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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누림이신 그리스도 -
1. 서언
로마서를 끝내고 고린도전서로 넘어가려고 한다. 로마서의 개요를 보면 인간의 절망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복음적 대책이라는 큰 주제를 갖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절망적 상태다. 이것을 모르면 인간의 여러 가지 면이 다 절망이 될 수 있다. 돈이 없는 것도 절망이고 건강하지 못한 것도 절망이고 취직 못한 것도 절망이고 실연을 해도 절망이고 온갖 것이 다 절망이다. 그런데 인간의 진짜 절망적 상태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 그런 절망들은 아주 잡다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나도 건강으로 생각한다면 어려서부터이니까 절망적 상태다. 그렇지만 그때는 그것이 절망인 줄 알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이 절망이 아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도록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한 것이 절망적 상태다. 내가 건강하게 70평생을 살았더라도 뭐가 나오겠는가? 나올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80세를 살고 90세를 살고 100세를 살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건강하게 살았다는 그것밖에 없다.
창세기 5장에 보면 그들이 몇 세를 향수하고 죽었다고 되어있다. 보통 800세 900세인데 향수하고 죽었다는 말은 잘 살고 죽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묘비에도 잘 살고 죽었다, 건강하게 살고 죽었다, 잘 먹고 죽었다고 쓰면 안되지 않겠는가?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다고 하면 안된다. 항상 뭐가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되었다고 쓰면 절망적인 것이다.
살아있을 동안에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이 대책을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구속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다. 인간의 의는 내놓을 것이 없고 절망적인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내놓은 것이다. 자기 의는 아들을 주어서 그 아들로 하여금 우리에게 구속을 이루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다. 이 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의 의라고 한다. 옛날에는 우리가 만든 의를 의라고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내놓은 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는 화목에 이른다. 이것이 제 일단락의 구원이다. 3장부터 5장까지가 하나님의 의이신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믿음으로서의 의, 그리고 화목, 이것으로 하나의 구원이 완성된다.
두 번째 단락 6장에서는 연합이다. 죽음 안에서 연합하듯이 살으심 안에서 연합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7장에 가면 결혼이 나온다. 연합이 되었으니 결혼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8장에 가면 그 영의 해방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포함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포함된 구원이다.
세 번째 단락은 9장부터 11장까지인데, 긍휼의 그릇으로 우리를 선택했다. 보배를 담을 긍휼의 그릇으로 우리를 선택된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다. 그 선택된 그릇을 위해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도 끝나고 사람도 끝나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접붙임에 이르렀다. 두 나무를 접붙이려고 하면 두 나무가 다 잘라져야 된다. 하나님의 율법도 끝나고 사람의 의도 끝나고 두 나무가 접붙여졌다.
로마서의 절정은 이 접붙임에 있다고 생각된다. 한번 접붙여지면 한 나무가 되는 것이다. 나무의 본성은 다르지만 한 나무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 구원의 최종적인 경륜의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 접붙임을 받았고, 이 접붙임을 향해서 이 접붙임의 완성을 위해서 가는 것이다. 이것을 8장에서는 다른 말로 표현했는데,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표현했다.
이렇게 세 번의 단계를 거쳐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와 인간의 절망적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복음)의 대책에 대하여 아주 논리 정연하게 말씀한 것이 로마서다.
그리고 12장 이후에는 교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교회로 귀결되기 위해서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집을 짓기 위한 먼저 재료를 준비하듯이 교회의 재료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영관이와 놀면 장난감을 갖고 논다. 그냥 집을 짓거나 다리 공사를 하는데처음에는 노아의 방주를 짓다가 지금은 다리 공사를 하게 된다. 내가 일부러 가르치기 위해서 재료를 먼저 준비하고 정리하고 건축하자고 할 때마다 이야기를 한다. 재료를 아무렇게나 놓아두면 일할 때 복잡하니까 다 정리해두고 하면 쉽다고 재료 정리를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제는 당연히 재료부터 정리할 줄 알고 있다. 우리 인생도 재료가 정리되어야 무엇을 할 수 있지 재료가 정리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암시적인 것이지만 나는 아이에게 계속 이야기한다. 그래서 영관이가 재료 정리하자고 한다. 그리고 어떤 물건을 찾다가 찾지 못하는 수가 있다. 그러면 영관이가 찾고 싶은 물건은 꼭 한 자리에 두어야 다음에 찾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찾지 못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영관이가 보석이라고 하는 구슬이 3개 있는데 그것을 꼭 한 자리에 두라고 하여 항상 제 자리로 돌아오는 돌려놓은 것을 의식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점점 자기가 그렇게 의시되어서 자기 생각처럼 되게 되면 이것은 여기에 놓아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어디에 놓을 것인지? 어느 위치에 놓을 것인지? 이런 것들이 개념이 잡힐 것이라고 생각된다.
로마서는 교회를 건축하기 위한 완벽한 재료를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린도전서는 이렇게 접붙임 받고 화목되고 결혼이 되었다. 그렇게 되었으면 이것을 그냥 그대로 놓아두면 안되고, 이것을 아주 유일한 분깃으로 누려야 된다는 것이다. 인생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요지부동이다. 내가 아무리 천사가 좋다고 해서 천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아무리 버러지 같은 것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버러지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일한 선택이다. 하나님의 선택이다. 우리는 이것을 좋으니 나쁘니 해서는 안되고, 이것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누릴 수 있는가?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얼마만큼 알며 얼마만큼 인식하며 얼마만큼 누릴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과제이다. 잘 만들어졌는가, 못 만들어졌는가는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만들어진 그대로 우리는 100%로 풀어 누리는 것이 행복이다. 어떤 사람이 태어날 때 발이 하나 없이 태어났다고 하자. 그렇다고 발을 하나 새로 만들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발이 하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그 육체를 자기가 100% 누려야 한다. 발 하나가 없다고 매일 한탄하고 있으면 있는 하나마저도 누릴 수가 없다. 그러나 발이 하나 없게 태어났다면 그 하나라도 100% 누리면 둘을 가진 사람보다 더 유용하게 누릴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는 우리의 분깃으로 주신 그리스도를 100%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렇기 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아주 복잡한 문제가 많이 있어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쓰여진 것이다. 이런 문제를 사항 하나하나를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이 모든 문제가 생긴 것은 우리의 복인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한 것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모든 문제를 생각하면 우리 인생의 문제가 많다. 이런 문제도 있고 저런 문제도 있고 괴로운 문제도 많다. 이런 문제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인생에게 주신 분복을 우리가 올바로 온전하게 누리지 못한 결과에서 온 것이다. 기계는 좋은 기계라도 100% 사용하지 못하면 오히려 해가 되어버린다. 컴퓨터를 아무리 좋은 것을 갖다놓았다 하더라도 잘 사용하지 못하면 괜히 방안만 시끄럽게 된다. 잘 사용하면 유익하지만 잘못 사용하면 무익하고 오히려 해가 되는 경우가 생기게 된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이 주신 분깃을 잘 누리면 복이 되고, 잘 누리지 못하면 저주가 된다. 우리가 새로 만들 수는 없다. 인생을 내가 새로 만들 수는 없다. 단지 누리는 것만 인생에 주어진 축복이다.
