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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법계무차별론(大乘法界無差別論)
견혜(堅慧) 지음
제운반야(提雲般若) 등 한역
김철수 번역
뛰어난 방편으로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 병(病)과 괴로움에 의한
과실을 떠나게 하는
보리심에 머리 조아립니다.
보리심은 간략히 말해 열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이 논에서 다루고자 하는 본체이다.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이들은 그 열두 가지가 다음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과(果)인 경우, 인(因)인 경우, 자성(自性)인 경우, 다른 명칭[異名]인 경우, 차별이 없는 경우, 분위(分位)인 경우, 물들지 않는[無染] 경우, 항상하는 경우, 상응하는 경우, 뜻의 이로움을 짓지 않는 경우, 뜻의 이로움을 짓는 경우, 하나의 성품[一性]인 경우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보리심의 과(果)를 보여준 것은 뛰어난 이로움을 보도록 한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것을 일으키는 인(因)에 관해 말하며,
그런 후에는 이로부터 생겨난 모습을 안립하고,
다른 명칭이지만 차이가 없음을 드러낸다.
일체의 위(位)에서 물듦이 없으며[無染著],
항상 정법(淨法)과 함께 상응한다.
부정위(不淨位)에서는 갖가지 공용(功用)이 없고,
청정위(淸淨位)에서는 이익이 생긴다.
하나의 성품은 열반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열두 가지의 뜻을 지금 이 논에서 차례대로 밝히고자 한다.
보리심의 과(果)란 무엇인가?
가장 적정(寂靜)한 열반의 세계를 말한다.
이는 오직 부처님들만 증득하는 경계이지 그 밖의 다른 이들은 증득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오직 부처님ㆍ여래만이 일체 미세한 번뇌의 열기를 영원히 멸하여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태어남이 없는 이유는 다시는 생각[意]으로 여러 가지 온(蘊)을 생하는 일이 영원히 없기 때문이다.
늙음이 없음은 이 공덕이 점차 향상되어 훌륭하고 원만한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 쇠락하여 변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이 없음은, 불가사의한 변역사(變易死)를 영원히 버려 여의었기 때문이다.
병이 없음은, 일체의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의 병(病)은 물론 습기(習氣)를 모두 다 영원히 끊었기 때문이다.
괴로움이 의지하는 곳이 없음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무명주지(無明住地)가 갖고 있던 습기를 모두 영원히 제거했기 때문이다.
과실이 없음은, 일체의 몸[身]과 말[語]과 생각[意]으로 그릇되게 범하는 일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보리심으로 말미암아 최상의 방편을 행하고 퇴실(退失)함이 없는 인(因)으로 일체의 공덕이 구경(究竟)에 이르러 그 과(果)를 얻는 것을 말한다.
그 과라는 것은 열반의 세계이다.
열반의 세계란 무엇인가?
부처님들께서 가지고 계시는 전의상(轉依相)과 불가사의한 법신(法身)을 말한다.
보리심은 불가사의한 과(果)의 인(因)이다.
마치 보름달[白月]이 초승달을 원인으로 하는 것과 같다.
지금 머리 숙여 예를 올린다.
또다시 게송으로 말한다.
세간의 선법(善法)을 이익되게 하고
성스러운 법과 부처님들이
의지하는 보배의 처소이고 바탕이니
땅과 같고 바다와 같고 종자와 같네.
또한 보리심은 마치 땅처럼 일체 세간의 착한 싹이 생겨나 자라날 때 의지하는 곳이며,
마치 바다처럼 일체의 성스러운 법의 보배가 쌓여 모여 있는 처소이며,
마치 종자처럼 일체의 부처나무[佛樹]를 출생시켜 상속하게 하는 원인[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보리심의 과(果)에 대해서 설하였다.
보리심의 인(因)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믿음[信]이 그 종자요
반야가 그 어머니이며
삼매가 그 태장(胎藏)이고
대비(大悲)가 젖을 먹여 기르는 유모이네.
또한 이 인(因)은 어떻게 쌓여 모이는가?
전륜왕의 아들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가운데 법에 대한 깊은 믿음이 보리심의 종자이고, 지혜에 통달함이 어머니이며, 삼매가 그 태장이다.
선정[定]의 즐거움에 머물러 일체의 선법(善法)을 안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비는 유모(乳母)와 같으니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생사 속에서도 싫어하거나 권태로워함이 없다. 일체종지(一切種智)의 원만함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자성(自性)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자성은 물들지 않으니
환한 보배나 공중에서 내리는 물과 같으며
백법(白法)에 의해 성취되므로
마치 대산왕(大山王)과 같네.
