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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장경 상권
1. 제법실상품(諸法實相品)
[무생ㆍ무멸ㆍ무상[상 없음]ㆍ무위를 믿고 깨닫게 하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王舍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큰 비구의 무리와 함께 머무셨는데, 이들은 모두가 지식을 갖춘 이들이었으며, 또 가없는 대보살마하살의 무리는 한량없고 셀 수 없었다.
이 때 사리불이 삼매로부터 깨어나 부처님 계신 곳으로 찾아와서 오른쪽 어깨를 한쪽으로 드러내고 머리를 숙여 예의를 갖춰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希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無生], 멸이 없고[無滅], 상이 없고[無相], 함이 없는 것[無爲]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가 어떠한 이익을 보았기에 찬탄하여
‘희유합니다. 여래가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滅)이 없고 상이 없으며 함이 없는 것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한다’고 하는가?”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선정(禪定)에 있으면서 항상 이러한 생각을 하였습니다.
‘세존께서는 명상(名相)이 없는 법에 있어 곧잘 명상으로써 설하며 언어가 없는 법을 언어로써 설하신다.’
이 일을 사유하여 희유하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렇다. 이 일은 가장 희유하다. 이것을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말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훌륭한 화공(畵工)이 허공에 여러 가지 색상(色相)을 그려서 나타내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화공을 희유하다고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가 얻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라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함이 배(倍)나 희유하다.
무슨 까닭인가?
명상(名相)이 없는 법은 생각이 없고 얻음이 없는 것으로서 역시 닦을 것도 없다.
불가사의하여 마음의 의지하는 바가 아니며 희론(戱論)함도 없다.
이는 희론이 의지할 곳이 아니고,
깨달을 것도 관(觀)할 것도 없고 거두는 바도 없다.
마음에 있지 않고, 얻고 얻는 것이 아니며,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 분별함이 없다.
움직임도 없고 성품[性]도 없어 본래가 스스로 공(空)한 것이다.
생각할 수가 없고 나갈[出] 수가 없는 것으로서 일체의 세간이 믿을 수 없는 곳이다.
이와 같이 명상이 없는 법을 명상으로서 설하는 것이 그와 같다.
사리불아,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 수미산(須彌山)을 씹어 삼켜서 능히 없애고 허공을 날아도 병이 되지 않음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냐, 하지 않으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모든 부처가 설하는 바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화성(火城)의 높이와 너비와 깊이가 각각 1유순(由旬)으로 네 개의 문으로부터 불꽃을 뿜어낸다.
사람이 마른 풀을 지고 그 속을 지나가니 사나운 바람에 불길이 불어 그 몸을 태우려 하지만, 이 사람은 풀을 태우지 않고 몸도 태우지 않고서 안에서 나올 수가 있어 본래와 같아 다름이 없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돌을 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바다의 이쪽 기슭에서 저쪽 기슭에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사람이 있어서 4천하(天下)와 그리고 모든 수미산의 강과 풀과 나무를 지고서 모기[蚊]의 다리로 사다리를 삼아 올라가 범천(梵天)에 이르고자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연(蓮) 줄기의 실을 수미산에 걸어 허공에 있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신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깨닫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하면 겁(劫)이 다하도록 큰불이 타오를 때, 사람이 침을 한 번 뱉어서 능히 이 불을 끄고, 또 한 번 불어서 세계와 모든 천궁(天宮)을 다시 이루는 것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항하(恒河)의 광대(廣大)함을 무량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무량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4천하(天下) 가운데 널리 큰비를 내려 항하에 넘치도록 함과 같은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비를 받아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수미산을 넓고 크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높고 큽니다. 4천하 가운데 큰돌을 남김 없이 비오듯 뿌려 모두가 수미산과 같이 하는데, 사람이 있어 손으로 이 돌을 받아 개자(芥子)와 같이 버릴 곳이 없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의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무생(無生)ㆍ무멸(無滅)ㆍ무상(無相)ㆍ무위(無爲)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사리불아, 비유컨대 사람이 있어 일체 중생을 왼손에 놓고 오른손에 삼천대천세계의 산과 갖가지 풀과 나무를 들어 올려 능히 일체 중생 모두로 하여금 한가지로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하고 그 뜻이 다르지 않게 함과 같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희유하다 하겠느냐, 아니하겠느냐?”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일체의 모든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어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기란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
[모든 법이 성품이 없고 공힘을 믿고 알기에 어려운 것이다]
사리불아, 여래께서 설하시는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어 일체의 세간(世間)이 믿고 알기에 어려운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이 법은 생각[想]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想]을 떠났으며,
취(取)도 없고 버리는 것[捨]도 없고,
희론(戱論)함도 없고 뜨거운 고뇌도 없다.
