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보리심론 제1권
1. 보리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대승의 모든 법의 행을 간략히 모아
최초로 수승한 사업(事業)을 건립하여서
나 지금 보리심을 자세히 주석하노라.
[대비와 보리심]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에 일체지(一切智)를 속히 증득하고자 하는 자라면, 총체적이거나 간략하게 표방한 마음이 세 곳에 머물면서 비심(悲心)을 낳는다.
비심으로부터 대보리심이 발생하는데, 가장 수승한 일체 부처님의 법은 모두 비심을 말미암아서 근본이 되니, 이 비심이 인(因)이 되어 중생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성법집경(聖法集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관자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기를,
‘세존이시여, 모든 보살은 여러 가지 법문을 수학(修學)하지 말고 다만 한 가지 법만을 스스로 부지런히 행해야만 곧 일체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어떠한 것이 한 가지 법입니까?
이른바 대비(大悲)입니다.
모든 보살은 이 대비를 타면 곧 일체 부처님의 법을 손 안에 얻은 듯합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자면 전륜성왕이 윤보의 행처[輪寶行處]에서 곧 일체 힘의 더미[力聚]를 얻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의 행처에서 곧 일체 부처님의 법력의 더미를 능히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또한 사부(士夫)의 명근(命根)이 견고함은 능히 모든 근(根)을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이듯이,
모든 보살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대비가 견고함은 능히 모든 보리의 행법을 능히 굴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또한 사리자여, 마땅히 알아라. 모든 보살의 대비는 다함이 없느니라.
무엇 때문인가?
일체법과 더불어 선도(先導)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여, 비유하자면 사부(士夫)가 지닌 명근이 출입하는 호흡과 더불어 선도가 되는 것과 같으니라.
대승 법문의 광대하고 두루한 모임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보살의 대비가 선도하기 때문이니라.”
『상두경(象頭經)』에서 말하였다.
“이 때 천자(天子)가 묘길상보살에게 물었다.
‘어떻게 해야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킬 수 있고 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묘길상이 말했다.
‘천자여, 대비라야 능히 일체 보살의 수승한 행을 일으키고, 보살이 모든 중생을 반연함이 경계가 되어 머무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일체 중생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자신의 몸을 돌아보고 애석해 하는 바가 없느니라. 순수하게 한결같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기르며, 오랜 세월동안 어렵게 짓고 능히 지어서 모든 행을 발생하느니라.’”
『신력법문경(信力法門經)』에서 말하였다.
“저 모든 보살의 비심(悲心)은 견고해서 일체 중생을 구하여 제도하지만, 그 때도 조금도 고통이라는 생각이 없고, 제도한 후에도 제도하였다는 생각이 없고, 일체의 어려운 행과 고통스러운 행도 버리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하여 오래지 않아 모든 행이 원만해지고 본래 원한 일체지의 증득을 이루어서 일체의 부처님 법을 얻느니라.”
이와 같이 모두가 비심을 말미암음을 근본으로 삼아서 모든 불세존은 일체지를 현증(現證)하고 대비를 두루 거두어서 널리 세간을 위하여 가장 수승한 이익을 짓고 무주(無住)열반에 편안히 머무른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행은 모두가 대비로써 그 인(因)을 삼는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因) 중에 설령 고뇌가 있더라도 이때도 중생의 작의(作意)를 반연하여 더욱 다시 많은 것을 지어서 증장하여 물러서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모든 경전에서 설하셨듯이, 일체 중생은 모든 취(趣)에서 여러 가지 고통을 겪는다. 그 감응하는 바 지극한 고통만큼이나 보살은 항상 중생을 위해 자비와 연민으로 관찰한다.
이른바 지옥취 중에는 여러 가지의 고통이 있는데, 업의 불길이 타올라 오랜 시간 끊이지 앉는 고뇌가 다함없는 것이 마치 세간의 도적을 여러 가지 벌로 다스려 묶고 치고 찌르고 또 쫓아버리고 몸을 잘라 나누어서 모든 고뇌를 받게 하는 것과 같다. 이 고통 또한 그러하다.
