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의 아버지 산수 이종률
벌써 아버지가 가신지도 23년 째의 해가 저물고 있다. 아버지의 제자들 중 이미 벌써 세상을 뜬 사람도 있으니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며 우리들도 차차 언젠가는 아버지를 뒤이어 가게 될 것이다. 아버지가 가신지 거의 사반세기가 지났으나 과연 그동안 우리의 국내 국외 정세는 아버지의 염원처럼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끝까지 아버지의 마지막 뜻의 끈을 놓치않고 이어가야 할 것이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아버지에 대한 자료와 기억들도 희미해져 가고 있는 지금 나라도 아버지에 대한 작은 기억을 정리해 남겨 놓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약 십여 회에 걸쳐 옛날을 회상해 올려 보려 한다.
단군가족 (李 雨人)
1 재판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해 출마를 안 하겠다는 소위 3.5성명이란 것을 발표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 짐작대로 과연 관제민의(官制民意)가 동원되어 국민들은 '이승만 대통령 재입후보 결사 요구'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하였고 이대통령은 '민의가 그렇다면 부득이 출마하겠다'하여 그 이듬해 1960년 3.15일 선거에 나서 당선이 된다.
그 때 이박사의 나이 이미 86세였으니, 3.5성명대로 재야에 나가 쉬었다면 본인에게나 국민들에게 더 많은 피해를 입히지 않았을 것을 3.15 부정선거는 일파만파로 전국을 휩쓸게 된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서울에 자주 가시며 아예 부산대학에 사표까지 제출하셨는데 부산대 측에서는 언제라도 다시 돌아오시라면서 사표는 수리 하지 않고 기다리겠다 하였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민족건양회(民族建楊會)에 적극 관여하시며 시국수습을 위해 동분서주 하신다. 전국은 3.15 마산 유혈사태, 4.14 부산 유혈사건, 광주 유혈사건, 김천 유혈사건과 4.18 고려대 정치깡패들의 피습, 4.19 서울 유혈사건으로 얼룩지고 있었고, 아버지는 순진한 우리 학생들과 민족 청년들을 이승만 손아귀에 몰아넣을 수만은 없다고 보고 각지에서 올라온 뜻있는 지사들과 연일 모임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하여 그 시점에서는 무엇보다 학생들의 스승인 교수들이 나서야 하며 그것마저 효과가 없다면 전국의 학부형들이 총궐기하여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요구로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기붕 부통령을 하야케 해야 한다는 의결이 있었고 빠른 시일 내 서울교수단 데모를 조직하자는데 합의를 본다. 그렇게 하여 며칠 후 25일 교수들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자' '이승만 대통령 물러서라'는 구호의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 천지를 누볐던 것이다.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알게 된 미국 매카나기 대사는 그 날 저녁 경무대로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결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하게 된다.
그 이후 민족건양회에서 그 역사적인 절대적인 필요성으로 민족자주통일(民族自主統一)중앙협의회(약칭 민자통)을 발기하게 되고 아버지는 거기에서 통일논책심의위원회에서 직책을 맡아 일하시게 된다. 그리고 그 얼마 후 서울 모 다방에서 조용수라는 젊은이를 소개받아 한 혁신계신문을 창간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어 아버지는 그 신문사에 편집부장으로도 일하시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 1961년 1월 어느 날 밤, 부산 동래구의 그 당시엔 한적한 교외였던 우리 과수원집 수일원(秀一苑)에서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을 모두 불러 앉히고 말씀하신다. "이제 우리 한반도의 분단을 종식시키고 조국통일을 앞당기기 위해 아버지도 적극적으로 나서 민족을 위해 일할 때가 되었다. 지금 아버지가 서울 가면 우리 가정에 어떤 역경이 올지 모르나 고생을 이겨내는 것도 우리가 조국통일을 위해 감내해야할 하나의 투쟁방식이다." 그 다음 날 아버지는 간단한 트렁크 하나를 들고 떠나셨고 그것은 바로 부산대학과 우리 가정을 떠나는 것이라는 걸 우리 어린 형제들은 그 당시 잘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도 아버지와 함께 하는 긴 고난의 시작이라는 것을 17살 시골 소녀이던 나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얼마 후 5.16이 터지고 국가 중대발표라면서 라디오를 통해 박정희는 그 유명한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발표를 한다. 그리고 다음에 내가 아버지를 뵐 수 있었던 것은 민족일보 사건으로 군사 혁명재판소 법정에서 포승줄에 묶여 들어오시는 모습이었다.