차안(此岸)도 아니며 저 피안(彼岸)도 아니며 육지도 아니다.
어리석음이 아니며 현명함도 아니며,
무량한 지혜로써 알 수가 있게 되는 것이지, 사량(思量)으로써 능히 알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행(行)도 없고 상(相)도 없으며 뜨거운 고뇌도 없다.
생각[念]이 없고 모든 생각을 지난 것이다.
마음도 없고 모든 마음을 지난 것이다.
앞[向]도 없고 뒤[背]도 없으며,
묶임도 없고 풀리는 일도 없다.
망령됨도 없고 망령된 법도 없다.
어리석음도 없고 어리석은 법도 없다.
어리석음의 그물이 없으며,
이름도 없고 말도 없다.
설함이 없고 설하지 않음도 없고,
다함이 없고 다하지 않음도 없다.
행(行)이 없고 행의 상(相)도 없으며,
길이 없고 길의 결과[道果:보리와 열반]도 없다.
떠남도 없고 떠나는 모든 것도 지났다.
사유(思惟)함도 없고 뒤범벅이 된 것도 없다.
취(取)하지 않고 버리지 않으며, 얻음도 얻을 수 없는 것도 없다.
모든 집착을 없애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앤다.
진실이 아니고 허망함도 아니다.
항상함이 아니고 무상(無常)한 것도 아니다.
밝음이 아니고 밝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둠이 아니고 비춤[照]도 아니다.
마음에 있지 않고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성품은 본래가 공(空)이다.
능히 악마를 항복하고 번뇌를 항복하고,
5음(陰)을 항복하고 12입(入)을 항복하고,
18계(界)를 항복하고 5음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2입이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고 18계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중생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사람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목숨[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명(命)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유(有)가 있다고 설하는 자와, 무(無)가 있다고 설하는 자를 항복하며, 일체의 모든 삿된 행이 있는 자를 항복한다.
[부처와 다투는 자을 항복시킨다]
사리불아, 나의 이 거룩한 법은 능히 일체의 탐착하고 내지 법이 있다고 설하는 자와, 모든 법의 여실(如實)한 상을 바라지 않는 자와, 불법(佛法)을 거스르는 자, 모두를 항복한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만약 중생의 아(我)를 설하는 자와, 인(人)을 설하는 자와,
끊어짐과 멸함을 설하는 자, 상(常)을 설하는 자와,
유(有)를 설하는 자와, 무(無)를 설하는 자,
여러 법을 설하는 자와, 거짓 이름을 설하는 자와, 가[邊]를 설하는 자가 있으면,
그 모두는 부처에게 어기고 배반하며 부처와 함께 다투는 자이다.
사리불아, 내지 법에 있어서 조금의 기약이라도 얻는 자는 모두가 부처와 함께 다툰다.
부처와 다투는 자는 모두가 삿된 길에 들며 나의 제자가 아니다.
만약 나의 제자가 아니면 곧 열반과 함께 다투며 부처와 함께 다투고 법과 함께 다투고 승(僧)과 함께 다툰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소견을 가진 사람이 출가하여 계를 받은 것을 나는 허가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는 내가 한 번 마시는 물을 받아도, 스스로 공양(供養)하는 것이라고 허락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제자, 유순한 법인을 이룬다]
사리불아, 만약 사람이 이와 같은 선하지 못한 탐착한 일을 없애고 나의 법 가운데서 출가하여 도(道)를 구하면 열반을 염하고 열반으로써 염(念)을 삼고 열반을 탐하지 않는다.
필경공(畢竟空)의 법에 있어서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이 사람은 더욱 모든 법을 끊기 위한 까닭에 부지런히 정진을 행한다. 하물며 이와 같이 선하지 못한 탐착(貪着)이겠느냐?
말하자면 나에게 집착하고 중생에게 집착하고 사람에게 집착하고 법에 집착함이겠느냐?
이 사람은 모든 탐착을 끊기 위한 까닭에 오직 부지런히 힘써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닦아 무상삼매에 있어서도 역시 상(相)을 취하지 않는다.
