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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문수사리현보장경 상권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城]의 기수급고독정사(祇樹給孤獨精舍)에서 유행하실 때 큰 비구 대중과 함께 계셨는데, 비구가 1,250인이었고, 보살이 1만 인이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가리라(迦利羅) 강당에 앉아 무앙수(無央數) 백천 무리들에게 두루 둘러싸여 경을 설하셨는데, 이에 문수사리(文殊師利)가 5백 보살과 천제석[天釋]ㆍ범천[梵]ㆍ사천왕(四天王) 등 여러 권속들과 함께 부처님 처소에 와서 머리를 숙여 부처님 발에 예배한 다음 부처님을 세 번 돌고서 한쪽에 물러나 앉았다.
그러고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까 세존께서 무슨 법을 설하셨습니까?
원컨대 천중천(天中天)이시여, 그 강설하신 바를 존중하고 받들겠습니다.”
[불법의 그릇]
현자 수보리(須菩提)가 부처님의 위신(威神)을 이어받아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아까 세존께서 제자의 일을 말씀하셨으니,
원컨대 이제 상인(上人)께선 보살의 행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문수사리는 수보리에게 대답하였다.
“일체 제자들은 연각(緣覺)의 소행이고 보살의 그릇이 아닌데 무엇 때문에 묻습니까?”
“원컨대 그릇이 무엇인가를 해설해 주십시오. 듣고서 간직하겠습니다.”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존자 수보리께선 어떤 것이 그릇이고 어떤 것이 그릇이 아님을 알려고 합니까?”
수보리는 말하였다.
“그 여러 제자들은 매번 음성으로써 해탈하게 되니, 우리들이 어찌 그릇인지 그릇이 아닌지를 알 수 있겠습니까?
이제 청해 묻노니 즐거이 듣고자 합니다.”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그 어두움에서 나오는 것은 다 불법(佛法)의 그릇이 아닙니다.
가령 어두운 곳에 광명을 나타내 비춘다면 또한 어두움에 떨어지지 않고 중생을 구호하여 어두움과 합하지 않으니, 일체의 하는 일이 다 불법의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또 수보리여, 한계를 얻어 배워서 배우는 법을 이미 성취하면 일체 사람들이 주지 않는 것을 보는 것 보기를 그 뜻에 두려움을 느끼고 마음에 싫증을 내어 더럽게 여기고, 삼계(三界)를 두려워하여 즐겁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이는 불법의 그릇이 아닙니다.
설령 미래라 해도 수천 겁(劫)을 가지 않고 삼계에 돌아다니되 두려움이 없고 3구(垢)에 욕심이 없어서 생사를 즐거워하기를 마치 누각ㆍ동산ㆍ강당에 있는 것처럼 일체를 즐겁게 여겨 오고 가매 여섯 가지 일이 없으니,
이것을 불법의 그릇이라 합니다.
또 수보리여, 보살은 현재 애욕 속에 있기는 하되 욕락(欲樂)이 없고,
성냄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되 성냄과 해침이 없고,
어리석음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되 어두움이 없고,
사나움과 굳세고 강함과 괴수의 모습을 나타내 보이기는 하되 번뇌가 없으며,
현재 삼계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에겐 그를 위해 바로 이끌어 주고,
어지러운 속에선 순리대로 하여 거칠지 않게 하고,
훌륭한 체하는 자에겐 겸손하여 예의를 다하게 하고,
여러 중생들을 위해선 그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며,
일체를 가르쳐 삼보를 끊어지지 않게 하고,
세 가지 통달한 지혜[三達知]를 얻어 널리 나타내 보이니,
이것이 이른바 모든 불법의 그릇입니다.”
이에 수보리는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모든 법은 평등할 뿐이라 다 같이 진리[本際]는 하나인데,
어느 것이 그릇인지 그릇이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마치 오지그릇을 만드는 사람이 똑같은 진흙으로 갖가지 그릇을 만들어 모두 한 군데 모아 불에 구워내어서 혹은 제호(醍醐)를 담기도 하고, 혹은 마유(麻油)를 담기도 하고, 혹은 감로(甘露)와 꿀[蜜]을 담기도 하고, 혹은 부정한 것을 담기도 하되, 그 본래의 진흙만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는 것처럼,
수보리여, 모든 법도 그와 같이 평등하여 그 진리는 다 같이 하나이지만, 인연을 따라 지어감은 차별이 있으니,
비유컨대 제호나 기름을 담는 그릇은 비유하면 제자와 연각이고,
감로와 꿀을 담는 그릇은 보살들이고,
부정한 것을 담는 그릇은 하천한 범부의 무리들과 같은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그렇다면 제유(諸有:衆生의 뜻)의 그릇을 그릇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그릇이 아니게끔 했을 뿐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무슨 까닭입니까?”
