는 말이다. 성경에서 열 번은 만수이다. 다 찼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는 말이다.
육신 안에서 모든 사람은 다 죽는다. 죽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원래 육신으로는 죽도록 만들어졌다. 사람만 유독 죽지 않도록 만들어졌겠는가? 풀 한 포기나 개 한 마리나 사람이나 다 같은 물질이다. 그런데 어떻게 풀 한 포기는 났다가 죽게 되어있는데 사람이라고 났다가 죽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그 원리가 틀지지 않은가?
육신으로서의 인간은 났다가 죽도록 되어있다. 그런데 났다가 죽으면 끝인데, 망하는 것인데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거두고 계신다는 것이다. 봄에 벼가 심어져서 가을이 되니까 누렇게 되어 지푸라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주인은 거기서 열매를 거둔다. 벼이삭을 거둔다. 그러니까 그 벼 잎은 벼이삭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지 벼 잎 자체로는 도저히 완성될 수 없다. 벼 잎은 결국 썩어질 것이다. 그 썩어질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둔다는 말이다.
사람도 이 썩어질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둔다.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어야지 내 인간이 완성된다. 사람이 아무리 살아봐도 천 년, 만 년 살겠는가? 물론 인간의 수명이 120세까지 살 수 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사람 중에도 120살을 넘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120세를 먹으나 20세를 먹으나 매 한가지이다.
시간은 똑같은 시간이다. 그러니까 조금 더 사나 조금 덜 사나 매 한가지이다. 진시황은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오래 살까하고 승로반에 이슬을 담아 먹어보기도 하고, 삼천 동자를 보내서 산삼을 캐러 보내기도 했다.(한반도 백두산인지, 한라산인지 모르지만 한반도라는 말이 있다.) 그래도 역시 다 죽었다.
육신으로는 절대로 완성이 되지 않는다. 육신에서 열매가 나와야한다. 육신적으로도 아들을 낳아야, 자녀를 낳아야 계승을 하지 않는가? 나 자신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아들로 계속해서 계승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썩을 것이 아닌가? 아무리 대대를 물려 내려가는 집안이라 할지라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영원히 끝나지 아니할 것, 썩지 아니할 것, 그것으로 열매를 맺어야한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바라는가? 그 썩지 아니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썩을 것뿐이라면 인생이 허망하다. 거기서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다. 만일,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사람에겐 썩을 것밖에 없다.
썩을 것을 위해 열심히 하다가 마지막에 가면 썩을 것밖에 남지 않으니까 인생이 마지막에 허무해진다. 무엇인가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엔 공수래 공수거로 가니까 인생은 허무하다.
그러나 바울은 ‘우리 육신은 후패하나 우리 속 사람은 날로 새롭다’고 말했다. 이것은 열매가 자꾸 자꾸 익어간다는 뜻이다. 인간은 났을 때, 젊었을 때는 희망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희망이 점점 더 없어진다. 마지막에는 아무 것도 없어진다. 어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롭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부활하셨다. 그러니까 그는 영원한 열매를 거뒀다. 우리도 장차 없어질 우리 인생을 들여서 없어지지 아니할 인생을 거두는 것, 이것이 참으로 인생을 옳게 사는 것이고 잘 사는 것이다.
썩을 것을 심어서 다시 썩을 것을 거둔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썩을 것을 심어서 썩지 아니할 것을 거두고, 욕된 것을 심어서 영광스러운 것을 거둘 때 이것이 인생을 잘 사는 길이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렇게 거두어진 열매, 이렇게 완성된 것이 전파될 수 있는 것이 재생산이 가능한 것이고, 온 인류에게 시공간을 초월해서 다 전파될 수 있는 그런 열매가 되게 된다. 씨가 전파되기 전에 씨가 나오기 전까지는 그 식물은 그 자리에서 옮길 수가 없다. 다른 데로 옮겨갈 수가 없다. 그런데 씨가 나오고 나면 아무데나 뿌릴 수가 있다.
제주도에서 생산된 씨를 한라산에 뿌릴 수도 있고 미국에 뿌릴 수도 있다. 온 세계에 다 퍼질 수가 있다. 그러니까 재생산과 전파가 가능한 그런 생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그냥 그 자리에 있다가 그 자리에서 죽을 그 운명에서 그 자리에서 온 세계 만방으로 퍼질 수 있는 생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온전케 되는 길이다.