또한 마땅히 이 보리심의 인(因)이 쌓여 모인 다음에는 두 가지의 양상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 두 가지란 오염을 떠난 청정한 모습[離染淸淨相]과 백법소성상(白法所成相)이다.
오염을 떠난 청정한 모습이란, 이 마음의 자성이 물들지 않고, 또한 객진번뇌(客塵煩惱)의 장애를 떠나보내어 청정함을 얻는 것을 말한다.
비유하면 환한 마니보배나 허공에서 내리는 물 등은 재나 티끌이나 구름이나 흙먼지가 덮어 가릴 때에도, 그 자성은 물들지 않으면서 재 등을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에 환한 보석 등으로 하여금 청정함을 얻게 한다.
이와 같이 일체 모든 중생의 자성에 차별이 없는 마음[自性無差別心]은 탐욕 등의 번뇌에 의해 물들지 않으면서 탐욕 등을 멀리 여읠 수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은 청정함을 얻는다.
백법소성상(白法所成相)이란, 이와 같은 자성의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은 일체의 백법이 의지하는 바이다.
일체의 백정법(白淨法)으로 그 성품을 이루니,
“수미산은 갖가지 보배가 의지한다.
왜냐하면 수미산은 갖가지 보배가 합하여 이루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명칭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성불위(成佛位)에 이르면
보리심이라 이름하지 않고
아라하(阿羅訶)라 이름하며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바라밀이라 하네.
이 보리심의 성품은 밝고 깨끗하여
법계와 더불어 동체(同體)이며
여래께서는 보리심에 의지하여
불가사의한 법을 설하시네.
또한 이 보리심은 일체의 객진과 허물과 악(惡)을 영원히 떠나고,
일체의 공덕을 떠나지 않고 성취하여 네 가지 최상의 바라밀을 얻으니,
이를 여래의 법신이라 말한다.
세존의 여래법신이란, 상(常)바라밀ㆍ낙(樂)바라밀ㆍ아(我)바라밀ㆍ정(淨)바라밀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여래의 법신은 객진번뇌에 의해 물든 자성청정심과는 차별되는 명칭이다.
또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리불아, 이 청정한 법성이 곧 법계이니라.
나는 이 자성청정심에 의지하여 불가사의한 법을 설하노라.”
차별이 없다[無差別]는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법신은 중생 가운데서
본래 차별이 없는 모습[相]이니
지음도 없고 시초도 없고 다함도 없으며
또한 물들어 더러워지는 일도 없네.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이 보리심의 지혜로 아는 바이고
보리심에 형상이 없음[無相]은 성인(聖人)이 행하는 바이며
일체법이 의지하는 바이니
단멸(斷滅)과 항상함 모두를 떠났네.
또한 이 보리심은 일체 중생의 몸에서 열 가지의 차별없는 모습을 갖추고 있다.
이른바 짓는 바가 없으니 무위(無爲)이기 때문이고,
시초가 없으니 일어남이 없기 때문이며,
다함이 없으니 멸함이 없기 때문이고,
물들어 더러워짐이 없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며,
법의 성품이 공하다는 것을 지혜로 아는 바이니, 일체법이 무아(無我)이고 일미(一味)의 양상이기 때문이고,
형상이 없으니 온갖 근(根)이 없기 때문이며,
성인이 행하는 바이니 부처님ㆍ대성인[大聖]의 경계이기 때문이고,
일체법이 의지하는 바이니 오염되고 청정한 모든 법이 의지하기 때문이며,
항상하지 않으니 이는 잡되게 물들어서 항상하는 법성이 아니기 때문이고,
단멸하지 않으니 이는 청정하여 단멸하는 법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위(分位)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부정위(不淨位)에서는 중생계(衆生界)요
오염된 가운데 깨끗한 보살이며
아주 지극히 청정한 자를
여래라 말하네.
또한 이 보리심은 본래 차별적인 모습이 없으나,
깨끗하지 못한 분위(分位) 가운데 있으면 중생계라 하고,
더러운 가운데 청정한 위(位)에 있으면 보살이라 하며,
가장 청정한 위(位)에 있으면 여래라고 한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본제(本際)가 가없으니, 번뇌장(煩惱藏)에 얽매여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생사로 나아가 그 가운데서 생하고 멸하면서 흘러 구르는 것을 중생계라 하느니라.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생사에 표류하는 괴로움을 싫어하여 떠나고, 일체 모든 탐욕의 경계를 버리고, 10바라밀 및 8만 4천의 법【문】가운데서 보리를 구하여 온갖 행을 닦으면 보살이라 하느니라.