1. 교회설립 배경
교회 설립의 배경을 보면, 사도행전 18장에 어떻게 고린도 교회가 생겼는지를 알 수 있다. 사도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덴 사람들이 도무지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다. 아덴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희랍의 중심 도시이니까 그곳은 철학이 많고 이론도 많고 그러다보니 괴변도 많은 곳이다. 바울이 기껏 말씀을 전해놓으면 일리가 있으니 내일도 한번 해보라는 식이고 말 잘한다는 식으로 김빠지게 한다. 그래서 바울이 도저히 안되겠다하여 아덴을 떠나게 되어, 도착한 것이 고린도다.
고린도에 와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로라는 두 사람을 만나는데, 이 두 사람이 다 장막 치는 없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천막제조업자들이다. 바울도 천막 치는 사람이므로 동업자로 같이 만나게 되었다. 동업을 하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증거했는데 유대인들이 가는 곳마다 방해를 하고 가는 곳마다 핍박하는 것이다. 결국은 유대인들을 떠나서 이방인들에게로 가게 된다.
고린도 교회는 원래 이방 땅이지만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이 듣지 않아서 이방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게 되었다. 그래서 이방 도시의 대표적인 도시가 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했다. 하나님, 율법, 성경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 가게 되었다.
복음의 내용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하나님이나 율법을 아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이 전하고 싶은 복음이 아니다.
그래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가 되었다. 여기서 18개월 동안 머물렀다고 되어있다. 이것이 A.D. 51년경이라고 한다.
2. 편지를 쓴 배경
거기서 18개월 동안 복음을 전했는데, 그 뒤로 에베소 교회에 가있는데 여러 소식들이 들려왔고, 그리고 질문에 대한 편지가 왔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쓰여진 것이 고린도전서다. 얼른 보면 문제 해결을 위한 편지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속에 하나님의 깊은 마음이 들어있고 경륜이 들어있다. 내용은 아까 말한 대로 이미 그리스도가 주어졌다. 이렇게 복된 인생이 주어졌고 복된 축복이 주어졌으니 이것을 너희가 완전하게 누려야지 왜 다른 것이 집념하느냐는 것이다. 다른 것에 집념하기 때문에 시끄러워진 것이므로 오직 그리스도만 누려야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를 쓴 배경이 바로 그렇다.
혼인 문제,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영적 은사들을 사용하는 문제, 예루살렘 교회 연보 문제, 파벌 분쟁 문제, 음행 문제, 시비에 대한 소송 문제, 주의 만찬을 남용하는 문제, 부활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제시되었다. 이것은 바로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의미한다.
이 문제들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도 되지만 이 문제들의 모든 중심이 그리스도를 누리지 못함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누림으로서만 이것이 온전하게 해결된다는 것이 중심사상이다.
편지는 A.D. 55년경에 쓰여진 편지라고 하고, 에베소 교회에 있으면서 고린도로 보낸 편지다.
3. 고린도전서의 주요 기조가 되는 사람
고린도전서의 주요 기조가 되는 사상은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유일한 분깃으로 누려야 한다는 것이다. 10장 3절 4절에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그리스도시라”고 한다. 이것은 출애굽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이 한 음식을 먹고 한 음료를 마셨다. 이 한 음식과 한 음료를 먹고 마셨다는 것이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러니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 먹고 사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 먹었는가? 광야에서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만 먹었다. 우리도 오직 그리스도만 먹어야 된다는 이야기다.
3.1.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떨쳐 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취해야 함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을 떨쳐버리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것으로 취해야 한다. 우리의 교회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것을 목표로 한 것이다.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있다. 생각하려면 한도 없이 복잡하다. 인생 문제가 얼마나 많은가! 불교에서는 번뇌가 108가지라고 한다. 108번뇌라고 한다. 사람의 생각 속에 있는 문제가 108개나 된다는 말이다. 그것도 또 생길 것이니까 108개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의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는 또 생기고 또 생길 것이므로 수없이 많다. 인생의 문제는 많지만 이 모든 것을 다 떨쳐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 취해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고 한다. 너무나 단순 명료하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하고, 이것도 알아야 되고 저것도 알아야 되지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만 알아서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하고 사람들이 생각하기가 쉽다. 밥만 먹고 어떻게 사느냐는 것과 똑같다. 사실은 알고 보면 밥만 먹고 사는 것인데, 밥만 먹고도 사느냐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다.
완전식품은 그것만 먹고도 살아간다. 밀가루는 밀가루만 먹고 살아가기가 어렵다. 고기는 고기만 먹고 살기가 어렵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낙농업이 발달했다. 밀을 주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자연히 고기(기름기)가 필요했다. 밀가루만 계속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 기름기가 들어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 밀가루는 뽑아내는 성질을 갖고 있다. 옛날에 종기가 나면 밀가루를 붙였는데 뽑아내라고 붙인 것이다. 우리 몸에 들어가도 훑어내는 역할을 하므로 고기를 먹어주어야 된다. 그래서 우유가 나오게 되고 소를 키우게 되고 돼지를 키우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왜 그런 것이 없었는가? 쌀이 완전식품이다. 쌀만 먹고도 산다. 반찬을 먹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고 쌀만 먹고도 산다. 현미를 먹는다면 그렇다. 현미 안에는 모든 것이 고루 들어있다. 너무나 좋은 것이 있다 보니까 낙농업이 필요 없었다. 지게가 너무 편리해서 자동차를 발명하지 못했다는 이어령씨의 말처럼, 쌀이 너무 좋아서 낙농업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우리가 처음 생각하면 어떻게 그것을 가지고 인생 문제가 해결되겠는가 하고 생각하지만 직접 누려보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면 해답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출애굽 때 마라에 왔을 때 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어떤 나무를 던지라고 해서 던졌더니 물이 달아졌다는 말이 있다. 그 나무가 무엇인가? 그 나무가 십자가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우리의 쓴 환경, 쓰다는 것은 괴롭다는 말이다. 쓰다는 말을 쓸 때 쓰다는 苦를 쓰는데 그 苦가 괴로울 苦다. 쓰다는 것은 괴롭다는 말인데 그 모든 괴로운 것 속에 십자가를 넣으면 다 단 것이 되어버린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놓고 보면 아무것도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이 다 어디로 사라져버린다. 내 인생이 무엇인가? 한 줌의 흙이 아닌가!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는가?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부자가 농사를 지어 농사가 잘되어 저장을 하려면 창고를 지어야 되고, 창고를 지으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또 창고를 지어 놓으면 지킬 사람이 있어야 되고, 지킬 사람을 구하려니까 믿을만한 사람이 있어야 되고, 문제가 갈수록 많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꼭 안심할 수는 없어 철조망을 쳐야 되고, 철조망을 쳤지만 철조망을 끊고 들어올 놈 때문에 거기에 전기를 가설해야 되고, 복잡하다. 그리고 세콤을 설치해야 되고 자꾸 자꾸 복잡해진다. 그랬더니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대답할 말이 없다.
