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광명최승왕경 제1권
대당용흥삼장성교서(大唐龍興三藏聖教序)
어제(御製)
“끝없이 펼쳐진 푸른 하늘은 별자리를 늘어놓아 형상을 드러내고,
아득히 이어진 넓은 땅은 강과 산을 펼쳐놓아 형상을 이룬다”고 들었다.
천문(天文)을 우러러 관찰해보면 이미 그와 같고, 지리(地理)를 굽어 살펴보면 또한 이와 같다.
무릇 오묘한 뜻[妙旨]은 그윽하고 미묘해 이름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진여(眞如)는 맑고 고요해 성품이나 형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귀머거리와 같이 어리석은 마음을 일깨우려면 메아리가 요동치는 법의 천둥에 의지해야 하고,
길을 잃고 헤매는 중생을 이끌려면 방향을 알려주는 깨달음의 우두머리를 기다려야 한다.
따라서 임시로 이름을 붙였지만 영원한 이름을 파괴하지 않고,
설법을 즐기셨지만 결국 말할 게 없음을 설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상 밖의 형상을 홀로 삼계의 존자라 칭하고 하늘 가운데 하늘을 이에 육신통을 갖춘 성인이라 표현한다면, 법왕께서는 날카로운 견해로 72명의 군왕을 낳아 기르시고 범천과 제석이 다스린 세월마저 1만 8천년으로 가두신 것이 된다.
주나라 시절에 별이 빛을 잃었다는 말씀은 성인이 태어날 징조와 부합하였고,
한나라 시절에 태양이 상서로운 빛을 흘렸다는 기록은 신과 소통한 꿈과 맞아떨어졌다.
따라서 부처님은 능히 모래알처럼 오랜 겁 동안 위의를 떨치시고, 티끌처럼 수많은 세상에서 교화를 행하시는 것이다.
옥호(玉毫)에서 빛을 놓아 어둠을 없애고, 금구(金口)로 널리 선포하여 막힌 곳을 뚫으셨으니, 번뇌의 적을 물리침에 어찌 창과 방패를 쓰겠는가?
생사의 군대를 파괴함에 오직 지혜의 힘만 의지하셨다.
원만하고 밝은 세계를 열어 가없는 중생을 널리 받아들이고, 영원한 행복의 문을 열어 심식(心識)이 있는 생명을 두루 포용하셨으니,
하늘을 뒤덮는 욕망의 물결일지라도 경계의 바람이 그침에 단박에 맑아졌고,
해를 가리는 망정의 먼지일지라도 법의 비가 적심에 곧바로 쓸려가 버렸다.
귀의하는 자는 재앙이 소멸되고 복을 받았으며, 회향하는 자들은 위험이 제거되고 안락을 얻었으니, 가히 높고도 우뚝한 것이 그가 이룩한 공이 있겠지만 드넓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일 수 없는 분이라 하겠다.
다만 꼬물꼬물 어리석은 사생(四生) 무상(無常)을 깨닫지 못하고, 아득한 육취(六趣)는 모두들 유결(有結)에 묶였으니,
허공의 꽃이 실재가 아니고 강에 비친 달이 견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어찌 알리오.
오음(五陰) 속으로 치달리고 삼계의 영역에서 옮겨 다닐 뿐이니, 온갖 만물을 거둬들여 결국 법문을 기다려야만 했다.
백마가 서쪽에서 와 현묘한 말씀이 동토에 전해지고부터서야 세존께서 곧 근기의 부류에 따라 법을 연설하시고, 중생이 이에 성품을 쫓아 미혹을 깨쳤으며, 마명(馬鳴)은 고귀한 책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용수(龍樹)는 보배로운 게송에서 향기를 드날렸다.
이에 아득한 진단(震旦)까지 통하고 염부제(閻浮提) 멀리까지 유통되어 반자교(半字敎)와 만자교(滿字敎)가 구역을 나누고,
대승과 소승이 나란히 질주하였으며,
맑고 편안한 준덕들이 수승한 도량에서 실력을 겨루고,
아름답고 원대한 고사들이 법의 집에서 줄지어 거닐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묘한 말씀이 규범으로 드러나 천고의 세월을 거치면서 아름다운 명성을 드날렸고, 지극한 도리가 법규로 흘러 시방에 두루 미치면서 무성한 과실을 맺었다.
그러나 후주(後周) 시절에 마군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치는 시운을 만나 결국 온 천하 초제(招提)가 모조리 허물어지고 피폐해졌으며, 온 세상 법려(法侶)가 평민들 속으로 자취를 숨겨야 했다.
