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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중변론 상권
1. 변상품(辯相品)
이 논(論)을 지으신
선서(善逝)의 체소생(體所生:子)과
우리들을 가르치신 스승께 머리 조아리면서
부지런히 이 뜻[義]을 밝혀야 하겠다(釋論者의 歸敬頌)
이 가운데서는 맨 처음에 논의 체[論體]를 벌려 세우면서 게송으로 말한다.
다만 모양[相]과 장애[障]와 진실함[眞實]과
모든 다스림을 닦음[修對治]이며
곧 이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修分位]와
과위를 얻음[得果]과 무상승(無上乘)만이다(總序)
≪논≫
이 논(論)은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뜻[七義]만을 설명한다.
첫째는 모양이요,
둘째는 장애요,
셋째는 진실함이요,
넷째는 모든 다스림을 닦음이요,
다섯째는 곧 이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요,
여섯째는 과위를 얻음이요,
일곱째는 무상승이다.
이제 이 안에서는 먼저 그 모양[相]을 설명하면서 게송으로 말한다.
허망한 분별은 있고
이것에 두 가지는 도무지 없으며
이 안에는 ≺공(空)≻이 있을 뿐이요
그것에도 역시 이것만이 있다
≪논≫
‘허망한 분별은 있고’라고 함은, 취할 바[所取: 感覺認識이 되는 것]와 능히 취함[能取: 感覺認識을 하는 것]의 분별함이 있음을 말함이요,
‘이것에 두 가지는 도무지 없으며’라고 함은, 곧 이 허망한 분별에 있어서 영원히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두 가지 성품[二性]이 없음을 말한다.
‘이 안에는 ≺공≻이 있을 뿐이요’라고 함은, 허망한 분별의 안에는 다만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을 떠난 ≺공≻한 성품[空性]만이 있음을 말함이요,
‘그것에도 역시 이것만이 있다고 함은, 곧 그 두 가지가 ≺공≻한 성품 안에서도 역시 이 허망한 분별만이 있음을 말한다.
만약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로 말미암아 자세히 살피어 ≺공≻이 되고, 그 밖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대로 알아서 있는 것이 되는지라, 이와 같이 될 적에는 뒤바뀜이 없어서 ≺공≻의 모양[空相]을 나타내 보일 수 있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공≻이 아니고 ≺공≻ 아님[不空]도 아니라고 말하나니
있음[有]과 없음[無]과 및 있음[有] 때문에
이는 곧 중도(中道)에 꼭 들어맞는다
≪논≫
‘온갖 법[一切法]’이라고 함은, 모든 유위(有爲: 因緣所生의 事物)와 무위([無爲: 因緣所生이 아닌 것)의 법이니, 허망한 분별을 유위라고 하고, 2취(取)의 ≺공≻한 성품을 무위라고 한다.
앞의 이치에 의하기 때문에 이 온갖 법은 ‘≺공≻이 아니고 ≺공≻ 아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공≻한 성품과 허망한 분별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공≻이 아니라고 한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성품[所取能取性]이 없기 때문에 ≺공≻ 아님이 아니라고 한다.
‘있음의 때문[有故]’이라고, 함은 ≺공≻한 성품과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요,
‘없음의 때문[無故]’이라고 함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이 두 가지 성품이 없기 때문이요,
‘및 있음 때문에’라고 함은, 허망한 분별의 가운데에 ≺공≻한 성품이 있기 때문이다.
또 ≺공≻한 성품의 가운데에 허망한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중도도 꼭 들어맞는다’라고 함은, 온갖 법은 한결같이 ≺공≻한 것이 아니고, 또한 한결같이 ≺공≻ 아님도 아니니, 이와 같은 이치야말로 미묘하게 중도에 계합하는 것이다.
또한 『반야경(般若經)』 등의 온갖 법에 ≺공≻한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하는 데에도 들어맞고 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허망한 분별의 있음의 모양과 없음의 모양을 나타냈는데, 이것의 자기만의 모양[自相]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識]이 나서 변하여
뜻[義]ㆍ유정(有情)ㆍ≺나≻[我]와 알음[了]에 비슷하되
이 대경[境]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대경이 없는지라 의식도 없다
≪논≫
‘변하여 뜻[義]에 비슷하다’고 함은, 빛깔[色] 등, 모든 대경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을 말함이다.