야고보서의 주제는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이다. 창세기 1장을 보면 우리가 육신에서 인격으로, 영으로,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인격으로의 과정으로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온전하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아, 이 사람은 분명히 육신으로 나서 한 때는 예수를 멸시하던 사람이었지만, 다시 말하면 영원한 것, 온전한 것을 모르고 멸시하던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인가는 이 사람이 온전한 것을 알고 그것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썩을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썩지 아니할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욕된 것밖에 모르는 사람이 영광스러운 것을 알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이 사람은 온전하게 된 사람이 아닌가?
나무가 열매가 되었으면 온전한 것이다. 열매가 되었으면 전파될 수 있다. 전파될 수 있으면 온전한 사람이다. 그것이 참 사람이다. 그러니까 악한 이름으로도 전파되고, 선한 이름으로도 전파가 되겠지만 결국 전파가 될 때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게 된다. 만인에게 나눠줄 수 있고, 교통할 수 있고, 하나될 수 있도록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기술자가 될 수도 있고 영적으로 높은 수준에 있는 사람이 될 수 도 있고 여러 가지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완성된 사람인가? 그것은 만인과 교통할 수 있는 사람, 만인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완성된 사람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나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든 사람과 하나되지 못했다. 더욱더 좁은 세계밖에는 가질 수 없었다. 내가 10년을 수도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었거나, 남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서 독특한 사람이 되었다면, 그럴수록 난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오늘 아침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라’하신 말씀을 묵상해보았는데 이 말씀이 굉장히 귀한 말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오라고 하려면 상대방이 따라갈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따라올 수 없는 입장에 있는데 따라오라고 할 수는 없다. 내가 저 하늘 높이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올라오라고 한다면 약올리는 것이다.
‘따라 오라’는 말은 정말 복된 말이다. 누구보고 따라오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은 다 갈 수 있다는 말이다. 만일, 갈 수 없는 길을 따라오라고 한다면 사기꾼이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감히 늘 이렇게 말했다. 성철 스님이 ‘나를 따라 오라’고 했다면 온 인류가 다 멸망이라고 말이다. 어찌 그 길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참 위대하기는 하지만 따라갈 수는 없다. 난 하루도 앉아있지 못한다. 요즘은 더구나 허리가 아파서...(모두 웃음).
그러니 만일,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신 구세주라면, 하나님 아들이라면, 인류를 위해 오신 분이라면 난 멸망이라는 말이다. 나뿐 아니라 여러분도 멸망이다. 난 하루 못 앉아있고, 여러분은 삼일 못 앉아 있고, 어떤 힘 좋은 사람은 열흘 앉아있을 수는 있겠지만 십년을 앉아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나를 따라오라는 말이 정말 보통 말이 아니구나!’하는 생각이 아침에 갑자기 났다.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 누구나 따라갈 수 있기 때문에 따라오라고 했다. 이 사람은 만인과 하나될 수 있는, 만인과 교통할 수 있는, 온 인류와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완성된 사람이다.
자기만 똑똑하다고 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다. 나 혼자 히말라야산맥에 올라갔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이 완성된 사람이다. 방주를 짓는다고 하면 방주 안에 있는 재료가 될 수 있는 것만이 온전한 재료가 아닌가? 집을 짓는다면, 건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재료만이 온전한 재료이다. 건축 안에 들어갈 수 없는 재료는 온전한 재료가 못된다. 그러니까 사람은 최종적으로 이 교통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야고보을 생각해보면 참 온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니까 이 사람은 이미 육신이나 연합할 수 없는 한계에 이른 모든 것을 떠났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만일, 야고보가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으로서 사도가 되었다면 난 동생이 아닌데 어찌 사도가 되겠는가? 하지만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이었지만 전혀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모든 사람이 다 사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우리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 육신의 형제이기 때문에 사도가 되었다면 나를 따라오라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에게도 그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육신의 혈통을 따라 사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육신의 어떤 강점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면 ‘나를 따라 오라’는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다 따라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사람과는 아주 다른 존재라고 생각한다. 물론 피가 파랗다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관념상으로는 우리 피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만일,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라면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하실 수 없다. 이티가 와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가겠는가? 우리 피가 파랗게 될 수 없다. 같은 인간의 피를 수혈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라’고 하신 말씀은 아주 놀라운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말이 완성된 사람의 말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과 하나될 수 있도록 완성되었다. 이런 사람이 만민에게 은혜를 베풀 수가 있는 사람이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만민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만이 은혜를 베풀 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참으로 귀중한 까닭은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받으신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을 받아야 온 인류를 받으실 수 있지 않겠는가?