옛날에 중학생 한명이 고민이 있어 왔다. 여학생을 사귀었는데, 둘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둘이 신학교를 가서 목사가 되기로 했는데 갑자기 새치기 하는 놈이 생겨 고민이 생겼고 이번 금요일까지 결단의 해답을 달라고 했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어리석은 부자를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이야기가 꼭 자기 이야기 같다고 했다. 네가 지금 중학생인데 지금 네가 중학교를 졸업할지 못할지 아느냐? 또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제대로 다닐지 다니지 않을지를 아느냐? 그때까지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을 아느냐? 아무것도 알지 모르지 않느냐? 지금부터 왜 근심을 당겨서 하느냐고 했다. 뒤로 들어보니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그 아이 나이가 30세가 넘은 후에 우연히 동산병원에 갔는데 어느 녀석이 일어나더니 목사님 아니냐고 한다. 자기를 알겠냐고 하여 안다고 했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모를 리가 있겠는가. 오토바이를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서 입원을 했는데 옆에 아내 같아 보이는 여자가 간호하려고 와 있었는데 그 여자가 그때 여학생이 아님은 분명할 것이다. 내가 물어보려고 하다가 틀림없이 아닐 것이기 때문에 물어보지 않았다.
그리스도 이외의 모든 것은 언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의 모든 것을 취해야 한다. 교회 올 때만 그리스도가 아니고, 찬양하고 간증하기 위해서만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우리 인생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있으면 간단한 문제다. 아마 그 학생도 그렇게 알고 인생을 살았더라면 아마도 중학교도 제대로 졸업했을 것이고,고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했을 것이고, 대학교도 졸업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리 당겨서 염려하는 바람에 중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미리 우리가 당겨서 생각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오직 지금 이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못 박히신 그리스도 이외에는 내가 알려고 하지를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를 복잡한 것이 많아 하는 말이다.
3.2.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깃이심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깃이다. 왜냐하면 인생이라는 이 자리는 유일한 분깃이다. 흙으로 빚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되게 했다는 것은 빈 그릇이고 밭이라는 말이다. 밭이라는 말은 씨가 무슨 씨가 오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다. 빈 그릇이라는 말은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어제까지 보화를 담았던 그릇이라 하더라도 오늘 똥을 담으면 똥 그릇이 되는 것이고, 어제까지 똥을 담았던 그릇이라 하더라도 씻어서 보화를 담으면 보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이다. 그러면 인생을 너무 비하시키는 것이 아니냐? 인생을 그렇게 무시할 수 있느냐? 달나라까지 올라가는데 인생을 빈 그릇이라고 하면 되는가 할지 모르지만 그 빈 그릇이라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다. 오늘 비록 똥을 담아놓은 그릇이라고 하더라도 임금님의 수라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이보다 더 축복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달나라 간 것과 비교가 안되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른다. 빈 그릇이라는 것이 내 분깃이라는 것을 모른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인생은 빈 그릇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노래에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 운명이 우리의 유일한 분깃이다. 이 분깃을 100% 살려내고, 100% 누려야 된다. 그릇은 그릇으로만 100% 사용되면 축복이다. 그런데 그릇이 내가 왜 빈 그릇이 되었는가? 나는 왜 탑이 되지 못했는가? 왜 방망이가 되지 못했는가? 이렇게 하고 있으면 그릇으로 누릴 것을 누리지 못한다. 누가 보물을 가지고 와서 담자고 해도 자존심이 상해 담지 않으려 할 것이다. 나를 왜 빈 그릇으로 생각하고 가지고 왔느냐는 것이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여 나에게 담아서 덕 보려고 생각하느냐고 하면 빈 그릇으로의 축복을 누리지 못한다. 빈 그릇이니까 뭘 좀 담자고 왔으면 내놓으면 될 텐데 자존심 때문에 내놓지 않으면 보물을 가지고 왔는지 달러를 가지고 왔는지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항상 더 큰 것을 주신 분이고,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을 주신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열어놓아야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분깃은 이것이다. 다른 것은 다 없어질 수 있고 다 망할 수 있고 다 소멸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가 만든 것들, 내가 나라고 만들어놓은 모든 것들은 다 허무하게 부서질 것들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만들어서 우리에게 주신 것, 이것이 인생이라고 주신 것은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절대로 없어질 수가 없다.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죽음 그 자체도 그 그릇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사람들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끝난 것이 아니고 그것이 바로 그릇이다. 거기에 하나님이 오셨다. 죽었는데 하나님이 왔다. 죽었는데 부활이 왔다. 그러니까 죽음도 축복인 것이다. 죽음 자체도 빈 그릇을 완전하게 나타낸 것이 죽음이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이라고 골로새서 1장 12절은 말했는데, 그리스도는 성도의 기업의 부분이라고 한다. 우리의 유일한 기업으로 알아야 한다. 구약시대에는 이 기업 때문에 기업을 얻으려고 온갖 싸움을 다했다.
3.3.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심이심
그리스도는 우리의 유일한 중심이다. 여기서 그들의 주요 우리의 주라고 한다. 고린도 1장 1절부터 13절까지 읽으면, 우리의 중심이다. 우리의 주요 또 저희의 주다는 말은 우리의 것이요 또 저희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신 분깃으로서 우리 것이고 내 것이다. 여러분의 것이고 내 것이다. 이미 하나님이 주셔서 내 소유가 되었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이다. 우리말 성경에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고전1:2)라고 번역했는데, 직역하면 그들의 것과 우리의 것인 그리스도라는 말이 된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 것이라고 알아야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나구나.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사람이 남이 아니고 나구나. 옛날 아담 이야기가 아니고 신화가 아니고 그것이 바로 나구나. 그것을 알아야 된다. 우리는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다. 숨이 코에 붙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산혼이다. 이 산혼이 바로 빈 그릇이다. 빈 밭이다. 씨를 기다리는 밭이고, 보물을 기다리는 그릇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내 분깃임을 알아야 된다. 그리스도가 내 중심임을 알아야 된다. 내 유일한 중심이 그리스도다.
3.4. 그리스도는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이심
그리스도는 우리의 문제 해결의 유일한 열쇠기이기도 하다. 아까 말씀 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 문제가 생기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나로 생각되면 문제가 다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내가 아니고 2000년 전에 갈보리에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교회의 아무 아무개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우리 교회도 여러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사람이 바로 나다. 우리 자신이다. 남이 아니다.
