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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동학 교수와 함께하는
제1회 혜명역사문화탐방
1.답사지역
의성 단촌면 고운사
안동 일직면,길안면,임하면,임동면,
안동시내 일원
2.주관
혜명동양학연구원
3.지도교수
류동학
4.답사일자
3월28일 일요일
5.참가자
혜명동양학연구원 회원과 가족및 지인
제1회 혜명역사문화탐방
(유불문화의 향기와 독립운동의 정신을 찾아서)
답사지역-경북 의성군 고운사
안동시 일원(일직면,길안면,임하면,임동면,안동시내)
날짜-3월28일 일요일
오전 8시 00분 혜명학당앞 대구출발
10시 30분 고운사 도착예정
대구-중앙고속도로-남안동IC진입-소호헌(보물),대산종택-고운사도착 의성 고운사,
11시 00분 도착 임청각(보물), 군자정, 고성이씨 탑동종택, 신세동 7층 전탑 (최고의 전탑),
12시 30분 도착 안동시 길안면 용담사 -점심공양
2시 30분 출발 용담사 출발 안동김씨 김계행을 모신 묵계서원과 길안면 용계 은행나무(천연기념물)와 경치가 일품인 임하댐순환도로 (11.2km)를 거쳐
4시 10분 도착 전주류씨 집성촌인 수곡마을과 수애당,무실종택,
의성김씨 정려각,임하댐 전경
5시 도착 안동시 임하면 영남의 4대 길지 천전마을과 안동독립기념관,
의성김씨 내앞종택, 김동삼 생가,백하구려
6시 30분 동악골 매운탕 저녁식사
7시 30분 안동출발-남안동 IC-중앙고속도로- 9시 대구도착
답사지역 해설사 -
류동학교수의 친절하고 자세한 해설로 역사문화를 바로 아는 계기가 될 것 임
차량-28인승 리무진
참가자 비용 -명리학 수강회원-5만원
일반참가자-5만원
점심식사와 저녁식사 제공, 음료수와 과일
1. 들어가며
이번 혜명역사문화탐방은 유불의 향기가 묻어있고 독립운동의 정신이 살아 있는 의성군과 안동시일원을 탐방하고자 한다. 유학적으로는 대구서씨의 중흥조 약봉 서성의 탄생지이자 보물로 지정된 소호헌, 전주류씨의 무실종택과 의성김씨의 내앞종택, 귀봉종택, 고성이씨의 탑동종택을 탐방하고, 안동김씨의 보백당 김계행선생을 배향한 묵계서원을 탐방한다. 불교문화로는 의성 고운사와 길안 용담사,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전탑이자 이번 역사탐방의 유일한 국보인 신세동 7층전탑을 탐방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사순례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천연기념물을 2개 탐방하는데 바로 사촌리의 가로숲과 길안면의 용계은행나무이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느끼는 시간도 마련하여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안동지역을 탐방하는데, 바로 내앞마을에 있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과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집안인 전주류씨, 의성김씨, 고성이씨 가문을 탐방한다. 이 세 가문에서 무려 60여명의 건국훈장을 받은 독립운동이 살아 있는 가문이다. 또한 안동호와 임하호를 관람하여 이번 역사탐방의 제목을‘유불문화의 향기와 독립운동의 정신을 찾아서’라는 테마로 설정했다. 아래에서는 이번 탐방지역에 대한 간략한 역사지식과 지역의 소개룰 하고자 한다.
2.답사지역 안내
1)안동시 일직면 지역의 조탑동 5층 전탑, 소호헌, 대산종택,고산서원
1-1) 조탑동 5층 전탑(塼塔)(보물 57호)
답사에 앞서 전탑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하자면 전탑은 탑파 형식에서 목탑 => 전탑 => 석탑의 형식으로 발전하는 탑의 중간 단계로서 주로 탑파의 발전 형태를 볼 것 같으면 중국은 전탑 형식이 발전했고 우리나라는 석탑, 일본은 목탑이 주로 발전 했다고 할 수 있는데, 탑의 완성 형태가 석탑이라 할 수 있고, 전탑은 그 중간 단계라 할 수 있다.벽돌형식의 탑을 전탑이라 부른다. 이런 전탑의 형식과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흔하지 않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경기도 여주와 안동에서 볼 수 있다 안동 주변에는 석탑과 전탑이 여러 곳에 있는데 특히 전탑은 안동이 보유한 문화재의 자랑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역사탐방은 안동 문화의 자랑이요 문화재로서 그 가치를 자랑하고 있는 전탑을 답사 하게 되었다. 간단하게 답사 경로를 말하자면 남안동IC 근처인 일직 조탑동 5층 전탑부터 시작하여 시내에 들어 와서 안동댐 올라가는 곳에 중앙선 철길 옆에서 외롭게 세월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국보 16호인 법흥동 7층 전탑을 답사하는 것으로 순서를 정하여 답사를 시작했다. 안동역 부근의 동부동 5층 전탑은 시간 관계상 생략한다. 이외에도 전탑은 칠곡군 동명사의 5층 전탑과 여주군 신륵사의 전탑이 있다.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5층 전탑은 전탑 중 가장 안정감 있는 규모와 비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보물 제57호로 중앙고속도로 남안동 나들목을 빠져나오면서 좌쯕편에 만나게 되는 첫 동네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작품이다. 감실 좌우에 인왕상이 돋을새김 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인왕상은 암좌 위에 서 있으며 주먹코에 왕방울 눈, 불끈 쥔 주먹, 솟아오른 다리 근육등 힘이 넘친다.
1-2)소호헌(보물 475호)
약봉 서성[藥峯 徐渻, 명종 13년(1558)∼인조 9년(1631)] 선생이 태어난 태실은 특이한 형식의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청송심씨 노당 심덕부 가의-심덕부, 심온, 심회 ,청풍김씨 관복재 김구가의 김구, 김재노, 김치인(3대) ,대구서씨 약봉 서성가의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로 이어지는 삼대 정승과 광산김씨 사계 김장생 가문, 연안이씨 월사 이정구 가문, 전주이씨 영의정 백강 이경여 증조 이구수 가문과 함께 삼대 대제학으로 대표되는 명문가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에 있는 이 건물은 안채인 태실(一字 구조)과 사랑채인 소호헌(丁字 구조)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호헌은 현재 보물 제475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호리의 약봉 후손들은 안동에서는‘소호리 서씨’로 통하는데, 널리 알려진 양반이면서도 영남 남인(南人)의 구심지인 안동에서만은 인정받지 못한 처지다.
그 이유는 첫째 퇴계 문인의 후예였지만 후손들이 대부분 조선후기 정계를 주도한 노론 쪽이었고, 둘째 일찌감치 서울로 생활 기반을 옮겨 안동에 뿌리를 공고히 내릴 여건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소호리 대구 서씨들과 마주한 곳에 후대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문중(목은 이색의 10세손이며 서애 류성룡의 외손자인 수은 이홍조가 입향조, 양지마을이라 함)의 경우 약봉가의 성취와 비교할 때 열세지만, 안동에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을 소퇴계(小退溪)로 부르고‘소호리 한산 이씨’를 한급 높게 친다. 그 이유는 대산 이상정은 퇴계 이황(진성이씨)-학봉 김성일(의성김씨)-경당 장흥효(안동장씨)-갈암 이현일(재령이씨)-밀암 이재(재령이씨)-대산 이상정(한산이씨)-손재 남한조(영양남씨)-정재 류치명(전주류씨)-서산 김흥락(의성김씨)으로 이어지는 퇴계학통의 정맥을 이은 적전 인물이기 때문이다. 대구 서씨의 현조인 서침, 서거정, 서해, 서성을 배향한 서원이 귀암서원(龜巖書院)으로 대구시 북구 산격동 산79-1에 있다. 대구 달성 서씨의 대표적 인물을 배향해 유림의 서원이면서도 대구 서씨 문중의 구심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소호헌에서 태어난 서성[徐渻, 명종 13년(1558)∼인조 9년(1631)]은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대구(大丘)이다. 약봉은 당시의 기준으로 보더라도 태생이 화려했다. 약봉은 조선 초 명신 양촌 권근의 사위인 서미성의 5대손이요 서거정(徐居正)의 종현손(從玄孫)이다. 증조는 목사 서팽소(徐彭召), 조부는 예조참의 서고(徐固), 아버지는 서해(徐嶰), 어머니는 청풍군수 고성이씨 이고(李股)의 따님이고, 배위는 송녕(宋寧)의 따님 여산송씨(영의정 송질의 증손녀)로 숙부 서엄(徐崦)의 슬하에서 자랐다. 5대조 이래 대과에 급제한 이가 세 분이다.