그 몇 해 전 부산대학교 정치과에 입학해 다니던 언니는 홍일점으로 정치과의 모든 남학생들이 자기를 좋아해 괴롭힌다고 한사코 다니기 싫다면서 몇 날 며칠을 아버지를 졸라 서울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아버지가 출강하시는 성균관대학교 정치과 2학년에 편입학하고 야간엔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학의 전신) 영문과를 동시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언니는 마악 수도여사대 2년제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는 4학년으로 진학하려던 터였다. 그런데 그 해 61년도 1월에 아버지는 갑자기 언니에게 특명을 내려 부산으로 긴급히 불러 내리고 부산 혜화여자중학교 영어선생으로 부임시켜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신다. 그로서 아버지는 집을 떠나시기 전 가족의 생활을 언니에게 넘기고 자신은 서울로 떠날 준비를 하신 것이었다.
내가 알기로 평생 민족을 위해 노심초사 하시던 아버지가 죄인이 되어야하는 세상, 이 거대한 정권의 바위에 계란으로 도전하는 한 힘없는 개인.. 어린 소녀가 이해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도 힘들었다.
민족일보는 일본 조총련계에서 자금을 받아 시작했다는 검사의 논지와 그 반대의 논지를 보여줄 재일본 증인의 입국 비자를 고의로 막는 등 혁재측은 일사천리로 재판을 마무리해간다.
공판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관람했던 내가 보기에 재판과정은 너무도 무리하게 이어져 가고 있었다. 마치 이미 정해져있는 종착역을 향해 달려가는 거친 과정 같기만 하였다.
조용수(趙鏞壽)사장은 조총련 자금을 받아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평화통일을 주장해 북을 이롭게 했다는 것인데 1심에선 주식회사인 민족일보를 사회단체로 보아 특별법을 적용했다가 상고심에서는 사회대중당에 공천장 한번밖에 받은 일이 없는 그를 통일사회당의 주요정당간부로 엮어 특별법을 적용하는 등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었다. 조용수는 일관되게 민족일보 창간자금은 일본 조총련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것을 증명해줄 증인을 일본으로부터 부를 수 있다 하였는데 그 증인들은 입국조차 차단되고 있었다.
민족일보는 처음엔 대중일보라 제명(制名)하려 했으나 편집을 책임지신 아버지의 강력한 주장으로 민족일보라 고친다. 창간호부터 독립 운동가들의 생생한 사회비판 육성을 담은 함석헌 선생의 '광야의 소리'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오늘 날 한미 FTA의 조상격인 당시 한미경제협정의 굴욕성을 비판하며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고발한 '농촌의 인상'등의 기사를 통해 빈곤 문제도 줄기차게 다루고 있었으니 대중들에게 신문이 잘 팔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제일 잘 팔리던 신문이 동아일보였는데 가판에선 민족일보가 그보다 앞서 1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민중의 염원을 리드해 나가는 혁신 신문, 그러기 때문에 박정희는 바로 그 싹을 잘라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민족일보는 61년 2월 13일에 창간되어 그해 5월 16일에 폐간되기까지 매일 3만5천부나 발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창간 3개월 만에 지령 92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고 사장이하 간부들도 줄줄이 연행되었다.
민족일보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간첩 이영근(李榮根)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창간되었다고 주장하나 이영근은 그 전에 우리나라에서 간첩죄로 기소된 일은 있었지만 1심에서 무죄로 판결이 되었고 그 한참 후인 90년이 되어 조국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국민훈장무궁화장을 추서 받았으니 정부가 스스로 그가 간첩이 아니란 사실을 인정해준 셈이다.
이영근은 조총련(朝總聯)계가 아니고 조용수와 함께 민단(民團)의 간부 출신 인물이었다는 것도 나중에 밝혀졌는데 그 사실을 박정희는 정말 몰랐을까.
아버지는 처음부터 민족일보의 노선문제에서 조용수 사장과 약간의 충돌이 있었다. 아버지는 어디까지나 좌(左)나 우(右)가 아닌 순수한 '민족지'를 추구한 반면에 조용수는 '혁신계' 대변지를 모색하고 있었다. 자금문제에 있어서도 민족일보창간 자금이 일본조총련계 자금이라는 소문이 이미 장면정부시절부터 파다하였으니 그런 의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아버지는 민족일보가 국내자본을 이용해야한다고 주장하시고 실지로 국내 자본가들로부터 그런 약속을 받아놓고 계셨다. 그리해야만 명실상부 민족적인 신문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보시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조용수가 아버지의 충고에 따라 국내 자본가들의 후원을 받고 그 후원금에서 그동안 일본의 이영근으로부터 받은 액수를 돌려주었다면 아무리 박정희라도 막무가내 민족일보를 일본의 조총련계 자금을 받은 좌익계 신문이라고 몰아붙여 조용수를 과연 사형시키기까지 했을까 의문이다.
조용수는 연세대 다닐 때 우익학생운동을 전개했었으며 민족일보사는 공산주의를 배격한다는 점도 분명히 밝혔었다. 그는 북한이 주장하는 연방제 통일안을 비판했고 김일성은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는 독재정치가라며 강한 논조로 비난하기도 했다.