석가모니는 내가 아니다. 그분의 공력과 도력은 내가 아니다. 내가 할 수가 없다. 아무리 내가 가지려고 해도 가질 수가 없다. 무슨 수로 갖겠는가? 그 고생을 해서 얻어놓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그냥 얻겠는가? 석가의 고행상이라는 것이 있는데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상이 있다. 얼마나 굶고 고생을 했으면 뼈와 가죽만 남았겠는가? 그런 속에서 도를 깨달았다는 것이 불교사상이다. 그렇게 깨달은 것을 어떻게 내 것으로 갖겠는가? 나도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갖지 세상에 공짜라는 것은 없다.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공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똑같은 사람이다. 우리가 어디가 틀린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과 내가 무엇이 틀린가? 아무것도 틀리지 않는다. 우리의 지위나 명예를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을 그것밖에 없다. 진짜 남는 것은 그것밖에 없으므로 절대로 남이 아니다. 그런데 하늘에 있는 분으로 경배만 자꾸 하다보니까 아주 멀리 계신 당신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종교화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멀리 멀리 보내놓았다. 높고 멀리 보내놓았다. 그랬으니 우리에게 얼마나 큰 손실인가? 우리 자신을 멀리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저 하늘에 있는 사람으로 특별한 사람으로 아무나 갈 수 없는 사람으로 아주 놀라운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석가모니는 그것이 맞고 공자님도 그것이 맞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일 때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왜 계속 그대로 나가지 않는가? 그대로 나가지 않으신 것이 우리에게 복이다. 그분이 만일 끝까지 그런 식으로 나갔으면 우리는 그분이 석가모니나 공자님과 똑같이 기이한 사람이 돼버리고 만다.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운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분은 값없이 얻는 복이다. 우리가 노력한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뭐가 되려고 하던 모든 노력을 정지(중지)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할 일이 없게 돼버렸다. 자기를 위해서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자기를 쌓기 위해서 하던 모든 노력이 다 끝나버렸다. 그분을 만나면 다 끝난다.
30년 전에 내가 이분을 알고 나서 보니까 그동안 내가 큰 야망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고 굉장한 것을 기대한 사람도 아니지만 그래도 그동안 나도 뭔가가 되려고 많이 노력했던 사람이다. 뭔가 그 세계에서 되어보려고 많이 하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안식이 없었다. 그것이 다 중지되고 없어져 버린다. 할 일이 하나도 없어져 버린다. 할 일이 하나도 없어져 버리니 얼마나 편하고 좋은가! 그렇다고 내가 전도를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를 위해서 뭔가를 만들려고 하던 것이 없어져버렸다는 말이다. 인생을 피곤하게 하는 것은 자기를 세우려고 하기 때문에 피곤하다. 나를 세워서 어떻게 해서든지 세상 앞에 인정받으려고 하다보니까 피곤한 것이지 그냥 있는 대로 살려면 피곤할 필요가 아무것도 없다. 옛날에 시골에서 나무 한 짐 해 와서 점심 얻어먹던 사람들은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다. 고구마만 먹어도 피곤하지 않았다. 요즘은 참 잘 살지만 피곤하다.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피곤하다. 왜? 자기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남이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된다. 그렇게 때문에 자기를 세워야 되는 일이 피곤한 일이다. 허수아비도 세워놓으려면 힘이 든다. 우리 집 앞에 허수아비를 세워놓았는데 내 생각에 저 놈들도 피곤하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내가 그렇게 서있다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24시간을 서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고 눕도록 해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계속 서 있기만 하라고 했으면 죽을 지경일 것인데 피곤하면 눕도록 자유를 주어서 우리가 지금 안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누워라. 너 할 일은 없고 내가 이미 너를 그렇게 만들어놓았으니까 만들어놓은 것을 더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만들어놓은 그대로 살라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네가 100% 누리면 너는 너무너무 풍족하고 너무 행복해질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을 누릴 줄 모르고 막 덮개를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만들어주었는데 왜 또 만들려고 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어놓으시고 안식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안식이 안된다. 왜? 자기가 서야 되기 때문에 안식이 안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보면 내 운명을 알고 나면 내가 더 만들 수가 없다. 어떻게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을 바꾸겠는가? 오늘 밤이라도 내 영혼을 부르면 가야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바꾸겠는가? 바꿀 방법이 없다. 그것이 인생인데 그것이 인생인줄 모르고 내가 만든 것이 인생인 줄 알았다. 그랬으니까 또 만들어야 되고 또 만들어야 되고 자꾸 만들려고 하다 보니까 힘이 들었다.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목이 뻣뻣하게 곧다. 내가 C.C.C.에 있을 때 여러 교회들을 방문해 보았다. 목사님들을 만나러 가면 어떤 목사님은 소탈한 목사님이 있는 반면 어떤 목사님은 목이 뻣뻣하게 굳어 고개 숙이는 것이 안된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자세히 보면 그 교회에서의 자기 위치가 불안하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더 자기를 세우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위치가 안정되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전혀 그런 것이 없다. 힘이 내려져 있다. 사람은 자기의 안정된 위치를 찾으려고 하니까 피곤한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안정된 위치를 주었다. 변할 수 없는 위치를 주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알면 우리는 어디에 있어도 편안할 수밖에 없다. 뒤로 생각해보니 그때 나도 힘을 주고 살았음을, 힘 줄 것도 없는데 힘을 주고 살았으니 얼마나 꼴볼견이었겠는가. 힘 있는 사람이 힘을 내면 괜찮지만 힘없는 사람이 힘 있는 척 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보고 그 사람이 나로 알고 나니까 더 이상 나를 위해 할 일이 없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이 몸에 그리스도를 보화로 받았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에게 줄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살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니까 내 인생이 단순하게 되었다. 아주 간단해졌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4)고 했다. 우리 인생을 해결하는 유일한 열쇠이다. 마스터 키다. 어디이든지 열어지지 않는 곳이 없다.
3.5.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우리 서로 사이의 교통의 중심임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 우리서로 사이의 교통의 중심이다. 우리가 교통, 교통하며 교제하는데 그 중심이 있어야 교제가 된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교제가 된다. 내 생각과 네 생각하면 교제가 안된다. 내 취향과 네 취향하면 교제가 안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중심이 될 때만 교통이 가능하다.
참된 교통은 그리스도만 중심이 될 때 참된 교통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 그 운명이 상에 차려져서 그 상에서 잔치를 해야 다 똑같은 것을 먹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소머리 놓고 돼지머리 놓고 잔치가 되겠는가? 안된다.
한 음식을 먹었다. 한 음료를 마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을 놓고 먹었다는 말이다. 상에 차려놓을 때 그 사람만 차려놓으면 우리는 다 화목하게 된다. 다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어떤 사람도 배탈날 일이 없는 음식이다. 그러니 교제가 잘되는데, 다른 음식을 놓아두면 교제가 안되는 것이다. 교리를 놓아둔다면 장로교와 침례교와 감리교를 놓으면 그릇마다 다른 음식이다. 하나는 장로교 음식이고 하나는 침례교 음식이고 하나는 감리교 음식이면 장로교인들은 장로교 음식만 먹을 것이고 감리교인들은 감리교 음식만 먹을 것이고 침례교인은 침례교 음식만 먹을 것이다. 그러니 교제가 되겠는가? 안된다. 남의 음식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먹으면 물들어서 이단이 될까봐 못 먹는다. 각자 자기 그릇가지고 자기 것 먹다가 가는 것이다. 옛날에 종교 통합한다고 몇 몇 종교 대표자들이 모인 적이 있었다. 그때 만평에 비아냥해놓은 것이 있다. 전부 앉아서 기도를 하는데 머리 위의 말풍선에 다 다른 것이다. 이것은 교통이 아니다.
