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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권
1. 서품(序品)
모든 존재[諸有]에 두루하는 일체법 가운데
가장 알기 어려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홀로 능히 깨달아 아신, 그릇되고 뒤섞임이 없는
이러한 일체지(一切智)께 지금 공경 예배드리옵니다.
[저술의 동기]
나 중현(衆賢)은 이치에 부합하는 광박(廣博)한 언사로써
다른 종의를 비판하고, 본 종(宗)의 뜻을 드러내고자 함에
만약 경주(經主, 즉 世親)의 말이 이치에 부합하는 가르침이라면
바로 그것에 따라 술(述)하여 그릇된 것을 구하지 않겠지만
조금이라도 대법(對法)의 취지나 경(經)에 어긋남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 밝혀 삭제하고 물리치기를 서원하옵니다.
이미 『순정리(順正理)』라고 이름한 논을 설한 바 있어
사택(思擇)을 즐기는 자라면 마땅히 배워야 하겠지만
문구가 번잡하고 끊겨있어 헤아리기 어려우며
적은 노력으로 능히 이해할 바가 되지 못하기에
광문(廣文)의 요점을 간추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보다 간략한 논을 지어 『현종(顯宗)』이라 일렀습니다.
일단 거기서의 게송을 늘어놓고 귀의처로 삼지만
『순정리』 중에서의 번잡한 결택(決擇)은 지워버리고
그것의 잘못된 말에 대해서는 올바로 해석하여
종의가 되는 참된 묘의(妙義)를 드러내려 하옵니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대는] 진리를 두루 아는 변지(遍智)도 아니면서 어떻게 능히 알아 이렇듯 불세존께서는 바로 일체지(一切智)로서, 제법(諸法) 중의 가장 알기 어려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능히 깨달아 그릇되고 뒤섞임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1)
비록 진리를 두루 아는 변지가 아닐지라도 역시 능히 알 수 있으니,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면 반드시 과보를 획득하기 때문에 지혜를 가진 자는, 곧잘 뛰어난 의사에 비유되는 것과도 같다.
이를테면 세간의 의사는 먼저 병자의 풍열(風熱)과 가래 등에 의해 일어나는 질병의 근원을 살피고,
다시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으로 익힌 습성[性習]의 두 가지가 나이ㆍ시기ㆍ처소 등 온갖 형편에 따라 동일하지 않음을 참답게 관찰하고,
병고를 없애 주고자 [관찰한 바에 따라] 약을 처방하여 준다.
그리고 모든 환자들은 처방에 따라 약을 복용함으로써 고질병도 점차 없어져 날이 갈수록 몸은 편안하게 되니,
실로 뛰어난 의사는 온갖 약을 처방하는데 청정한 변지를 갖추었음을 지자(智者)라면 능히 살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존께서도 교화되어야 할 자에게 있어 탐ㆍ진ㆍ치 등의 번뇌가 병의 근원임을 아시고,
다시 본성(本性) 수집(修集)이라는 두 가지 선의 종자(種子)와 승해(勝解)와 수면(隨眠), 그리고 그가 능히 스스로 원만하게 되는 것을 감내하는 능력 등을 참답게 관찰하시고서,
그들로 하여금 번뇌를 점차적으로 영원히 소멸시켜 주고자 번뇌를 굴복시켜 제거할 두 가지 도(道)라는 약을 처방하여 주셨다.2)
그리고 교화되어야 할 모든 이들은 이러한 처방에 따라 개별적이거나 혹은 일반적인 대치도(對治道)라는 약을 복용함으로써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혀 점점 더 견고해지는 감옥과도 같은 온갖 번뇌의 병이 점차 제거되어 탐 등의 멸(滅)을 자신이 얻게 되며, 나아가 도의 얕고 깊음에 따라 더욱더 수승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우리의 위대한 스승께서는 일체의 모든 어둠을 멸하시고,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음을 우러러 헤아려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래로 찬탄하는 이[讚頌者]들은 부처님을 게송으로 찬탄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누가 능히 세존처럼 수면(隨眠) 경계의
이루 헤아릴 수 없고 가없는 자상과 공상의
온갖 품류(品類)를 훌륭히 분별하였을 것이며,
감응하는 대로 널리 설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였을 것인가?