그가 일본의 북송을 반대하는 시위에 나선 것도 그가 북에 동조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왜 박정희는 조용수를 제거해야 했을까?
박정희는 조용수가 좌익이라서기보다 자신을 비판하는 세력이기 때문에 그를 제거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기 위해선 좌익이라는 죄목으로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조용수사건의 배후에는 박정희의 '레드 컴플렉스'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그토록 두려워한 것은 자신의 편력 때문이었다. 48년 여수 반란 사건 때 그는 군대 내에서 남로당 총책으로 붙잡혀 수사를 받는다. 그 때 박정희는 김창룡(金昌龍)에게 엄청나게 맞았다고 술을 마시며 측근에게 털어놓더라 하였다. 그때 그는 그 고통을 못 이겨 김창룡과 타협하고 부하들 명단을 넘겨주는 배신을 하였고, 그 후 두고두고 그 일을 잊지 못하며 술을 마시면서 자책 하였을 테니 어느 면에서는 그도 인간적으로 불쌍한 사람이라고 본다.
그러나 그 자책도 그의 인간성까지 변모시킬 수는 없었던지 다시 한 번 두 번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하면서 자신 한사람이 살기위해 그 후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킨다.
미국이 박정희의 배경을 뒷조사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그는 미국의 오해를 풀기위해서는 획기적인 프로그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결심한 듯 하다. 그 방편으로 민족일보관련자들과 통일운동을 벌였던 혁신계 인사들, 민자통(民族自主統一) 관련자들을 검거하였고 이 획기적인 프로그램은 그의 의도대로 그를 구제해 줄 수 있었다.
그리하여 드디어 그 해 11월 박정희는 미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며 반공을 국시로 내건 군사정권은 백악관의 지지도 얻어낸다.
군사 혁재에서 61년 8월 20일 아버지는 5년 구형을 받으시고 그 며칠 후 선고가 내려지는 날. 떨리는 마음으로 방청석에 앉아있는데 문이 열리며 조용수 사장이 포승줄에 묶여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까진 여러 피고인들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들어와서 특별히 눈에 뜨이지 않았는데 그날은 왠일인지 혼자만 먼저 호송돼 들어와 조금 후에 들어올 다른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때 본 조용수의 옥골선풍 모습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선 그런 미남을 본 것이 생전 처음이었고, 단순히 미남인 정도가 아니라 하얀 한복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어떤 천상의 도인 같은 분위기라 할까 온몸주위로 밝고 하얀 어떤 빛나는 후광이 분명히 그를 둘러싸고 있는 듯 했다.
내 옆에 앉은 어느 피고인인가의 따님일 한 20대 아가씨는 아아! 하며 신음소리를 토해 내는데 우리 모두 그 탄성에 공감하며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곳에 앉은 모두의 말없는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 마디, "아깝다!" 나라를 위해 일한 저 선골의 깨끗하고 아름다운 청년이 죄를 지을 리 없다! 사후 조용수가 남긴 사진들을 보면 도무지 실물에서 주는 그 신성스런 분위기가 없어 사진이란 형식의 한계를 느낀다.
마지막 선고에서 가장 먼저 "조용수 사형!" 이란 말에 다시 한 번 방청객 모두 신음을 토해낸다. "아깝다!" 는 탄식을.. 조용수의 판결문은 '남북협상 남북서신교류 남북학생회담 평화회담 등을 선전하여 이북괴뢰집단의 주장에 동조했다.' 는 등의 죄목이었다.
이어 "안신규 사형, 송지영 사형.. "하고 계속되는데 나는 아버지가 또 5년이라도 선고 받으셨으면 하고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기도하던 중 의외로 "이종률 무죄"라는 말이 들리는 순간 오히려 귀가 의심되면서 긴장이 풀리고 온몸의 힘이 빠진다. 다행이다 아아 다행이다.. 곧 이어 공판과정이 끝나고 일어서시는 아버지의 얼굴은 그러나 웃음 끼라곤 찾아볼 수 없고 고통스럽게 굳어져있었다. 5년 구형을 받으실 때는 웃으시던 아버지가 무죄선고에선 굳어지시다니. 나는 안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도 조용수 사장이 무죄고 아버지 자신이 사형이었다면 기쁘게 웃으셨을 게다.