우리 교통의 유일한 중심은 그리스도다. 우리가 교통을 할 때 나의 어떤 것을 갖고 교통해도 안되고 너의 어떤 것을 갖고 교통해도 안되고 오직 그리스도만 갖고 교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참된 교통에 이룰 수가 있다.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1:9)고 9절에서 말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의 중심이 된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고, 서론에 하는 말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 했다. 아주 지혜로운 말씀이다. 왜 너희는 싸우느냐고 말하지 않고, 먼저는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리스도가 해답이 되도록 제시한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역자의 태도다.
1) 어떤 은사, 지나치게 강조된 교리, 특별한 실행 등으로 빗나가지 않고 유일한 분깃이신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함
<어떤 은사>
고린도 교회는 은사 같은 것이 많이 있었다. 방언하는 사람, 예언하는 사람, 병 고치는 사람, 이런 은사들 때문에 교통이 안된다. 서로가 자기가 갖고 있는 은사가 다르니까 병 고치는 사람은 방언하는 사람에게 방언하면 무엇 하느냐, 병도 고치지 못하느냐고 한다. 어떤 사람은 병 고치면 무엇 하느냐, 방언해서 우리가 즐거워야지 한다. 그러므로 교통이 전혀 안된다.
오늘날 어느 교회에 가면 은사가 많은 교회들이 많다. 우리 교회는 그런 은사가 있던 사람도 없어져버리고 없다. 왜 없어지는가? 그런 것으로는 교통이 안된다. 시끄러워지지게 되어버린다. 은사를 찾다보면 방언파, 예언파, 병고치는 파로 갈라져버린다. 그러니 안된다.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있어서 유익하게 되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 우리 교회는 이런 일로 인해 시끄러운 일은 없다. 다른 교회 가면 그런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은 꿈도 더 잘 꾸는 사람, 방언도 더 잘하는 사람,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하는 사람, 여러 가지다. 서로 자기가 높다는 것이다. 방언만 하는 사람보다는 방언도 하고 통역도 하는 사람이 한 단계가 높다는 것이다. 병 고치는 것도 어떤 사람은 감기만 고치고, 어떤 사람은 암까지 고친다. 급수가 달라져 버린다. 그 사람에게 가면 암도 고쳐진다고 하는데 겨우 배탈이나 고치는 사람과 같겠는가.
은사는 서로 나누게 만드는 것이다. 서로가 각자 자기 것이 제일이라고 하게끔 만들어놓는다. 또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는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가진 은사만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의 은사를 다 존중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한다.
<지나치게 강조된 교리>
지나치게 강조된 교리가 있었다. 이 교리 때문에 기독교 역사는 피로 물들었다. 1세기 이후부터 이 교리적인 논쟁은 계속 되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은 이단으로 몰리고 축출당하고 어떤 사람은 정통이 되게 되었다. 1세기 사도들이 끝난 이후부터 바로 시작되었다.
가장 중심된 논쟁은 예수가 하나님이냐, 사람이냐는 논쟁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피터지게 싸운 것이다. 모여서 총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성토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죽일 권세가 없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국교가 되면서 다시 말하면 캐톨릭이 되면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통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어긋나는 것은 다 죽이는 것이다. 아주 극단적인 처형을 했다. 쇠기둥에 달아놓고 풀을 피워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 잔인하게 죽였다.
우리나라의 부관참시라는 있는데 죽은 후에도 다시 국문을 하여 벌을 주는 것이 부관참시다. 능지처참은 살았을 때 사지를 찢어 죽인다는 말이고, 부관참시는 죽었지만 죄를 다시 묻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부관참시보다도 훨씬 더 심한 부관참시가 있다. 죽은 지 300년이나 된 사람을 뼈를 파서 다시 재판했다. 하여튼 지독한 놈들이다. 이럴 때보면 인간이라 할 수가 없다.
그런데 150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거기에 대해 찬반논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그래야 된다는 사람이 있다. 왜? 교리를 지켜야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그것은 비인간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150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끝나지 않는 논쟁이다. 교리 논쟁이라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사람들은 교리 논쟁이라는 것이 간단한 것인 줄 알고 뛰어들어 교리논쟁을 하고 있다.
지금 구라파의 모든 문명의 마지막 집결지가 미국이다. 역사는 200년 밖에 안되지만 구라파 200년의 역사를 지나와서 마지막으로 만들어놓은 나라가 미국이다. 얼마나 잔인한 일이 많이 생겼으면 미국은 헌법에 정치와 종교를 완전히 분리하도록 명시해놓았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가 칼을 잡았을 때, 종교가 정치력을 가졌을 때, 엄청난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정치도 종교를 간섭하지 않고, 종교도 정치를 간섭하지 않도록 만들어놓았다. 정교분리 정책이다.
기독교인들은 잘못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면 피 흘리는 것이다. 종교에게 칼을 맡기는 것이고 총을 맡기는 것이다. 사람 죽이는 데는 지독하게 빠르다. 지금 모슬렘 계통이 정교가 일치되어 칼을 갖고 있으므로 무섭다.
지나치게 강조된 교리! 교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교리가 생명인 것처럼 매달리는 것은 결국 사람 죽이는 일밖에 안된다. 로마제국의 네로 같은 사람이 나와서 기독교인을 박해해서 죽인 숫자보다 기독교 자체가 이단이라고 해서 죽인 숫자가 더 많다고 한다. 그것이 역사에 밝혀진 사실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거기에 대해 반성이 없고 오히려 잘했고 그렇게 해야 된다는 사람이 정통이고,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사람이 오히려 잘못되어 버린다. 이것이 종교의 본성이다. 습성이다.
교리는 지나치게 강조되면 안된다. 교리는 없을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강조되면 안된다.
<특별한 실행>
또 특별한 실행이 있다. 예를 들어 기도도 하나의 실행이고 금식도 하나의 실행이고 성만찬도 하나의 실행이고, 종교마다 이런 실행이 있다. 지금 모슬렘 교도들은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절을 한다. 어디에 살든지 간에 그 땅에 그냥 엎드려 절을 한다. 일종의 실행이다.
이런 것들이 특별한 실행을 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과 구별된다. 다른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서 특별한 실행을 하고 있다. 이 교회가 갖고 있는 실행과 저 교회가 갖고 있는 실행이 다르면 서로 갈라진다. 예를 들면 침례교라는 말은 사람을 물에 담근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침례교라는 이름을 붙였는가? 성경에 침례교라는 말이 없는데 붙였다. 왜 그런가? 캐톨릭이 되면서 황제가 죽을 때 급해서 침례를 못하니까 물방울을 떨어뜨려 했다는 전설이 있는데 좌우간 약례를 하게 되었다. 물에 담그지 않고 그릇에 물을 가지고 와서 세 방울 정도 떨어뜨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고 했다. 그것이 안된다고 나온 것이 침례교다. 그래서 침례를 한 사람과 약례를 한 사람은 상종이 안된다. 나도 옛날에 많이 싸웠다. 나는 장로교 출신이기 때문에 약례를 받았다. 그것도 마음먹고 받은 것이다. 몇 년 동안 받지 않고 있다가 마음이 돌아서서 받았으니까 나로서는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 사람들이 오더니 침례를 자꾸 이야기하는 것이다. 속이 상해서 계속 싸우다가 성경을 찾아보니 약례라는 것은 한군데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잘못했구나하여 침례를 다시 받았다. 나는 약례도 받고 침례도 받은 사람이지만 그러나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다. 약례를 받았을 때는 옷이 젖지 않았고, 침례를 받았을 때는 옷이 젖었다는 차이밖에 없다. 왜 이렇게 사람이 어리석은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이 되어서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닌데 하나의 표현일 뿐인데 내가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일 뿐인데 그것을 가지고 갈라진다.