아, 적막한 선정의 거처에는 좌선하던 자리만 휑하니 남았고, 황량한 지혜의 동산에는 경행하던 흔적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개황(開皇)에 이르러 거듭 보수하고 건립하였지만 다시 대업(大業)을 맞아 또 일부가 붕괴되는 일을 겪었으니, 귀신이 통곡하고 신령이 앓았으며, 산이 울고 바다가 들끓었다. 이미 도탄(塗炭)에 빠졌는데 가람(伽藍)이 어찌 남아나랴?
정법은 침몰해 사라지고, 사견은 더욱 늘어만 갔다.
이에 사람들이 깨달음의 길을 미혹해 고(苦)와 집(集)의 구역으로 되돌아갔고,
세속이 참된 종지를 뒤덮어 번뇌와 장애 속의 굴레에 속박되었다.
우리 대 당나라가 천하를 차지하여 위로 유소씨(有巢氏)와 수인씨(燧人氏)를 능가하고 아래로 복희씨(伏羲氏)와 헌원씨(軒轅氏)를 굽어보자 삼성(三聖)이 거듭 빛을 발하고, 만방(萬邦)이 하나로 통일되었다.
위엄을 보여 일제히 정비하고 은택을 끝없이 베풀었으며, 대지의 맥락을 걷어잡아 순박함으로 돌이키고, 하늘의 강유를 널리 선포하며 정성을 바쳤다.
부처님의 태양을 다시 걸고 범천(梵天)을 거듭 보수하자 용궁(龍宮)의 여덟 기둥이 가지런히 안정되고 영취산[鷲嶺]의 다섯 봉우리가 높이를 다투었으니, 석존의 가르침을 크게 홍포한 것은 진실로 우리 황조라고 하겠다.
대복선사(大福先寺)에서 경전을 번역한 삼장법사 의정(義淨)은 범양(范陽) 사람이다.
속성은 장씨(張氏)이니, 한(韓)나라 이후로 5대에 걸쳐 제상을 지내고 진(晉)나라 이전에 삼태(三台)의 벼슬을 지내면서 붉은색과 자주색으로 빛깔을 나누고 초미(貂尾)와 선문(蟬文)으로 광채를 합한 가문이다.
고조(高祖)께서 동제군수(東齊郡守)를 지내던 시절에는 어진 교화의 바람[仁風]이 부채를 따라 일어났고 단비가 수레를 따라 내렸으며, 육조(六條)로 교화를 펼치고 십부(十部)로 정치를 행하셨다.
이 무렵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러서는 모두 세속의 영화를 싫어하여 하나의 언덕에서 맘대로 살면서 세 갈래 오솔길을 소요하였다.
온화함을 품고서 몸을 소박하게 하고, 천성을 기르면서 정신을 편안하게 하였다.
그렇게 동쪽 산에서는 돋아난 영지를 따고 남쪽 개울에서는 맑은 물을 길었으니, 가히 저 멀리 붉은 산마루를 찾아갔다가 흰 구름에 깃들어 누웠다고 하겠다.
언덕의 학은 이에 울음을 삼켰고, 마당의 망아지는 이 때문에 그림자만 묶였다.
법사께서는 허깨비를 뽑아버린 밝은 총명함으로 일찌감치 총명함과 민첩함을 드러냈다.
자두를 변별할 나이를 넘기자마자 즐거운 마음으로 출가하였고, 사내가 낙양에서 노닐 나이를 넘기자마자 서쪽 나라로 찾아갈 뜻을 세웠다.
이후 경사(經史)를 두루 학업 하여 학문이 고금을 꿰뚫었고, 삼장(三藏)의 현묘한 중추를 손아귀에 쥐고서 일승(一乘)의 오묘한 뜻을 밝혔다.
그러고 나서는 한가롭게 지내며 고요함을 익히고 사려함을 쉬고서 선정에 안주하였으며, 저 산림에 의탁하여 이 티끌 같은 세상의 속박을 멀리하였다.
그러다 37세에 비로소 평소 품었던 뜻을 결행하여 함형(咸亨) 2년(671)에 발걸음이 광부(廣府)에 이르렀다. 출발할 때 의기투합한 숫자는 열 명이었지만 노 저어 떠날 때 뱃머리에 오른 사람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남해를 돌아 아득히 흐르고 서역을 향해 길이 내달리면서 천 겹 바위산을 지나고 만 리 파도를 넘어 갔다.
조금씩 천축에 다다라 차례로 왕사성(王舍城)에 도착하니, 부처님께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신 영취산(靈鷲山) 봉우리가 여전히 그대로였고, 여래께서 성도하신 성스러운 자취도 여전히 남아있었다.
폐사성(吠舍城)에는 일산을 바쳤던 흔적이 사라지지 않았고, 급고독원(給孤獨園)에는 황금을 깔았던 땅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세 갈래 보배 계단이 확연한 것을 눈으로 목격하였고, 여덟 개의 크고 신령한 탑이 아득한 것을 직접 관찰하였다.