누가 능히 점차로 수행하였으면서도
승리의 약을 성취하지 못하였던 것인가?
지혜가 없어 성교(聖敎)를 능히 따르지 못하였으면서
어찌 영험이 없다는 허물이 여래에게 있다 할 것인가?
[부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그런데 사택(思擇, 생각)에 증상만(增上慢)이 있는 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불세존께서는 일체지(一切智)가 아니니, 청하여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다.
[1] 이를테면 ‘이에 대해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 같이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한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2] 또한 ‘전제(前際)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스스로의 무지함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이다.
[3] 또한 일찍이 손타리(孫陀利)와의 인연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아울러 그녀의 친구들이 온갖 악을 짓는 것도 그대로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3)
[4] 또한 바라문의 여인인 전차(戰遮)가 일으킨 비방과 훼손을 능히 막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
[5] 또한 일찍이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불법 중에 출가하고자 한 것을 허락하였기 때문이다.5)
[6] 또한 일찍이 외도 올달낙가(嗢達洛迦)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스스로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6)
[7] 또한 파타리성(波吒釐城)에서 장차 그와 같이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7)
[8] 또한 불법 중에 장차 열여덟 가지 부파의 다른 주장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8)
[9] 또한 ‘온갖 업으로서 결정되지 않은 것(즉 不定業)이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외도들이 비방하는 언사를 간략히 언급하면 이상과 같다.
그들 외도들은 이렇듯 완고하게 주장하고 있는데, 일체지(一切智)이신 세존께서 비록 갖가지 뛰어난 방편의 화도(化導)를 시설하셨을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능히 정등각(正等覺)에 대한 청정한 신해(信解)를 낳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니, 뛰어난 복덕과 지혜를 갖추고서 진리를 구하는 자라야 비로소 능히 일체지의 바다를 측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현(衆賢)의 대답]
나 [중현(衆賢)]는 여기서 과감히 정근(正勤)의 마음을 일으켜 참다운 이치에 따라 바야흐로 조그마한 깨달음을 열어 보이고자 한다.
[1]
“청하여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이에 대해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 같이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한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거기서 주장된 논거가 확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불세존께서는 청하여 물은 바에 대해 무지하였기 때문에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인가?
물은 자[의 의도]를 관찰하여 그가 만약 총명예지의 오만함을 품었다면 그로 하여금 바로 즉시 참답게 믿고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비록 알고 있었음에도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니, 이를테면 어떤 속임수 물음[矯問]에서의 경우와도 같다.
즉 ‘모든 석녀(石女,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자식은 검다고 해야 할 것인가, 희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물으면,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인데, 어찌 별도의 처방이 있어 그들의 고질병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인가?
이와 마찬가지로 외도들은 자아[我]를 주장하여 진실이라 하면서,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하는 등의 사실에 대해 속임수의 물음을 묻고 있다.
그래서 세존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부처님의 의도는,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기별(記別)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는 만약 어떤 법이 실유(實有)의 존재가 아니라면 마땅히 그것에 대한 차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혹은 불세존께서는 뛰어난 권도의 방편으로써 그들을 조복(調伏)시키기 위해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같이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함은 바로 그들을 조복시키기 위한 까닭에서이지 무지하기 때문에 (물은 것과는) 다르게 대답하신 것이 아니다.