우리가 어떤 교회가 어떤 특별한 실행을 가지고 있다면 좋은 것 같지만 단합을 위해 좋은 것 같지만 이것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느 교회는 이런 것을 한다더라고 하면 그 교회에서 잘하는 사람은 다른 교회가면 적응을 못한다. 꼭 그렇게 해야 되기 때문이다. 쉽게 예를 든다면 평생 동안 오전 10시 예배를 보아왔던 사람은 다른 교회에서 오전 11시 예배를 보려면 시간 차가 있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다. 일요일만 예배를 드려야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월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안된다. 한참 우리나라가 산업화되었을 때 공장이 일요일에 일을 했다. 공장 노동자들을 어떻게 하면 예배를 보게 할까하여 만든 것이 월요일에 집회를 하는 곳이 생겼다. 월요일에 쉬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고 또 한쪽에서는 주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였다. 거기서 오랫동안 젖었던 사람들은 월요일에 예배를 드리면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 같다. 사람의 습성이라는 것이 묘하다. 한번 길들여지면 바꾸기가 굉장히 어렵다. 김일성 뱃지를 달고 다니다가 안달고 다니면 한참 지날 때까지는 이상할 것이다. 만일 통일이 된다고 가정하면, 북한 사람들이 가슴에 뱃지를 달고 다니다가 안달면 이상할 것이다. 옷 입을 때마다 이상하고 내 옷인가 할 것이다. 오래되면 잊어버리지만 한동안 그렇다.
습성이라는 것은 어떤 실행이라는 것은 자기들끼리는 좋고 자기들끼리 알아보고 자기들끼리 단합하는 것에는 좋지만 교회라는 것을 놓고 볼 때는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어느 교회도 특별한 방법의 실행이 있으면 안된다. 우리 교회는 다 보시면 알겠지만 고정된 방법이라는 것은 없다. 오늘 이렇게 할지 내일 저렇게 할지도 모른다. 그 교회는 말씀 후에 다 나와서 간증하는 것이 고정된 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어느 날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실행이 아니다. 사실은 막 뛰어나오는 것도 좀 혼란스러워 그렇지 재미있다. 만약 육군 사관학교 학생들이 하듯이 질서 정연하게 착착 나온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훈련하다 보면 그것이 습성이 되어 실행이 된다. 그러면 다른 곳에서 뛰어 나오는 것을 보면 도저히 볼 수 없는 것이다.
어떤 것도 특별한 실행이 있어서는 안된다. 생명이 원하는 대로 그때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행동이 있는 것이지 정해놓고 꼭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은 없다. 우리가 2시까지 집회를 하는데, 오래되면 2시까지 집회를 하지 않으면 이상해진다. 어쩌다가 2시 30분까지 했다면 오늘 집회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람의 습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2시까지 하는 이유는 배가 고파서 2시에 끝나는 것이다. 다른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2시 넘으면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그런 것도 아니고 2시 넘으면 간증이 되지 않아 그런 것도 아니고 배가 고파서 그치는 것이다. 우리가 식당이 있어 먹고 할 수 있다면 3시까지도 할 수 있다. 옛날에는 아침에 시작하면 오후 5시까지 했다.
종교 안에 있는 특별한 실행들은 분열을 일으킨다. 이것을 꼭 명심해두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들로 빗나가면 안된다. 이런 것을 하다보면 이상하게 이런 것이 중요해진다. 묘하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데 계속하다 보면 그것이 더 중요한 것이 돼버린다. 고린도 교회가 바로 그런 형태였다.
이런 것으로 빗나가면 안되고 유일한 분깃인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 행동이나 실행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고,우리의 유일한 몫인 그리스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야 된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지 나타나지 않는지만 봐야 되지 다른 것을 보면 안된다.
우리 교회 같으면 어떤 사람은 이렇고 어떤 사람은 저렇고 성격은 이렇고 행동은 저렇고 여러 가지가 있다. 또 자유분방하다 보니까 통일된 것이 없이 다 다르다. 그런데 그런 외형을 가지고 판단하려면 한이 없다. 저 사람은 간증은 저렇지만 생활은 엉망이라고 해버리면 은혜가 안된다. 그 집에 가보니 설거지가 전혀 되어있지 않더라가 되면 간증이 맛이 없어져 버린다. 저 사람은 직장도 제대로 못 다니고 왔다갔다한다가 돼버리면 간증을 잘해도 소용이 없어진다. 이런 것이 많다.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설거지 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고 직장 자꾸 옮겨 다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런 곳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오직 유일한 우리의 분깃인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내가 설거지를 잘하는 것은 가정을 위한 것이고, 직장생활을 잘하는 것은 자기생활을 위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다. 설거지 잘했다고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못했다고 주님께 욕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아무 상관이 전혀 없다. 그것은 자기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내가 여러분 집을 다 조사해본 것은 아니지만 살림을 깨끗이 한 분도 있을 것이고 잘하지 못한 분도 있을 것이고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 보면 곰팡이 생긴 것도 있을 것이고 마루가 반질반질한 집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뭐가 되겠는가? 여러분의 감독자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알긴 알아도 관심이 없다. 나도 눈이 있고 생각이 있으니까 청소 좀 잘하면 좋을 텐데, 정리 좀 잘하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은 있다. 그렇다고 내 초점이 거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설거지 안했다고 목사님이 뭐라고 하시겠다는 생각은 하지 말라. 그런 생각할 시간도 없고 관심도 없고 자기 일 잘한 것이다. 그것 잘했다고 나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아무 도움도 안된다. 1000원 짜리 헌금한 것만 못하다. 예를 들면 집안 어지럽게 해두고 1000원 헌금한 사람과 집안 깔끔하게 해두고 헌금 안하는 사람 중에 누가 좋겠는가? 나에게는 1000원 헌금한 사람이 좋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설거지가 필요하겠는가? 냉장고가 필요하겠는가? 그분은 아무것도 필요없는 분이다. 오직 그리스도만 필요한 분이다. 내가 그분에게 가서 설거지 잘했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고, 안했다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분에게 말해보았자 우이독경이다. 나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렇게 하시겠는가.
우리의 유일한 분깃인 그리스도에게로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은사나 교리나 실행도 다 필요하다. 필요하지만 거기에 기울어지면 안된다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의 교통은 주님과 우리가 한 영일 때만 가능함
그리스도의 교통은 주님과 우리가 한 영일 때만 가능하다. 한 영은 십자가에서 부활할 때 한 영이다. 이때만 우리가 참된 교통이 가능하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안에서만 교통이 가능하다. 동시에 거기서 나온 한 영으로만 교통이 가능하다.