약봉의 외가도 명문이다. 그의 외조 고성이씨 이고는 안동의 명절(名節)로 이름난 임청각(臨淸閣) 이명의 아들이다. 또한 약봉의 장인인 광주목사(廣州牧使) 송영(宋寧)은 중종 때 영의정을 지낸 송일의 손자다. 하지만 그는 매우 외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생후 1년 반이 못 되어(명종14년, 1559) 부친이 23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집안에는 25세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중부(仲父)인 춘헌공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서엄에게는 아직 자녀가 없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백부인 서대(徐岱) 내외가 몇 달 사이로 별세했다. 그들에게도 역시 자녀는 없었다. 약봉은 세 살 때 모친을 따라 서울로 올라온다. 약봉이 서울살이를 시작한 것은 춘헌공 서엄의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으로(현 서울 아현동 서울역 뒤 중림동 천주교회가 있는 자리) 그곳에서 10여 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웠으며 결혼까지 하게 된다.
약봉의 가문에는 당시 장수한 사람이 드물어 쇠락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서엄은 총명한 어린 조카 약봉에게 문명(文名)을 기대했다. 이제 약봉에게 주어진 것은 재명(才名)과 수복(壽福)이었다. 약봉은 어린 시절 중부인 서엄에게 학문을 배워 성장한 뒤 율곡 이이와 귀봉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29세(1586) 때 알성문과에 급제해 관료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학자로서보다 관료로 더 이름을 떨쳤다. 약봉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의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개성유수, 병조판서를 역임했고 지중추부사 겸 도총관 지의금부사 등의 직도 수행했다. 그리고 선조의 유교(遺敎)를 받은 중신인 고명칠신(顧命七臣)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대구의 구암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약봉집 藥峯集》이 있다.
문과 합격자 105명에 상신(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9명, 대제학(홍문관의 장) 6명, 당상관(정3품 상계) 28명, 정2품 이상 관리(판서급) 34명, 종2품(참판급) 15명. 3대 정승에 이어 3대 대제학 등 내리 6대에 걸쳐 최고위직 공무원 배출한 이른바 조선시대 ‘공무원 사관학교’를 방불케 할 정도로 ,조선시대 ‘행정의 달인’으로 꼽히는 약봉 서성(1558~1631) 가문이 배출한 인재 내력이다. 세간에서는 이를‘서지약봉(徐之藥峯)이요 홍지모당(洪之慕堂)’이라는 말이 회자될 정도였다. 서씨 가운데는 약봉(서성)이 유명하고, 홍씨 가운데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다.
약봉은 6도 관찰사를 두루 지냈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모든 판서직을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를 더욱 영화롭게 하는 것은 직계 후손들이 이룬 ‘업적’에 있다. 한 가문에서 정승 한 명도 나기 힘든데 무려 9명이나 배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 배경과 비법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450여 년 전 한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과 자녀 교육을 위한 ‘결단의 리더십’에 있었다. 집안을 일으켜 조선 최고의 인재 산실로 만든 이가 약봉의 어머니인 고성 이씨 부인이다. 서성의 어머니는 우리나라 3대 명문가 産室의 하나인 안동의 고성 이씨(固城 李氏) 종택인 임청각(臨淸閣)의 딸이다. 그녀는 임청각의 종손인 이명의 다섯째 아들로 청풍군수를 지낸 무금정(無禁亭) 이고(李股)의 무남독녀로 태어났다. 불행히도 그녀는 맹인이었다. 남편 함재 서해는 약봉 서성의 생후 1년 반이 못되어 23세에 세상을 떠난다. 당시 집안에는 25세의 어머니 고성 이씨와 仲父인 서엄 내외만 있을 뿐이었다. 약봉의 어머니 고성 이씨는 아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온다. 仲父 춘엄공 서엄의 제택(第宅, 살림집과 정자를 통칭)이 있던 약현(藥峴)으로 이곳에서 10여년간 서엄에게 글을 배우며 결혼하게 된다.
고성 이씨는 약식, 약과, 약주를 만들어 번 돈으로 약현에 대지 오천평에 일반 사가(私家)의 규모를 뛰어넘는 무려 28칸짜리 집을 짓는다. 가족이라고 해 봐야 아들인 약봉과 고성 이씨 단 둘에 불과했다. 친지들이 "식구도 적은 사가집이 대청 열두 칸이면 모두 28칸이나 되는데 너무 큰 규모이니 줄여서 짓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씨 부인은 " 그 집이 지금은 사가로서 너무 크다고 하시겠으나 몇 십년 가지 아니해 그 집이 클 것이 없고, 이후에 내가 죽은 후 삼년상에는 그 대청이 좁을 형편이고, 만약 손자 대를 내려가면 내 제삿날을 오히려 그 대청이 부족하여 다시 그 마루 앞으로 딴 마루를 늘려야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씨 부인의 예측대로 한 세대가 지나자 명절 때에는 그의 증손자들까지 수십 명에 달하는 등 집이 좁아 보일 지경이었다. 서성은 병조판서와 종1품 승록대부까지 올랐고, 그의 넷째아들이 선조의 부마가 되어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된다. 서성의 종고조부가 대제학을 지냈고 "동문선"을 쓴 서거정(徐居正)이다. 약봉의 후손들은 영,정조 시대를 거치면서 조선 후기에 출세를 많이 하게 된다. 약봉의 후손들은 쟁쟁하다. 이 가문에서 여덟 명의 정승과 34명의 판서가 배출되었다. 77세의 수를 누린 모친은 칠순 때를 기준으로 보더라도 53세의 약봉 이외, 중견 문신으로 활동한 37세의 경우(景雨)와 국왕인 선조의 사위인 31세의 경주 등 4명의 손자, 손부 그리고 증손자 8명, 증손녀 1명 등 슬하에 19명의 자손이 가득했다.
북학파의 시조이자 대학자로 도덕경을 주석한 도덕지귀(道德指歸)를 펴낸 이가 서명응(1716~1787)이고, 아들 서호수(1736~1799)는 문과 장원급제자이었으며 대단한 천문학자였다. 그가 편찬한 상위고(象緯高)는 일식, 월식, 칠정(七政)의 운행을 연구한 책이다. 조선시대에 천문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었다. 서호수의 아들 서유구(1764~1845)는 농업의 백과사전이라 할 수 있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113권 54책의 방대한 분량을 저술하였다. 또한 약봉의 후손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 三代가 정승을 지냈고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이 내리 三代 대제학을 지냈다. 조선 후기 가장 화려했던 대구 서씨 집안 후손이자 만기요람(萬機要覽)의 저자인 서영보의 직계 후손이 친박연대(親朴連帶, 박근혜 추종 정당세력) 대표인 서청원이다.
소호헌이라는 이름은 이 동네를 굽이돌아 흐르는 안망천을 바라보는 조망이 너무 좋아서 붙였다. 소호헌 앞마당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소호헌의 기와에 새겨진 용 두 마리가 나는 문양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것이며 건물에 나타나는 오래된 수법들은 조선시대 민가 건축 연구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고운사
(1)고운사 소개
고운사는 신라 신문왕 원년(서기 681년)에 해동 화엄종의 시조이신 의상대사께서 창건하신 사찰이다. 부용반개형상(연꽃이 반쯤 핀 형국)의 천하명당에 위치한 이 사찰은 원래 高雲寺였다.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ㆍ여사 양대사와 함께 가운루(경북 유형문화재 제151호)와 우화루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다.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이자 풍수지리사상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옥룡자 도선국사가 가람을 크게 일으켜 세웠으며 그 당시 사찰의 규모가 五法堂十房舍(5동의 법당과 10개의 요사채)였다고 한다. 현존하는 약사전의 부처님(보물 제246호)과 나한전 앞의 삼층석탑(경북 문화재자료 제28호)은 도선국사께서 조성하신 것들이다.
특히 고운사는 해동제일지장도량이라 불리는 지장보살영험성지이다. 옛부터 죽어서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고운사에 다녀왔느냐고 물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님의 원만자비하신 풍모는 물론이거니와 명부십대왕의 상호와 복장도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위엄과 정교함을 자랑한다.
지금은 조계종 제16교구의 본사로 의성, 안동, 영주, 봉화, 영양에 산재한 60여 대소사찰들을 관장하고 있다. 10여년전부터 중창불사의 뜨거운 원력으로 주변을 정리하고 낡은 건물들을 수리 및 단청하여 지금은 위풍당당한 본산의 위상과 소박하고 절제된 수행지로서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정도 규모 이상의 고찰로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고운사는 민가로부터 3km 정도 떨어져 오염되지 않은 순수함을 자랑하며 일주문에 이르는 솔밭 사이 비포장길은 부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다소 곳이 다가서는 불자들의 마음처럼 포근하고 정감 넘치는 모양을 하고 있다.
청정하고 엄격한 수행가풍을 자랑하는 고금당선원에서 정진하는 스님들을 비롯한 고운사의 모든 대중들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대승불교의 참모습을 구현하기 위해 새벽의 찬공기를 가르며 부처님전에 발원을 멈추지 않는다.
(2)고운사 인물
가.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857~?)
신라시대의 학자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자 고운(孤雲)·해운(海雲).