아귀취 중에는 여러 가지 극심한 배고픔과 목마름의 고통이 있는데, 몸이 비쩍 말라서 먹을 것을 찾아 구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해친다. 항상 찾아 구하기를 설령 백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끝내 버려진 사소한 것이나 깨끗하지 못한 것 등이라도 얻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아귀는 자신의 힘이 열악하여 다른 수승한 것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비록 의지하기는 하지만 얻는 바가 없다. 설령 얻는 바가 있더라도 강력한 귀신들로 전변해서 기만과 능멸로 협박해 빼앗으며 채찍으로 때려서 벌로 다스린다. 이와 같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러한 고통을 받는 것은 예전에 사람으로 있을 때에 부유함과 즐거움이 자재한 무리들이 악한 일들을 일으키다가 이 아귀취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축생취에서도 무수한 고통을 받는다. 화를 내어 해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 서로 간에 잡아먹고, 혹은 그 코를 꿰뚫고, 혹은 몸이 파열되고, 혹은 때리고 묶는 등 극히 자재하지 못해서 몸 전체가 아픈 것이 참으로 약간이라도 사랑하거나 즐거워할 만한 곳이 없다.
마치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지면 전혀 게으르고 나태할 수 없듯이, 비록 오랜 시간이 흘러도 피로함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축생들은 광야에서 한 순간 방일한다 하더라도 이런저런 분주함으로 잠시도 머물지 않으며 서로 해치고 두려움을 일으킨다. 이 축생취 중에는 또 이러한 고통이 있다.
이와 같이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여러 취들은 여러 가지 번뇌의 악업을 일으키는 것이 인이 되기 때문에 그 각각의 취에서 고뇌를 받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낭떠러지의 험한 곳에 떨어진 것처럼 고뇌 또한 그러하다.
저 인취(人趣)에도 여러 가지 고통이 있는데, 다른 곳에서 설한 것과 같다.
다음은 욕계의 하늘들이다. 욕심의 불길이 타올라 마음이 산란해지자 자신의 마음을 찰나 간에 한 곳으로 고정하여 모으려고 하지만 결국 그럴 수가 없으니, 마땅히 욕망의 쾌락이 무너질 때 즉각 고통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마치 가난의 고통과 같으니 어떤 즐거움이 있겠는가?
이 욕계천에는 항상 떨어져 멸하는 것이라서 두려움과 근심과 파괴 등 역시 그 즐거움이 아니다.
색계천들은 이른바 모든 행이 항상 변천하여 전전하는 것을 말미암으니, 그 하늘의 과보가 다하면 다시 지옥 등의 취에 떨어진다.
“이와 같은 등의 취의 무리들은 번뇌와 업 등에 항상 얽히고 묶여서 자재하지 못하며, 이로 말미암아 온갖 고뇌들을 낳는다. 그러므로 고통의 불길이 치성하여 불타고 있는 세간은 쉼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보살은 이 고통을 보면 즉시 자비심을 일으켜서 일체 중생을 널리 관찰한다.
또한 보살은 모든 중생들이 여러 가지 고통을 받는 것을 볼 때도 원망도 친함도 없이 자비와 연민의 마음을 일으켜 평등하게 관찰해서 제도한다.
또한 일체 중생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윤회하여 유전하는데, 보살은 하나의 중생이라도 친우(親友)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음이 없으니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행에 즉(卽)해서 시방의 일체 중생을 널리 두루 관찰하는데, 만일 하나의 중생이라도 고통 받는 자가 있음을 본다면, 보살은 그를 자식처럼 사랑해서 즉각 그 고통을 대신 받아 중생으로 하여금 고통을 받지 않게 한다. 이러한 자비심이 전전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 중생의 고뇌를 쉬어 멸하게 하며, 더 나아가 대비의 수승한 행을 성취하는 것이다.
『무진의경(無盡意經)』에서 말하였다.
“이 자비관행[悲觀行]은 세존께서 『아비달마경』에서 최초로 설하신 것이다. 일체의 유정들을 구하여 제도하고자 하는 까닭에 비원(悲願) 등의 힘을 일으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만약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는 곧 이 보리심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다.”
『십지경(十地經)』에서 말하였다.
“일체 중생 가운데 구호(救護)를 받지 못하는 자, 귀의하여 나아가지 않는 자, 의지할 곳이 없는 자, 지견(知見)이 없는 자들을 보살이 보면 즉시 자비의 마음을 낳고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다.
만약에 남을 위하여 길을 열어 가르침을 보이지 못한다면, 보살은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보살들이 용감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켰다는 것은 곧 비심이 견고함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