3) 그리스도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짐(그분의 파와 몸에 참여)
그리스도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서만 꼭 이루어진다. 세상에 나가서 그리스도와 교통하려고 하면 안된다. 또 믿지 않는 사람과 교통하려고 해도 안된다. 이것은 몸인 교회에서만 이루어진다. 내 팔과 발은 내 몸 안에서만 교통이 이루어지지 다른 곳에 가서는 교통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우리는 그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다. 그 안에서만 참된 교통이 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은 전도이지 교통은 아니다.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만이 참된 교통이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고전10:16,21)고 한다. 이 한 떡을 먹는 것이 교회다. 오직 그리스도라는 한 떡이다. 한 교리가 아니라 한 실행이 아니라 한 은사가 아니라 한 떡이신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분 자신, 한 떡이고 한 몸이신 그분을 나누는 것이 바로 교통이다. 그 이외의 것은 전혀 교통이 안된다. 그 이외의 것을 교통하다 보면 결국 마지막에는 싸움이 난다.
취미를 갖고 교통을 해도 싸움이 난다. 왜냐하면 각자의 취미는 나름대로 고상한 것을 가질 것이다. 그런데 말을 하다보면 내 취미가 네 취미보다 낫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눈치 빠른 사람은 기분 나쁘다. 사진 찍는 것을 가지고 둘이 이야기하면 처음에 좀 좋은 것 같은데 한참 하다보면 각자 자기대로 다른 것이 있다. 예술이라는 것은 더군다나 그렇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항상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다른 사람의 것을 무시하게 된다. 무시당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기분이 좋겠는가? 기분이 좋지 않다. 마지막에는 기분 나빠져서 헤어지게 된다. 동창회 한다고 해서 갔더니 여자들끼리 모여서 모두 남편 자랑과 자식 자랑을 했다. 처음에는 풍성한 것 같았지만 자식 없는 사람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고 돈 없는 사람은 돈도 없는데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헤어질 때는 썰렁하게 헤어진다.
세상의 것으로는 우리가 교통이 안된다. 무엇을 해도 교통이 안된다. 교리로 교통을 해보면 절대로 안된다. 양보가 안된다. 어떤 경우에도 교리적인 교통을 해서 그것이 그렇다가 되는 법은 절대로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리적인 논쟁을 하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 된다. 누가 그렇게 도전을 해와도 우리는 그렇게 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것을 취미로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인터넷에서도 그런 것을 자기 사명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기들끼리 하라고 하고 우리는 하지 않아야지 하다보면 이전투구가 된다. 진흙탕에서 같이 싸우다보면 저 사람 옷에만 흙이 묻겠는가? 내 옷에도 흙이 묻는다. 우리는 할 필요가 없고, 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하라고 하면 된다.
4)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고 한다. 우리는 한 떡을 먹고 한 몸에 참여해서 한 몸이다. 이 몸 안에서만 우리의 교통이 가능하다. 세상에 가면 좋은 사람도 많고 점잖은 사람도 많고 착한 사람도 많다.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한 몸이 아니기 때문에 교통이 되지 않고, 마지막에 가면 너와 나는 다르다는 것밖에 남지 않는다. 참(정말) 좋은 사람인데도 점점 들어가면 갈수록 그렇다. 세상에서는 인간관계를 거리를 두고 갖는 관계를 좋아한다. 딱 붙으면 안된다. 딱 붙으면 싸움이다. 서양문명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아주 매너가 좋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꼭 싸운 것 같은데 서양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도 ‘Hi!'한다. 웃고 가고 기분좋게 해준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사람을 만나면 대단히 민망스럽다. 한 아파트에 살아도 얼굴을 알지만 인사를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이 탔다면 얼굴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한 사람은 이쪽을 보고 있고, 한 사람은 저쪽을 보고 있다. 정말 민망하다. 서양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처음 만나는 사람일지라도 웃는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니다. 엄격하게 거리를 두고 하는 것이다. 서양은 울타리가 없지만 남의 정원에 함부로 걸어가면 안된다. 울타리가 없다고 해서 잔디밭에 들어가면 큰일난다. 딱 자기 갈 길만 가야되지 남의 풀 한포기라도 밟으면 안된다. 엄격하게 거리를 두고 관계를 가진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오래 살다보니까 가깝게 하면 안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고 산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그렇게 살지를 않아 잘되지를 않는다. 이 두 가지가 지금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거리를 둘 것이냐? 합할 것이냐? 가까이 살 것이냐? 교회 이외는 참된 교통이 없다.
5) 그리스도의 교통은 한 생명의 흐름으로서 만유를 포함한 그분의 생명을 포함
그리스도의 교통은 한 생명의 흐름으로서 만유를 포함한 그분의 생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교제를 하는데 생명이 흐르는 것이다. 분명 말로 하는데 말이 오가는데 그 생명이 흐르는 것이다. 물이 흐르는데 금도 있고 호마노도 있고 베델리엄도 있었다. 에덴에서 흐르는 강물이 있었는데 거기에 정금도 있고 호마노도 있고 베델리엄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로 교제하는 교통 속에 영원한 생명이 분배되고 있다. 물을 통해서. 물은 모든 것을 운반해 준다. 우리 몸에도 물이 필요한 이유가 간에서 만들어놓을 것을 우리 몸에 전달하려면 물이 있어야 된다. 그것이 피다. 알고 보면 피는 물이다. 물인데 여러 가지 영양성분을 싣고 다니는 물이다. 물이 없으면 갈 수가 없다. 물은 교통하는 것이다. 지금 이 후보가 한 말이 낙동강을 한강까지 연결해서 대운하를 만들겠다고 했다. 고속도로도 있는데 무엇하러 만드냐고 할 것이다. 그런데 수로의 교통을 통해 이루어진 교통이 훨씬 운반비가 절감되고 대량 수송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운하를 만든다. 물은 모은 것을 유통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나일강이 좋은 것이 북해에서 바로 베를린까지 올라간다. 우리 한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강은 크지만 배가 다니지 못하므로 산업적 가치가 없다.
생명은 흐름은 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그냥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말을 하고 있는데 무엇이 흘러간다.
6) 그리스도의 교통은 교회생활의 실재
그리스도의 교통은 교회생활의 실재다.
6a. 다른 선호를 갖는 것은(교리, 실행, 은사 등) 유일한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잃는 것이며 육체 안에 있는 것임(고전1:2, 9 11-13, 3:1-4참조)
다른 선호, 아까 말한 교리나 실행이나 은사를 좋아하게 되면, 교통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실제적인 생활이 아닌 다른 데로 빗나가 버린다. 분명히 그렇다. 여러분이 인터넷을 보면 누구를 찾아내어 공격하는데 신경 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교회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교회에서는 분명히 화합이 안될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교통이 안될 사람이다. 보지 않았지만 뻔하다.