‘변하여 유정(有情)에 비슷하다’고 함은, 자기나 다른 이의 몸을 다섯 가지 감관[五根]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을 말함이다.
‘변하여 ≺나≻[我]에 비슷하다’고 함은, 물들은 마나스[末那]가 ≺나≻라고 하는 어리석음 따위와 언제나 서로가 응하기 때문이며,
‘변하여 알음과 비슷하다’고 함은, 그 밖의 6식[識]은 아는 모양이 거칠기 때문이다.
‘이 대경은 실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라고 함은 뜻에 비슷하다 함과 감관[根]에 비슷하다 함과 알음에 비슷하다 함은 참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두가 실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대경이 없는지라 의식도 없다’라고 함은 취할 바 뜻[所取義] 따위의 네 가지 대경이 없기 때문에 능히 취하는 것의 모든 의식[能取諸識]도 역시 실로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허망한 분별의 성품은
이 뜻으로 말미암아 실로 있음[實有]도
전혀 없음[全無]도 아님을 이룩하게 되나니
사라져서 해탈(解脫)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논≫
‘허망한 분별은 이 뜻으로 말미암아 실로 있음도 아님을 이룩하게 된다’고 함은, 나타나는바 그대로 생겨서 참으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혀 없음도 아님’이라고 함은, 그 안에서 적으나마 어지러운 의식[亂識]의 생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이 성품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인정되는가? 이것이 사라져서 해탈하게 된다고 인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면 얽매임과 해탈은 모두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은 곧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을 부정하여 버리는 실수를 이루리라.
이미 허망한 분별의 제만의 모양을 나타냈는지라 여기서는 포섭의 모양[攝相]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다만 이와 같은 허망한 분별만이 있어서 곧 갖춘 세 가지의 제 성품[自性]을 포섭하나니,
게송으로 말한다.
오직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과
원성실성(圓成實性)만은
대경[境]이기 때문이요, 분별(分別)이기 때문이니
두 가지가 ≺공≻하기 때문에 말한다.
≪논≫
허망한 분별의 대경에 의지하기 때문에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하며,
허망한 분별의 성품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타기(依他起)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한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공≻함에 의지하기 때문에 원성실(圓成實)의 제 성품이 있다고 말함이다.
이미 허망한 분별의 포섭의 모양을 나타냈는지라,
곧 허망한 분별에 있어서 모양 없는 방편의 모양[無相方便相]에 드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識]은 얻는 바가 있는 데에 의지하고
대경[境]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며
대경은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고
의식은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긴다
≪논≫
의식만은 얻는 바가 있는 데에 의지하기 때문에 먼저 대경에서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게 된다.
또 대경에서는 얻는 바가 없는 데에 의지하기 때문에 뒤에 의식에 있어서도 얻는 바가 없으면서 생기게 된다.
이런 방편으로 말미암아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모양 없음에 들 수 있다.
또 다음에 게송으로 말한다.
의식의 얻음이 있는 성품[有得性]도
얻는 바가 없음[無所得]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그러므로 두 가지의 얻음이 있음[有得]은
얻음이 없는 성품[無得性]과 평등한 줄 알아라
≪논≫
의식만이 나는 때에 나타나서 갖가지 허망한 경계에 비슷하기 때문에 얻는 바가 있다[有所得]고 한다.
얻는바 대경은 진실한 성품[實性]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진실한 성품도 이룩할 수가 없다.
얻을 수 있는 의식이 얻는 바가 없기 때문에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두 가지 얻는 바가 있는 것은 평등하여서 다 함께 얻는 바가 없는 성품[無所得性]을 이룬다.
허망한 분별의 모양이 없는 방편의 모양에 드는 것을 나타내 마쳤는지라,
이 차별(差別)과 다른 문[異門]과의 모양을 이제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 세계[三界]의 심(心)과 심소(心所)는
이야말로 허망한 분별인 것이니
대경을 아는 것만을 임자 마음이라고 하고
또한 차별하는 것을 딸린 마음이라 한다.
≪논≫
허망한 분별에 대한 차별의 모양[差別相]이라고 함은, 곧 이는 욕심 세계[欲界]와 형상 세계[色界]와 무형세계[無色界]의 모든 심(心)과 심소(心所)이다.
다른 문의 모양[異門相]이라 함은, 대경의 온 모양[總相]을 아는 것만을 임자 마음[心]이라고 하고, 차별도 아는 것을 느낌[受] 따위의 모든 딸린 마음의 법[心所法]이라고 한다.