이 사람이 일체의 모든 법의 상에 통달하면 이 모두는 하나의 상으로서 이른 바 무상(無相)인 것이다.
사리불아, 이는 곧 거룩한 법 가운데서 유순한 법인(法忍)을 이룬다고 이름한다.
이 유순한 법인을 얻으면 이는 곧 나의 제자라고 이름한다.
능히 공양을 없애어 몸을 받음에 헛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나의 이 진실한 상의 법은 들어갈 수 없고 취할 수 없고 버릴 수 없고 탐착할 수 없으며 설할 수 없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것이다.
기쁨이 없고 기쁨을 탐하는 마음까지도 끊어진 것이다.
뭇 인연과 뭇 인연의 합하고 떠남이 아니다. 길이 없고 길을 끊어 길 없음에 이른다. 모든 언어와 논의(論議)와 음성을 끊는다.
모양도 없고 빛깔도 없고 취함도 없고
착함[着]도 없고 쓰임[用]도 없다.
진실함도 없고 거짓됨도 없고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다.
무너짐도 없고 다툼도 없고
합함도 없고 흩어짐도 없다.
움직임도 없고 생각함도 없고
분별함도 없으며 얻을 수도 없다.
때[垢]가 아니고 깨끗함이 아니며,
이름이 아니며 상이 아니며,
심수(心數: 心所. 마음의 작용)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나의 이 법 가운데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으며,
하늘도 없고 용(龍)도 없으며,
야차도 없고 건달바도 없다.
구반다(鳩槃茶)도 없고 비사사(毘舍闍)도 없다.
단견(斷見)도 없고 상견(常見)도 없고,
아(我)도 없고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다.
오고 감이 없고 들고남도 없다.
계율도 없고 계율을 범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없고 더러움도 없으며,
삼매도 없고 선정도 없고 선정(禪定)의 뿌리도 없다.
선(禪)도 없고 선의 뿌리도 없다.
앎[知]이 없고 견해도 없으며, 탐욕도 없고 다툼도 없다.
도(道)도 없고 도의 열매도 없다.
지혜도 없고 지혜의 뿌리도 없다.
밝음[明]도 없고 밝지 않음도 없다.
해탈도 없고 해탈 아님도 없다.
과보도 없고 과보의 얻음도 없다.
힘도 없고 힘 아님도 없다.
두려운 것도 없고 두려움이 없음도 없다.
생각도 없고 생각의 뿌리도 없다.
앉는 것[坐禪]도 없고 행(行:수행)함도 없으며 위의(威儀)도 없다.
이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저것이라고 하는 주장도 없고,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함도 없다.
보리(菩提)도 없고 보리의 분(菩提分)도 없고,
지혜도 없고 지혜 아님도 없다.
땅[地]이 없고 물이 없고 불도 없고 바람도 없다.
죄도 없고 복도 없으며,
법(法)도 업고 법 아닌 것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일체의 모든 희론의 뿌리를 뽑아 버린다.
보든 것은 영원히 떠나고 차가워 불타지 않는다.
[모든 생각ㆍ견해ㆍ번뇌ㆍ증상만을 깨트린다
사리불아, 긴요한 것만을 들어서 이를 말하면,
나의 변은 일체의 모든 생각[念]과, 일체의 모든 견해와, 일체의 모든 번뇌와, 모든 증상만(增上慢)을 남김없이 깨트린다.
일체의 잊지 않는 모든 것을 염[念]하지 않고 일체의 여러 가지 언어를 끊는다.
나의 이 법 가운데에는 항상 함도 없고 무상함도 없다.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며,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단견(斷見)도 없고 상견(常見)도 없으며,
아상(我相)도 없고 중생상(衆生相)도 없다.
인상(人相)도 없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으며,
명상(命相)도 없고 생도 없고 멸(滅)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사리불아, 여래는 법에 있어서 모든 소득이 없으며 멸하는 바는 있다.
까닭에 이름하여 열반이라 이름한다.
또 열반을 얻는다고 보지 않는다.
[부처도 또한 열반을 염(念)하지 않는다]
사리불아, 부처도 또한 열반을 염(念)하지 않는다.
열반으로서 소원을 삼지 않고 또 열반에 탐착하지 않는다.
이 까닭에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를 제일로 기특하고 희유하다 한다.
이른바 여래의 일체의 법은 생이 없고 멸이 없고, 상이 없고 함이 없다고 설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믿고 알게 하는 것이 배나 희유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