또한 마땅히 부처님께 뛰어난 말재간[辯才]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니, 그와 같은 물음은 논도(論道)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와 같은 물음이 논도에 포섭되는 것임에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가히 말재간이 없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 중에는 이치에 맞는 난문(難問)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데, 어찌 부처님께 말재간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법을 청해 물은 자의 마음이 간절하지 않기 때문에, 아견(我見)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근기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바야흐로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게끔 할 수 없었으니, 그래서 질문 받은 바를 사치(捨置)하고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질문 받은 바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선(大仙)이신 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2]
또한 [외도들은]
“‘초제(初際, 혹은 前際, 태초를 말함)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바로 스스로의 무지함을 나타낸 것이다”라고 하였지만,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존재하지 않는 법(비존재)은 마땅히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존재하는 어떤 법을 대상으로 삼아서도 지혜가 생겨나지 않았다면, 여래는 가히 일체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제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지혜는 무엇을 알아야 할 것인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지혜가 없다는 말이 성립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초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
그와 같이 설할 경우 다시 (초제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설정하기가 용이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마땅히 ‘알 수 없기 때문에’라는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그것은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혹 어떤 법이 비록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인식의 조건[緣]이 결여되면 [그것 역시]알 수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결정적인] 이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의 이유로 설정할 경우, 필경무(畢竟無, 절대무)가 동일한 예[同喩]가 될 수 있어 [결정적인] 이유로 허용될 수 있기 때문에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설하셨던 것이다.9)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는 불확정의 오류[不成失]를 범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생사의 초제가 만약 결정코 비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 초제의 몸은 마땅히 원인 없이 생겨나야 할 것이며,10)
초제의 몸에 원인이 없다면 그 후로도 역시 마땅히 원인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니, 앞뒤의 몸은 원인을 달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렇다고 인정한다면(다시 말해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미 행해진 청정하거나 부정한 온갖 업도 모두 다 어떠한 과보도 갖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러한 사실은 이미 허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앞서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사실의 이유로) 제시된 ‘초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고 하는 것은 불확정적인 이유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만약 ‘생사에는 초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마땅히 허공처럼 후제(後際, 종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외적인 존재와 그 종류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외적 존재인 보리의 경우 이후의 것은 이전의 것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나듯이 비록 초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불이나 물 등 태우고 썩게 하는 온갖 인연을 만나면 영원히 괴멸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생사는 번뇌와 업을 원인으로 하여 전전(展轉)하며 상생(相生)하니, 비록 초제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탐ㆍ진ㆍ치 등을 대치하는 힘을 자주 익힘에 따라 생사의 제온(諸蘊)이 마침내 생겨나지 않으면, 바로 후제가 된다.
곧 [생사의 제온이] 공(空)하여 생겨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후제에는 가히 생사가 없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생이 있는 한 어찌 후제가 없을 것인가? 지금 바로 보더라도 생겨난 법은 반드시 끝나는 때가 있으니, 생사가 이미 생겨났다면 이치상 반드시 귀멸(歸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제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설하셨던 것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이 그 이유였으니, 그 뜻은 이미 잘 제시되었다.
따라서 마땅히 “초제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3]
또한 “일찍이 손타리와의 인연을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녀의 친구들이 온갖 악을 짓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다.
비록 일찍이 깨달아 알았을지라도 많은 허물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먼저
“우리는 그러한 짓을 한 적이 없다. 그와 같은 짓을 한 이들은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는 다른 사람들이다”라고 말하였다면,
그녀의 친구들은 악한 마음을 마구 퍼뜨림으로써 그 일에 무관심하였던 모든 이들도 다 같이 회의를 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이와 같은 허물은 부처님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있을 것인가?
또한 대인(大人)은 남의 비리를 드러내지 않는 법이다. 부처님께서는 바로 대인이니, 어찌 남의 과오를 드러내 보이겠는가?
또한 그들의 악행을 드러내게 될 경우,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존을 미워하고 등 돌리게 함으로써 정법에 드는 것을 막게 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자신과 그들의 몸에 비방과 단명(短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업[定業]이 존재함을 관찰하셨던 것이다.
또한 말세의 필추(苾芻, 비구의 신역)들에게 위안을 열어주기 위해서였다. 즉 부처님께서는 당래 정법이 쇠하여 사라지게 되었을 때, 다문(多聞)과 지계(持戒)의 무리들이 필추로서 조금이라도 비방을 당하지 않고서 죽게 되기를 희망하는 것을 관찰하시고서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대선(大仙)이신 세존께서는 일체의 번뇌의 과실과 습기(習氣)를 영원히 뿌리째 뽑아버렸고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색구경천(色究竟天)에까지 이르셨음에도 오히려 뭇사람들로부터 성가시게 비방을 받았는데, 하물며 우리는 어떠하겠는가?’라고 스스로 위안삼아 말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즉 이렇게 마음을 편안히 할 때 온갖 선업을 닦게 되는 것으로, 이상과 같은 득과 실의 결정적 사실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먼저 그것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7일이 지나 그 일의 전모가 저절로 밝혀져 부처님께서는 거룩함을 드러내게 되었고, 허물은 외도들에게 돌아갔으니, 그러므로 마땅히 (손타리와의) 인연을 스스로 밝히지 않았다고 해서 ‘불세존께서는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4]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전차녀(戰遮女)가 비방하게 된 인연을 스스로 파헤쳐 밝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이미 해석한 셈이다.