또한 사리불이여, 이 법신은 일체의 번뇌장으로부터 해탈하고, 일체의 괴로움을 멀리 여의며, 일체의 번뇌와 번뇌를 따르는 허물을 영원히 없애어, 청정하고도 아주 청정하고 지극히 청정하여 법성에 머물러 일체중생을 관찰할 수 있는 경지와 일체 모든 알음알이를 다 없앤 경지에 이른다.
또한 무이(無二)한, 장부(丈夫)의 처소에 올라 장애가 없고 집착함이 없는 일체법의 자재력(自在力)을 얻는데, 이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한다.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중생계는 법신과 다르지 않고 법신은 중생계와 다르지 않느니라.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이니라.
이는 단지 명칭만 다를 뿐 뜻은 다르지 않는 것이니라.”
물들지 않음[無染]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밝고 깨끗한 태양이
구름에 의해 가리워지지만
만약 번뇌의 구름이 없어지면
법신의 태양이 밝게 드러나는 것과 같네.
또한 부정위(不淨位)에서는 한량없는 온갖 번뇌가 나타나는데도 어떻게 물들지 않는다는 것인가?
비유하면 둥근 태양이 구름에 가리워져도 그 성품은 항상 청정하듯이, 이 마음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저 갖가지 번뇌는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客]일 뿐이기 때문이다.
항상함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겁(劫)이 다할 때의 불길이라도
허공을 태울 수 없듯이
이와 같이 늙음과 병듦과 죽음도
법계를 태울 수 없네.
일체의 세간이
허공을 의지해 일어났다가 없어지듯이
온갖 근(根)도 이와 같아서
무위(無爲)를 의지하여 생멸하네.
또한 여기에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나타나는데 어떻게 항상하다 말할 수 있는가?
비유하면 허공은 비록 겁이 다할 때 재앙의 불길이 일어나도 해를 입지 않듯이,
법계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생사란 단지 세속의 말에 따라 존재하는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죽음이란 온갖 근(根)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태어남이란 온갖 근이 새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래장에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일어난다거나 사라진다거나 하는 일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유위상(有爲相)을 넘어섭니다.
적정(寂靜)하고, 상주(常住)하며, 변하지 않고 단절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응(相應)이란 무엇인가?
광명과 열기와 색상이
등불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다른 양상이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모든 불법도
법성(法性)에 대해서 그러하네.
번뇌의 성품과 양상[性相]이 떠나면
저 객진번뇌가 공하며
깨끗한 법이 항상 상응하면
더러움이 없는 법은 공이 아니네.
또한 아직 정각을 이루지 못했는데 어떻게 불법에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유하면 광명과 열기와 색상 등은 등불에 있어서 다른 모습이 아닌 것처럼, 모든 불법도 법신에 대해 이와 같다.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사리불이여, 모든 부처님들의 법신에는 공덕법이 있느니라.
비유하면 등불에는 광명과 열기와 색상이 있어 떨어지거나 벗어나지 않듯이 마니보주의 광명과 색상과 형상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니라.
사리불이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부처님들의 법신의 지혜와 공덕법이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른바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여래법을 넘어서는 것이니라.”
또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두 가지 여래장공지(如來藏空智)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두 가지인가?
이른바 공(空)여래장은 일체의 번뇌를 떠나기도 하고 벗어나기도 하는 지혜이고,
불공(不空)여래장은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불가사의한 모든 불법(佛法)을 떠나지도 벗어나지도 않는 지혜이다.”
이로움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번뇌장(煩惱藏)에 얽히고 덮혀 있으면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없으니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것과 같고
금(金)이 분뇨 속에 있는 것과 같으며
또한 보름달일 때
아수라가 가리는 것과 같네.
또한 중생의 공덕이 이와 같은 공덕과 상응하는데 왜 여래의 덕용(德用)이 없다고 하는가?
이는 마치 연꽃이 아직 피지 않은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온갖 악견(惡見)의 잎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금을 화장실에 떨어뜨린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각관(覺觀)의 상태는 마치 분뇨의 더러움 속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보름달을 가리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아만(我慢)의 라후(羅睺)가 집어 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연못의 물이 탁해지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하나니, 탐욕의 흙먼지가 혼합되어 섞이기 때문이다.