서울 대학교에서는 바보를 절대로 받지 못한다. 200점 짜리는 절대 받지 못한다. 전에 어찌하다가 미달이 되는 바람에 서울 대학교 수준이 되지 않는 학생을 합격을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학생을 입학시키느니, 마느니 하면서 소동을 피운 적이 있었다. 그런데 후문에 의하면 결국 그 학생이 학교를 다니다가 그만 두게 되었다고 한다. 그 학교는 어떤 일정 수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수준 이하는 받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경북 대학교는 그 수준이 있으니까 경북 대학교 수준 이하의 학생을 받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받느냐에 따라서 만유를 받을 수 있는가, 없는가가 결정된다. 모든 사람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을 받았으면 모든 사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과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성된 사람은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는 그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보통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열매가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고 막연히 ‘열매가 되어야한다. 알곡이 되어야한다’고 말한다.
열매는 바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을 가리켜 말한다. 방주가 될 수 있는 사람, 방주가 될 수 있는 판자를 말한다. 모든 인간과 하나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며 그 사람을 원하고 있다. 그 사람이 온전케 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가심으로,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매달려 계심으로써 모든 인류를 자기 안에 불렀다. 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이 아니라, 거기서 한 운명을 제시하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그 안으로 다 불러들였다.
거기서 우리가 한 운명을 보게 되면 누구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그 분 앞에 서면 우린 모두 다 한 사람이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고 다 한 운명이다.
우리가 목욕탕에 가면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는가? 그래서 요즘 친구들하고 목욕탕에 많이 가는 모양이다. 거기 가면 옷을 모두 벗어버리니까... 군대에서도 계급장을 달고 있다가 목욕탕에 가면 계급장이 없어지니까 장난도 좀 칠 수 있고 그렇지 않은가?
그와 같이 우리가 십자가 앞에 가면 모드가 다 일반이다. 다 똑같다. 그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다’라고 했다. 참 놀라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것을 찾았다. 히말라야 산에 올라가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정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다 들어올 수 있는 그 자리에 계셔서 사람들을 부르고 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닌가! 이것이 복음이다. 히말라야에서 부른다면 저주이다. 히말라야 산에 오른 사람만 합격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산꼭대기에 서서 하나님께서 우릴 부르신다면 저주란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만히 있다가 굴러 내려가기만 하면 갈 수 있는 자리, 호박이 덩쿨째 구르다가 보면 갈 수 있는 그 자리에서 부르시니까 그것이 복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진실이더란 말이다. 바보가 아니라 그 자리가 인간의 진실이더란 말이다.
‘아버지,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이 말은 바보 멍청이가 하는 말이 아니라 곧 진실한 사람의 말이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가 되었는가? 이것을 알았을 때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냥 ‘형님’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된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라고 말했다. 이것은 놀라운 말이다.
오늘 우리 인생이 이렇게 바꾸어져서 온전한 자리에 서게 될 때 우린 육신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한 사람으로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 안에서 그런 장벽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겨서 만민과 교통하는 한 인격 안에 서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이고, 교회 생활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린 새로운 세계를 갖게 된다. 인격 안에서 하나인 세계를 갖게 된다. 다른 계통에서 온,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된 계통 안으로 우리가 들어와서 숨을 쉬기 때문에 평안과 안식을 느끼고 만족을 느끼게 된다.
야고보는 온전한 사람이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온전하다는 말이 아니다. 자기 형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서 온전해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 때는 비아냥 거렸던 사람이 자기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이 사람이 온전해 진 사람이다.
우리도 야고보처럼 한 때는 한 때는 그렇게 비아냥 했던 사람이 우리가 주님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온전해 지지 않는가? 우리가 어떤 형제를 볼 때 ‘이렇고 저렇고...’하면서 판단했던 사람이 있다고 하자. 지금도 마찬가지로 다 알고 있지만 어느 날 그 안에서 나타난 어떤 것을 보고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결점과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과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 안에서 내가 머리를 숙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온전하게 된 사람이다.
구비하여 온전하게 되기를 원한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썩을 것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과 목적 안에서 썩지 아니할 것을 바꿀 수 있게 하시고, 욕된 것으로 태어났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이 축복의 노선 안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인생이 지금 썩어질 것이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향해서 가게 하시고, 지금 욕된 것이지만 영광스러운 것을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야고보처럼 온전한 사람으로 변화하기를 원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바꾸어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