[5]
제바달다가 불법 중에 출가하고자 한 것을 허락한 까닭에는 깊은 뜻이 있다.
부처님께서 그를 관찰하여 보니, 출가하지 않으면 마땅히 전륜왕과 일을 도모하여 무수한 사람을 해치고, 불법을 괴멸케 하여 악취에 거꾸로 떨어져 언제 벗어날지 기약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도되어 출가함으로써 심오한 선의 근본을 심게 되었으니, 출가하지 않았다면 능히 심지 못하였을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을 보호하고 손해를 없애주며, 아울러 온갖 악을 막게 하기 위한 까닭에서 출가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6]
또한 “일찍이 외도 올달낙가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스스로 알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생각만 하였다면 바로 알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떤 의식이 생겨날 때에는 여타의 다른 의식의 대상은 능히 알지 못한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설법하는 일에 마음을 두었으므로 그 사람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관찰하지 못하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그 후 그것을 알고자 하여 잠시 마음을 챙겼을 때, 그의 목숨이 이미 끊어졌음을 여실히 알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그것을 알고자 하여도 능히 알 수 없었다면 여래는 가히 일체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대상에 속해 있어 이와 같은 대상(즉 올달낙가의 존망)을 아직 인식의 조건[所緣]으로 삼지 않은 것을 ‘무지하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7]
“파타리성에서 장차 그와 같이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 예측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은밀하게 예측하였기 때문이다.
즉 일찍이 밀의(密意)로써 설하기를,
“만약 어떤 것으로부터 면제되어 벗어나게 되면 다른 어떤 것이 다시 또 다른 어떤 손해를 끼치게 된다. 이를테면 부처님께서도 일찍이 깨달은 바가 있어 혹 어떤 것을 수호하였다면, 필시 다른 어떤 것이 또 다른 어떤 손해를 끼치게 되었을 것이지만, 세 가지 어려운 일에 대해 각기 스스로 지키게끔 함으로써 다른 어떤 것이 능히 손해를 끼치지 못하였다. 그래서 밀의로써 설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어려운 일의 필연성을 예측한 것이니, 어찌 세존을 일체지가 아니라고 할 것인가?
[8]
또한 “스스로 불법 중에 장차 열여덟 가지 부파의 다른 주장들이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하였다”고 말하는 것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이미 예견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미래의 어떤 비구의 무리들은 내 말뜻을 잘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서로 다른] 부파의 주장들이 다투어 생겨나 서로 비방하게 될 것이다”라고 설하신 바와 같다.
세존께서는 이에 대해 내외의 두 가지 방호(防護)를 간략히 설하셨다.
내적인 방호란 말하자면 이설(異說)ㆍ대설(大說)과 같은 것으로, 계경에 나타난 바를 관찰하는 방호이다.
외적인 방호란 말하자면 6가애법(可愛法)과 같은 것으로, 계경에서 설해진 바를 구하여 받아들이는 방호이다.
또한 『견집법계경(見集法契經)』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법 중에는 장차 이설이 생겨나게 될 것이니, 말하자면
어떤 이는 ‘오로지 금강유정(金剛喩定)만이 번뇌를 능히 단박에 끊을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택멸열반(擇滅涅槃)은 두 가지의 법을 본질[體]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11)
혹은 ‘불상응행법(不相應行法)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표업(表業)도 존재하지 않는데, 하물며 무표업이 존재하겠는가?’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色法)은 대종(大種)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전후의 서로 유사한 법을 동류인(同類因)이라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색처(色處)는 오로지 현색(顯色)만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촉처(觸處)는 오로지 대종을 본질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오로지 촉처만이 대애(對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안식(眼識)이 능히 본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근(根)과 식(識)의] 화합이 능히 본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의계(意界)와 법계(法界)는 다 같이 영원하고 무상하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은 찰나멸(刹那滅)이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불상응행법은 다(多)찰나에 걸쳐 지속하는 경우가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상정(無想定)과 멸진정(滅盡定)은 모두 [완전히 무심(無心)의 상태가 아니라] 유심(有心)의 상태이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등무간연(等無間緣)도 역시 색법과 통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색법에는 동류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이숙생(異熟生)의 색은 끊어졌다가 다시 상속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방생ㆍ아귀ㆍ천취(天趣)도 역시 별해탈계(別解脫戒)를 획득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마음에 염오함이 없더라도 역시 생을 계속[續生]할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생을 계속하게 되는 것은 모두 애에(愛恚)때문이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율의와 불율의는 나누어 받을 수도 있고[分受], 또한 역시 전부 받을 수도 있다[全受]’고 설할 것이다.