대답하였다.
“수보리여, 그 일체 번뇌를 담는 그릇이 중생들 가운데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모든 번뇌를 끊는다 하더라도 다 불법의 그릇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그릇이란 어떤 높고 낮음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수보리여, 그릇이란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그릇으로서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대답하였다.
“사실 높음도 없고 낮음도 없음이니, 법의 머무는 그 자체가 높음도 낮음도 없기 때문에 견고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가령 높거나 낮은 행이 있다면 이는 파괴되는 그릇인 줄을 아십시오.
수보리여, 마치 허공이 약초나 수목 등 만물의 그릇이 아닌 것처럼,
수보리여, 보살이 일체 불법의 그릇이 되나 또 다른 그릇이 없습니다.
마치 땅 위에 생겨난 나무를 허공이 받아서 큰 그릇으로 길러내는 것처럼,
수보리여, 보살이 청정하고 평등한 뜻을 내어 지혜바라밀을 이어받아서 길러내는 것도 그러합니다.”
[보살의 법]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떻게 보살이 길러낼 수 있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마치 허공이 길러내는 것처럼 보살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허공과 보살은 마침내 늘어나는 것도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이 말씀은 무엇을 이르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번뇌가 늘어나지 않고 불법(佛法)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번뇌와 불법이 어떤 다른 것이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마치 수미산에 가까이하는 자는 광명이 같이 비추어 한 가지 모양을 나타내게 함으로써 모두 금빛이 되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번뇌를 소멸시켜 그 모양을 같게 하여 불법의 빛이 되게 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이 때문에 모든 번뇌가 다 불법이나, 지혜가 밝은 이는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고 관찰하니,
일체 법이 바로 불법인 것입니다.”
또 물었다.
“어째서 일체 법을 다 불법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하는 일이 모든 부처님께서 하시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이 부처님께서 하시는 일과 같다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밑과 끝[本末]이 또한 그러한 것처럼,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그것이 바로 같다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을 밑이라 하고, 무엇을 끝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밑이란 공(空)한 것이고, 끝이란 고요한[寂]한 것이니,
이것을 일러 밑과 끝이라고 합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공한 것과 고요한 것에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마치 금(金)이나 보배가 다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그 물체는 동등하지만 이름이 다를 뿐입니다.”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공한 것과 고요한 것도 그 이름이 다를 뿐이니,
지혜 있는 이는 그 자수(字數)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을 어리석은 상(相)이라 하고, 어떤 것을 영리한 상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부처님께서 가르쳐 주신 바 그대로 인연을 어리석은 상이라 하고, 법의 이치를 영리한 상이라 합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을 인연의 상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열두 가지 인연의 상이니, 수보리여, 이것을 인연의 상이라 합니다.
저것에 만약 생각의 조작이 있으면 곧 생각해 아는 것이 있고,
만약 생각의 조작도 없고 생각하는 것도 없으면 아는 것이 나타나지 않으니,
저 어리석은 자는 생각의 일으킴이 있기 때문에 이들은 곧 말이 있어야 알지만,
영리한 자는 생각의 조작이 없기 때문에 말이 없어도 알게 됩니다.
그가 머무는 데가 없으면 곧 두루 이르는 것이라.
이것이 이른바 현성(賢聖)의 행이니, 그 행에 행함이 있거니와
만약 행이 없다면 이는 현성의 행이 아닌 것입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떤 것을 현성이라 합니까?”
대답하였다.
“현성이란 이른바 공을 다루되 자취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을 어찌 더러움 없는 공 등으로 다루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또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그러합니까?”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마치 뭇 물이 큰 바다에 들어가서는 합해져서 한 가지 맛이 되는 것처럼,
수보리여, 더러움 없는 공 같은 것으로써 일체 법을 다루어 한 가지 맛을 만들어서 중생을 해탈시킴도 그러합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어째서 해탈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대답하였다.
“수보리여, 어떤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지혜가 없기 때문에 거리낌이 있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러합니다, 수보리여. 지혜 없는 이를 제도하기 때문에 해탈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일체 법이 다름이 없는데 어디로부터 지혜가 있다거나 지혜가 없다는 말이 있을 수 있습니까?”
대답하였다.