그것은 유일한 중심이신 그리스도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다른 것에 신경 쓰는 동안에 잃어버린 것이다. 사탄의 전략 가운데 가장 중요한 전략은 허허실실하는 것이다. 여기에 주력부대가 있는데 이 주력부대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른 쪽에 가서 난리를 치는 것이다. 그러면 다른 쪽에 뭐가 있는 줄 알고 몰려간 동안에 주력부대가 침략하는 것이다. 사탄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으로 웅성거려서 그것이 굉장한 것처럼 만들어서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거기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유일한 중심이신 그리스도는 가버리고 없다.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말한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사람들을 의미한다.
우리는 유일한 중심이신 그리스도 이외 것에 대해서 선호해서는 안된다. 좋아해서는 안된다. 부인하지는 않지만 좋아해서는 안된다. 남이 은사를 갖고 있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된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갖고 있는 것을 부인하면 안된다. 방언 은사를 부인하면 안된다. 무시하면 안된다. 그렇지만 내가 그런 은사를 선호하면 안된다. 왜 그런가? 그런 것을 선호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잃어버린다.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도 잃어버리지 않을 수가 없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처음부터 게임을 하려고 했겠는가? 공부하다가 머리가 좀 아프니까 게임 좀 하고 머리를 식혀서 공부해야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 되는가? 게임을 하다가 피곤하면 공부 좀 해야지로 거꾸로 된다. 그러면 이 학생은 다른 길로 빠져버린다. 요즘 공부 못하는 아이들이 그렇게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휴식 시간에 잠깐 한다는 것이 자기 생활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밤에도 그 생각, 낮에도 그 생각이다. 장기나 바둑을 두어보면 온 머릿속에 그것만 있다. 말이 왔다갔다 하고 상이 왔다갔다 하고 포가 넘어가고 머릿속에서 왔다갔다 하고 다른 생각이 안난다. 바둑을 두어보아도 검은 알과 흰 알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다 집을 짓고 어디로 빠져나가는 것이 생각난다.
유일한 중심이신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린다. 사람은 그렇다. 사탄은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다른 데로 관심을 갖도록 하나님 백성들을 유인하고 있다.
6b.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 선호, 분깃, 취향, 누림임(고전1:24, 30, 2:2참조)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고, 우리의 유일한 선호이고, 우리의 유일한 분깃이고, 우리의 유일한 취향이고, 그래서 그분을 누리는 것이 교회생활의 실재다. 그러면 너무나 단순해지는 것이 아니냐? 문화생활도 있어야 되고 뭣도 있어야 되고 뭣도 있어야 되는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 되고 유일한 선호가 되고 유일한 분깃이 되고 유일한 취향이 되고 우리의 유일한 누림이 된다면 인생을 무슨 맛으로 살겠는가? 이렇게 되는 것이 문제다. 이렇게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를 선택할수록 더욱 즐겁고, 그분이 우리의 선호가 될수록 더욱 행복하고, 그분이 우리의 분깃이 될수록 더욱 만족하고, 그분이 우리의 취향이 될수록 더욱 고상해지고, 그분이 우리의 누림이 될수록 우리가 더 안식이 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바로 교회생활의 실재다. 뭘 못해서 죽을 일은 없다. 장기 못 두어서 죽은 사람은 없다. 바둑 못 두어서 죽은 사람도 없다. 골프 치지 못해 죽은 사람도 없다. 다 죽을 일이 아니다. 그냥 어쩌다가 한번 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빠져서 그것을 자기 인생의 선호로 생각하면 인생이 비참하다. 인생이 그것을 위해 태어났다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사람답다’가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선택이 되어야 되고, 선호가 되어야 되고 분깃이 되어야 되고 취향이 되어야 되고 누림이 되어야 된다. 그럴 때 우리가 사람이 사람답게 된다. 그 외의 다른 것은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어야지 다른 것 때문에 이것을 못하면 중심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항상 중심은 있어야 된다. 옛날 말에 호랑이에게 물려가더라도 정신(중심)을 차리고 있으면 산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호랑이도 허점이 있으므로 허점을 이용하면 살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호랑이에게 홀려버리면 죽는 것이다. 정신 빠져버리면 죽는 것이다.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중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나온다.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건축(건설)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로 건축되는 것 이외의 것을 우리는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 교회생활의 원칙은 세상에 나가도 마찬가지다. 결국 남을 기쁘게 하고 남을 좋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일반 사회에 나가도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해주면 그 사람은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다. 자기 취향이 너무 강하면 남을 기쁘게 못한다. 자기 생각이 너무 강하면 남에게 좋게 할 수가 없다. 내가 나를 비워버리면 이 사람은 이렇게 좋게 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좋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마음 맞추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다. 내가 비우면 그리스도만 내 중심이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내가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추지 못해 직장생활 못할 사람이 없다. 내 고집이나 내 주장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직장생활 못하는 사람은 없다. 다 자기의 고집이나 프라이드나 아집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비워버리면 세상에서도 누구든지 다 좋아한다. 우리 교회생활을 잘하면 세상에서도 잘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생활의 원칙은 사회생활이다. 인간관계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남을 행복하게 하고 남을 기쁘게 하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꼭 교회에서만 그렇게 하고 세상에 나가면 그렇지 말라는 법은 없다. 자기를 비우면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유일한 선택으로 여긴다는 말은 어떤 교리를 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비워진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를 만나도 마찬가지다. 높은 사람 만나면 높은 사람에게 낮은 사람을 만나면 낮은 사람에게 내가 할 만한 모든 대우를 다 할 수 있다. 내가 대우해서 위신 꺾일 일이 없다. 내가 남을 높여서 비참해질 일이 없다. 남을 높이면 나도 높아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을 높이면 내가 낮아질 것 같아 남을 높이지 못한다.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남을 높이는 사람은 자기도 높아진다. 남을 좋게 하는 사람은 자기도 좋게 된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했다. 그 땅은 우리의 환경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은 자기의 영역이 자꾸 넓어진다는 말이다. 부동산 투기를 하지 않아도 자기 부동산이 많아진다. 그런데 화평케 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땅이 점점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자기 한 사람 서 있을 땅도 없어지게 된다. 화평케 한다면 교회 안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직장에서도 환영받는 사람이 될 것이고, 어디를 가도 다 환영받는 사람이 된다. 꼭 교회에서만 그러하겠는가.
교회생활은 어디에 갇혀있는 생활이 아니고, 이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된다면,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분깃이 된다면, 다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내 운명이라는 것이 내게 유일한 분깃이 된다면, 그것만이 나라는 것을 인식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를 가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일 뿐 아니라 어디를 가도 모든 사람을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를 만유로서 유일하게 누리는 것이 교회를 건축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생활의 실재다. 그리고 실제적인 교회생활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는 실제적인 생활이다. 로마서에서는 실제적인 생활을 별로 보지 못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실제적인 생활을 보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분깃으로 누리자! 이것이 바로 기조된 사상이다.
[ 기 도 ]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그 경륜을 따라 우리가 부름 받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한 것이고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와 접붙여져서 한 나무를 이루고 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 열매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참된 교통 안에 아들 안에서의 교통으로 우리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원하옵니다. 아들 안에 교통을 주신 것을 감사하고 우리가 고린도전서 안에 있는 많은 문제들 속에서 그것을 헤쳐 나가면서 아들 안에서의 교통을 우리가 넉넉하게 경험하도록 축복해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주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