869년(경문왕 9) 13세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874년 과거에 급제,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된 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올라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고, 이어 자금어대(紫金魚袋)도 받았다. 879년(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난 때는 고변(高)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 시독 겸 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가 되었으나,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진성여왕에게 상소,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을 자청,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낸 후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 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관,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伽倻山) 해인사(海印寺)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花郞道)를 말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泰仁)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慶州)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 <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 <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光塔碑)> <사산비(四山碑)>가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集)》 《석순응전(釋順應傳)》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등이 있다.
나.함홍선사
함홍선사는 순조 을축(1805년)에 임제종의 37세 손인 송암화상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함홍은 법호이고 법명은 치능(致能이)다. 스승의 권유로 삭발 전 사서삼경과 제자백가를 통달하고 구담화상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으셨다. 대강백 혼허화상과 팔봉선사의 법을 있고 고운사로 돌아와서 강당을 세우니 전국에서 승속을 불문하고 선사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학인들이 운집하였다.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펴시되 정성을 다하시니 열등한 자라도 끝내 재목을 이루었다. 조선에 석학으로 이름이 높아 사대부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으셨으며 그 당시 불교의 최고 지도자인 조선불교 선교양종(禪敎兩宗) 정사(正事)를 지내셨다.
말년에 만성재(晩成齋) 두어칸 집을 짓고 『이 방에 4년을 있으리라』하였는데 과연 그 때가 되자 병세를 보이셨다. 날이 저물자 제자들에게 일러 옷을 갈아 입히라 명하시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혀 달라 명하시더니 바로 좌탈입망에 드셨다. 이 때가 1878년 겨울이었다. 오늘 날 고운사 입구에 선사의 행적비가 있으며 법당에 그 영정이 모셔져 있다.
3).의성군 사촌마을과 사촌리 가로숲
'의로운 성'이라 이름 할 만큼 의로운 선비가 많았고, 반촌 마을이 많은 곳이 바로 의성이다. 남부의 반촌이라 불리는 의성 산운마을이 있는가 하면, 북부의 반촌으로 알려진 구 안동 김씨, 안동 권씨, 풍산 류씨의 집성촌인 '사촌마을'이 있는곳이 의성이다. 사촌 마을의 이름은 중국의 사진리을 본 따서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송은 김광수[金光粹, 1468~1563),서애 류성룡, 천사 김종덕[金宗德, 1724~1797] 등이 이곳에서 태어 났으며, 이곳 사촌마을에서 태어나 대과에 급제한 사람이 18명, 소과에 급제한 사람이 31명이었다고 한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이 마을에 3명의 정승이 태어 난다고 하며, 신라시대 한 명, 조선시대 류성룡 그리고 한사람이 더 태어날 것이어서 마을 어른들은 출가한 여인들이 친정으로 돌아와 애를 낳는 것을 원치 않는 풍습이 있다고 한다.
사촌마을은 풍수상 명당으로서 딱 하나가 부족했다고 하는데, 마을 뒷산으로 목형산인 문필봉이 떡 버티고 서있고, 왼쪽으로는 좌산이 서있어 좌청룡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오른쪽 지형은 광활한 들판이어서 우백호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풍수를 위해 방풍림을 심었는데 지금 이 숲이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돼 있는 '사촌리 가로숲"이다. 마을에서는 서쪽에 있는 숲이라 하여 '서림'이라 부른다. 방풍림은 주로 팽나무, 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가 대부분으로, 마을을 이룰때 심은 나무들이 이제 수령이 600년에 이르는 나무들로 자라, 길이 1km에 폭은 45m 정도의 숲길을 이루며 제방을 따라 산책하기에 좋은 숲길이 만들어 졌다.
사촌마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택은 1582년에 지은 만취당으로 만취당은 김사원의 호이며, 조선 선조때의 인물이다. 만취당은 사랑채 격이지만 본채에서 떨어져 있어서 정자같은 느낌을 준다. 본채에는 사랑채가 따로 있는데, 규모가 매우 작다, 객을 맞을 별도의 만취당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만취당에는 만년송이라는 오래된 향나무가 한그루 서 있다. '만년송'이라는 소나무 이름을 붙였지만 소나무가 아닌 향나무다. 수령 500년으로 추정을 하지만, 김사원의 증조부이자, 류성룡의 외조부인 김광수의 '송은'이라는 호가 이 만년송에서 나왔다는 고사를 미루어 볼때 이미 송은 김광수때에도 이 만년송은 노송의 모습이었을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만취당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을 갖춘 대형 건물로 만취당의 현판 글씨는 명필로 잘 알려진 한석봉의 글씨이다. 마을 앞 기천 점곡2교를 건너면 보이는 왼쪽 언덕에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어 잇는 영귀정 이라는 정자가 있다. 송은 김광수가 건립한 정자로 김광수는 이곳에 은거하여 살다.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촌마을의 한가운데에는 마을의 유래와 볼거리, 특징, 전해오는 유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사촌마을자료관이 있다.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방문하면, 사촌마을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3.용담사
용담사(龍潭寺)는 안동시 길안면 금곡리 황학산(黃鶴山) 기슭에 위치해 있다. 절 앞으로 황학산에서 발원하여 길안천으로 흘러 들어가는 개울물이 풍부하게 흐르는데, 이곳은 황학산과 금학산이 맞닿는 곳에 내를 따라 그리 넓지는 않지만 적당한 논과 밭이 펼쳐져 있다. 그 옆으로 길이 나 있는데, 바로 옆에 용담사가 위치해 있다. 이곳은 황학산, 화부산(花釜山), 연점산(鉛店山), 금학산(金鶴山), 그리고 천지갑산(天地甲山)이 모여 있는 안동지역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골짜기 중에 골짜기다. 겹겹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은 높고 골이 깊으며,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청정지역이다. 산줄기가 맞닿은 곳은 협곡을 이루고 있어 경치가 아름답기 그지없다. 황학산 기슭에 가람의 터를 잡고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용담사는 깊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나, 절이 번창할 당시에는 많은 승려들이 수도를 하여 쌀 씻는 물이 멀리 7km 떨어진 묵계까지 이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그만큼 용담사에는 수도승과 불자들이 많았으며 부속암자도 3개나 갖추고 있을 정도로 사찰의 규모가 상당히 큰 편이었다고 한다.
용담사 아래 깊은 골짜기로 계곡물이 흐르고 흘러 만들어 낸 용담폭포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진한 푸른빛으로 담겨져 있다. 얼마나 맑고 푸르면 이곳에 용이 보금자리로 삼고 살다가 승천을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까. 보니 가히 그럴만하여 감탄사가 절로 튀어 나온다. 용담사라는 절 이름도 용이 살다가 승천을 했다는 용담소(龍潭沼)와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묵계서원(黙溪書院)...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안동(安東)은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다. 한옥(韓屋)의 참 멋을 안동만큼 풍부하게 보여주는 곳은 없다. 경상북도의 새 도청 유치를 위해 경주시와 안동시가 치열하게 경쟁할 때 경주시가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문화재가 많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안동시는 우리도 적지 않다며 누가 많은지 국가 및 지방 지정문화재를 세어 보자고 했다. 그 결과 안동이 석 점 더 많았다. 현재도 경주는 320점, 안동은 323점이다. 안동에 이처럼 문화재가 많은 것은 전통 있는 가문마다 한 마을에 종택(宗宅)·정자(亭子)·재실(齋室)·서원(書院) 등을 경쟁적으로 갖추었고, 그 후손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이 목조건축들을 보존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벼슬하던 선비가 낙향하여 한 마을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면 그 후손들이 재실과 서원을 세우면서 가문을 일으키는 과정은 길안면(吉安面)의 묵계서원( 溪書院)에서 그 전형을 볼 수 있다.
묵계서원은보백당(寶白堂)김계행(金係行,1431-1517)과응계(凝溪)옥고(玉沽,1382-1436)선생을 봉향하는 서원으로 1687년(숙종 13)에 창건되었다. 조선초 청백리로 선정되었으며 "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맑고 깨끗함 뿐이다." 라는 유훈을 남겼다. 김계행은 본관이 (신)안동이다. 신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선평으로 신라말 경애왕때 고창군(古昌郡: 안동)의 성주(城主)로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원년)에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 경애왕을 살해하자, 930년(경순왕 4)에 권행(權幸:안동권의 시조), 장정필(張貞弼:안동장 시조)과 함께 향병(鄕兵)을 모으고 왕건을 도와 고창(안동)군에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군(甄萱軍)을 토벌하여 병산대첩(甁山大捷)의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安東金은 이 때부터 본관(本貫)을 안동(安東)으로 하였다.
청백리인 보백당은 청음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5대 조부인 한성부 판관을 역임한 김계권(金係權,?-1458)의 동생으로 성종때 도승지(비서실장급) 대사성(성균관 총장급) 대사간(사간원 장) 등을 역임하였고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보백당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응계(凝溪) 선생은 세종때 청백리로 사간원 정언 예조정랑 사헌부 장령 등을 지냈다. 고종 6년(1869)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1994년에 강당과 문루인 읍청루, 진덕문, 동재 건물 등을 복원하였다. 또한 서원 옆에 보백당 신도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다.