혹은 ‘방생과 아귀에게는 무간업(無間業)이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간(無間)과 해탈(解脫)의 두 가지 도는 다 같이 능히 온갖 번뇌를 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의식상응의 선(善)인 유루혜는 모두 다 견(見)이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유신(有身)과 변집(邊執)의 두 가지 견은 모두 다 불선이며, 또한 역시 타계연(他界緣)이 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번뇌는 모두 다 불선이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낙수(樂受)와 사수(捨受)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오로지 낙수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색계 중에도 역시 온갖 색이 존재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무상천(無想天)에서 죽으면 모두 악취에 떨어진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일체의 유정은 [정해진] 때가 아닌 때 죽는 일이 없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온갖 무루혜는 모두 지견(智見)을 자성으로 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 일체의 법은 현재찰나에 각기 개별적으로 존재한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색심(色心)은 상호 구유인(俱有因)이 되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갈랄람(羯剌藍)의 상태에서 이미 일체의 색근(色根)을 모두 갖추게 된다’고 설할 것이다.12)
혹은 ‘정법(頂法)을 획득한 모든 이는 다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모든 선악의 업은 다 전멸(轉滅)될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
혹은 ‘모든 무위법은 다 실유의 존재가 아니다’라고 설할 것이다.
혹은 ‘온갖 세간도(世間道)로써는 번뇌를 끊지 못한다’고 설할 것이다.13)
혹은 ‘오로지 섬부주(贍部洲)에서만 능히 원지(願智)ㆍ무쟁(無諍)ㆍ무애해(無礙解)ㆍ중삼마지(重三摩地)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할 것이다.14)
혹은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無境]도 역시 소연(所緣)으로 삼는다’고 설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등등의 온갖 차별의 쟁론이 각기 주장하는 바를 설하면 그 수는 수천을 넘을 것이며, 스승과 제자 사이의 상승(相承)도 백 천의 무리가 넘을 것인데, 여러 도속(道俗)을 위해 해설되고 칭양(稱揚)될 것이다.
나의 불법 중에는 미래세 마땅히 이와 같은 쟁론이 생겨나 한결같지 않게 될 것으로, 그들은 이익을 위하고 이름을 위하여 그릇되게 설하고 그릇되게 수지하여 정법을 증득하지 않을 것이니, 실로 전도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부파들의 과거ㆍ현재ㆍ미래에도 역시 또한 이와 같은 쟁론의 차별이 있게 될 것이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분명하게 예견하셨다.
그럼에도 여러 제자들은 성언(聖言)을 돌아보지 않고 각기 종의(宗義)로 삼는 바에 집착하여 서로 비방하고 헐뜯을 것이나 그 허물은 제자들에게 속하는 것이지 어찌 세존께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일체지(一切智)를 비방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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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온갖 업으로서 결정되지 않은 것[不定業]이 존재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에 [일체지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와 같은 업은 실재하기 때문이다.15) 즉 당래 능히 이숙의 부정(不定)을 초래하는 업이 존재한다고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도를 닦아 번뇌[結]를 끊는다’고 함은 쓸데없는 중설(重說)이 되고 말 것이니, 일체의 업은 반드시 그 과보를 획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설한 온갖 이유에서, 혹은 다시 그 밖의 또 다른 이유에 의해 마땅히 일체지(一切智)를 비방해서는 안 된다.
세존께서는 불가사의하고 희유한 공덕과 높고도 광대한 명칭을 성취하셨으니, 이치가 아닌 것으로써 헐뜯고 비방하면 가없는 죄를 얻게 될 것이다. 온갖 유정으로서 지혜 있는 자라면 모두 마땅히 부처님을 믿어야 할 것이니, 일체지를 갖추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공경하고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