이제 다음에는 이것이 생기는 모양[生起相]을 말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첫째를 곧 연식(緣識)이라고 하고
둘째를 받는 이[受者]라고 하나니
이 가운데서 능히 수용(受用)하고
분별하여 추리함은 딸린 마음이다.
≪논≫
‘인식’이라고 함은, 장식(藏識:阿賴耶識)이니, 이는 다른 의식을 내는 반연이기 때문이다. 장식을 반연으로 하여 생기는 바 전식(轉識:다른 七識)은 수용하는 임자[主]이기 때문에 ‘받는 이’라고 한다.
이 모든 의식 중에 느낌[受]은 능히 수용하고, 생각[想]은 능히 분별하고, 헤아림[思]과 뜻 지음[作意] 따위의 모든 서로 응함의 행[相應行]은 모든 의식을 추리하나니, 이 세 가지는 임자 마음을 돕기 때문에 딸린 마음이라고 한다.
이제 다음에는 여기에 섞여 더러움의 모양[雜染相]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가려 막음[覆障]과 안립(安立)과
거느려 인도함[將導]과
포섭함[攝]과 원만함[圓滿]이며,
세 가지 분별[三分別]과 받아 씀[受用]과
끌어 일으킴[引起]과 연달아 맴[連縛]이며
앞에 나타남[現前]과 괴로움의 결과[苦果] 때문에
이것만이 세간을 괴롭히나니
셋[三]과 둘[二]과 일곱[七]의 섞여 더러움[雜染]은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서이다
≪논≫
‘가려 막음 때문에’라고 함은, 무명(無明)이 사실대로의 이치[如實理]를 가려서 참된 소견[眞見]을 막음으로 말미암아서요,
‘안립 때문에’라고 함은, 모든 지어감[諸行]이 근본 의식[本識] 가운데에 업의 훈습[業熏習]을 심었기 때문이요,
‘거느려 인도함 때문에’라고 함은, 잡음[取]이 있는 의식[識]이 모든 유정(有情)을 이끌어서 태어나는 처소로 이르기 때문이다.
‘포섭함 때문에’라고 함은, 이름과 물질[名色]이 유정의 제 몸[自體]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원만함 때문에’라고 함은, 여섯 가지 안의 감관[六內處:六處]이 모든 유정들의 몸을 두루 갖추게 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분별 때문에’라고 함은, 닿임[觸]이 감관[根]과 대경[境]과 알음[識]의 세 가지를 분별하여 세 가지 느낌[三受]에 따르기 때문이다.
‘받아 씀 때문에’라고 함은, 느낌의 갈래[受支]가 순탄함[順]과 거스름[違]과 둘이 다 아님[非已:非順非違]의 경계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끌어 일으킴 때문에’라고 함은 욕망[愛]의 힘이 먼저 지은 업에 끌리어 후생 몸[後有]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연달아 맴 때문에’라고 함은, 잡음[取]이 의식으로 하여금 따르는 욕심 따위를 반연하여 연달아 맴의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앞에 나타남 때문에’라고 함은, 존재[有]의 힘이 이미 지은 업으로 하여금 후생 몸의 모든 이숙의 과보[異熟果]를 붙잡아 주어서 앞에 나타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결과 때문에’라고 함은, 태어 남[生]과 늙어 죽음[老死]의 성품에 핍박함이 있고 먼저의 원인을 갚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열두 가지 인연[十二有支]만이 세간을 괴롭혀서 안온하지 않게 한다.
‘셋의 섞여 더러움[三雜染]이라고 함은,
첫째는 번뇌의 섞여 더러움[煩惱雜染]이니, 무명과 욕망[愛]과 잡음[取]을 말함이요,
둘째는 업의 섞여 더러움[業雜染]이니, 지어감[行]과 존재[有]를 말함이요,
셋째는 나기의 섞여 더러움[生雜染]이니, 그 나머지 갈래이다.
‘둘의 섞여 더러움[二雜染]이라고 함은,
첫째는 원인의 섞여 더러움[因雜染]이니, 번뇌와 업을 말함이요,
둘째는 결과의 섞여 더러움[果雜染]이니, 그 나머지 갈래들이다.
‘일곱의 섞여 더러움[七雜染]이라고 함은, 일곱 가지인[七種因]이다.