안동김씨는 태사공 宣平이후 습돈(習敦)을 1세조로 하여 世系를 이어오면서 10世원손(遠孫) 계행(係行10世)이 조선 성종 때 대사간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명문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가문의 지위를 굳혔다. 풍산읍 소산리 입향조는 세종때 비안(지금의성)현감을 지낸 김삼근(金三近 9世)으로 전한다. 삼근(三近)의 두 아들은 계권(係權)과 보백당 계행(係行10世)이다. 그의 자부(子婦:계권의婦) 권씨가 다섯아들을 데리고 시미에 낙향했는데 장남은 승려가 되어 세조때 국사(國師)가 된 고승 학조대사이다. 다섯 아들은 학조(學祖)-영전(永銓) -영구(永勾)-영추(永錘)-영수(永銖)이다. 그 5형제중 막내 영수(永銖)가 세 아들을 두었다. 세아들의 이름은 영(瑛 호三塘)-번(王+番)-순(珣)이다. 그 중 번(王+番)의 손자가 극효이며 극효의 아들이 김상용(尙容)-김상헌(尙憲)이다. 김번의 후예인 장동파가 서울에 옮겨 세도를 구가하는 동안 큰집인 삼당(三塘)의 후예들이 작은 집의 권세에 편승하지 않고 뼈대있는 가문의 전통을 이으며 소산(素山)을 지켰다.
계행(係行10世)의 종손 영(瑛)은 중종(中宗)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했으며, 그의 아우 김번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다.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고,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長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일찍이 석학(碩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尙容)은 인조(仁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강화도에 들어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순국했다.
상용의 아우 상헌(尙憲15세)은 백부(伯父)인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을 하사(下賜)받았다.
청에 잡혀 가면서 쓴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라는 시로 유명한 인물로 척화파의 대표였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은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 원행(元行)이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의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
그밖의 인물로는 선천 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친 싯귀(詩句)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개화혁명(開化革命)의 기수 옥균(玉均)과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흑룡강(黑龍江)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전통을 살렸다.
5).임하호 순환도로와 용계은행나무
드라이브로 딱인 임하호 30리 순환도로 최근 개통된 임하 호반길이 환절기에 드라이브 하기에 딱인 곳이다. 임하댐하면 34번 국도변의 밋밋함이 연상되지만 길안면 구수리에서 임동면 박곡리까지 임하댐 순환도로를 타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안동시 임동면 박곡리에서 길안면 구수리를 잇는 이 도로는 2009년10월29일에 11.2km에 걸쳐 너비 8m의 왕복 2차로로 돼 있으며,총 178억원의 사업비가 들어갔다. 이 길의 아이콘인 천연기념물 175호 용계은행나무에서 임동면 박곡리 지례 예술촌까지 임하호를 끼고도는 와룡산 울창한 숲길은 인마의 왕래가 드물고 호젓하여 만추의 낭만을 맛보기에 안성맞춤길이라 할 수 있다.
확.포장전 와룡산 고갯길은 지역 사람들만 넘나드는 산길로 접근성이 좋치않아 인간의 떼가 덜 뭍은 자연의 모습 그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임하호 순환도로 들머리는 34번 국도상의 가랫재 휴게소 부근과 길안과 청송을 동서로 이어주는 914번 지방도상의 구수1리이다.
대구 출발이면 35번 국도를 타야하므로 길안 구수 마을에서 용계쪽으로 조금 달리면 옛적 산업시대의 농촌 모습을 간직한 자연부락을 지나다 보면 임하호 용계은행나무에 닿는다.
천연기념물 175호 용계은행나무는 원래 용계초등학교 운동장에서 700여년을 자라다가, 17년 전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자 각계의 노력으로 되살린 천년기념물이다.
1990년부터 1994년까지 3년 5개월에 걸쳐 댐 만수시에도 안전한 높이로 제자리에서 흙을 15m 북돋아 산 형태(假山)를 만든 뒤 그 자리에서 15m 수직으로 올려 심은 천년기념물로 20억원이 소요된 소중한 문화재이다.
조선 선조때 훈련대장이었던 탁순창(卓順昌)이 서울에서 내려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은행나무계(契)를 만들어 이 나무를 보호하고, 매년 7월에 나무 밑에 모여 서로의 친목을 도모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용계마을은 수몰로 사라졌지만, 탁(卓)씨의 후손들은 해마다 나무에 제사를 드리며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용계 은행나무는 나라에 변고가 날때마다 울어서 예언(豫言)해 주는 신목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한일합방, 6.25사변(事變),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서거(逝去) 때 울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병마(病魔)가 퍼질 때나, 가물 때도 운다는 신목(神木)으로 알려져 신성시하고 있다. 은행은 자웅(雌雄)이 서로 마주 보아야만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데 용계 은행나무는 숫 나무 없이 해마다 은행이 많이 열린다.
암나무 홀로 열매를 맺는 것은 임하댐 맑은 물에 비친 자기의 그림자를 수나무로 착각(錯覺)하여 은행을 열게 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용계은행나무 주변 도로에는 용계은행나무 2세목이 무럭무럭 자라 노란 단풍이 나그네의 이목을 끈다. 용계은행 2세목은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된 것을 기념하여 지난 2004년 용계은행나무에서 은행 종자를 채취해 양묘하여 심어진 나무들로 전국적으로 수많은 2세목을 둔 천연기념물이다.은행나무를 둘러보고 차를 다시 북으로 돌리면 구비구비 임하호 절경이 차창에 전개된다.
임하호는 임하면 임하리 반변천에 건설된 다목적 댐 건설로 생긴 호수로 유역면적이 1,361㎢, 총저수량이 5억 9,500만t인 다목적댐이다. 호반길을 한 바퀴 돌면 도연교를 건넌다.도연교부터 와룡산 고갯길의 시작이다. 다리목 호반언덕 숲속에는 그림같은 집이 눈길을 끈다. 와룡산 중턱 도로변에 팔각정 전망대가 있어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에 좋다.정상에 이르면 삼거리를 만난다. 오른쪽은 지례예술촌 가는 길이고 왼쪽은 임동.수곡방향이다. 여기까지 왔으면 지척의 지례예술촌을 꼭 둘러 보라고 권하고 싶다.
수몰전 지례마을은 조선 숙종임금때 대사성을 지낸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1695)과 그의 중형(仲兄) 방형(邦衡)의 자손이 340여년간 동족 부락을 이루어 주경야독하며 살아온 전형적 사림(士林)의 마을이었다.
이 마을이 임하담 건설로 수몰됨에 지촌가의 사람들은 수몰된 옛고향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중턱에 지촌문중 소유의 종택과 제청, 서당 등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받아 3년에 걸쳐(1986~1989) 옮겨 다시 지어 예술창작마을로 문을 연 것이 지례예술촌의 효시이다.
6). 임동면 전주류씨 집성촌 수곡마을과 무실종택및 수애당
전주류씨 수곡파는 바로 의성김씨 천전파 청계공 김진의 외손들이다. 따라서 김진의 후손인 의성김씨와 그 외손인 전주류씨는 안동동부지역에 수백년 동안 터전을 잡고 경학과 예학을 숭상하며 살아왔다. 전주류씨는 조선시대 문집을 가장 많이 낸 빅5가문이다, 즉 진성이씨,안동김씨, 반남박씨, 의성김씨,전주류씨이다.
전주류씨 수곡파는 수곡(무실),박곡(박실),대평(한들),삼산,마령(마재),광평(게실) 고천(고래골) 등에 문중을 형성하며 살아왔다. 두 가문은 세칭'천김수류(川金水柳)라 하여 안동의 이황 이후의 학술문화를 크게 발전 시켰다."
수곡류씨가 무실(水谷)에 들어온 것은 16세기 중엽쯤이다. 파시조 류윤선의 장남인 류성(柳城)이 청계 김진의 사위가 됨으로써 안동과 인연을 맺고 마침내 처가의 세력권 안에 있는 무실에 정착했다. 수하삼촌(水下三村: 무실,박실, 한들.) 수상삼촌(水上三村:고천, 갈전, 맛재)을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안동의 임동. 예안 서후면 일대, 청송의 부남과 진보면일대 등으로 거주지를 확산해 나갔다.
전주류씨 수곡파가 안동에 입향하기 전에는 조상 대대로 서울 묵사동(墨寺洞:현 중구 묵정동)에 살았다. 수곡(무실)의 전주류씨는 내앞의 의성김씨와 "돌고개"를 사이를 두고 수 백년간 혈연과 학연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지내왔다. 그런데 류성이 28살에 작고하자 부인 의성김씨(학봉의 누이)는 젖먹이 어린이 두 아들을 데리고. 남편상을 마치고 자결하자 어려움에 처한 것은 류복기 류복립 형제였다. 그래서 외할아버지 김진이 데려가서 양육하였다.
