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품반야바라밀경 제1권
소품경서(小品經序)
석승예(釋僧睿)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은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을 극진히 하는 격언(格言)이요, 보살이 부처를 이루는 큰 궤칙[軌]이다.
궤칙이 크지 않으면 뭇 다른 것을 포용하여 그 돌아갈 곳을 가리키기에 부족하고, 성품이 극진하지 않으면 중생이 어떻게 도량에 올라 정각(正覺)을 이루겠는가?
정각이 이루어지는 까닭과 뭇 다른 것이 하나로 되는 까닭이 어찌 이 도(道)를 말미암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교(異敎)가 간절하여 삼무(三撫)가 이로써 자주 일어나고 공덕(功德)이 쌓여 구증(九增)이 이로써 빈번히 이르게 된다.
예컨대 「문상(問相)」은 현묘함[玄]을 표시해 그 현묘함을 현묘하게 하고,
「환품(幻品)」은 붙일 곳을 잊어 그 잊음조차 잊으며,
「도행(道行)」은 그 나루터를 평탄하게 하고,
「난문(難問)」은 그 근원을 궁구하며,
「수희(隨喜)」는 나아갈 곳을 잊어 종말을 궁구하고,
「조명(照明)」은 불화(不化)로써 현묘함에 나아가게 한다.
장(章)은 비록 30이나 그것을 꿰는 것은 도(道)요,
말[言]은 비록 10만이나 그것을 더하는 것은 수행이다.
수행이 응집된 뒤에 무생법인[無生]을 얻고 도가 충분해진 뒤에 보처보살이 되며, 여기에 이르러야 일체지(一切智)로 변한다.
『법화경』은 근본을 밝혀[鏡本] 응연히 비추는 작용이 있고,
『반야경』은 지말에 명합하여[冥末]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작용이 있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보살의 도[菩薩道]요, 근본을 밝혀 응연히 비추는 것은 그 최종목표가 된다.
실상에 도달한 뒤에도 화도(化道)의 작용을 없애지 않으면 돌아가는 길에 초목이 무성하여 삼실(三實)의 자취가 있게 되고, 권도(權道)가 응당 크지 않으면 어지러운 실마리가 분분하여 혹취(惑趣)의 다름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법화경』과 『반야경』은 서로 도와서 목적지에 도달하고, 방편(方便)과 실화(實化)는 합일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치를 궁구하여 타고난 본성을 다하는 것과 육도만행을 크게 밝히는 것을 논한다면 『반야경』의 실화(實化)는 『법화경』의 방편(方便)만 못하고,
만일 참된 교화를 크게 밝힘을 취하여 본래 일승(一乘)뿐이요 3승이 없음을 이해하면 『반야경』은 『법화경』만 못하다.
그러므로 깊음을 찬탄하면 『반야경』의 공이 무겁고,
실상을 찬미하면 『법화경』의 작용이 은미하다.
이 경의 높음은 삼무(三撫)와 삼촉(三囑)이니 미혹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진(秦) 태자가 저궁(儲宮)에 있을 때 구외(區外)의 운(韻)을 헤아려 이 경을 완미하고 꿈속에서도 생각이 이르러 『대품(大品)』과 비교하여 번역자의 잘못을 깊이 알았다.
마침 구마라집[究摩羅] 법사에게 신(神)이 그 글을 주어 진본(眞本)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들었다.
홍시(弘始) 10년 2월 6일에 번역하도록 하여 4월 30일에 이르러 교정을 모두 마쳤다. 옛 번역을 상고해 보니 참으로 거친 밭에 곡식을 재배하는 것과 같아 절반 이상 김을 매더라도 어찌 많이 고쳤다고 하겠는가?
이 경의 정문(正文)은 모두 네 가지가 있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다른 때에 교화에 알맞게 자세히 말씀하거나 생략한 말씀이다.
그 중에 많은 것은 10만 게(偈)가 있고 적은 것은 6백 게이다.
여기서의 『대품』은 바로 천축의 『중품』이다.
편의에 따라 말한 것을 어찌 반드시 그 다소를 따지겠는가?
범문(梵文)은 고아하고 질박하나 본래의 뜻을 상고하면서 번역하여 기교에는 부족하지만 소박하고 바름에는 넉넉함이 있게 되었다.
삼가 글을 아는 어진 사람들은 그 화려함은 생략하고 그 실질을 살피기를 바라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