첫째는 전도인(顚倒因)이니 무명이요,
둘째는 견인인(牽引因)이니 지어감이요,
셋째는 장도인(將導因)이니 의식이요,
넷째는 섭수인(攝受因)이니 이름과 물질ㆍ여섯 가지 감관이요,
다섯째는 수용인(受用因)이니 닿임과 느낌이요,
여섯째는 인기인(引起因)이니 욕망과 잡음과 존재요,
일곱째는 염포인(厭怖因)이니 나기와 늙어 죽음이다.
이 여러 가지 섞여 더러움은 모두가 허망한 분별로 말미암아 생장하게 되지 않음이 없다.
이로부터 그 앞은 통틀어서 허망한 분별에 아홉 가지의 모양[九種相]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는 있음의 모양[有相]이요,
둘째는 없음의 모양[無相]이요,
셋째는 제만의 모양[自相]이요,
넷째는 포섭의 모양[攝相]이요,
다섯째는 모양 없는 방편의 모양에 듦[入無相方便相]이요,
여섯째는 차별의 모양[差別相]이요,
일곱째는 다른 문의 모양[異門相]이요,
여덟째는 생김의 모양[生起相]이며,
아홉째는 섞여 더러움의 모양[雜染相]이다.
이와 같이 이미 허망한 분별을 나타냈는지라,
이제 다음에는 알 바의 ≺공≻한 성품[空性]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모양[諸相] 및 다른 문[異門]과
뜻[義]과 차별(差別)과 성립(成立)은
두 가지가 ≺공≻한 성품인 줄 알지니
간략히 말하면 이것뿐이기 때문이다
≪논≫
그러므로 알라.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하는 것[能取]의 ≺공≻한 성품은 이 모양 따위의 다섯 가지 뿐이기 때문이다.
알 바의 ≺공≻한 성품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가 없고[無二]없음이 있기[有無] 때문이요
있음[有]도 아니고 없음[無]도 아니며
다름[異]도 아니고 또한 동일함[一]도 아니니
이것을 말하여 ≺공≻한 모양이라고 한다
≪논≫
‘두 가지가 없다’고 함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이 없음을 말하며, ‘없음이 있다’고 함은, 두 가지 취함[二取]의 없음이 있음을 말한다.
이 ≺공≻은 성품 없음[無性]이 성품이 된다 함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공≻한 모양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둘의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
무엇을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는가? 둘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이 ≺공≻한 모양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나타낸다.
이 ≺공≻은 저 허망한 분별과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만약 다르다면 법의 성품[法性]은 다른 법으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바른 이치[正理]에 어긋나나니 괴로움[苦] 따위의 성품과 같으며,
만약 동일하다고 하면 깨끗한 지혜[淨智]의 경계도 아니고 공통된 모양[共相]도 아니어야 하므로 이는 곧 ≺공≻과 허망한 분별[忘相]과는 동일하거나 다르다고 하는 모양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알 바 ≺공≻한 성품의 다른 문이란 어떤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공≻의 다른 문을 간략히 말하자면
진여(眞如)와 실제(實際)와
모양 없음[無相]과 뛰어난 이치의 성품[勝義性]과
법계(法界) 따위인 줄 알아야 하리라
≪논≫
간략하게 ≺공≻한 성품을 말하면 이런 다른 문이 있다.
어떻게 이 다른 문의 뜻을 알아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변함이 없음[無變]과 뒤바뀜이 없음[無倒]과
모양의 사라짐[相滅]과
거룩한 지혜의 경계[聖智境]와
모든 거룩한 법의 원인[聖法因]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다른 문의 뜻은 다음과 같으니라.
≪논≫
곧 이 안에서 알 바의 ≺공≻한 성품을 말하자면,
‘변함이 없음’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진여(眞如)로 삼나니, 참다운 성품은 항상 그대로 이어서 바꾸어짐이 없기 때문이며,
‘뒤바뀜이 없음’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실제(實際)로 삼나니, 모든 뒤바뀜의 의지[依]와 반연[緣]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양의 사라짐’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모양 없음[無相]으로 삼나니, 이 안에서는 영원히 온갖 모양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거룩한 지혜의 경계’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뛰어난 이치의 성품[勝義性]으로 삼나니, 이는 가장 뛰어난 지혜로써 행할 바 뜻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법의 원인’이라는 뜻으로 말미암아서 말하되 법계(法界)로 삼나니, 온갖 거룩한 법은 이것을 반연하여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계(界)라고 함은 곧 이는 원인[因]이라는 뜻이니, ≺나≻없음[無我] 따위의 뜻도 이런 이치와 같이 알아야 한다.