두 형제는 커서는 외숙부인 김성일에게 수학해서 문장과 덕행으로 향리에서 존경을 받았다. 김성일은 임동 납실(申谷)에 살림이 나서 생활했는데 내앞과 납실을 오가면서 생질(甥姪) 류복기 형제를 교육하고 각별히 보살펴 주었다.
1988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면서 한들과 박실, 무실의 일부 족친들은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해 새로운 80여호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이 구미시 해평면 일선리로 이주하고 무실 이주 단지에는 38호만 남았지만 수곡에는 대종가와 기양서당 그리고 정려각 등, 수류의 뿌리에 해당하는 인물과 연관된 상징적 공간들이 있어 문중의 성원들에게 "정체성과 귀속감"을 부여 했을 뿐아니라, 문중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무실류씨"들의 본거지로 인식 되었다. 대곡천을 사이에 두고 무실과 마주보고 있는 수곡2동 한들(大坪)은 퇴계의 학맥을 이은 거유(巨儒)로 병조참판을 지낸 정재 류치명을 배출한 마을로써 관암위파의 지파인 용암공파가 주로 살았다
무실 류씨의 입향 유래는 조선 정종때 류극서(柳克恕)의 아들 빈(濱.태종 이방원과 동방급제한 친구로 사망 후 승문리에 안장하고 묘를 종능이라 했음)의 4대손 류 윤선(柳潤善)이 영주군수 류윤덕(柳潤德)을 따라 내려온 것이 발단이 됐다.
류윤선은 그 곳에서 사직(司直) 박승장의 딸을 아내로 맞아 오천(汚川)에 머물러 이 인근 지역의 시조가 됐으며 이후 아들 둘을 두었으니 첫째가 성(城)이고 둘째 가 원(垣)이었다.
첫째 류성이 내앞(川前)에 살던 청계공 김진(金璡)선생의 딸과 결혼해 인근의 무 실로 이사해 수곡파의 입향조가 됐다. 입향조 성의 맏아들 기봉은 일찍이 명문이 높아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과 교분을 가지고 임란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또 16세기부터 19세기 말엽까지 이 마을에서 문과에 10명, 생원과 진사에 37명 등 모두 112명이 출사했으며 각종 문집을 남긴 사람도 110여명이 넘어 지금까지 151 종 551권의 책이 남아있다.
무실에는 5명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으며 목민관으로 추앙받던 관현과 정원, 학덕 이 높았던 류우잠과 류직, 상변통고를 집대성한 류장원, 경술국치를 만나 의병장 으로 순국한 류시연, 항일계몽운동의 선각자 류인식,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류 림 등 영남 사림의 큰 맥을 잇는 인물들이 배출됐다.
이 마을에는 입향조 류성의 처인 김씨의 정렬을 기리기 위해 인조 13년(1635)에 세운 무실정려각(경북도민속자료 48호)이 마을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15세에 전주 류씨 가문으로 출가해 25세에 남편 류성이 별세하자 10세 미만의 두 아들을 손수 가르치고 삭발과 냉방에 거주하면서 3년상을 마치고 단식으로 순절해 조정으로 부터 열녀의 정려가 내려졌다. 지금도 저녁노을 지는 임하호를 바라보면 숙인 김씨의 남편을 그리는 지극한 정성이 오롯이 전해오는 듯 하다.
6). 안동시 임하면 천전마을(내앞마을)과 의성김씨종택(보물450호)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0-1752)은 양반, 선비가 살만한 영남의 4대 길지로 안동의 도산, 하회, 천전, 봉화의 닭실을 꼽았다. 그가 꼽은 4대 길지 중 하나인 천전마을에 의성김씨 종택이 있다. 풍수가들이 뽑은 4대 길지인 양동마을은 건축학자 김봉렬의 표현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평창동에 해당되는 고급주택지로서 손중돈과 이언적의 후손들이 사는 곳이다. 하회는 겸암과 서애로 상징되는 류씨들 동네고, 내앞은 의성김씨, 닭실은 충재 권벌의 고택으로 뜰 옆 거북바위 위에 앉아 있는 청암정(靑巖亭)으로 유명한 곳이다.
의성김씨들이 이 마을에 집성촌을 이룬 것은 그들이 중시조로 모시는 청계(靑溪) 김진(金璡, 1500-1580)의 조부인 김만근(金萬謹)이 임하현의 오씨 부인에게로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이곳에서 살면서 점차 그 후손들이 번성하여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 기와집들 가운데 가장 웅장한 규모로 제일 너른 자리를 차지한 의성김씨 종택(보물)은 청계(靑溪) 선생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대종가로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진 집이다. 문장이 뛰어난 청계선생은 생원이 된 후 대과를 준비하고 있을 때 한 관상가를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다."라는 예언을 듣고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해 대과를 포기하고 자손들의 학문 장려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다섯 아들인 약봉(藥峯) 극일(克一), 귀봉(龜峯)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峯)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이 모두 과거에 급제해 이 집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 불리게 되었고,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였으므로 청계선생은 이조판서에 증직되어 이 집을 육부자등과지처(六父子登科之處)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곳 내앞마을의 현무봉은 낙동정맥의 울진 통고산(1067m)에서 분맥한 용이 일월산(1291m), 청량산(870m)을 거쳐 낙동강과 대곡천 사이로 힘차게 내려와 나지막하게 일으킨 봉우리다. 마을입구에서 집 뒤 현무봉을 보면 마치 편안하게 누운 소가 한가로이 풀을 되새김질하고 있는 모습이다. 풍수형국명을 붙이자면 와우형(臥牛形)에 해당한다.
보물 제450호로 지정된 의성김씨 종택 건물은 처음 지었던 집은 조선 선조 때 불타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집은 학봉 김성일이 16세기말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곳 상류층주택의 설계도를 가져와 재건하였다고 한다.
현재 전체 55칸으로 알려져 있는 종택 내부에서 사랑채와 안채를 살펴보면 기단은 사랑채가 높은데 집의 높이는 안채가 더 높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랑방은 기단에서도 몇 단을 더 높이 쌓아 안채의 방들보다 더 높게 방을 만들어 가장 위계가 높은 사람의 공간임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이어지는 부속건물은 2층 구조로 위층은 서고이고 아래층은 헛간이다.
이 집에는 특별한 방이 있는데 과거에 급제한 청계선생의 다섯 아들이 모두 여기서 태어났다고 한다. <<설심부>>에서 주장하는 ‘지령(地靈)은 인걸(人傑)’임을 입증하는 방이라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흥미를 끄는 공간이다. 산실(産室)이라 불리는 방으로 사랑채와 거의 겹쳐지는 안채의 끝 지점에 있는데 이 방 뒤가 바로 이 집으로 용맥이 뻗어 내려오는 현무봉이다.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한 것도 드문 일이지만, 그 다섯 아들 모두가 학행이 뛰어난 선비로서 각각 일가를 이루었다는 사실은 더 중요하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1522∼1585년),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1528∼1583년), 운암(雲岩) 김명일(金明一, 1534∼1570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년),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 1541∼1591년)이 바로 그들이다. 장남인 약봉은 내앞의 대종택에서 살았지만, 나머지 네 아들은 안동 인근으로 분가하여 각기 소종택을 형성하였다. 이 소종택들도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큰형이 과거에 급제하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는 자녀가 모두 8남매나 되었는데,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강보 속에 있었다. 이에 아버지께서 온갖 고생을 다해 기르면서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한밤중에 양쪽으로 어린아이를 끌어안고 있으면 어린아이가 어미젖을 찾는데 그 소리가 아주 애처로웠다. 이에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젖을 물려주었는데, 비록 젖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이는 젖꼭지를 빨면서 울음을 그쳤다. 아버지께서 이 일을 말씀하실 적마다 좌우에서 듣는 사람 중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어린 새끼들이 밤에 젖을 찾으니 중년 남자인 자신의 젖을 물릴 정도로 자녀양육에 온갖 정성을 기울인 인물이 청계다. 그는 인근에 살던 퇴계에게 다섯 아들을 보내 공부시킨다. 다섯 아들은 일찍부터 퇴계의 훈도를 받은 것이다. 그중 넷째 아들인 학봉은 후일 서애 유성룡과 함께 영남학파를 이끄는 양대 기둥으로 성장한다.
청계가 자녀교육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있다. 교육철학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영수옥쇄(寧須玉碎) 불의와전(不宜瓦全)’의 가르침이다.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이다. 차라리 곧은 도리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도리를 굽혀서 살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 의리정신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만주 독립운동에도 선명하게 나타난다. 내앞 사람들의 의병과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면 별도의 책 한 권이 나올 정도로 방대하다. 청계공 탄생 500주년(2001년 2월)을 기념하는 학술논문집에 수록된 조동걸 교수의 논문 ‘안동(安東) 천전문중(川前門中)의 독립운동’이란 내용 중에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하면 이렇다.