(민족일보 혁명재판 사진)
<47년 만에 '무죄'선고된 민족일보 사건>이란 제목으로 배포된 연합뉴스 등의 사진에는 왠일인지 왼쪽부터 조용수 송지영 안신규 라고 돼있으나 맨 오른쪽은 안신규가 아니고 나의 아버지 이종률이다. 안신규씨는 키가 크고 좀 퉁퉁하신 편이라 아버지와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이 사진에는 안 나와 있지만 아주 다른 인상이다. 아버지는 172센티 정도로 별로 큰 키는 아니신데 송지영 씨가 몸집이 좀 작으신 편이라 더 커 보이신다. 조용수 사장은 174센티 정도의 헌칠한 키였는데 지금 모두 고인이 되신 마당에 몇 센티가 다 무슨 소용이랴.. >
국내 각계의 진정과 호소가 빗발쳤지만 국가재건최고회의장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끄떡도 안하다가 국외까지 항의소리가 점점 커져나가자 결국 송지영과 안신규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켰으나 조용수는 32세의 아까운 젊은 나이로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날 같이 사형 당한 이들은 정치깡패라는 이정재 임화수 최인규 곽영주(경무대 경호책임자) 최백근(사회당 조직부장) 들인데 그날 서대문형무소에서 그들이 사형실로 끌려가던 모습을 목격한 이들(민족일보 논설위원이던 송남헌, 혁신당위원 허영무)의 증언에 의하면 그 정치깡패들은 안 들어가려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렸지만 조용수는 일체의 반항없이 조용히 걸어 들어가더라 한다.
평생 폭력과 필시 수많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을 깡패들은 자신의 죽음만은 한사코 거부하며 반항하였고, 약자와 소수를 존중하고 부정과 부패를 배척하며 민족의 통일을 위해 온몸을 바쳤던 조용수는 어떤 반항의 몸짓도 없이 고요히 사라져갔다.
하긴 자유당 이승만 정권에 절대 충성한 무신(武臣)격인 그들은 3.15부정선거 지휘, 시위대에 폭력진압 지시, 40인명부작성 암살 지시, 동양극장 앞에서 학생들 살해.. 등의 죄목을 쓰고 '구악을 일소'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정권에 의해 제거되는데 그들 스스로는 이승만 정권에 글자 그대로 '온 몸을 바쳐'충성을 바쳤던 최대의 애국자였음을 자부하고 억울해 하였을 것이다.
마치 고려 말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쟁취한 이성계가 고려정권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했듯이, 명분이야 구악이건 신악이건 어차피 정상적 정권교체가 아닌 이상 필연적인 결과이고 정몽주 역시 그 필연을 너무나 잘 인식하여 아들이 극구 말리는 가운데 이방원집으로 향하지 않았던가.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21일, 하늘도 노했던지 입시한파처럼 그 다음날까지 유난히 추워 영하 15도는 되었을 성 싶은데 형을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동생 조용준은 그 전날까지 생생하게 살아있던 형이 다음날 싸늘하게 돌아온 시체를 인수해 나오며 이 '정신병자 정권!' 이라며 격렬하게 분노하였다. 그 분노는 평생 그의 가슴에서 사라지지 않았으니 99년 대법원이 조용수 유족에게 80억을 지급하라는 판결이 내렸지만 그것이 어떻게 그 고통을 보상할 수 있겠는가. 군사정권에게 실상 정치깡패들은 그저 그런 들러리였고 주요 타깃은 조용수였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훗날 나는 결혼 후 진주에 내려가 살면서 진주가 조용수를 배출한 고장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었고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이 평생 형을 잊지 못한다는 이런 저런 소식도 주위에서 듣고 있었다.
그 선고공판에 배석판사로 이 회창이 앉아 있었다 하나 기억은 할 수 없고 그럼에도 그의 별명이 늘 대쪽 같단 긍정적 표현이 따르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가 정말 '대쪽'이라면 99년 대법원의 사법부가 조봉암과 조용수에게 무죄판결을 내렸을 때 당장 자신의 과오를 뉘우쳤어야 했다.
그러나 5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그는 거기에 대해 일절 한마디 언급조차 안하고 있으니, 하긴 일제 강점기부터 검찰서기 이시던 부친의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의 아들 또한 병역회피 비리로 회자되는 등 그의 가계에 흐르고 있는 비도덕성은 참으로 놀랄 만하다.
아버지는 나중에 출옥 후 경기도 중부면 검복리 남한산성자락 중턱에 위치한 조용수의 무덤에 성묘하시며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을 찾아 임백호(林白湖)가 읊었다는 시조를 패러디(parody) 하여 한 수 읊으신다.
아버지가 그곳을 찾았을 때는 조용수가 그곳에 누운 지도 한참 되었으니 홍안(紅顔)은 이미 백골(白骨)이 되어 있었을 테다. 이런 시조를 읊으신 아버지도 그 후 89년에 경남 양산에 묻히신지 올해 23년 이나 지났으니.. 우리도 불과 몇 십 년 안에 다 같은 신세가 될 것인 즉,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임백호는 평생 풍류객으로 살다 갔지만 아버지도 일제 때 태어나서 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그리고 8.15후에도 진정한 해방과 통일을 위해 한평생을 살다 가셨으니 아버지도 정치 '풍류객' 이셨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