“마치 여름철 더울 때에도 물을 말하고 겨울철 추울 때에도 물을 말하지만 그 물은 다름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수보리여, 생각이 청백하지 않으므로 번뇌가 있고, 번뇌가 있으므로 곧 지혜가 없다는 말이 있으며,
청정한 생각을 일으키는 자는 곧 집착이 없기 때문에 지혜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다.
저 모든 정사(正士)는 중간에 지혜가 있다거나 지혜가 없다는 말이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그 이치가 행을 멀리한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두 가지 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문수사리여, 이치란 보기 어려운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지혜의 눈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받아 간직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그 이치란 알기 어려운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요달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미 모든 깨닫는 뜻을 여의었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해설하기 어려운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공과 같은 종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생각이 없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생각하는 행이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염(念)이 없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말이 없습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이치란 현성(賢聖)도 없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생각하거나 원함을 여의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영리한 자는 지혜로써 이치를 나타내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이 때문에 스스로가 볼 수 없습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문수사리여,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로운 이치를 구해서는 이치를 얻을 수 없고,
이로운 이치를 구하지 않음으로써 이치를 얻을 수 있다’ 하셨으니,
무엇 때문에 이러한 구절을 말씀하셨습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그 이로운 이치란 얻을 수 없습니다.
저 아무리 이치를 구해 얻으려고 하여도 이치에 이로운 이치가 없으니, 그 이치란 고요한 이치이기 때문에 아무리 몸과 뜻으로 이로운 이치를 구해 얻으려고 하여도 이는 이치에서 이로운 이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치를 구해서 이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이치를 구하는 자는 도리어 이치를 얻지 못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수보리는 다시 물었다.
“문수사리여, 무엇 때문에 부처님께서 ‘일체 법이 다 법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세존께서 『비유경(譬喩經)』에 말씀하시기를,
‘하고자 하는 법도 끊어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겠느냐?’라고 하셨으니,
만약 끊기만 한다면 그 법은 곧 법 아닌 것이 아님을 이르는 것입니다.”
수보리는 또 물었다.
“그렇다면 문수사리여, 불법도 역시 법이 아닌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불법은 흥성(興盛)함이 없는지라, 흥성하지 않는 이것을 법이라 하니,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일체 법은 다 법이 아닌 것입니다.”
[법에 대한 두려움 없음]
수보리는 말하였다.
“전에 없었던 일이라, 매우 따르기 어렵습니다.
문수사리여, 신학(新學) 보살로서도 이 말씀을 듣고는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사자의 새끼가 사자의 부르짖음을 듣고서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기에 옷과 털이 곤두서지 않기 마련입니다.
네 가지 일이 무엇인가?
첫째는 그 종성(種姓)이 진짜이고,
둘째는 사자의 소생이고,
셋째는 높은 이의 양육을 받음이고,
넷째는 모든 존재[有]에 집착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네 가지입니다.
이같이 행하는 자라야 여래 종족의 성실한 보살이 되는지라,
여래의 소생으로서 법을 위해 나아감이 제자와 연각들보다 뛰어나 그 유(類)가 아니므로, 그는 일체 법을 듣고서 마침내 겁내지 않으며,
강설(講說)하는 일체 언어에 있어서도 두려움이 없어 옷과 털이 곤두서지 않고 마음이 게으르지 않은 동시에 의심하거나 겁내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또 수보리여, 새 새끼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해서 어떤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두려움이 없겠습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이와 같이 수보리여, 보살이 공의 경계에 머물기 때문에 모든 법을 듣되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체 법에도 두려움이 없고 의심이 없는가 하면
그 모든 법을 요달하기 때문에 어떤 말을 들어도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겁내는 일이 없습니다.”
문수사리는 수보리에게 반문하였다.
“어디로부터 두려움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습니까?”
대답하였다.
“몸을 탐하는 소견(所見) 때문에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문수사리는 말하였다.
“보살이 몸을 탐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일체 법을 설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 겁내거나 당황함이 없습니다.”
수보리는 문수사리에게 물었다.
“가령 보살이 적멸[寂]을 요달함에 있어서 몸을 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얻을 수 있습니까?”
문수사리는 대답하였다.
“그렇습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도를 얻기 위해 몸을 탐할 것이라고 보지 않으니,
만약 보살로 하여금 도를 얻기 위해 몸을 탐할 것이라고 보는 자라면, 그는 이 때문에 도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수보리는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문수사리보살이여, 크고 훌륭한 방편을 행하는 보살은 몸을 탐하면 도를 얻지 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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