내앞마을은 백하를 비롯한 독립운동 유공자를 25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전국 시ㆍ군 단위 독립운동 유공자 수가 평균 35명임을 감안하면, 대단한 숫자다. 내앞마을의 의성 김씨 망명객은 150여명에 이른다. 백하의 내앞 문중을 시작으로, 1911년 무렵 안동과 주변 지역에서 만주로 독립투쟁하러 간 사람은 100여 가구 약 1,000명에 이른다. '만주벌 호랑이'로 불린 김동삼(1878~1937), 백하의 아들로 해방 직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난 남북연석회의 임시의장을 맡았던 김형식(1877~1950)도 이 마을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내앞마을은 안동 시내에서 영덕 방향으로 15㎞ 지점, 임하댐 입구 보조댐 앞에 있다. 마을 앞으로 낙동강의 지류인 반변천이 흘러 내앞(川前)마을로 불린다. 의성 김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안동에서 하회마을과 쌍벽을 이루던 곳이다. 하지만 하회 모르는 이는 없어도 내앞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마을이 거의 통째로 만주로 가서 대부분 돌아오지 못했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만주로 간 일가의 독립운동을 지원하느라 가세가 기울고 후손은 흩어진 탓이다.
마을에는 백하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와 김동삼의 생가가 있다. 백하구려에 살고 있는 후손 김시중(73)씨는 방 안 벽에 선조들의 독립투쟁 훈장증과 이 집을 임시교사 겸 기숙사로 썼던 협동학교 관련 기사가 실린 일제강점기의 황성신문 복사본을 붙여놨다. 백하 집안의 독립 유공자는 백하를 비롯해 막내 여동생 김락, 조카 만식 정식 규식, 규식의 아들 성로 등 6명이다.
1907년 내앞마을에서 문을 연 협동학교는 경북 지역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다. 류인식 등 혁신 유림이 설립했다. 의성 김씨 문중 서당인 가산서당에서 출발한 이 학교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강제 폐교될 때까지 독립 투사의 산실이었다. 초기에는 지역 유림의 반대가 극심했다. 위정척사를 외치며 개화에 반대하던 보수 유림으로서는 신학문도, 학생들의 단발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10년 7월에는 의병이 협동학교를 기습해 교직원 3명을 살해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백하구려 마당의 큰 바위가 그들이 피를 뿌린 곳이다. 김시중씨는 "귀신 나오는 바위라고 해서 어릴 때 밤에는 무서워 마당에 나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백하도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의병 투쟁이 곳곳에서 일제에 패하고 망국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1909년 초 그는 혁신 유림으로 다시 태어난다. 육십 평생 보수 유림으로 살아온 선비가 세계관의 대전환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백하구려의 사랑채를 협동학교 교사로 내주고 지원하기 시작한다. 당시 그의 변화는 안동 지역 뿐 아니자 전국에 영향을 끼칠 만한 큰 사건이어서, 황성신문은 '교남 교육계에 새로운 붉은 기치'라는 제목의 논설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백하의 변모는 그 무렵 독립운동 단체 '대한협회보'를 읽고 쓴 다음과 같은 글에 잘 드러난다. "늙은이 눈 어두워 죽은 듯이 누웠다가 창문에 기대어 대한서를 읽는다. 폐부를 찌르는 말 마디마디 간절하니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옷깃을 적시네." 뼈저린 대오각성이었다.
만주에서 백하는 매부인 이상룡(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등과 함께 한인 자치조직 경학사를 만들고,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강습소를 세워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다 1914년 삼원포에서 세상을 떠난다.
'돈 천 석, 사람 천 석, 글 천 석'의 '삼천 석 댁'으로 불리던 백하 집안도 독립운동으로 쇠락했다. 김시중씨는 "사람과 돈이 모두 없어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안이 엉망진창이었다"고 말한다. "선조들의 독립투쟁 이야기를 귀가 따갑게, 몸서리 나도록 들으며 자랐죠. 독립운동 이야기, 양반 이야기가 제일 듣기 싫었어요. 만날 굶고 경찰에 불려 다니는데 좋겠어요? 그런데 나이가 드니 집안 할매, 아지매들이 해준 그 이야기들이 새록새록 생각 나요. 백하 할배만 해도 그래요. 망명 당시 65세였는데, 요즘으로 치면 구십 노인 아녜요? 죽으러 간 거지."
백하의 묘는 찾을 길이 없다. 일제가 훼손할까 봐 비석을 세우지 않았다가 위치를 알 수 없게 됐다. 2002년 안동의 의성 김씨 선산에 가묘를 쓰면서 역사학자 조동걸이 비문을 지었다. "백하는 유학자, 선비, 계몽주의 민족운동가,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 선구자다… 세상에 외치노니 지사연 하는 학자가 의리를 찾는다면 여기 와서 물어보라. 애국자연 하는 위정자가 구국의 길을 묻는다면 여기 와서 배우라, 저승으로 가는 늙은이가 인생을 아름답게 마감하는 지혜를 구한다면 여기 와서 묻고 배우라고 하자."
■ 독립운동 3代, 그 명가를 지켜낸 김락
여성 독립운동가는 무척 드물다. 그것도 신여성이 아니라 전통 양반 가문의 안주인이 항일투쟁에 나선 경우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10년 전인 2000년 여름, 일제가 쓴 '고등경찰요사'를 읽다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안동 양반 이중업의 아들 이동흠이 "내 어머니가 3ㆍ1운동 때 일제 수비대에 끌려가 두 눈을 잃고 11년 동안 고생하다 돌아가셨으니 일제에 대한 적개심을 결코 버릴 수 없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딱 넉 줄 적혀 있었다. 그 어머니는 누구인가. 추적에 나섰다.
족보에는 의성 김씨 김진린의 딸이라 적혀 있다. 그렇다면 안동 임하면 천전리(내앞마을) 김대락의 막내 여동생이다. 친정 제적등본에 적힌 형제자매의 이름은 모두 김대락처럼 김O락인데, 주인공인 막내만은 그냥 김락(1862~1929)이다. 하는 수 없이 그 이름으로 독립유공자로 신청하고 포상받게 되었다.
김락이 3·1운동에만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독립운동가 3대를 지켜낸 중심인물이다. 열다섯 살에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시집가서, 양산현령을 지낸 이만도의 맏며느리이자 이중업의 아내가 되었다. 새댁 시절 시어머니를 여읜 그는 시누이와 시동생을 돌보며 안방 주인으로서 집안을 도맡았다. 그런데 1895년 시아버지는 예안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이 되었고, 남편도 마땅히 함께 나섰다. 일제의 공격으로 이웃 퇴계 종가가 불타는 황망한 가운데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집안을 지켰다.
48세 되던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시어른은 24일 단식 끝에 순국했다. 장례를 치르고 상복에 눈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아버지처럼 여기던 큰오빠 김대락과 김동삼 등 친정 집안이 대거 만주로 망명 길에 나섰다. 큰 형부 이상룡 집안도 함께 갔다. 서간도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떠난 고난의 길이었다.
남편과 두 아들도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남편 이중업은 안동과 봉화 장터에 격문을 돌렸다. 맏아들 이동흠은 대한광복회에 가담했다가 구속됐다.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편은 '파리장서'라 불리는 독립청원서를 발의하고, 강원도와 경북 지방 유림 대표의 서명을 받는 일을 맡았다. 바로 이때 김락은 57세의 나이에 예안면 만세운동에 나섰다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혔고, 취조를 받다가 두 눈을 잃는 참극을 당했다.
앞을 못 보고 귀로만 듣고 살던 터에 다시 놀라운 일과 마주쳤다.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중국으로 떠나던 남편이 갑자기 사망한 것이다. 한숨 짓는 사이에 맏사위 김용환이 일제에 붙잡혔다. 학봉 김성일의 종손인 맏사위는 만주 독립군 기지를 지원하던 의용단에 가담했던 것이다. 김용환은 '조선 최대의 파락호' 소리를 들으며 노름꾼으로 위장해 독립자금을 댔다. 그 바람에 요즘으로 치면 100억원이 훌쩍 넘을 종가 재산이 거덜났다. 둘째 사위 류동저는 안동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둘째 아들 이종흠은 1925년 제2차 유림단 의거에 참여했고, 그 바람에 두 아들이 모두 잡혀갔다. 이런 사이 두 번이나 자살하려다 가족들 손으로 살아난 그는 1929년 2월 67세로 눈을 감았다.