또한 금산(金山)이 가리워진 것과 같으니, 진에(瞋恚)의 진흙먼지로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허공이 가리워진 것과 같으니, 어리석음의 두터운 구름이 가렸기 때문이다.
또한 태양이 아직 뜨지 않는 것과 같으니, 무명의 습기[無明習氣]가 있는 땅에 있어 밝음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같으니, 6처(處)가 수대(水大)의 창고 속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구름이 끼었어도 비가 내리지 않는 것과 같으니, 서로 어긋나는 인연이 현전(現前)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총괄하여 게송으로 말한다.
연꽃이나 금 등이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처럼
부처님의 체(體)가 객진에 가리는 것도 역시 그러하네.
이때의 공덕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니
이와 상반되면 커다란 이로움이 되네.
이로움을 짓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연못이 흙먼지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과 같이
연꽃이 크게 피어나는 것과 같이
훌륭한 금에 있는
온갖 더러운 오물을 씻어내는 것과 같이
허공이 청정하여
밝은 달을 별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이
욕심을 떠나 해탈할 때의
공덕도 또한 이와 마찬가지이네.
비유하면 태양이 밝게 드러나면
그 위광(威光)이 세간에 두루하듯이
땅이 온갖 곡식을 낳듯이
바다가 온갖 보배를 산출하듯이
이와 같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여
온갖 유루(有漏)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온갖 유루의 성품을 헤아려 알아
대비(大悲)를 일으키네.
다함이 있든 다함이 없든
이 모든 것에 대해 집착함이 없으니
불심(佛心)은 큰 구름과 같이
실제공(實際空)에 머무네.
삼매와 총지법(總持法)으로
때에 맞춰 단비를 내리니
일체의 모든 착한 싹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자라나네.
이 게송의 내용은 앞의 내용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이것이 청정법신임을 알아야 한다.
객진의 온갖 고통을 멀리 떠나기 때문이며,
자성의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이 법을 증득하는 이를 여래ㆍ응공ㆍ정등각이라 한다.
적정(寂靜)하고 청량하며 불가사의한 열반의 경계에 상주(常住)하고, 항상 안락함을 수용하니, 일체중생이 귀의하고 믿는다.
하나의 성품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것은 곧 법신이고
또한 여래이며
이와 같으면 곧
성스러운 진리[聖諦]의 제일의(第一義)이네.
열반은 부처님과 다르지 않으니
마치 차가움과 물과의 관계와 같으며
공덕이 서로 떠나지 않으므로
열반과 다르지 않네.
만약 여래의 법신이 열반과 다르다면 경전에서는 이와 같이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을 게송으로 말한다.
중생계가 청정하면
곧 법신임을 알아야 하네.
법신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여래이네.
또한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열반계라 하며, 이 열반계를 여래 법신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와 법신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여래가 곧 법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고멸제(苦滅諦)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경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괴로움이 무너지는 것을 고멸제라 이름하지 않습니다.
고멸(苦滅)이란 본래부터 짓는 바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태어남도 없고 멸함도 없고, 다함도 없고 다함도 떠나 항상 변하지 않고 단절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자성청정하여 일체의 번뇌장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수보다 많은 지혜를 떠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으며, 불가사의한 온갖 불법을 갖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래 법신이라 합니다.
세존이시여, 이 여래 법신이 아직 번뇌장(煩惱藏)을 떠나지 않은 상태를 여래장(如來藏)이라 합니다. 여래장의 지혜가 곧 여래의 공지(空智)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장은 일체의 성문이나 독각이 그 본바탕을 알 수도 없고 증득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불세존만이 일체의 번뇌장을 영원히 무너뜨려 일체의 괴로움을 멸하는 도를 갖추어 닦아야만 증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열반은 차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비유하면 차가운 촉감이 물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오직 일승도(一乘道)만 존재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와 다르면 유여열반(有餘涅槃)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법계에 어찌 하열(下劣)한 열반과 승묘(勝妙)한 열반이 있겠는가?
또한 하(下)ㆍ중(中)ㆍ상(上)의 우열이 있는 온갖 인(因)으로부터 하나의 과(果)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현현하는 인이 차별되면 과도 또한 차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실로 우열과 차별이 없는 법은 열반을 증득합니다. 평등한 모든 법을 열반에서 증득합니다.
세존이시여, 평등지(平等智)와 평등해탈과 평등해탈견(平等解脫見)은 열반을 증득합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열반계를 일미(一味)라 합니다. 이른바 평등미(平等味)이고 해탈미(解脫味)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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