그가 경유한 곳은 30여 국이고 편력한 세월이 20여년이었으니, 보리수 아래에서 수차례나 가지를 꺾으면서 오랫동안 체류하였고, 아뇩달지(阿耨達池) 가에서 몇 번이나 갓끈을 씻고 거울을 닦았다.
법사께서는 자비(慈悲)로 방을 짓고 인욕(忍辱)으로 옷을 삼아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항상 재계하였고, 여섯 때에 게으름이 없이 늘 좌선하였다.
또한 예전의 번역자들은 먼저 범문을 송출한 다음에 이를 바탕으로 한문으로 번역하면서 단어를 선택함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학자들에게 의지해야만 했고, 뜻을 설명함에 있어서는 별도로 승려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법사께서는 그들과는 같지 않아 이미 오천축(五天竺)의 언어에 능통하였고, 또 이제(二諦)의 그윽한 종지를 상세히 밝혔다.
그래서 번역한 뜻과 엮어낸 문장이 모두 자기에게서 나왔고, 단어를 선택하고 이치를 확정할 때도 주변 사람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다.
이는 한나라 시절의 가섭마등(迦葉摩騰)을 능가하고, 진나라 때의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뛰어넘은 것이다.
법사께서는 거의 400부에 도합 50만 송의 범본 경전과 금강좌진용(金剛座眞容) 1포, 사리 300과를 가지고 증성(證聖) 원년(695) 여름 5월에 비로소 도읍에 도착하였다.
측천대성황제(則天大聖皇帝)께서는 동쪽에서 솟아 천명을 받고, 하늘로 날아올라 기강을 거머쥐고는 선왕들의 사업을 계승해 번창시키는 것으로 임무로 삼고, 사해의 백성을 널리 구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 분이셨다.
이에 모든 관료들에게 명령하고 아울러 사부대중을 정비하셨으니, 무지개 깃발이 해를 쓸어버리고, 봉황의 노래가 구름을 걷었으며, 육수의 향기가 퍼지고, 오색의 꽃잎이 흩날렸다.
그렇게 쟁쟁하고 성대하며 휘황하고 찬란하게 상동문(上東門)에서 맞이하여 불수기사(佛授記寺)에 안치하셨다.
법사께서는 우전삼장(于闐三藏)및 대복선사(大福先寺) 주지 사문 복례(復禮), 서숭복사(西崇福寺) 주지 법장(法藏) 등과 함께 『화엄경』을 번역하였고, 이후 대복선사에서 천축삼장 보사(寶思)와 말다(末多)및 불수기사 주지 혜표(惠表), 사문 승장(勝莊)・자훈(慈訓) 등과 함께 근본부(根本部)의 율(律)을 번역하였다.
이 대덕들은 모두 사선(四禪)의 선정에 잠겨 육바라밀[六度]을 그윽이 품고는 마음의 받침대에다 법의 거울을 높이 걸고, 성품의 바다에서 계율의 구슬을 환희 밝히셨던 분들이다.
이들은 문장의 숲에서 빼어난 재능을 드러내 깨달음의 나무를 가져다가 줄줄이 꽃망울을 터트렸고, 지혜의 횃불을 환하게 드날려 달을 맑히고 그림자와 합하였다.
순금과 박옥이란 진실로 이런 분들에게 해당하니, 진실로 범천 궁궐의 기둥이요 대들보이며, 참으로 불법 문중의 용이요 코끼리이다.
이들이 이미 여러 경율 200여권을 번역하고는 교정과 필사를 마치고 곧바로 모두 황궁에 진상하였으며, 그 나머지 계율과 여러 논서들은 바야흐로 다음 작업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오편(五篇)의 가르침이 온전히 규명되고, 팔법(八法)의 원인이 빠짐없이 밝혀졌으니, 구슬을 삼킨 거위마저 보호하고, 벌레의 목숨마저 해치지 않게 하였으며, 부낭(浮囊)은 반드시 썩지 않은 것을 취하고 기름 그릇은 끝까지 엎어버리지 말게 하며, 성교(聖教)의 기강을 받들고 모든 생명체의 이목을 열어주게 되었다.
삼가 바라옵니다. 위로 밑거름이 되어주신 선대 성황들께서 칠묘(七廟)의 기반을 길이 융성하게 하시고, 아래로 황위를 계승한 미미한 제가 구천(九天)의 명령을 항상 보좌하게 하소서.
모든 생명을 인수의 영역으로 옮기고, 천박한 풍속이 순수한 근원에 이르게 하시며, 해마다 풍년들고 절기마다 온화하며, 먼 곳은 안정되고 가까운 곳은 정숙되도록 하소서.
돌아보건대, 온갖 업무를 총괄해야 하고 사해의 일들이 너무나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을야(乙夜)의 여가를 틈타 하늘을 뒤덮는 덕을 돕고자 허공을 살피고 적멸을 두드려 이렇게나마 서문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