35년 동안 시가와 친가 모두 독립운동으로 해가 뜨고 졌다. 그 한가운데 김락이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3대에 걸쳐 독립운동이 펼쳐졌다. 현재 그의 사진 한 장 없다. 그가 시집 가서 살던 하계마을은 1970년대 안동댐 건설로 수몰됐다. 쓸쓸하고 횡한 마을에 독립운동 내력을 전하는 기적비만 남아 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자취는 잊혀질 수 없다. 안동에서 그를 되살려 인형극을 공연하고, 뮤지컬을 준비하는 것은 '겨레의 딸, 아내 그리고 어머니'의 삶을 제대로 기리기 위해서이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ㆍ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
내앞에 살던 66세의 백하(白河) 김대락(金大洛, 1845∼1914년)은 경술국치(1910년)로 조국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자 엄동설한인 12월24일 만주 서간도로 망명한다. 이 노선비는 서간도에 갈 때 혼자 간 것이 아니라 만삭 임신부인 손부와 손녀를 데리고 간다. 일본 식민지에서 증손자들이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일본신민이 되는데 이를 참을 수 없는 치욕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하일기’에 따르면 목적지 유하현으로 가는 도중인 1911년 2월2일과 23일에 손부와 손녀가 해산을 한다. 엄동설한의 눈밭에서 난산을 했다고 전해진다. 병원도 약도 구할 수 없어 버선과 신발이 얼어붙을 정도로 동분서주하고, 마을 성황당과 칠성님께 비느라 손발이 얼어터지는 참담한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김대락은 증손자의 이름을 중국(唐)에서 태어나 통쾌하다는 뜻으로 쾌당(快唐), 외증손자는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의 고장에서 태어났다는 뜻으로 기몽(麒蒙)이라고 지었다고 하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기가 막힌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문중 원로가 66세의 노구를 이끌고 더구나 만삭인 손부와 손녀가 뒤를 따르는 걸 보고 감명을 받은 내앞 사람 22가구 50여 명이 대거 만주로 건너갔다. 이런 걸 보면 양반은 그냥 양반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내앞 출신의 독립투사 중 대표적인 두 사람을 꼽는다면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다. 일송은 1923년 상해에서 독립운동자 총회인 국민대표회가 열릴 때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대표로 참가하여 의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이때 부의장은 안창호, 윤해였다. 독립군 단체에 문제가 발생하면 이를 수습하는 회의마다 거의 의장을 맡다시피 할 정도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일송이 향년 60세로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평소 일송을 존경하던 만해 한용운이 그 유해를 수습하여 성북동 심우장에서 화장을 한 후 유언대로 한강에 뿌렸다.
월송(1877∼1950년)은 김대락의 아들이다. 사람 천석, 글 천석, 밥 천석을 하던 도사택(都事宅)에서 태어나 협동학교(協東學校)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와 대소가 안팎 식솔 수십 명과 함께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8년 김구와 김일성이 만나는 남북연석회의 당시 개회식에서 사회를 보았다. 노년에 금강산에서 휴양중(1950년 가을) 전화가 미치자 미군에게 수모를 당하는 것보다는 깨끗하게 생을 마치겠다며 구룡폭포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향년 74세. 자진하면서 남긴 절명시는 이렇다.
‘이 산에 응당 신선이 있을 터인데, 육안으로는 분간이 어렵구나. 백발 노인이 구름 사이로 치솟으니, 사람들은 나를 신선이라 하겠구나(此山應有仙 肉眼不分看 白髮聳雲間 人謂我神仙).’ 내앞 사람들의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에는 협동학교가 있었다. 협동학교는 내앞에서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산실이었다. 현재는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세워졌다.
7). 임청각과 군자정(보물)및 고성이씨 탑동종택
가)고성 이씨 -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시조가 이황[李璜]으로 고성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6가야(고령가야,성산가야,함안가야,대가야,금관가야,소가야) 중 소가야의 도읍이었는데,1895년(고종 32) 고성군이 되었다.
[이씨추원록(李氏追遠錄)]에 의하면 고성이씨(固城李氏)는 한나라 문제때 사람인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을 시조로 받들고 있다. 그는 고려때 밀직부사를 역임하고, 1033년 거란이 침입했을 때 공을 세워 문종때 호부상서에 올라 철령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은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고성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으로는 시조의 7세손으로 고려 충렬왕때 판밀직사사를 지낸 이존비(李尊庇)와 그의 아들 이우(李瑀)가 유명했다. 우(瑀)는 벼슬이 병부의 판사와 경령전의 서장관사에 이르렀으며 나라에 공을세워 철성부원군에 봉해져서 크게 명성을 떨쳤었고, 그의 아들 암과 교(嶠)가 뛰어났다. 행촌 이암은 충정왕때 우정승을 지냈고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리웠으며, 행촌 이암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인(寅)은 고성군에 봉해졌으며, 차남 숭(崇)은 공민왕때 궁술로 무명을 떨치고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때 검교시중에 올라, 대제학을 지낸후 서예로 필명을 떨쳤던 아우 강(岡)과 함께 가세를 일으켰다. 강(岡)의 아들 11세 원(原)은 태종때 좌명공신으로 철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이어 병조판서와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용헌공파의 시조이다.
원은 슬하에 대(臺),곡(谷),질,비,장(場),증(增 : 12세,안동 입향조,참판공),지 등 일곱아들을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여 가문에 중추적인 인맥을 형성했다. 이 가운데 이증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청파극담(靑坡劇談)》으로 이름난 청파 이륙(李陸)은 원의 손자이다. 또, 인조 때 난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은 육의 현손이다. 2000년 인구조사에서 2만 6286가구에 8만 438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에 혜명동양학연구회 회원 30여명과 안동지역의 역사문화탐방을 했다. 안동지역은 주로 퇴계학맥을 이은 가문들이 학맥과 혼맥으로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와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지역이다. 임청각이라는 고택에서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4대에 걸쳐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석주의 아우인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이운형(애족장), 이형국(애국장), 이봉희의 아들인 이광민(독립장), 친아들 이준형(애국장), 친손자 이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고성 이씨의 대표적인 인물로 세종 때 청백리로 좌의정을 지낸 철성부원군 용헌(容軒) 이원(李原:1368~1429)이 있다. 이원의 일곱 아들 가운데 여섯째 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안동의 입향조이다. 이증의 둘째 아들 이굉이 낙동강과 반변천이 합수하는 와부탄에 귀래정(歸來亭)을 건립하고, 셋째 아들 이명이 보물 182호로 지정된 임청각(臨淸閣)을 건립한다. 이명의 막내아들 이굉(李肱)도 반구정(伴鷗亭)을 건립하여, 이굉의 아들 이용이 만년을 보냈다. 그로부터 400년 동안 후손들 대부분이 중앙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고 은둔의 명문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임청각 출신 한 여성이 함재 서해(1537~1559)에게 출가하여, 대구 서씨를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린 약봉 서성(1558~1631)을 안동시 일직면 소호헌(보물 475호)에서 낳았다. 이 사람이 이명의 다섯째 아들 무금정 이고(無禁亭 李股)의 무남독녀이다. 약봉의 어머니는 약봉이 두살 때 남편이 23세로 요절하자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하여 한양의 약현(藥峴)으로 이사하면서 자녀 교육에 앞장서 문과 급제자 105명, 3대 정승에 3대 대제학, 8대가 연속하여 과거에 급제하는 등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대구 서씨의 산파 역할을 했다.
고성 이씨가 약봉 서성을 키우면서 만들어 판 것이 지금의 약주, 약식, 약과의 명칭이 되었다. 약봉은 부친이 퇴계학맥을 이었으나 본인은 기호학파의 율곡 이이와 구봉 송익필의 학맥을 이어서 사계 김장생과 동문수학하여 5도 관찰사와 3조의 판서를 역임해 ‘행정의 달인’으로 통했다. 약봉의 네 아들 경우·경수·경빈·경주 중에서 서경우는 우의정에 오르고,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가 되었다. 4형제 중에서도 둘째 경수와 넷째 경주의 집이 특히 번창하여 경수의 현손 서종제(徐宗悌)의 딸이 영조비가 되고, 종제의 현손 서용보(徐龍輔)가 영의정이 되었으며, 서경주의 집에서 영의정 6명과 좌의정 1명, 대제학 5명이 나왔다. 또 서명응·서호수·서유구의 3대는 다 같이 문명이 높았다. 이와 같이 약봉집은 선조에서 고종에 이르는 약 300년간 정계를 주름잡았으며, 구한말 개화파의 서광범과 서재필 등을 배출했다. 현재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도 이 집안 출신이다. 임청각 출신의 한 여성이 외동아들을 잘 가르쳐 손자 4명-증손 15명-현손 53명의 대가족을 이루면서 모두 현달시킨 위대한 한국의 어머니가 되었다.
한편 임청각 이명의 손자 이용의 딸이 서애의 형인 겸암 류운룡가로 출가한다. 이분이 서애의 형수인 고성 이씨이다. 이명의 증손 이복원의 큰딸이 임진왜란 때 순국한 호남의 명문가인 창평 고씨 제봉 고경명의 맏며느리로 출가한다. 서애 이후 270년 만에 영남사람으로 흥선군 때 재상에 오른 서애의 후손 류후조의 외가도 임청각이다. 애국시인 이육사의 종고모도 임청각 출신으로 퇴계의 진성이씨가로 출가한다. 이런 면에서 임청각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전통 사회에서 ‘현모양처’의 산실 역할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고택이라 할 수 있다. 임청각의 산실방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역사를 감상하는 것도 매우 좋을 듯 싶다.