어떻게 ≺공≻한 성품의 차별을 알아서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것은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이어서
때 있음[有垢]과 때 없음[無垢]으로 말미암아서이니
마치 물 경계[水界]와 온전한 허공[空]처럼
깨끗하므로 인정하여 깨끗함[淨]이라고 한다
≪논≫
≺공≻한 성품의 차별은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섞여 더러움이요,
둘째는 맑고 깨끗함이다.
이것이 더러움[染]과 깨끗함[淨]을 이룩함은 나누어진 위치[分位]의 구별로 말미암아서이니,
때 있음의 자리[有垢位]를 말하여 섞여 더러움이라고 하고, 때[垢]를 벗어나게 되는 시기를 말하여 맑고 깨끗함이라고 한다.
비록 먼저 섞여 더러웠다가 뒤에 맑고 깨끗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바꿔지고 변하여 무상(無常)한 것으로 되는 허물은 아니다.
물 경계 등이 객진(客塵)을 벗어나는 것처럼 ≺공≻의 깨끗한 것도 그러하나니, 성품이 바꿔지고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공≻의 차별에는 다시 열여섯 가지가 있다.
안의 ≺공≻[內空]이요, 바깥의 ≺공≻[外空]이요, 안팎의 ≺공≻[內外空]이요,
큰 ≺공≻[大空]이요, ≺공≻의 ≺공≻[空空]이요, 뛰어난 이치의 ≺공≻[勝義空]이요,
유위의 ≺공≻[有爲空]이요, 무위의 ≺공≻[無爲空]이요, 마지막의 ≺공≻[畢竟空]이요,
가 없음의 ≺공≻[無際空]이요, 흩어짐이 없음의 ≺공≻[無散空]이요,
본래 성품의 ≺공≻[本性空]이요, 모습의 ≺공≻[相空]이요, 온갖 법의 ≺공≻[一切法空]이요,
성품이 없음의 ≺공≻[無性空]이며, 성품이 없는 제 성품의 ≺공≻[無性自性空]이다.
이들의 간략한 뜻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능히 먹음[能食]과 먹을 바[所食]와
이 의지의 몸[依身]과 머무를 데[所住]와
능히 이것을 봄[能見此]과 그대로의 이치[如理]와
구하는 바 두 가지 깨끗함의 ≺공≻[二淨空]이며
언제나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나고 죽음[生死]을 버리지 않기 위하고
착함[善]의 다함이 없기 위하여
그 때문에 이를 살피어 ≺공≻으로 삼는다
종성(種性)의 맑고 깨끗함을 위하고
모든 좋은 모습[相好]을 얻기 위하고
모든 부처님 법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그 때문에 보살은 ≺공≻임을 살핀다
≪논≫
‘능히 마음의 ≺공≻’이라 함은, 안의 처소[內處]에 의하여 말하는지라, 곧 이것은 안의 ≺공≻이다.
‘먹을 바 ≺공≻’이라 함은, 바깥 처소[外處]에 의하여 말하는지라, 곧 이것은 바깥의 ≺공≻이다.
‘이 의지의 몸’이라고 함은, 능히 먹음과 먹을 바의 의지하는바 몸인지라, 이 몸이 ≺공≻하기 때문에 안팎의 ≺공≻이라고 한다.
모든 기세간(器世間)을 말하여 ‘머무를 데’라고 하며, 이 모양은 넓기 때문에 크다고 하는데, 머무를 데가 ≺공≻하기 때문에 큰 ≺공≻이라고 한다.
‘능히 이것을 봄’이라고 함은, 지혜가 안의 처소 따위의 ≺공≻함을 볼 수 있으며, ≺공≻의 지혜[空智]도 ≺공≻하기 때문에 ≺공≻의 ≺공≻이라고 한다.
‘그대로의 이치’라고 함은, 뛰어난 이치[勝義]를 말하나니, 곧 사실대로의 행[如實行]이며, 살피는 바 진리는 이것이 바로 ≺공≻하기 때문에 뛰어난 이치의 ≺공≻이라고 한다.
보살의 수행은 두 가지 깨끗함을 얻기 위해서이니, 바로 모든 유위위의 착한 법이다.
이 두 가지는 ≺공≻하기 때문에 유위의 ≺공≻이라고 하고 무위의 ≺공≻이라고 한다.
유정들에 대하여 언제나 이로움을 지으려 하면서도 ≺공≻인 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마지막의 ≺공≻이라고 한다. 나고 죽음은 길고도 멀어서 처음과 끝이 없는지라 이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가없음의 ≺공≻이라고 한다.
≺공≻임을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빨리 싫어하며 버리겠지마는 이 나고 죽음을 싫어하며 버리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이 가없는 나고 죽음을 자세히 살피어 ≺공≻으로 삼는다.
닦는바 착함이 남음이 없는 열반[無餘依般涅槃]의 지위에 이르러서도 흩어서 버리려 함이 없으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흩어짐이 없음의 ≺공≻이라고 한다. 모든 성스러운 종성은 제 바탕이 본래 있는 것이요, 익혀서 이루어지는 바가 아님을 말하여 본래 성품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이것을 빨리 맑고 깨끗이 되게 하기 위하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본래 성품의 ≺공≻이라고 한다.
보살은 보살[大士]의 좋은 모습을 얻기 위하면서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모습의 ≺공≻이 된다. 보살은 힘[力:十力]과 두려움 없음[無畏:十無畏] 등의 온갖 부처님 법으로 하여금 모두 깨끗할 수 있게 하기 위하면서 이것이 ≺공≻임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온갖 법의 ≺공≻이라고 한다.
이 열 네 가지 ≺공≻[十四空]은 차별에 따라서 벌려 세운 것이요,
이 중에서 어느 것을 말하여 ≺공≻이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와 법(法)의
실제 성품[實性]은 다 같이 있음[有]이 아니며
이 없는 성품[無性]이 있는 성품[有性]이므로
따로 두 가지 ≺공≻[二空]을 세운다
≪논≫
보특가라와 법과의 실제 성품은 다 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성품이 없음의 ≺공≻이라고 하며, 이 성품이 없음의 ≺공≻은 제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공≻은 성품이 없음을 제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성품이 없는 제 성품의 ≺공≻이라고 한다.
앞에서 말한 능히 먹음의 ≺공≻[能食空] 등에 있어서 그 ≺공≻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하여 따로 두 가지 ≺공≻을 세우나니, 이는 보특가라와 법과의 더욱 늘음의 고집[增益執]과 ≺공≻의 줄어 없어짐의 고집[損減執]을 막아 그치게 하기 위하여 그 차례대로 뒤의 두 가지 ≺공≻을 세웠다.
이와 같이 이미 ≺공≻한 성품[空性]의 차별을 나타내었다.
이것이 성립(成立)하는 뜻은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한다.
이것이 만약 섞여 더러움이 없다면
온갖 것은 저절로 해탈되어야 하고
이것이 만약 맑고 깨끗함이 없다면
공용(功用)은 결과가 없어야 하리
≪논≫
만약 모든 법이 ≺공≻하여 아직 다스림[對治]이 생기지 못하였어도 섞여 더러움을 용납함이 없다면 온갖 유정들은 함에 말미암지 아니하고서 저절로 해탈되어야 한다.
만약 다스림이 이미 생겼어도 역시 맑고 깨끗하지 않다면 해탈하려 하여 부지런히 힘쓴다 하여도 결과는 없어야 한다.
이미 그렇다면 게송으로 말한다.
더러움[染]도 아니고 더럽지 않음[不染]도 아니며
깨끗함[淨]도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不淨]도 아니어서
마음의 성품[心性]은 본래 깨끗하지마는
객진(客塵)으로 말미암아 더럽게 된다
≪논≫
어찌하여 더러움도 아니고 더럽지 않음도 아니냐고 하면, 마음의 성품은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깨끗함도 아니고 깨끗하지 않음도 아니냐고 하면, 객진에 더럽힘을 받게 되기 때문이니, 이것이 ≺공≻의 차별을 성립하는 뜻[成立空差別義]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앞에서 ≺공≻의 뜻은 통틀어 두 가지가 있었으니, 모양[相]과 안립(安立)이다. 모양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나니, 없음[無]과 있음[有]이어서 ≺공≻한 성품의 있음의 모양[有相]은 있는 것도 여의고 없는 것도 여의고, 동일한 것도 여의고 다른 것도 여읜 그것을 그의 모양으로 삼는다. 빌려 세움은 곧 다른 문[異門] 따위인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