나)임청각과 독립운동
이 고택에서 석주 이상룡을 비롯해 무려 9명의 독립운동가가 태어났다. 석주와 함께 간도 망명을 떠났던 당숙 이승화(애족장), 석주의 아우인 이상동(애족장), 이봉희(독립장), 조카로 상동의 아들인 이운형(애족장), 이형국(애국장), 이봉희의 아들인 이광민(독립장), 친아들 이준형(애국장), 친손자 이병화(독립장)가 그들이다. 당숙 이승화 선생까지 넣으면 모두 4대에 걸쳐 독립운동을 했다. 참고적으로 건국훈장인 1등급인 대한민국장, 2등급인 대통령장, 3급인 독립장,4급인 애국장,5급인 애족장이 있다. 약9000여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석주 이상룡 선생의 행적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처가에 관한 것이다.
석주의 처남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1845~ 1914)에게는 3명의 누이가 있었다. 이들 중 맏이는 석주 이상룡의 부인이다. 이들 중 막내는 기암 이중업에게 출가, 경술국치 때 단식으로 자결한 진성이씨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의 며느리가 되었다. 이분이 바로 안동의 3·1운동 때 예안시위에 참가했다가 수비대에 잡혀 두 눈을 잃은 여성 독립운동가 김락(金洛) 여사다. 백하의 집안도 석주의 집안과 마찬가지로 온 문중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고성 이씨의 입향조 형제 조카들은 모두 대단한 학자로 무오·갑자사화에 절개를 지켜 명문으로 기틀을 다졌다 이후에도 많은 인물이 나와 안동 양반사회에서 도산서원 원장과 함께 최고의 명예직으로 삼고 있는 안동좌수(座首)를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배출하였다. 애국시인 이육사 형제들은 어려서부터 종고모 집인 읍내의 임청각에 드나들며 함께 지내기도 하였다.
석주선생은 1858년 경북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유림 명문 이승목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본관은 고성(固城)으로 어릴 때 이름은 상희(象義), 호는 석주(石洲)이며,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후 상룡(相龍)으로 개명하였습니다. 평생 부귀를 누릴 수 있는 석주선생이 조국과 종갓집, 조상 산소와 수많은 전답을 남겨 둔 채 삭풍이 휘몰아치는 정월에 만주 땅으로 떠났으니, 그 감회는 창자를 자르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일찍이 석주선생은 퇴계학 전통을 이은 서산 김흥락(金興落)문하에 들어가서 학문을 익혔다.
그 후 석주는 일제의 근대식 군사력에 대항하는 승산 없는 의병항쟁 대신 새로운 방향의 구국운동을 모색한다. 이때부터 그는 새로운 문물에 눈뜨기 위해 동서양의 새로 나온 서적을 백방으로 구하여 열심히 읽었다. 신학문으로 서양의 민주제도에 눈을 뜬 후, 먼저 집안의 노비 문서부터 불살라 버리고 종들도 모두 해방시켰다. 또한 그는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 등과 더불어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을 전개하고 1907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여 후진양성에 나선다.
1909년 6월에는 계몽단체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를 결성, 회장에 선출되었고 경술국치 후 석주는 1911년 1월 양기탁(梁起鐸)과 협의 후 뜻을 굳히고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여 중국 동삼성으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그의 망명길에는 그의 뜻에 동조하는 친척과 동지 50여 가구가 동행하였다. 53세의 나이에 항일투쟁을 위해 자신의 고향땅을 떠나 이역만리로 간다는 것은 예사 사람이 내릴 수 있는 결단은 아니었다. 이상룡이 낯선 간도 땅에 도착하여 처음 정착한 곳은 길림성 유하현 삼원보였다. 그는 먼저 도착한 이동녕(李東寧),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휘(李東輝) 등과 더불어 그곳에 새로운 생활의 터전이자 해외 독립운동의 구심체가 되는 독립군 기지 개척을 시작했다.
이상룡은 우선 동지들과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 사장을 맡아 벼농사를 보급하고 한인의 경제적 안정과 법적지위 보장 등 이주기반을 마련하는 데 주력했다. 그때까지 국경을 넘어온 동포들이 대부분 값싼 황무지를 빌어 화전 농사로 가난을 면치 못한 것을 본 그는, 삼원포 일대의 넓고 기름진 땅을 빌어 억새풀을 베어내고 벼농사를 짓게 하여 비로소 동포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했다. 간도에서의 벼농사는 이때 한인(韓人)들이 처음 시작한 것이다.
동지들과 합의 하에 신흥학교를 설립하고 국내외 청년들을 모아 문무를 겸한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신흥학교는 그 이후 신흥무관학교로 발전,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후일 항일 전선에 앞장서게 된다. 경학사는 거듭된 흉작과 토착민들의 반발 등 어려움을 극복하고 부민단(扶民團, 1912)과 한족회(韓族會, 1919)로 개편 발전하며 한인사회의 토착화에 기여했다.
1925년 상해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지도체제를 대통령 중심에서 내각책임제에 해당하는 국무령제로 바꾸었으며 이상룡을 초대 국무령에 선출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간의 대립으로 인한 임시정부의 내분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이에 크게 낙담한 이상룡은 임정 국무령직을 사임하고 서간도로 돌아왔다. 서간도로 돌아온 그는 1928년 5월,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만이라도 통합을 이루기 위해 대표적 독립운동 조직인 정의부(正義府)와 참의부(參議府) 및 신민부(新民府)의 삼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1931년 9월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 지역을 장악한 일제가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수립함으로써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그는 그해 5월에 길림성 서란 소성자에서 병을 얻어 그렇게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외세 때문에 주저하지 말고 더욱 힘써 목적을 관철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영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그의 공로를 높이 사서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8).국보인 신세동 7층전탑
전탑이란 구운 벽돌인 전(塼)으로 만든 탑이다. 전탑 역시 중국의 전탑에서 전래된 것이다. 신라 불탑의 변천과정은 목탑이 먼저 발생하고, 그 다음 목탑을 모방한 모전 석탑이, 그 다음에 석탑이 출현하고,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전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학계에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형태로만 본다면 전탑에서 모전석탑이 모전석탑에서 석탑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전탑은 대부분 안동지방에 집중되어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이 지역에 전탑이 집중되어 있는 이유는 밝혀지고 있지 않다.
전탑이 넓은 지역과 시간에서 유행하지 못한 이유는 재료의 획득과 조탑이 어려운 점, 붕괴가 쉬운 점 등을 들 수 있다. 한국의 전탑은 4각이며, 기단이 단순화되어 낮은 단층기단이 일반적이다. 중국의 전탑이 내부공간이 있는 반면, 한국의 전탑은 내부공간이 전혀 없거나 공간이 간략화된 감실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옥개(지붕)는 층급(층단)을 이루고, 기와를 얹은 흔적이 보인다. 전탑은 대부분이 경북지방에 분포하며 송림사 5층전탑, 안동 조탑동 5층전탑, 안동 동부동 5층전탑, 안동 신세동 7층전탑, 여주신륵사 다층전탑, 안동 금계동 다층전탑 등이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 된 전탑으로 8세기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되었다. 높이 17m,기단부 7.5m. '신세동'은 1962년 국보 지정 당시의 동네 이름이었다. 이 탑이 있는 지명이 '법흥(法興)'인 점으로 미루어 법흥사에 속했던 것으로 추측되나 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법흥사지(法興寺址)에는 고성(固城) 이씨(李氏) 탑동파(塔洞派) 종택(宗宅)이 들어서 있으며 탑은 바로 문간 앞에 자리잡고 있다. 이 탑은 기단부와 탑신부 및 탑두부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 탑두부는 노반에 남아 있고 상륜부는 유실되었다. 기단부에는 네모꼴로 팔부중상(八部衆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과 12지신을 양각한 판석(板石)을 세워 축조했다. 탑신부는 진회색의 무늬없는 벽돌을 어긋나게 쌓아 올렸다.
기단은 8부중상과 사천왕상을 양각한 판석을 1면에 6매씩 합계 16매를 세웠고, 그 윗면과 1층탑신까지는 시멘트로 발라서 원래의 모습을 훼손하여, 보기에 딱하다. 1층 탑신의 남면에는 감실이 있으며, 탑신은 2층부터 급격히 체감하고, 옥개석의 받침수는 1층부터 9,8,7,6,5,5,3단으로 줄어들며, 낙수면의 층단수는 10,9,8,7,6,4,3단으로 줄어든다. 탑신 괴임은 각층마다 2단의 벽돌을 쌓아 설치하였다. 옥개석 윗면의 곳곳에는 기와가 남아있어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있다. 이는 목탑이 전탑보다 앞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9.안동댐과 월영교,민속박물관
한 부부의 아름답고 숭고한 사랑이 간직되어 있는 나무다리이다. 먼저 간 남편을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한 켤레의 미투리를 지은 지어미의 애절하고 숭고한 사랑을 기념하고자 미투리 모양을 담아 다리를 지었다고 한다. 2003년 개통되었으며 길이 387m, 너비 3.6m로 국내에서는 가장 긴 목책 인도교이다. 다리 한가운데에는 월영정(月映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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